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혁은 내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붉어졌다.“온순하다고? 그런 말로 사람을 모욕하지 마. 우리 일은 이미 끝났어, 더 이상 끄집어내지 말라고!”그가 화난 기색을 숨기면서도 참으려는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나는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얼른 한발 물러서며 팔짱을 끼고 마치 내가 덮칠 것처럼 몸을 방어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피식 웃음이 났다.“뭐가 그렇게 무서워? 내가 너한테 뭐라도 할까 봐? 이렇게 쩔쩔매는 너를 보니까, 왜 갑자기 이렇게 얌전해졌는지 더 궁금해지네.”“얌전한 게 싫어? 설마 내가 누나한테 다시...”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고개를 저었다.“제발 그만 좀 해. 다 끝난 일이야. 그리고 더 다가오지 마. 아니면 촬영해서 증거로 남길 거야.”나는 조태혁이 겁먹은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솔직히 말해봐. 강진혁이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너를 이렇게 얌전하게 만들었는지.”그는 갑자기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비켜 줘. 나 지금 바빠.”나는 일부러 그의 앞에 다리를 쭉 뻗어 길을 막았다.“모르는 척하지 마. 너 지금 강진혁 밑에서 일하는 거잖아. 아니면 네가 네 친누나까지 팔아넘길 리가 없잖아?”그 말에 조태혁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나는 그의 몸 위아래를 쓱 훑어보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입고 있는 이 옷들, 전부 비싼 브랜드네? 예전에는 네 누나가 강유형 카드를 긁어댔으니 이해했지만 지금은 그런 호사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럼 이건 뭐야? 강진혁이 사준 거?”조태혁은 침묵하며 얼굴을 돌렸다. 나는 그의 입을 막은 사람이 강진혁일 거라고 확신하며 비웃었다.“조태혁, 너 예전에 나한테 했던 짓들? 솔직히 별로 신경도 안 써. 그냥 철없는 애가 심심해서 장난친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나는 일부러 말을 끊으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네 누나까지 팔아넘겼다는 건 정말 최악이다.”내 말에 조태혁의 눈이 불타오르듯 붉어지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한
나는 여전히 TV 속 탁구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두 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벌이는 치열한 대결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웠다.공이 오고 가는 멋진 랠리를 감상하며 나는 조나연에게 물었다.“이 경기, 누가 이길 것 같아?”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네가 감히 여길 왜 온 거야?”나는 그녀의 병상 옆에 놓인 의자를 당겨 앉으며 무심히 대꾸했다.“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니야?”사실 그녀가 안리영을 고소한 것도, 결국 나를 겨냥한 거였다.“네가 와도 소용없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내가 직접 당하는 것보다 더 아프게 만들어주겠어.”조나연은 이제 가식조차 벗어던지고 노골적으로 독설을 퍼부었다.그 순간,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성공시키며 한 세트를 따냈다. 관중들의 환호가 들렸고 나도 자연스레 TV에서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조나연의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푸르스름했다. 살이 빠져 초췌해진 모습은 한눈에도 안쓰러워 보였다.“내가 무슨 대가를 치를진 모르겠지만 넌... 요즘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손대지 마!”그녀는 경계심에 찬 눈빛으로 몸을 움츠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왜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순간, 어젯밤 진정우가 장난스럽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내일 손톱 좀 다듬어줄게.’그 말이 떠오르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윤지원, 차라리 날 죽여.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널 끝장낼 거야.”조나연은 이를 악물고 위협했다. 나는 손톱을 보며 흘깃 웃고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누가 누구를 끝장낼지는 두고 봐야겠지.”그녀는 나를 향한 증오로 눈빛을 번뜩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경기는 더욱 치열해졌고 두 선수는 열 번이 넘는 랠리를 주고받으며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나는 화면을 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진짜 멋지다. 이
