“팀장님은 모르시겠지만 저 연애 한 번도 못 해봤어요. 저는 팀장님처럼 경험이 많지도 못해요. 파혼한 약혼남에, 친한 오빠에, 그냥 아는 남자에... 팀장님처럼 알고 지내는 이성도 별로 없어요.”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먼저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저예요. 어젯밤 저희가 같은 방에 있었던 게 소문이라도 난다면,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제가 진 기사님의 명성에 먹칠했다는 거예요?”나는 약간 화가 난 말투로 물었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팀장님 어젯밤은 그냥 잠만 잤잖아요.”진정우의 말을 듣고 있자면 내가 변태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고단수였다.나는 속으로만 씩씩댈 뿐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손에 들린 빵만 애꿎은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명성을 지키려면 저한테서 멀어져야겠네요.”빵을 다 먹고 난 나는 소심하게 반격했다.“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저희같이 일하고 있잖아요.”진정우는 티슈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내가 아침 식사를 끝냈을 때 이소희도 끝냈다. 그녀는 동창들과 인사했다. 다음에는 꼭 오기 전에 연락하겠다면서 말이다.동창들이 차에 탄 다음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언니, 진 기사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둘이 한참 얘기하던데?”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동창들과 밥 먹을 때에도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별 얘기 안 했어요.”나는 짧은 말로 둘러댔다. 이소희는 당연히 믿지 않고 계속 말하라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그냥 일 얘기예요. 저희 앞으로 야근이 더 잦아질 것 같다고요.”“네?”이소희는 급 울상이 되었다.“기사님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못됐어요, 정말!”나는 말없이 그녀와 함께 놀이동산에 갔다. 진정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가 차에서 내릴 때야 그는 따릉이를 타고 왔다.“언니,
“이게 무슨 말이에요? 쉰다니요?”나는 황급히 진정우에게 가서 물었다.“일주일에 두 번은 쉬도록 국가적으로 규정되어 있어요. 요즘은 일이 바쁘니 하루 정도 쉬는 건 문제 없죠?”진정우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대답했다.“맞아요. 근데 저희 시간이 별로 없어요. 진 기사님도 알잖아요. 휴식은 후에 하면 안 될까요? 추가 수당도 줄게요.”진정우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휴식이 필요해요. 쉬어야 일도 더 잘하죠.”전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쉴 수 있을 때가 아니다.나는 숨을 고르고 나서 다시 말했다.“그래서 오늘 꼭 쉬어야겠다고요?”“네.”말을 마친 진정우는 몸을 돌려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또 한 마디 덧붙였다.“다른 분들도 쉬게 해줘요.”나는 화가 치밀어서 그를 보며 외쳤다.“진 기사님은 푹 쉬세요! 저희가 일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요!”한쪽에서 이소희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진정우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다가 팀장님도 일 못해요. 어젯밤...”“진정우 씨!”나는 소리 내어 그의 말을 끊었다. 손바닥에는 땀이 한층 배었다.어젯밤 일을 비밀로 하자고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언급될 뻔했다. 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결국 기세에 밀려나서 타협했다.“알았어요. 저희도 쉬면 되잖아요. 소희 씨, 이만 돌아가요.”나는 이소희를 불러서 가려고 했다.“팀장님.”이때 진정우가 다시 나를 불러세웠다.“저 부탁할 일이 있어요.”가슴에서는 또다시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화를 가까스로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왜요, 쉬는 시간에 마사지라도 해줄까요?”“그건 됐고, 사야 할 물건이 있어요. 팀장님이 안내해 줬으면 하는데.”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소희 씨랑 같이 가요.”“저는 팀장님이랑 가고 싶은데요.”“풉!”이소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실
“진 기사님, 이게 무슨 뜻이에요? 어제 일로 저를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아뇨.”진정우는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를 패버리고 싶다는 충동까지 생기고 있었다.“저 진짜 이 동네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요. 조금 도와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저도 팀장님 도와준 적 있고...”진정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마치 내가 안 도와주면 나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역시 진 빚은 갚아야 한다. 그게 돈 빚이든, 인정 빚이든 말이다.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좋아요, 오늘 어디 가고 싶어요? 뭘 사야 하는지 알려주면 안내해 줄게요.”“집 보고 싶어요.”그의 대답에 나는 또 말문이 막혔다.“집이요? 이쪽 일 끝나고 나면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요?”“안 돌아갈 것 같아요. 그래서 미리 봐두려고요.”진정우의 말에 나는 목구멍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몰랐다. 아무튼 이상했다.“기사님 회사 다른 곳에 있잖아요.”“사직하면 돼요.”