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을 열어보니 친구 추가 요청이 와 있었다. 나는 낯선 사람은 잘 추가하지 않는데 번호로 나를 검색해 추가한 사람이라면 모를까.별생각 없이 요청을 눌러보니 ‘정의는 마음속에’라는 닉네임이 뜨고 메시지로 [저는 신 경찰관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이렇게 당당하게 자기가 경찰관이라고 하는 건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다.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제 사망 확인서를 발급해 줬던 경찰관이 떠올랐다.그때 이름을 물어보진 않았지만 최근에 접촉한 경찰은 그가 유일했다. 게다가 그가 내 번호도 가져갔으니 틀림없을 것이다.수락을 누르니 바로 친구로 추가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그가 먼저 요청을 보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연락을 해오겠지 싶었다.그 대신 안리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연애할 때는 좀 밀당도 하고 귀여운 척도 하고 애교도 부려야 해. 너처럼 철벽 쳐가며 굴면 남자가 널 보호하고 싶어 하겠냐고.]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안리영을 바라봤지 안리영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치 휴대폰을 들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그래도 답장을 바로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냥 다음번엔 참고하라는 의미로 보냈을 뿐이었다.“문자 그만하고 밥 먹어.”진정우가 내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나는 얌전히 대답하며 면을 먹기 시작했다.하지만 목이 아파서 많이 먹을 수 없었다. 대신 달콤한 과일 주스는 정말 맛있었다. 특히 목을 부드럽게 해줘서 좋았다. 만약 아이스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진정우는 내가 생리 중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따뜻하게 주문했다.나는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고 주스만 홀짝였지만 진정우는 정말 열심히 식사를 했다.그는 겉모습은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먹는 모습은 전혀 거칠지 않았다. 다만 먹는 속도가 꽤 빨라서, 접시가 순식간에 깨끗해졌다.게다가 음식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모습은 오늘뿐만이 아니었다.내가 그를 알게 된 이후로 쭉 그랬다.이건 그의 오랜 습관처럼 보였다. 마치 어릴 적 부모님이 나에게 “음식을 남기지
진정우가 빠르게 내 손에서 흘러내릴 뻔한 주스를 잡아줬다.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지원, 정말 잘한다. 나중에 스승님으로 모셔야겠어.”안리영이었다. 결국 내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모양이다.나는 그녀를 살짝 때리며 말했다.“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놀라게 해서 큰일 나면 난 보상도 못 해줘. 안 그래요, 정우 씨?”안리영이 진정우를 놀리며 말했다.구 교수 앞에서는 양처럼 얌전하더니 우리 앞에서는 거리낌 없는 모습이다.어떻게 구 교수 앞에서는 그렇게 태연히 순한 척을 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그나저나 구 교수는 어디 갔어?”나는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물었다. “갔어.”안리영이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진정우를 향해 농담을 던졌다.“정우 씨, 혼자 두 그릇 시켜 먹었어요? 우리 지원이건 아무것도 시켜주지 않고? 여자 친구 너무 안 챙기는 거 아니에요?이 말은 분명히 일부러 한 것이었다. 그녀는 진정우가 내 남은 음식을 먹은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팔꿈치로 살짝 찌르며 진정우가 어색해질가봐 장난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진정우는 여전히 태연하게 먹으며 말했다.“이게 지원 씨 거예요.”“오, 두 사람이 한 그릇을 나눠 먹는 거예요? 정우 씨도 참 로맨틱하네요.”안리영은 계속 놀렸다.“네. 리영 씨도 구 교수님과 한 번 해보세요.”진정우가 태연히 받아쳤다. 그러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안리영은 내 팔을 꼬집었는데 하필이면 혈액 검사를 했던 팔이었다.“아야, 아파.”내가 말하자 진정우가 바로 말했다.“그 팔은 방금 피 뽑은 데예요.”안리영이 깜짝 놀라며 내게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나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투덜댔다.“열이 좀 났어. 그러니까 아픈 사람 괴롭히지 마.”그녀는 내 이마에 손을 올려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열이라니? 어디가 아픈데?”“목이 아파. 아파서 미칠 것 같았어.”
