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위에 서 있는 남자를 보니, 내가 굳이 거절의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진정우는 검은 반팔 티셔츠에 작업복 스타일의 팬츠를 입고, 검은 오토바이 옆에 서 있었다. 그의 강렬하고도 매력적인 모습에 시선이 저절로 끌렸다.이런 모습의 진정우는 처음이었다.하지만 이런 남자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예전에 강유형도 이런 모습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자신감 넘쳤던 때가 있었다.그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던 기억이 난다.그리고 지금도 생생하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 그의 허리를 감싸고, 밤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그 짜릿한 순간들이.“아직도 오토바이를 좋아하나 봐?”잠시 넋이 나간 사이, 강유형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의도를 눈치챘지만, 나는 가볍게 미소만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정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진정우는 내가 다가가자마자 천천히 걸음을 맞춰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를 막아섰다.진수로!우리 회사의 대표님이자, 진정우와 나의 현재 상사였다.그는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 빳빳한 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그의 단단한 배와 진정우의 날렵한 체격은 대비가 극명했다.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마치 진정우가 진수로에게 지시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진수로가 나를 흘끗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진정우는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그가 강유형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나만 향하고 있었고, 걸음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그의 발걸음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오래 기다렸어?”나는 계단 위, 그는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덕분에 우리 눈높이가 나란히 맞았다.“아니.”진정우의 눈빛은 깊고 진지했다.그의 눈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고, 그의 말처럼 그의 마음도 정직하고 솔직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가자.”그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그때 진수로가
조나연이 나를 찾아온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다만 우리 회사로 직접 찾아왔다는 점이 의외였다. 차라리 아파트 앞이나 집 근처에서 기다릴 줄 알았다.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당연히 강유형과 관련된 일이겠지만 이제는 그녀와 말다툼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래서 리셉션 직원에게 간단히 말했다.“그냥 제가 없다고 전하세요.”그런데 퇴근 시간이 되어도 그녀는 여전히 회사를 떠나지 않고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 부장님, 그분이 반나절 동안 계속 기다리고 계세요. 드린 물도 손도 안 대셨고요. 임신한 몸이신데 혹시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할 것 같아요.” 리셉션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조나연은 동정심을 유발하며 나를 압박하려는 속셈이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다음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나를 괴롭힐 게 분명했다.“일이 생기든 말든 우리와는 상관없어요. 기다리고 싶으면 기다리라 하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한 뒤 건물을 나섰다.“지원 씨!”갑자기 조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그 소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었다. 뒤돌아보니 그녀가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하얀 실크 소재의 임산부 드레스를 입고 약간 부른 배를 내보이며, 얼굴에는 약간 홍조가 감돌았다. 아마 방금 큰 소리를 낸 탓일 것이다.“왜 저를 피하는 거예요?” 그녀는 원망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피하는 게 아니라, 만나기 싫어서 안 만나는 겁니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특유의 약한 척하는 모습으로 힘없이 말했다.“찔리니까 그런 거죠.”그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강유형에게 저에 대해 고자질한 거예요? 왜 헤어졌으면서도 여전히 그와 얽혀 있는 거죠?”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쏘아붙였다.그녀가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제 우리 둘 주변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두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화제를
혹시 조나연이 단순히 나에 대한 원망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걸까?그럴 리 없다. 조나연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데는 반드시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내가 반격하려는 순간, 진정우와 허진호가 나타났다. 진정우는 내 옆으로 걸어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조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애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조나연은 그의 강렬한 기세에 몸을 떨며, 더더욱 약한 척하며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만약 윤지원 씨가 강유형에게 가지 않았다면 당연히 상관없었겠죠.”진정우는 차갑게 비웃으며 대꾸했다.“두 사람은 10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서로 연락하면 어때서요?”그의 반격은 나조차도 조금 놀랐다. 조나연은 그의 태도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아마도 그녀는 진정우가 나를 이렇게까지 옹호할 줄 몰랐을 것이다.그 순간, 그녀가 왜 이런 소란을 피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조나연은 내 연인 관계를 흔들어 놓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강유형에게 돌아간다면? 그녀는 그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하지만 저 여자가 계속 강유형과 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잖아요.”