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입구컷을 당할 줄 알았다.역시 강두식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대단했다. 특히는 용진표에게는 더욱 중요한 이름인 것 같았다.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홀 한가운데에서 기운을 다스리며 태극권을 연습하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한눈에 들어왔다.‘저 사람이 바로 용진표야?’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지금 60세가 채 안 된다고 했지만 지금 눈앞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거의 아버지와 비슷해 보였다. 오히려 아버지보다 나이가 한참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그의 외모는 내가 가진 정보와 일치했지만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바로 용진표라고 믿기 힘들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젊은 아가씨, 뭐 하러 날 찾으러 왔지?”용진표는 여전히 자신의 동작에 집중하며 나를 한 번도 정면으로 보지 않은 채 말했다.그가 바로 용진표였다.그가 이렇게 변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별로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그래. 알고 있었어.”용표는 여전히 태극권 동작을 멈추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나는 조금 놀랐고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용진표가 나의 존재를 알았다면 내가 왜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다는 것일까? 혹시 용진표가 미리 말을 전해놨을까?’“옛날부터 강 대표님은 너를 많이 아꼈고 너를 자기 딸처럼 생각하고 자주 나한테 자랑했지.”그의 말에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풀린 느낌이 들었다.‘그러면 내가 찾는 이유도 아는 거겠지?’“그래. 말해봐. 나한테 할 말이 뭐야?”그는 태극권을 계속 연습하며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내게 등을 보인 채 계속 동작을 이어갔기에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라는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10여 년 전에 윤동휘라는 분과 계약을 체결하셨던 것으로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삼촌이 용진표처럼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을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나는 언제나 생각이 많았기에 이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여기 앉아.”용진표가 내게 손짓을 하자 나는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옆의 아가씨들이 물을 따라줬고 서비스는 매우 세심했다.나는 이런 대접에 익숙하지 않지만 상황에 맞춰서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결혼 안 했지?”용진표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아니요.”“그럼 언제 강 대표네 집으로 시집갈 거야?”그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이미 강유형과 헤어진 사실을 그가 모르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용준호가 나에게 그의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아버지를 만나자고 했던 것도 어이가 없었다.지난번에 용준호의 말을 듣고 그랬다면 용진표는 어쩌면 화가 나서 터졌을 수도 있었다. “결혼 안 할 거예요.”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용진표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어?”그의 말투가 자연스러웠고 내가 결혼 안 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이미 내가 KS 그룹에서 나왔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그냥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나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사실 그가 이렇게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내가 다니는 작은 회사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 같았다.“어떤 남자 친구를 원해?”용진표가 내 사생활에 대해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내게 질문을 던졌다.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도가 궁금했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남자 친구가 있어요.”“오.”용진표는 차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를 기억하시나요?”용진표는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기억이 안 나네.”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가방에서 아버지의 파일 안에 있던 계약서를 꺼내 두 손으로 그에게
