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나는 일찍 깼다. 진정우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테라스로 나갔다. 마침 구 교수가 차에 타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는 안리영의 손을 잡고 있었다. 꼭 끌어안거나 키스하진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다정한 분위기는 어젯밤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그리고 그 뒤에 소희연이 내려왔다. 그녀는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깔끔한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미모와 세련된 차림새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이 여자는 정말 예뻐 보이는 법을 아는구나.’소희연의 옷차림은 단순히 멋을 낸 것이 아니었다. 구 교수의 시선을 끌고 동시에 안리영에게 압박감을 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선배님, 안녕하세요!”소희연은 환하게 웃으며 구 교수에게 인사했다.그 웃음에는 어젯밤 안리영과 구 교수가 함께 있었던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구 교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어.”그 한마디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구 교수도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타입이구나.’어젯밤 소희연이 무슨 말을 했는지 구 교수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소희연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안리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네가 내 험담을 했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안리영은 한술 더 뜨며 말했다.“제가 구 교수님께 말했어요. 늦으면 다들 기다리지 않겠다고.”그 말에 소희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구 교수에게 무언가를 해명하려 했지만 구 교수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는 안리영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제 돌아가. 도착하면 연락할게. 내가 정리되는 대로 바로 나를 찾아와.”그의 눈빛은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나조차 가슴이 뭉클했는데 바로 곁에 있던 소희연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그녀는 잠시 얼어붙어 있다가 억울한 듯 차에 올라탔다.안리영은 구 교수를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고 마지막
안리영은 아무 말 없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구 교수님 보내기 싫어서 힘든 거지?”“짝사랑할 때보다 더 힘들어.”안리영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그럴 수밖에. 겨우 맛보기만 했는데 이제 더 못 먹는다면 속상하지 않겠어?”나는 그녀를 조금 놀리면서도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말했다.“누가 못 먹는다고 그래? 내가 먹고 싶으면 비행기 타고 바로 가면 되지.”안리영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을 듣자 어젯밤 그녀와 구 교수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뭐야. 진짜 따라갈 생각이 생긴 거야?”안리영은 고개를 들어 소파에 앉아 다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아직 고민 중이야.”그 말은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 그것도 오랜 짝사랑 끝에 이루어진 관계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천천히 생각해. 시간은 많잖아.”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근데 어젯밤은 어땠어? 솔직히 말해 봐.”안리영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살짝 찌르며 말했다.“다 똑같다면서 뭘 그렇게 궁금해해?”“궁금하지! 평소엔 점잖은 구 교수님이 침대에선 어떤 사람인지 말이야.”나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너 정말... 진정우를 만나더니 점점 더 뻔뻔해지는 것 같아.”안리영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우리는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조금 뒤 진정우가 주문한 아침 식사가 도착했지만 안리영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그녀가 제대로 입맛을 찾을 리 없었다.나도 별로 먹지 않았다.진정우는 오늘 하루 쉬라고 했지만 나는 간단히 준비한 뒤 안리영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우리는 조나연이 낳은 아이를 보러 갔다. 아이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간호사는 아이가 생명력이 강하다고 했고 성장도 빠르고 모든 신체 기능도 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있다고 했다.하지만 태어난 후 지금까지 아이는 엄마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조나연은