조나연은 다시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정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만약 당신과 강유형의 관계가 정말로 탄탄하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지원 씨가 나쁜 여자라고 나더러 믿으라고 이러는 거잖아요.”역시 진정우다. 그는 조나연의 얕은 속셈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조나연이 입을 열려 하자, 진정우는 내 손을 잡으며 그녀에게 한 방을 더 날렸다.“조나연 씨, 당신이 지원 씨의 남자 친구를 빼앗은 건 알겠는데 감히 여기까지 와서 지원 씨를 괴롭히다니요. 대체 무슨 배짱으로요?”그 순간, 주변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참 뻔뻔하네!”그 말을 듣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조나연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꼭 뺨이라도 맞은 듯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를 더 몰아붙일 수도
“갈 거야.”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가야 했다.그곳은 내게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2년 동안 쏟아부은 노력, 무수한 밤의 땀방울, 내 기대와 후회, 그리고 나의 새로운 시작까지.초대장을 손에 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한 사람 더 데려가도 돼?”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진정우야?”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네가 오기만 하면 누구를 데려오든 상관없어.”이건 그의 양보였다. 예전의 그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고마워.”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강유형이 다시 나를 불렀다.“지원아, 내일 부모님도 오실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너를 기다릴 거야.”그는 분명히 내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다.“알겠어.”나의 대답을 듣고도 그는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았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결국, 그의 침묵 속에서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모든 영상 플랫폼과 지역 전광판에 모두 놀이공원 개장 광고가 떴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그만큼 확실히 알리고 싶다는 의미였다.천하의 강유형답게 그의 사업적 감각은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우리가 이렇게 멀어진 지금도 그의 능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언니, 이 놀이공원이 언니랑 오빠가 연애 시작한 장소 아니에요?”진소영이 TV 속 광고를 가리키며 물었다.그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고 진정우를 바라봤다.“맞아요?”“아니.”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그럼 어디예요?”진소영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진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 묻는 소영에게 내가 대신 말했다.“청평. 전에 얘기했던 그 작은 마을.”진정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미묘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정우가 주방으로 간 뒤, 나는 그를 따라갔다.“내가 뭔가 잘못 말했어?”“응.”그는 짧게 답했다.“뭔데?”나는 의아해하
그는 늘 믿음직스럽고 정직한 얼굴이었다. 거짓말을 해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진솔해 보였고 지금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를 보고 나는 더 이상 그가 농담하는지조차 추궁할 수 없었다. 그래도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그건 애들 장난이지. 그런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진정우, 정말 왜 이래?”그는 채소를 자르던 손을 잠시 멈추더니 짧게 말했다.“너니까.”정말이지, 이 남자. 달콤한 말을 할 때는 과하다 싶을 정도다.“언니, 나도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든요.”진소영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함께 데려가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강유형에게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강유형은 내가 진정우를 데려가고 싶다고 오해했을 뿐이었다.진정우는 내가 데려갈 필요도 없이 놀이공원에 갈 것이었다. 놀이공원 후반 작업, 특히 조명 설계는 그의 손을 거친 결과물이니까.개장 광고는 엄청난 효과를 냈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마케팅팀은 사전 예측을 통해 시간대를 나눠 티켓을 판매하고 입장을 조절했다. 덕분에 혼란 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진정우와 나는 진소영을 데리고 전용 통로를 통해 입장했다. 진정우는 내가 특별 손님인 걸 알고 있었기에 진소영을 데리고 놀러 가고 나는 개막식 참석자용 대기실로 향했다.“지원아! 어서 와! 너희 삼촌이랑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한껏 멋을 낸 강유형의 어머니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나는 강유형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삼촌, 몸은 좀 어떠세요?”“아주 좋아. 밥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시고 잠도 푹 자.”그는 농담처럼 말했다.강유형과 강진혁도 정장을 입고 나왔다. 두 사람 모두 훤칠해 눈길을 끌었다. 강유형의 어머니는 그런 두 아들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근데 너 혼자야?” 강유형이 물었다.“정우가 동생 데리고 놀러 갔어.”“점심에 연회가 열릴 거야. 그때 둘 다 같이 오라고 해.”강유형의 아버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유형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안색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어디 아파?”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말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목구멍에 맺힌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강유형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내가 그와 신지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난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난 내가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가 될 줄은 몰랐어, 강유형...”