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창밖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그 둘이 정말 뭔가 있었다면 벌써 그런 기류가 있었겠지. 그랬다면 너한테 기회조차 없었을 거고.”“맞아. 내가 구 교수를 좋아할 때, 그도 날 좋아했어. 우리는 같은 주파수에 있었어. 비록 완전히 같은 차원은 아니어도.”안리영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너희는 정말 영혼의 짝 같아.”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근데 너희 혹시... 그냥 영혼만 통하는 게 아니라 몸도...”안리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아직은 아니야.”“그럼 그가 주저하는 거야? 아니면 네가 아직 망설이는 거야?”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놀렸다.“그냥 뭔가 아직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그녀는 숨김없이 솔직히 말했고 나는 고민하는 척하며 말했다.“그럼 오늘 나와 정우가 너희를 위해 호텔 스위트룸을 하나 잡아줄까? 분위기만 맞추면 다 잘 될걸?”“야, 됐거든? 그런 거 분위기 아니고 민망한 거야.”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내 말을 받아넘겼다.“근데 왜 그렇게 날 빤히 쳐다봐?”“네가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나 싶어서.”안리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여자는 살짝 나쁜 구석이 있어야 남자가 더 좋아하는 법이거든.”우리는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진정우가 이미 돌아와 구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아까 화장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슬쩍 말을 꺼냈다.“아까 대표님 만났어.”“그래?”그의 반응은 여전히 미지근했다.“둘이 뭐라고 얘기했어?”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화장실에서 잠깐.”진정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살짝 더 떠봤다.“근데 대표님이 KS 그룹이랑 협력 논의 중인 것 같더라.”“맞아.”이번에도 그는 짧게 대답했다.“응? 넌
나와 진정우는 구 교수 바로 옆방에 묵게 되었다.사실 내가 호텔에 머물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오늘 밤 안리영이 구 교수 방에 남게 될지 궁금해서였다.진정우와 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바로 테라스로 나갔다. 발을 들이기 무섭게 구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리영아, 너도 해외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걸 생각해 본 적 있어? 너 정도 실력이면 해외에서도 훌륭히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나는 몸을 숙여 테라스 너머를 살폈다. 구 교수는 안리영을 다정하게 감싸안은 채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글쎄, 오늘 전까진 생각해 본 적 없어.”안리영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가운 톤과는 달리 한없이 부드러웠다.“그럼 이제 생각해 볼래?”구 교수의 말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안리영은 대답하지 않았고 구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거기서 네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선배.”안리영이 부르며 그의 품에 안긴 채 물었다.“선배는 국내로 돌아올 생각 없어?”구 교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단호히 대답했다.“...없어.”안리영은 그의 품속에서 머리를 들고 물었다.“왜?”“해외에서 경력을 쌓다 보니 특정 국가에 국한되는 게 싫어. 글로벌하게 일하고 싶어.”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의 말에 안리영은 잠시 침묵했다.“선배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건 맞지만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쌓아온 인맥은 전부 국내에 있는데...”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안리영은 사랑에 눈이 멀지 않고 현실적인 관계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알아. 내가 너한테 무조건 나를 따라오라는 게 아니야. 그저 우리가 함께할 미래를 생각해 보자는 거지. 결혼하면 결국은 같은 곳에 있어야 하잖아.”구 교수는 안리영의 귀에 얼굴을 대며 다정히 말했다.이 대화를 들으며 나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보이는 작은 습관이 떠올랐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자주 감싸안았고 강유형은 내 얼굴을 쓰
“그리고 딱딱하지.”내가 두 글자를 덧붙이자 진정우는 입을 꽉 다물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나를 슬쩍 내려놓았다.“진정우.”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설마 이거 가지고 삐진 거야?”“아니.”그는 단호히 대답했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왜 내가 너를 ‘거친 남자’라고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안 들어도 알아.”그는 내 허리를 감싸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나를 호텔 방에 있던 흔들의자에 앉혔다.“알고 있다고? 뭘?”나는 두 다리를 흔들며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가 더 움직이지 못하도록.진정우의 목젖이 두 번 위아래로 움직였지만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척했다.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기분이었다.“말해 봐. 뭘 안다는 거야?”나는 그의 허리를 감싼 다리로 장난을 치며 물었다.그는 여전히 침묵했다. 아마 그가 절대 먼저 말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에 내가 말을 이어갔다.“말 안 하면 내가 알려줄게.”