“리영아...”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물었다.“지금 내가 선배를 따라가면 붙잡을 수 있을까?”지금 따라간다 한들 불가능했다.안리영은 현재 병원 업무에서 배제된 상태라 의료위원회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조나연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야. 막다른 길에서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는 거라고.”안리영은 차분히 말했다가 잠시 멈추더니 덧붙였다.“뇌 검사를 한번 받아보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그녀의 말은 농담 같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내 표정을 읽은 그녀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했다.“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 이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어떻게 상관없을 수 있겠어?’조나연이 안리영을 공격하는 건 나 때문이었다.그녀가 사고를 당했을 때 내가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그녀가 수술실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상관있든 없든, 난 조나연을 만나야겠어. 지금 당장 가서 얘기해 볼 거야.”내 목소리에는 이미 결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안리영이 내 팔을 잡았다.“지금 네가 찾아가면 조나연은 우리가 겁먹었다고 착각할 거야. 좋은 소리 나올 리 없고 오히려 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수도 있어.”“그녀가 뭘 요구하든 상관없어. 어디까지 나올 수 있는지 보려고.”나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안리영은 내 성격을 잘 알기에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그래,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걔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잊지 마. 너를 자극하려는 거야.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마.”“넌 어디 갈 건데?”내가 묻자 그녀는 담담히 대답했다.“원장실에 가서 상황을 먼저 설명할 거야.”나는 억눌린 화를 삼키며 말했다.“그럼 조금 있다가 다시 만나자.”“네 감정만 잘 다스려. 그녀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걔는 널 자극해서 무리수를 두게 만들려는 거야.”안리영의 조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엔 내가 걔 계획을 다 망쳐놓을 거야.”우리는 병실을 나섰다. 그녀는 원장
조태혁은 내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붉어졌다.“온순하다고? 그런 말로 사람을 모욕하지 마. 우리 일은 이미 끝났어, 더 이상 끄집어내지 말라고!”그가 화난 기색을 숨기면서도 참으려는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나는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얼른 한발 물러서며 팔짱을 끼고 마치 내가 덮칠 것처럼 몸을 방어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피식 웃음이 났다.“뭐가 그렇게 무서워? 내가 너한테 뭐라도 할까 봐? 이렇게 쩔쩔매는 너를 보니까, 왜 갑자기 이렇게 얌전해졌는지 더 궁금해지네.”“얌전한 게 싫어? 설마 내가 누나한테 다시...”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고개를 저었다.“제발 그만 좀 해. 다 끝난 일이야. 그리고 더 다가오지 마. 아니면 촬영해서 증거로 남길 거야.”나는 조태혁이 겁먹은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솔직히 말해봐. 강진혁이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너를 이렇게 얌전하게 만들었는지.”그는 갑자기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비켜 줘. 나 지금 바빠.”나는 일부러 그의 앞에 다리를 쭉 뻗어 길을 막았다.“모르는 척하지 마. 너 지금 강진혁 밑에서 일하는 거잖아. 아니면 네가 네 친누나까지 팔아넘길 리가 없잖아?”그 말에 조태혁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나는 그의 몸 위아래를 쓱 훑어보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입고 있는 이 옷들, 전부 비싼 브랜드네? 예전에는 네 누나가 강유형 카드를 긁어댔으니 이해했지만 지금은 그런 호사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럼 이건 뭐야? 강진혁이 사준 거?”조태혁은 침묵하며 얼굴을 돌렸다. 나는 그의 입을 막은 사람이 강진혁일 거라고 확신하며 비웃었다.“조태혁, 너 예전에 나한테 했던 짓들? 솔직히 별로 신경도 안 써. 그냥 철없는 애가 심심해서 장난친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나는 일부러 말을 끊으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네 누나까지 팔아넘겼다는 건 정말 최악이다.”내 말에 조태혁의 눈이 불타오르듯 붉어지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한
나는 여전히 TV 속 탁구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두 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벌이는 치열한 대결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웠다.공이 오고 가는 멋진 랠리를 감상하며 나는 조나연에게 물었다.“이 경기, 누가 이길 것 같아?”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네가 감히 여길 왜 온 거야?”나는 그녀의 병상 옆에 놓인 의자를 당겨 앉으며 무심히 대꾸했다.“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니야?”사실 그녀가 안리영을 고소한 것도, 결국 나를 겨냥한 거였다.“네가 와도 소용없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내가 직접 당하는 것보다 더 아프게 만들어주겠어.”조나연은 이제 가식조차 벗어던지고 노골적으로 독설을 퍼부었다.그 순간,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성공시키며 한 세트를 따냈다. 관중들의 환호가 들렸고 나도 자연스레 TV에서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조나연의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푸르스름했다. 살이 빠져 초췌해진 모습은 한눈에도 안쓰러워 보였다.“내가 무슨 대가를 치를진 모르겠지만 넌... 요즘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손대지 마!”그녀는 경계심에 찬 눈빛으로 몸을 움츠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왜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순간, 어젯밤 진정우가 장난스럽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내일 손톱 좀 다듬어줄게.’그 말이 떠오르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윤지원, 차라리 날 죽여.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널 끝장낼 거야.”조나연은 이를 악물고 위협했다. 나는 손톱을 보며 흘깃 웃고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누가 누구를 끝장낼지는 두고 봐야겠지.”그녀는 나를 향한 증오로 눈빛을 번뜩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경기는 더욱 치열해졌고 두 선수는 열 번이 넘는 랠리를 주고받으며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나는 화면을 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진짜 멋지다. 이