“모든 사람들 눈에는 우린 이미 부부야.” 강유형이 내 말을 끊었다.‘그래서 뭐? 그 사람들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건가?’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였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손에 든 펜이 닫혔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혼인 신고서에 머물렀다. “다음 주 수요일에 혼인신고 하러 가자.”이 말은 내가 듣고 싶었 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아주...난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강유형,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도 그럴 필요 없고.”“윤지원!” 그가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움찔했고 고개를 들어 그의 짜증 난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혼인 신고서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턱이 굳어졌다. “이리 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몇 초 후, 그가 일어나 내게로 왔고 내 앞에 서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지태랑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어. 넌 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정말 농담이었을까?“너도 알잖아. 남자들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 거.”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혼인 신고서를 빼앗아 갔다.“앞으로는 남의 말 함부로 믿지 마.” 그가 돌아서서 혼인 신고서를 서랍에 넣고 옆에 있
하루 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오후에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난 그를 따라나섰다.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리고 퇴근 후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왜 말이 없어?”돌아가는 길에 강유형이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강유형, 우리 그냥...”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차량 디스플레이에 이름 없는 번호가 떴고 강유형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가 긴장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재빨리 차량 스피커를 끄고 블루투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통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아,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데려다줄 수가 없겠어.”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까.그래도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먼저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었다.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텅 비어 아파왔고 나는 서운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강유형의 턱이 굳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밖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내려줄게. 택시 타고 돌아가.”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더 묻고 떼를 쓰는 건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일 뿐이다.“집에 도착하면 전화... 메시지 보내.” 강유형이 당부하는 사이 핸들은 이미 돌아가 도로변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섰다.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렸다.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가 발신번호를 본 후의 이상한 반응부터 차량 스피커로 통화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이미 예감이 왔다.다만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뿐이다.어떤 일들은 묻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로 두고 자기 위안을 할 수 있으니.“조심해서 가!” 서두르는 와중에
그는 늘 믿음직스럽고 정직한 얼굴이었다. 거짓말을 해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진솔해 보였고 지금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를 보고 나는 더 이상 그가 농담하는지조차 추궁할 수 없었다. 그래도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그건 애들 장난이지. 그런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진정우, 정말 왜 이래?”그는 채소를 자르던 손을 잠시 멈추더니 짧게 말했다.“너니까.”정말이지, 이 남자. 달콤한 말을 할 때는 과하다 싶을 정도다.“언니, 나도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든요.”진소영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함께 데려가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강유형에게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강유형은 내가 진정우를 데려가고 싶다고 오해했을 뿐이었다.진정우는 내가 데려갈 필요도 없이 놀이공원에 갈 것이었다. 놀이공원 후반 작업, 특히 조명 설계는 그의 손을 거친 결과물이니까.개장 광고는 엄청난 효과를 냈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마케팅팀은 사전 예측을 통해 시간대를 나눠 티켓을 판매하고 입장을 조절했다. 덕분에 혼란 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진정우와 나는 진소영을 데리고 전용 통로를 통해 입장했다. 진정우는 내가 특별 손님인 걸 알고 있었기에 진소영을 데리고 놀러 가고 나는 개막식 참석자용 대기실로 향했다.“지원아! 어서 와! 너희 삼촌이랑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한껏 멋을 낸 강유형의 어머니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나는 강유형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삼촌, 몸은 좀 어떠세요?”“아주 좋아. 밥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시고 잠도 푹 자.”그는 농담처럼 말했다.강유형과 강진혁도 정장을 입고 나왔다. 두 사람 모두 훤칠해 눈길을 끌었다. 강유형의 어머니는 그런 두 아들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근데 너 혼자야?” 강유형이 물었다.“정우가 동생 데리고 놀러 갔어.”“점심에 연회가 열릴 거야. 그때 둘 다 같이 오라고 해.”강유형의 아버