삼촌과 아줌마는 나에게 정말 잘해주셨고 나도 그들을 진심으로 내 부모처럼 여겼다.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계약서를 발견한 이후 그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 항상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이제 그걸 풀어내고 싶다. 나도 그들을 마음껏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용진표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넌 네 아버지를 똑 닮았네.”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그는 아까 분명히 내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제야 알았다. 그는 나를 속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나는 숨을 깊게 쉬며 손끝으로 내 손바닥을 쥐었다.그때 용진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 강 대표가 자주 언급했어. 아니면 내가 어떻게 10년도 더 된 사람을 기억하겠어?”내 목이 조여오며 말했다.“삼촌이 제 아버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죠?”그러자 용진표가 일어섰다.옆에 있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왔지만 용진표는 손짓으로 그를 멈추게 하고 큰 창문 앞으로 걸어가 풀밭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생각해? 네가 강 대표라면 네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했을 것 같아?”역시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다.사람을 다루는 게 정말 능숙했다.나는 삼촌이 무슨 말을 했을지 전혀 모르겠고 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그래서 나는 일어나 그를 따라가서 그의 옆에 섰다.“삼촌은 제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예요.”용진표는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나도 그를 따라 창밖을 보았다.넓은 풀밭, 초록색으로 가득한 풍경이 시선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이 풍경은 갑자기 아버지와 함께 갔던 큰 초원을 떠올리게 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우리는 그렇게 부유하진 않았지만 매년 여행을 떠났다.그들은 큰 도시보다는 자연을 선호했고 그 덕분에 나는 초원이나 사막, 바다와 같은 광활한 자연을 더 잘 기억하고 있다.눈앞의 초록 풀밭은 불현듯 나를 몽골 대초원으로 데려갔고 아버지와 함께 몽골 텐트에서 자고
삼촌과 아줌마는 나에게 가족 같은 사랑을 주셨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랑이 혹시나 한낱 웃음거리가 될까봐 두려웠다.하지만 용진표의 말은 믿어도 되는 걸까?내가 이렇게 의심이 많은 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일이라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어떻게 더 물어봐야 할지 몰라서 결국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지원아, 너 아직 모르고 있을 텐데 강 대표한테 작은 비밀 금고가 하나 있어.”용진표가 말을 꺼내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허허.”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강 대표랑 나는 같은 부류가 아니야.”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용진표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구나.’인터넷에서는 그가 부인과 애인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이야기가 있었다.하지만 그런 소문에도 그는 자식이 딱 하나 용준호만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삼촌과 아줌마는 사이가 정말 좋으세요.”용진표는 다시 한번 웃었지만 난 그 미소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그러더니 그는 말을 이었다.“강 대표의 비밀 금고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야. 당시 그 계약의 모든 수익과 그 이후의 배당금이 들어있지.”그는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더니 말했다.“지원아, 그 금고는 너희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어. 그러니까 그 돈은 너희 아버지 몫이라는 거지.”나는 충격을 받아 말을 잃었다.나는 KS 그룹에 이렇게 오래 있었지만 이런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삼촌은 나에게 이 일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강 대표는 그 돈이 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얻은 돈이라 자기는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 돈을 쓰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라며 그 프로젝트의 모든 수익을 네 아버지 이름으로 돌려놓았지. 그리고 네가 나중에 결혼할 때 그 돈을 네 부모님이 너에게 남겨준 결혼 자금이라고 준다고 했어.”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죄책감이 찌르는
“누나!” 조태혁이 나를 향해 웃으며 다가왔고 난 그 표정이 정말 얄미웠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이곳에서 조태혁을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또 무슨 사고 쳤어?”조태혁이 사고를 안 치면 평소에 여길 올 일도 없을 것이다.조태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말했다.“맞아. 무면허 운전.”그 말에 나는 문득 그가 생일 초대했던 일이 떠올랐다.아직 미성년자인데 말이다.“축하해.”나는 어이가 없어 험한 말이 나갔다.“고마워!”그는 여전히 뻔뻔하게 받아쳤다.나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무시하고 자료를 찾고 있던 경찰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고 자료가 너무 오래된 건지 경찰은 여전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못 찾은 듯했다.“누나, 여기엔 왜 온 거야?”조태혁이 옆으로 다가오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볼일 좀 보러.”나는 대충 둘러댔다.“무슨 일이야? 잘 안 풀리면 내가 사람 찾아서 도와줄게.”조태혁이 멋진 남자 흉내를 내고 있었다.나는 비웃으며 말했다.“네 일을 해결할 사람을 먼저 찾아보는 게 어때?”무면허 운전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만약 그랬다면 여기서 꽤 고생했을 거다.“난 이미 해결됐어.”조태혁은 아주 뻔뻔하게 말했다.그 말을 듣자 아까 강유형이 여기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역시 그가 도와줬을 것이다.다음 순간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니 조태혁이 가까이 와 있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우리 매형이 여기 국장이랑 아주 친하거든.”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였다.하지만 그가 말한 매형이라는 표현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다. ‘이 녀석이 일부러 나를 짜증 나게 하려고 작정했네.’“필요 없어!”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괜찮아. 가족끼린데 뭘. 내가 가서 바로 얘기할게.”조태혁은 고집을 부리며 나설 기세였다.역시 조나연의 친동