조나연은 갑자기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녀의 반응이 너무 빨라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너 왜 그렇게 겁먹어? 나 그냥 리모컨 가져가려고 했던 건데.”리모컨을 손에 들며 웃자 그녀의 얼굴은 금세 빨개졌다가 창백해졌다. 나는 리모컨으로 TV를 다시 켜고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화면 속에서는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점수는 8대 8, 이제 단 두 점만 더 따면 승부가 결정될 상황이었다.“나가!”조나연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리모컨을 들어 그녀를 가리키며 태연히 말했다.“조용히 좀 해. 경기 끝나면 얘기하자고.”사실, 그녀를 약 올리려는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나는 정말로 경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스포츠 팬이라면 알 것이다. 이런 명승부는 놓치면 평생 아쉬움이 남는 법이다.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내기할래?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아? 맞추면 네 조건 하나 들어줄게. 뭐든지.”내 제안에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진짜야?”“믿기 힘들면 녹음해도 돼.”마침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한 점을 내주며 9대 8로 뒤처졌다. 나는 흘낏 그녀를 보며 말했다.“빨리 골라. 지금 아니면 기회 없어.”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포츠에 관심 없고 화장품이나 연예인을 더 좋아하는 그녀였다.그러는 사이,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멋진 리턴으로 다시 9대 9 동점을 만들었다. 경기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긴장감이 감돌았다.“2 점 남았어. 이제 정말 끝나가. 선택할 거면 빨리해.”나는 재촉하며 말했다. 그 순간 상대 팀 선수가 작전 타임을 요청하며 경기가 잠시 멈췄다.휴식 시간은 단 1분.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기회 줄 테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봐.”조나연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너, 그냥 나랑 얘기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이런 시시한 경기로 뭘 어쩌겠다고.”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 말했다.“기회 줬는데 네가 안 잡은 거잖아. 그럼 됐어.”그리고 다시
나는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화면은 다시 경기장으로 바뀌었고 상대 팀의 공이 살짝 빗나가자 환호성이 터졌다. 내가 응원하던 선수가 라켓을 높이 들며 승리를 알렸고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TV에서는 승리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나는 의자를 돌려 조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겼네.”조나연은 내 말을 무시하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경기도 다 봤으면 이제 할 말 해봐. 왜 왔어?”나는 발로 바닥을 밀며 의자를 그녀 앞으로 당겼다. 다리를 꼬며 앉자 어젯밤 안리영과 구 교수와의 저녁 자리에서 입었던 검정 실크 치마의 트임이 자연스레 올라가 허벅지가 드러났다.내 피부는 원래도 하얗지만 검은 치마와 대조되며 더 환히 빛났다. 조나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다리에 멈췄다. 그녀 역시 피부가 좋은 편이었지만 내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부러움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이런 부러움을 느낀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그녀는 이런 자신감을 한동안 잃었을 것이다. 게다가 내 허벅지에 희미하게 남은 흔적이 더욱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 모양이었다.그 흔적은 진정우가 남긴 것이었다. 자세히 본다면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을지 한 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조나연 같은 경험 많은 여자는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금세 분노로 물들었다.“이런 걸 자랑하려고 온 거야? 설마 그 자국 강유형이 남긴 거 아니겠지?”조나연의 말은 독살스러웠지만 나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넌 네 남편 곁에 누워서 다른 남자 생각하는 스타일이잖아. 날 네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내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너도 마찬가지잖아. 강유형이랑 십 년을 자다가 이제 지겨워서 다른 남자를 찾은 거잖아.”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게 전혀 놀랍지 않았다. 사실, 나와 강유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만약 내가 강유형과 한 번도 그