안리영이 차갑게 말했다.“이미 경고했죠.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세요. 또 오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러나 남자는 물러서지 않고 이어갔다.“리영 씨, 저는 괴롭히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좋아서 정말로 진심으로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었을 뿐이에요...”그 말을 듣자 며칠 전 꽃을 보낸 남자가 떠올랐다.“리영 씨, 맹세할게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어요. 진심입니다!” 남자가 손을 들며 말했다.“리영이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싫어했을 텐데요.”내가 말을 받아치며 안리영 옆에 섰다. 진정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지켜봤다. 그는 언제든 이 남자를 제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이때 그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누구세요? 내가 리영 씨랑 얘기 중인데 왜 끼어드는 거죠?”그 말에 정말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그럼 당신은 뭐길래 좋아한다고 하면 우리 리영이가 대답해야 하나요?” 나는 전혀 굽히지 않고 맞받아쳤다.“나는 리영 씨를 정말 순수하게 좋아해요. 그런 사랑을 당신이 알 리가 없죠.” 남자는 점점 이상한 말을 늘어놓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치 내가 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듯한 태도였다.나는 남자를 한참 동안 훑어보았다. 상의는 아디다스, 바지는 나이키, 신발은 퓨마. 전부 메이커 같지만 고급 짝퉁인 게 뻔히 보였다.“사람이 돈이 없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적어도 솔직해야죠.” 나는 비꼬며 말했다.처음 진정우를 만났을 때, 그는 평범한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비록 소박했지만 믿음이 갔다.하지만 이 남자는 겉만 번지르르한 가짜였다.그가 찬 시계가 그 유명한 녹색 롤렉스 짝퉁이라는 걸 알아보고 웃음이 나왔다. 나는 가차 없이 물었다.“당신은 뭘 믿고 리영 씨를 좋아한다고 말하죠? 돈이 있나요? 엄청 많아요?”남자는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어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전기세 100원만 올라가도 투덜댈 것 같은데 그런 주
안리영은 창밖에서 서 있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언제쯤 끝날까?”밖에 서 있는 남자는 진정우에게 무릎이라도 꿇을 듯 애원하고 있었다. 진정우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었고 아침 햇살이 그의 몸을 감싸며 빛나고 있었다.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자부심과 행복감이 차올랐다.‘그래, 저 사람은 내 남자야.’진정우와의 시작은 단순히 우연이었다. 가볍게 흘려보낼 생각으로 시작했던 관계였고 강유형과 헤어진 후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의도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진정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진가를 매일 새롭게 발견하며, 내가 얼마나 행운인지 깨닫고 있었다.“대답 좀 해 봐. 물어봤잖아.”안리영이 어깨로 나를 살짝 찌르며 말했다.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아마 곧 끝날 거야.”내 예상이 맞다면, 밖에 있는 남자는 진정우에게 어깨를 고쳐 달라고 애원하고 있을 것이다. 전에 진소영이 말하기를, 진정우가 접골을 할 줄 아는 이유는 어릴 적 마을 어르신에게 배운 기술 덕분이라고 했다. 진소영이 자주 팔이 탈구되어 어르신을 찾았고 진정우는 자연스럽게 그 과정을 지켜보며 기술을 익혔다고 했다.결국 그는 탈구된 팔을 고치는 방법을 배웠고 반대로 탈구를 유도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 남자는 끊임없이 진정우에게 애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우는 그를 완전히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라, 결국 어깨를 고쳐줄 것이다. 게다가 진정우는 나와 함께 혈액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가야 하니, 그 남자와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아마 우리가 나가면 바로 끝날 거야.”나는 덧붙여 말했다.안리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럼 나가면서 얘기하자.”안리영은 의자에 걸쳐 둔 외투를 내 어깨에 걸쳐 주며 천천히 말했다.“어제 조나연 말인데 네가 통화 끝나고 바로 예약 잡고 수술 준비했거든. 근데 돈만 내고 또 도망갔더라니까.”나는 고개를 저
