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가보자고?”조나연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자기 남편의 목숨까지 도구로 쓸 수 있는 여자가 남의 인생은 뭐 대수겠어?’그녀는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경계해야 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말을 끝낸 뒤 나는 다리를 휙 들어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병실을 나섰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 문득 그녀의 무리한 행동으로 세상에 일찍 태어난 그 아이가 떠올랐다.그래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냉정하게 한마디를 던졌다.“조나연, 네가 사람이라면 네가 낳은 아이에게 얼굴이라도 비춰. 적어도 그 애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내 말을 들은 그녀는 멈칫했지만 나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나는 안리영의 휴게실로 향했다. 약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그녀가 들어왔다.“왜 아직도 안 갔어?”그녀는 웃으며 물었다.“괜히 딴소리하지 마. 원장은 뭐래?”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냥 보고서 하나 쓰고 조사에 협조하래. 별거 없었어.”그녀는 물을 따르며 태연하게 말했다.“근데 넌 조나연하고는 잘 해결했어?”나는 소희연과 조나연의 연루된 상황이 떠올라 곧장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넌 조나연이 왜 널 건드린다고 생각해?”안리영은 물 한 잔을 내밀며 말했다.“미친개처럼 물어대는 거겠지.”그녀는 일부러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대답했다.“그럼 왜 하필 너일까?”나는 그녀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길 바라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나를 이용해 너를 겨냥하려는 거겠지.”“그게 전부일까?”나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러자 안리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지원아, 너 지금 뭘 알고 있는 거야? 아니면 조나연한테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거야?”“조나연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네 커리어를 망치고 타격을 주려는 거겠지. 물론 나를 겨냥한 복수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나는 안리영의 계획을 곰곰이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네가 이렇게 떠나면 원장님도 좀 당황하시겠네. 너 지금 우리 해동 산부인과의 최고 실력자잖아.”“맞아.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거야. 어쩌면 이번 기회에 부원장 자리 하나 받을지도 모르지.”안리영의 욕심은 사실 별거 없었다. 나는 그녀의 용감함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감탄했다.“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상처를 주려고 해도 넌 그걸 기회로 만들어 더 빛나는 사람이 되는구나.”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내 핸드폰을 가리키며 말했다.“네 VIP 계정으로 비행기 표 하나 예약해 줘.”진짜 ‘산부인과의 명의’답게 계획을 세우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었다.나는 바로 그녀를 위해 당일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약했다. 그리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어 짐을 챙길 시간을 줬다.공항으로 가는 길,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근데 원장님이 너 조사받아야 한다고 했잖아. 이러고 가버리면 괜찮아?”안리영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이제 와서 그걸 묻는다고? 늦지 않아?”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너답네.”“모든 수술 과정은 기록에 남아 있고 영상도 있고 가족과의 대화도 다 문서로 남아 있어. 조사할 게 있으면 그들이 알아서 하면 되지. 내가 남아서 뭐 하겠어?”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굳이 남아 있어봤자 안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더 기세를 부릴 뿐이었다.“근데 구 교수한테는 미리 말 안 해도 돼? 너 바로 따라가면 깜짝 놀랄걸?”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그녀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돌발 검사를 하려는 거지. 혹시 구 교수와 소희연이 몰래 무슨 짓이라도 하고 있을지 모르잖아.”그녀의 대답에 나는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그럼 너 구 교수를 못 믿는 거야?”“그게 아니라, 사람의 본성을 믿지 않는 거지. 고양이가 생선을 안 훔쳐 먹는 걸 본 적 있어?”역시 사람의 본성과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의사다운 대답이었다. 안리영은 직접 겪은 일이 아니어도 사
강유형의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야?”내 물음에 그의 얼굴은 한층 어두워졌다.“싸움에 휘말렸어.”해외에서, 그것도 중요한 시합을 앞둔 상황에서 싸움이라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지태 오빠가 직접 너한테 연락한 거야?”강유형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니, 지금 구금 상태에 있어.”“구금?”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상황이 안 좋아. 자칫하면 장기 구금도 각오해야 할지도 몰라.”나는 숨이 턱 막혀 아무 말도 못 했다. 내 표정을 읽은 강유형은 차분히 설명했다.“정확한 건 나도 몰라. 지태 팀 동료가 전화로 알려준 거야. 가서 상황을 확인해 봐야 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상황 알게 되면... 연락 좀 해줘.”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물었다.“너도 같이 갈래?”뜻밖의 제안에 나는 당황했다.“지태 팀원이 그러더라. 지금 상태가 안 좋아서 굉장히 예민하고 흥분 상태래. 네가 가면 그를 좀 진정시킬 수 있을 거라고.”신지태는 내게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가족처럼 나를 아껴주던 그를 생각하면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문제는 강유형과 함께 가야 한다는 점이었다.과거, 강유형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지금의 진정우에게 똑같은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먼저 가. 난 짐을 챙기고 바로 갈게.”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짐은 거기서 사도 되잖아.”그의 말은 선을 넘는 듯했다. 내가 짐을 챙긴다는 말은 사실 따로 가겠다는 뜻이었지만 그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그는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이거, 네 거야.”그제야 나는 잊고 있던 여권이 그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과거 우리가 해외여행을 갔을 때 그의 가방에 넣어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나는 여권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주지 않고 멈칫했다.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왜 왔어?”