나는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까이 댔다.“‘거칠다’라는 건, 너를 처음 봤을 때 너무 무뚝뚝하고 예의도 없고 여자를 다룰 줄 모른다는 뜻이야.”내 말에 그의 몸이 미묘하게 반응했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며 덧붙였다.“반박하지 마. 왜냐하면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런 인상이었으니까. 내 머릿속엔 이미 너는 거친 남자로 각인됐거든.”나는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몸이 긴장하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딱딱하다는 건 부정 못 하겠지?”내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으며 그의 몸을 더듬었다.“진짜 딱딱해. 손에 닿으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흔들의자가 갑자기 휘청거렸다.“꺅!”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품에 안겼다.진정우는 곧 흔들의자를 붙잡고 나를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엔 진짜 ‘딱딱한’ 걸 보여줄게.”그의 목소리엔 농도 짙은 농담이 섞여 있었
안리영 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까 내가 목격한 기류를 보아하니, 아마도 지금 나와 진정우처럼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것이다.그런 상황에서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도 처음이라면 분명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불쾌한 사건이 될 터였다.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진정우를 살짝 밀며 말했다.“잠시만.”진정우는 가슴이 들썩이며 나를 뜨겁게 바라보았다.“뭐라고?”나는 문 쪽을 가리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들어봐. 누군가가 안리영의 일 망치려는 것 같잖아.”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서?”“그러면 안 되지.”나는 벌써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그러면 지금 우리의 일은? 같이 망치는 거잖아.”그 말에 나는 살짝 부끄러웠지만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자기야, 잠깐 기다려봐. 내가 저년을 물리치고 올게.”내 말투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정말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점점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다.과거 강유형과 함께 있을 땐, 어른스럽고 냉철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미래의 사모님’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체면을 위해 모든 상황에서 배려하고 우아하게 굴어야만 했다. 그 결과 젊음마저 소모된 느낌이었다.하지만 진정우와 함께하는 지금은 달랐다. 그는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줬다.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미끄러지듯 바닥에 내려섰다. 흐트러진 옷을 간단히 정리하고 방문을 열어 방해꾼과 맞설 준비를 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맞은편 구 교수의 방에서 나온 사람은 뜻밖에 안리영이었다.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문틀에 기대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그녀가 유리하다면 그냥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리해진다면 즉시 지원군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구 교수님은 어디 계세요?”소희연이 먼저 직설적으로 물었다.“샤워 중이에요.”익숙한 대사가 안리영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녀의 목소
안리영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럼요. 구 교수님은 여자 친구가 있으니, 희연 씨도 당연히 선을 지키실 줄 알았어요.”자기가 진짜 여자 친구임을 당당히 드러냈다.소희연은 잠시 안리영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공격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침묵하다가 마침내 말했다.“구 교수님께 내일 한 시간 일찍 출발하라고 전해주세요. 늦으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테니까요.”그 말은 분명히 위협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싸움을 걸 핑계를 만들고 있었다.안리영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오늘 밤은 쉬지 않고 시간을 보내야겠네요.”그 순간 나는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역시 내 친구!’소희연은 안리영의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더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뒤돌아 떠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안리영은 나를 가리키며 손짓했다.‘네가 옆방에 있다는 걸 몰랐다면 더 좋았을 텐데.’그녀의 뜻을 이해한 나는 웃음으로 답했다.이날의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안리영은 완벽히 승리했다. 그것도 너무나 우아하고 깔끔하게.방으로 돌아온 나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진정우에게 달려가 그를 꼭 껴안고 입을 맞췄다.“자기야, 나 방금 너무 행복해. 내 친구 리영이 진짜 멋있었어!”진정우는 내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네가 이긴 것처럼 좋아하네. 왜, 너도 적을 물리친 것 같아?”“그럼! 리영의 적은 곧 내 적이야. 그녀의 행복이 내 행복이거든. 그걸 망치려는 사람은 절대 용납 못 해.”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 순간 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서 안리영의 행복을 위해 우리의 시간을 희생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앞으로?”그는 일부러 단어를 꼬투리 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나는 그에게 키스로 답했다.그리고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계속 흔들의자에서 할 거야?”그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응.”나는 그의