조태혁은 키가 180cm나 되는 큰 체구로 나를 거의 넘어뜨릴 뻔했다.나는 중심을 잡으려고 비틀거렸지만 뭐라 하기도 전에 조나연이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그 순간 문득, 조나연이 정말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에 어떻게 그녀를 예쁘다고 생각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아마 ‘상유심생(相由心生)’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거겠지. 지금의 조나연은 내면이 꼬일 대로 꼬여서, 마음이 추하니 얼굴까지 변한 것 같았다.“조태혁, 이리 와.”조나연은 동생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누나, 살려줘!”조태혁은 내 뒤에 숨으며 어린애처럼 애원했다.나는 정말 어이가 없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손 놔!”“누나, 제발 좀 살려줘.”조태혁은 끈질기게 내 팔을 잡고 늘어졌다.이를 악물고 참다못한 나는 발을 들어 그의 발등을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아!”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고 나는 그가 잡았던 팔을 재빨리 옷에 문질러 닦았다.그런데도 조나연이 내 앞을 막아섰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비켜주세요.”“지원 씨, 당신이 이렇게 독할 줄은 몰랐어요. 정말 너무하네요.”조나연은 나를 향해 비난 섞인 목소리를 냈다.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머리가 나쁘면 병원에 가서 치료하세요.”“당신은 강유형이랑 이미 끝났잖아요. 그런데도 왜 굳이 우리 가족을 망신 주고 날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어야 해요? 난 집에서 쫓겨났어요. 그래도 유형이가 다른 집을 마련해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이긴 것도 아니죠.”조나연의 원망 섞인 말에 상황이 명확히 이해됐다.그녀가 집에서 쫓겨난 게 사실이었다.어제 아줌마가 조나연을 내쫓겠다고 했을 때, 내가 굳이 말렸던 것이 떠올랐다.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의 살벌한 눈빛에도 나는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요. 당신이 열받으면 그걸로 됐어요.”그러자 조나연의 얼굴은
약한 사람만 골라서 괴롭히는 거지.강유형과 조나연이 나한테 이렇게 나오는 건 내가 항상 물러서고 싸우지 않으니까 만만하게 본 거겠지.하지만 그건 내가 지겨워서 상대도 안 했을 뿐이다.그들이 착각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알려주려고 했다. 내 날 선 말에 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다.“윤지원.”“손 놔.”나는 또 한 번 단호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말했다.“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이 얘기를 전하려고 했을 뿐이야.”“지금 나더러 짜증 나라고 일부러 얘기하는 거야?”나는 가시 돋친 말투로 그를 몰아붙였다. “그런 거라면 필요 없어. 듣고 싶지 않아.”강유형은 미간을 찌푸리고 애써 분노는 참고 있는 게 느껴졌다.평소 같았으면 차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그는 몇 초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놀이공원은 예정대로 개장해. 그날 와줬으면 좋겠어.”그 말에 숨이 턱 막힌 듯 멈칫했다.그 놀이공원은 단순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개인적으로도 깊은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개장 날에는 꼭 참여하고 싶었다. 처음 공원을 건설할 때부터, 개장 날 꼭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했으니까.하지만 지금은...“나도 그곳에 있는 게 신경 쓰인다면 그날 나는 안 나갈게.”그는 내 마음속 갈등을 읽은 듯, 스스로 한발 물러나는 태도를 보였다.“괜찮아.”나는 짧게 대답하고 그의 마음을 찌를 말을 덧붙였다.“너 때문에 가지 않을 일은 없으니까.”강유형의 얼굴이 굳었고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굳이 이렇게 상처를 주며 말해야 속이 시원해?”나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차 문을 열며 말했다.“나 바빠.”그가 손을 놓기 전 물었다.“그날 올 거야?”“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차 문을 세게 닫았다.문이 닫히며 그의 몸이 순간 뒤로 밀려났고 그가 한발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차를 몰고 주차장을 나서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조수석에