진정우는 손동작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의 뒤로 다가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보고 싶어서.”갑작스러운 애정 표현에 그는 기뻐하기보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빛을 보였다.그는 내 허리를 한번 감더니 나를 그의 무릎 위로 앉혔다.“무슨 일이야?”그의 긴장한 모습에 나는 장난스럽게 그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웃었다.“어떻게 네 눈은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는 거야.”“그러니까 숨기지 마.”나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안리영이 출국했어.”신지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먼저 안리영 얘기를 꺼냈다. 그는 크게 놀라지 않은 듯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높고 잘생긴 콧대를 손끝으로 따라가며 질문을 던졌다.“정우야, 넌 남자니까 잘 알겠지?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에게 매달리는 걸 좋아해?”“안리영 대신 묻는 거야?”그는 내가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만지는 것을 가만히 놔두며 되물었다.“그런 것도 있고 나도 알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여자를 대신해서 묻는 거야.”“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지.”그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그의 콧대를 따라 이마 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며 다시 물었다.“그럼 구 교수 같은 사람은 좋아할까? 아니면 귀찮아할까?”“모르겠어.”그의 솔직함에 익숙한 나는 장난스럽게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그럼 넌 어때?”진정우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네가 얼마나 매달리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응?”그는 내 손가락을 살짝 잡아 자기 이마에 대며 말했다.“넌 어떻게 매달리든 난 괜찮아.”그의 빠른 태도 전환에 웃음이 났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 속에서 진짜 의도를 찾아내려 했다.“그럼 내가 지나치게 매달리면 귀찮아지겠네?”“그게...”그가 변명하려 하자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변명은 필요 없어.”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정말 고집 센 여자 친구네.”“우리 요즘 하루 종일 붙어있잖아. 낮에는 회사에서 같
“가고 싶으면 가. 내 허락이 왜 필요해?”진정우의 반문에 나는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네가 신경 쓸까 봐. 혹시라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해서.”그는 내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날 배려해 준 거였구나.”그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기쁨이 배어 있었다. 내가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행복하게 만든 듯했다.‘역시 남자도 관심받고 싶어 하는 존재구나.’“넌 내 남자 친구잖아. 내가 다른 남자 때문에 너를 뒤로하고 떠난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 남자 친구와 엮이는 게 너한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하고.”나는 솔직하게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내가 받았던 상처들을 진정우에게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우리 조조가 이렇게 날 배려해 주는구나.”진정우의 따뜻한 말에 문득 공항에서 강유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넌 나를 신경 쓴 적이 없었어.’그건 정말 오해였다. 나는 늘 신경 썼지만 강유형은 그걸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었다.“당연하지. 넌 내 남자 친구고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진심은 말로 전해야 한다는 말처럼, 나는 진정우가 내 마음을 오해하지 않길 바랐다.그는 나를 살짝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마주 보았다.“우린 연애 중이지만 각자의 삶이 있잖아.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냥 말해. 내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어.”“그건 아니지.”나는 웃으며 그의 말을 반박했다.“그럼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말하지 않을 거야?”“아니야. 난 항상 네게 말할 거고 네 허락을 받을 거야.”그의 말은 다소 모순적이었지만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진정우, 너 참 불공평하다.”나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남자잖아. 하지만 넌 여자니까. 여자는 더 배려받고 존중받아야 해. 네가 뭘 하든 난 항상 네 편이야.”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어머, 나중에 딸이라도 생기면 완전 딸바보 되는 거 아니야?”그는 목젖을 움직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우
“바보.”진정우는 나를 다독이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네가 말했잖아. 울고 싶을 땐 네 품에서 울라고.”“정말 가도 괜찮아? 강유형이랑 엮일 텐데.”나는 솔직히 그의 마음이 궁금했다.“넌 이미 그 사람과 끝냈잖아. 내가 뭘 질투하겠어. 게다가 나랑 사귀고 나면 다른 남자 눈에 들어오겠어?”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그래, 이제 정말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진정우는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주며 비행기가 뜰 때까지 나를 지켜보았다.휴링턴에 도착한 건 이미 밤이었다. 휴대폰을 켜서 신지태의 소식을 알아보려는데 강유형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어.]순간 당황스러웠다.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정우가 말했을 가능성이 컸다.‘진정우, 정말 자신만만하네. 나를 전 남친에게 맡기다니.’메시지에 답하기보다 진정우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도착했어?”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따뜻했다.“응, 그런데 전 남친이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어.”내가 살짝 장난스럽게 말하자 진정우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걔가 있으면 네가 안전할 것 같아서.”“전 남친한테 나를 맡기는 게 안전하다고?”나는 살짝 비꼬며 물었다.“너무 자신감 넘치는 거 아냐?”“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나머지는 상관없어.”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그리고 난 우리 지원이를 믿어.”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그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지태 오빠 만나고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바로 돌아갈게.”나는 안심시키듯 말했다.“서두르지 말고 갔으니 며칠은 더 있다 와. 그리고 내가 알아본 건데 누가 널 찾아올 수도 있어.”그의 뜻밖의 말에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여기 아는 사람 있어?”