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창밖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그 둘이 정말 뭔가 있었다면 벌써 그런 기류가 있었겠지. 그랬다면 너한테 기회조차 없었을 거고.”“맞아. 내가 구 교수를 좋아할 때, 그도 날 좋아했어. 우리는 같은 주파수에 있었어. 비록 완전히 같은 차원은 아니어도.”안리영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너희는 정말 영혼의 짝 같아.”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근데 너희 혹시... 그냥 영혼만 통하는 게 아니라 몸도...”안리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아직은 아니야.”“그럼 그가 주저하는 거야? 아니면 네가 아직 망설이는 거야?”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놀렸다.“그냥 뭔가 아직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그녀는 숨김없이 솔직히 말했고 나는 고민하는 척하며 말했다.“그럼 오늘 나와 정우가 너희를 위해 호텔 스위트룸을 하나 잡아줄까? 분위기만 맞추면 다 잘 될걸?”“야, 됐거든? 그런 거 분위기 아니고 민망한 거야.”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내 말을 받아넘겼다.“근데 왜 그렇게 날 빤히 쳐다봐?”“네가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나 싶어서.”안리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여자는 살짝 나쁜 구석이 있어야 남자가 더 좋아하는 법이거든.”우리는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진정우가 이미 돌아와 구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아까 화장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슬쩍 말을 꺼냈다.“아까 대표님 만났어.”“그래?”그의 반응은 여전히 미지근했다.“둘이 뭐라고 얘기했어?”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화장실에서 잠깐.”진정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살짝 더 떠봤다.“근데 대표님이 KS 그룹이랑 협력 논의 중인 것 같더라.”“맞아.”이번에도 그는 짧게 대답했다.“응? 넌
나와 진정우는 구 교수 바로 옆방에 묵게 되었다.사실 내가 호텔에 머물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오늘 밤 안리영이 구 교수 방에 남게 될지 궁금해서였다.진정우와 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바로 테라스로 나갔다. 발을 들이기 무섭게 구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리영아, 너도 해외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걸 생각해 본 적 있어? 너 정도 실력이면 해외에서도 훌륭히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나는 몸을 숙여 테라스 너머를 살폈다. 구 교수는 안리영을 다정하게 감싸안은 채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글쎄, 오늘 전까진 생각해 본 적 없어.”안리영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가운 톤과는 달리 한없이 부드러웠다.“그럼 이제 생각해 볼래?”구 교수의 말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안리영은 대답하지 않았고 구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거기서 네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선배.”안리영이 부르며 그의 품에 안긴 채 물었다.“선배는 국내로 돌아올 생각 없어?”구 교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단호히 대답했다.“...없어.”안리영은 그의 품속에서 머리를 들고 물었다.“왜?”“해외에서 경력을 쌓다 보니 특정 국가에 국한되는 게 싫어. 글로벌하게 일하고 싶어.”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의 말에 안리영은 잠시 침묵했다.“선배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건 맞지만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쌓아온 인맥은 전부 국내에 있는데...”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안리영은 사랑에 눈이 멀지 않고 현실적인 관계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알아. 내가 너한테 무조건 나를 따라오라는 게 아니야. 그저 우리가 함께할 미래를 생각해 보자는 거지. 결혼하면 결국은 같은 곳에 있어야 하잖아.”구 교수는 안리영의 귀에 얼굴을 대며 다정히 말했다.이 대화를 들으며 나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보이는 작은 습관이 떠올랐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자주 감싸안았고 강유형은 내 얼굴을 쓰
“그리고 딱딱하지.”내가 두 글자를 덧붙이자 진정우는 입을 꽉 다물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나를 슬쩍 내려놓았다.“진정우.”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설마 이거 가지고 삐진 거야?”“아니.”그는 단호히 대답했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왜 내가 너를 ‘거친 남자’라고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안 들어도 알아.”그는 내 허리를 감싸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나를 호텔 방에 있던 흔들의자에 앉혔다.“알고 있다고? 뭘?”나는 두 다리를 흔들며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가 더 움직이지 못하도록.진정우의 목젖이 두 번 위아래로 움직였지만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척했다.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기분이었다.“말해 봐. 뭘 안다는 거야?”나는 그의 허리를 감싼 다리로 장난을 치며 물었다.그는 여전히 침묵했다. 아마 그가 절대 먼저 말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에 내가 말을 이어갔다.“말 안 하면 내가 알려줄게.”나는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까이 댔다.“‘거칠다’라는 건, 너를 처음 봤을 때 너무 무뚝뚝하고 예의도 없고 여자를 다룰 줄 모른다는 뜻이야.”내 말에 그의 몸이 미묘하게 반응했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며 덧붙였다.“반박하지 마. 왜냐하면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런 인상이었으니까. 내 머릿속엔 이미 너는 거친 남자로 각인됐거든.”나는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몸이 긴장하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딱딱하다는 건 부정 못 하겠지?”내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으며 그의 몸을 더듬었다.“진짜 딱딱해. 손에 닿으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흔들의자가 갑자기 휘청거렸다.“꺅!”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품에 안겼다.진정우는 곧 흔들의자를 붙잡고 나를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엔 진짜 ‘딱딱한’ 걸 보여줄게.”그의 목소리엔 농도 짙은 농담이 섞여 있었