조나연은 갑자기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녀의 반응이 너무 빨라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너 왜 그렇게 겁먹어? 나 그냥 리모컨 가져가려고 했던 건데.”리모컨을 손에 들며 웃자 그녀의 얼굴은 금세 빨개졌다가 창백해졌다. 나는 리모컨으로 TV를 다시 켜고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화면 속에서는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점수는 8대 8, 이제 단 두 점만 더 따면 승부가 결정될 상황이었다.“나가!”조나연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리모컨을 들어 그녀를 가리키며 태연히 말했다.“조용히 좀 해. 경기 끝나면 얘기하자고.”사실, 그녀를 약 올리려는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나는 정말로 경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스포츠 팬이라면 알 것이다. 이런 명승부는 놓치면 평생 아쉬움이 남는 법이다.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내기할래?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아? 맞추면 네 조건 하나 들어줄게. 뭐든지.”내 제안에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진짜야?”“믿기 힘들면 녹음해도 돼.”마침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한 점을 내주며 9대 8로 뒤처졌다. 나는 흘낏 그녀를 보며 말했다.“빨리 골라. 지금 아니면 기회 없어.”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포츠에 관심 없고 화장품이나 연예인을 더 좋아하는 그녀였다.그러는 사이,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멋진 리턴으로 다시 9대 9 동점을 만들었다. 경기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긴장감이 감돌았다.“2 점 남았어. 이제 정말 끝나가. 선택할 거면 빨리해.”나는 재촉하며 말했다. 그 순간 상대 팀 선수가 작전 타임을 요청하며 경기가 잠시 멈췄다.휴식 시간은 단 1분.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기회 줄 테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봐.”조나연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너, 그냥 나랑 얘기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이런 시시한 경기로 뭘 어쩌겠다고.”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 말했다.“기회 줬는데 네가 안 잡은 거잖아. 그럼 됐어.”그리고 다시
나는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화면은 다시 경기장으로 바뀌었고 상대 팀의 공이 살짝 빗나가자 환호성이 터졌다. 내가 응원하던 선수가 라켓을 높이 들며 승리를 알렸고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TV에서는 승리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나는 의자를 돌려 조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겼네.”조나연은 내 말을 무시하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경기도 다 봤으면 이제 할 말 해봐. 왜 왔어?”나는 발로 바닥을 밀며 의자를 그녀 앞으로 당겼다. 다리를 꼬며 앉자 어젯밤 안리영과 구 교수와의 저녁 자리에서 입었던 검정 실크 치마의 트임이 자연스레 올라가 허벅지가 드러났다.내 피부는 원래도 하얗지만 검은 치마와 대조되며 더 환히 빛났다. 조나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다리에 멈췄다. 그녀 역시 피부가 좋은 편이었지만 내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부러움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이런 부러움을 느낀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그녀는 이런 자신감을 한동안 잃었을 것이다. 게다가 내 허벅지에 희미하게 남은 흔적이 더욱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 모양이었다.그 흔적은 진정우가 남긴 것이었다. 자세히 본다면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을지 한 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조나연 같은 경험 많은 여자는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금세 분노로 물들었다.“이런 걸 자랑하려고 온 거야? 설마 그 자국 강유형이 남긴 거 아니겠지?”조나연의 말은 독살스러웠지만 나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넌 네 남편 곁에 누워서 다른 남자 생각하는 스타일이잖아. 날 네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내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너도 마찬가지잖아. 강유형이랑 십 년을 자다가 이제 지겨워서 다른 남자를 찾은 거잖아.”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게 전혀 놀랍지 않았다. 사실, 나와 강유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만약 내가 강유형과 한 번도 그
