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고 여자는 남자의 약한 모습에 약하다.게다가 남녀 간의 일에서 처음엔 서투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사실 이번 일은 안리영이 보내준 메시지 덕분에 내가 더 이상 진정우를 탓하지 않게 된 면도 있었다.[여자는 처음엔 약간의 상처가 있을 수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안리영의 다정한 메시지가 나를 진정시켰다.진정우는 안리영에게 정말 감사해야 했다. 그녀는 그의 실수를 덮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여동생을 위해 구안석 교수와의 수술도 연결해 주었으니 말이다.내 몸이 아직 아픈 상태이기에 아무리 진정우가 나를 원하더라도 난 이번엔 그가 참을 줄 알았다.그래서 그는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잘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꼭 껴안고 내 곁에 눕더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정우 씨, 넌 괜찮아? 힘들지 않아?” 나는 그의 품에서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는 짧게 대답했다.“말하지 말고 그냥 자.”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근데 정말 잘 수 있겠어?”“지원아.”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내 이름을 불렀다.“장난치지 마.”그는 분명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참아내고 있지만 마음속 갈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혼자 잤다면 덜 힘들었을 텐데 굳이 내 곁에 있으니 스스로 고생길을 택한 셈이었다.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살짝 찌르며 말했다.“그렇게 참기 힘든데 왜 여기서 자?”그는 내 말에 대답 대신 더욱 강하게 나를 안으며 답했다.그의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평소 덤덤하고 무뚝뚝한 모습만 보였던 그도 이렇게 소년 같은 면이 있다니.“소영이는 언제 데려올 거야?”나는 그의 품에서 슬며시 본론으로 들어갔다.“내일 회사 가서 일정 정리하고 바로 갈 게.”그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데려오고 바로 돌아올 거야? 아니면 며칠 더 있을 거야?”그는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내가 며칠 더 있길 원해?”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그의 의
진정우는 짧은 소매 셔츠에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그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 같았고 그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어딘가 특수 요원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랄까.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 그의 체격 덕분이기도 했지만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결과이기도 했다.문득 어젯밤 거실에서 팔굽혀펴기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자세는 정말 헬스 동영상에서 볼만큼 완벽했다.“왜 그렇게 쳐다봐? 밥이나 먹어.”진정우는 내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가 끓여준 소고기 국수를 한 입 들이키며 물었다.“운동은 주로 헬스장에서 하는 거야?”그는 젓가락으로 반찬 하나를 집어 내 그릇에 놓아주며 대답했다.“아니. 집에서 혼자 해.”“그래서 팔굽혀펴기 자세가 그렇게 완벽했구나.”나는 생각 없이 말했다가 문득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진정우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나는 그가 부끄러워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태연히 말했다.“다 봤나 보네?”이번엔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국수를 먹었다.그의 요리 솜씨는 정말 뛰어났다.원래 국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내가 이 소고기 국수를 먹으며 생각을 바꿀 정도였다.“정우 씨, 나중에 엔지니어 말고 요리사 하는 것도 좋겠는데?”나는 그를 칭찬하며 말했다.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뭐든 뒤에 사가 붙는 직업이잖아.”그러자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정우 씨는 내가 뭘 말해도 다 좋다 그러네.”그는 담담히 대답했다.“남자는 아내 말을 들어야지.”그의 말에 나는 순간 당황해 얼굴이 붉어졌다.진정우는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지원아, 너 얼굴 붉히는 모습 참 예쁘네.”“그런 말 하지 마.”나는 손으로 그의 입을 가리며 말했다.그는 내 손을 살짝 피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진짜야.”“계속 그러면 아주 혼날 거야!”나는 장난스레 화를 내며 그와 장난을 치기 시작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진정우의 눈빛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아마 그는 지금 살짝 불안한 상태일 것이다.역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법이다.진정우의 긴장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지만 나는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의 앞에 섰다.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시 멈췄다.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망설이는 모양이었다.평소 직설적인 성격의 그가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그 모습을 보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풉.”내 웃음소리에 그는 더 혼란스러운 듯 나를 보며 말했다.“지원아...”나는 그의 손에서 그가 준비해 둔 우유를 받아 들고 살짝 발돋움해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고마워.”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내 가방 챙겨 와.”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는 내 뒤를 따라오며 가방을 들고 있었다.아까의 긴장감은 없었고 그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차 앞에 도착해서는 이번엔 내가 운전석이 아니라 조수석으로 갔다.그리고 차 열쇠를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정우 씨가 운전해.”그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그가 데운 우유를 홀짝이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전혀 예상치 못한 여유와 편안함에 나는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회사가 가까워졌을 때 진정우가 갑자기 차를 도로변의 버스 정류장에 세웠다. “왜 멈춰?”나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네가 회사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모르게 하자며? 난 여기서 내려서 걸어갈게. 괜히 소문나면 안 좋으니까.”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이 문제를 떠올렸다.솔직히 나는 그가 이 문제를 잊었으면 했다.그가 먼저 나서서 신경 써 준다는 게 어딘가 불편했다.순간, 어제 회사에서 여직원들이 그를 칭찬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러자 나는 괜히 마음이 쓰렸다.
