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리영이 차갑게 말했다.“이미 경고했죠.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세요. 또 오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러나 남자는 물러서지 않고 이어갔다.“리영 씨, 저는 괴롭히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좋아서 정말로 진심으로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었을 뿐이에요...”그 말을 듣자 며칠 전 꽃을 보낸 남자가 떠올랐다.“리영 씨, 맹세할게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어요. 진심입니다!” 남자가 손을 들며 말했다.“리영이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싫어했을 텐데요.”내가 말을 받아치며 안리영 옆에 섰다. 진정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지켜봤다. 그는 언제든 이 남자를 제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이때 그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누구세요? 내가 리영 씨랑 얘기 중인데 왜 끼어드는 거죠?”그 말에 정말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그럼 당신은 뭐길래 좋아한다고 하면 우리 리영이가 대답해야 하나요?” 나는 전혀 굽히지 않고 맞받아쳤다.“나는 리영 씨를 정말 순수하게 좋아해요. 그런 사랑을 당신이 알 리가 없죠.” 남자는 점점 이상한 말을 늘어놓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치 내가 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듯한 태도였다.나는 남자를 한참 동안 훑어보았다. 상의는 아디다스, 바지는 나이키, 신발은 퓨마. 전부 메이커 같지만 고급 짝퉁인 게 뻔히 보였다.“사람이 돈이 없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적어도 솔직해야죠.” 나는 비꼬며 말했다.처음 진정우를 만났을 때, 그는 평범한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비록 소박했지만 믿음이 갔다.하지만 이 남자는 겉만 번지르르한 가짜였다.그가 찬 시계가 그 유명한 녹색 롤렉스 짝퉁이라는 걸 알아보고 웃음이 나왔다. 나는 가차 없이 물었다.“당신은 뭘 믿고 리영 씨를 좋아한다고 말하죠? 돈이 있나요? 엄청 많아요?”남자는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어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전기세 100원만 올라가도 투덜댈 것 같은데 그런 주
안리영은 창밖에서 서 있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언제쯤 끝날까?”밖에 서 있는 남자는 진정우에게 무릎이라도 꿇을 듯 애원하고 있었다. 진정우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었고 아침 햇살이 그의 몸을 감싸며 빛나고 있었다.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자부심과 행복감이 차올랐다.‘그래, 저 사람은 내 남자야.’진정우와의 시작은 단순히 우연이었다. 가볍게 흘려보낼 생각으로 시작했던 관계였고 강유형과 헤어진 후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의도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진정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진가를 매일 새롭게 발견하며, 내가 얼마나 행운인지 깨닫고 있었다.“대답 좀 해 봐. 물어봤잖아.”안리영이 어깨로 나를 살짝 찌르며 말했다.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아마 곧 끝날 거야.”내 예상이 맞다면, 밖에 있는 남자는 진정우에게 어깨를 고쳐 달라고 애원하고 있을 것이다. 전에 진소영이 말하기를, 진정우가 접골을 할 줄 아는 이유는 어릴 적 마을 어르신에게 배운 기술 덕분이라고 했다. 진소영이 자주 팔이 탈구되어 어르신을 찾았고 진정우는 자연스럽게 그 과정을 지켜보며 기술을 익혔다고 했다.결국 그는 탈구된 팔을 고치는 방법을 배웠고 반대로 탈구를 유도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 남자는 끊임없이 진정우에게 애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우는 그를 완전히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라, 결국 어깨를 고쳐줄 것이다. 게다가 진정우는 나와 함께 혈액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가야 하니, 그 남자와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아마 우리가 나가면 바로 끝날 거야.”나는 덧붙여 말했다.안리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럼 나가면서 얘기하자.”안리영은 의자에 걸쳐 둔 외투를 내 어깨에 걸쳐 주며 천천히 말했다.“어제 조나연 말인데 네가 통화 끝나고 바로 예약 잡고 수술 준비했거든. 근데 돈만 내고 또 도망갔더라니까.”나는 고개를 저
안리영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꺼냈다.“네가 예전부터 이렇게 했다면 강유형이 도망가진 않았을 거야.”현 남자 친구 앞에서 전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내는 건 최악이다.그녀가 나를 해치려는 게 아닌 건 알지만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궁금했다. 고개를 돌려 안리영이 나에게 살짝 윙크를 했다.그녀는 진정우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거다. 아무리 대범한 남자라도 여자 친구의 과거 연애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하지만 왜 굳이...괜히 진정우를 자극해서 도망가게 만들 수도 있는데 말이다.나는 몰래 진정우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과 달리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안리영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정우 씨, 그렇지 않나요?”나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 순간, 진정우가 짧게 대답했다.“지원이는 저한테만 애교 부려요.”그 한마디에 공기마저 달콤해졌다. 이 사람, 대답 하나로 상황을 완벽히 마무리했다.안리영은 감탄하듯 혀를 차며 말했다.“진짜 의외네요. 정우 씨, 이성적이고 무뚝뚝한 분인 줄 알았는데 로맨틱한 면이 이렇게 많다니.”진정우는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화학에서도 양자 반응이라는 게 있어요. 각 반응은 결합한 양자 상태에 따라 매번 달라지죠. 지원이랑 있으면 제가 달라지는 것처럼.”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사랑을 이렇게 과학적으로 풀어낸다니, 역시 진정우답다.그러자 안리영이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했다.“정우 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너 진짜 복 받았네.”내 마음속에 자부심이 가득 찼다. 이 사람과 만난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그때 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지원아, 그러면 조나연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맞아. 조나연이 아니었으면 내가 정우를 어떻게 만났겠어?”그 말을 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진정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안리영은 웃으며 장난을 쳤다.“그만해. 다행히 배부르게 안
