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샤워를 마친 후, 진정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 앞에 준비해 둔 아침 식사를 챙겨가라는 내용이었다. 왜 그동안 그의 아침을 먹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지만 여전히 챙겨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의 정성을 저버리지 않으려 아침을 챙겨 먹고 회사로 출근했다.출근이 일렀던 탓에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의 일정을 정리하고 팀원들의 업무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나니 아직 근무 시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모처럼 친구들의 소식을 보기 위해 SNS를 확인했다. 비록 대화는 자주 하지 않지만 이곳을 통해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신지태는 당구 챌린지에 나가겠다고 올렸고 안리영은 오늘 맞이한 아기 천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녀는 출산을 돕는 일마다 하나씩 기록하는데 오늘로 5,566번째 아기를 맞이한 셈이다. 그녀 자신도 이 숫자에 감탄한 듯했다.안리영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엄지를 치켜드는 이모티콘을 남겼다. 다음으로 넘기다가 강유형이 올린 글이 눈에 들어왔다.“앞으로 남은 삶, 너희를 지키면서 살 거야.”라는 문구와 함께 어머니와 아이가 등장하는 그림이었다.순간 가슴이 꽉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조나연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분명했다. 강유형이 밤중에 올린 게시글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요’와 축하 댓글을 달았고 심지어 나와 강유형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둘을 엮어 축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짧게 댓글을 남겼다. “축하해. 행복하길.” 그러고는 곧바로 SNS를 닫았다. 핸드폰을 옆에 두고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주 아프다기보다는 그저 무겁고 답답할 뿐이었다. 이 감정을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다.그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보니 허진호였다. 그의 사무실을 봤더니 아직 출근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부대표님.”“지원 씨, 당분간 회사에 안 나와도 돼요.
신지태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내자 그의 전화가 바로 걸려 왔다.“왜? 그 사람이 너한테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신지태의 직설적인 물음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오히려 내가 그 사람한테 이상한 짓 하고 싶은데, 문제는 그 사람 얼굴도 못 봤다는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겠어?”“얼굴도 못 봤다고? 그러면 단순히 궁금해서 알아보라는 거야?” 신지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너, 내가 한가한 줄 알아?”며칠 전에 당구 대회 준비한다고 바쁜 신지태가 문득 떠올랐다. 내가 좀 성급했나 싶은 생각에 약간 미안해지며 대답했다.“바쁘면 됐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꼭 확인해야 하는 건 아니고.”“네 그 말이 오빠를 속상하게 만드는 거 알지?” 신지태가 장난스레 투덜거렸다.나도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진짜야, 오빠. 시간 되면 알아봐 주고, 아니면 말고.”“그래, 알았어. 다른 사람 일은 몰라도 네 부탁은 들어줘야지. 어떻게든 알아볼게.” 신지태는 흔쾌히 응답했다.하지만 통화를 끊지 않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신지태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려다 말고는 “됐어. 그냥 네가 힘든 일 생기면 언제든 말해.”하고 말을 맺었다.그가 별말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어제 있었던 일, 특히 강유형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면 서로 난감했을 테니까.“고마워. 대회 때 응원하러 갈게. 티켓 구해줘!” 내가 활기차게 말하자 신지태도 웃으며 대답했다.“좋아! 준비해 줄게!”전화를 끊고 난 후, 나는 집으로 향했다. 어제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친 탓에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집 앞에 도착해 보니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나는 차를 주차하고 다가가 보니 공고문이 눈에 들어왔다.재개발!이 세 글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가 언젠가 재개발될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당황스러웠다.다른 사람들에게 재개발은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다. 하룻밤 사이에 부