“뭐 하는 거야? 핸드폰 내놔!”조나연이 소리치며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그녀의 반응은 분명히 심상치 않았고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게 느껴졌다.나는 더욱 궁금해졌고 핸드폰을 그녀에게 내주지 않으며 피했다.그러는 사이 전화는 이미 연결되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화를 끊었는데 왜 다시 걸죠?”그 목소리는… 소희연이었다.잠시 멍해졌다가 모든 게 한순간에 이해되었다.소희연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이렇게 비열한 수를 쓰다니.“소 교수님, 이제 산부인과도 관여하시나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나는 한 손으로 조나연의 시도를 막으며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왜 아무 말도 없으세요, 희연 교수님?”그러자 전화는 바로 끊겼다. 소희연은 자신이 들켰다는 걸 알고 도망친 것이다.조나연은 핸드폰을 다시 빼앗으려 하면서 손톱으로 내 손등을 긁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손등을 타고 번졌고 나는 화를 꾹 참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진짜 미친 거 아니야? 핸드폰 내놔!”나는 피가 스며 나오는 손등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녀와 소희연이 공모했다는 사실이 분노를 끌어올렸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한 발을 들어 그녀를 찼다.조나연은 침대 가장자리로 나가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나는 그녀 앞에 반쯤 쪼그려 앉아 차갑게 말했다.“소희연이 너한테 얼마를 준 거야? 그렇게 돈이 필요했어? 돈 몇 푼에 사람 목숨까지 해치려고 해? 네 양심은 어디에 팔아먹었어?”조나연은 침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나는 그녀가 정말 아픈 건지, 아니면 동정을 얻으려는 건지 상관하지 않고 단호하게 경고했다.“내가 경고할게. 더 이상 내 사람 건드리지 마. 그리고 네 뒤에 있는 그 사람에게도 전해. 걔가 한 짓은 내가 전부 폭로할 거라고.”조나연은 나를 붙잡
“놀이공원을 달라고?”나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미친 여자가 정말 착각하고 있나?’“안 돼.”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왜 안 된다는 건데?”조나연이 이유를 따지며 물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내 침묵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했다.“강유형이 준 거라 그런 거야?”‘혼자만의 상상이 참 대단하네’“그날 개장식에서 삼촌이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나는 담담하게 그날의 일을 다시 짚어 말했다.“그건 그냥 사람들 입을 가리려는 말이겠지.”조나연은 비웃으며 받아쳤다. 더는 그녀와 말싸움을 이어갈 가치가 없었다.“그래, 그럼 네가 놀이공원을 가지려는 이유가 뭐야?”“돈이 되잖아. 그걸 갖게 되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그녀의 대답은 현실적으로 들렸지만 왠지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조나연, 진심을 말하지 않으면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줘야 하겠어?”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정말 진심으로 말해도 돼?”나는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자 그녀가 다급히 내 팔을 붙잡았다.“솔직히 말할게. 네 걸 뺏고 싶어서.”그녀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지만 동시에 우스꽝스러웠다.“왜?”나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우린 과거에 만난 적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 그런데 왜 굳이 내 걸 뺏고 싶은 건데?”조나연은 씁쓸하게 웃었다.“역시 넌 기억도 못 하겠지.”“뭘 기억 못 한다는 거야?”내가 묻자 그녀는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학교 다닐 때 넌 참 잘 나갔지. 상도 많이 받고. 혹시 기억나?”나는 솔직히 그녀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너, 예전에 토론 대회 나갔었지? 네 팀이 우승했고 너는 최고 토론상을 받았잖아. 주제는 ‘공과 사’였던 것 같은데. 나도 그 대회에 참가했었어.”그녀는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고 나도 그녀가 말하는 대회는 어렴풋이 기억났다. 하지만 워낙 많은 대회에 나갔던 터라 특별히 기억에 남진 않았다
“끝까지 가보자고?”조나연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자기 남편의 목숨까지 도구로 쓸 수 있는 여자가 남의 인생은 뭐 대수겠어?’그녀는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경계해야 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말을 끝낸 뒤 나는 다리를 휙 들어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병실을 나섰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 문득 그녀의 무리한 행동으로 세상에 일찍 태어난 그 아이가 떠올랐다.그래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냉정하게 한마디를 던졌다.“조나연, 네가 사람이라면 네가 낳은 아이에게 얼굴이라도 비춰. 적어도 그 애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내 말을 들은 그녀는 멈칫했지만 나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나는 안리영의 휴게실로 향했다. 약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그녀가 들어왔다.“왜 아직도 안 갔어?”