“지원아, 오늘 밤엔 아빠랑 같이 별을 세자.”“지원아, 약 잘 먹고 말 잘 들어야지.”“지원아...”...“아빠, 엄마...”나는 꿈속에서 두 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은 누군가에게 붙잡혔고 귀에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정신 차려. 지원아!”함께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내 얼굴이 따스한 손에 감싸였다.눈앞에 보인 건 다급한 표정의 진정우였다. 그는 내 뺨을 살며시 문지르며 말했다.“지원아, 나야.”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꿈에서 깨어났지만 현실로 돌아오니 마음이 더 아팠다.나는 입술을 꽉 물며 고통을 참아내려 했다. 하지만 진정우가 내 입을 벌리며 말했다.“지원아, 이러지 마. 상처 난다고. 내 말 들어, 알겠지?”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머릿속에는 부모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아!”나도 모르게 다시 비명을 지르며 진정우의 어깨에 매달리듯 안겼다.그의 어깨에 기대어, 나는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아무도 내 마음속 고통을 모를 것이다. 나는 그의 어깨를 마구 때렸고 눈물은 끝없이 흘렀다.‘우리 부모님은 왜 그렇게 끔찍한 사고로 떠나셔야 했을까?’그 억울함과 분노는 끝도 없이 이어졌고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이었다.그런 나를 진정우는 단단히 안아주었다. 이성을 잃은 나는 마지막엔 그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어버렸다.그러고는 또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그 후,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났을 때, 희미한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침대 옆에서 엎드려 있는 진정우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전날의 일이 스쳐 지나가며 눈을 감았다.아직도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기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나는 부모님의 고통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기로 했다.“물 마실래?”엎드려 있던 진정우는 내가 깬 걸 눈치채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더 이상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를 부드럽게 일으켜 세우고 탁자 위에 따뜻하게 데워둔 물을 내게 건넸다.“혼자 마실 수 있어.”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정말 너무해. 내 말도 안 들어보고 이렇게 구는 거야?”“내가 언제 안 들었어. 네 얘기를 들으려고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그의 말에 나는 머릿속으로 그가 얼마나 초조했을지 그려졌다.내가 없어진 걸 알고 CCTV까지 확인하며 나를 찾아다녔겠지. 그리고 결국 내가 강유형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강유형이 말한 대로 진정우는 나를 찾기 위해 애썼다.나는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전화 못 받은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땐 내가 중환자실에 있었거든.”“알아.”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래서 화내지 않았어. 그리고 전화가 안 됐던 이유는 집에 가면 얘기해줄게.”그는 멀리 보이는 아파트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네가 어젯밤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어. 물도 안 마셨고. 정말 피곤하고 목이 말라.”그의 말에 마음이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이끌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간 걸 알면서 왜 잠도 안 자고 물도 안 마신 거야? 대체 뭘 했길래 이래?”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나를 따라 걸었다. 그의 상태가 걱정돼 더 이상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짐을 내려놓고 과일을 정리하더니 나를 신발장 쪽으로 밀어붙였다.그의 강렬한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멎을 듯해 나는 침을 삼켰다.“물 준비해 놨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질투 났어.”그의 말에 나는 놀라 멈췄다.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걸 이해한다는 말투였는데, 이제 와서 질투했다고?“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 말을 막았다.그의 품에 안겨 입맞춤을 나누며 그의 목마름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졌다. 거칠고 마른 입술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따뜻했다.“네가 한 일을 이해해. 그래도 질투는 멈출 수 없더라.”그가 입맞춤을 멈추
나는 눈을 감았다. 연락이 닿지 않아 불안했던 마음이 그제야 가라앉았다.“정우 씨는 어딘데?”“집 앞이야.”그 말에 순간 머릿속에 그가 텅 빈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모습이 그려졌다.내가 이사를 했다는 걸 알 리 없는 그는 당연히 그곳으로 간 것이었다.“핸드폰이 없길래 소영이한테 물어봤더니 네가 집에 돌아갔다고 했어. 리영 씨도 수술 중이라 연락이 안 되고...”진정우가 이유를 설명했다.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새집을 둘러보며 대답했다.“나도 정우 씨가 연락이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알아.”그의 짧은 대답에 어쩐지 쓴웃음이 나왔다.그에게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만나서 이야기할게. 너 이사 간 거야?”지금 이 새로운 집은 진정우도 모르고 있었다.그전에 그는 셋집을 구했다고 나한테 말하면서 나보고 그곳으로 오라고 했고 나도 그 당시 동의했다.하지만 진정우가 연락이 되지 않자 갈 곳이 없던 나는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응. 네 짐도 다 가져왔어.”바닥에 놓인 그의 짐가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사실 그의 짐은 별로 없었다. 그가 살던 곳의 많은 것들은 원래 집주인의 것이었다.그는 잠시 말이 없었고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아서 나는 바로 말했다.“택시 타고 자호 가든으로 와. 내가 입구에서 기다릴게.”“알았어.”나는 전화를 끊고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인 뒤 컵 두 개에 식히고 신발을 갈아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 단지는 작년에 완공된 새 아파트였고 깔끔하고 환경도 좋았다.나는 단지를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보낸 뒤 약속한 입구로 갔다.마침 입구 근처의 과일가게가 새로 문을 열고 할인 행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게에 들어가 몇 가지 과일을 골랐다. 계산하려던 순간 진정우에게서 전화가 왔다.“과일가게 안에 있어. 들어와.”전화를 끊자마자 그가 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내가 손을 흔들자 그는 빠르게 걸어왔다. 그의 눈길이 내 얼굴에 고정된 것을 느끼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뭐
