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가보자고?”조나연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자기 남편의 목숨까지 도구로 쓸 수 있는 여자가 남의 인생은 뭐 대수겠어?’그녀는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경계해야 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말을 끝낸 뒤 나는 다리를 휙 들어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병실을 나섰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 문득 그녀의 무리한 행동으로 세상에 일찍 태어난 그 아이가 떠올랐다.그래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냉정하게 한마디를 던졌다.“조나연, 네가 사람이라면 네가 낳은 아이에게 얼굴이라도 비춰. 적어도 그 애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내 말을 들은 그녀는 멈칫했지만 나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나는 안리영의 휴게실로 향했다. 약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그녀가 들어왔다.“왜 아직도 안 갔어?”그녀는 웃으며 물었다.“괜히 딴소리하지 마. 원장은 뭐래?”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냥 보고서 하나 쓰고 조사에 협조하래. 별거 없었어.”그녀는 물을 따르며 태연하게 말했다.“근데 넌 조나연하고는 잘 해결했어?”나는 소희연과 조나연의 연루된 상황이 떠올라 곧장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넌 조나연이 왜 널 건드린다고 생각해?”안리영은 물 한 잔을 내밀며 말했다.“미친개처럼 물어대는 거겠지.”그녀는 일부러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대답했다.“그럼 왜 하필 너일까?”나는 그녀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길 바라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나를 이용해 너를 겨냥하려는 거겠지.”“그게 전부일까?”나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러자 안리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지원아, 너 지금 뭘 알고 있는 거야? 아니면 조나연한테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거야?”“조나연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네 커리어를 망치고 타격을 주려는 거겠지. 물론 나를 겨냥한 복수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나는 안리영의 계획을 곰곰이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네가 이렇게 떠나면 원장님도 좀 당황하시겠네. 너 지금 우리 해동 산부인과의 최고 실력자잖아.”“맞아.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거야. 어쩌면 이번 기회에 부원장 자리 하나 받을지도 모르지.”안리영의 욕심은 사실 별거 없었다. 나는 그녀의 용감함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감탄했다.“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상처를 주려고 해도 넌 그걸 기회로 만들어 더 빛나는 사람이 되는구나.”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내 핸드폰을 가리키며 말했다.“네 VIP 계정으로 비행기 표 하나 예약해 줘.”진짜 ‘산부인과의 명의’답게 계획을 세우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었다.나는 바로 그녀를 위해 당일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약했다. 그리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어 짐을 챙길 시간을 줬다.공항으로 가는 길,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근데 원장님이 너 조사받아야 한다고 했잖아. 이러고 가버리면 괜찮아?”안리영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이제 와서 그걸 묻는다고? 늦지 않아?”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너답네.”“모든 수술 과정은 기록에 남아 있고 영상도 있고 가족과의 대화도 다 문서로 남아 있어. 조사할 게 있으면 그들이 알아서 하면 되지. 내가 남아서 뭐 하겠어?”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굳이 남아 있어봤자 안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더 기세를 부릴 뿐이었다.“근데 구 교수한테는 미리 말 안 해도 돼? 너 바로 따라가면 깜짝 놀랄걸?”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그녀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돌발 검사를 하려는 거지. 혹시 구 교수와 소희연이 몰래 무슨 짓이라도 하고 있을지 모르잖아.”그녀의 대답에 나는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그럼 너 구 교수를 못 믿는 거야?”“그게 아니라, 사람의 본성을 믿지 않는 거지. 고양이가 생선을 안 훔쳐 먹는 걸 본 적 있어?”역시 사람의 본성과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의사다운 대답이었다. 안리영은 직접 겪은 일이 아니어도 사
강유형의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야?”내 물음에 그의 얼굴은 한층 어두워졌다.“싸움에 휘말렸어.”해외에서, 그것도 중요한 시합을 앞둔 상황에서 싸움이라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지태 오빠가 직접 너한테 연락한 거야?”강유형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니, 지금 구금 상태에 있어.”“구금?”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상황이 안 좋아. 자칫하면 장기 구금도 각오해야 할지도 몰라.”나는 숨이 턱 막혀 아무 말도 못 했다. 내 표정을 읽은 강유형은 차분히 설명했다.“정확한 건 나도 몰라. 지태 팀 동료가 전화로 알려준 거야. 가서 상황을 확인해 봐야 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상황 알게 되면... 연락 좀 해줘.”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물었다.“너도 같이 갈래?”뜻밖의 제안에 나는 당황했다.“지태 팀원이 그러더라. 지금 상태가 안 좋아서 굉장히 예민하고 흥분 상태래. 네가 가면 그를 좀 진정시킬 수 있을 거라고.”신지태는 내게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가족처럼 나를 아껴주던 그를 생각하면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문제는 강유형과 함께 가야 한다는 점이었다.과거, 강유형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지금의 진정우에게 똑같은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먼저 가. 난 짐을 챙기고 바로 갈게.”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짐은 거기서 사도 되잖아.”그의 말은 선을 넘는 듯했다. 