“뭐 하는 거야? 핸드폰 내놔!”조나연이 소리치며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그녀의 반응은 분명히 심상치 않았고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게 느껴졌다.나는 더욱 궁금해졌고 핸드폰을 그녀에게 내주지 않으며 피했다.그러는 사이 전화는 이미 연결되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화를 끊었는데 왜 다시 걸죠?”그 목소리는… 소희연이었다.잠시 멍해졌다가 모든 게 한순간에 이해되었다.소희연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이렇게 비열한 수를 쓰다니.“소 교수님, 이제 산부인과도 관여하시나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나는 한 손으로 조나연의 시도를 막으며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왜 아무 말도 없으세요, 희연 교수님?”그러자 전화는 바로 끊겼다. 소희연은 자신이 들켰다는 걸 알고 도망친 것이다.조나연은 핸드폰을 다시 빼앗으려 하면서 손톱으로 내 손등을 긁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손등을 타고 번졌고 나는 화를 꾹 참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진짜 미친 거 아니야? 핸드폰 내놔!”나는 피가 스며 나오는 손등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녀와 소희연이 공모했다는 사실이 분노를 끌어올렸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한 발을 들어 그녀를 찼다.조나연은 침대 가장자리로 나가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나는 그녀 앞에 반쯤 쪼그려 앉아 차갑게 말했다.“소희연이 너한테 얼마를 준 거야? 그렇게 돈이 필요했어? 돈 몇 푼에 사람 목숨까지 해치려고 해? 네 양심은 어디에 팔아먹었어?”조나연은 침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나는 그녀가 정말 아픈 건지, 아니면 동정을 얻으려는 건지 상관하지 않고 단호하게 경고했다.“내가 경고할게. 더 이상 내 사람 건드리지 마. 그리고 네 뒤에 있는 그 사람에게도 전해. 걔가 한 짓은 내가 전부 폭로할 거라고.”조나연은 나를 붙잡
내 말에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똑똑한 여자네. 다음 생에선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를...”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일어섰고 나는 몸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며 그가 신발을 신고 있는 곳으로 거의 쓰러질 뻔했다.용진표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막았고 대신 나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이제 사실을 다 알았으니 뭘 더 하고 싶어? 내가 널 풀어줄까?”나는 그가 날 풀어주길 원했고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대표님이 말한 내용이 믿기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대표님이랑 저랑 삼촌과 셋이서 마주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삼촌에게 전화라도 해서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세요”이 말은 진심이었고 또한 나는 사실 시간을 끌고 싶었다. 시간을 끌어서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누가 나를 구하러 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용진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그를 붙잡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나를 무시하고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끌려 나갔다.용진표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혔고 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그동안 삼촌과 아줌마한테 받은 친절이 정말 진심이 아니었던 걸까? 그들이 나를 잘 대해준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강유형을 살릴 수 있는 피가 있어서?’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십 년 동안 변함없이 잘해줬고 그게 가짜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그러니 아마 용진표가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왜 나를 속여야 하는 걸까? 내가 삼촌과 아줌마를 미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하지만 용진표는 지금 날 죽이겠다고 했으니 내가 그들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렇게 나는 앉아서 고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밖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나를 지키는 사람도 없어진 것 같았다.‘용진표가 나를 굶겨 죽일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내 얼굴을 응시하던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그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마치 그가 나한테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그가 웃음을 멈추고 나서 말했다.“그러면 너한테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고 죽일게. 왜냐하면 네 부모님이 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으니까.”그 말에 나는 바로 그와 계약하려던 그 계약서를 떠올렸다.“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다고요? 그게 왜 제 부모님과 상관이 있나요?”나는 다시 의문을 제기했고 용진표는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잊었어?”그 말에 나는 깨달았다. 그도 다른 사람한테서 돈을 받았다는 뜻이었다.“그 사람이 누구죠?”나는 급히 물었지만 용진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에게 되물었다.“네 생각에는 누구일 것 같아?”내 부모님의 죽음은 결국 그 계약 때문이었고 그 계약은 결국 삼촌에게 넘어갔으니...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전에도 한 번 의심은 했었지만 용진표는 그 의심을 지워버렸고 심지어 삼촌이 그 계약으로 번 돈을 나에게 따로 저금해 두었다고까지 했다.지금 그가 이렇게 암시하자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용 대표님, 나이가 드셔서 기억이 잘 안 나세요? 