“그럴 일은 없을 거야.”진소영은 내가 한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요! 오빠가 돌아오면 언니랑 빨리 결혼해야 해요. 그래야 아무도 언니를 노릴 수 없잖아요.”철없고 순진한 동생 같은 말에 웃음이 났다. 세상에는 '이혼'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를 것이다.하지만 나는 진소영이 괜한 걱정을 할까 봐 가볍게 대답했다.“그래, 나도 네 오빠가 빨리 나 데려가길 기다리고 있어.”진소영은 눈을 반짝이며 기뻐하더니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진정우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언니가 오빠가 데리러 오기만 기다리고 있대요. 얼른 와서 청혼해요!”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메시지를 보낸 뒤 진소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근데 오빠 왜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안 봐요?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죠?”그 말에 나도 잠시 마음이 철렁했지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글쎄, 어쩌면 가는 길에 다른 예쁜 여자한테 홀렸을지도 몰라.”“그럴 리 없어요! 오빠는 예전부터 쫓아다니는 여자들한테도 관심 없었어요. 오직 언니만 좋아했거든요.”진소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우리는 웃으며 가벼운 대화를 이어갔다. 아침을 함께 먹고 나서 나는 간병인에게 진소영을 맡기고 병원에서 나왔다.안리영이 준비해 준 예비 핸드폰과 새 번호를 받아 들고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불안감이 커졌지만 지금 당장 그를 찾으러 갈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나는 집에서 부모님 사고와 관련된 자료를 꺼내 다시 살펴봤다.보고서에는 사고 원인이 브레이크 고장으로 인해 차량이 통제력을 잃고 전복된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브레이크 고장이라니?이게 단순한 차량 문제였을까? 아니면 누군가 고의로 손을 댄 걸까?보고서는 이 의문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왜 당시에는 이런 부분을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이 모든 사고 처리를 삼촌이 맡았
진소영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진정우에게 전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핸드폰이 드디어 연결된 걸까?처음엔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묵묵히 서서 진소영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오빠, 지원 언니 전 남자 친구가 언니를 보는 눈빛이 이상해. 분명히 아직도 언니를 좋아하는 것 같아.”“오빠, 혹시 언니랑 싸운 거 아니야? 언니가 아까부터 계속 멍하니 있었어.”“왜 문자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한 가지 확실히 말해둘게. 만약 언니랑 헤어지면 나도 오빠랑 안 볼 거야.”“빨리 답장해. 전화 받으라고!”마지막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통화 중이 아닌 음성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진정우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왜 연락이 안 되는지 궁금해졌다.나는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녀가 음성 메시지를 보내는 걸 엿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병실 문을 다시 열고 더 큰 소리로 문을 닫았다.“언니!”진소영이 문소리를 듣고 날 불렀다.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숨기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며 웃었다.“별생각 하지 마.”나는 그녀의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아까 병실에 왔던 사람이 내 전 남자 친구였어. 하지만 다 지난 일이야. 지금은 그냥 친구 아니면 형제 같은 관계야.”진소영은 빤히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언니, 그럼 그 사람이랑 어떻게 만나서 연애했는지 그리고 왜 헤어졌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그녀의 순수한 눈빛은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탐구하려는 것 같았다.아마 그녀는 로맨스 소설 속 사랑 이야기만 접해봤기에 현실에서의 사랑 이야기가 더 궁금했을 것이다. 모르는 이야기는 더 알고 싶기 마련이다.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그녀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게 뻔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알았어. 너의 궁금증을 풀어줄게.”나는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진소영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강유