내가 짐을 챙긴다는 말은 사실 따로 가겠다는 뜻이었지만 그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그는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이거, 네 거야.”그제야 나는 잊고 있던 여권이 그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과거 우리가 해외여행을 갔을 때 그의 가방에 넣어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나는 여권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주지 않고 멈칫했다.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왜 왔어?”진정우는 손동작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의 뒤로 다가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보고 싶어서.”갑작스러운 애정 표현에 그는 기뻐하기보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빛을 보였다.그는 내 허리를 한번 감더니 나를 그의 무릎 위로 앉혔다.“무슨 일이야?”그의 긴장한 모습에 나는 장난스럽게 그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웃었다.“어떻게 네 눈은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는 거야.”“그러니까 숨기지 마.”나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안리영이 출국했어.”신지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먼저 안리영 얘기를 꺼냈다. 그는 크게 놀라지 않은 듯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높고 잘생긴 콧대를 손끝으로 따라가며 질문을 던졌다.“정우야, 넌 남자니까 잘 알겠지?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에게 매달리는 걸 좋아해?”“안리영 대신 묻는 거야?”그는 내가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만지는 것을 가만히 놔두며 되물었다.“그런 것도 있고 나도 알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여자를 대신해서 묻는 거야.”“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지.”그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그의 콧대를 따라 이마 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며 다시 물었다.“그럼 구 교수 같은 사람은 좋아할까? 아니면 귀찮아할까?”“모르겠어.”그의 솔직함에 익숙한 나는 장난스럽게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그럼 넌 어때?”진정우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네가 얼마나 매달리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응?”그는 내 손가락을 살짝 잡아 자기 이마에 대며 말했다.“넌 어떻게 매달리든 난 괜찮아.”그의 빠른 태도 전환에 웃음이 났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 속에서 진짜 의도를 찾아내려 했다.“그럼 내가 지나치게 매달리면 귀찮아지겠네?”“그게...”그가 변명하려 하자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변명은 필요 없어.”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정말 고집 센 여자 친구네.”“우리 요즘 하루 종일 붙어있잖아. 낮에는 회사에서 같
“가고 싶으면 가. 내 허락이 왜 필요해?”진정우의 반문에 나는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네가 신경 쓸까 봐. 혹시라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해서.”그는 내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날 배려해 준 거였구나.”그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기쁨이 배어 있었다. 내가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행복하게 만든 듯했다.‘역시 남자도 관심받고 싶어 하는 존재구나.’“넌 내 남자 친구잖아. 내가 다른 남자 때문에 너를 뒤로하고 떠난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 남자 친구와 엮이는 게 너한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하고.”나는 솔직하게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내가 받았던 상처들을 진정우에게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우리 조조가 이렇게 날 배려해 주는구나.”진정우의 따뜻한 말에 문득 공항에서 강유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넌 나를 신경 쓴 적이 없었어.’그건 정말 오해였다. 나는 늘 신경 썼지만 강유형은 그걸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었다.“당연하지. 넌 내 남자 친구고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진심은 말로 전해야 한다는 말처럼, 나는 진정우가 내 마음을 오해하지 않길 바랐다.그는 나를 살짝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마주 보았다.“우린 연애 중이지만 각자의 삶이 있잖아.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냥 말해. 내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어.”“그건 아니지.”나는 웃으며 그의 말을 반박했다.“그럼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말하지 않을 거야?”“아니야. 난 항상 네게 말할 거고 네 허락을 받을 거야.”그의 말은 다소 모순적이었지만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진정우, 너 참 불공평하다.”나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남자잖아. 하지만 넌 여자니까. 여자는 더 배려받고 존중받아야 해. 네가 뭘 하든 난 항상 네 편이야.”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어머, 나중에 딸이라도 생기면 완전 딸바보 되는 거 아니야?”그는 목젖을 움직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우