그녀는 웃으며 물었다.“괜히 딴소리하지 마. 원장은 뭐래?”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냥 보고서 하나 쓰고 조사에 협조하래. 별거 없었어.”그녀는 물을 따르며 태연하게 말했다.“근데 넌 조나연하고는 잘 해결했어?”나는 소희연과 조나연의 연루된 상황이 떠올라 곧장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넌 조나연이 왜 널 건드린다고 생각해?”안리영은 물 한 잔을 내밀며 말했다.“미친개처럼 물어대는 거겠지.”그녀는 일부러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대답했다.“그럼 왜 하필 너일까?”나는 그녀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길 바라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나를 이용해 너를 겨냥하려는 거겠지.”“그게 전부일까?”나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러자 안리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지원아, 너 지금 뭘 알고 있는 거야? 아니면 조나연한테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거야?”“조나연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네 커리어를 망치고 타격을 주려는 거겠지. 물론 나를 겨냥한 복수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나는 안리영의 계획을 곰곰이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네가 이렇게 떠나면 원장님도 좀 당황하시겠네. 너 지금 우리 해동 산부인과의 최고 실력자잖아.”“맞아.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거야. 어쩌면 이번 기회에 부원장 자리 하나 받을지도 모르지.”안리영의 욕심은 사실 별거 없었다. 나는 그녀의 용감함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감탄했다.“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상처를 주려고 해도 넌 그걸 기회로 만들어 더 빛나는 사람이 되는구나.”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내 핸드폰을 가리키며 말했다.“네 VIP 계정으로 비행기 표 하나 예약해 줘.”진짜 ‘산부인과의 명의’답게 계획을 세우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었다.나는 바로 그녀를 위해 당일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약했다. 그리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어 짐을 챙길 시간을 줬다.공항으로 가는 길,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근데 원장님이 너 조사받아야 한다고 했잖아. 이러고 가버리면 괜찮아?”안리영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이제 와서 그걸 묻는다고? 늦지 않아?”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너답네.”“모든 수술 과정은 기록에 남아 있고 영상도 있고 가족과의 대화도 다 문서로 남아 있어. 조사할 게 있으면 그들이 알아서 하면 되지. 내가 남아서 뭐 하겠어?”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굳이 남아 있어봤자 안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더 기세를 부릴 뿐이었다.“근데 구 교수한테는 미리 말 안 해도 돼? 너 바로 따라가면 깜짝 놀랄걸?”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그녀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돌발 검사를 하려는 거지. 혹시 구 교수와 소희연이 몰래 무슨 짓이라도 하고 있을지 모르잖아.”그녀의 대답에 나는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그럼 너 구 교수를 못 믿는 거야?”“그게 아니라, 사람의 본성을 믿지 않는 거지. 고양이가 생선을 안 훔쳐 먹는 걸 본 적 있어?”역시 사람의 본성과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의사다운 대답이었다. 안리영은 직접 겪은 일이 아니어도 사
유정철은 물을 내려놓고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을 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건 우리 가족 사진인데 이제 그 사진 속 사람 중엔 나밖에 남지 않았어.” 유정철은 조용히 말하며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가족 사진?” 나는 중얼거리며 빨간 옷을 입은 작은 소녀를 가리켰다. “이 소녀도 아저씨 가족분인가요?”“응, 맞아. 저건 내 여동생이야. 그때 그녀는 겨우 두 살이었지.” 유정철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다.“이분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나는 숨이 갑자기 가빠졌다. 마음속에서 ’혹시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유정철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이때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아저씨...”“그날 여동생은 사라졌어. 바로 그 사진을 찍은 날이었지.” 유정철의 말에 내 심장이 급격히 빨라졌다.“어떻게 사라졌나요?” 나는 본능적으로 유정철의 옷자락을 잡았다.유정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날을 되새겼고 사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은 그날 사진을 찍고 굉장히 기뻐했지. 