나는 앞으로 어디에서 부모님과의 추억을 찾아야 할까?“다윤아.”현관 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바로 맞은편 집에 사는 집주인 아주머니였다.재개발 소식을 듣고 온 것이 분명했다.“여기가 곧 철거된다니, 아쉽네.”아주머니는 흔치 않게 탄식을 내뱉었다.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그러자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나도 얼마 전에 돈 들여 집을 조금 손봤는데 겨우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이사를 해야 한다니, 억울하네.”나는 말없이 웃음만 지었다.“방을 빌린 청년한테 전화했는데 연락이 안 되네. 혹시 그 친구 보게 되면 이 소식 좀 전해주고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줘. 곧 철거될 거라 미리 준비하라고 말이야. 짐도 챙기게.”아주머니가 나에게 부탁했다.“네, 그렇게 할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 아주머니가 감사 인사를 전하더니 갑자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청년 만나봤지? 괜찮은 사람이지?”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나쁘지 않아요.”“그 정도가 뭐야? 그 청년 같은 인물 드물어. 딸이 없어서 아쉽지, 있었으면 사위 삼고 싶을 정도로 괜찮은 청년이던데.”아주머니도 진정우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아줌마도 낳으세요.” 나는 농담처럼 받아쳤다.평소 같으면 불쾌하게 들렸을 수도 있지만 요즘에 60대 노인의 출산 뉴스가 화제가 되면서 분위기가 가벼워졌다.“나는 그럴 체력도 없지. 그만 놀려.”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나도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슬슬 너도 이사 준비해야겠다. 쓸모없는 건 버리고 팔 수 있는 건 팔아라. 내가 아는 고물상 전화번호가 있는데 사람도 괜찮고 가격도 잘 쳐줘. 필요하면 번호 줄게.”그 따뜻한 배려에 거절하기가 미안할 정도였다.아주머니는 고물상 전화번호를 건네고 가셨고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열자 온 집안 가득히 묻어 있는 추억이 나를 맞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
광화그룹.용진표.회사 이름도, 대표의 이름도 너무나 익숙했다.왜냐하면 광화 그룹은 강유형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KS그룹의 최대 파트너였고 강유형의 부모님과 용 대표님은 사적으로도 아주 친한 사이였다.하지만 이 계약서가 열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했다.아버지는 KS 그룹의 직원도 아니었고 당시에는 KS과 아무런 연관이 없던 분이셨다. 그런데 왜 이 계약서를 아버지가 갖고 계셨던 걸까?계약 내용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청정에너지 개발을 위한 협약이었다.현재 그 사업은 KS 그룹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어, 엄청난 수익을 내는 분야였다.엄밀히 말하면 이 계약서는 KS 그룹의 자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유형의 아버지 서명이 없었다.나는 계약서를 옆에 두고 아버지의 노트를 펼쳤다.노트에는 대부분 업무 계획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화학 기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계약이 순조롭기를"이라는 짧은 문구를 발견했다.그리고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아마도 그 이후로 아버지는 사고를 당하신 것 같다.갑자기 아버지가 사고 나기 전날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다윤야, 내일이 지나면 아빠가 너에게 놀이공원을 지어줄 수 있을 거야.”그때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신나서 아빠에게 달려가 안기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광화 그룹과 계약을 성사했다면, 아마 지금의 KS 못지않은 대기업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놀이공원이 아니라 상업 제국을 이룰 수도 있었겠지.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사고가 정말 단순한 사고였을까? 이 계약과 관련된 누군가가 개입한 것은 아니었을까?머릿속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생각들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나는 그대로 물건들 사이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결국 이 일을 직접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꼭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강진혁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득력 있는 이유가 필요했다.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형이가 우리 부부를 미치게 하려는 모양이야! 그 여자와 진짜로 결혼하려고 한다면, 나랑 네 삼촌은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아줌마의 반응은 놀랍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달랬다.“아줌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요즘은 결혼 문제에 부모가 관여하기 어려운 세상이잖아요.”“우린 그걸 알지만, 이혼한 여자와의 결혼은 절대 안 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내 마음도 이미 복잡하고 상처받은 상태였기에, 더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힘들었다. 사실 그런 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강유형과 조나연이 나에게 상처를 준 건데, 내가 굳이 그들을 변호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대한 태도라고 생각했다.“지원아, 너희 삼촌이 너무 화가 나서 식사도 거부하고 있어. 너밖에 못 말려. 네가 와서 좀 말려줄래?” 아줌마가 전화한 이유가 드러났다.아줌마의 부탁을 듣고 마음이 설렜다. 