예전에 대표님은 저에게...“내 말투는 점점 자신감이 없어 보였고 그는 줄곧 웃고 있었다. 용진표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대신 일을 처리해 준다고 했으니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일 수는 없었다.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싫었지만 용진표가 계속해서 그런 걸 암시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남의 돈 받고 일을 하시는 거 맞죠?”내가 다시 묻자 용진표는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이 맞았어. 네가 이렇게 똑똑한데...”그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워졌고 몸을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믿을 수 없어요. 대표님이 저를 속이고 있는 거겠죠.”“내가 너를 부모님에게 보내 주려고 하는데 왜 굳이 널 속이겠어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함소은이 말했다. “용진표의 아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 용진표가 지원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죠.”“뭐라고요?”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갑자기 나는 함소은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몸이 뜨는 느낌이 들었고 귀에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 자고 있어요.”나는 왜 자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내 몸이 들어 올려지는 걸 느꼈지만 나는 눈은 뜨지 못했고 말도 할 수 없었다.어디론가 데려가졌고 그곳에서 물을 먹은 후 나는 눈을 떴다.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큰 남자였고 그가 바로 용진표의 경호원이었다.의식이 흐릿해지기 전에 함소은이 말한 내용을 떠올렸고 나는 이제 모든 걸 알았다.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며 그에게 물었다.“용진표는 어디 있어?”그 사람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나는 손과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곳은 폐차장이었고 주변에 낡은 타이어들이 쌓여 있었다.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용진표가 나를 잡아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그는 아마 내가 그가 한 일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내 몸까지 묶었으니 나한테 별로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막심한 공포가 밀려왔지만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밖에는 용진표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내가 물을 마시고 깨어났으니 이제 아마 용진표가 올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고 경호원이 형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갇혀 있는 문이 열리자 용진표가 들어왔다. 그는 오늘 마치 무술 도복 같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아가씨, 또 만났네.”용진표가 웃으며 말하자 나는 겁먹지 않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마음에 들지 않으면 왜 날 자꾸 자극한 거야?”그가 내 앞에 서자 경호원은 의자
“진정우 씨.” 나는 평범한 동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 순간 내 얼굴에 있는 미소가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회사 차를 몰고 함소은이 말한 곳으로 갔다.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함소은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열었고 그때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스크롤을 위로 올려보니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는 거의 다 자책과 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정우를 변호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나는 딱 한 번만 답을 보냈고 그 후에는 다시 답하지 않았다.[언니, 보면 답장해 줘. 오빠가 나를 방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해요.]진소영의 메시지를 보고 한참 생각한 후에야 나는 그녀에게 답을 보냈다.[소영아, 나는 괜찮고 이젠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있어. 그리고 나랑 네 오빠 사이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그러자 그녀는 바로 답을 보냈다. [언니, 오빠는 언니를 정말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맹세해요.]나는 답하지 않았고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오빠가 언니에게 죽을 끓여줄 때 정신이 없어서 팔까지 데었어요.]그 메시지를 보자 나는 그가 버린 죽을 떠올리며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오빠가 언니한테 죽을 가져가고 돌아와서 잠도 자지 않고 창문 앞에 서 있었어요. 담배도 피웠고요.] [언니, 나는 언니와 오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언니, 오빠한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돼요?][언니와 오빠가 이렇게 지내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난 평생 혼자 살아도 괜찮으니 그냥 언니 오빠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웃음을 지었고 동시에 진소영이 소지훈에 대한 짝사랑을 떠올렸다.나는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소지훈이 너한테 연락했어?][아니요!]진소영은 눈물 나는 이모티콘을 덧붙
