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연의 말에 나는 어이없었다.“강유형이요? 그 사람을 원한다고요?”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조나연은 내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맞아요. 강유형 그 사람이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의 마음이 아니라, 그의 존재예요.”나는 그 말에 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대단한 여자네.’“조나연 씨,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당신이 원하는 건 강유형이 아니라, 그의 신분과 그 뒤에 숨겨진 부잖아요.”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그건 부정하지 않아요. 하지만...”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비수처럼 날카로운 한마디를 내뱉었다.“하지만 그동안 유형 씨가 저에게 잘해줬어요. 너무 잘해줘서 저도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어요. 이제는 그와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그 말을 듣자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나를 겨냥하듯, 강유형이 자신에게 잘해줬다는 점을 강조한 그녀의 말투에 감춰진 의도가 뻔히 보였다.그래서 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가 그렇게 잘해줬다면 왜 도망쳤을까요?”조나연의 얼굴이 굳었고 나는 계속 이어 말했다.“그가 정말로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세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돌아오기만 하면 제가 방법을 찾겠어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냉정히 말했다.“그럼 당신이 알아서 돌아오게 해 보세요. 저는 도와줄 생각이 없으니까요.”그녀는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 몸이 휘청거렸고 그래서 차 문을 꽉 잡았다.“왜요? 설마 아직도 유형 씨를 사랑해요?”그녀의 말에 나는 짧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렇게 믿으세요.”조나연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무릎 꿇고 계시면 아기한테도 안 좋으니까 이제 일어나세요. 저도 가야 하거든요.”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지원 씨가 강유형 씨에게 연락하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그녀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
강유형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조나연은 이미 눈물이 가득 고였고 목소리가 떨렸다.“유형아... 나 정말 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그녀는 간절하게 애원했지만 강유형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조나연은 초조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며 물었다.“유형아, 너 듣고 있는 거 맞지? 듣고 있어?”화면에는 여전히 통화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지만 강유형은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다 마침내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조나연, 네가 우리 집에 간 거, 누가 시켰어? 내가 너한테 뭐라고 경고했는지 잊었어?”그녀는 핸드폰을 쥔 손을 떨며 변명했다.“유형아, 어쩔 수 없었어... 난 이 아이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아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안 된다고 했잖아.”그녀의 태도에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이를 없애겠다고 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강유형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이번이 마지막이야. 조나연.”“유형아...!”하지만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통화는 종료되었고 핸드폰에서는 뚜뚜 신호음만 울렸다.조나연은 멍하니 핸드폰을 쥔 채 계속 이름을 불렀다.“유형아, 유형아...”나는 차분히 말했다.“전화 끊겼으니까 핸드폰 돌려줘요. 이제 끝난 거 같네요.”그녀는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고 앉아버렸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나는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운전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그녀가 했던 말들과 임석진의 죽음이 떠올랐다. 정신이 흐려져 어떻게 운전했는지도 모른 채 민원센터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이러다 큰일 나겠다.’나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화장증명서와 서류를 들고 걸어갔다.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은 이를 확인한 뒤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불렀다.“잠깐만요.”직원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네?”“부모님 자료 좀 찍어두고 싶어서요. 기념으로요.”사진을 찍고 나자 직원은 곧바로
