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어머, 이렇게 쉽게 대답한다고? 구 교수님한테 물어보긴 했어?”나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물어볼 필요 없어.”안리영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순간 깨달았다.“설마 내일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한 거 아니야?”“뭐, 그런 거지. 그래도 네 명이서도 괜찮아.”안리영은 윙크하며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구 교수가 떠나는 걸 아쉬워하지 않을 리 없지만 안리영은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내일은 제대로 대접해야겠어. 그리고 이벤트도 준비하자.”나는 진정우에게 작게 속삭였다.“이벤트? 뭔데?”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럭셔리 스위트룸.”진정우는 스위트룸 대신 저녁 식사를 해동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로 정했다.“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두 분 덕분에 과분한 대접을 받네요.”진정우가 청혼한 이후, 안리영은 나를 이미 진정우의 아내로 대하고 있었다.“구 교수님은 소영이를 살려주신 분입니다. 이 정도는 대접해야죠.”진정우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흰 가운 대신 세련된 정장을 입은 구 교수는 더욱 빛났다. 오늘 진정우 역시 평소와 달리 정장을 차려입었는데 드라마 속 재벌 2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정우 씨, 이렇게 멋지면 반칙 아니에요? 비주얼로 제대로 군기 잡는데요?”안리영이 감탄하며 말했다.“내가 고른 거야.”나는 자랑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녁 식사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나와 안리영은 먹고 마시며 분위기를 띄웠고 구 교수는 친근하고 유쾌하게 사람들을 대했다.진정우는 평소 조용한 이미지와 달리, 구 교수와 학술적인 대화를 나누며 놀라운 지식 면을 보여줬다.“너희 집 진정우, 진짜 보물이네. 모르는 게 없어.”화장실로 가는 길에 안리영이 감탄하며 말했다.“그럼, 내가 온 우주를 돌아다니며 찾아낸 보물이거든.”나는 손을 씻으며 농담처럼 말했다.그 순간, 남자 화장실에서 강유형이 나왔다. 그는 나를
‘강씨 가문을 붙잡아 뒀다고?’이 말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진수로가 진정우에게 ‘우리’라고 표현했다는 점이었다.안리영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인 채 진정우의 대답을 기다렸다.진정우는 고급 맞춤 정장을 입고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고위 결정권자 같았고 진수로는 오히려 그의 부하처럼 보였다.“힘들면 알아서 결정하세요.”진정우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그럼 오늘 강씨 가문과 최종적으로 논의할게.”진수로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고 곧이어 물었다.“시간 되면 한 번 같이 밥 먹자.”진정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요즘 바빠서...”진수로는 거절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더 해보려는 듯했지만, 진정우는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난 지금 약혼녀와 친구들과 저녁 식사 중이라 다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그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진수로는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려놓았다.그들이 멀어지자 안리영이 나를 쿡 찌르며 말했다.“야, 진수로가 진씨 가문의 상속자잖아. 그런데 진정우 앞에서는 마치 말단 직원 같네.”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건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진정우가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재라서 그런가? 요즘 대기업들은 기술형 인재를 중요하게 여기잖아.”나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하며 웃었다.“하, 우리나라에 인재가 넘쳐나는데 그런 이유는 아닐걸?”안리영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왜 그런 거지?”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혹시... 진정우도 진씨 가문 사람 아니야?”안리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 있다가, 그동안의 기억이 스쳐 갔다.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말도 안 돼. 소영이 수술비도 내가 냈는데 그가 진씨 가문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어.”“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안리영은 잠시 뜸을 들
나는 창밖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그 둘이 정말 뭔가 있었다면 벌써 그런 기류가 있었겠지. 그랬다면 너한테 기회조차 없었을 거고.”“맞아. 내가 구 교수를 좋아할 때, 그도 날 좋아했어. 우리는 같은 주파수에 있었어. 비록 완전히 같은 차원은 아니어도.”안리영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너희는 정말 영혼의 짝 같아.”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근데 너희 혹시... 그냥 영혼만 통하는 게 아니라 몸도...”안리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아직은 아니야.”“그럼 그가 주저하는 거야? 아니면 네가 아직 망설이는 거야?”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놀렸다.“그냥 뭔가 아직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그녀는 숨김없이 솔직히 말했고 나는 고민하는 척하며 말했다.“그럼 오늘 나와 정우가 너희를 위해 호텔 스위트룸을 하나 잡아줄까? 분위기만 맞추면 다 잘 될걸?”“야, 됐거든? 그런 거 분위기 아니고 민망한 거야.”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내 말을 받아넘겼다.“근데 왜 그렇게 날 빤히 쳐다봐?”“네가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나 싶어서.”안리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여자는 살짝 나쁜 구석이 있어야 남자가 더 좋아하는 법이거든.”우리는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진정우가 이미 돌아와 구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아까 화장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슬쩍 말을 꺼냈다.“아까 대표님 만났어.”“그래?”그의 반응은 여전히 미지근했다.“둘이 뭐라고 얘기했어?”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화장실에서 잠깐.”진정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살짝 더 떠봤다.“근데 대표님이 KS 그룹이랑 협력 논의 중인 것 같더라.”“맞아.”이번에도 그는 짧게 대답했다.“응? 넌