안리영 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까 내가 목격한 기류를 보아하니, 아마도 지금 나와 진정우처럼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것이다.그런 상황에서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도 처음이라면 분명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불쾌한 사건이 될 터였다.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진정우를 살짝 밀며 말했다.“잠시만.”진정우는 가슴이 들썩이며 나를 뜨겁게 바라보았다.“뭐라고?”나는 문 쪽을 가리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들어봐. 누군가가 안리영의 일 망치려는 것 같잖아.”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서?”“그러면 안 되지.”나는 벌써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그러면 지금 우리의 일은? 같이 망치는 거잖아.”그 말에 나는 살짝 부끄러웠지만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자기야, 잠깐 기다려봐. 내가 저년을 물리치고 올게.”내 말투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정말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점점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다.과거 강유형과 함께 있을 땐, 어른스럽고 냉철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미래의 사모님’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체면을 위해 모든 상황에서 배려하고 우아하게 굴어야만 했다. 그 결과 젊음마저 소모된 느낌이었다.하지만 진정우와 함께하는 지금은 달랐다. 그는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줬다.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미끄러지듯 바닥에 내려섰다. 흐트러진 옷을 간단히 정리하고 방문을 열어 방해꾼과 맞설 준비를 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맞은편 구 교수의 방에서 나온 사람은 뜻밖에 안리영이었다.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문틀에 기대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그녀가 유리하다면 그냥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리해진다면 즉시 지원군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구 교수님은 어디 계세요?”소희연이 먼저 직설적으로 물었다.“샤워 중이에요.”익숙한 대사가 안리영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녀의 목소
안리영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럼요. 구 교수님은 여자 친구가 있으니, 희연 씨도 당연히 선을 지키실 줄 알았어요.”자기가 진짜 여자 친구임을 당당히 드러냈다.소희연은 잠시 안리영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공격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침묵하다가 마침내 말했다.“구 교수님께 내일 한 시간 일찍 출발하라고 전해주세요. 늦으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테니까요.”그 말은 분명히 위협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싸움을 걸 핑계를 만들고 있었다.안리영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오늘 밤은 쉬지 않고 시간을 보내야겠네요.”그 순간 나는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역시 내 친구!’소희연은 안리영의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더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뒤돌아 떠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안리영은 나를 가리키며 손짓했다.‘네가 옆방에 있다는 걸 몰랐다면 더 좋았을 텐데.’그녀의 뜻을 이해한 나는 웃음으로 답했다.이날의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안리영은 완벽히 승리했다. 그것도 너무나 우아하고 깔끔하게.방으로 돌아온 나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진정우에게 달려가 그를 꼭 껴안고 입을 맞췄다.“자기야, 나 방금 너무 행복해. 내 친구 리영이 진짜 멋있었어!”진정우는 내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네가 이긴 것처럼 좋아하네. 왜, 너도 적을 물리친 것 같아?”“그럼! 리영의 적은 곧 내 적이야. 그녀의 행복이 내 행복이거든. 그걸 망치려는 사람은 절대 용납 못 해.”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 순간 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서 안리영의 행복을 위해 우리의 시간을 희생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앞으로?”그는 일부러 단어를 꼬투리 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나는 그에게 키스로 답했다.그리고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계속 흔들의자에서 할 거야?”그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응.”나는 그의
내가 그토록 찾으려 애썼던 것이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다니, 정말 놀랍고도 흥분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이어진 것은 당혹감이었다.‘왜 이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걸까? 그리고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어떻게 안 거지?’부모님의 교통사고가 발생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지금까지 보고서에서 빠진 페이지를 공개하지 않았을까?이제 와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뭘까? 정말로 보고서를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든 나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나는 숨을 고르며 메시지를 작성했다.[어떻게 만나 뵐 수 있을까요?]하지만 상대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나는 초조하게 1분을 기다리며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떠올리려 했다. 언제 내 연락처에 추가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그때 친구 추가 기록을 살펴보다가, 이 사람이 내 연락처를 추가하며 남긴 ‘신정훈 경사’이라는 메모를 발견했다.그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이 사람이 처음 나에게 친구 추가 요청을 했을 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었고 나도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부모님 사고를 처리했던 경찰일까?나는 더욱 흥분하며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신 경사님, 만나 뵙고 싶습니다.]이번에는 상대가 곧바로 ‘입력 중’이라는 알림을 띄웠다. 나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화면을 지켜봤다.곧이어 도착한 메시지.[전화할 테니 기다리세요.]그 짧은 문장을 보고 나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알겠습니다.]그 후로 상대는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짧은 문장들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흥분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용진표의 경고 삼촌의 설득, 그리고 일부러 사라진 보고서의 한 페이지...이 모든 상황이 뒤얽혀 있다는 건 그 페이지가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과연 이게 누구에게 어떤 충격을 줄까? 아