“그 나쁜 계집애가 강유형을 믿고 이러는 거야.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아줌마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줌마, 우선 조나연이 삼촌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확실히 아는 게 중요해요.”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무슨 말을 했겠어? 당연히 우리 집에 들어오고 싶다는 얘기겠지. 대놓고 우리한테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말했을 거야.”아줌마의 말투에서 조나연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천만에. 세상에 여자가 다 없어져서 강유형이 평생 혼자 산다 해도 그런 년을 절대 우리 집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야!”그녀의 단호한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나는 그녀의 분노가 삼촌을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화를 풀게 두고 있었다.그리고 얼마 후 아줌마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지원아, 지켜봐. 내가 그년을 제대로 혼쭐낼 거야.”그 말을 듣자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강유형 집에 들어온 지 2년째인가 3년째 되는 해 아줌마와 삼촌은 이혼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그때 아줌마가 누군가를 혼쭐내겠다고 전화로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아줌마는 상대방에게 내 남편을 건드리지 말라며 경고했다.그 일 후, 삼촌과 아줌마는 크게 다퉜고 삼촌은 아줌마를 지독한 여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오늘의 아줌마도 그때와 비슷했다. 나는 이번에도 아줌마가 무언가 극단적인 행동을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만약 내가 그녀를 말리지 않고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삼촌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제가 조나연을 찾아가서 직접 물어볼게요. 어떤 속셈인지 확인한 후 그다음에 대책을 생각하셔도 늦지 않아요.”나는 차분히 설득했고 아줌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마침내 동의했다.“그래. 네가 가서 물어봐. 하지만 분명히 전해줘. 만약 너희 삼촌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년은 목숨으로 갚아야 할 거라고.”그 마지막 말은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강유형이었다.그가 병실에 갑자기 나타나자 내 첫 반응은 삼촌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물었다.“삼촌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강유형은 병실 안을 둘러보지 않고 나만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으셔.”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엄마가 널 찾으셔.”안도의 한숨이 나왔다.“무슨 일인데?”“글쎄... 나도 모르겠어. 급한 것 같아. 어서 너 보고 전화하라고 하셨어.”그는 다시 핸드폰을 내 앞에 내밀었다.내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받으려는 순간 뒤에서 진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이분은 누구세요?”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진소영은 이미 내가 진정우랑 왜 싸웠을까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강유형이 내 전 남자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게다가 그녀는 로맨스 소설로 가득 찬 머릿속을 가지고 있으니 온갖 상상을 할 게 분명했다.“저기... 내 오빠야.”내가 그렇게 말하자 강한 냉기가 주위를 감싸는 걸 느꼈다.나는 강유형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반응이 예상되었다.나는 진소영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너는 구운 배를 마저 먹어.”진소영은 손에 작은 스푼을 든 채 강유형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경계와 방어의 기색이 가득했다.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가자.”그 순간 진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저분이 둘째 오빠인 걸 저도 알아요.”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강유형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그가 지금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불편한 걸까?하지만 우리가 이미 헤어진 사이고 그의 부모님은 나를 건너뛰어 의붓딸 삼겠다고 했으니 강유형은 엄연히 내 둘째 오빠가 맞다.“맞아. 둘째 오빠야.”나는 단호히 대답했고 핸드폰을 받아 들고 병실을 나섰다.병실 밖으로 나온 나는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아줌마의
그러자 진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이제 건강해졌으니까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요. 제가 놓쳤던 것들을 다시 찾아야죠.”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다.“좋아. 언니가 응원할게.”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격려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근데 이 책들 혼자 이해할 수 있겠어? 혹시 어려우면 원포인트로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아볼까?”진소영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언니. 심장 이식받고 나서 그런지 전보다 머리가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이 책도 금방 이해되더라고요.”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자 진소영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장난스럽게 말했다.“언니, 혹시 이 심장의 주인이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던 걸까요?”“무슨 소리야. 공부 잘하는 건 머리로 하는 거지 심장이랑은 상관없어.”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생각을 부정했다.