허진호가 나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겠다고 하자 조금 놀랐다. 사실 아까 병원에서 채혈할 때 진정우가 귓속말로 그런 얘기를 했었다. 그때는 단순히 내 주의를 돌리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게 진짜가 될 줄은 몰랐다.“대표님이 초대한 거야?”진정우가 확인하듯 물었다.“응.” 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네 대표님한테 부탁한 거 아니야?”진정우가 허진호의 상사라면 한마디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야.”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거라 생각하며 비웃었다.“미리 나한테 얘기했어.” 진정우가 다시 입을 열며 말했다..그 말이 과연 진짜일까? 아니면 그냥 둘러대는 걸까?나는 더 이상 캐묻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초대받은 자리라면 거절할 이유도 없어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나 간다고 했어. 너도 같이 갈 거지?”“응.” 역시 짧은 대답이었다. 만약 그의 말투를 분석할 수 있다면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쓰였을 것이다.“나는 내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밥 먹는 걸 허락 못 해.”진정우다운 단호한 대답이었다.한편, 진소영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감탄했다.“오빠, 정말 스윗하다! 언니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에요?”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당연하지.”“언니.” 진소영이 나를 불렀다.“오빠가 소설 속 남자 주인공보다 더 로맨틱하네요. 이런 모습은 상상도 못 했는데.”그녀는 아마 진정우 같은 무뚝뚝한 사람이 달콤한 말을 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그러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이야말로 숨겨진 매력이 있는 법이야. 너희 오빠 같은 사람은 전쟁 시절에 특급 첩보원이었을지도 몰라.”진소영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언니,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얘기예요?”아직 그녀는 내가 말하려던 깊은 뜻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진정우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오늘 저녁은 너 혼자 먹어야 할 텐데 뭐 먹고 싶어?
나와 진정우 사이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진정우가 자기 정체를 숨겼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진소영에게 이 일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심장이 약한 데다 예민해서 쓸데없는 걱정을 할 것이다.“아니야.”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랑 네 오빠 사이가 어떤지 너도 잘 알잖아.”진소영은 맑은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투명해서, 내가 괜히 거짓말을 하면 더럽혀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시선을 가리며 말했다.“정말이야. 믿기 어렵다면 나중에 네 오빠한테 직접 물어봐.”“언니!” 진소영이 내 팔을 꼭 끌어안고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오빠가 무슨 잘못을 해도 언니가 혼내기만 하고 절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말투는 마치 부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짝 기댔다.“알았어. 네가 그럼 대신 혼내 줘.”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니, 나는 항상 언니 편이에요.”그녀의 말에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언니, 만약 내가 사라지고 언니까지 떠나면 오빠는 정말 불쌍해질 거예요.”갑자기 진소영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무슨 소리야. 넌 아무 일 없을 거야.” 나는 그녀를 다독였다.진소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아무도 죽음을 원하지 않지만 그녀나 강유형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에게는 삶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나는 화제를 돌려 그녀와 공연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안리영에게서 전화가 왔다.“지금 소영이랑 같이 있어?”안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응. 왜, 무슨 일이야?”“누가 나한테 감귤을 한 박스나 보내왔는데 소영이한테 좀 가져다줘. 그 애가 좋아할 것 같아서.”안리영은 평소에도 환자 가족들에게 받은 선물을 동료들에게 나누곤 했다.“바로 갈게.”나는 진소영과의 대화도 잠시 멈추고 과일을
소지훈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놀란 듯 바라보았다.나도 내가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말했다.“제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소지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괜찮아요. 누나가 와 주시면 기뻐할 거예요.”그가 이렇게 말할 때 나를 보지 않고 혼잣말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의 태도에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그럼 따라오세요.”소지훈은 다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나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가 얼마나 클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뒷모습은 그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듯 무겁게 느껴졌다.소지훈은 나를 요양 병동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VIP 병실처럼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비용도 꽤 비쌀 것 같았다. 