낙태라고?조나연은 끝까지 사고를 치며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녀가 뭘 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미 내 마음과 몸이 지쳐 있었기에 그녀에게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알아서 하라고 전해.”나는 단호히 안리영에게 말했다.“어머? 이번엔 정의의 여신 안 할 거야?”안리영이 비꼬듯 물었다. 내가 얼마나 참견이 심했는지 보여주는 말이었다.“정의의 여신? 이제 그런 거 없어. 나도 타락했거든.”나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고 안리영은 큰소리로 나를 비웃었다.“좋아, 마음에 들어. 계속 그렇게 해봐.”전화를 끊고 재개발 사무소로 향해 서류를 제출하고 서명했다. 직원은 삼일 안에 집을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며 안내장을 건넸다.철거 공지를 받았을 때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기한이 정해지니 그 현실이 무겁게 다가왔다.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아파트 입구에 서서 오랫동안 위를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이 시간에 마주쳤을 아줌마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이미 떠난 것이다.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나를 누군가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고개를 돌리자 진정우가 서 있었다.그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배고프지 않아?”진정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고 대신 차분히 물었다.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모든 게 너무 피곤하고 버겁게 느껴졌다. 말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힘들지?”그는 내 상태를 단번에 알아차렸다.나는 짧게 "응" 하고 대답했다.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내가 이미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아무 말 없이 따라왔다.그리고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조용히 받아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 한마디 없이 함께 계단을 올랐다.마지막 계단에 도착했을 때, 나는 손을 뻗었다. 진정우는 가방을 내주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그가 원하는 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조용히 말했다.“부모님 주민등록 말소 처리했어. 너무 지쳐서
모든 것이 내 착각이었다.방금 전 들렸던 아버지의 목소리도, 단지 환청에 불과했다.부모님은 이미 10년 전에 나를 떠나셨다.그런데 내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다니...나는 허탈감에 빠져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둠이 드리웠다. 창밖의 마지막 빛줄기가 사라지자, 온 집 안이 깜깜해졌다.그제야 마음속 깊이 묻어둔 부모님을 잃은 슬픔이 터져 나왔다.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라 결국 흐르고 말았다.그날 밤, 꿈속에서 내내 부모님과 함께했다.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온몸이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들고 하루 종일 일한 것처럼 지쳤다.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제야 내가 병에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약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때, 문밖에서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일어났어?”나는 입을 열어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목구멍을 칼로 도려낸 듯 아팠다. 결국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나 많이 아파. 문 앞에 열쇠가 있으니까 열고 들어와."진정우는 내가 준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몇 초 지나지 않아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곧바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고 그의 차가운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그 순간 뜨거운 열기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으며 편안해졌다. 나는 더 기대고 싶었지만 그는 곧 손을 거두었다.“열이 나네. 병원 가야겠어.” 그 순간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얼굴에 댔다. 그러자 그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병원에 가자.”“그냥 약만 먹으면 돼...”나는 힘들게 대답했지만 그는 단호했다.“약은 먹어야지. 근데 병원도 가야 해.”그는 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약을 가지러 갔다.그리고 곧 물과 약을 들고 돌아온 그는 나를 부드럽게 일으켜 약을 먹였다.내가 조금 숨을 고르자 그는 말했다.“이제 병원 가서 검사받아야지.”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다시 내 이마에 키스하며
“파스타 두 개 주세요. 하나는 토마토소스 대신 블랙페퍼소스로요. 그리고 망고주스 한 잔, 따뜻한 물 한 잔, 저칼로리 블루베리 케이크도 하나 추가요.”구안석 교수가 우아한 태도로 주문을 마쳤다.들으니 분명히 두 사람 몫이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완전히 안리영 취향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특히 그녀가 블랙페퍼소스를 좋아한다는 디테일까지 반영되어 있었다. 이건 그녀를 잘 아는 사람, 혹은 세심하게 관찰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왜냐하면, 그녀는 겉으론 가리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 토마토소스가 들어간 음식은 절대 손도 대지 않는 사람이었다.몇 년 만에 다시 만났고 이제 막 관계를 시작한 상황인데 구 교수가 그녀의 이런 디테일한 취향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그들의 관계를 두고 비웃었지만 지금 보니 내가 몰랐던 면들이 보였다.“우리도 주문하자.”진정우가 내 손을 가볍게 쥐며 부드럽게 말했다.