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형에 대한 마음은 이미 내려놓았지만 그렇다고 그와 관련된 모든 상처와 불쾌했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지원아, 너도 참. 그렇게 큰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집은 너를 위해 산 거야. 그런 여자는 당장 쫓아내야지. 차라리 거지한테 줘도 그년한테는 못 줘!”아줌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줌마는 단 한 점의 허물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아마 이 때문에 삼촌도 평생 한눈팔지 않고 아내만 사랑한 것 같다. 사랑해서 그랬을 테지만 그녀를 두려워한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나와 강유형은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더는 이 일을 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나는 아줌마를 진정시키려 했다. “아줌마,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너는 지나갔어도 난 못 지나가! 오늘 당장 사람을 시켜서 그 집을 되찾아올 거야.”아줌마는 강하게 말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나연을 그 집에서 내쫓아도 강유형이 또 다른 집을 사주면 그만이에요.”조나연은 확실히 나와 강유형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모든 기회를 준 건 강유형이었다.진짜 문제는 조나연이 아니라 강유형이었다.“다른 집은 사주더라도 그 집만큼은 네 거야. 네가 아닌 다른 여자는 그 집에 발도 못 들여놔.”아줌마의 말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마치 친엄마가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아줌마, 저를 생각해 주시는 건 알겠지만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나는 아줌마를 달랬다.사실 그녀가 정말로 소란을 피운다면 강유형은 또다시 나를 의심할 것이다.나는 이미 끝난 관계에서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조나연 또한 내가 그와 경쟁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난 화난 게 아니야. 절대 그 둘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넌 신경 쓰지 마.” 그녀의 화는 누가 말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더는 아줌마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달은 나는 입을 다물었다.“그 못된 놈이 감히 신
보통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고 여자는 남자의 약한 모습에 약하다.게다가 남녀 간의 일에서 처음엔 서투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사실 이번 일은 안리영이 보내준 메시지 덕분에 내가 더 이상 진정우를 탓하지 않게 된 면도 있었다.[여자는 처음엔 약간의 상처가 있을 수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안리영의 다정한 메시지가 나를 진정시켰다.진정우는 안리영에게 정말 감사해야 했다. 그녀는 그의 실수를 덮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여동생을 위해 구안석 교수와의 수술도 연결해 주었으니 말이다.내 몸이 아직 아픈 상태이기에 아무리 진정우가 나를 원하더라도 난 이번엔 그가 참을 줄 알았다.그래서 그는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잘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꼭 껴안고 내 곁에 눕더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정우 씨, 넌 괜찮아? 힘들지 않아?” 나는 그의 품에서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는 짧게 대답했다.“말하지 말고 그냥 자.”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근데 정말 잘 수 있겠어?”“지원아.”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내 이름을 불렀다.“장난치지 마.”그는 분명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참아내고 있지만 마음속 갈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혼자 잤다면 덜 힘들었을 텐데 굳이 내 곁에 있으니 스스로 고생길을 택한 셈이었다.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살짝 찌르며 말했다.“그렇게 참기 힘든데 왜 여기서 자?”그는 내 말에 대답 대신 더욱 강하게 나를 안으며 답했다.그의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평소 덤덤하고 무뚝뚝한 모습만 보였던 그도 이렇게 소년 같은 면이 있다니.“소영이는 언제 데려올 거야?”나는 그의 품에서 슬며시 본론으로 들어갔다.“내일 회사 가서 일정 정리하고 바로 갈 게.”그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데려오고 바로 돌아올 거야? 아니면 며칠 더 있을 거야?”그는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내가 며칠 더 있길 원해?”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그의 의
진정우는 짧은 소매 셔츠에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그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 같았고 그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어딘가 특수 요원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랄까.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 그의 체격 덕분이기도 했지만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결과이기도 했다.문득 어젯밤 거실에서 팔굽혀펴기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자세는 정말 헬스 동영상에서 볼만큼 완벽했다.“왜 그렇게 쳐다봐? 밥이나 먹어.”진정우는 내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가 끓여준 소고기 국수를 한 입 들이키며 물었다.“운동은 주로 헬스장에서 하는 거야?”그는 젓가락으로 반찬 하나를 집어 내 그릇에 놓아주며 대답했다.“아니. 집에서 혼자 해.”