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언니,나 배고파. 죽 좀 사다 줘”“알았어, 지금 사다 줄게. 고기도 먹을래?”나는 그녀에게 말했다.고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매번 고기를 먹을 때마다 다이어트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고기를 먹어야 살이 오르는 거죠, 그럼 조금 먹을게요.”이소희는 예전처럼 장난했다.아파도 참으며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 웃었다.“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볶음으로 사 올게.”“나는 비계와 살코기가 골고루 섞인 고기를 원해요.”그는 전처럼 음식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알았어. 제일 크고 제일 좋은 거로 선택해 올게.”말을 마친 나는 일어서서 병실 문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선 나는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얼마 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벽에 기댄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한참 후 음식을 사러 가던 중 강유형을 만났다.그가 피를 토하던 모습이 섬뜩했던 나는 그를 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 피가 분출되던 모습이 생각났다.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유형은 나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와 나는 마치 낯선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0년을 알고 지냈던 그와 나는 4년을 연애했지만 결국엔 각자의 길을 선택하며 헤어졌다.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그와 나는 평범한 낯선 사람이다.“야채죽 1인분이랑 고기볶음 1인분하고 김치 주세요.”나는 이소희가 좋아하는 메뉴를 주문했다.나는 그녀가 이것저것 먹고 싶어 해도 얼마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래도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메뉴 몇 가지를 주문하고 디저트도 샀다.음식을 포장해 돌아가려는 순간 차에 기대어 서있는 강유형을 보았다.방금 비록 말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병원엔 웬일로 온 거야? 어디 아픈 거야?”강유형이 먼저 말을 했다.여기는 병원 식당이었기에 그는 당연히 의문스러웠을 것이다.이소희를 절대로
도시락통을 뒤로 숨기는 나의 모습을 본 두 남자는 웃으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나는 이소희의 병실로 향했다. 잠시 후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것을 보고 나는 이소희의 병실로 달려갔다.“소희 씨.”문을 열며 나는 그녀를 불렀다.거친 숨을 쉬는 나를 본 이소희는 물었다.“왜 그래요? 언니?”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다.그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병실로 걸어 들어갔다.음식을 침대 옆에 놓으려던 순간 나는 돈뭉치를 발견했고 그것이 그들이 이소희의 입을 막으려고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아까 그 두 남자는 이소희를 찾아온 것이다. 그녀에게 학대를 당한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입단속하러 온 것이었다.“언니, 이 돈 치워주세요.”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 돈뭉치를 바라보았다.“이걸 왜 받았어?”이소희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 돈을 받아야 그들이 안심할 수 있어요. 또 한 저도 다시 돌아갈 수 있고요.”사색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마음이 아팠다.“소희 씨, 그들의 죄를 밝히려면 또 다른 방법도 있을 거야, 다시 그곳으로 가면 소희 씨가 죽을 수도 있어.”그녀가 겪은 고통을 알 수가 없기에 나는 그녀더러 포기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평생을 그들에게 짓밟혔기에 그들을 망가뜨릴 이유가 있다.침대 옆에 음식을 놓은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그녀는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그녀는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공간을 주고 싶었다.나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고 진정우의 병실로 갔다.바로 전에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이소희를 매수하듯이 누군가 진정우를 찾아오는것이 두려웠던 나는 경계를 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오지 않았다.아마도 진정우가 의식이 없는 줄로 알고 있는 그들이기에 찾아와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진정우
“이미 진혁 오빠를 의심하고 있었다고? 그럼, 유형은? 그들과 이미 협력하고 있었던 상황에 유형이가 악어 떼에 공격당할 때도 나서지 않았잖아? 그건 어떻게 된 일이야?”지금 강유형과 헤어졌기에 그의 일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으나 그 장면이 자주 떠올랐고 심지어 꿈에서도 그 장면을 보았다.강유형에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지만 오직 진정우만이 모범답안을 말해줄 수 있다.“일부러 떠봤어.”진정우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유형이와 진혁 오빠가 형제라서?”나는 또 진정우에게 물었다.“맞아,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야. 그 당시 또 다른 원인도 있었어.”진정우의 말을 들은 나는 의아했다.“뭔데?”상처를 보지 못하게 한 진정우였다. 그래서 몸을 비스듬히 앉은 나는 그의 상처와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모든 증거가 진혁 씨를 가리키고 있었어. 마치 누군가 일부러 계획한 것처럼 말이야.”진정우의 말에 나는 그 당시 상황이 생각났다.확실히 그랬다. 강진혁 별장에 들어가서부터 후에 사고가 나기까지 모든 것이 나를 노린 것처럼 보였지만 브라운이 최종 보복 상대는 진정우 그들이었다.그 당시 나를 미끼로 진정우 그들에게 판 함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유형이는 진혁 씨가 너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나 이미 갈라진 상황에서 진혁 씨가 너랑 사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겠지. 그러기에 너와 진혁 씨가 사귀는 것을 막는 방법은 오직 너더러 진혁 씨가 나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는 거야.”진정우가 말했다.“너를 위해 악어한테 공격을 받았던 이유도 유형 씨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야. 너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한편으론 그의 혐의를 벗기 위해서이기도 해. 악어 떼에 공격을 받았는데 누가 그를 의심하겠어?”나는 진정우에게 말했다.“그럼, 그 말인즉슨 유형이가 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구해주지 않았단 말이야? 유형의 반응을 보려고?”“그 생각도 있었어.”진정우는 또 다른 생각도 있었다.“뭔데?”결국 나는 고개를