그들은 사진관에서 만든 키링를 목걸이로 바꿔 여동생에게 선물했어. 그리고 우리를 놀이공원에 데려갔고... 여동생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데려갔는데 엄마가 화장실에서 기절하고 나니 여동생은 사라졌어...” 유정철의 말이 끝날 때, 내 가슴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막히는 기분이었다.“그 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나요?” 나는 목이 타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찾았지. 우리 가족은 미친 듯이 찾았어. 부모님은 놀이공원에서 하루 종일 지키고 그 후엔 도시 전역을 찾았지. 그리고 나서는 전국을 찾아다녔어. 그러다 엄마는 여동생을 찾지 못한 탓에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했어. 아빠는 엄마 장례를 치르고도 계속해서 찾았는데 그 과정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지...”그 말에 나는 몸이 얼어붙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결국 내 엄마의 실종이 행복한 가정을 이렇게 산산이 부서지게 만든 것이었다.“그럼 더 이상 찾지 않으셨나요?” 나는
“어?” 유정철은 잠시 멈칫하며 신희선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지원아.”“전혀 번거롭지 않아요. 사실 전에 한번 뵈러 가고 싶었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내 핸드폰에는 소지훈이 준 그들의 연락처와 주소가 있었지만 계속해서 가지 못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조금 더 일찍 찾아갔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랬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두려움에 떨며 경찰에 신고하기까지는 안 갔을 것이다.차를 몰고 그들을 집으로 데려다주었고 도중에 그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신희선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그녀는 나를 통해 그들의 딸을 보고 있겠지.그들을 집 앞에 데려다주고 안전을 위해 나는 그들이 집으로 올라갈 때까지 함께 있었다.유정철은 집 입구 구석에 있는 담배꽁초를 가리키며 말했다. “봐, 이 담배꽁초도 그 사람이 피운 거야.”“아저씨, 이건 손대지 마세요. 경찰이 오면 증거로 가져갈 거예요.”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유정철은 문을 열고 내가 들어가도록 했다. 나는 예의상 그렇게 들어갔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라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조금 미안했다.“지원아, 앉아. 내가 마실 거 준비해 줄게.” 유정철이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아저씨, 괜찮아요. 그냥 잠깐 얘기 좀 나눠요.” “안 돼, 기다려. 내가 너에게 직접 꿀 자몽차를 끓여줄게. 희연이가 정말 좋아했었거든. 내가 계속 끓여줬는데 아쉽게도 이제 마실 수 없게 됐네.” 유정철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유정철은 차를 준비하면서 신희선도 함께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마 신희선이 내게 무언가 말하는 걸 막으려 했던 것 같았다.그들이 부엌으로 들어간 후, 유정철이 말했다. “여보, 그 아이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 걔가 무서워할 거야. 진짜 우리 딸 아니야.”“그런데 왜 우리 딸이랑 그렇게 닮았지?” 신희선은 작은 목소리로 중
고개를 들자 손을 맞잡은 한 쌍의 노인 부부가 긴장과 불안이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경찰서 직원 일어나려던 순간 내가 먼저 일어나며 인사했다.“아저씨, 아줌마.”두사람은 유희연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신희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희연아...”“희연이가 아니야.” 유정철은 급히 아내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그러자 신희선 얼굴에 있던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저씨, 아줌마, 뭘 신고하시려고요?”이때 사건 담당자가 다가왔다.“두 분, 신고하시려면 저를 따라오세요.”유정철과 신희선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며칠 전부터 계속 누군가가 우리 집 문을 부수고 다니며 우리가 순순히 하지 않으면 우리의 피를 뽑겠다고 위협했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사건 담당자를 향해 눈길을 돌렸고 그도 미간을 찌푸렸다.“그 사람이 누구죠? 아시나요? 혹시 오래된 앙숙이라도 있나요?”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고 유정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우리는 그 사람을 전혀 모릅니다.”“그 사람이 며칠 동안 괴롭혔나요?” “3, 4일 됐어요” 유정철이 신희선을 바라보았고 신희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형사님,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보호해 드릴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사를 위해 조금 협조해 주세요. 