다음 날, 나는 일찍 깼다. 진정우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테라스로 나갔다. 마침 구 교수가 차에 타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는 안리영의 손을 잡고 있었다. 꼭 끌어안거나 키스하진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다정한 분위기는 어젯밤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그리고 그 뒤에 소희연이 내려왔다. 그녀는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깔끔한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미모와 세련된 차림새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이 여자는 정말 예뻐 보이는 법을 아는구나.’소희연의 옷차림은 단순히 멋을 낸 것이 아니었다. 구 교수의 시선을 끌고 동시에 안리영에게 압박감을 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선배님, 안녕하세요!”소희연은 환하게 웃으며 구 교수에게 인사했다.그 웃음에는 어젯밤 안리영과 구 교수가 함께 있었던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구 교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어.”그 한마디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구 교수도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타입이구나.’어젯밤 소희연이 무슨 말을 했는지 구 교수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소희연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안리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네가 내 험담을 했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안리영은 한술 더 뜨며 말했다.“제가 구 교수님께 말했어요. 늦으면 다들 기다리지 않겠다고.”그 말에 소희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구 교수에게 무언가를 해명하려 했지만 구 교수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는 안리영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제 돌아가. 도착하면 연락할게. 내가 정리되는 대로 바로 나를 찾아와.”그의 눈빛은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나조차 가슴이 뭉클했는데 바로 곁에 있던 소희연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그녀는 잠시 얼어붙어 있다가 억울한 듯 차에 올라탔다.안리영은 구 교수를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고 마지막
안리영은 아무 말 없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구 교수님 보내기 싫어서 힘든 거지?”“짝사랑할 때보다 더 힘들어.”안리영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그럴 수밖에. 겨우 맛보기만 했는데 이제 더 못 먹는다면 속상하지 않겠어?”나는 그녀를 조금 놀리면서도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말했다.“누가 못 먹는다고 그래? 내가 먹고 싶으면 비행기 타고 바로 가면 되지.”안리영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을 듣자 어젯밤 그녀와 구 교수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뭐야. 진짜 따라갈 생각이 생긴 거야?”안리영은 고개를 들어 소파에 앉아 다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아직 고민 중이야.”그 말은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 그것도 오랜 짝사랑 끝에 이루어진 관계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천천히 생각해. 시간은 많잖아.”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근데 어젯밤은 어땠어? 솔직히 말해 봐.”안리영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살짝 찌르며 말했다.“다 똑같다면서 뭘 그렇게 궁금해해?”“궁금하지! 평소엔 점잖은 구 교수님이 침대에선 어떤 사람인지 말이야.”나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너 정말... 진정우를 만나더니 점점 더 뻔뻔해지는 것 같아.”안리영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우리는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조금 뒤 진정우가 주문한 아침 식사가 도착했지만 안리영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그녀가 제대로 입맛을 찾을 리 없었다.나도 별로 먹지 않았다.진정우는 오늘 하루 쉬라고 했지만 나는 간단히 준비한 뒤 안리영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우리는 조나연이 낳은 아이를 보러 갔다. 아이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간호사는 아이가 생명력이 강하다고 했고 성장도 빠르고 모든 신체 기능도 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있다고 했다.하지만 태어난 후 지금까지 아이는 엄마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조나연은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
수혈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지원아, 꼭 조심해야 해.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왜 그렇게 많은 피를 준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바보 같은 년, 누가 너더러 피를 주라고 했어?”“지원아, 제발 날 구해줘. 나... 너무 추워.”꿈속의 목소리는 부모님, 진정우, 그리고 강유형이었다.나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꿈속 장면이 멈췄고 강유형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다.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강유형! 강유형!”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피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공포에 몸이 떨리며 나는 그를 계속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지원아, 일어나. 제발 정신 좀 차려!”급한 목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지원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강진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악몽이라도 꿨어?”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려 했다.강진혁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나는 목이 칼에 베인 듯 아파 말을 내뱉는 게 너무 힘들었다.“너와 유형한테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강유형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며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그가 위급했던 모습이 겹쳤다.나는 아픈 목소리로 물었다.“강유형... 어때요?”강진혁은 다행히도 평온하게 대답했다.“이미 깨어났어. 너를 몇 번 보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쉬게 하려고 내가 다시 병실로 돌려보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제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요?”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밝았고 사고가