나는 숨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과 마주쳤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정직하고 대범하게 대했지만 나는 항상 마음이 불안했다. 마치 헤어진 게 딱 내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호랑이도 자기 말하면 온다더니... 정우 씨, 방금 윤 부장님과 정우 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허진호는 능글맞게 말을 이어갔지만 진정우는 그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네.”“정우 씨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허진호는 정말 끝내주는 재치로 우리를 괴롭혔다. 진정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고 허진호는 코를 문지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정우 씨가 살이 빠졌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던가...”허진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윤 부장님, 정우 씨에게 알려주지 말자고요.”“하하.”나는 속으로 찐웃음이 터져 나와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고 진정우가 딱 그 순간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시선을 돌렸다.그가 나를 원하지 않았기에 나도 진정우 없이 잘 살 수 있는 모습을 증명하고 싶었다.점심때, 나는 항상 전화를 걸지 말지 고민했던 함소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가 용진표랑 함께 있어서 불편할까 봐 전화하지 않았다.“어떻게 됐어요? 괜찮아요?”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오늘은 잘 피했어요.”함소은이 가볍게 말했다.그녀가 어떻게 피했는지 묻지 않았다. 이 여자는 용진표의 곁에서 몇 년이나 보내면서도 여전히 복수를 품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라면 그만큼 능수능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그녀가 단지 외모를 과시하는 여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그럼 다른 이유로 저한테 전화한 거예요?”“지원 씨가 찾으라고 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래서 직접 만나보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나는 예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조금 놀랐고 이내 흥분해서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직접 만나고 싶어요
“쫓아갈 거야?”나는 쫓아가서 꼭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도시락을 보니 더 이상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가 버린 것은 도시락도 음식도 아닌 나에 대한 마음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쫓아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굴욕을 찾는 일이었다.나는 마음을 되돌리고 도시락을 다시 내려놓고 내 병상으로 돌아갔으나 이제는 젓가락을 다시 들고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도시락을 주운 사람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다시 내 앞에 놓았다.“가져가세요.”“아, 아니에요...”그 사람은 손을 움켜잡으며 물러섰다.“당신이 주운 거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게다가 시름 놓고 드시면 돼요. 맛은 있을 거예요.”나는 한숨을 쉬며 음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런데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강유형은 옆에서 음식을 먹으려는 내 손을 살짝 눌렀다.“내 음식한테 화내지 마.”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아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보고 떠난 거 같아.”그 말에 나는 잠시 멈췄다. 방금 강유형이 내 입술 옆을 닦아준 걸 생각하니 마음이아팠다.‘아, 이거 정말... 오해는 점점 더 깊어만 지는구나.’내가 잠시 멍하니 있을 때 강유형은 내가 먹던 음식을 쥐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치웠다. 그리고 도시락을 손에 쥐고 나가려 했다.그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지원아, 유형이 너한테 음식을 가져왔을 때 별문제 없었지?”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아,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유형의 입가에 상처가 있더라고. 싸운 거 같아서...”아줌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강유형이 나가서 진정우랑 싸운 거 아니야?’하지만 난 결국에 이 말을 내뱉지 않았고 아줌마는 또 몇 마디 했고 마지막으로 만두랑 음식이 맛이 어떤지 물었다.전화가 끊기자 나는 병원을 떠났다.다음 날 나는 회사에 갔고 마침 약속이
“잠깐만.”내 말을 들은 강유형은 재빠르게 일어섰다.지금의 그는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언제든지 응해주고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렸다.만약 예전에도 이렇게 했다면 아마 난 강유형과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만일이라는 건 없었고 나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봤다. 화면이 멈춰 있었는데 그 영상 속에는 아마 3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나는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왜 그런 영상을 찍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휴대폰을 빼앗아 보고 싶었지만 또 그럴 수는 없어서 고민하던 그 순간 강유형이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그는 내가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잠드는 동안 예전 사진과 영상을 좀 봤는데 지금 넌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더라.”나는 물을 마시며 그가 한 말에 이어서 대답했다.“그러면 예전엔 내가 안 예뻤다는 거네? 그래서 네가...”