허진호의 말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표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긴급 출장이라도 가야 하나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틀 정도 외근 나가야 할 것 같아요.”나는 조금 전 아침 회의를 마쳤지만 외근 관련 내용은 없었다. 아마도 허진호가 방금 급히 잡은 일정인 듯했다.“어디로 무슨 일로 가야 하죠?” 나는 상황을 더 알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조금 있다가 알려줄게요.”그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어차피 대표님의 지시라면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나는 서둘러 현재 진행 중인 업무들을 정리하고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오전 10시 반쯤에야 잠시 여유가 생긴 나는 컵을 들고 차나 한잔 마시려고 티 룸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여직원 두 명의 수다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새로 온 진정우 씨는 보면 볼수록 멋있지 않아? 오늘 입은 작업복 바지 보니까 다리가 2미터처럼 느껴지더라니까!”“너무 과장하는 거 아냐? 너 요즘 진정우 씨한테 너무 빠졌구나. 근데 넌 예전엔 허진호 대표님 팬이었던 거 같은데?”“맞아, 예전엔 허 대표님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진정우 씨가 오고 나서는...”여직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젠 허 대표님이 길거리 물건처럼 보일 정도야.”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이 직원들의 말이 참 매섭네.’“앞으로 내 마음속 아이돌은 진정우 씨야. 다른 누구도 못 따라올 거야!”그녀의 선언 같은 말이 끝날 즈음에 나는 티 룸으로 들어섰다.그들은 내가 들어오자 그녀들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윤 부장님, 차 드실래요? 아니면 커피 드실래요?”나는 컵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진정우 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그녀들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네. 진정우 씨는 너무 멋있어요. 게다가 전직 군인이라면서요?”“그래요. 확실히 멋있긴
“쉿...”진정우가 낮게 신음을 냈다.그건 아파서가 아니라 민감하고 약간의 쾌감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묘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점점 더 장난기가 심해지는 내 모습에 자신도 놀라웠다.나는 그의 반응을 끝으로 태연하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사무실 문을 나섰다.진정우는 내가 방금 한 행동에 당황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사무실로 돌아와 커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나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음이 나는지는 몰랐지만 그냥 웃음이 나왔다.마치 장난꾸러기 아이가 몰래 나쁜 장난을 치고 신나서 웃는 것처럼 정말 속이 후련하고 유쾌했다.그렇게 웃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확인하니 용준호였다.그가 보낸 건 한 장소의 주소였다.링크를 눌러보니 외곽에 있는 한 산업단지에 위치한 신영 투자회사라는 주소였다.나는 그가 왜 이 주소를 보내온 건지 의아했다.‘잘못 보낸 건가? 아니면 나를 일부러 놀리려는 건가?’ 갸웃거리며 생각하던 찰나 그의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우리 아버지를 만나고 싶으면 여기로 와.”‘용준호의 아버지, 용진표가 요양원을 떠났다고? 용준호의 말이 사실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계략일까?’나는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다가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다.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내가 묻기도 전에 말했다.“못 믿겠으면 오지 마.”“대표님은 저더러 아버지를 찾지 말라고 했잖아요? 만난다 해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라 했잖아요?”나는 전에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지금 그는 또 나에게 주소를 보내서 그의 아버지를 만나게 하는 게 참으로 수상했다.그러자 용준호는 차분히 대답했다.“맞아. 나는 네가 헛수고할 까봐 말렸던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은 너잖아?”그러더니 그는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가고 싶지 않으면 그냥 못 본 척하면 되지.”그의 말투는 여전히 건
“맞아. 그 자국이 정말 컸어. 딱 보니 진정우 씨 여자 친구는 폐활량도 대단하네.”“꼭 그런 건 아닐걸? 어쩌면 진정우 씨가 워낙 잘해서 여자 친구가 흥분한 거일 수도 있어.”나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이 두 여직원은 의외로 상식도 많고 생각보다 이런 쪽으로 잘 아는 것 같았다.“정말 눈도 밝으시네요.”나는 억지로 웃어넘기려 했다.“우리가 눈이 밝은 게 아니에요. 진정우 씨가 일부러 보라고 한 거라니까요. 셔츠 목깃을 반쯤 풀고 있어서 안 볼 수가 없었어요.”한 여직원이 말하며 옆 사람을 툭 치며 물었다.“그렇지?”“맞아요. 우리만 본 게 아니라 회사 모든 여직원 심지어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 다 봤다니까요.”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이 얘기가 어쩌면 회사 전역을 돌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 씨는 평소에 정말 조용한 사람이잖아요. 회사 안에서는 거의 자리에만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라고요.”“그러게. 설마 일부러 우리한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건 아닐까?”“그럴 가능성 있어. 아니. 그냥 확실해. 