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서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병원 근처에서 이렇게 식사하는 걸 보면,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 시간을 깨는 건 누가 봐도 민폐였다.진정우는 내가 아프다는 걸 알았는지 내 취향을 고려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는 음식을 골랐다.“디저트는 다음에 먹자. 지금은 목이 아프니까 나중에 먹는 게 나을 거야.”진정우의 세심함은 구안석 못지않았다. 디저트는 주문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해 줬다. 멀리서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구안석과 안리영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괜히 진정우에게 장난을 쳤다.“만약 내가 꼭 먹고 싶다고 하면?”연애를 하면서 여자들이 가끔 투정을 부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오히려 사랑받는 기분이 드니까.그런데 안리영과 구안석의 연애는 내게 너무 밋밋해 보였다. 마치 오늘 내가 먹는 싱거운 죽처럼 말이다.“그럼 조금만 먹어. 하지만 많이는 안 돼.”진정우
카카오톡을 열어보니 친구 추가 요청이 와 있었다. 나는 낯선 사람은 잘 추가하지 않는데 번호로 나를 검색해 추가한 사람이라면 모를까.별생각 없이 요청을 눌러보니 ‘정의는 마음속에’라는 닉네임이 뜨고 메시지로 [저는 신 경찰관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이렇게 당당하게 자기가 경찰관이라고 하는 건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다.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제 사망 확인서를 발급해 줬던 경찰관이 떠올랐다.그때 이름을 물어보진 않았지만 최근에 접촉한 경찰은 그가 유일했다. 게다가 그가 내 번호도 가져갔으니 틀림없을 것이다.수락을 누르니 바로 친구로 추가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그가 먼저 요청을 보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연락을 해오겠지 싶었다.그 대신 안리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연애할 때는 좀 밀당도 하고 귀여운 척도 하고 애교도 부려야 해. 너처럼 철벽 쳐가며 굴면 남자가 널 보호하고 싶어 하겠냐고.]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안리영을 바라봤지 안리영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치 휴대폰을 들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그래도 답장을 바로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냥 다음번엔 참고하라는 의미로 보냈을 뿐이었다.“문자 그만하고 밥 먹어.”진정우가 내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나는 얌전히 대답하며 면을 먹기 시작했다.하지만 목이 아파서 많이 먹을 수 없었다. 대신 달콤한 과일 주스는 정말 맛있었다. 특히 목을 부드럽게 해줘서 좋았다. 만약 아이스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진정우는 내가 생리 중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따뜻하게 주문했다.나는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고 주스만 홀짝였지만 진정우는 정말 열심히 식사를 했다.그는 겉모습은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먹는 모습은 전혀 거칠지 않았다. 다만 먹는 속도가 꽤 빨라서, 접시가 순식간에 깨끗해졌다.게다가 음식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모습은 오늘뿐만이 아니었다.내가 그를 알게 된 이후로 쭉 그랬다.이건 그의 오랜 습관처럼 보였다. 마치 어릴 적 부모님이 나에게 “음식을 남기지
진정우가 빠르게 내 손에서 흘러내릴 뻔한 주스를 잡아줬다.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지원, 정말 잘한다. 나중에 스승님으로 모셔야겠어.”안리영이었다. 결국 내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모양이다.나는 그녀를 살짝 때리며 말했다.“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놀라게 해서 큰일 나면 난 보상도 못 해줘. 안 그래요, 정우 씨?”안리영이 진정우를 놀리며 말했다.구 교수 앞에서는 양처럼 얌전하더니 우리 앞에서는 거리낌 없는 모습이다.어떻게 구 교수 앞에서는 그렇게 태연히 순한 척을 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그나저나 구 교수는 어디 갔어?”나는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물었다. “갔어.”안리영이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진정우를 향해 농담을 던졌다.“정우 씨, 혼자 두 그릇 시켜 먹었어요? 우리 지원이건 아무것도 시켜주지 않고? 여자 친구 너무 안 챙기는 거 아니에요?이 말은 분명히 일부러 한 것이었다. 그녀는 진정우가 내 남은 음식을 먹은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팔꿈치로 살짝 찌르며 진정우가 어색해질가봐 장난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진정우는 여전히 태연하게 먹으며 말했다.“이게 지원 씨 거예요.”“오, 두 사람이 한 그릇을 나눠 먹는 거예요? 정우 씨도 참 로맨틱하네요.”안리영은 계속 놀렸다.“네. 리영 씨도 구 교수님과 한 번 해보세요.”진정우가 태연히 받아쳤다. 그러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안리영은 내 팔을 꼬집었는데 하필이면 혈액 검사를 했던 팔이었다.“아야, 아파.”내가 말하자 진정우가 바로 말했다.“그 팔은 방금 피 뽑은 데예요.”안리영이 깜짝 놀라며 내게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나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투덜댔다.“열이 좀 났어. 그러니까 아픈 사람 괴롭히지 마.”그녀는 내 이마에 손을 올려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열이라니? 어디가 아픈데?”“목이 아파. 아파서 미칠 것 같았어.”