내가 그토록 찾으려 애썼던 것이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다니, 정말 놀랍고도 흥분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이어진 것은 당혹감이었다.‘왜 이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걸까? 그리고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어떻게 안 거지?’부모님의 교통사고가 발생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지금까지 보고서에서 빠진 페이지를 공개하지 않았을까?이제 와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뭘까? 정말로 보고서를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든 나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나는 숨을 고르며 메시지를 작성했다.[어떻게 만나 뵐 수 있을까요?]하지만 상대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나는 초조하게 1분을 기다리며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떠올리려 했다. 언제 내 연락처에 추가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그때 친구 추가 기록을 살펴보다가, 이 사람이 내 연락처를 추가하며 남긴 ‘신정훈 경사’이라는 메모를 발견했다.그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이 사람이 처음 나에게 친구 추가 요청을 했을 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었고 나도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부모님 사고를 처리했던 경찰일까?나는 더욱 흥분하며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신 경사님, 만나 뵙고 싶습니다.]이번에는 상대가 곧바로 ‘입력 중’이라는 알림을 띄웠다. 나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화면을 지켜봤다.곧이어 도착한 메시지.[전화할 테니 기다리세요.]그 짧은 문장을 보고 나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알겠습니다.]그 후로 상대는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짧은 문장들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흥분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용진표의 경고 삼촌의 설득, 그리고 일부러 사라진 보고서의 한 페이지...이 모든 상황이 뒤얽혀 있다는 건 그 페이지가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과연 이게 누구에게 어떤 충격을 줄까? 아
다음 날, 나는 일찍 깼다. 진정우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테라스로 나갔다. 마침 구 교수가 차에 타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는 안리영의 손을 잡고 있었다. 꼭 끌어안거나 키스하진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다정한 분위기는 어젯밤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그리고 그 뒤에 소희연이 내려왔다. 그녀는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깔끔한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미모와 세련된 차림새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이 여자는 정말 예뻐 보이는 법을 아는구나.’소희연의 옷차림은 단순히 멋을 낸 것이 아니었다. 구 교수의 시선을 끌고 동시에 안리영에게 압박감을 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선배님, 안녕하세요!”소희연은 환하게 웃으며 구 교수에게 인사했다.그 웃음에는 어젯밤 안리영과 구 교수가 함께 있었던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구 교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어.”그 한마디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구 교수도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타입이구나.’어젯밤 소희연이 무슨 말을 했는지 구 교수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소희연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안리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네가 내 험담을 했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안리영은 한술 더 뜨며 말했다.“제가 구 교수님께 말했어요. 늦으면 다들 기다리지 않겠다고.”그 말에 소희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구 교수에게 무언가를 해명하려 했지만 구 교수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는 안리영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제 돌아가. 도착하면 연락할게. 내가 정리되는 대로 바로 나를 찾아와.”그의 눈빛은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나조차 가슴이 뭉클했는데 바로 곁에 있던 소희연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그녀는 잠시 얼어붙어 있다가 억울한 듯 차에 올라탔다.안리영은 구 교수를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고 마지막