세부 사항을 확실히 알려주세요,” 사건 담당자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저와 함께 갑시다.”유정철은 나를 바라보며 마치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아저씨, 아줌마 먼저 가세요. 제가 다 처리하고 곧 가서 찾아뵐게요.”“그래. 그래.”유정철은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고 그는 분명히 내가 함께 가기를 원했다.사건 담당자는 그들을 다른 방으로 안내하며 동료에게 넘겼고 나는 나머지 서류를 처리한 후 그들을 만나러 갔다. 그들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반복해서 그들을 위협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조나연이 이 직책을 맡기에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박수를 치자 모두 따라 박수를 쳤다.조나연은 내 옆에 서서 사람들의 환호와 놀라운 시선 속에서 점점 더 자신감을 얻어가는 것이 느껴졌다.그녀는 오랫동안 억눌려 왔고 무수히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이제 드디어 정상에 오른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그녀가 느끼는 이 감정이 내가 원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숨겨왔던 분노를 발산하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 감정을 잘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녀가 그 분노를 뚫고 나오도록 해야만 나는 그녀를 내 수단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이제 조 매니저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앞에 세우며 그녀가 받을 경배와 존경을 모두 누리게 만들었다.조나연은 분명히 긴장했지만 야망이 컸고 내가 이미 그녀에게 해준 조언을 따라 차근차근 잘 해냈다.작은 인수인계 의식이 끝난 후, 나는 그녀를 매니저실로 안내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표 자리에 앉았고 그녀는 내 맞은편에 서 있었다.나는 조나연에게 짜릿함도 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그녀를 반복해서 자극하며 결국 그녀가 나를 미워할 정도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녀가 나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다.“조나연, 이제 이 술집을 전적으로 너에게 맡길 거야. 할 수 있겠어? 안 되면 말해, 다른 사람을 찾아서 바꿀 수도 있어.” 나는 내 방식대로 그녀에게 압박을 주었다. 그녀는 이미 사람들 앞에서 말했으니 이제 물러설 수 없을 것이다.“나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야? 내가 말을 취소하고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조나연이 내게 반문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지 않아. 네가 맡기로 했으니 내 원칙을 설명할게.”조나연은 꼿꼿이 내 앞에 서서, 마치 말을 잘 듣는 학생처럼 보였다. 예전의 그녀는 이렇게 겸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세상에서, 돈이야말로 사람에게 자신감을 주는 법이
‘조시언과 안리영 사이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네. 이런 건 놓칠 수 없지.’안리영은 나에게 숨김없이 자신과 구안석이 조시언에게 들킨 일에 대해 털어놨다.“오빠가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것도 삼촌 때문이야.”“하하.” 나는 웃으며 말했다.“구 교수님은 조시언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겠지? 그 사람은 네 작은삼촌인데.”“누가 알겠어, 남자들의 이기심과 소유욕이 강해서 내 주변에서 날아다니는 모기 한 마리도 신경 쓰는 경우가 많거든.”안리영은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그럼 그건 선배가 널 정말 사랑한다는 거지. 엄청 사랑한다는 증거야.”나는 안리영과 구안석이 공항에서 나눈 키스 장면을 떠올리며 말했다.사랑에서의 고통은 죽음으로 인한 이별만 있는 게 아니라, 살아서 서로를 떠나는 이별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안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또 그녀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그나저나, 우리 회사에서 바디 라이트 쇼를 준비 중인데 내가 찾은 남자 모델들이 해동에서 국내 최고 수준이라 연예인보다 훨씬 멋지거든. 눈이 확 트일 거야. 혹시 구경하러 올래?”“바디 라이트 쇼?”안리영이 내게 물었다.“그거, 벌거벗은 거야?”나는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그렇게 하고 싶긴 한데 정부에서 허락 안 해줄걸?”“윤지원, 너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안리영은 장난스럽게 나를 놀렸다.“짧은 인생 먹고 싶은거 먹고 놀고 싶은 걸 놀아야지. 남자는 쓰레기처럼 놀아도 되고 여자는 안돼?”내 말을 듣자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말 맞는 것 같아.”그러더니 웃으면서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윤지원, 이제 너 본색을 드러내는구나.”“내가 예전엔 그렇게 얌전했어?”안리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예전엔 강씨 가문에서 길러진 모범생 같았어. 지금 진짜 너 자신이 된 것 같아.”