“...”“참, 저 월세로 알아보고 싶어요. 아직 집 살 능력은 없어서요.”진정우는 지나치게 태연하게 지갑 상황까지 밝혀버렸다.이 점은 약간 놀라웠다. 요즘은 돈이 없어도 있는 척, 할부로 명품을 사며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진정우는 솔직한 편이었다.“그런데 왜 사직해요?”진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것 같았다.그가 한 말 때문인지 나는 약간의 동정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를 차에 태우고 시내로 향했다.“시내는 집값이 비싸지 않을까요?”“교외보다는 비싸겠지만 출퇴근이 어려워요. 교통비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여기 사는 게 나아요. 기사님 같은 분이라면 적어도 CBD 쪽 회사에 다닐 거잖아요.”나의 제안에도 진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정이 많이 어려운가 싶어서 나는 말을 보탰다.“돈이 모자라면 제가 빌려줄게요. 돈이 생긴 다음 천천히 갚아요.”“어쩐지 몸으로 갚으라는 말로
“안 될 거예요.”“그거 녹 쓴지 한참 됐어, 총각.”“밸브가 또 얼마나 아래에 있는지 우린 건드리지도 못했어요.”...주민들이 수군댔다.나의 시선은 오직 진정우에게 고정되었다. 밸브를 잡기 위해 그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힘을 주느라 팔뚝에 힘줄이 튀어 올랐다.그런 데도 밸브는 움직이지 않았다. 진정우는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힘을 줬다.“안 될 거야, 총각. 힘 낭비하지 마. 여기 있는 남자들 이미 다 해 봤어.”할머니 한 분이 보다 못해 말했다. 나도 나서서 말리기 시작했다.“됐어요. 제가 수리 기사님을 부를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진정우가 갑자기 힘을 풀며 말했다.“됐어요.”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이제 올라가서 확인해요.”나는 계단을 타로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봤다. 지금 올라갔다가는 쫄딱 젖을 것 같았다.“이따가 올라가요. 물이 다 빠진 다음에요.”진정우는 내 신발을 힐끗 보고 나서 말했다.“제가 업어줄게요.”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아니에요.”이 말을 들은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구경꾼들은 우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보아낸 진정우가 다시 말했다.“그럼 제가 먼저 올라갈게요. 열쇠 줘요.”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벌써 손을 뻗어 내가 들고 있던 열쇠를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이 피부에 닿은 순간 나는 흠칫 떨었다. 전기라도 닿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강유형과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 아마 너무 익숙해져서 그럴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있었으니, 손잡는 것도 포옹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연애하는 긴장감은 당연히 없었다.이 순간 나는 어쩐지 강유형이 신지태에게 했던 말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진정우는 성큼성큼 위층으로 올라갔다. 물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퍽 드라마틱해 보였다.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다.“아가씨 남자친구죠? 든든하니 일 잘하게 생겼어요. 아주 잘 골랐어
왠지는 모르겠지만, 놀이동산 일에도 아프지 않던 머리가 이제 와서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저를 못 믿어요?”“아뇨, 그건 아니고...”나는 진정우를 바라봤다. 상의도 바지도 더러워져 있었다. 귀찮으니 수리 기사를 부르겠다는 말은 아무래도 나오지 않았다.“저 이거 할 수 있어요. 빨리 다녀와요.”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얼른요.”나는 머리가 핑 어지러웠다. 얼마 전 강진혁도 쓰다듬은 적 있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말로 이루 형용하지 못할 따듯하고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시큼한 것이 갈망하게 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진정우의 눈빛을 더는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도망갔다. 그가 요구한 물건을 사서 돌아왔을 때, 그는 걸레로 복도에 고인 물을 청소하고 있었다.집 안에 들어갔을 때는 물기 하나 없이 청소된 바닥이 보였다. 배수구가 고장 나기 전보다도 깨끗했다. 내가 물건을 구하는 동안에도 그는 쉬지 않았던 것이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집을 바라보며, 나는 코끝이 시큰거렸다.“아래층에 가서 확인해 보니까 누수는 없어요. 배상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진정우가 말했다.그는 유능할 뿐만 아니라 세심하기까지 했다. 나는 목이 탁 막혔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잘 나오지 않았다.진정우는 다시 배수관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나는 멀뚱멀뚱 지켜봤다. 그는 아주 능숙했다. 현장에서 일할 때와 똑같았다.문턱에 기대서 그를 바라보며 나는 무심코 물었다.“정우 씨는 못하는 게 뭐예요?”“저도 못하는 거 있어요.”그는 일하면서도 내 질문에 대답했다.“뭔데요?”그는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애 낳는 거요.”어쩐지 약간 다운되던 기분이 그의 말을 들은 순간 확 사라졌다. 나도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장난을 받아쳤다.“그건 낳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 거네요.”“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지나치게 무덤덤한 태도 때문일까?