아마도 우리더러 마음을 접으라고 일부러 그랬겠지.”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지금 시대 여자들의 감각과 눈치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그리고 동시에 진정우의 당돌한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정우 씨는 진짜 철저하네. 자기 손으로 직접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들키면서 주변에서 치근덕대는 여자들을 다 잘라버리는 걸 보니 말이야.’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그가 얼마나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진정우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네. 이런 모습 보니까 더 좋아졌어.”“맞아. 너무 멋진 사람이야.”그들이 진정우를 향해 깊은 애정을 드러내는 모습에 나는 살짝 웃으며 티 나지 않게 나왔다. 마음속으로는 무척 행복했다.내가 용준호가 보낸 위치 정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 산업단지의 신영 투자 회사였다.밖에는 개업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하지만 막
나는 원래 입구컷을 당할 줄 알았다.역시 강두식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대단했다. 특히는 용진표에게는 더욱 중요한 이름인 것 같았다.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홀 한가운데에서 기운을 다스리며 태극권을 연습하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한눈에 들어왔다.‘저 사람이 바로 용진표야?’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지금 60세가 채 안 된다고 했지만 지금 눈앞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거의 아버지와 비슷해 보였다. 오히려 아버지보다 나이가 한참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그의 외모는 내가 가진 정보와 일치했지만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바로 용진표라고 믿기 힘들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젊은 아가씨, 뭐 하러 날 찾으러 왔지?”용진표는 여전히 자신의 동작에 집중하며 나를 한 번도 정면으로 보지 않은 채 말했다.그가 바로 용진표였다.그가 이렇게 변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별로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그래. 알고 있었어.”용표는 여전히 태극권 동작을 멈추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나는 조금 놀랐고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용진표가 나의 존재를 알았다면 내가 왜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다는 것일까? 혹시 용진표가 미리 말을 전해놨을까?’“옛날부터 강 대표님은 너를 많이 아꼈고 너를 자기 딸처럼 생각하고 자주 나한테 자랑했지.”그의 말에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풀린 느낌이 들었다.‘그러면 내가 찾는 이유도 아는 거겠지?’“그래. 말해봐. 나한테 할 말이 뭐야?”그는 태극권을 계속 연습하며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내게 등을 보인 채 계속 동작을 이어갔기에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라는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10여 년 전에 윤동휘라는 분과 계약을 체결하셨던 것으로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삼촌이 용진표처럼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을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나는 언제나 생각이 많았기에 이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여기 앉아.”용진표가 내게 손짓을 하자 나는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옆의 아가씨들이 물을 따라줬고 서비스는 매우 세심했다.나는 이런 대접에 익숙하지 않지만 상황에 맞춰서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결혼 안 했지?”용진표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아니요.”“그럼 언제 강 대표네 집으로 시집갈 거야?”그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이미 강유형과 헤어진 사실을 그가 모르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용준호가 나에게 그의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아버지를 만나자고 했던 것도 어이가 없었다.지난번에 용준호의 말을 듣고 그랬다면 용진표는 어쩌면 화가 나서 터졌을 수도 있었다. “결혼 안 할 거예요.”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용진표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어?”그의 말투가 자연스러웠고 내가 결혼 안 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이미 내가 KS 그룹에서 나왔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그냥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나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사실 그가 이렇게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내가 다니는 작은 회사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 같았다.“어떤 남자 친구를 원해?”용진표가 내 사생활에 대해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내게 질문을 던졌다.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도가 궁금했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남자 친구가 있어요.”“오.”용진표는 차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를 기억하시나요?”용진표는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기억이 안 나네.”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가방에서 아버지의 파일 안에 있던 계약서를 꺼내 두 손으로 그에게