“그만해.”그가 내 말을 끊었다.“그 사람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마.”물 몇 모금 마시자 나는 목이 좀 편해졌다.“조나연 그 일은 이제 다 정리한 거야?”나는 젓가락으로 목이버섯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 물었고 그 상큼하고 새콤한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강유형은 휴대폰을 다시 들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 화면을 보고 있었고 나도 그저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좀 더 먹으려던 찰나 강유형이 입을 열었다.“완전히 깨끗하게 끝냈어.”그 말에 나는 조금 더 생각했다. 그때 그 여자가 남긴 독한 말들을 떠올리며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강유형이 이렇게 말하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다시 음식을 먹을 준비를 했다.“알겠어.”“잠시만.”그때 강유형이 나를 막아 나서면서 손으로 내 입술 옆에 묻은 기름을 닦아 주었다.“기름이 묻어서.”나는 입술
강유형은 결국 강진혁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그건 직접 물어봐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에게도 마음이 없어.”그러자 강유형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너무 자주 말하지 않아도 돼.”“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나는 말을 마친 후 기침을 두 번 했고 그러자 강유형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진정우는 네가 사고를 당한 걸 몰랐어?”강진혁의 말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컵 안에 있는 뜨거운 물의 온기가 몸의 차가움을 녹여주었지만 마음속의 차가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왔었어. 그리고 다시 갔어.”강유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는 물컵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나 좀 자고 싶어.”내가 눕자 강유형은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열이 나서 눈꺼풀이 무겁고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다.“나와 헤어질 때는 네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뭐라고 하는 거야?’사실 맞는 말이었다. 강유형과 헤어질 때 지금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없었다.“아마 너는 천천히 칼날로 내 마음을 줄곧 찔렀기 때문에 난 아픔에 익숙해졌겠지.”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뒤로 돌아누웠고 결국 깊은 잠에 빠졌다.나는 밥 냄새에 잠이 깼다. 눈을 떴을 때 강유형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에 몰입한 듯 내가 깬 줄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침대 옆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며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몸의 상처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냉큼 숨을 쉬었다.강유형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깨어났어? 나한테 말하지.”“배가 고파.”나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말했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네가 배고플 줄 알았어. 예전처럼 감기나 열이 나면 깨자마자 먹는 게 첫 번째잖아.”듣고 보니 난 확실히 그랬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입맛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배가 고팠다.
옆에 있던 강진혁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방금 그가 내가 머리를 만져준다고 했을 때 난 바로 피했고 강유형이 나를 만졌을 땐 나는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라고 해도 그 상황이면 서운했을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강진혁은 별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넌 아직도 강유형의 친밀한 행동에 익숙한 거 같아.”“......”“그건 당연한 소리지. 지원이는 거의 내 아내가 될 뻔했으니까.”“......”“맞아. 거의였지.”강유형은 강진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표정이 가득했다.“아무래도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아.”강유형은 말을 끝내며 지나가는 간호사를 불렀다.“체온계 좀 줘봐요.”“괜찮아. 아마도...”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끊었다.“괜찮은 건지는 그건 네가 스스로 판단할 일이 아니야.”강유형의 말에 간호사는 바로 체온계를 가져와 내 이마에 대었다.“37.7도입니다.”그러자 강유형은 간호사에게 말했다.“의사에게 상황을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감염인지 아니면 그냥 물에 젖어서 감기가 온 건지 확인해 주세요.”강유형은 정말 전문가처럼 말을 이어갔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사인 줄 알겠네.’간호사는 대답하고는 떠났고 강진혁은 나에게 따뜻한 물을 부어줬다.“따뜻한 물이라도 마셔. 아마 그냥 몸이 얼어서 그런 거 같아.”두 형제가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다.나는 그들이 그만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강유형은 이미 먼저 말했다.“형, 아니면 먼저 돌아가. 내일 선보러 간다고 했잖아?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피부에 안 좋아.”“오빠, 선보는 거예요? 방금 왜 말을 안 했어요?”나는 조금 놀랐고 강진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말할 새도 없이 강유형이 와서 방해했으니까.”이 말의 의미는 강유형이 우리 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