만약 내가 꽃이라면 예전에는 사람의 손길로 잘 다듬어진 꽃이었다면 지금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자란 야생화가 된 것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도 한동안 잡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래도 조금 나아진 후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서 간단히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공항으로 향했다.허진호가 시간이 촉박하다고 했는데 정말 딱 맞아떨어졌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는 이미 착륙해 있었다.나는 그가 보낸 정보와 사진을 확인하다가 곧바로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키는 180cm가 넘고 검은색 셔츠를 풀어 헤친 채 그 위에 같은 색의 조끼를 걸쳤으며 동일한 컬러의 슬랙스를 입었다. 게다가 거의 연예인 수준의 외모였다.나는 그를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조시언 씨. 저는 해다 그룹의 윤지원입니다. 허 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생기셔서 제가 대신 마중을 나왔어요.”그는 내 시선을 마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시언입니다.”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내 손과 가볍게 악수했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수화물 찾아야 해서요.”“같이 가죠.”나는 그와 함께 수화물 찾는 곳으로 걸어갔고 그곳에서 안리영과 구안석을 마주쳤다.바닥에는 하나의 캐리어가 놓여 있었고 그걸 보자마자 나는 깨달았다.‘구 선배가 떠나는구나...’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손을 맞잡고 묵묵히 수화물 찾는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그 아련한 분위기만으로도 내 가슴이 괜스레 시큰거렸다.수화물 찾는 곳을 1미터 남겨두고 그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마침내, 구안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수화물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안리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구안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걸 알기에 굳이 말을 붙이지 않는 듯했다.“짐 부치고 올게.”구안석이 손을 놓으려는 순간 안리영이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까치발을 들더니 그에게 입을 맞췄다.구지호는 순간 놀랐지만 곧 캐리어를 손에서 놓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공항 한
“남자 모델? 아니, 윤지원 씨, 요즘 무슨 일 꾸미고 계신 거예요? 술집을 사더니 이제는 남자 모델 쇼까지 연다고요?”허진호는 내 말을 듣고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냥 재미로요.”그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파악하려는 듯했다.나는 신경 쓰지 않고 내가 구상한 계획을 설명했다.“우리 회사에서 조명 음악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잖아요. 거기에‘바디 라이트 쇼’ 를 추가하려고 해요. 남자 모델들이 조명을 의상처럼 입고 런웨이를 걷는 형식으로요.”“바디 라이트 쇼?”허진호는 말을 되풀이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와, 윤지원 씨 아이디어 하나는 기가 막히네요.”그 반응을 보자 나는 빙긋 웃으며 바로 응수했다.“허 대표님도 괜찮다고 보시는 거죠? 그럼 바로 진행해 주세요.”하지만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이게 시장에서 옷 한 벌 사 오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디자인도 해야 하고 제작 과정도 필요한데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나는 아무렇지 않게 두 손을 모아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허 대표님이 필요한 거잖아요?”그는 피식 웃으며 단칼에 거절했다.“그렇게 애교 부려도 안 돼요. 이건 현실적으로 힘들어요. 솔직히 진정우 씨가 여기 있었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네요.‘지금 내 심장을 후벼 파겠다는 건가?’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방법을 찾아볼게요.”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나가버렸다.“지원 씨! 잠깐만요!”허진호가 다급히 뒤에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헐레벌떡 따라와 내 앞을 막아섰다.“죄송해요. 괜히 농담했네요. 기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지원 씨가 진짜 하겠다면 제가 도울게요.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가능한 방향으로 알아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허진호가 진심으로 사과하자 나도 웃으며 말했다.“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허 대표님.”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쌓인 업무를 처리하려 했지만 책상 앞에 앉은 지 얼