안리영이 차갑게 말했다.“이미 경고했죠.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세요. 또 오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러나 남자는 물러서지 않고 이어갔다.“리영 씨, 저는 괴롭히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좋아서 정말로 진심으로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었을 뿐이에요...”그 말을 듣자 며칠 전 꽃을 보낸 남자가 떠올랐다.“리영 씨, 맹세할게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어요. 진심입니다!” 남자가 손을 들며 말했다.“리영이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싫어했을 텐데요.”내가 말을 받아치며 안리영 옆에 섰다. 진정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지켜봤다. 그는 언제든 이 남자를 제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이때 그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누구세요? 내가 리영 씨랑 얘기 중인데 왜 끼어드는 거죠?”그 말에 정말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그럼 당신은 뭐길래 좋아한다고 하면 우리 리영이가 대답해야 하나요?” 나는 전혀 굽히지 않고 맞받아쳤다.“나는 리영 씨를 정말 순수하게 좋아해요. 그런 사랑을 당신이 알 리가 없죠.” 남자는 점점 이상한 말을 늘어놓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치 내가 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듯한 태도였다.나는 남자를 한참 동안 훑어보았다. 상의는 아디다스, 바지는 나이키, 신발은 퓨마. 전부 메이커 같지만 고급 짝퉁인 게 뻔히 보였다.“사람이 돈이 없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적어도 솔직해야죠.” 나는 비꼬며 말했다.처음 진정우를 만났을 때, 그는 평범한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비록 소박했지만 믿음이 갔다.하지만 이 남자는 겉만 번지르르한 가짜였다.그가 찬 시계가 그 유명한 녹색 롤렉스 짝퉁이라는 걸 알아보고 웃음이 나왔다. 나는 가차 없이 물었다.“당신은 뭘 믿고 리영 씨를 좋아한다고 말하죠? 돈이 있나요? 엄청 많아요?”남자는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어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전기세 100원만 올라가도 투덜댈 것 같은데 그런 주
‘결벽증 있다더니 이게 무슨 행동이야?’헤르나는 안았다가 이제는 손까지 잡고 있었다.나는 손을 뿌리치려다 병실 안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침대에 누운 사람은 진정우가 아니었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저 여자를 데리고 온 거야?”헤르나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경기 데려가기 전에 들른 거야. 그런데 상태는 좀 어때?”그 말에 브라운의 얼굴은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헤르나는 일부러 그의 상처를 그것도 가장 굴욕적인 상처 들춰내고 있었다.브라운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떠올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 부위를 떠올렸고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복수는커녕, 이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날 조롱하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브라운의 분노가 병실에 울려 퍼졌지만 헤르나는 태연히 대답했다.“그냥 알리러 온 거야.”그는 내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이제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니까 건들지 마.”브라운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럼 난 괜히 당한 거야?”“네가 당한 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리고 널 다치게 한 사람도 얘가 아니야.”헤르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그제야 나는 헤르나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하지만 모든 게 저 여자 때문이었잖아.”브라운은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그건 네가 먼저 건드렸기 때문이지.”헤르나는 냉정하게 말했고 그의 말에 브라운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브라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푸른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그래도 저년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도대체 왜 신지태의 문제에 얽히려 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지.’나는 단순히 신지태가 걱정돼서 관여했을 뿐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강유형이 일부러 날 이런 상황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그 생각은 스쳐 갔지만
나는 헤르나의 말을 듣고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진정우가 용설아와 함께 온 건가? 이제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걸까? 항상 붙어 다니는 거야?’헤르나는 내 표정이 잠시 멍해진 것을 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네 눈이 네 입보다 솔직하네.”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병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숨 막히는 답답함을 삼키고 그의 뒤를 따랐다.내가 이곳에 올 때는 헤르나에게 기절당한 채 끌려왔지만 이제는 그의 고급 차량에 앉아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이동하고 있었다.하지만 창밖의 풍경은 또렷이 기억나는데 내 마음속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차가 멈추자 나는 옆에 앉은 헤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여기 병원에 왜 온 거죠?”“한 사람을 만나러.” 헤르나는 내 긴장한 모습을 흘깃 보며 말했다.“누구를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이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진정우를 생각하고 있는가 봐?”