진정우는 침묵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던 나는 그와 용설아의 일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두려워하겠어?”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진정우를 보고 있자니 문득본 나는 쑥스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그에게 말하려던 순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원아, 난 사실 이 네가 나를 멀리하는 것보다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더 두려워.”내가 그를 화나게 하고 오해해도 그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해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나를 멀리 밀쳐 밀어내고 있었다.그는 진심으로 나를 위하고 있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두려운 그 감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나를 속였으면서, 꿀 발린 듣기 좋은 말만 하지 마!”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함께 이겨나가야 하기 때문이다.진정우는 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는 모든 것을 잃어도 너만은 잃으면 안 돼.”이런 직설적인 고백을 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이런그의 말에 괜히 나는 마음이 약해졌다.헤어져 있었던 그 시간 동안 그에 대한 오해 때문에 그에게 모질게 굴었으며 심지어 그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 그런 모습을 본 그도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말만 잘해, 분명히 네가 나를 밀어내고 나를 버렸어.”말하며 나는 입으로 그를 깨물었다.그의 턱과 수염 그리고 입술...나는 그 사이 모든 서운함을 모두 깨물며 보복했다.깨물다가 나는 자신이 너무 통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그가 다쳤기에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나는 멈췄다. 그리고 이마를 가슴에 파묻고 거칠게 호흡했다...나의 마음을 알고 있던 진정우는 가볍게 웃었다.“웃지 마!”나는 쑥스러워서 그에게 화냈다.그러나 그는 계속 웃었고 나는 그를 자극했다.“웃긴 뭘 웃어, 이게 다 네가 지금 하면 안 되기 때문이야.”그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벌거벗겨 덥쳤을 것이다...진정우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고통은 강진혁이 가한 것이기에 나는 기억해 둘 것이다.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와 장난한 이 순간이 너무도 좋았다.중증 환자인 진정우가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척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나는 그에게 물었다.“언제까지 의식이 없는 척할 거야?”“내가 이미 의식이 돌아왔잖아, 이제는 안 할 거야.”진정우의 말을 들은 나는 웃었다.“그들을 가지고 노는 거야?”진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할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들을 잘 데리고 놀 건데.”말투는 차분했으나 말끝마다 날카로웠다.논다고 말했으나 사실 이소희처럼 목숨으로 그들과 싸우고 있다.“소희 씨를 만났어...”이소희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던 진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리영이가 전에 소희 씨와 같은 일을 겪은 여자들을 치료한 적이 있대. 그래서 그녀들에게 연락해 더 많은 증거를 수집하게 도와주겠대.”진정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나는 손을 흔들어 그의 주의를 돌렸다.“이것은 흑색 산업 체계야. 성매매뿐만 아니라 많은 업무가 해외와 연결되어 있어.”진정우의 설명을 듣고 나는 바로 이해했다.드래곤킹에서 성매매만 했다면 그가 이렇게 힘들게 죽은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너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아.다만 자신을 잘 보호하겠다고 약속해 줘.”내 친구가 피해를 보았고 진정우도 자신의 책임이 있기에 나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그는 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는 네가 연루되어 피해를 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결국엔 너도 연루되었어. 너도 자신을 잘 보호해, 특히 진혁 씨를 조심해.”그렇다, 강진혁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나를 사랑할 때는 아껴주지만 얻을 수 없으면 망가뜨릴 것이다.진정우가 걱정할 것을 알기에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와 알고 지낸 후부터 그는 줄곧 나를 보호해 줬기에 나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나연 씨도 드래곤킹에 끌려갔어.”나는 조나연을 이용할 계획을 진정우에게 말했다.진정