안리영은 아무 말 없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구 교수님 보내기 싫어서 힘든 거지?”“짝사랑할 때보다 더 힘들어.”안리영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그럴 수밖에. 겨우 맛보기만 했는데 이제 더 못 먹는다면 속상하지 않겠어?”나는 그녀를 조금 놀리면서도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말했다.“누가 못 먹는다고 그래? 내가 먹고 싶으면 비행기 타고 바로 가면 되지.”안리영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을 듣자 어젯밤 그녀와 구 교수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뭐야. 진짜 따라갈 생각이 생긴 거야?”안리영은 고개를 들어 소파에 앉아 다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아직 고민 중이야.”그 말은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 그것도 오랜 짝사랑 끝에 이루어진 관계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천천히 생각해. 시간은 많잖아.”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근데 어젯밤은 어땠어? 솔직히 말해 봐.”안리영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살짝 찌르며 말했다.“다 똑같다면서 뭘 그렇게 궁금해해?”“궁금하지! 평소엔 점잖은 구 교수님이 침대에선 어떤 사람인지 말이야.”나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너 정말... 진정우를 만나더니 점점 더 뻔뻔해지는 것 같아.”안리영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우리는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조금 뒤 진정우가 주문한 아침 식사가 도착했지만 안리영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그녀가 제대로 입맛을 찾을 리 없었다.나도 별로 먹지 않았다.진정우는 오늘 하루 쉬라고 했지만 나는 간단히 준비한 뒤 안리영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우리는 조나연이 낳은 아이를 보러 갔다. 아이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간호사는 아이가 생명력이 강하다고 했고 성장도 빠르고 모든 신체 기능도 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있다고 했다.하지만 태어난 후 지금까지 아이는 엄마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조나연은
“알았어요.”나는 짧게 하고 대답한 뒤,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묻지 않고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잠깐만요.” 허진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제 그 남자 모델, 진짜로 정우 씨 아니에요.”“알아요.” 나는 커피잔을 들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직접 그를 땅에 묻었으니까.”허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그냥 두겠다는 듯 다시 물러섰다. 나는 회의실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강유형은 마치 내 감정을 읽으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하지만 오늘의 나는 요즘 중에서 가장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화장까지 하고 나왔으니 거울 속 내 모습이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무엇보다도, 밤새 아팠던 다리도 거짓말처럼 나아 이제 걷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좀 늦었네?” 강유형이 나를 훑어보더니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다.“응, 근데 우리 대표님이 워낙 너그럽거든. 지각했다고 월급 깎지 않더라.”내 말에 강유형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예전에 내가 KS그룹에 다닐 때, 지각이나 조퇴를 하면 누구든 벌금을 내야 했다. 나는 대표님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어제 너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집까지 갔더니 불도 꺼져 있길래 걱정됐어.”강유형은 거침없이 걱정스러웠던 마음을 내비쳤다.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집에 가서 바로 잤어.”“그렇게 쉽게 잘 수 있었어?”“못 잘 이유라도 있어?”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배성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 진정우 아니야. 내가 직접 조사해 봤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하더니 바로 그때, 내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밤새 사람 시켜서 조사했어. 관련 자료 다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윤지원, 진정우는 이미 죽었어. 네가 직접 봤잖아.”나는 손에 쥔 커피잔을 가만히 돌리며 대답했다.“나도 알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거.
나는 강유형이 정말 용준호를 한 대 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은 나였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 나는 휠체어도 버리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진짜 하나같이...” 안리영이 주변 사람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와 조용히 내 팔을 잡아 부축했다.그녀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서야 멈춰 섰다. “지원아, 아까 그 사람 목에 정말 점이 없었어? 혹시 일부러 없앤 거 아닐까? 흉터 같은 건 안 만져졌어?”그녀가 이렇게까지 묻는 건 여전히 배성재가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그의 목을 여러 번 확인했다. 혹시나 해서 손끝으로 몇 번이나 훑어봤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내 반응을 본 안리영은 헷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를 의자에 앉히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이 정말 진정우 같아?”때때로 느낌이란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정확한 법이다. 