나는 호흡이 점점 가빠진 채 얼어붙었다. 진정우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시선은 나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나와 마주 보고 있었다.우리는 이대로 가만히 있었다. 먼저 피하지도, 혹은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서로의 심장박동이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지는데도 말이다.이때 밖에서 이웃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이 집 아가씨 남자친구 사람 참 좋아. 복도까지 깔끔하게 청소한 거 봐.”문뜩 정신을 차린 나는 진정우를 밀어내고 거실로 도망갔다.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어쩔 바를 모를 정도로 말이다.뒤늦게 따라온 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여기 부모님 집이에요?”나는 약간 멈칫했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것도 잠시,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팀장님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어요.”벽에는 내가 받았던 상장에 가족사진도 붙어 있었다. 교복 차림의 나는 부모님 사이에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지금 다시 보니 가슴이 아리기만 하는 미소였다.“학교 다닐 때 성적도 좋았나 봐요.”진정우는 또 내가 받았던 상장들을 바라봤다. 전부 학교에서 받은 것들이었다.“지금도 맡은 일은 잘하잖아요.”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인정해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여러 가지 방면으로.”나는 감히 그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입 밖으로 뱉은 말도 너무나 적나라했다.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수고 했어요. 제가 밥 살게요. 밥부터 먹고 집 보러 갈까요?”처음 원하지 않던 데서, 이제는 내가 먼저 제안하게 되었다. 아까와 달리 지금은 빚진 게 있었기 때문이다.“좋아요. 그 전에 세수하고 싶은데, 혹시 수건 있어요?”나는 이제야 그의 얼굴에도 옷에도 먼지가 묻었다는 것을 인식했다.“그...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옷부터 사 올게요.”이 근처에는 옷 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의 대형 마트에 가면 옷이
“혹시 물티슈 있어요?”진정우가 물었다.“아니면 다른 수건도 괜찮아요. 옷도 닦고 싶어서요.”그는 나의 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걸로 옷을 닦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일회용 수건 있어요. 그걸 적셔서 쓰면 되겠네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뽑아줬다. 그는 멍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보는 신문물에 놀란 모습이었다.피식 웃은 나는 괜히 그를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설마 이게 뭔지 몰라요?”“네, 처음 봐요.”순순히 인정하는 모습도 귀여웠다.하긴, 연애 한번 한 적 없는 사람이 이런 건 알게 될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유행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여자가 없으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여자들이 세수할 때 쓰는 거예요. 깔끔하게 한 번 쓰고 버리도록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물에 적셔서 건네줬다. 진정우는 고개를 숙여서 옷에 묻은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등에도 먼지는 가득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다른 수건을 들고 닦아줬다.내 손이 등에 닿은 순간 그의 몸은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해서 닦았다.그 순간 나는 진정우의 목덜미에 있는 점을 봤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그때의 꿈이 떠올랐다. 나를 등지고 있는 남자아이의 목덜미에도 점이 있었다.생각에 잠긴 나는 진정우가 불렀을 때에야 벌떡 정신 차렸다. 내가 들고 있던 수건이 그의 옷을 젹셔 가고 있었던 것이다.“그... 다 됐어요.”나는 그의 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정우 씨, 목덜미에 점은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진정우는 손으로 점을 만지작대면서 말했다.“네.”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꿈에서 본 사람이 진정우 씨는 아니겠지? 말도 안 돼. 현실에서 만나기도 전에 꿈에서 만날 리는 없지. 게다가 그냥 뒷모습이었잖아. 그래, 아닐 거야.’꿈은 환상일 뿐이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꿈과 현실이 결합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1분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말이다.“
역시 뻔뻔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나를 향해 걸어오는 조나연을 보고 이런 생각이 문뜩 들었다.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내연녀의 신분으로 이토록 당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나연은 당당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으스댔다.“여기서 다 만나네요, 지원 씨. 밥 먹으러 왔어요?”조나연은 나와 말하면서 진정우를 힐끔댔다. 사실은 처음부터 진정우를 바라보며 걸어왔다.전정우는 원래도 시선이 가는 타입이니 할 말은 없다. 나이 많은 아주머니도 그를 힐끔거리기 마련이다. 조금 전 집에서도 그러지 않았는가?“안 그러면 구경하러 왔겠어요?”나는 차갑게 말했다. 내 성격이 못된 게 아니라, 그냥 그녀가 착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만약 그녀가 당당하게 강유형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나는 흔쾌히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내 신경을 거스르기만 했다.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곧장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유형도 없는데 연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혹시 이번 표적은 정우 씨인가?’