어쩌면 이 기회에 삼촌의 차량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나는 곧장 가겠다고 대답했고, 아줌마는 전화기 너머에서 강유형을 계속해서 꾸짖다가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이렇게 바로 강유형 집에 가는 것만으로는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안전하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강진혁에게도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강진혁 오빠는 여전히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진혁 오빠.” 나는 먼저 그를 이렇게 불렀다.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그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내 자신도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이용하려는 건 아닌지
“삼촌...” 내 목소리가 떨리며 나도 모르게 삼촌을 불렀다.“지원아.” 삼촌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머리가... 어떻게...”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만지려 했다.그는 살짝 놀란 듯 물었다. “내 머리가 왜? 헝클어졌니?”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삼촌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아줌마가 무슨 말이라도 했니? 그 사람 말은 신경 쓰지 마. 늘 과장하잖아.”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거의 하얗게 변한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새까맸던 머리가, 하루아침에 80%는 희어져 있었다. 한순간에 정정한 중년에서 늙어버린 것 같았다.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그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삼촌은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왜 울어? 나 괜찮아. 그저 혼자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네 아줌마가 계속 성가시게 해서 너까지 부른 거야.”그는 내가 하루 종일 문을 잠그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걸 걱정한 줄 알았다.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젓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자, 안에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자. 삼촌이 직접 끓여줄게.” 삼촌은 나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듯 의연하게 말했다.하지만 하룻밤 사이 그렇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삼촌.” 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유형... 그냥 두세요. 더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지금의 삼촌이 너무 안쓰러웠다. 마치 친아버지처럼 가슴이 아려왔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이 무거웠다. “너무 실망스러웠어. 내가 그 아이를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이야.”“그건 삼촌 탓이 아니에요. 강유형도 이제는 자기 주관을 가진 어른이잖아요.” 나는 애써 그를 달랬지만 삼촌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삼촌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속으로는 굳건하게 자신을 지키는 성격이었다. 누구의 말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성격이었다.“지원아, 여기 앉
그래,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세월이 무겁게 내려앉을 줄이야... 가슴이 아팠다.삼촌은 나를 위해 홍차를 끓여주셨지만 내 입속에 남은 건 씁쓸함뿐이었다.“이 홍차 가져가렴. 집에서도 끓여 마실 수 있을 거야. 피부에도 좋고 몸에 좋아.” 삼촌은 남은 찻잎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내 손에 쥐여 주셨다.삼촌은 마치 나를 친딸처럼 챙겨주셨다. 그 속에는 미안한 마음도 담겨 있는 듯했다. 내가 그걸 거절하면 삼촌 마음이 더 상할까 봐 조용히 받아들었다.“네, 다 마시면 또 삼촌께 부탁드릴게요.” 나도 가볍게 대답하며 삼촌의 마음을 덜어드렸다.“그래, 뭐든 원하면 말해라. 지원아, 넌 내 딸이나 다름없다.” 삼촌의 진심 어린 말에 나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저에게도 삼촌은 친아버지나 다름없어요.”학창 시절에도 항상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삼촌이 늘 신경 써주셨다. 가끔은 아줌마가 가고 싶어 해도 삼촌이 “내가 가야, 교장 선생님도 한 번 더 신경 써주지 않겠어?”라고 하시며 직접 학교에 오셨다.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시선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하자 미소를 지었다. “지원아, 네 아줌마가 나 걱정 많이 하던데 이렇게 된 걸 알면 얼마나 더 속상해할까?”“삼촌, 지금도 멋지세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삼촌도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멋지지 않니?”나는 눈물이 고이도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삼촌은 언제나 멋져요.”우리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가 목소리부터 내셨다. “지원이 아니면 당신 같은 고집불통 노인은 누가 감당하겠어요!”아줌마는 문 앞까지 오더니 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말없이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아줌마의 얼굴에 담긴 미소는 금세 굳어졌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삼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삼촌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아줌마가 충격받을까 봐 급히