나는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이미 헤어졌잖아. 미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를 신경 써?”헤르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고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억지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헤어졌다고 해서 신경을 안 쓴다는 법은 없잖아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내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잠시 후, 그는 차에서 내렸다.“그게 진정우인지 아닌지는 네가 가서 보면 알겠지.”나는 차 안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만약 진정우라면 난 가지 않을 거예요.”“왜?” 헤르나가 웃으며 물었다.“그 사람에게는 약혼자가 있잖아요. 내가 전 연인으로 찾아가면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헤르나는 입가를 살짝 핥으며 웃었다.“선을 잘 지키네. 하지만…… 넌 가야 해.”“가지 않으면요?” 나는 그와 대립하듯 대꾸했다.“그럼 내가 널 안고 갈 거야.”나는 눈이 커
헤르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약속한 경기 날이 다가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날 진정우가 올 거라는 말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진정우가 오든 오지 않든,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아무리 깊은 사랑이라도 실망이 반복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걸, 강유형과 진정우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셋째 날 아침, 헤르나가 돌아왔다. 나는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아래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고개를 돌리니 연한 카키색 재킷과 흰색 캐주얼 팬츠를 입고 손에는 하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190cm가 넘는 그의 키와 탄탄한 체격은 마치 톱 모델처럼 보였다.“내려와.”그가 나를 부르자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는 꽃다발을 건네며 나를 가볍게 안으려 했다.그때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친하지도 않은 남녀 사이에 이건 아닌 것 같네요. 함부로 그러지 마세요.”나는 순간 뭔가 깨달았다. 헤르나는 나에게 유난히 관대한 것 같았고 내가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굴수록 그는 오히려 나를 더 흥미롭게 대했다.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늘 남들의 복종에 익숙해져서, 가끔 말을 안 듣고 반항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선하게 느끼는 모양이다.“하하, 참 쑥스러움이 많네.”그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소파로 걸어갔다.나는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경기 보러 언제 가요?”“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없으면 시작도 못 할 테니까.”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스누커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선수가 이런 부당한 현실 속에서 희생되었을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헤르나 씨, 이렇게 하면 양심에 찔리지는 않아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더라.”그는 정말 솔직했지만 그 솔직함이 오히려 화를 돋웠다.이틀 동
나는 강유형을 세게 밀치며 소리쳤다.“안 간다고 했잖아! 왜 자꾸 이래? 지금은 여기에 있고 싶어. 내가 늑대한테 잡아먹히든, 개한테 물리든 그게 네 일이야?”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 우린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 일에 간섭하지 마. 그리고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원하지 않아.”내 말에 강유형의 눈빛이 깊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지원아, 이건 네 선택이야. 후회하지 마.”“내 선택에 후회한 적 없어.”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그 말에 강유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등을 돌렸지만 몇 걸음 걷다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헤르나를 가리키며 말했다.“경고야. 지원이한테 손대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나를 한 번 쳐다본 후 떠났다.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 한구석에 묘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다.“그 자식 아직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헤르나가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고 나는 시선을 땅으로 떨구며 대답했다.“유통기한 지난 사랑은 아무리 좋아도 필요 없어요.”헤르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제법 똑똑한 소녀네.”그가 나를 칭찬한 건지, 아니면 내가 여기 남겠다고 한 선택이 현명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강유형과 함께 떠나겠다고 했더라면 그는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가자. 뭐라도 먹어야지. 오늘 특별히 중국 요리사를 불러서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준비했어.”헤르나는 마치 소중한 손님을 대접하듯 말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그의 '인질'인데도, 그는 나를 VIP처럼 대했다.식탁에는 다양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만두까지 있었다.'이 사람, 철저히 나를 조사했구나.'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했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왜 안 먹어?”그는 만두 하나를 내 접시에 놓으