“그래서 팔굽혀펴기 자세가 그렇게 완벽했구나.”나는 생각 없이 말했다가 문득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진정우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나는 그가 부끄러워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태연히 말했다.“다 봤나 보네?”이번엔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국수를 먹었다.그의 요리 솜씨는 정말 뛰어났다.원래 국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내가 이 소고기 국수를 먹으며 생각을 바꿀 정도였다.“정우 씨, 나중에 엔지니어 말고 요리사 하는 것도 좋겠는데?”나는 그를 칭찬하며 말했다.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뭐든 뒤에 사가 붙는 직업이잖아.”그러자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정우 씨는 내가 뭘 말해도 다 좋다 그러네.”그는 담담히 대답했다.“남자는 아내 말을 들어야지.”그의 말에 나는 순간 당황해 얼굴이 붉어졌다.진정우는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지원아, 너 얼굴 붉히는 모습 참 예쁘네.”“그런 말 하지 마.”나는 손으로 그의 입을 가리며 말했다.그는 내 손을 살짝 피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진짜야.”“계속 그러면 아주 혼날 거야!”나는 장난스레 화를 내며 그와 장난을 치기 시작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진정우의 눈빛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아마 그는 지금 살짝 불안한 상태일 것이다.역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법이다.진정우의 긴장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지만 나는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의 앞에 섰다.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시 멈췄다.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망설이는 모양이었다.평소 직설적인 성격의 그가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그 모습을 보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풉.”내 웃음소리에 그는 더 혼란스러운 듯 나를 보며 말했다.“지원아...”나는 그의 손에서 그가 준비해 둔 우유를 받아 들고 살짝 발돋움해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고마워.”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내 가방 챙겨 와.”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는 내 뒤를 따라오며 가방을 들고 있었다.아까의 긴장감은 없었고 그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차 앞에 도착해서는 이번엔 내가 운전석이 아니라 조수석으로 갔다.그리고 차 열쇠를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정우 씨가 운전해.”그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그가 데운 우유를 홀짝이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전혀 예상치 못한 여유와 편안함에 나는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회사가 가까워졌을 때 진정우가 갑자기 차를 도로변의 버스 정류장에 세웠다. “왜 멈춰?”나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네가 회사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모르게 하자며? 난 여기서 내려서 걸어갈게. 괜히 소문나면 안 좋으니까.”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이 문제를 떠올렸다.솔직히 나는 그가 이 문제를 잊었으면 했다.그가 먼저 나서서 신경 써 준다는 게 어딘가 불편했다.순간, 어제 회사에서 여직원들이 그를 칭찬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러자 나는 괜히 마음이 쓰렸다.
허진호의 말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표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긴급 출장이라도 가야 하나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틀 정도 외근 나가야 할 것 같아요.”나는 조금 전 아침 회의를 마쳤지만 외근 관련 내용은 없었다. 아마도 허진호가 방금 급히 잡은 일정인 듯했다.“어디로 무슨 일로 가야 하죠?” 나는 상황을 더 알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조금 있다가 알려줄게요.”그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어차피 대표님의 지시라면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나는 서둘러 현재 진행 중인 업무들을 정리하고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오전 10시 반쯤에야 잠시 여유가 생긴 나는 컵을 들고 차나 한잔 마시려고 티 룸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여직원 두 명의 수다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새로 온 진정우 씨는 보면 볼수록 멋있지 않아? 오늘 입은 작업복 바지 보니까 다리가 2미터처럼 느껴지더라니까!”“너무 과장하는 거 아냐? 너 요즘 진정우 씨한테 너무 빠졌구나. 근데 넌 예전엔 허진호 대표님 팬이었던 거 같은데?”“맞아, 예전엔 허 대표님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진정우 씨가 오고 나서는...”여직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젠 허 대표님이 길거리 물건처럼 보일 정도야.”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이 직원들의 말이 참 매섭네.’“앞으로 내 마음속 아이돌은 진정우 씨야. 다른 누구도 못 따라올 거야!”그녀의 선언 같은 말이 끝날 즈음에 나는 티 룸으로 들어섰다.그들은 내가 들어오자 그녀들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윤 부장님, 차 드실래요? 아니면 커피 드실래요?”나는 컵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진정우 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그녀들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네. 진정우 씨는 너무 멋있어요. 게다가 전직 군인이라면서요?”“그래요. 확실히 멋있긴
