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진이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밝게 웃던 모습과 달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나는 몰랐다.“하지만 석진 씨도 사람이에요. 그도 지쳤죠. 여러 번 몰래 그가 한밤중에 일어나 담배를 피우는 걸 봤어요. 그럴 때마다 정말 마음이 아팠고 제가 짐이 된 것 같아 스스로를 원망했어요.” 조나연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을 이었다.“그래서 그와 헤어지고 싶었어요. 완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갑자기 그녀의 말투와 태도가 바뀌었다. 자신이 임석진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러자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은 안 힘들겠네요. 이제 영원히 안 힘들겠죠.”조나연은 내 말에서 비꼬는 의도를 느꼈는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내 삶을 살아보지 않았잖아요. 내 고통을 이해할 리가 없죠.”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의 외치는 듯 말했다.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이내 조금씩 가라앉았다.“지원 씨, 석진 씨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정말로 내가 그를 해치려 한 게 아니에요. 나는 단지... 나의 배신을 발견하면서 자발적으로 나를 떠나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그를 자유롭게 해주려고요.”나는 가만히 물었다. “그럼 그 사고는... 정말 당신 짓이 아니에요?”조나연은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석진 씨는 나에게 너무 잘해줬어요. 내가 짐승도 아닌데 어떻게 그를 죽일 생각을 하겠어요?”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그래도 결국 당신 때문에 죽었잖아요.”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핑계를 차단했다.조나연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다음 생에... 내가 더 잘할게요. 석진 씨한테...”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다음 생에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석진 씨는 당신을 보고 도망칠 거예요.”내 말은 한층 날카롭게 그녀를 찔렀다.내심 아이만 없었다면 그녀를 붙잡
조나연의 말에 나는 어이없었다.“강유형이요? 그 사람을 원한다고요?”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조나연은 내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맞아요. 강유형 그 사람이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의 마음이 아니라, 그의 존재예요.”나는 그 말에 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대단한 여자네.’“조나연 씨,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당신이 원하는 건 강유형이 아니라, 그의 신분과 그 뒤에 숨겨진 부잖아요.”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그건 부정하지 않아요. 하지만...”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비수처럼 날카로운 한마디를 내뱉었다.“하지만 그동안 유형 씨가 저에게 잘해줬어요. 너무 잘해줘서 저도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어요. 이제는 그와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그 말을 듣자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나를 겨냥하듯, 강유형이 자신에게 잘해줬다는 점을 강조한 그녀의 말투에 감춰진 의도가 뻔히 보였다.그래서 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가 그렇게 잘해줬다면 왜 도망쳤을까요?”조나연의 얼굴이 굳었고 나는 계속 이어 말했다.“그가 정말로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세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돌아오기만 하면 제가 방법을 찾겠어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냉정히 말했다.“그럼 당신이 알아서 돌아오게 해 보세요. 저는 도와줄 생각이 없으니까요.”그녀는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 몸이 휘청거렸고 그래서 차 문을 꽉 잡았다.“왜요? 설마 아직도 유형 씨를 사랑해요?”그녀의 말에 나는 짧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렇게 믿으세요.”조나연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무릎 꿇고 계시면 아기한테도 안 좋으니까 이제 일어나세요. 저도 가야 하거든요.”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지원 씨가 강유형 씨에게 연락하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그녀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
강유형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조나연은 이미 눈물이 가득 고였고 목소리가 떨렸다.“유형아... 나 정말 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그녀는 간절하게 애원했지만 강유형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조나연은 초조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며 물었다.“유형아, 너 듣고 있는 거 맞지? 듣고 있어?”화면에는 여전히 통화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지만 강유형은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다 마침내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조나연, 네가 우리 집에 간 거, 누가 시켰어? 내가 너한테 뭐라고 경고했는지 잊었어?”그녀는 핸드폰을 쥔 손을 떨며 변명했다.“유형아, 어쩔 수 없었어... 난 이 아이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아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안 된다고 했잖아.”그녀의 태도에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이를 없애겠다고 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강유형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이번이 마지막이야. 조나연.”“유형아...!”하지만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통화는 종료되었고 핸드폰에서는 뚜뚜 신호음만 울렸다.조나연은 멍하니 핸드폰을 쥔 채 계속 이름을 불렀다.“유형아, 유형아...”