“갈 거야.”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가야 했다.그곳은 내게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2년 동안 쏟아부은 노력, 무수한 밤의 땀방울, 내 기대와 후회, 그리고 나의 새로운 시작까지.초대장을 손에 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한 사람 더 데려가도 돼?”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진정우야?”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네가 오기만 하면 누구를 데려오든 상관없어.”이건 그의 양보였다. 예전의 그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고마워.”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강유형이 다시 나를 불렀다.“지원아, 내일 부모님도 오실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너를 기다릴 거야.”그는 분명히 내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다.“알겠어.”나의 대답을 듣고도 그는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았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결국, 그의 침묵 속에서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모든 영상 플랫폼과 지역 전광판에 모두 놀이공원 개장 광고가 떴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그만큼 확실히 알리고 싶다는 의미였다.천하의 강유형답게 그의 사업적 감각은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우리가 이렇게 멀어진 지금도 그의 능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언니, 이 놀이공원이 언니랑 오빠가 연애 시작한 장소 아니에요?”진소영이 TV 속 광고를 가리키며 물었다.그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고 진정우를 바라봤다.“맞아요?”“아니.”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그럼 어디예요?”진소영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진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 묻는 소영에게 내가 대신 말했다.“청평. 전에 얘기했던 그 작은 마을.”진정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미묘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정우가 주방으로 간 뒤, 나는 그를 따라갔다.“내가 뭔가 잘못 말했어?”“응.”그는 짧게 답했다.“뭔데?”나는 의아해하
혹시 조나연이 단순히 나에 대한 원망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걸까?그럴 리 없다. 조나연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데는 반드시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내가 반격하려는 순간, 진정우와 허진호가 나타났다. 진정우는 내 옆으로 걸어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조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애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조나연은 그의 강렬한 기세에 몸을 떨며, 더더욱 약한 척하며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만약 윤지원 씨가 강유형에게 가지 않았다면 당연히 상관없었겠죠.”진정우는 차갑게 비웃으며 대꾸했다.“두 사람은 10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서로 연락하면 어때서요?”그의 반격은 나조차도 조금 놀랐다. 조나연은 그의 태도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아마도 그녀는 진정우가 나를 이렇게까지 옹호할 줄 몰랐을 것이다.그 순간, 그녀가 왜 이런 소란을 피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조나연은 내 연인 관계를 흔들어 놓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강유형에게 돌아간다면? 그녀는 그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하지만 저 여자가 계속 강유형과 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잖아요.”조나연은 다시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정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만약 당신과 강유형의 관계가 정말로 탄탄하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지원 씨가 나쁜 여자라고 나더러 믿으라고 이러는 거잖아요.”역시 진정우다. 그는 조나연의 얕은 속셈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조나연이 입을 열려 하자, 진정우는 내 손을 잡으며 그녀에게 한 방을 더 날렸다.“조나연 씨, 당신이 지원 씨의 남자 친구를 빼앗은 건 알겠는데 감히 여기까지 와서 지원 씨를 괴롭히다니요. 대체 무슨 배짱으로요?”그 순간, 주변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참 뻔뻔하네!”그 말을 듣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조나연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꼭 뺨이라도 맞은 듯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를 더 몰아붙일 수도
조나연이 나를 찾아온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다만 우리 회사로 직접 찾아왔다는 점이 의외였다. 차라리 아파트 앞이나 집 근처에서 기다릴 줄 알았다.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당연히 강유형과 관련된 일이겠지만 이제는 그녀와 말다툼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래서 리셉션 직원에게 간단히 말했다.“그냥 제가 없다고 전하세요.”그런데 퇴근 시간이 되어도 그녀는 여전히 회사를 떠나지 않고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 부장님, 그분이 반나절 동안 계속 기다리고 계세요. 드린 물도 손도 안 대셨고요. 임신한 몸이신데 혹시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할 것 같아요.” 리셉션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조나연은 동정심을 유발하며 나를 압박하려는 속셈이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다음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나를 괴롭힐 게 분명했다.“일이 생기든 말든 우리와는 상관없어요. 기다리고 싶으면 기다리라 하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한 뒤 건물을 나섰다.“지원 씨!”갑자기 조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그 소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었다. 뒤돌아보니 그녀가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하얀 실크 소재의 임산부 드레스를 입고 약간 부른 배를 내보이며, 얼굴에는 약간 홍조가 감돌았다. 아마 방금 큰 소리를 낸 탓일 것이다.“왜 저를 피하는 거예요?” 그녀는 원망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피하는 게 아니라, 만나기 싫어서 안 만나는 겁니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특유의 약한 척하는 모습으로 힘없이 말했다.“찔리니까 그런 거죠.”그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강유형에게 저에 대해 고자질한 거예요? 왜 헤어졌으면서도 여전히 그와 얽혀 있는 거죠?”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쏘아붙였다.그녀가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제 우리 둘 주변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두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화제를