내가 온갖 수를 써서라도 타고 싶었던 차에 이렇게 쉽게 탈 수 있을 줄이야. 이제 남은 건 그 주소를 알아내는 건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저기, 삼촌, 차 좀 잠깐 세워주세요. 속이 안 좋아서 토할 것 같아요.” 차가 반쯤 달렸을 때 약국이 보이자, 일부러 아픈 척하며 차를 멈춰달라고 부탁했다.“그래, 그래.” 삼촌은 백미러로 날 한 번 쓱 보더니 서둘러 차를 세웠다.차가 멈추자 삼촌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원아, 어디 아픈 거야? 병원에 갈까?”“아까 삼촌이 끓여주신 차를 마시고 속이 좀 찬 것 같아서 그래요.” 일부러 삼촌을 언급하면 더 신경 써 줄 것 같았다.배를 살짝 감싸안으며 말했다. “삼촌, 미안한데 오메프라졸 약 좀 사다 주실 수 있을까요? 그거 하나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듯했다. “그래도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더 이상 말하지 않자, 삼촌은 내가 굳이 병원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오랫동안 삼촌 곁에서 일한 사람답게,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그가 약을 사러 내려가는 걸 보면서 시간을 조금 더 끌어보려고 덧붙였다. “삼촌, 물도 한 병만 사다 주세요.”“찬물은 안 돼, 차 안에 미지근한 물 있으니까 돌아와서 줄게.” 삼촌은 약국으로 향하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그가 약국 쪽으로 서둘러 가는 걸 확인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내비게이션의 운행 기록을 검색했다. 이런 짓을 하면서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마음이 바빠져 한 번도 창밖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약국은 길을 건너야 하기에 삼촌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서둘러 운행 기록을 뒤졌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찾고자 하는 주소는 없었다. 한 달 전의 기록까지 다 뒤졌는데도 말이다. 설마 내가 뭔가 착각한 걸까?아직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는 중에, 삼촌이 약을 들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나는 창밖을 살피
“알았어요.”나는 짧게 하고 대답한 뒤,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묻지 않고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잠깐만요.” 허진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제 그 남자 모델, 진짜로 정우 씨 아니에요.”“알아요.” 나는 커피잔을 들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직접 그를 땅에 묻었으니까.”허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그냥 두겠다는 듯 다시 물러섰다. 나는 회의실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강유형은 마치 내 감정을 읽으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하지만 오늘의 나는 요즘 중에서 가장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화장까지 하고 나왔으니 거울 속 내 모습이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무엇보다도, 밤새 아팠던 다리도 거짓말처럼 나아 이제 걷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좀 늦었네?” 강유형이 나를 훑어보더니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다.“응, 근데 우리 대표님이 워낙 너그럽거든. 지각했다고 월급 깎지 않더라.”내 말에 강유형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예전에 내가 KS그룹에 다닐 때, 지각이나 조퇴를 하면 누구든 벌금을 내야 했다. 나는 대표님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어제 너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집까지 갔더니 불도 꺼져 있길래 걱정됐어.”강유형은 거침없이 걱정스러웠던 마음을 내비쳤다.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집에 가서 바로 잤어.”“그렇게 쉽게 잘 수 있었어?”“못 잘 이유라도 있어?”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배성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 진정우 아니야. 내가 직접 조사해 봤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하더니 바로 그때, 내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밤새 사람 시켜서 조사했어. 관련 자료 다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윤지원, 진정우는 이미 죽었어. 네가 직접 봤잖아.”나는 손에 쥔 커피잔을 가만히 돌리며 대답했다.“나도 알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거.