나와 진정우는 구 교수 바로 옆방에 묵게 되었다.사실 내가 호텔에 머물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오늘 밤 안리영이 구 교수 방에 남게 될지 궁금해서였다.진정우와 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바로 테라스로 나갔다. 발을 들이기 무섭게 구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리영아, 너도 해외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걸 생각해 본 적 있어? 너 정도 실력이면 해외에서도 훌륭히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나는 몸을 숙여 테라스 너머를 살폈다. 구 교수는 안리영을 다정하게 감싸안은 채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글쎄, 오늘 전까진 생각해 본 적 없어.”안리영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가운 톤과는 달리 한없이 부드러웠다.“그럼 이제 생각해 볼래?”구 교수의 말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안리영은 대답하지 않았고 구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거기서 네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선배.”안리영이 부르며 그의 품에 안긴 채 물었다.“선배는 국내로 돌아올 생각 없어?”구 교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단호히 대답했다.“...없어.”안리영은 그의 품속에서 머리를 들고 물었다.“왜?”“해외에서 경력을 쌓다 보니 특정 국가에 국한되는 게 싫어. 글로벌하게 일하고 싶어.”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의 말에 안리영은 잠시 침묵했다.“선배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건 맞지만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쌓아온 인맥은 전부 국내에 있는데...”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안리영은 사랑에 눈이 멀지 않고 현실적인 관계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알아. 내가 너한테 무조건 나를 따라오라는 게 아니야. 그저 우리가 함께할 미래를 생각해 보자는 거지. 결혼하면 결국은 같은 곳에 있어야 하잖아.”구 교수는 안리영의 귀에 얼굴을 대며 다정히 말했다.이 대화를 들으며 나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보이는 작은 습관이 떠올랐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자주 감싸안았고 강유형은 내 얼굴을 쓰
“그리고 딱딱하지.”내가 두 글자를 덧붙이자 진정우는 입을 꽉 다물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나를 슬쩍 내려놓았다.“진정우.”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설마 이거 가지고 삐진 거야?”“아니.”그는 단호히 대답했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왜 내가 너를 ‘거친 남자’라고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안 들어도 알아.”그는 내 허리를 감싸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나를 호텔 방에 있던 흔들의자에 앉혔다.“알고 있다고? 뭘?”나는 두 다리를 흔들며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가 더 움직이지 못하도록.진정우의 목젖이 두 번 위아래로 움직였지만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척했다.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기분이었다.“말해 봐. 뭘 안다는 거야?”나는 그의 허리를 감싼 다리로 장난을 치며 물었다.그는 여전히 침묵했다. 아마 그가 절대 먼저 말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에 내가 말을 이어갔다.“말 안 하면 내가 알려줄게.”나는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까이 댔다.“‘거칠다’라는 건, 너를 처음 봤을 때 너무 무뚝뚝하고 예의도 없고 여자를 다룰 줄 모른다는 뜻이야.”내 말에 그의 몸이 미묘하게 반응했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며 덧붙였다.“반박하지 마. 왜냐하면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런 인상이었으니까. 내 머릿속엔 이미 너는 거친 남자로 각인됐거든.”나는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몸이 긴장하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딱딱하다는 건 부정 못 하겠지?”내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으며 그의 몸을 더듬었다.“진짜 딱딱해. 손에 닿으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흔들의자가 갑자기 휘청거렸다.“꺅!”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품에 안겼다.진정우는 곧 흔들의자를 붙잡고 나를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엔 진짜 ‘딱딱한’ 걸 보여줄게.”그의 목소리엔 농도 짙은 농담이 섞여 있었
안리영 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까 내가 목격한 기류를 보아하니, 아마도 지금 나와 진정우처럼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것이다.그런 상황에서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도 처음이라면 분명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불쾌한 사건이 될 터였다.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진정우를 살짝 밀며 말했다.“잠시만.”진정우는 가슴이 들썩이며 나를 뜨겁게 바라보았다.“뭐라고?”나는 문 쪽을 가리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들어봐. 누군가가 안리영의 일 망치려는 것 같잖아.”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서?”“그러면 안 되지.”나는 벌써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그러면 지금 우리의 일은? 같이 망치는 거잖아.”그 말에 나는 살짝 부끄러웠지만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자기야, 잠깐 기다려봐. 내가 저년을 물리치고 올게.”내 말투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정말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점점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다.