헤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좋아. 사랑에 눈이 먼 여자는 아닌가 봐.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왜 하필 신지태를 구하려고 한 거야?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겉으로는 친절해 보이는 헤르나지만 그는 계속해서 나를 떠보며 내 약점을 찾으려 했고 내 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중요하지 않아요.”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헤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나를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유일한 기회를 그를 위해 썼잖아.”“내가 스누커를 배운 건 지태 오빠 덕분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기회는 그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내 말에 헤르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어? 나를 설득해서 너를 놓아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잖아.”“어차피 당신은 날 여기 가두고 경기를 보게 하려고 했잖아요. 날 풀어준다 해도 공항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지태 오빠의 경기를 보러 왔기에 굳이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내가 말하며 그의 팔에 난 상처를 힐끔 쳐다보자, 헤르나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여유롭게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이거?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어. 다 나으면 문신이라도 해서 보기 흉하지 않게 만들어야겠지.”“누가 그런 거예요?”나는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모를 리가 있나?”헤르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 나도 더 숨길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정우를 상대로 복수하려는 거군요.”헤르나는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그게 전부는 아니야.”그리고 와인잔을 흔들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그가 날 다치게 해서 생긴 게 아니거든.”“진정우랑 이미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내가 묻자, 이번엔 헤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너희 사귀었다면서? 그런데도 자기 과거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어?”그의 말은 내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았다.“안 했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헤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연민이
그러나 나는 그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부러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헤르나는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앉아서 천천히 생각해 봐.”사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할지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자리에 앉아 흰색 캐주얼 팬츠 위로 긴 다리를 교차시킨 채 와인잔을 손에 들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여유롭고 느긋했다.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웠고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전혀 급하지 않은 듯 보였다.솔직히 말해, 그의 외모는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깊고 또렷한 눈매는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심연 같아서 오랫동안 쳐다볼 수 없었다.나는 그의 눈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당구대 모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경기가 끝나면 절대 지태 오빠에게 다시는 손대지 마세요.”현존 최고의 스누커 선수라면 단연 신지태였다.그들은 불법 도박 자본을 이용해 경기를 조작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 리는 없었다.결국 신지태를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넣으려 할 것이고 내가 아는 신지태는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자신의 팔을 끊어버릴 만큼 단호한 사람이었다.헤르나는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 나는 곧바로 말했다.“당신이 내가 이기면 어떤 요구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헤르나는 와인잔을 살짝 흔들며 답했다.“긴장하지 마. 약속을 깨겠다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서 그래.”“역시 이런 사람들은 말만 번지르르하지.”나는 비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큐대를 내던지고 뒤돌아섰다.그때, 헤르나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널 여기 데려온 건 두 사람 때문이야.”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누군데요? 당신, 브라운 때문에 날 납치한 거 아니었어요?”그가 내게 조건을 내걸라고 했지만 나는 브라운과 그의 팬들에게 나를 놔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신지태를 구