계단 위에 서 있는 남자를 보니, 내가 굳이 거절의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진정우는 검은 반팔 티셔츠에 작업복 스타일의 팬츠를 입고, 검은 오토바이 옆에 서 있었다. 그의 강렬하고도 매력적인 모습에 시선이 저절로 끌렸다.이런 모습의 진정우는 처음이었다.하지만 이런 남자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예전에 강유형도 이런 모습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자신감 넘쳤던 때가 있었다.그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던 기억이 난다.그리고 지금도 생생하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 그의 허리를 감싸고, 밤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그 짜릿한 순간들이.“아직도 오토바이를 좋아하나 봐?”잠시 넋이 나간 사이, 강유형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의도를 눈치챘지만, 나는 가볍게 미소만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정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진정우는 내가 다가가자마자 천천히 걸음을 맞춰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를 막아섰다.진수로!우리 회사의 대표님이자, 진정우와 나의 현재 상사였다.그는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 빳빳한 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그의 단단한 배와 진정우의 날렵한 체격은 대비가 극명했다.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마치 진정우가 진수로에게 지시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진수로가 나를 흘끗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진정우는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그가 강유형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나만 향하고 있었고, 걸음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그의 발걸음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오래 기다렸어?”나는 계단 위, 그는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덕분에 우리 눈높이가 나란히 맞았다.“아니.”진정우의 눈빛은 깊고 진지했다.그의 눈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고, 그의 말처럼 그의 마음도 정직하고 솔직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가자.”그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그때 진수로가
“지원 씨, 지금 강유형과 같이 계세요? 제 전화 좀 받아달라고 해주실 수 있나요?”조나연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방 안이 워낙 조용하다 보니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했다.동시에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 섞인 숨소리와 함께 모든 시선이 내 휴대폰과 강유형 사이를 오갔다.나는 주변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고 강유형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조나연 씨, 혹시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당신 남자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왜 저한테 전화하시는 거죠?”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마치 이 큰 공간 안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제... 제 전화를 안 받으까요...”조나연의 목소리는 분명히 기운이 빠져 있었다.“아, 그렇군요.”나는 비웃듯 짧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제가 받아보라고 하면 정말 받을 것 같으세요?”내 말이 끝나자 조나연은 대답하지 못했고 대신 강유형이 내 휴대폰을 확 낚아채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나는 그를 보고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이렇게 행동하시면 당신 여자 친구가 더 오해하지 않겠어요? 제가 일부러 대표님께서 전화를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말이죠.”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목을 잡아 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강유형!”신지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비켜.”강유형은 짧게 말하며 신지태를 밀어냈다.신지태는 내가 다치지 않을까 염려해 따라오려고 했지만 누군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지태야, 저 둘은 아직 풀지 못한 게 있는 것 같아. 네가 끼어들 필요 없어.”그들에게는 내가 여전히 강유형과 잘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걸까.하지만 방금 전의 대화는 나를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방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세게 뿌리치며 말했다.“강유형, 네 문제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 내 손 더럽히지 말고.”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남자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강유형의 곁에 있을 때 나는 늘 그에게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 좀 하라고 말했었다. 어울리기 너무 어려운 사람으로 보이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땐 그나마 좀 나았는데 지금의 강유형은 완전히 혼자 겉도는 느낌이었다.“유형이 너랑 헤어진 이후로 쟤 완전히 딴사람이 됐어. 맨날 저런 얼굴로 세상 다 빚진 사람처럼 굴잖아."신지태가 나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의 말을 흘리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지태 오빠,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나는 그가 지금 시합 때문에 정신이 없겠지만 이 부탁은 그만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었다.