안리영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꺼냈다.“네가 예전부터 이렇게 했다면 강유형이 도망가진 않았을 거야.”현 남자 친구 앞에서 전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내는 건 최악이다.그녀가 나를 해치려는 게 아닌 건 알지만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궁금했다. 고개를 돌려 안리영이 나에게 살짝 윙크를 했다.그녀는 진정우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거다. 아무리 대범한 남자라도 여자 친구의 과거 연애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하지만 왜 굳이...괜히 진정우를 자극해서 도망가게 만들 수도 있는데 말이다.나는 몰래 진정우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과 달리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안리영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정우 씨, 그렇지 않나요?”나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 순간, 진정우가 짧게 대답했다.“지원이는 저한테만 애교 부려요.”그 한마디에 공기마저 달콤해졌다. 이 사람, 대답 하나로 상황을 완벽히 마무리했다.안리영은 감탄하듯 혀를 차며 말했다.“진짜 의외네요. 정우 씨, 이성적이고 무뚝뚝한 분인 줄 알았는데 로맨틱한 면이 이렇게 많다니.”진정우는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화학에서도 양자 반응이라는 게 있어요. 각 반응은 결합한 양자 상태에 따라 매번 달라지죠. 지원이랑 있으면 제가 달라지는 것처럼.”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사랑을 이렇게 과학적으로 풀어낸다니, 역시 진정우답다.그러자 안리영이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했다.“정우 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너 진짜 복 받았네.”내 마음속에 자부심이 가득 찼다. 이 사람과 만난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그때 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지원아, 그러면 조나연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맞아. 조나연이 아니었으면 내가 정우를 어떻게 만났겠어?”그 말을 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진정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안리영은 웃으며 장난을 쳤다.“그만해. 다행히 배부르게 안
허진호가 나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겠다고 하자 조금 놀랐다. 사실 아까 병원에서 채혈할 때 진정우가 귓속말로 그런 얘기를 했었다. 그때는 단순히 내 주의를 돌리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게 진짜가 될 줄은 몰랐다.“대표님이 초대한 거야?”진정우가 확인하듯 물었다.“응.” 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네 대표님한테 부탁한 거 아니야?”진정우가 허진호의 상사라면 한마디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야.”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거라 생각하며 비웃었다.“미리 나한테 얘기했어.” 진정우가 다시 입을 열며 말했다..그 말이 과연 진짜일까? 아니면 그냥 둘러대는 걸까?나는 더 이상 캐묻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초대받은 자리라면 거절할 이유도 없어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나 간다고 했어. 너도 같이 갈 거지?”“응.” 역시 짧은 대답이었다. 만약 그의 말투를 분석할 수 있다면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쓰였을 것이다.“나는 내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밥 먹는 걸 허락 못 해.”진정우다운 단호한 대답이었다.한편, 진소영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감탄했다.“오빠, 정말 스윗하다! 언니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에요?”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당연하지.”“언니.” 진소영이 나를 불렀다.“오빠가 소설 속 남자 주인공보다 더 로맨틱하네요. 이런 모습은 상상도 못 했는데.”그녀는 아마 진정우 같은 무뚝뚝한 사람이 달콤한 말을 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그러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이야말로 숨겨진 매력이 있는 법이야. 너희 오빠 같은 사람은 전쟁 시절에 특급 첩보원이었을지도 몰라.”진소영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언니,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얘기예요?”아직 그녀는 내가 말하려던 깊은 뜻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진정우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오늘 저녁은 너 혼자 먹어야 할 텐데 뭐 먹고 싶어?