처음에는 분명 신분을 바꾼 채 나를 일부러 외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그의 냉정한 태도와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을 보면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진정우는 나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위해 직접 방울 팔찌를 만들었고 반지를 주문해 줬다. 나는 아직도 그걸 손에 끼고 있었고 만약 정말 진정우였다면 못 봤을 리가 없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밀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지원아, 그냥 그 사람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안리영은 더 이상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DNA 검사를 하면 확실해질 거야. 그 사람, 분명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 진정우의 여동생이나, 아니면 진씨 가문 사람 중 누구랑 비교해 보면 되잖아.”“하지만 진영이랑은 친남매가 아니야.”그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아니면 제대로 못 봐서 가까이서 다시 한번 봐야겠어?”용준호가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조금 더 다가갔다. 그가 강진혁과 강유형 앞에 거의 얼굴을 맞댈 정도로 가까이 서자, 이제 그들은 그의 모공까지도 볼 수 있었다.물론 나도 그 장면을 똑똑히 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무조건 진정우가 맞다고 확신했다.“용준호, 정말 대단해. 이런 사람을 어디서 구해왔어?” 강유형이 낮게 비웃었다. 그러자 용준호는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운명 같은 거지.”그리고 나를 보며 물었다. “그렇죠, 지원아?”나는 진정우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뚫어지게 배성재를 바라보았다.“성재야, 지원 씨가 네가 좋다며 너를 데려가고 싶대. 괜찮겠어?” 용준호가 조금 귀찮은 듯 말하며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도련님, 제 원칙 알잖아요. 저는 몸을 팔지 않아요.” 배성재는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했다. 그 말에 강진혁과 강유형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용준호가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봐봐. 내가 말했지? 절대 동의 안 한다고.”“다른 일 없으면 전 돌아갈게요.” 배성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 했다. 그때 내 어깨가 살짝 무거워지더니 안리영이 내 팔을 짚으며 손끝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잠깐만요.” 나는 배성재를 불렀고 일어나서 두 걸음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발끝을 들고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윤지원, 너 뭐 하는 거야?” 강진혁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외쳤고 안리영도 얼른 덧붙였다. “지원이가 지금 사람을 홀리고 있어요.”그 틈에 나는 손을 배성재의 목덜미에 가져갔지만 그곳은 부드럽고 매끄러워,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실망감에 빠져서 다시 한번 그곳을 더듬어 보았다. 뒷머리까지 만져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진정우에게 있던 그 점, 손끝으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분명했던 그 자국은 여기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가 진정우가 아님을 깨달았다.팔을 풀고 물러
“네가 끝났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지. 강유형은 널 잊지 못한 것 같은데. 너밖에 신경 안 쓰이는 것 같아.” 안리영이 시원하게 한마디 했다.조시언이 자리에 앉으면서 드디어 조명이 켜지고 공연이 시작됐다. 50분이 넘는 공연 동안 조명이 하나도 반복되지 않았고 특히 마지막에 나온 남성 모델들의 몸을 이용한 조명 쇼는 관객들에게 우리 회사의 창의력과 연구 개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줬다.쇼가 끝날 때, 우리 회사 로고가 크게 빛을 내며 등장했고 관객들은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정말 창의적이고 신선하네요, 특히 마지막 조명 쇼가 인상 깊었어요.” 고객인 조시언은 매우 높이 평가했다.“이건 저희 마케팅 부서 윤지원 부장님의 기획이에요.” 허진호는 나에게 공을 돌리며 칭찬했다.모두가 나를 향해 박수를 쳤고 용준호는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윤지원 부장님의 기획도 좋지만 우리 남자 모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죠.”“맞아요, 그래서 준호 씨의 지원에 감사해요.” 나는 고마움을 표현했다.“윤지원 부장님을 돕게 되어 영광이죠.” 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강진혁과 강유형을 쳐다봤다.“두 분, 맞죠?”용준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사건을 키우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가 강진혁과 강유형을 자극하려는 의도임을 잘 알았다.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 이 사람과 협력한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배성재가 진정우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성재는 용준호 사람이라, 용준호를 빼고는 그를 빼낼 방법이 없었다.“준호 씨, 그 배성재 모델 제가 데리고 있어도 될까요?”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네!”나는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내 한마디에 강유형과 강진혁의 표정은 확실히 어두워졌다.용준호는 그들을 보고 잠시 웃더니 다시 말했다. “안돼. 우리 클럽의 남자 모델들은 모두 규칙을 지키며 일요. 고객을 위한 서비스는 제공하지만 그 이상의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아.”