나는 차분히 말했다.“전화 끊겼으니까 핸드폰 돌려줘요. 이제 끝난 거 같네요.”그녀는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고 앉아버렸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나는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운전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그녀가 했던 말들과 임석진의 죽음이 떠올랐다. 정신이 흐려져 어떻게 운전했는지도 모른 채 민원센터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이러다 큰일 나겠다.’나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화장증명서와 서류를 들고 걸어갔다.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은 이를 확인한 뒤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불렀다.“잠깐만요.”직원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네?”“부모님 자료 좀 찍어두고 싶어서요. 기념으로요.”사진을 찍고 나자 직원은 곧바로
낙태라고?조나연은 끝까지 사고를 치며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녀가 뭘 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미 내 마음과 몸이 지쳐 있었기에 그녀에게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알아서 하라고 전해.”나는 단호히 안리영에게 말했다.“어머? 이번엔 정의의 여신 안 할 거야?”안리영이 비꼬듯 물었다. 내가 얼마나 참견이 심했는지 보여주는 말이었다.“정의의 여신? 이제 그런 거 없어. 나도 타락했거든.”나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고 안리영은 큰소리로 나를 비웃었다.“좋아, 마음에 들어. 계속 그렇게 해봐.”전화를 끊고 재개발 사무소로 향해 서류를 제출하고 서명했다. 직원은 삼일 안에 집을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며 안내장을 건넸다.철거 공지를 받았을 때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기한이 정해지니 그 현실이 무겁게 다가왔다.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아파트 입구에 서서 오랫동안 위를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이 시간에 마주쳤을 아줌마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이미 떠난 것이다.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나를 누군가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고개를 돌리자 진정우가 서 있었다.그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배고프지 않아?”진정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고 대신 차분히 물었다.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모든 게 너무 피곤하고 버겁게 느껴졌다. 말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힘들지?”그는 내 상태를 단번에 알아차렸다.나는 짧게 "응" 하고 대답했다.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내가 이미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아무 말 없이 따라왔다.그리고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조용히 받아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 한마디 없이 함께 계단을 올랐다.마지막 계단에 도착했을 때, 나는 손을 뻗었다. 진정우는 가방을 내주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그가 원하는 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조용히 말했다.“부모님 주민등록 말소 처리했어. 너무 지쳐서
모든 것이 내 착각이었다.방금 전 들렸던 아버지의 목소리도, 단지 환청에 불과했다.부모님은 이미 10년 전에 나를 떠나셨다.그런데 내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다니...나는 허탈감에 빠져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둠이 드리웠다. 창밖의 마지막 빛줄기가 사라지자, 온 집 안이 깜깜해졌다.그제야 마음속 깊이 묻어둔 부모님을 잃은 슬픔이 터져 나왔다.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라 결국 흐르고 말았다.그날 밤, 꿈속에서 내내 부모님과 함께했다.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온몸이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들고 하루 종일 일한 것처럼 지쳤다.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제야 내가 병에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약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때, 문밖에서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일어났어?”나는 입을 열어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목구멍을 칼로 도려낸 듯 아팠다. 결국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나 많이 아파. 문 앞에 열쇠가 있으니까 열고 들어와."진정우는 내가 준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몇 초 지나지 않아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곧바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고 그의 차가운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그 순간 뜨거운 열기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으며 편안해졌다. 나는 더 기대고 싶었지만 그는 곧 손을 거두었다.“열이 나네. 병원 가야겠어.” 그 순간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얼굴에 댔다. 그러자 그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병원에 가자.”“그냥 약만 먹으면 돼...”나는 힘들게 대답했지만 그는 단호했다.“약은 먹어야지. 근데 병원도 가야 해.”그는 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약을 가지러 갔다.그리고 곧 물과 약을 들고 돌아온 그는 나를 부드럽게 일으켜 약을 먹였다.내가 조금 숨을 고르자 그는 말했다.“이제 병원 가서 검사받아야지.”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다시 내 이마에 키스하며