“세 판.”“좋아요.”나는 말하면서 천천히 큐를 골랐다.“보는 눈이 있는데?”내가 큐를 손에 쥐자마자, 헤르나가 웃으며 칭찬했고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는 곧 이유를 덧붙였다.“네가 고른 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야.”“그래요?”나는 살짝 비웃으며 큐를 살펴보다가 큐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큐에 새겨진 건 ‘진’이라는 번체 글자였다.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나도 모르게 먼저 튀어나왔다.“이건 당신 게 아니라..”나는 이어서 진정우의 큐라고 말하려다 멈췄다.진정우와 헤르나는 완전히 대립 관계 아닌가. 그가 어떻게 진정우의 큐를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큐는 보통 프로 선수들만 사용하는 건데.이전에도 진정우에게 스누커를 잘 치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보통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전문 큐를 가질 리 없었다.“이거 누구 거야?”헤르나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나에게 맞춰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것은 아니예요. 큐에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역시 스누커를 잘 아는 소녀답네. 이런 것도 알아보네.”‘스누커 소녀’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브라운이 나를 처음 그렇게 불렀었다.“그렇게 저를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왜?”헤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쓰레기 같은 인간이 저를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거든요.”나는 헤르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꼬마야, 나를 욕하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해.”나는 헤르나를 욕하려 한건 아니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의 웃음을 무시했고 이미 공이 배치된 테이블을 보며 말했다.“이제 시작하죠.”그는 손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해봐.”내가 먼저 시작하라는 조건이었으니,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큐를
‘무슨 경기를 본다는 거야. 이건 그냥 날 인질로 잡아 지태 오빠가 이기게 만들려는 거잖아.’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렇다면... 여기 온 김에 차분히 적응하는 수밖에.’사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방금 핸드폰을 던지며 보였던 격앙된 행동은 모두 헤르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을 뿐이었다.그는 이미 내 핸드폰을 만졌으니, 내 메시지나 통화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걸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핸드폰을 아예 없애는 것이었다.더 이상 발버둥 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헤르나도 이미 나에게 구체적으로 통보했고 이 상황에서 계속 소란을 피워봐야 무의미할 뿐이었다.그래서 방에서 나와 테라스로 향해 바람이라도 쐬려고 했다. 그런데 테라스에 나서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숨이 멎었다.엄청난 규모의 테라스 아래로는 거대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사방은 푸른 식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골프장, 야외 스누커 경기장, 커다란 수영장과 화려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그곳에서 헤르나가 한가롭게 당구를 치고 있었다고 그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꼬마야, 내려와서 나랑 한 판 치지 않을래?”순간, 나와 시합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브라운이 떠올랐다.브라운과 헤르나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르나가 브라운을 압도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브라운 한 명은 대처할 수 있겠지만 그의 수많은 팬들은 이미 광기에 휩싸여 있고 언제든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결국 이 팬들을 진정시키려면 브라운이 직접 나서야 하는데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헤르나뿐이었다.하지만 나는 그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네가 당구를 잘 친다고 들었어. 만약 네가 나를 이기면 널 미리 돌려보내 줄 수도 있지.”헤르나가 유혹적인 제안을 던졌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진정우나 신지태와 가끔 시합을 즐겼을 뿐인데 어쩌다 내 당구 실력이 이리 소문났는지.두 명의 외국 남자