내가 언제 헤르나의 사람이 됐다는 거지?헤르나는 일부러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고 순식간에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마치 내가 도화선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강유형은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어두운 눈빛으로 헤르나를 노려보았다.“헤르나 씨, 경찰의 관심을 끌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해 봐.”헤르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경찰을 들먹이다니, 너 수준이 진징우보다 조금 낮구나. 그래서 지원이가 너 대신 진정우를 선택했구나.”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헤르나... 정말 교활한 자식이야. 강유형과 진정우 사이의 갈등까지 부추기다니.’강유형의 얼굴은 이미 험악했는데 진정우의 이름이 나오자 더욱 굳어졌다.진정우는 강유형에게 가시 같은 존재인데 헤르나는 그 가시를 더 깊이 찔러 넣었다.“헤르나, 네가 누구를 상대로 하든, 어떤 일을 꾸미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하지만 지원이에게 손대는 건 절대 안 돼.”강유형은 차가운 경고의 말을 던졌다. 그러나 헤르나는 내 손목을 쥔 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렇게 귀여운 소녀를 어떻게 건드릴 수 있겠어?”그는 깊고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내 곁에 두고 싶을 뿐이야.”그의 목소리마저도 유난히 다정하게 들렸다.“죽고 싶어!”강유형은 화가 치밀어 올라 크게 소리쳤지만 헤르나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운 채 나를 향해 물었다.“네가 직접 말해봐. 여기서 나갈지, 남을지.”그는 교묘하게 나를 갈등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지원아, 걱정하지 마. 내가 널 데리고 나갈게.”강유형은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강유형은 비록 나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보호하려는 그의 태도만큼은 진심이었다.하지만 헤르나의 뒤에 있는 두 명의 체격 좋은 경호원이 그의 뒤를 바짝 지키고 있었다. 헤르나가 눈짓만 하면 그들은 당장이라도 강유형에게 달려들 태세였다.강유형이 강해 보이긴 했지만 그는 군대를 다녀온 진정우처럼 싸움에 능한 사람이 아니고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헤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좋아. 사랑에 눈이 먼 여자는 아닌가 봐.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왜 하필 신지태를 구하려고 한 거야?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겉으로는 친절해 보이는 헤르나지만 그는 계속해서 나를 떠보며 내 약점을 찾으려 했고 내 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중요하지 않아요.”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헤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나를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유일한 기회를 그를 위해 썼잖아.”“내가 스누커를 배운 건 지태 오빠 덕분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기회는 그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내 말에 헤르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어? 나를 설득해서 너를 놓아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잖아.”“어차피 당신은 날 여기 가두고 경기를 보게 하려고 했잖아요. 날 풀어준다 해도 공항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지태 오빠의 경기를 보러 왔기에 굳이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내가 말하며 그의 팔에 난 상처를 힐끔 쳐다보자, 헤르나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여유롭게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이거?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어. 다 나으면 문신이라도 해서 보기 흉하지 않게 만들어야겠지.”“누가 그런 거예요?”나는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모를 리가 있나?”헤르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 나도 더 숨길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정우를 상대로 복수하려는 거군요.”헤르나는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그게 전부는 아니야.”그리고 와인잔을 흔들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그가 날 다치게 해서 생긴 게 아니거든.”“진정우랑 이미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내가 묻자, 이번엔 헤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너희 사귀었다면서? 그런데도 자기 과거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어?”그의 말은 내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았다.“안 했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헤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연민이
그러나 나는 그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부러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헤르나는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앉아서 천천히 생각해 봐.”사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할지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자리에 앉아 흰색 캐주얼 팬츠 위로 긴 다리를 교차시킨 채 와인잔을 손에 들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여유롭고 느긋했다.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웠고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전혀 급하지 않은 듯 보였다.솔직히 말해, 그의 외모는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깊고 또렷한 눈매는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심연 같아서 오랫동안 쳐다볼 수 없었다.나는 그의 눈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당구대 모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경기가 끝나면 절대 지태 오빠에게 다시는 손대지 마세요.”