세상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 꽤 된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상 모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이다.조나연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과부 주제에 남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가면을 쓴 모습이 퍽 우스웠다.‘쟤 강유형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더 좋은 남자를 보면 바로 넘어갈 가벼운 마음이었나? 아니면 그냥 내 곁에 있는 남자라면 다 좋은 건가?’나와 진정우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조나연이 치근덕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가서 임산부 세트나 먹어요. 여기 음식 꽤 건강하거든요. 나연 씨 같은 임산부한테 꼭 맞아요.”조나연의 안색은 순간 빨개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그리고 속셈이 뻔히 보이는 표정으로 진정우를 힐끔댔다.“하.”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조나연이 이 꼴을 하고서도 진정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웃겼다.조나연이라면 유강후와 만나면서도 여러 남자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온몸이 이불에 휩싸인 채 침대로 돌아오고 나서야 내가 괜히 이상한 상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군인 출신인 진정우의 자제력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했다.그는 단순히 나를 씻겨준 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그냥 깨끗하게 씻겨준 것.이미 그의 능력을 확인했지만 그래도 승부욕이 발동해 장난스럽게 말했다.“진정우, 너 혹시... 안 되는 거 아니야?”이 말은 남자에게 치명적인 모욕이다. 어지간한 남자는 이런 말을 듣고 참을 수 없겠지만 진정우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얌전히 있어. 그리고 더 이상 애쓰지 마. 아무 소용 없으니까.”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살짝 상처받았는데...”나는 일부러 힘없이 실망한 척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그러자 그가 이불을 살짝 당겨 내 얼굴을 드러내며 내 볼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내가 안 되는 게 아니고 네가 날 끌어당기지 못하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내가 널 다치게 할까 봐 조금 더 기다리는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럼 내가 너랑 가까워지기만 하면 다칠 것 같으면 너 평생 나한테 손도 안 댈 거야?”그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응, 참아야겠지.”“...”나는 다시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이불째 나를 품에 안았다.“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그는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조금만 쉬어. 나 샤워하고 올게.”분명 찬물 샤워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찬물 샤워하러 간다.”“...”정말 원칙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자신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나를 상처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가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렀다.“진정우.”“응?”“너, 진짜 최고야.”그리고는 창피해서 혀를 쏙 내밀고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러자 그가
진정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는 내가 모든 원칙을 포기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그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게 말했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로 깊은 사랑을 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 꺼내지 않아도, 문장 하나하나가 사랑이었다. 나는 코끝이 찡해졌고 전을 먹으며 입안 가득 찬 상태로 웅얼거렸다.“진정우, 이리 와봐.”“왜?”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오라면 오라니까.”나는 괜히 고집을 부렸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소파에 앉자마자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잠시 놀란 듯 멈췄고 내가 말했다.“네 어깨에 기대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진정우가 나를 침대에 눕히며 물었다.“오늘 여기서 잘까, 아니면 네 방에서 잘까?”“여기서 잘래!”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문득, 밤마다 푸쉬업을 하고 찬물 샤워를 하던 그가 떠올랐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근데 오늘 밤에는 푸쉬업 금지야.”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일부러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얘긴 다시 꺼내지 마.”나는 그의 품에 안기며 그의 허리를 살짝 감쌌다.“안 하면 안 꺼낼게.”진정우의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장난치지 마.”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못 참겠어?”나는 한층 대담하게 물었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장난은 이제 그만. 그리고 나를 더 자극하지 마.”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낮아진 목소리였다.“너도 원하고 있잖아.”나는 점점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지원아...”그는 나의 손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올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난 이제 다 나았어.