“쉿...”진정우가 낮게 신음을 냈다.그건 아파서가 아니라 민감하고 약간의 쾌감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묘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점점 더 장난기가 심해지는 내 모습에 자신도 놀라웠다.나는 그의 반응을 끝으로 태연하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사무실 문을 나섰다.진정우는 내가 방금 한 행동에 당황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사무실로 돌아와 커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나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음이 나는지는 몰랐지만 그냥 웃음이 나왔다.마치 장난꾸러기 아이가 몰래 나쁜 장난을 치고 신나서 웃는 것처럼 정말 속이 후련하고 유쾌했다.그렇게 웃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확인하니 용준호였다.그가 보낸 건 한 장소의 주소였다.링크를 눌러보니 외곽에 있는 한 산업단지에 위치한 신영 투자회사라는 주소였다.나는 그가 왜 이 주소를 보내온 건지 의아했다.‘잘못 보낸 건가? 아니면 나를 일부러 놀리려는 건가?’ 갸웃거리며 생각하던 찰나 그의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우리 아버지를 만나고 싶으면 여기로 와.”‘용준호의 아버지, 용진표가 요양원을 떠났다고? 용준호의 말이 사실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계략일까?’나는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다가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다.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내가 묻기도 전에 말했다.“못 믿겠으면 오지 마.”“대표님은 저더러 아버지를 찾지 말라고 했잖아요? 만난다 해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라 했잖아요?”나는 전에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지금 그는 또 나에게 주소를 보내서 그의 아버지를 만나게 하는 게 참으로 수상했다.그러자 용준호는 차분히 대답했다.“맞아. 나는 네가 헛수고할 까봐 말렸던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은 너잖아?”그러더니 그는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가고 싶지 않으면 그냥 못 본 척하면 되지.”그의 말투는 여전히 건
“맞아. 그 자국이 정말 컸어. 딱 보니 진정우 씨 여자 친구는 폐활량도 대단하네.”“꼭 그런 건 아닐걸? 어쩌면 진정우 씨가 워낙 잘해서 여자 친구가 흥분한 거일 수도 있어.”나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이 두 여직원은 의외로 상식도 많고 생각보다 이런 쪽으로 잘 아는 것 같았다.“정말 눈도 밝으시네요.”나는 억지로 웃어넘기려 했다.“우리가 눈이 밝은 게 아니에요. 진정우 씨가 일부러 보라고 한 거라니까요. 셔츠 목깃을 반쯤 풀고 있어서 안 볼 수가 없었어요.”한 여직원이 말하며 옆 사람을 툭 치며 물었다.“그렇지?”“맞아요. 우리만 본 게 아니라 회사 모든 여직원 심지어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 다 봤다니까요.”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이 얘기가 어쩌면 회사 전역을 돌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 씨는 평소에 정말 조용한 사람이잖아요. 회사 안에서는 거의 자리에만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라고요.”“그러게. 설마 일부러 우리한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건 아닐까?”“그럴 가능성 있어. 아니. 그냥 확실해. 아마도 우리더러 마음을 접으라고 일부러 그랬겠지.”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지금 시대 여자들의 감각과 눈치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그리고 동시에 진정우의 당돌한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정우 씨는 진짜 철저하네. 자기 손으로 직접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들키면서 주변에서 치근덕대는 여자들을 다 잘라버리는 걸 보니 말이야.’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그가 얼마나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진정우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네. 이런 모습 보니까 더 좋아졌어.”“맞아. 너무 멋진 사람이야.”그들이 진정우를 향해 깊은 애정을 드러내는 모습에 나는 살짝 웃으며 티 나지 않게 나왔다. 마음속으로는 무척 행복했다.내가 용준호가 보낸 위치 정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 산업단지의 신영 투자 회사였다.밖에는 개업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하지만 막
나는 원래 입구컷을 당할 줄 알았다.역시 강두식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대단했다. 특히는 용진표에게는 더욱 중요한 이름인 것 같았다.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홀 한가운데에서 기운을 다스리며 태극권을 연습하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한눈에 들어왔다.‘저 사람이 바로 용진표야?’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지금 60세가 채 안 된다고 했지만 지금 눈앞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거의 아버지와 비슷해 보였다. 오히려 아버지보다 나이가 한참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그의 외모는 내가 가진 정보와 일치했지만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바로 용진표라고 믿기 힘들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젊은 아가씨, 뭐 하러 날 찾으러 왔지?”용진표는 여전히 자신의 동작에 집중하며 나를 한 번도 정면으로 보지 않은 채 말했다.그가 바로 용진표였다.