‘주인님?’진정우의 말에 나는 깔깔 웃었다. 그에게 이렇게 유머러스한 면이 있을 줄이야.비록 농담이지만, 내 인생에서 이 두 글자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인생은 원래 예측불가한 것이니, 누구도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불확실한 미래에서 누구나 다크호스가 될 수 있는 것이다.진정우와 이소희 두 사람 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지라, 나 혼자 두 사람을 돌보는 건 무리여서 간병인을 붙여주었다.진정우는 자신이 걷고 움직이고 먹고 마실 수만 있으면 간병인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면서, 기어코 도움받지 않았다.진정우는 낯선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 이곳에서 또 무슨 짓 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것 같아서 나도 가지 않았다.남자도 때로는 여자 못지않게 눈치가 매우 빠르다.지금의 진정우는 약간 나한테 많이 의지하면서 모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소영이한테 가봐야겠어. 소지훈이 자신한테 접근한 목적을 알았으니 괴로울 거야.”나는 진정우를 달랬다.“걔도 이제 어른이니까 자기 감정 문제쯤은 스스로 처리해야지. 남자 하나 때문에 자포자기하면 그건 너무 나약해.”진정우는 말 속에 말이 있었다.진소영을 가리키는 동시에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했다.나는 진정우와 작은 병실 침대에 같이 비비고 앉아 있으면서 발로 그의 발을 건드렸다.“정우 씨가 날 포기해도, 생사의 고비가 있어도 난 다 견지했는데, 나 너무 씩씩하지 않아?”진정우는 내 손을 입술에 대고 살짝 물었다.“응. 우리 지원이는 슈퍼 몬스터야.”“어라? 내가 왜 몬스터야?”난 진정우에게 항의했다.내 항의는 갓 자란 어린 소녀처럼 조금 유치했다.하지만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여든이 넘어도 소녀처럼 행동한다.진정우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몬스터지 그럼. 날 이길 수 있는 작은 몬스터.”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애칭은 정말 다양하지만, 나는 진정우가 지어준 애칭이 마음에 들었다.내가 진정우의 입술을 살짝 물자, 그는 툴툴거렸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인 것 같은데, 내가 아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안전하다.진정우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걱정 마. 나 자신을 잘 지킬게. 우리... 꼬마 몬스터한테 내가 필요하잖아.”‘꼬마 몬스터?!’귀여운 애칭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나는 그 자리에서 카톡 이름을 바로 바꾸었다.신지태가 가장 먼저 바뀐 이름을 발견하고 문자가 왔다.[누굴 공격하려고 그래?]몬스터는 누굴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도 짓밟히지 않는 것이다.신지태와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휴링턴에서 돌아온 이후로 당구장을 양도했다는 말만 들었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휴링턴의 위험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신지태의 결정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악마!]나는 달랑 두 글자로 답장했다.이어서 또 새 문자가 도착했다.[요즘 잘 지내?]내가 잘 지내는지는 인터넷을 접하면 알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질문하는 걸 보니 잘 모르는 것 같았다.[그럼.][지원아, 미안해. 진작 너한테 사과했어야 하는데.]신지태의 문자에 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또 하나의 문자가 도착했다.[나 때문에 진정우가 그렇게 된 거야.]신지태는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단지 이 모든 사건의 도화선이라는 걸 잘 모르는 것 같았다.[네 잘못 아니야. 모든 건 하늘의 뜻이자 가장 좋은 결과야.]신지태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는 잘 모르지만, 혼란스러운 속세에서 벗어난 듯했다. 그게 아니면 나의 현재 상황을 모를 리가 없다.그렇다면 신지태에서 더 이상 고민거리를 제공해 줄 필요가 없다. 적어도 진정우가 살아있다는 건 말할 수 없었다.내가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 알려주면 된다.신지태는 답장이 없었고, 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신지태와 짧은 대화를 마친 후, 나는 쇼핑을 좀 하고 진소영을 찾으러 유치원에 갔다. 진소영이 아닌 다른 선생님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나는 그 선생님에게 진소영에 대해 물었다.“진소영
진소영을 속인 건 맞지만, 그건 선의의 거짓말이었고 앞서 해명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용서할 수 없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진소영이 사리 분별이 된다면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비록 진소영과의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소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참견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진정우의 동생이니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까지 사랑하는 셈 치고 참견했다.진소영은 그저 자신이 신뢰하던 사람에게 속아서 화났을 뿐이다.“누나.”통화는 안 됐지만, 소지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나는 휴대폰을 넣고 소지훈을 바라보았다. 묻지 않아도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있었다.분명 진소영을 만나러 온 것이다.진소영이 나한테도 그 정도 화났으면, 소지훈한테는 더 화났을 것이다.“소영이를 보러 온 건가요? 아니면 소영이 몸에 있는 심장이 신경 쓰이는 건가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침묵하는 소지훈을 보며 나는 비웃었다.“아직도 답을 못 찾았나 봐요.”“누나, 나도 너무 머리가 아파요.”퀭한 소지훈의 모습을 보아하니 요 며칠 동안 잘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스스로 만든 고민이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나는 그래도 한마디 충고했다.“고민을 해결하려면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내세요.”말은 쉽지만, 만약 소지훈이 그걸 쉽게 구분할 수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지훈 씨, 전에 소영이를 떠나겠다고 했잖아요.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이 기회에 머리를 좀 식히고 답을 찾아봐요.”“잘 알고 있지만, 조금 무서워요.”소지훈은 보기 드물게 남자의 연약한 면을 드러냈다.“뭐가 무서운데요?”소지훈은 입술을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누나, 소영이가 혹시 심장을 바꿔버리겠다고 안 했어요?”소지훈은 그게 두려워서 여기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진소영이 홧김에 한 말을 소지훈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정말 단순한 남자다.하지만 소지훈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