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대답했다.“응, 있어.”문득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물었다.“오해하지 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강유형에게 더는 헛된 기대를 심어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무심하게 대답했고 더는 논쟁하고 싶지 않아 나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여기까지 와서 싸우자는 거야?”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말했다.“짐 줘.”나는 별말 없이 짐을 그에게 넘기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우리는 한동안 침묵 속에서 걸었고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태 오빠 상태는 어때? 싸움은 왜 난 거고?”그는 짧게 대답했다.“지금 구금 상태야. 면회는 안 돼.”그의 말에 내 표정이 굳었다.‘그럼 난 뭐 하러 여기까지 온 거지...’나는 신지태가 불안정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온 건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강유형은 내 표정을 살폈는지 바로 덧붙였다.“조율 중이야. 곧 면회 가능할 거야.”나는 살짝 안도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싸움은 왜 난 거야?”그는 침착하게 설명했다.“훈련 중에 생긴 충돌 때문이야. 상대는 티크라는 보조 선수인데 태도가 엉망이었어. 자주 지각하거나 일찍 끝내고 훈련에 집중도 안 했지. 지태가 교체를 요청하자 그가 화를 냈고 말다툼이 심해지다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어.”그의 말을 들으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 사람 많이 다쳤어?”강유형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는데 뒤통수를 심하게 다쳤어. 결국...”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사망한 거야?”나는 숨을 들이쉬며 겨우 물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사망 원인 조사가 진행 중이야. 만약 지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 형량이 줄어들 수도 있어.”나는 만약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살인은 어디서나 무거운 죄로 취급받는 법인데...’강유형은 차분하게 말했다.“최악의 경우를 피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만나보고 있어.”그는 시계를 확인하며 내게 물었다.“저녁 먹었어? 뭐라도 먹자.”“입맛 없어.”신지태 생각에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강유형은 잠시 나를
강유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정말 날 원망하는구나.”“그렇게까지는 아니야.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사실이야. 내 10년을 너한테 낭비했으니까.”이미 이 화제가 시작된 이상,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내 10년은? 윤지원, 나도 널 사랑했고 진심으로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나는 잠시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그건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조나연과 엮인 그 순간, 네가 했던 모든 노력을 스스로 지운 거야.”“죄인도 집행유예나 한 번쯤은 용서받을 기회를 얻잖아. 그런데 왜 나는 그런 기회조차 없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울함이 가득했다.“난 그럴 너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내 단호한 대답과 동시에 음식이 상에 올랐다.강유형은 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내가 먼저 선을 그었다.“이 식사를 계속하고 싶다면 과거 이야기는 하지 마.”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고 결국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는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지만 서로 음식 맛조차 느끼지 못한 채 숟가락만 들었다.식사를 마친 후 그는 나를 호텔로 데려다줬고 내 방은 그의 바로 옆방이었다.방에 들어가기 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태 오빠를 가능한 한 빨리 만나고 싶어.”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이번엔 그의 배려를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가 다시 불렀다.“윤지원, 넌 진정우에 대해 정말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뭐라고?”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대답 대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도대체 무슨 뜻이지? 진정우에 대해 뭘 말하려는 거야?’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진정우에게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휴대폰을 안 들고 있나, 아니면 바쁜 건가?’나는 호텔 방 사진을 찍어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안전하게 도착했어.]하지만 여전히 답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
수혈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지원아, 꼭 조심해야 해.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왜 그렇게 많은 피를 준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바보 같은 년, 누가 너더러 피를 주라고 했어?”“지원아, 제발 날 구해줘. 나... 너무 추워.”꿈속의 목소리는 부모님, 진정우, 그리고 강유형이었다.나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꿈속 장면이 멈췄고 강유형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다.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강유형! 강유형!”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피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공포에 몸이 떨리며 나는 그를 계속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지원아, 일어나. 제발 정신 좀 차려!”급한 목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지원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강진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악몽이라도 꿨어?”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려 했다.강진혁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나는 목이 칼에 베인 듯 아파 말을 내뱉는 게 너무 힘들었다.“너와 유형한테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강유형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며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그가 위급했던 모습이 겹쳤다.나는 아픈 목소리로 물었다.“강유형... 어때요?”강진혁은 다행히도 평온하게 대답했다.“이미 깨어났어. 너를 몇 번 보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쉬게 하려고 내가 다시 병실로 돌려보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제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요?”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밝았고 사고가