그가 이렇게 변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별로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그래. 알고 있었어.”용표는 여전히 태극권 동작을 멈추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나는 조금 놀랐고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용진표가 나의 존재를 알았다면 내가 왜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다는 것일까? 혹시 용진표가 미리 말을 전해놨을까?’“옛날부터 강 대표님은 너를 많이 아꼈고 너를 자기 딸처럼 생각하고 자주 나한테 자랑했지.”그의 말에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풀린 느낌이 들었다.‘그러면 내가 찾는 이유도 아는 거겠지?’“그래. 말해봐. 나한테 할 말이 뭐야?”그는 태극권을 계속 연습하며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내게 등을 보인 채 계속 동작을 이어갔기에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라는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10여 년 전에 윤동휘라는 분과 계약을 체결하셨던 것으로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온몸이 이불에 휩싸인 채 침대로 돌아오고 나서야 내가 괜히 이상한 상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군인 출신인 진정우의 자제력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했다.그는 단순히 나를 씻겨준 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그냥 깨끗하게 씻겨준 것.이미 그의 능력을 확인했지만 그래도 승부욕이 발동해 장난스럽게 말했다.“진정우, 너 혹시... 안 되는 거 아니야?”이 말은 남자에게 치명적인 모욕이다. 어지간한 남자는 이런 말을 듣고 참을 수 없겠지만 진정우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얌전히 있어. 그리고 더 이상 애쓰지 마. 아무 소용 없으니까.”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살짝 상처받았는데...”나는 일부러 힘없이 실망한 척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그러자 그가 이불을 살짝 당겨 내 얼굴을 드러내며 내 볼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내가 안 되는 게 아니고 네가 날 끌어당기지 못하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내가 널 다치게 할까 봐 조금 더 기다리는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럼 내가 너랑 가까워지기만 하면 다칠 것 같으면 너 평생 나한테 손도 안 댈 거야?”그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응, 참아야겠지.”“...”나는 다시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이불째 나를 품에 안았다.“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그는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조금만 쉬어. 나 샤워하고 올게.”분명 찬물 샤워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찬물 샤워하러 간다.”“...”정말 원칙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자신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나를 상처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가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렀다.“진정우.”“응?”“너, 진짜 최고야.”그리고는 창피해서 혀를 쏙 내밀고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러자 그가
진정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는 내가 모든 원칙을 포기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그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게 말했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로 깊은 사랑을 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 꺼내지 않아도, 문장 하나하나가 사랑이었다. 나는 코끝이 찡해졌고 전을 먹으며 입안 가득 찬 상태로 웅얼거렸다.“진정우, 이리 와봐.”“왜?”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오라면 오라니까.”나는 괜히 고집을 부렸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소파에 앉자마자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잠시 놀란 듯 멈췄고 내가 말했다.“네 어깨에 기대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진정우가 나를 침대에 눕히며 물었다.“오늘 여기서 잘까, 아니면 네 방에서 잘까?”“여기서 잘래!”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문득, 밤마다 푸쉬업을 하고 찬물 샤워를 하던 그가 떠올랐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근데 오늘 밤에는 푸쉬업 금지야.”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일부러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얘긴 다시 꺼내지 마.”나는 그의 품에 안기며 그의 허리를 살짝 감쌌다.“안 하면 안 꺼낼게.”진정우의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장난치지 마.”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못 참겠어?”나는 한층 대담하게 물었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장난은 이제 그만. 그리고 나를 더 자극하지 마.”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낮아진 목소리였다.“너도 원하고 있잖아.”나는 점점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지원아...”그는 나의 손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올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난 이제 다 나았어.