평소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이번엔 단 몇 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좋습니다. 지금 바로 수혈을 진행해야 합니다. 대략 400cc에서 600cc 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 더 필요하다면 더 해도 돼요.”강유형이 내 탓에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나는 의사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구급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의사가 그가 언제든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한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강유형, 꼭 버텨야 해. 힘내.”그는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되었고 나는 그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수혈을 해야 했다.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피가 계속 빠져나가자 나는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이것이 혈액 손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수혈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유형을 살리려면 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미 600cc나 뽑았습니다.”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환자의 혈압과 호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 계속 수혈해야 합니다.”주치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더 뽑아주세요. 괜찮아요.”“더 뽑으면 윤지원 씨가 실신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나를 보며 경고했다.“아니에요. 지금 제 상태는 아직 아주 좋아요. 정말 괜찮아요. 더 뽑아주세요.”아마도 내가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았기에 의사는 주치의에게 물었
우리는 마침내 구조되었다.구조대원 중 한 명은 신지태를 만나러 갈 때 나를 태워준 운전기사였다.나는 그가 진정우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차가 심하게 찌그러져서 차를 절단해야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강유형의 핸드폰도 함께 찾아냈다.“어? 이 전화 아직도 통화 중이네요.”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이 아니라 강유형의 것이었다.나는 전에 이 핸드폰으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통화가 막 끝난 상태였고 통화 시간은 67분 12초로 표시되어 있었다.진정우가 계속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강유형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하지만 강유형과 나는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안도했다.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나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강유형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고 운전기사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이 없었다.셋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이는 전적으로 강유형이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강유형 씨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계십니까?”의사가 다가와 물었다.우리는 낯선 나라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강유형의 가족은 그의 곁에 없었다.나는 결국 나서야 했다.“제가 가족입니다. 강유형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의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현재 환자가 과다 출혈 상태입니다. 문제는 환자의 혈액형이 매우 희귀한 RhD 음성, RhNULL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병원에는 이 혈액의 재고가 전혀 없어서 즉시 수혈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의사가 강유형 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혈액형이 RhNULL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혹시 같은 혈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
교통사고는 정말 내게 악몽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내가 그 악몽을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이 절망감은 얼마나 깊은지...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던 순간에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니, 어쩌면 더 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한 상처를 입은 끝에 돌아가셨으니까.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진정우는 그런 나를 잡아주려고 애썼다.“지원아, 괜찮아. 곧 사람들이 너희를 구하러 갈 거야. 나도 금방 갈게.”그는 내게 계속 말을 걸며 진정시키려 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아파...”강유형의 힘없는 신음이 내 옆에서 들려왔다.그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심지어 말조차 하지 못했다.“지원아, 왜 대답 안 해? 괜찮아?”진정우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괜찮아...”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차에서 불이 나거나 휘발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 봐.”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기 전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나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차 앞쪽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차가 또다시 흔들리더니 곧이어 세상이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으악!”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잡으려 했지만 다시 차가 뒤집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다시 멈췄을 때 나는 이미 온몸이 탈진한 상태였다.“지원아! 지원아!”멀리서 진정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 있었고 내 핸드폰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까 차가 뒤집힐 때 핸드폰은 어디론가 던져졌고 나는 간절히 외쳤다.“진정우! 차가 또 뒤집혔어!”“진정우, 제발 사람들 빨리 보내줘. 제발!”커가는 공포감에 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나는 이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을 볼 용기가 없었다. 만약 불이 나