강진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지원아, 네가 아직 진정우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이렇게 망가뜨리지는 마. 정말 외롭고 힘들다면 날 찾아오면 되잖아.”그의 눈빛은 깊고 표정은 진지했다. 그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조용히 말했다.“진혁 오빠, 저는 오빠랑 강유형이 갈등을 빚는 걸 원하지 않아요. 유형이가 저를 찾아왔어요...”“그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그는 단호하게 말을 끊으며 내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손을 빼내려 했지만 억지로 참아내며 불안한 눈빛을 띄웠다.“오빠도 알잖아요. 부모님도 반대하실 거예요. 그분들도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하지만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난 이미 한 번 널 놓쳤어.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진 않을 거야. 설령 온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넌 내 사람이 될 거야.”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집착과 고집은 너무나도 명확했다.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나는 손을 빼내어 테이블 아래에서 옷에 슬쩍 문질렀다.“하지만 나는 원하지 않아요.”그러자 강진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정말 원하지 않는 거야? 아니면 그냥 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야?”나는 그를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가장 명확한 답변이 된다.강진혁은 몇 초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그래... 내가 너무 조급했나 보네. 네가 날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게.”그는 차분하게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내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지원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난 오랫동안 기다렸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모든 걸 내려놓고 날 온전히 받아들이는 날까지.”그가 말하는 '기다림' 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그가 내게 주는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감정이 불안과 공포로 변하는
조나연이 내 덫에 걸려들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차례였다. 하지만 술집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이곳은 정상 영업을 하고 있고 매출도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런 곳을 누가 쉽게 넘기겠는가?즉,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강씨 가문의 힘을 빌린다면 그럼 이 일은 아주 간단할 것이지만 지금 나는 강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고민 끝에, 나는 허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원 씨가 사장이 되고 싶으면 제 자리 넘겨줄까요?”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허진호가 얼마나 속세에 무심한 사람인지 다시금 실감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저 한테 사장 자리는 필요 없어요. 그냥 술 마실 때 돈 안 내고 마시고 싶을 뿐이에요.”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 돈으로 술을 사 마시면 다음 생까지 마셔도 못 마실걸요?”그는 농담을 던지면서도 진지하게 충고했다.“지원 씨, 충동하지 마세요. 술집을 사는 건 장난이 아니에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장난이 아닌데요. 술집 주인과 연락이 닿을 수 있는지만 알려줘요. 안 되면 다른 사람을 찾을 테니까.”내가 술집을 사려는 건 단순한 충동이 아니고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하지만 허진호에게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용씨 가문을 조사하는 일은 알면 알수록 위험해지는 일이니까.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알았어요. 제가 한 번 시도해 볼게요.”“고마워요, 허 대표님.”그는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잠이 오지 않는 두 번째 날이다. 사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심각한 불면증을 겪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불면증을 앓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그렇게 잠들지 못한 채, 나는 많은 생각을 했고 해야 할 일들도 정리했다.그중 하나는 강진혁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우아한 분위기의 레스토랑.강진혁은 내가 건넨 넥타이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오늘이 내 생일도 아니고 특별한 날도 아닌데?”나는 그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