“진정우, 정말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군.”헤르나는 동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옆에 있던 물건을 집어 들고 헤르나에게 내던지며 소리쳤다.“이제 알겠죠? 나는 그 사람 여자도 아니에요! 이 쓰레기 같은 인간아, 정말 더럽고 치사한 놈!”평생 이렇게까지 격한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엔 내가 누구를 향해 욕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그냥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안에서 쌓여가는 슬픔과 억울함이 터질 것만 같았다.헤르나는 내가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도 피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결국 내 손에 힘이 다 빠지고 온몸이 지쳐 움직일 수 없을 때, 나는 스스로 몸을 웅크리고 조용히 앉아 있었고 헤르나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저 여자가 진정우를 끌어낼 수 있을까요?”문이 닫히면서 나는 헤르나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방 안에는 다시 나 혼자뿐이었다. 아까의 히스테리로 온 에너지가 소진돼 머릿속도 멍하고 공허했다.그저 텅 빈 시선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문이 다시 열리고 필리핀 가정부가 들어왔다.그녀는 내 옷을 손에 들고 있었다.“지원 씨, 옷은 여기 있어요. 깨끗하게 세탁해 두었습니다.”나는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물었다.“왜 제 옷을 세탁했어요?”“헤르나 님께서는 결벽증이 있어서, 밖에서 입은 옷으로 그의 집에서 자는 걸 허락하지 않으세요.”그녀의 대답에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잠옷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그럼, 제 옷은 당신이 갈아입힌 건가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나는 그제야 마음 한구석이 놓였다. 가정부는 내 옆에 옷을 내려놓고 방 안에 흩어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방은 다시 깨끗해졌고 나는 조금씩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잠시 후, 나는 핸드폰을 들고
“헤르나!”진정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나는 친근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더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할수록 헤르나가 진정우를 더 쉽게 협박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런 뒤 여유롭게 와인잔을 들었다.“진, 너의 여자 친구는 정말 귀엽고 아름다워. 정말 매력적이야.”“걔는 이제 내 여자가 아니야.”진정우의 말은 마치 내 가슴을 칼로 베는 듯했다. 그가 사실을 말하는 건 알았지만 그 말이 여전히 날 아프게 했다.“아니라고? 내 정보가 아직 정확하지 않나 보네.”헤르나가 비웃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아니면 끊을 거야.” 진정우의 차가운 말투가 내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가 나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내버려두는 건 상상도 못 했다.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내가 헤르나에게 이용당할지 모르는 데도 진정우는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왜 그래?” 헤르나가 말하며 내 몸을 던지듯 당기더니 갑자기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그는 자기 얼굴을 내 쪽으로 바싹 붙이며 진정우에게 그대로 보여주었다.진정우는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금색 칼라 핀을 꽂고 있었다. 그는 화면 속에서 내게 무심히 시선을 보냈고 그 눈빛은 마치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차갑고 냉정했다.“진, 이제 네 여자가 아니라면 내가 얘를 가져도 되겠지?”헤르나가 말하며 내 얼굴에 입술을 밀어붙이려고 했다.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물러났지만 그의 큰 손은 이미 내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그의 입술은 내게 닿지 않았지만 그 느낌은 마치 독사처럼 차가운 혓바닥이 내 몸을 스치는 듯했다.그는 이 모든 걸 진정우에게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정우가 정말 나를 도와주지 않고 모른 사람 취급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바로 그때 진정우가 말했다.“헤르나, 네 마
내가 말하려고 입을 열기 전에, 헤르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꼬마야, 지금 그 남자를 들여보내면 인질 한 명 더 많아지는 건데.”그는 나를 협박하며 또 겁을 주고 있었다.“지원아?”강유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목소리에서 급한 기색이 묻어났다.나는 헤르나가 나를 데려가도록 그냥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그의 손을 물었다.헤르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뺐고 그 틈을 타서 나는 몸을 일으켜 힘껏 문 쪽으로 달려갔다.“강유형, 구...”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나는 기억을 잃고 쓰러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두운 상태였고 몇 개의 노란 불빛만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흐릿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내 옷을 확인했다.그 순간, 내가 입고 있는 낯선 잠옷을 보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같은 잠옷을 입은 헤르나가 들어왔다.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고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이렇게 화를 내다니?”헤르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는 그를 눈으로 죽어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저 내 옷을 누가 바꿔 입혔는지 왜 잠옷을 입고 있는지 묻는 것조차 용기가 나지 않았다.헤르나는 와인잔을 손에 들고 침대에 앉았다. 그의 하얀 피부와 유럽식 미남의 외모가 어우러져 고요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혹시 네 옷차림 때문에 화가 난 건가?”그는 내 몸에 입은 잠옷을 가리키며 웃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불을 더 꽉 움켜쥐었다.헤르나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너무 바보 같을 것 같았다.그가 나에게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알 수 있을 테니까.“정말 순진한 여자애구나.”헤르나가 웃으며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저를 여기 데려와서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나