나와 진정우 사이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진정우가 자기 정체를 숨겼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진소영에게 이 일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심장이 약한 데다 예민해서 쓸데없는 걱정을 할 것이다.“아니야.”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랑 네 오빠 사이가 어떤지 너도 잘 알잖아.”진소영은 맑은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투명해서, 내가 괜히 거짓말을 하면 더럽혀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시선을 가리며 말했다.“정말이야. 믿기 어렵다면 나중에 네 오빠한테 직접 물어봐.”“언니!” 진소영이 내 팔을 꼭 끌어안고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오빠가 무슨 잘못을 해도 언니가 혼내기만 하고 절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말투는 마치 부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짝 기댔다.“알았어. 네가 그럼 대신 혼내 줘.”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니, 나는 항상 언니 편이에요.”그녀의 말에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언니, 만약 내가 사라지고 언니까지 떠나면 오빠는 정말 불쌍해질 거예요.”갑자기 진소영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무슨 소리야. 넌 아무 일 없을 거야.” 나는 그녀를 다독였다.진소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아무도 죽음을 원하지 않지만 그녀나 강유형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에게는 삶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나는 화제를 돌려 그녀와 공연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안리영에게서 전화가 왔다.“지금 소영이랑 같이 있어?”안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응. 왜, 무슨 일이야?”“누가 나한테 감귤을 한 박스나 보내왔는데 소영이한테 좀 가져다줘. 그 애가 좋아할 것 같아서.”안리영은 평소에도 환자 가족들에게 받은 선물을 동료들에게 나누곤 했다.“바로 갈게.”나는 진소영과의 대화도 잠시 멈추고 과일을
소지훈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놀란 듯 바라보았다.나도 내가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말했다.“제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소지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괜찮아요. 누나가 와 주시면 기뻐할 거예요.”그가 이렇게 말할 때 나를 보지 않고 혼잣말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의 태도에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그럼 따라오세요.”소지훈은 다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나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가 얼마나 클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뒷모습은 그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듯 무겁게 느껴졌다.소지훈은 나를 요양 병동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VIP 병실처럼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비용도 꽤 비쌀 것 같았다. 이런 곳에 입원할 수 있다면 그녀의 가정 형편이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병실 문 앞에서 소지훈이 멈추더니 나를 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기색이 있었다.“혹시 불편하시면 그냥 넘어가도 돼요.”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소지훈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누나랑 교수님은 정말 많이 닮았어요. 다만... 지금은 교수님이 많이 말라서...”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세상 어딘가에 나와 닮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외모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름다움은 마음에서 나오는 법이죠.”소지훈도 미소를 짓더니 병실 문을 열었다.안으로 들어서자 파란 작업복을 입은 간병인이 환자에게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일어섰다.“잠시 쉬세요. 제가 다시 부를게요.”소지훈은 공손하게 말했다. 간병인은 자리를 뜨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도 나와 환자가 닮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평소에는 간병인이 주로 돌보나요?”나는 침묵을 깨고 물었다. 소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일 때문에 늘 여기 있을 수는 없어서요.”그는 가져온 과일을 탁자에 올려놓고 침대 곁에 앉았다.
‘결벽증 있다더니 이게 무슨 행동이야?’헤르나는 안았다가 이제는 손까지 잡고 있었다.나는 손을 뿌리치려다 병실 안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침대에 누운 사람은 진정우가 아니었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저 여자를 데리고 온 거야?”헤르나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경기 데려가기 전에 들른 거야. 그런데 상태는 좀 어때?”그 말에 브라운의 얼굴은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헤르나는 일부러 그의 상처를 그것도 가장 굴욕적인 상처 들춰내고 있었다.브라운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떠올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 부위를 떠올렸고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복수는커녕, 이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날 조롱하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브라운의 분노가 병실에 울려 퍼졌지만 헤르나는 태연히 대답했다.“그냥 알리러 온 거야.”그는 내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이제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니까 건들지 마.”브라운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럼 난 괜히 당한 거야?”“네가 당한 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리고 널 다치게 한 사람도 얘가 아니야.”헤르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그제야 나는 헤르나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하지만 모든 게 저 여자 때문이었잖아.”브라운은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그건 네가 먼저 건드렸기 때문이지.”헤르나는 냉정하게 말했고 그의 말에 브라운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브라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푸른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그래도 저년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도대체 왜 신지태의 문제에 얽히려 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지.’나는 단순히 신지태가 걱정돼서 관여했을 뿐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강유형이 일부러 날 이런 상황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그 생각은 스쳐 갔지만