이 상황, 얼마나 민망했을지 상상이 간다. 물론 진정우는 예외였다.“잠시만요.”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소파에 앉혔다. 그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천천히 물티슈를 꺼내 내 손을 닦아주었다.“천천히 먹어. 죽이 좀 뜨거우니까 급하게 먹지 말고.”문가에 서 있는 강진혁은 들어오기도, 물러서기도 난감해 보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가 나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내 말은 진정우에게 얼른 강진혁을 챙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정우는 자리를 뜨기 전에 모든 음식 포장을 풀고 식기를 내 앞에 정갈히 놓아주었다.문가에 서 있던 강진혁은 그야말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애정 행위를 강제로 목격한 셈이었다.아마 나를 짝사랑하는 그의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강 실장님, 무슨 일이 신가요?”진정우는 문가로 걸어가며 강진혁에게 물었다.강진혁은 병실 밖으로 나갔고 그가 진정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듣지 못했다.진정우는 약 3분 후에 돌아왔는데 그의 평온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표정을 드러내지 않자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죽을 먹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별일 아니야.”그의 대답은 꽤 건조했다. 아마도 그 자신도 느꼈는지 덧붙였다.“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하더군.”“스카우트? 어디로? KS그룹?”강진혁은 아직 총괄 감독에 불과하다. 스카우트 같은 건 인사 부서나 그룹 회장이 해야 할 일 아닌가?혹시 이미 강유형의 자리를 대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만약 그렇다면, 아까 그가 내게 한 말은 다 무슨 뜻이었을까?내게 심리적 준비를 시키려는 걸까, 아니면 나를 떠보려는 걸까?“어디로 간다는 얘기는 없었고 그저 내 생각을 물어봤어.”진정우는 덤덤하게 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나는 죽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뭐라고 대답했는데?”“고려하지 않는다고 했어.”그의 대답은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너무 솔직하고 귀여워서.”칭찬을 듣자
“오빠, 강유형은 성인이에요. 본인이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죠.”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강유형을 회사에서 내보내든, 관계를 끊든, 그건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나도 알아. 하지만 아버지랑 그렇게 싸우는 걸 보니 속이 타더라. 그리고 그가 회사에서 나가면 회사에도 영향이 클 거야.”강진혁은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오빠가 있잖아요?”그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지원아, 난 한 번도 회사를 관리할 생각을 해본 적 없어. 그러지 않을 거였으면 애초에 회사를 떠나지도 않았겠지.”그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나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다만 내 생각을 덧붙였다.“회사의 일은 삼촌께서 알아서 계획하고 계실 거예요. 강유형이 떠난다고 해서 회사가 멈추는 건 아니죠.”나는 이성적으로 말하며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했다.“세상은 누구 없어도 돌아가게 돼 있어요.”강진혁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야.”“오빠, 아마 너무 걱정되니까 그런 거겠죠.”나는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말을 덧붙였다.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가 4년 전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4년 전?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4년이라는 시간은 아이도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그걸 성장이라고 하죠.”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강진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맞아. 네가 정말 많이 컸다, 우리 꼬마 지원이.”그의 말에 가슴 한쪽이 찡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내가 강가에 들어왔을 때, 강유형과 강진혁은 종종 나를 이렇게 부르며 장난스럽게, 때로는 애정을 담아 나를 놀리곤 했다.그런데 그 말을 들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빠, 이런 문제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세요. 너무 관여하면 오히려 안 좋아요.”그의 ‘꼬마 지원이'라는 말에 잠시 감정이 흔들렸지만 나는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강진혁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