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가 나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겠다고 하자 조금 놀랐다. 사실 아까 병원에서 채혈할 때 진정우가 귓속말로 그런 얘기를 했었다. 그때는 단순히 내 주의를 돌리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게 진짜가 될 줄은 몰랐다.“대표님이 초대한 거야?”진정우가 확인하듯 물었다.“응.” 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네 대표님한테 부탁한 거 아니야?”진정우가 허진호의 상사라면 한마디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야.”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거라 생각하며 비웃었다.“미리 나한테 얘기했어.” 진정우가 다시 입을 열며 말했다..그 말이 과연 진짜일까? 아니면 그냥 둘러대는 걸까?나는 더 이상 캐묻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초대받은 자리라면 거절할 이유도 없어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나 간다고 했어. 너도 같이 갈 거지?”“응.” 역시 짧은 대답이었다. 만약 그의 말투를 분석할 수 있다면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쓰였을 것이다.“나는 내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밥 먹는 걸 허락 못 해.”진정우다운 단호한 대답이었다.한편, 진소영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감탄했다.“오빠, 정말 스윗하다! 언니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에요?”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당연하지.”“언니.” 진소영이 나를 불렀다.“오빠가 소설 속 남자 주인공보다 더 로맨틱하네요. 이런 모습은 상상도 못 했는데.”그녀는 아마 진정우 같은 무뚝뚝한 사람이 달콤한 말을 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그러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이야말로 숨겨진 매력이 있는 법이야. 너희 오빠 같은 사람은 전쟁 시절에 특급 첩보원이었을지도 몰라.”진소영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언니,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얘기예요?”아직 그녀는 내가 말하려던 깊은 뜻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진정우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오늘 저녁은 너 혼자 먹어야 할 텐데 뭐 먹고 싶어?
나와 진정우 사이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진정우가 자기 정체를 숨겼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진소영에게 이 일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심장이 약한 데다 예민해서 쓸데없는 걱정을 할 것이다.“아니야.”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랑 네 오빠 사이가 어떤지 너도 잘 알잖아.”진소영은 맑은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투명해서, 내가 괜히 거짓말을 하면 더럽혀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시선을 가리며 말했다.“정말이야. 믿기 어렵다면 나중에 네 오빠한테 직접 물어봐.”“언니!” 진소영이 내 팔을 꼭 끌어안고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오빠가 무슨 잘못을 해도 언니가 혼내기만 하고 절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말투는 마치 부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짝 기댔다.“알았어. 네가 그럼 대신 혼내 줘.”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니, 나는 항상 언니 편이에요.”그녀의 말에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언니, 만약 내가 사라지고 언니까지 떠나면 오빠는 정말 불쌍해질 거예요.”갑자기 진소영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무슨 소리야. 넌 아무 일 없을 거야.” 나는 그녀를 다독였다.진소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아무도 죽음을 원하지 않지만 그녀나 강유형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에게는 삶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나는 화제를 돌려 그녀와 공연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안리영에게서 전화가 왔다.“지금 소영이랑 같이 있어?”안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응. 왜, 무슨 일이야?”“누가 나한테 감귤을 한 박스나 보내왔는데 소영이한테 좀 가져다줘. 그 애가 좋아할 것 같아서.”안리영은 평소에도 환자 가족들에게 받은 선물을 동료들에게 나누곤 했다.“바로 갈게.”나는 진소영과의 대화도 잠시 멈추고 과일을
소지훈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놀란 듯 바라보았다.나도 내가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말했다.“제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소지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괜찮아요. 누나가 와 주시면 기뻐할 거예요.”그가 이렇게 말할 때 나를 보지 않고 혼잣말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의 태도에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그럼 따라오세요.”소지훈은 다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나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가 얼마나 클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뒷모습은 그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듯 무겁게 느껴졌다.소지훈은 나를 요양 병동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VIP 병실처럼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비용도 꽤 비쌀 것 같았다. 이런 곳에 입원할 수 있다면 그녀의 가정 형편이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병실 문 앞에서 소지훈이 멈추더니 나를 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기색이 있었다.“혹시 불편하시면 그냥 넘어가도 돼요.”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소지훈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누나랑 교수님은 정말 많이 닮았어요. 다만... 지금은 교수님이 많이 말라서...”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세상 어딘가에 나와 닮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외모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름다움은 마음에서 나오는 법이죠.”소지훈도 미소를 짓더니 병실 문을 열었다.안으로 들어서자 파란 작업복을 입은 간병인이 환자에게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일어섰다.“잠시 쉬세요. 제가 다시 부를게요.”소지훈은 공손하게 말했다. 간병인은 자리를 뜨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도 나와 환자가 닮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평소에는 간병인이 주로 돌보나요?”나는 침묵을 깨고 물었다. 소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일 때문에 늘 여기 있을 수는 없어서요.”그는 가져온 과일을 탁자에 올려놓고 침대 곁에 앉았다.