나는 헤르나의 말을 듣고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진정우가 용설아와 함께 온 건가? 이제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걸까? 항상 붙어 다니는 거야?’헤르나는 내 표정이 잠시 멍해진 것을 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네 눈이 네 입보다 솔직하네.”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병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숨 막히는 답답함을 삼키고 그의 뒤를 따랐다.내가 이곳에 올 때는 헤르나에게 기절당한 채 끌려왔지만 이제는 그의 고급 차량에 앉아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이동하고 있었다.하지만 창밖의 풍경은 또렷이 기억나는데 내 마음속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차가 멈추자 나는 옆에 앉은 헤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여기 병원에 왜 온 거죠?”“한 사람을 만나러.” 헤르나는 내 긴장한 모습을 흘깃 보며 말했다.“누구를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이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진정우를 생각하고 있는가 봐?”나는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이미 헤어졌잖아. 미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를 신경 써?”헤르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고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억지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헤어졌다고 해서 신경을 안 쓴다는 법은 없잖아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내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잠시 후, 그는 차에서 내렸다.“그게 진정우인지 아닌지는 네가 가서 보면 알겠지.”나는 차 안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만약 진정우라면 난 가지 않을 거예요.”“왜?” 헤르나가 웃으며 물었다.“그 사람에게는 약혼자가 있잖아요. 내가 전 연인으로 찾아가면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헤르나는 입가를 살짝 핥으며 웃었다.“선을 잘 지키네. 하지만…… 넌 가야 해.”“가지 않으면요?” 나는 그와 대립하듯 대꾸했다.“그럼 내가 널 안고 갈 거야.”나는 눈이 커
헤르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약속한 경기 날이 다가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날 진정우가 올 거라는 말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진정우가 오든 오지 않든,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아무리 깊은 사랑이라도 실망이 반복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걸, 강유형과 진정우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셋째 날 아침, 헤르나가 돌아왔다. 나는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아래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고개를 돌리니 연한 카키색 재킷과 흰색 캐주얼 팬츠를 입고 손에는 하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190cm가 넘는 그의 키와 탄탄한 체격은 마치 톱 모델처럼 보였다.“내려와.”그가 나를 부르자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는 꽃다발을 건네며 나를 가볍게 안으려 했다.그때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친하지도 않은 남녀 사이에 이건 아닌 것 같네요. 함부로 그러지 마세요.”나는 순간 뭔가 깨달았다. 헤르나는 나에게 유난히 관대한 것 같았고 내가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굴수록 그는 오히려 나를 더 흥미롭게 대했다.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늘 남들의 복종에 익숙해져서, 가끔 말을 안 듣고 반항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선하게 느끼는 모양이다.“하하, 참 쑥스러움이 많네.”그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소파로 걸어갔다.나는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경기 보러 언제 가요?”“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없으면 시작도 못 할 테니까.”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스누커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선수가 이런 부당한 현실 속에서 희생되었을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헤르나 씨, 이렇게 하면 양심에 찔리지는 않아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더라.”그는 정말 솔직했지만 그 솔직함이 오히려 화를 돋웠다.이틀 동
나는 강유형을 세게 밀치며 소리쳤다.“안 간다고 했잖아! 왜 자꾸 이래? 지금은 여기에 있고 싶어. 내가 늑대한테 잡아먹히든, 개한테 물리든 그게 네 일이야?”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 우린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 일에 간섭하지 마. 그리고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원하지 않아.”내 말에 강유형의 눈빛이 깊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지원아, 이건 네 선택이야. 후회하지 마.”“내 선택에 후회한 적 없어.”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그 말에 강유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등을 돌렸지만 몇 걸음 걷다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헤르나를 가리키며 말했다.“경고야. 지원이한테 손대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나를 한 번 쳐다본 후 떠났다.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 한구석에 묘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다.“그 자식 아직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헤르나가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고 나는 시선을 땅으로 떨구며 대답했다.