이런 곳에 입원할 수 있다면 그녀의 가정 형편이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병실 문 앞에서 소지훈이 멈추더니 나를 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기색이 있었다.“혹시 불편하시면 그냥 넘어가도 돼요.”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소지훈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누나랑 교수님은 정말 많이 닮았어요. 다만... 지금은 교수님이 많이 말라서...”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세상 어딘가에 나와 닮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외모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름다움은 마음에서 나오는 법이죠.”소지훈도 미소를 짓더니 병실 문을 열었다.안으로 들어서자 파란 작업복을 입은 간병인이 환자에게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일어섰다.“잠시 쉬세요. 제가 다시 부를게요.”소지훈은 공손하게 말했다. 간병인은 자리를 뜨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도 나와 환자가 닮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평소에는 간병인이 주로 돌보나요?”나는 침묵을 깨고 물었다. 소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일 때문에 늘 여기 있을 수는 없어서요.”그는 가져온 과일을 탁자에 올려놓고 침대 곁에 앉았다.
소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무언가를 하려는 듯 보였고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서 정말 나와 닮아 있었다.순간, 부모님께서 혹시 나 말고 또 다른 딸을 낳은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침대 옆 환자 명패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유희연, 나이 28세.속으로 그녀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유희연 씨, 안녕하세요. 저는 윤지원이에요.”그때 소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돌아오세요.”그는 간병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곧 간병인이 돌아왔고 우리는 병실을 나섰다.소지훈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 나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의사 말로는 회복 가능성이 없대요. 그녀의 가족들도 이제 포기했어요.”“하지만 지훈 씨는 포기하지 못하겠죠?”나는 그의 마음을 떠보듯 물었다.그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기적이라는 게 있다고 하잖아요.”기적은 분명 존재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됐어요?”“거의 2년이 다 돼 가요.”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2년 동안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다. 그녀의 가족들이 포기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였다.“가족들을 설득해 볼 수는 없을까요?”나는 그의 마음을 북돋우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이미 설득해 봤어요. 가족들은 지난주에 모든 걸 포기하려 했고 제가 일주일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지금은 그 시간이 거의 다 됐어요. 이제 3일밖에 안 남았어요.”그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불안해하고 있었다.“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녀를 놓기 싫어서인가요? 아니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고 싶지 않아서인가요?”나는 그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녀가 깨어난다고 해도 내가 진 마음의
“버블티 사 왔어. 들어가자.”진정우가 과일 봉투를 받아 들고 말했다.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아마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서 따로 설명할 힘도 없었다. 나는 그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언니! 버블티! 저 마시지도 않고 기다렸어요!”진소영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진정우는 과일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나는 그를 힐끔 보고는 진소영 쪽으로 다가갔다.“준비 다 했어요. 우리 같이 버블티 나눠 마셔요.”진소영은 작은 테이블 위에 컵들을 정성스럽게 놓아두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지금 버블티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소영아, 그냥 네가 다 마셔.”“진짜요?”진소영의 눈이 반짝이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근데 저는 그렇게 많이 못 마시는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버블티를 나누기 시작했다.“언니, 근데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오빠가 걱정돼서 음식 재료만 두고 언니 찾으러 나갔잖아요.”“오는 길에 친구를 좀 만났어.”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언니는 친구도 많아서 부러워요. 저도 나중에 친구 많이 사귀고 싶어요.”진소영은 나눈 버블티를 내 앞에 밀며 말했다.“소영이는 성격이 좋아서 분명 많은 친구를 사귈 거야.”나는 그녀를 격려하며 버블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진소영도 한 모금 마시며 감탄했다.“이 맛 진짜 맛있어요! 나중에 버블티 종류 다 마셔볼래요! 언니, 다음에는 또 어떤 맛을 먹어볼까요?”“언니?”그녀가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어디 아파요?”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소영은 주방 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오빠, 빨리 와보세요. 언니가 이상해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정우가 손질된 과일을 들고나왔다.“무슨 일이야?”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과일을 내려놓고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방금 물을 만졌던 손이라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나는 그의 손을 잡아 내리고는 그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