소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무언가를 하려는 듯 보였고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서 정말 나와 닮아 있었다.순간, 부모님께서 혹시 나 말고 또 다른 딸을 낳은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침대 옆 환자 명패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유희연, 나이 28세.속으로 그녀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유희연 씨, 안녕하세요. 저는 윤지원이에요.”그때 소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돌아오세요.”그는 간병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곧 간병인이 돌아왔고 우리는 병실을 나섰다.소지훈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 나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의사 말로는 회복 가능성이 없대요. 그녀의 가족들도 이제 포기했어요.”“하지만 지훈 씨는 포기하지 못하겠죠?”나는 그의 마음을 떠보듯 물었다.그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기적이라는 게 있다고 하잖아요.”기적은 분명 존재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됐어요?”“거의 2년이 다 돼 가요.”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2년 동안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다. 그녀의 가족들이 포기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였다.“가족들을 설득해 볼 수는 없을까요?”나는 그의 마음을 북돋우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이미 설득해 봤어요. 가족들은 지난주에 모든 걸 포기하려 했고 제가 일주일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지금은 그 시간이 거의 다 됐어요. 이제 3일밖에 안 남았어요.”그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불안해하고 있었다.“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녀를 놓기 싫어서인가요? 아니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고 싶지 않아서인가요?”나는 그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녀가 깨어난다고 해도 내가 진 마음의
“버블티 사 왔어. 들어가자.”진정우가 과일 봉투를 받아 들고 말했다.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아마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서 따로 설명할 힘도 없었다. 나는 그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언니! 버블티! 저 마시지도 않고 기다렸어요!”진소영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진정우는 과일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나는 그를 힐끔 보고는 진소영 쪽으로 다가갔다.“준비 다 했어요. 우리 같이 버블티 나눠 마셔요.”진소영은 작은 테이블 위에 컵들을 정성스럽게 놓아두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지금 버블티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소영아, 그냥 네가 다 마셔.”“진짜요?”진소영의 눈이 반짝이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근데 저는 그렇게 많이 못 마시는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버블티를 나누기 시작했다.“언니, 근데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오빠가 걱정돼서 음식 재료만 두고 언니 찾으러 나갔잖아요.”“오는 길에 친구를 좀 만났어.”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언니는 친구도 많아서 부러워요. 저도 나중에 친구 많이 사귀고 싶어요.”진소영은 나눈 버블티를 내 앞에 밀며 말했다.“소영이는 성격이 좋아서 분명 많은 친구를 사귈 거야.”나는 그녀를 격려하며 버블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진소영도 한 모금 마시며 감탄했다.“이 맛 진짜 맛있어요! 나중에 버블티 종류 다 마셔볼래요! 언니, 다음에는 또 어떤 맛을 먹어볼까요?”“언니?”그녀가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어디 아파요?”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소영은 주방 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오빠, 빨리 와보세요. 언니가 이상해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정우가 손질된 과일을 들고나왔다.“무슨 일이야?”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과일을 내려놓고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방금 물을 만졌던 손이라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나는 그의 손을 잡아 내리고는 그