“유통기한 지난 사랑은 아무리 좋아도 필요 없어요.”헤르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제법 똑똑한 소녀네.”그가 나를 칭찬한 건지, 아니면 내가 여기 남겠다고 한 선택이 현명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강유형과 함께 떠나겠다고 했더라면 그는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가자. 뭐라도 먹어야지. 오늘 특별히 중국 요리사를 불러서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준비했어.”헤르나는 마치 소중한 손님을 대접하듯 말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그의 '인질'인데도, 그는 나를 VIP처럼 대했다.식탁에는 다양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만두까지 있었다.'이 사람, 철저히 나를 조사했구나.'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했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왜 안 먹어?”그는 만두 하나를 내 접시에 놓으
내가 언제 헤르나의 사람이 됐다는 거지?헤르나는 일부러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고 순식간에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마치 내가 도화선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강유형은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어두운 눈빛으로 헤르나를 노려보았다.“헤르나 씨, 경찰의 관심을 끌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해 봐.”헤르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경찰을 들먹이다니, 너 수준이 진징우보다 조금 낮구나. 그래서 지원이가 너 대신 진정우를 선택했구나.”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헤르나... 정말 교활한 자식이야. 강유형과 진정우 사이의 갈등까지 부추기다니.’강유형의 얼굴은 이미 험악했는데 진정우의 이름이 나오자 더욱 굳어졌다.진정우는 강유형에게 가시 같은 존재인데 헤르나는 그 가시를 더 깊이 찔러 넣었다.“헤르나, 네가 누구를 상대로 하든, 어떤 일을 꾸미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하지만 지원이에게 손대는 건 절대 안 돼.”강유형은 차가운 경고의 말을 던졌다. 그러나 헤르나는 내 손목을 쥔 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렇게 귀여운 소녀를 어떻게 건드릴 수 있겠어?”그는 깊고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내 곁에 두고 싶을 뿐이야.”그의 목소리마저도 유난히 다정하게 들렸다.“죽고 싶어!”강유형은 화가 치밀어 올라 크게 소리쳤지만 헤르나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운 채 나를 향해 물었다.“네가 직접 말해봐. 여기서 나갈지, 남을지.”그는 교묘하게 나를 갈등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지원아, 걱정하지 마. 내가 널 데리고 나갈게.”강유형은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강유형은 비록 나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보호하려는 그의 태도만큼은 진심이었다.하지만 헤르나의 뒤에 있는 두 명의 체격 좋은 경호원이 그의 뒤를 바짝 지키고 있었다. 헤르나가 눈짓만 하면 그들은 당장이라도 강유형에게 달려들 태세였다.강유형이 강해 보이긴 했지만 그는 군대를 다녀온 진정우처럼 싸움에 능한 사람이 아니고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헤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좋아. 사랑에 눈이 먼 여자는 아닌가 봐.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왜 하필 신지태를 구하려고 한 거야?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겉으로는 친절해 보이는 헤르나지만 그는 계속해서 나를 떠보며 내 약점을 찾으려 했고 내 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중요하지 않아요.”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헤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나를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유일한 기회를 그를 위해 썼잖아.”“내가 스누커를 배운 건 지태 오빠 덕분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기회는 그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내 말에 헤르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어? 나를 설득해서 너를 놓아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잖아.”“어차피 당신은 날 여기 가두고 경기를 보게 하려고 했잖아요. 날 풀어준다 해도 공항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지태 오빠의 경기를 보러 왔기에 굳이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내가 말하며 그의 팔에 난 상처를 힐끔 쳐다보자, 헤르나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여유롭게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이거?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어. 다 나으면 문신이라도 해서 보기 흉하지 않게 만들어야겠지.”“누가 그런 거예요?”나는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모를 리가 있나?”헤르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 나도 더 숨길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정우를 상대로 복수하려는 거군요.”헤르나는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그게 전부는 아니야.”그리고 와인잔을 흔들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그가 날 다치게 해서 생긴 게 아니거든.”“진정우랑 이미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내가 묻자, 이번엔 헤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너희 사귀었다면서? 그런데도 자기 과거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어?”그의 말은 내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았다.“안 했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헤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연민이