현존 최고의 스누커 선수라면 단연 신지태였다.그들은 불법 도박 자본을 이용해 경기를 조작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 리는 없었다.결국 신지태를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넣으려 할 것이고 내가 아는 신지태는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자신의 팔을 끊어버릴 만큼 단호한 사람이었다.헤르나는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 나는 곧바로 말했다.“당신이 내가 이기면 어떤 요구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헤르나는 와인잔을 살짝 흔들며 답했다.“긴장하지 마. 약속을 깨겠다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서 그래.”“역시 이런 사람들은 말만 번지르르하지.”나는 비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큐대를 내던지고 뒤돌아섰다.그때, 헤르나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널 여기 데려온 건 두 사람 때문이야.”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누군데요? 당신, 브라운 때문에 날 납치한 거 아니었어요?”그가 내게 조건을 내걸라고 했지만 나는 브라운과 그의 팬들에게 나를 놔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신지태를 구
“세 판.”“좋아요.”나는 말하면서 천천히 큐를 골랐다.“보는 눈이 있는데?”내가 큐를 손에 쥐자마자, 헤르나가 웃으며 칭찬했고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는 곧 이유를 덧붙였다.“네가 고른 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야.”“그래요?”나는 살짝 비웃으며 큐를 살펴보다가 큐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큐에 새겨진 건 ‘진’이라는 번체 글자였다.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나도 모르게 먼저 튀어나왔다.“이건 당신 게 아니라..”나는 이어서 진정우의 큐라고 말하려다 멈췄다.진정우와 헤르나는 완전히 대립 관계 아닌가. 그가 어떻게 진정우의 큐를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큐는 보통 프로 선수들만 사용하는 건데.이전에도 진정우에게 스누커를 잘 치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보통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전문 큐를 가질 리 없었다.“이거 누구 거야?”헤르나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나에게 맞춰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것은 아니예요. 큐에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역시 스누커를 잘 아는 소녀답네. 이런 것도 알아보네.”‘스누커 소녀’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브라운이 나를 처음 그렇게 불렀었다.“그렇게 저를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왜?”헤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쓰레기 같은 인간이 저를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거든요.”나는 헤르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꼬마야, 나를 욕하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해.”나는 헤르나를 욕하려 한건 아니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의 웃음을 무시했고 이미 공이 배치된 테이블을 보며 말했다.“이제 시작하죠.”그는 손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해봐.”내가 먼저 시작하라는 조건이었으니,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큐를
‘무슨 경기를 본다는 거야. 이건 그냥 날 인질로 잡아 지태 오빠가 이기게 만들려는 거잖아.’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렇다면... 여기 온 김에 차분히 적응하는 수밖에.’사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방금 핸드폰을 던지며 보였던 격앙된 행동은 모두 헤르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을 뿐이었다.그는 이미 내 핸드폰을 만졌으니, 내 메시지나 통화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걸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핸드폰을 아예 없애는 것이었다.더 이상 발버둥 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헤르나도 이미 나에게 구체적으로 통보했고 이 상황에서 계속 소란을 피워봐야 무의미할 뿐이었다.그래서 방에서 나와 테라스로 향해 바람이라도 쐬려고 했다. 그런데 테라스에 나서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숨이 멎었다.엄청난 규모의 테라스 아래로는 거대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사방은 푸른 식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골프장, 야외 스누커 경기장, 커다란 수영장과 화려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그곳에서 헤르나가 한가롭게 당구를 치고 있었다고 그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꼬마야, 내려와서 나랑 한 판 치지 않을래?”순간, 나와 시합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브라운이 떠올랐다.브라운과 헤르나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르나가 브라운을 압도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브라운 한 명은 대처할 수 있겠지만 그의 수많은 팬들은 이미 광기에 휩싸여 있고 언제든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결국 이 팬들을 진정시키려면 브라운이 직접 나서야 하는데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헤르나뿐이었다.하지만 나는 그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네가 당구를 잘 친다고 들었어. 만약 네가 나를 이기면 널 미리 돌려보내 줄 수도 있지.”헤르나가 유혹적인 제안을 던졌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진정우나 신지태와 가끔 시합을 즐겼을 뿐인데 어쩌다 내 당구 실력이 이리 소문났는지.두 명의 외국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