“언니!”진소영이 내 머리를 다시 진정우의 어깨로 눌렀다.“언니, 그냥 이렇게 오빠한테 기대 있어요. 언니랑 오빠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이 정말 좋아요.”이 아이가 정말...“오빠, 언니.”진소영은 맑은 눈빛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원래는 며칠 후에 말하려고 했는데 오늘 이 얘기가 나온 김에 미리 말하려고요.”“괜한 걱정하지 말고 괜히 이상한 말도 하지 마.”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하지만 진정우는 차분히 말했다.“말해보게 놔둬.”진소영은 오빠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역시 우리 오빠. 내 마음을 제일 잘 알아주는 사람.”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언니, 우선 끝까지 제 얘기 들어주세요.”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고는 일부러 두 번 기침을 하며 긴장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더니 내 손과 진정우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이제 말할게요.”우리 둘은 잠자코 있었지만 숨소리가 조금 더 깊어지는 게 느껴졌다.“오빠, 언니... 저는 장기 기증을 하고 싶어요.”그녀의 한마디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뭐라고?”진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되물었다.“제 말은요, 수술이 실패하거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제 장기를 기증하고 싶다는 거예요.”진소영은 한 마디 한 마디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제가 곧 다른 사람의 심장을 이식받을 거잖아요. 나중에 제가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심장은 못 쓰겠지만 간이나 신장, 그리고 각막 같은 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받은 생명을 또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어요.”그녀는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말은 너무 무겁고 충격적이었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오빠,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진소영은 불안한 듯 오빠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빠가 반대해도 저는 할 거예요. 저 이제 성
진정우가 진소영의 이런 부탁을 받아들인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분명 마음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소영의 뜻을 존중해 주는 그의 모습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진소영은 혹시나 진정우가 나중에 마음을 바꿀까 봐, 바로 휴대폰을 꺼내 장기 기증 등록을 시작했다. 그녀가 꼼꼼히 정보를 입력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 작은 아이에게 얼마나 강렬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우리도 같이 신청하자.”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진정우는 나를 바라보았고 심지어 진소영도 손을 멈췄다.“언니...”“좋아.”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꺼냈다.“오빠, 언니, 정말이에요?”진소영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은 쉽게 결정했지만 다른 누군가가 같은 결정을 하는 것은 왠지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그러나 그녀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 언니, 우리 모두 신청해요. 그리고 앞으로 몇십 년 동안 모두 건강하게 살아서 이 신청이 필요 없기를 바라면 되죠.”그녀의 말에 나와 진정우는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그러면 네가 말한 기증은 결국 그냥 형식적인 거네?”진소영도 장난스럽게 대답했다.“언니, 들켰지만 모른 척해주세요. 알겠죠? 오빠도.”무거웠던 분위기는 금세 가벼워졌고 오히려 기분 좋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오빠, 언니, 우리 건배해요. 우리 모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됐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고 행복하길!”진소영은 버블티를 들며 말했다. 나와 진정우도 버블티를 들어 그녀와 가볍게 부딪혔다.“정말 맛있다. 너무 달콤해요.”진소영은 한 모금 마시고 감탄했다.그녀의 순수하고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이번 수술이 꼭 성공해서 그녀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기를.그날 저녁, 진정우는 진소영을 위해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그녀가 혼자 먹는 것이 외로울까 봐 우리도 함께 먹으려고 했지만 진소영이 먼저 말했다.“안 돼
“주인석에 앉으세요.”허진호가 나와 진정우를 보며 자리를 권했다.그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대기업 대표라는 권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확신했다. 만약 진정우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면, 허진호가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굴었을 리 없다는 것을.“허 대표님. 대표님은 우리 사장님이고 우리는 직원인데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면 조금 부담스럽네요.”허진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진정우를 흘깃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부담스러울 거 없어요. 우리는 같은 팀이잖아요.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생각해 주세요.”나는 차갑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대표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면 저희가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죠.”이번엔 진정우가 차분히 덧붙였다.“대표님이 너무 배려하시면 식사 내내 긴장하게 될 겁니다.”허진호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너무 정식적인 분위기는 싫어하고 최대한 친근하게 대하려고 해요.”“너무 친근하시네요.”진정우는 짧게 대답했다.허진호는 그러자 껄껄 웃었다. 마침 그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리자 그는 서둘러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손님 한 분을 모시고 오겠습니다.”