평소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이번엔 단 몇 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좋습니다. 지금 바로 수혈을 진행해야 합니다. 대략 400cc에서 600cc 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 더 필요하다면 더 해도 돼요.”강유형이 내 탓에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나는 의사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구급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의사가 그가 언제든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한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강유형, 꼭 버텨야 해. 힘내.”그는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되었고 나는 그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수혈을 해야 했다.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피가 계속 빠져나가자 나는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이것이 혈액 손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수혈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유형을 살리려면 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미 600cc나 뽑았습니다.”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환자의 혈압과 호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 계속 수혈해야 합니다.”주치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더 뽑아주세요. 괜찮아요.”“더 뽑으면 윤지원 씨가 실신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나를 보며 경고했다.“아니에요. 지금 제 상태는 아직 아주 좋아요. 정말 괜찮아요. 더 뽑아주세요.”아마도 내가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았기에 의사는 주치의에게 물었
우리는 마침내 구조되었다.구조대원 중 한 명은 신지태를 만나러 갈 때 나를 태워준 운전기사였다.나는 그가 진정우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차가 심하게 찌그러져서 차를 절단해야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강유형의 핸드폰도 함께 찾아냈다.“어? 이 전화 아직도 통화 중이네요.”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이 아니라 강유형의 것이었다.나는 전에 이 핸드폰으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통화가 막 끝난 상태였고 통화 시간은 67분 12초로 표시되어 있었다.진정우가 계속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강유형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하지만 강유형과 나는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안도했다.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나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강유형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고 운전기사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이 없었다.셋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이는 전적으로 강유형이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강유형 씨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계십니까?”의사가 다가와 물었다.우리는 낯선 나라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강유형의 가족은 그의 곁에 없었다.나는 결국 나서야 했다.“제가 가족입니다. 강유형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의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현재 환자가 과다 출혈 상태입니다. 문제는 환자의 혈액형이 매우 희귀한 RhD 음성, RhNULL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병원에는 이 혈액의 재고가 전혀 없어서 즉시 수혈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의사가 강유형 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혈액형이 RhNULL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혹시 같은 혈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
교통사고는 정말 내게 악몽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내가 그 악몽을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이 절망감은 얼마나 깊은지...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던 순간에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니, 어쩌면 더 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한 상처를 입은 끝에 돌아가셨으니까.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진정우는 그런 나를 잡아주려고 애썼다.“지원아, 괜찮아. 곧 사람들이 너희를 구하러 갈 거야. 나도 금방 갈게.”그는 내게 계속 말을 걸며 진정시키려 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아파...”강유형의 힘없는 신음이 내 옆에서 들려왔다.그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심지어 말조차 하지 못했다.“지원아, 왜 대답 안 해? 괜찮아?”진정우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괜찮아...”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차에서 불이 나거나 휘발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 봐.”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기 전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나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차 앞쪽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차가 또다시 흔들리더니 곧이어 세상이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으악!”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잡으려 했지만 다시 차가 뒤집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다시 멈췄을 때 나는 이미 온몸이 탈진한 상태였다.“지원아! 지원아!”멀리서 진정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 있었고 내 핸드폰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까 차가 뒤집힐 때 핸드폰은 어디론가 던져졌고 나는 간절히 외쳤다.“진정우! 차가 또 뒤집혔어!”“진정우, 제발 사람들 빨리 보내줘. 제발!”커가는 공포감에 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나는 이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을 볼 용기가 없었다. 만약 불이 나