그러나 나는 그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부러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헤르나는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앉아서 천천히 생각해 봐.”사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할지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자리에 앉아 흰색 캐주얼 팬츠 위로 긴 다리를 교차시킨 채 와인잔을 손에 들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여유롭고 느긋했다.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웠고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전혀 급하지 않은 듯 보였다.솔직히 말해, 그의 외모는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깊고 또렷한 눈매는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심연 같아서 오랫동안 쳐다볼 수 없었다.나는 그의 눈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당구대 모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경기가 끝나면 절대 지태 오빠에게 다시는 손대지 마세요.”현존 최고의 스누커 선수라면 단연 신지태였다.그들은 불법 도박 자본을 이용해 경기를 조작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 리는 없었다.결국 신지태를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넣으려 할 것이고 내가 아는 신지태는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자신의 팔을 끊어버릴 만큼 단호한 사람이었다.헤르나는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 나는 곧바로 말했다.“당신이 내가 이기면 어떤 요구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헤르나는 와인잔을 살짝 흔들며 답했다.“긴장하지 마. 약속을 깨겠다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서 그래.”“역시 이런 사람들은 말만 번지르르하지.”나는 비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큐대를 내던지고 뒤돌아섰다.그때, 헤르나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널 여기 데려온 건 두 사람 때문이야.”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누군데요? 당신, 브라운 때문에 날 납치한 거 아니었어요?”그가 내게 조건을 내걸라고 했지만 나는 브라운과 그의 팬들에게 나를 놔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신지태를 구
“세 판.”“좋아요.”나는 말하면서 천천히 큐를 골랐다.“보는 눈이 있는데?”내가 큐를 손에 쥐자마자, 헤르나가 웃으며 칭찬했고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는 곧 이유를 덧붙였다.“네가 고른 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야.”“그래요?”나는 살짝 비웃으며 큐를 살펴보다가 큐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큐에 새겨진 건 ‘진’이라는 번체 글자였다.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나도 모르게 먼저 튀어나왔다.“이건 당신 게 아니라..”나는 이어서 진정우의 큐라고 말하려다 멈췄다.진정우와 헤르나는 완전히 대립 관계 아닌가. 그가 어떻게 진정우의 큐를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큐는 보통 프로 선수들만 사용하는 건데.이전에도 진정우에게 스누커를 잘 치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보통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전문 큐를 가질 리 없었다.“이거 누구 거야?”헤르나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나에게 맞춰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것은 아니예요. 큐에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역시 스누커를 잘 아는 소녀답네. 이런 것도 알아보네.”‘스누커 소녀’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브라운이 나를 처음 그렇게 불렀었다.“그렇게 저를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왜?”헤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쓰레기 같은 인간이 저를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거든요.”나는 헤르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꼬마야, 나를 욕하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해.”나는 헤르나를 욕하려 한건 아니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의 웃음을 무시했고 이미 공이 배치된 테이블을 보며 말했다.“이제 시작하죠.”그는 손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해봐.”내가 먼저 시작하라는 조건이었으니,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큐를
‘무슨 경기를 본다는 거야. 이건 그냥 날 인질로 잡아 지태 오빠가 이기게 만들려는 거잖아.’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렇다면... 여기 온 김에 차분히 적응하는 수밖에.’사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방금 핸드폰을 던지며 보였던 격앙된 행동은 모두 헤르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을 뿐이었다.그는 이미 내 핸드폰을 만졌으니, 내 메시지나 통화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걸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핸드폰을 아예 없애는 것이었다.더 이상 발버둥 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헤르나도 이미 나에게 구체적으로 통보했고 이 상황에서 계속 소란을 피워봐야 무의미할 뿐이었다.그래서 방에서 나와 테라스로 향해 바람이라도 쐬려고 했다. 그런데 테라스에 나서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숨이 멎었다.엄청난 규모의 테라스 아래로는 거대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사방은 푸른 식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골프장, 야외 스누커 경기장, 커다란 수영장과 화려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그곳에서 헤르나가 한가롭게 당구를 치고 있었다고 그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꼬마야, 내려와서 나랑 한 판 치지 않을래?”순간, 나와 시합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브라운이 떠올랐다.브라운과 헤르나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르나가 브라운을 압도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브라운 한 명은 대처할 수 있겠지만 그의 수많은 팬들은 이미 광기에 휩싸여 있고 언제든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결국 이 팬들을 진정시키려면 브라운이 직접 나서야 하는데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헤르나뿐이었다.하지만 나는 그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네가 당구를 잘 친다고 들었어. 만약 네가 나를 이기면 널 미리 돌려보내 줄 수도 있지.”헤르나가 유혹적인 제안을 던졌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진정우나 신지태와 가끔 시합을 즐겼을 뿐인데 어쩌다 내 당구 실력이 이리 소문났는지.두 명의 외국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