이 상황, 얼마나 민망했을지 상상이 간다. 물론 진정우는 예외였다.“잠시만요.”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소파에 앉혔다. 그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천천히 물티슈를 꺼내 내 손을 닦아주었다.“천천히 먹어. 죽이 좀 뜨거우니까 급하게 먹지 말고.”문가에 서 있는 강진혁은 들어오기도, 물러서기도 난감해 보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가 나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내 말은 진정우에게 얼른 강진혁을 챙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정우는 자리를 뜨기 전에 모든 음식 포장을 풀고 식기를 내 앞에 정갈히 놓아주었다.문가에 서 있던 강진혁은 그야말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애정 행위를 강제로 목격한 셈이었다.아마 나를 짝사랑하는 그의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강 실장님, 무슨 일이 신가요?”진정우는 문가로 걸어가며 강진혁에게 물었다.강진혁은 병실 밖으로 나갔고 그가 진정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듣지 못했다.진정우는 약 3분 후에 돌아왔는데 그의 평온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표정을 드러내지 않자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죽을 먹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별일 아니야.”그의 대답은 꽤 건조했다. 아마도 그 자신도 느꼈는지 덧붙였다.“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하더군.”“스카우트? 어디로? KS그룹?”강진혁은 아직 총괄 감독에 불과하다. 스카우트 같은 건 인사 부서나 그룹 회장이 해야 할 일 아닌가?혹시 이미 강유형의 자리를 대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만약 그렇다면, 아까 그가 내게 한 말은 다 무슨 뜻이었을까?내게 심리적 준비를 시키려는 걸까, 아니면 나를 떠보려는 걸까?“어디로 간다는 얘기는 없었고 그저 내 생각을 물어봤어.”진정우는 덤덤하게 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나는 죽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뭐라고 대답했는데?”“고려하지 않는다고 했어.”그의 대답은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너무 솔직하고 귀여워서.”칭찬을 듣자
“오빠, 강유형은 성인이에요. 본인이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죠.”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강유형을 회사에서 내보내든, 관계를 끊든, 그건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나도 알아. 하지만 아버지랑 그렇게 싸우는 걸 보니 속이 타더라. 그리고 그가 회사에서 나가면 회사에도 영향이 클 거야.”강진혁은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오빠가 있잖아요?”그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지원아, 난 한 번도 회사를 관리할 생각을 해본 적 없어. 그러지 않을 거였으면 애초에 회사를 떠나지도 않았겠지.”그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나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다만 내 생각을 덧붙였다.“회사의 일은 삼촌께서 알아서 계획하고 계실 거예요. 강유형이 떠난다고 해서 회사가 멈추는 건 아니죠.”나는 이성적으로 말하며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했다.“세상은 누구 없어도 돌아가게 돼 있어요.”강진혁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야.”“오빠, 아마 너무 걱정되니까 그런 거겠죠.”나는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말을 덧붙였다.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가 4년 전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4년 전?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4년이라는 시간은 아이도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그걸 성장이라고 하죠.”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강진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맞아. 네가 정말 많이 컸다, 우리 꼬마 지원이.”그의 말에 가슴 한쪽이 찡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내가 강가에 들어왔을 때, 강유형과 강진혁은 종종 나를 이렇게 부르며 장난스럽게, 때로는 애정을 담아 나를 놀리곤 했다.그런데 그 말을 들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빠, 이런 문제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세요. 너무 관여하면 오히려 안 좋아요.”그의 ‘꼬마 지원이'라는 말에 잠시 감정이 흔들렸지만 나는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강진혁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