차가 크게 충돌하며 뒤집히고 마침내 모든 게 멈췄다. 온 세상이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 마치 내 생명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한참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보려고 하자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단순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유형?”“나... 여기 있어.”그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렸지만 무척 힘이 없어 보였다.“좀 비켜봐.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그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몸을 빼내려 했다.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서 겨우 빼낼 수 있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찌그러진 차체와 피를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운전기사가 보였다.나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강유형! 강유형!”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를 돌아보니 얼굴 역시 피투성이였다.‘큰일이야. 둘 다 다쳤어. 어떡하면 좋아.’나는 내가 다쳤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강유형의 아래에 깔려 있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찌그러진 차체에 더 깊이 눌려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우리 모두 더 큰 위험에 처할 게 분명했다.“강유형,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몸을 웅크려 봐. 그래야 내가 빠져나올 수 있어.”내 말에 그는 힘겹게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웅크렸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침내 나는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내가 나올 수 있게 하느라 그는 막심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나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먼저... 경찰에 신고해.”“아니... 진정우한테 전화해.”나는 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혹시라도 경찰이 Q 클럽과 연루
감금실을 나올 때까지도 신지태의 절박한 외침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강유형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신지태의 감정 상태는 순간적으로 격앙되었다가 금세 우울해질 정도로 정말 불안정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말이 기억났다.“지원아,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난 결백해. 제발 나 좀 꺼내줘!”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강유형이 빠르게 다가왔다.그는 내 안색이 나빠진 걸 보자 재빨리 날 부축하며 말했다.“너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신지태가 무슨 얘기라도 했어?”신지태가 나한테 부탁한 걸 떠올리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신지태는 내가 이곳을 빨리 떠나길 바랐다. 아마도 Q 클럽의 감시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는 나마저 위험에 빠질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강유형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진정 좀 해.”하지만 나는 물을 받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지태 오빠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고 했어.”나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지태 오빠 말로는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고 우리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대.”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차 앞쪽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고 운전기사는 당황하며 욕을 내뱉었다.“젠장!”강유형은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신지태를 만난 지 10분도 안 돼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어떡해?”나는 공포가 밀려와 본능적으로 강유형의 팔을 붙잡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운전사에게 지시했다.“앞뒤 좌우로 네 대가 따라붙었어. 네가 알아서 어떻게든 따돌려.”운전기사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대표님, 뒷좌석 안전벨트 꼭 하세요.”강유형은 재빠르게 내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주었다.차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휘청거리자 강유형은
진정우는 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드디어 신지태를 만났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있었고 멋있던 헤어스타일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삭발된 상태였다.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신지태는 강유형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며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지태 오빠.”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늘 그랬듯이 그는 내 앞에서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치 그의 세상은 언제나 맑은 햇살로 가득한 듯했다.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침묵하게 했다.“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아니면 너무 못생겨져서 날 못 알아보겠어?”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건 전부 연기였을 것이다. 나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아니야. 오빠는 언제나 멋져.”나는 그의 말을 받아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위로하지 않아도 돼.”“우리는 오빠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다 알아. 강유형과 진정우도 오빠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어. 그러니까 오빠는 꼭 침착하게 기다려야 해. 분명 잘 해결될 거야.”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며 준비한 질문으로 대화를 유도했고 신지태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니 우리의 말이 의외였던 것 같았다.“누가 오빠를 찾아왔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디크랑 왜 다투게 됐는지. 최대한 자세히 말해줘. 혹시 다른 중요한 일도 있었다면 모두 얘기해줘.”내가 간절히 말하자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내 일은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괜히 너희까지 휘말리게 될 수도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포기와 체념이 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