사람은 정말로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그렇지 않았다면 첫 반응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열고 도망쳤을 텐데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 남자에게 물었다.“누구세요?”“왜 이렇게 슬픈 표정이야? 사랑의 아픔을 겪고 있는 거야?”그 남자는 전형적인 외국인이었다. 깊은 눈두덩, 높은 콧날, 입체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모습이었지만 한국어는 정말 유창하게 했다.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게 내가 왜 슬픈지 한 번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누구세요?”나는 여전히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그 순간,잠깐 끊겼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나는 Q 클럽의 회장이 떠올랐다.하지만 그가 정말 그 사람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Q 클럽 회장이라면 거칠고 강한 남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단정하고 우아하며 나이에 비해 매우 세련된 멋있는 남자였다.길거리에서 만났다면 모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문득 강유형이 말했던 Q 클럽 회장이 다쳤다는 말을 기억했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다시 유심히 살펴봤지만 그냥 이 남자가 점점 더 잘생기고 멋있어 보였다.“난 헤르나 톨스크라고 해.”그 남자가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그는 내 얼굴을 만지려는 듯 다가왔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손을 피했다.그럼에도 그는 손을 내 머리에 얹고 마치 애완견을 쓰다듬듯 가볍게 톡톡 쳤다.“날 ‘헤르나’나 ‘톨스크’라고 불러도 돼.”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마치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꼬리를 감싸듯이 말이다.“뭐 하는 거죠?”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만약 지금 소리라도 질렀다면 강유형이 달려와도 나는 그 남자의 손안에 갇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맞춰봐.”헤르나는 늘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기에 나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답했다.“나 잡으러 왔겠죠.”“하하...”헤르나는 껄
목 속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가슴 속 깊이까지 퍼져 나갔고 나는 침묵 속에서 겨우 입을 열었다.“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 반지 고르느라 바쁜 것 같네. 그럼, 이만!”나는 마지막까지 정신을 붙잡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지는 순간 내 마음도 그 자리에서 무겁게 내려앉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나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강유형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강유형이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잠깐만 기다려. 짐 정리하고 올게.”강유형은 나를 따라오며 말했다.“내가 같이 올라갈게.”“괜찮아, 혼자 올라갈게.”나는 큰 소리로 거절하며 더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유형은 나를 계속 따라왔다.“무슨 일이야?”그는 내 불안한 모습을 눈치챘다. 나는 마음속에서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바라봤다.“괜찮아. 그냥... 혼자 정리하고 싶어서.”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내 마음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강유형의 그 질문에 난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러나 나는 그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진정우와 함께할 때 나는 강유형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는 정말 자신만만했었지만 지금은 그 아픔이 배로 되어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나는 마음속에서 넘쳐나려는 슬픔을 억누르며 억지로 강한 척 그를 바라봤다.“너랑 함께 올라가는 건 좀...”나는 담담하게 말했다.“다른 뜻은 없어. 네가 걱정돼서 그래.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그가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강유형이 문밖에 있는 것조차 싫었다. 지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나는 진정우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방금 그 여자의 한마디가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나는 진정우를 완전히 잊지 못했고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다.“무슨 일이 생기겠어?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결국 나는 공격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강유형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