“뭔데?”신지태는 먼저 동의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우리 부모님 교통사고의 진짜 원인을 좀 알아봐 줄래?”그러자 그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준비해 온 사고 감정서와 의문점을 그에게 보여주었다.“지태 오빠, 날 도와 줄 수 있는 건 오빠뿐이야.”“지원아, 그걸 알아낸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는데?”신지태가 되물었다.나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달라질 건 없어. 부모님이 돌아오실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난 진실을 알고 싶어. 그래야 부모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알아볼 거야? 어떤 결과가 나와도 괜찮아?”“응. 반드시 알아내야겠어.”“알았어.”신지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러자 안도의 숨이 나왔다.“지태 오빠, 비용은 내가 낼게.”신지태도 분명히 다른 사람을 시켜서 조사할 것이고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그래. 근데 결과 나오고 나서 얘기하자.”그도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듯 가볍게 말했다.신지태와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모두 술에 취해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어 있었다.“지태야! 빨리 와. 오늘 네가 주인공이잖아! 그리고 지원아, 너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보다 지태랑만 붙어 있잖아!”나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지태 오빠가 나 잘 챙겨
나는 조나연을 따라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내가 사는 아파트의 단지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를 보자 머릿속에 딱 두 글자가 떠올랐다.어이없었다.그녀가 바로 내 위층에 살고 있었다.이게 정말 우연일까, 아니면 의도된 걸까?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다행인 건 내 옆집 이웃은 거의 집에 오지 않는 사람이라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거다. 나는 앞으로 조나연과도 절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그녀의 무거운 걸음걸이를 보니 출산이 가까운 듯했다.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녀는 돈이 없어서 기본적인 물건조차 사기 어려워 보였는데 이런 고급 아파트에 산다니 누가 도왔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강유형.그는 여전히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하면서 뒤에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내가 그런 그를 떠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는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 보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며칠 뒤, 지태 오빠가 경기를 마치고 돌아왔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우승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으니 함께하자고 했다.“너 경기 보러 못 와서 아쉬웠잖아. 축하 파티엔 꼭 와야지.”나는 고민스러웠다. 그 자리에 강유형과 그의 친구들이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다음에 따로 축하하면 안 될까?”하지만 신지태는 단호했다.“내일 바로 해외로 나가야 해. 이번 아니면 기회 없어.”내가 망설이자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설마 강유형이랑 마주치는 게 불편해서 그런 거야?”“맞아.”나는 솔직히 인정했다.그러자 신지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그건 네가 아직도 강유형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는 뜻이야. 만약 정말로 다 정리했다면 강유형도 그냥 아는 사람일 뿐이잖아.”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태 오빠조차 이렇게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 특히 강유형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정말 너무해. 내 말도 안 들어보고 이렇게 구는 거야?”“내가 언제 안 들었어. 네 얘기를 들으려고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그의 말에 나는 머릿속으로 그가 얼마나 초조했을지 그려졌다.내가 없어진 걸 알고 CCTV까지 확인하며 나를 찾아다녔겠지. 그리고 결국 내가 강유형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강유형이 말한 대로 진정우는 나를 찾기 위해 애썼다.나는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전화 못 받은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땐 내가 중환자실에 있었거든.”“알아.”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래서 화내지 않았어. 그리고 전화가 안 됐던 이유는 집에 가면 얘기해줄게.”그는 멀리 보이는 아파트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네가 어젯밤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어. 물도 안 마셨고. 정말 피곤하고 목이 말라.”그의 말에 마음이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이끌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간 걸 알면서 왜 잠도 안 자고 물도 안 마신 거야? 대체 뭘 했길래 이래?”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나를 따라 걸었다. 그의 상태가 걱정돼 더 이상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짐을 내려놓고 과일을 정리하더니 나를 신발장 쪽으로 밀어붙였다.그의 강렬한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멎을 듯해 나는 침을 삼켰다.“물 준비해 놨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질투 났어.”그의 말에 나는 놀라 멈췄다.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걸 이해한다는 말투였는데, 이제 와서 질투했다고?“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 말을 막았다.그의 품에 안겨 입맞춤을 나누며 그의 목마름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졌다. 거칠고 마른 입술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따뜻했다.“네가 한 일을 이해해. 그래도 질투는 멈출 수 없더라.”그가 입맞춤을 멈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