“파스타 두 개 주세요. 하나는 토마토소스 대신 블랙페퍼소스로요. 그리고 망고주스 한 잔, 따뜻한 물 한 잔, 저칼로리 블루베리 케이크도 하나 추가요.”구안석 교수가 우아한 태도로 주문을 마쳤다.들으니 분명히 두 사람 몫이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완전히 안리영 취향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특히 그녀가 블랙페퍼소스를 좋아한다는 디테일까지 반영되어 있었다. 이건 그녀를 잘 아는 사람, 혹은 세심하게 관찰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왜냐하면, 그녀는 겉으론 가리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 토마토소스가 들어간 음식은 절대 손도 대지 않는 사람이었다.몇 년 만에 다시 만났고 이제 막 관계를 시작한 상황인데 구 교수가 그녀의 이런 디테일한 취향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그들의 관계를 두고 비웃었지만 지금 보니 내가 몰랐던 면들이 보였다.“우리도 주문하자.”진정우가 내 손을 가볍게 쥐며 부드럽게 말했다.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서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병원 근처에서 이렇게 식사하는 걸 보면,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 시간을 깨는 건 누가 봐도 민폐였다.진정우는 내가 아프다는 걸 알았는지 내 취향을 고려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는 음식을 골랐다.“디저트는 다음에 먹자. 지금은 목이 아프니까 나중에 먹는 게 나을 거야.”진정우의 세심함은 구안석 못지않았다. 디저트는 주문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해 줬다. 멀리서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구안석과 안리영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괜히 진정우에게 장난을 쳤다.“만약 내가 꼭 먹고 싶다고 하면?”연애를 하면서 여자들이 가끔 투정을 부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오히려 사랑받는 기분이 드니까.그런데 안리영과 구안석의 연애는 내게 너무 밋밋해 보였다. 마치 오늘 내가 먹는 싱거운 죽처럼 말이다.“그럼 조금만 먹어. 하지만 많이는 안 돼.”진정우
카카오톡을 열어보니 친구 추가 요청이 와 있었다. 나는 낯선 사람은 잘 추가하지 않는데 번호로 나를 검색해 추가한 사람이라면 모를까.별생각 없이 요청을 눌러보니 ‘정의는 마음속에’라는 닉네임이 뜨고 메시지로 [저는 신 경찰관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이렇게 당당하게 자기가 경찰관이라고 하는 건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다.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제 사망 확인서를 발급해 줬던 경찰관이 떠올랐다.그때 이름을 물어보진 않았지만 최근에 접촉한 경찰은 그가 유일했다. 게다가 그가 내 번호도 가져갔으니 틀림없을 것이다.수락을 누르니 바로 친구로 추가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그가 먼저 요청을 보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연락을 해오겠지 싶었다.그 대신 안리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연애할 때는 좀 밀당도 하고 귀여운 척도 하고 애교도 부려야 해. 너처럼 철벽 쳐가며 굴면 남자가 널 보호하고 싶어 하겠냐고.]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안리영을 바라봤지 안리영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치 휴대폰을 들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그래도 답장을 바로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냥 다음번엔 참고하라는 의미로 보냈을 뿐이었다.“문자 그만하고 밥 먹어.”진정우가 내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나는 얌전히 대답하며 면을 먹기 시작했다.하지만 목이 아파서 많이 먹을 수 없었다. 대신 달콤한 과일 주스는 정말 맛있었다. 특히 목을 부드럽게 해줘서 좋았다. 만약 아이스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진정우는 내가 생리 중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따뜻하게 주문했다.나는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고 주스만 홀짝였지만 진정우는 정말 열심히 식사를 했다.그는 겉모습은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먹는 모습은 전혀 거칠지 않았다. 다만 먹는 속도가 꽤 빨라서, 접시가 순식간에 깨끗해졌다.게다가 음식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모습은 오늘뿐만이 아니었다.내가 그를 알게 된 이후로 쭉 그랬다.이건 그의 오랜 습관처럼 보였다. 마치 어릴 적 부모님이 나에게 “음식을 남기지
진정우가 빠르게 내 손에서 흘러내릴 뻔한 주스를 잡아줬다.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지원, 정말 잘한다. 나중에 스승님으로 모셔야겠어.”안리영이었다. 결국 내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모양이다.나는 그녀를 살짝 때리며 말했다.“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놀라게 해서 큰일 나면 난 보상도 못 해줘. 안 그래요, 정우 씨?”안리영이 진정우를 놀리며 말했다.구 교수 앞에서는 양처럼 얌전하더니 우리 앞에서는 거리낌 없는 모습이다.어떻게 구 교수 앞에서는 그렇게 태연히 순한 척을 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그나저나 구 교수는 어디 갔어?”나는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물었다. “갔어.”안리영이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진정우를 향해 농담을 던졌다.“정우 씨, 혼자 두 그릇 시켜 먹었어요? 우리 지원이건 아무것도 시켜주지 않고? 여자 친구 너무 안 챙기는 거 아니에요?이 말은 분명히 일부러 한 것이었다. 그녀는 진정우가 내 남은 음식을 먹은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팔꿈치로 살짝 찌르며 진정우가 어색해질가봐 장난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진정우는 여전히 태연하게 먹으며 말했다.“이게 지원 씨 거예요.”“오, 두 사람이 한 그릇을 나눠 먹는 거예요? 정우 씨도 참 로맨틱하네요.”안리영은 계속 놀렸다.“네. 리영 씨도 구 교수님과 한 번 해보세요.”진정우가 태연히 받아쳤다. 그러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안리영은 내 팔을 꼬집었는데 하필이면 혈액 검사를 했던 팔이었다.“아야, 아파.”내가 말하자 진정우가 바로 말했다.“그 팔은 방금 피 뽑은 데예요.”안리영이 깜짝 놀라며 내게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나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투덜댔다.“열이 좀 났어. 그러니까 아픈 사람 괴롭히지 마.”그녀는 내 이마에 손을 올려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열이라니? 어디가 아픈데?”“목이 아파. 아파서 미칠 것 같았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