“오늘 다른 사람도 초대하셨나요?”나는 궁금해서 물었다.“네, 지원 씨가 꼭 한번 만나고 싶어 하던 분이에요.”허진호가 장난스럽게 눈짓을 했다.그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순간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그때 진정우가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대표님, 눈에 뭐라도 들어갔나요? 안약이라도 챙겨 드릴까요?”“푸흡!”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막았다.허진호도 농담을 알아듣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정우 씨, 남자는 그렇게 소심하면 안 됩니다.”“제 여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소심한 게 아니라 철저히 신경 씁니다.”진정우는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허진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
“싸움이 났어요, 밖에서 누가 싸우고 있어요!”복도에서 급히 들어온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리고 그 순간 용준호의 주먹이 강유형을 향해 뻗어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그만둬! 준호 오빠, 당장 멈춰!”나는 소리치며 달려가 그를 말렸다.하지만 그는 내 손을 뿌리치더니 힘껏 내던졌다. 나는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하얘짐을 느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킨 것처럼 어질어질해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그동안 단 한 번도 반격하지 않던 강유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애틋했다.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지원아...”그는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곧장 용준호에게 주먹을 날렸다. 곧이어 두 사람은 완전히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두 사람을 바라보다 결국 누군가에게 부탁해 경호원을 불러달라고 했다.몸싸움을 겨우 뜯어말렸을 땐 이미 멍과 상처가 두 사람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강유형은 계속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고개를 젖혀 코피를 거꾸로 흐르게 했다.이들이 왜 갑자기 싸운 건지 너무 궁금했지만 강유형의 코피가 너무 심하게 나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는 수밖에 없었다.“강유형, 병원으로 들어가자.”그는 꼼짝도 하지 않더니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너는 괜찮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끌었다.“나랑 같이 들어가자”“괜찮아. 금방 멈출 거야.”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찰나 용준호가 고함을 질렀다.“강유형, 이 개자식아! 우리 엄마 어딨어? 당장 우리 엄마 데려와!”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분명 그의 어머니는 화재로 숨졌다고 했는데 왜 강유형한테서 어머니를 찾는지 알 수가 없었다.“준호 오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나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네가 직접 물어보든지.”“신경 쓰지 마. 미쳐서 그래.”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
강유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의 눈가엔 슬픔이 가득했다.수정 스님은 행각승이었다가 법운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고향이나 가족을 알지 못했다.굳이 혈육을 꼽으라면 강유형이 유일한 존재일 터였다.그는 어릴 적부터 수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며 경을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지원아, 먼저 부상자들부터 도와줘.”강유형이 내 슬픔을 잠재우듯 말했다.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화재는 갑자기 일어난 거야? 너 그때 절에 있었어? 이상한 점은 없었고?”강유형의 눈빛이 짙어졌다.“지원아, 그건 내가 조사할 테니 네가 나설 필요 없어.”그 말에서 나는 그가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내가 위험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강유형, 나도 모르는 척 편히 있으려 했지만 이 불은 나를 노리고 온 것 같아서 말이지.”내가 추측을 내뱉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로의 말이 오리라 예상한 찰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정우, 곧 돌아오지?”맞았다. 강진혁이 직접 알려준 소식이었다.“이 화재가 진정우랑 관련 있다는 거야?”내 물음에 그는 담담히 말했다.“네가 방금 너 자신이 표적이라 말했으니 네 일은 곧 그의 일과 마찬가지인 셈이지.”하긴 지금 내 존재는 진정우의 약점이자 방패나 다름없었다.“지금은 급박한 때야. 조심해.”강유형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이내 덧붙였다.“가능하다면 내 곁에 있어.”그가 나를 지키려는 의도임을 알았다.그래도 나는 되물었다.“진짜로 내가 표적이라면 네 힘만으로는 부족할 텐데.”법운사에 불을 지른 자들은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수정 스님마저 피해자로 만들 정도로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김지영이 역시 불길에 휩싸일 줄은 용씨 가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업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분께서 이런 재앙을 마주했다니, 안타까울 뿐이었다.용진표의 혼란스러운 이성 관계가 떠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