사실 아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괜히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그녀가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넌 원래 똑똑해. 네 오빠도 그렇게 말했잖아.”나는 진소영을 다독이며 말했다.진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언니, 저 정말 대학 가고 싶어요. 캠퍼스 생활도 해보고 싶고요.”“좋아!”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격려하며 책을 몇 장 넘겨보았다. 책에는 필기 흔적이 군데군데 있었고 누군가 사용했던 헌책인 것 같았다.“이 책들은 누가 구해줬어? 네 오빠가 준 거야?”“아니에요. 어떤 친구가 줬어요.”진소영은 말하면서 시선을 약간 피했다.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나는 살짝 장난스럽게 물었다.“어머. 병원에서도 친구를 사귀었어? 그것도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니... 대단한데?”진소영은 약간 쑥스러운 듯 말했다.“친구라고 하기엔 좀 그래요...”“그럼 어떤 사람이야?”나는 모르는 척 더 물어봤다.“다른 병실 환자 가족이에요. 그분이 책 보다가 병실을 착각해서 우리 방에 들어왔어요. 처음엔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까 박사 준비 중이래요...”진소영의 말을 들으니 꽤
“강 대표님께서 지원 씨 목이 잠겼다고 하시면서 특별히 부탁해서 구운 배에 도라지를 넣어달라고 하셨어요. 한밤중에 주문한 건데도 지금도 따뜻하네요.”고준석은 말을 마치며 따뜻한 구운 배가 담긴 봉투를 내 손에 건넸다.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나는 봉투를 들고 고개를 숙였다.고준석이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윤 팀장님, 지금 사시는 아파트로 모실까요?”그 아파트는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이었다.그가 이렇게 쉽게 물어본 걸 보니 지난번 한밤중에 강유형이 우리 집 아래에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아마 고준석이 미리 알아보고 강유형에게 정보를 준 게 분명했다.“아니요. 괜찮아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고준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룸미러로 나를 쳐다봤다.“그럼 어디로...”“고 비서님, 차를 세워주세요.”내 말에 고준석은 움찔하며 차를 한쪽에 세웠다.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윤지원 씨, 무슨 일이세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집에 가지 않을 거예요. 병원 외과 병동으로 가주세요.”잠시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아직 병원에서 회복 중인 진소영을 찾아가야 한다는 걸 말이다.고준석은 금세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소영의 수술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걸 보니 강유형도 아마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밤새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그가 나를 걱정해서 그런지 아니면 강유형의 요구대로 일을 처리 못 하면 돌아가서 욕을 먹을까 봐 두려워서 그런지 몰랐다.“괜찮아요.”나는 말하며 차에서 내리려 했다.“윤 팀장님.”그가 나를 다시 불렀다.그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따뜻한 구운 배로 향해 있었다.“강 대표님은 여전히 윤 팀장님을 위해 정말 많이 신경 쓰십니다. 만약 제 실수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두 분은 결혼하셨을지도 모릅니다.”그 일이 아직도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아
나는 왜 그를 밀쳐내지 못했을까?강유형은 여전히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착각하며 집착한다면 나는 그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결국 가장 큰 상처를 입는 건 그 자신일 테니까.이것은 어쩌면 하늘이 내린 벌일지도 몰랐다.아니면 내 부모님이 하늘에서 내 지난 10년간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강유형이 나와의 과거를 잊지 못하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조금 있으면 고준석이 핸드폰을 가져다줄 거야. 들어가서 푹 쉬어.”강유형은 그렇게 말하며 내 허리를 감싸던 손을 풀었다.그는 뒤돌아섰고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꼿꼿했다.한때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던 내가 이제는 그 모습이 아련하고 낯설게만 느껴졌다.나는 로비로 내려갔다.문을 나서려는 찰나에 고준석이 도착했다.“윤 팀장님.”나는 더 이상 그의 비서가 아니었지만 고준석은 여전히 나를 그렇게 불렀다.하지만 호칭 따위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강 대표님이 직접 주문하신 핸드폰입니다. 윤지원 씨가 쓰시던 브랜드의 최신 모델이에요.”그가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핸드폰은 필요 없으니 당신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고준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윤 팀장님, 그건 조금...”내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한 번 거절한 건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핸드폰 빌릴 수 없으면 그냥 됐어요.”나는 말하며 돌아섰다.“아, 알겠어요!”고준석이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그 핸드폰을 받아 들고 나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자동 응답 메시지가 들려왔다.진정우의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혹시 진정우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간 걸까?혹시 몰라 내 핸드폰에도 전화를 걸어봤다. 이번엔 통화 연결음이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진정우가 화가 나서 내 전화를 일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