“안리영, 너 왜 이렇게 네 삼촌을 무서워해? 혹시 그 사람한테 뭔가 잘못한 거 있냐?”내가 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가는 동안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안리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정말 뭐가 있긴 한 거지?”“우리 그 얘기 그만하자.”안리영의 말을 듣자 나는 뭔가 비밀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손으로 안리영을 톡톡 쳤다.“내가 한번 맞춰볼까? 혹시 네가 그 사람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 뭔가 더 과한 짓을 한 거 아니야?”“무슨 말이야, 내 삼촌이라고.” 안리영이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그럼 왜 그를 보면 그렇게 떨고 겁을 먹고 있어?”나는 정말 궁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안리영이 이렇게 떨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별거 아니야, 그냥 내가 한 번 우연히 삼촌이 샤워하는 걸 봤거든.” 안리영의 말에 나는 놀라서 멈췄다.“뭐라고? 어디서 봤어? 다 봤어?”안리영이 눈을 감았다. “그만 말해.”“왜?”그 말에 안리영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솔직히 말했다.“욕실에서... 다 봤어.”“뭐야! 대박!”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혹시 술 취해서 실수로 들어간 거 아니야?”“아니야.” 안리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내가 외할머니 집에 갔었고 그 집엔 아무도 없었어. 나는 땀을 흘려서 씻고 싶어서 위층에 올라갔고 그 방에 들어갔어. 그리고 욕실로 가서...”그 뒤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다 짐작이 갔다.“그 욕실에서 물소리 안 들렸어?”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내가 이어폰 끼고 음악 듣고 있었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지.”“잠깐만!”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 옷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고? 그러면... 너도 그 사람처럼 전부 다 보여준 거네?”안리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화가 난 안리영은 내 머리를 쳤다. “그럼 너도 이제 신경 쓸 필요 없겠네, 다 봤으니 서로 부끄러울 것도 없잖아?”“나야말로 부
안리영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왜 이렇게 소심해. 손 한 번 만지는 것도 안 되나요?”배성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저는 몸은 팔지 않아요. 부담스럽네요.”그렇게 똑 부러지면서도 예의 바른 남자를 마주하자 안리영은 더 이상 그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손을 빼며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올해 몇 살이에요?”“스물아홉입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며 물었다.“키는요?”“183.7cm예요.”안리영은 또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대학교는 다녔나요?”“네, 청수대 인공지능 전공입니다.”“음, 요즘 그 전공 많이 인기 있죠.” 그 말은, 이렇게 좋은 전공을 하고도 남자 모델을 한다는 게 아깝다는 뜻이었다.“이건 제 알바예요.”배성재가 덧붙였다.안리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나? 제대로 된 본업도 있으면서 왜 알바를 할까?’그와 같은 열정적인 사람과 비교하니 나는 내 자신이 정말 게으른 사람 같았다.“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네요.”안리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배성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해 안리영에게 말했다.“가자, 공연 곧 시작해.”안리영은 배성재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모님이 아이를 잃어본 적 있어요?”“저는 외동이에요.”안리영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부모님 유전자 정말 좋네요.”그녀는 나를 밀며 조용히 속삭였다.“아까 말한 것 중에 진정우랑 겹치는 부분이 있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 외에는 진정우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었다.“그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고 하는데 얼굴은 진짜 똑같고 목소리도 아니고 정보도 다르고... 진짜 진정우인지 모르겠어.” 안리영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 남자를 어떻게 더 시험해 볼지 고민하고 있었다. 진정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윤지원, 왜 휠체어에 앉아 있어?”강유형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자 고개를 돌리니 그와 조시언이 다가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각 흰색 셔츠와 검은 셔츠를 입고 흑백 조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오늘 정말 시끌시끌하네, 하나같이 다 왔네.”안리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이렇게 작은 조명 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안리영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조시언이 오기 싫어서였겠지만 그는 고객이었고 이번 쇼를 보러 온 사람 중 하나였다.강유형이 내 쪽으로 걸어오며 내 다리를 쳐다봤다. “어디 다친 거야?”“무릎을 살짝 긁혔어. 별일 아니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강유형은 믿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사람은 휠체어에 앉지 않아.”“정말 괜찮아요. 강진혁 씨가 너무 걱정해서 휠체어를 가져온 거예요. 지원이도 안 타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된 거죠.” 안리영이 대신 설명했다. 