차가 크게 충돌하며 뒤집히고 마침내 모든 게 멈췄다. 온 세상이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 마치 내 생명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한참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보려고 하자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단순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유형?”“나... 여기 있어.”그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렸지만 무척 힘이 없어 보였다.“좀 비켜봐.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그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몸을 빼내려 했다.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서 겨우 빼낼 수 있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찌그러진 차체와 피를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운전기사가 보였다.나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강유형! 강유형!”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를 돌아보니 얼굴 역시 피투성이였다.‘큰일이야. 둘 다 다쳤어. 어떡하면 좋아.’나는 내가 다쳤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강유형의 아래에 깔려 있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찌그러진 차체에 더 깊이 눌려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우리 모두 더 큰 위험에 처할 게 분명했다.“강유형,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몸을 웅크려 봐. 그래야 내가 빠져나올 수 있어.”내 말에 그는 힘겹게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웅크렸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침내 나는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내가 나올 수 있게 하느라 그는 막심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나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먼저... 경찰에 신고해.”“아니... 진정우한테 전화해.”나는 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혹시라도 경찰이 Q 클럽과 연루
감금실을 나올 때까지도 신지태의 절박한 외침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강유형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신지태의 감정 상태는 순간적으로 격앙되었다가 금세 우울해질 정도로 정말 불안정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말이 기억났다.“지원아,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난 결백해. 제발 나 좀 꺼내줘!”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강유형이 빠르게 다가왔다.그는 내 안색이 나빠진 걸 보자 재빨리 날 부축하며 말했다.“너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신지태가 무슨 얘기라도 했어?”신지태가 나한테 부탁한 걸 떠올리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신지태는 내가 이곳을 빨리 떠나길 바랐다. 아마도 Q 클럽의 감시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는 나마저 위험에 빠질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강유형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진정 좀 해.”하지만 나는 물을 받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지태 오빠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고 했어.”나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지태 오빠 말로는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고 우리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대.”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차 앞쪽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고 운전기사는 당황하며 욕을 내뱉었다.“젠장!”강유형은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신지태를 만난 지 10분도 안 돼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어떡해?”나는 공포가 밀려와 본능적으로 강유형의 팔을 붙잡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운전사에게 지시했다.“앞뒤 좌우로 네 대가 따라붙었어. 네가 알아서 어떻게든 따돌려.”운전기사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대표님, 뒷좌석 안전벨트 꼭 하세요.”강유형은 재빠르게 내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주었다.차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휘청거리자 강유형은
진정우는 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드디어 신지태를 만났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있었고 멋있던 헤어스타일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삭발된 상태였다.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신지태는 강유형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며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지태 오빠.”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늘 그랬듯이 그는 내 앞에서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치 그의 세상은 언제나 맑은 햇살로 가득한 듯했다.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침묵하게 했다.“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아니면 너무 못생겨져서 날 못 알아보겠어?”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건 전부 연기였을 것이다. 나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아니야. 오빠는 언제나 멋져.”나는 그의 말을 받아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위로하지 않아도 돼.”“우리는 오빠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다 알아. 강유형과 진정우도 오빠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어. 그러니까 오빠는 꼭 침착하게 기다려야 해. 분명 잘 해결될 거야.”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며 준비한 질문으로 대화를 유도했고 신지태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니 우리의 말이 의외였던 것 같았다.“누가 오빠를 찾아왔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디크랑 왜 다투게 됐는지. 최대한 자세히 말해줘. 혹시 다른 중요한 일도 있었다면 모두 얘기해줘.”내가 간절히 말하자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내 일은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괜히 너희까지 휘말리게 될 수도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포기와 체념이 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