과거 강유형과 함께 있을 땐, 어른스럽고 냉철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미래의 사모님’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체면을 위해 모든 상황에서 배려하고 우아하게 굴어야만 했다. 그 결과 젊음마저 소모된 느낌이었다.하지만 진정우와 함께하는 지금은 달랐다. 그는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줬다.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미끄러지듯 바닥에 내려섰다. 흐트러진 옷을 간단히 정리하고 방문을 열어 방해꾼과 맞설 준비를 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맞은편 구 교수의 방에서 나온 사람은 뜻밖에 안리영이었다.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문틀에 기대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그녀가 유리하다면 그냥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리해진다면 즉시 지원군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구 교수님은 어디 계세요?”소희연이 먼저 직설적으로 물었다.“샤워 중이에요.”익숙한 대사가 안리영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녀의 목소
안리영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럼요. 구 교수님은 여자 친구가 있으니, 희연 씨도 당연히 선을 지키실 줄 알았어요.”자기가 진짜 여자 친구임을 당당히 드러냈다.소희연은 잠시 안리영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공격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침묵하다가 마침내 말했다.“구 교수님께 내일 한 시간 일찍 출발하라고 전해주세요. 늦으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테니까요.”그 말은 분명히 위협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싸움을 걸 핑계를 만들고 있었다.안리영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오늘 밤은 쉬지 않고 시간을 보내야겠네요.”그 순간 나는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역시 내 친구!’소희연은 안리영의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더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뒤돌아 떠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안리영은 나를 가리키며 손짓했다.‘네가 옆방에 있다는 걸 몰랐다면 더 좋았을 텐데.’그녀의 뜻을 이해한 나는 웃음으로 답했다.이날의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안리영은 완벽히 승리했다. 그것도 너무나 우아하고 깔끔하게.방으로 돌아온 나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진정우에게 달려가 그를 꼭 껴안고 입을 맞췄다.“자기야, 나 방금 너무 행복해. 내 친구 리영이 진짜 멋있었어!”진정우는 내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네가 이긴 것처럼 좋아하네. 왜, 너도 적을 물리친 것 같아?”“그럼! 리영의 적은 곧 내 적이야. 그녀의 행복이 내 행복이거든. 그걸 망치려는 사람은 절대 용납 못 해.”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 순간 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서 안리영의 행복을 위해 우리의 시간을 희생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앞으로?”그는 일부러 단어를 꼬투리 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나는 그에게 키스로 답했다.그리고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계속 흔들의자에서 할 거야?”그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응.”나는 그의
내가 그토록 찾으려 애썼던 것이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다니, 정말 놀랍고도 흥분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이어진 것은 당혹감이었다.‘왜 이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걸까? 그리고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어떻게 안 거지?’부모님의 교통사고가 발생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지금까지 보고서에서 빠진 페이지를 공개하지 않았을까?이제 와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뭘까? 정말로 보고서를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든 나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나는 숨을 고르며 메시지를 작성했다.[어떻게 만나 뵐 수 있을까요?]하지만 상대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나는 초조하게 1분을 기다리며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떠올리려 했다. 언제 내 연락처에 추가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그때 친구 추가 기록을 살펴보다가, 이 사람이 내 연락처를 추가하며 남긴 ‘신정훈 경사’이라는 메모를 발견했다.그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이 사람이 처음 나에게 친구 추가 요청을 했을 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었고 나도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부모님 사고를 처리했던 경찰일까?나는 더욱 흥분하며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신 경사님, 만나 뵙고 싶습니다.]이번에는 상대가 곧바로 ‘입력 중’이라는 알림을 띄웠다. 나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화면을 지켜봤다.곧이어 도착한 메시지.[전화할 테니 기다리세요.]그 짧은 문장을 보고 나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알겠습니다.]그 후로 상대는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짧은 문장들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흥분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용진표의 경고 삼촌의 설득, 그리고 일부러 사라진 보고서의 한 페이지...이 모든 상황이 뒤얽혀 있다는 건 그 페이지가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과연 이게 누구에게 어떤 충격을 줄까? 아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