안리영 덕분에 강유형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럴 만도 했다.안리영은 강유형의 반응을 무시하고 내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 휠체어는 꽤 괜찮아. 이렇게 밀고 다니면 다리가 좀 더 편하겠네. 널 세심하게 챙기고 다니는 건 확실히 강유형보다 나아.”그러자 강유형이 턱을 굳게 다물었 그 옆에서 조시언이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줬다.“너희 어디 가는 거야?”“멋진 남자들 보러 가요.”안리영이 대답했다. 그 말에 강유형은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는 그저 그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백스테이지에 들어서자 마자 대기 중인 남자 모델들이 보였다. 모두 이미 의상을 갈아입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다들 비슷한 체형에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와, 이 몸매들 정말 장난 아니네!” 안리영은 역시 중요한 포인트를 잘 찝었다.“몸매보다는 얼굴이 중요하지.” 나는 살짝 눈치를 주며 말했다.“그거야 알지만 자세히 볼 수 있으면 좋겠네.” 안리영은 발끝으로 서서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그때, 무대 감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 2년이나 됐다고요?” 나는 놀라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더 큰 실망감을 느꼈다.진정우가 사고를 당한 지 몇달 밖에 안 되었으니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히 진정우가 아니다.그런데 왜 이 사람은 진정우랑 이렇게 똑같이 생긴 걸까?혹시 이 사람과 진정우의 관계는, 내가 유희연과 같은 관계처럼 비슷한 건가?나는 그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며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강진혁이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그가 왔다는 것도 몰랐다. “너, 얼굴이 안 좋다. 어디 아파?” 강진혁은 나의 상태를 바로 알아챘다.“다쳤어.” 용준호가 그 말을 대신했다.하지만 그가 말한‘다쳤다’는 내 몸의 상처뿐 아니라, 내 마음의 상처도 포함된 말이었다. 용준호가 이렇게 진정우랑 닮은 사람을 일부러 데려다 놓은 건, 분명히 나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무릎을 다쳤어요.” 이번엔 허진호가 또 내 말을 대신해 주었다. 정말 고마운 두 남자 덕분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겠다.강진혁은 살짝 찡그리며 내 바지를 올리려고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강진혁의 손은 매우 빠르고 금세 내 발목을 잡았다. 그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잠깐만 볼게.”그가 내 바지를 살짝 올리자 상처가 드러났다. 강진혁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 다친 거야? 이렇게 심각한데 왜 말 안 했어?”그 모습이 마치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나에게 화가 난, 그런 전형적인 남자 친구의 모습 같았다. 만약 내가 그가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사실 그의 행동에 감동했을지도 모르겠다.“이미 안리영한테 확인을 받았어요. 별일 없었어요.” 나는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그의 얼굴은 굳어졌고 다시 내 상처를 살펴본 후, 몇 초 후에야 바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이렇게 다정한 모습은 지원이 앞에서만 볼 수 있네. 강진혁.” 용준호가 놀리듯 말했지만 강진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우였다!지난번 골목에서 봤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그때 내가 넘어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보겠다고 결심하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또다시 내 상처를 잊고 움직이자 그대로 넘어졌다.“어이, 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날 안고 싶으면 그냥 말해.”용준호는 장난스럽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불 켜!”내 말에 연습 중이던 사람들이 모두 멈췄지만 여전히 무대 뒤쪽의 불은 꺼져 있었다.“불 켜!” 내가 다시 소리쳤다. 밖에서 들어온 허진호가 내 소리에 놀라며 말했다.“뭐야? 불 켜, 빨리 켜!”허진호의 말에 모두가 움직여, 뒤쪽의 조명이 켜지자 눈이 부셔서 모두 눈을 찡그렸다.나는 무대 위의 모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나씩 얼굴을 살피다가, 결국 가장 중앙에 있는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그 얼굴은 내가 매일 밤 꿈에서 그리워했던 얼굴, 진정우의 얼굴이었다.그가 드디어 살아 돌아와 내 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 낯설고 심지어 어쩐지 혼란스럽고 불안한 기색까지 감돌았다.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리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무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너 뭐 하는 거야?” 용준호가 물었다. 허진호는 무대 위 사람을 가리키며 혼란스러워했다. “정우 씨, 정... 정우 씨가 여기 어떻게...”허진호 역시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나는 비틀거리며 무대 앞에 다가가 그 얼굴을 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말 진정우의 얼굴이 맞다고 나는 확신했다.“진정우.” 나는 그토록 많이 부른 이름을 낮게 불렀다. 하지만 무대 위의 남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나를 부축하던 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이 남자는 진정우가 아니야. 배성재야. 여기서 제일 유명한 모델이야.”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곧장 다가왔다. “준호 도련님.”“윤지원 씨야, 인사해.” 용준호가 말했다.배성재는 순순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