“바보.”진정우는 나를 다독이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네가 말했잖아. 울고 싶을 땐 네 품에서 울라고.”“정말 가도 괜찮아? 강유형이랑 엮일 텐데.”나는 솔직히 그의 마음이 궁금했다.“넌 이미 그 사람과 끝냈잖아. 내가 뭘 질투하겠어. 게다가 나랑 사귀고 나면 다른 남자 눈에 들어오겠어?”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그래, 이제 정말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진정우는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주며 비행기가 뜰 때까지 나를 지켜보았다.휴링턴에 도착한 건 이미 밤이었다. 휴대폰을 켜서 신지태의 소식을 알아보려는데 강유형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어.]순간 당황스러웠다.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정우가 말했을 가능성이 컸다.‘진정우, 정말 자신만만하네. 나를 전 남친에게 맡기다니.’메시지에 답하기보다 진정우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도착했어?”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따뜻했다.“응, 그런데 전 남친이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어.”내가 살짝 장난스럽게 말하자 진정우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걔가 있으면 네가 안전할 것 같아서.”“전 남친한테 나를 맡기는 게 안전하다고?”나는 살짝 비꼬며 물었다.“너무 자신감 넘치는 거 아냐?”“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나머지는 상관없어.”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그리고 난 우리 지원이를 믿어.”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그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지태 오빠 만나고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바로 돌아갈게.”나는 안심시키듯 말했다.“서두르지 말고 갔으니 며칠은 더 있다 와. 그리고 내가 알아본 건데 누가 널 찾아올 수도 있어.”그의 뜻밖의 말에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여기 아는 사람 있어?”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대답했다.“응, 있어.”문득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물었다.“오해하지 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강유형에게 더는 헛된 기대를 심어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무심하게 대답했고 더는 논쟁하고 싶지 않아 나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여기까지 와서 싸우자는 거야?”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말했다.“짐 줘.”나는 별말 없이 짐을 그에게 넘기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우리는 한동안 침묵 속에서 걸었고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태 오빠 상태는 어때? 싸움은 왜 난 거고?”그는 짧게 대답했다.“지금 구금 상태야. 면회는 안 돼.”그의 말에 내 표정이 굳었다.‘그럼 난 뭐 하러 여기까지 온 거지...’나는 신지태가 불안정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온 건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강유형은 내 표정을 살폈는지 바로 덧붙였다.“조율 중이야. 곧 면회 가능할 거야.”나는 살짝 안도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싸움은 왜 난 거야?”그는 침착하게 설명했다.“훈련 중에 생긴 충돌 때문이야. 상대는 티크라는 보조 선수인데 태도가 엉망이었어. 자주 지각하거나 일찍 끝내고 훈련에 집중도 안 했지. 지태가 교체를 요청하자 그가 화를 냈고 말다툼이 심해지다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어.”그의 말을 들으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 사람 많이 다쳤어?”강유형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는데 뒤통수를 심하게 다쳤어. 결국...”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사망한 거야?”나는 숨을 들이쉬며 겨우 물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사망 원인 조사가 진행 중이야. 만약 지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 형량이 줄어들 수도 있어.”나는 만약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살인은 어디서나 무거운 죄로 취급받는 법인데...’강유형은 차분하게 말했다.“최악의 경우를 피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만나보고 있어.”그는 시계를 확인하며 내게 물었다.“저녁 먹었어? 뭐라도 먹자.”“입맛 없어.”신지태 생각에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강유형은 잠시 나를
강유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정말 날 원망하는구나.”“그렇게까지는 아니야.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사실이야. 내 10년을 너한테 낭비했으니까.”이미 이 화제가 시작된 이상,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내 10년은? 윤지원, 나도 널 사랑했고 진심으로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나는 잠시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그건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조나연과 엮인 그 순간, 네가 했던 모든 노력을 스스로 지운 거야.”“죄인도 집행유예나 한 번쯤은 용서받을 기회를 얻잖아. 그런데 왜 나는 그런 기회조차 없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울함이 가득했다.“난 그럴 너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내 단호한 대답과 동시에 음식이 상에 올랐다.강유형은 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내가 먼저 선을 그었다.“이 식사를 계속하고 싶다면 과거 이야기는 하지 마.”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고 결국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는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지만 서로 음식 맛조차 느끼지 못한 채 숟가락만 들었다.식사를 마친 후 그는 나를 호텔로 데려다줬고 내 방은 그의 바로 옆방이었다.방에 들어가기 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태 오빠를 가능한 한 빨리 만나고 싶어.”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이번엔 그의 배려를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가 다시 불렀다.“윤지원, 넌 진정우에 대해 정말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뭐라고?”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대답 대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도대체 무슨 뜻이지? 진정우에 대해 뭘 말하려는 거야?’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진정우에게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휴대폰을 안 들고 있나, 아니면 바쁜 건가?’나는 호텔 방 사진을 찍어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안전하게 도착했어.]하지만 여전히 답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