나는 강유형이 정말 용준호를 한 대 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은 나였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 나는 휠체어도 버리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진짜 하나같이...” 안리영이 주변 사람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와 조용히 내 팔을 잡아 부축했다.그녀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서야 멈춰 섰다. “지원아, 아까 그 사람 목에 정말 점이 없었어? 혹시 일부러 없앤 거 아닐까? 흉터 같은 건 안 만져졌어?”그녀가 이렇게까지 묻는 건 여전히 배성재가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그의 목을 여러 번 확인했다. 혹시나 해서 손끝으로 몇 번이나 훑어봤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내 반응을 본 안리영은 헷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를 의자에 앉히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이 정말 진정우 같아?”때때로 느낌이란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정확한 법이다. 처음에는 분명 신분을 바꾼 채 나를 일부러 외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그의 냉정한 태도와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을 보면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진정우는 나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위해 직접 방울 팔찌를 만들었고 반지를 주문해 줬다. 나는 아직도 그걸 손에 끼고 있었고 만약 정말 진정우였다면 못 봤을 리가 없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밀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지원아, 그냥 그 사람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안리영은 더 이상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DNA 검사를 하면 확실해질 거야. 그 사람, 분명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 진정우의 여동생이나, 아니면 진씨 가문 사람 중 누구랑 비교해 보면 되잖아.”“하지만 진영이랑은 친남매가 아니야.”그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아니면 제대로 못 봐서 가까이서 다시 한번 봐야겠어?”용준호가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조금 더 다가갔다. 그가 강진혁과 강유형 앞에 거의 얼굴을 맞댈 정도로 가까이 서자, 이제 그들은 그의 모공까지도 볼 수 있었다.물론 나도 그 장면을 똑똑히 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무조건 진정우가 맞다고 확신했다.“용준호, 정말 대단해. 이런 사람을 어디서 구해왔어?” 강유형이 낮게 비웃었다. 그러자 용준호는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운명 같은 거지.”그리고 나를 보며 물었다. “그렇죠, 지원아?”나는 진정우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뚫어지게 배성재를 바라보았다.“성재야, 지원 씨가 네가 좋다며 너를 데려가고 싶대. 괜찮겠어?” 용준호가 조금 귀찮은 듯 말하며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도련님, 제 원칙 알잖아요. 저는 몸을 팔지 않아요.” 배성재는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했다. 그 말에 강진혁과 강유형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용준호가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봐봐. 내가 말했지? 절대 동의 안 한다고.”“다른 일 없으면 전 돌아갈게요.” 배성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 했다. 그때 내 어깨가 살짝 무거워지더니 안리영이 내 팔을 짚으며 손끝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잠깐만요.” 나는 배성재를 불렀고 일어나서 두 걸음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발끝을 들고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윤지원, 너 뭐 하는 거야?” 강진혁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외쳤고 안리영도 얼른 덧붙였다. “지원이가 지금 사람을 홀리고 있어요.”그 틈에 나는 손을 배성재의 목덜미에 가져갔지만 그곳은 부드럽고 매끄러워,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실망감에 빠져서 다시 한번 그곳을 더듬어 보았다. 뒷머리까지 만져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진정우에게 있던 그 점, 손끝으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분명했던 그 자국은 여기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가 진정우가 아님을 깨달았다.팔을 풀고 물러
“네가 끝났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지. 강유형은 널 잊지 못한 것 같은데. 너밖에 신경 안 쓰이는 것 같아.” 안리영이 시원하게 한마디 했다.조시언이 자리에 앉으면서 드디어 조명이 켜지고 공연이 시작됐다. 50분이 넘는 공연 동안 조명이 하나도 반복되지 않았고 특히 마지막에 나온 남성 모델들의 몸을 이용한 조명 쇼는 관객들에게 우리 회사의 창의력과 연구 개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줬다.쇼가 끝날 때, 우리 회사 로고가 크게 빛을 내며 등장했고 관객들은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정말 창의적이고 신선하네요, 특히 마지막 조명 쇼가 인상 깊었어요.” 고객인 조시언은 매우 높이 평가했다.“이건 저희 마케팅 부서 윤지원 부장님의 기획이에요.” 허진호는 나에게 공을 돌리며 칭찬했다.모두가 나를 향해 박수를 쳤고 용준호는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윤지원 부장님의 기획도 좋지만 우리 남자 모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죠.”“맞아요, 그래서 준호 씨의 지원에 감사해요.” 나는 고마움을 표현했다.“윤지원 부장님을 돕게 되어 영광이죠.” 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강진혁과 강유형을 쳐다봤다.“두 분, 맞죠?”용준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사건을 키우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가 강진혁과 강유형을 자극하려는 의도임을 잘 알았다.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 이 사람과 협력한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배성재가 진정우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성재는 용준호 사람이라, 용준호를 빼고는 그를 빼낼 방법이 없었다.“준호 씨, 그 배성재 모델 제가 데리고 있어도 될까요?”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네!”나는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내 한마디에 강유형과 강진혁의 표정은 확실히 어두워졌다.용준호는 그들을 보고 잠시 웃더니 다시 말했다. “안돼. 우리 클럽의 남자 모델들은 모두 규칙을 지키며 일요. 고객을 위한 서비스는 제공하지만 그 이상의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아.”
“안리영, 너 왜 이렇게 네 삼촌을 무서워해? 혹시 그 사람한테 뭔가 잘못한 거 있냐?”내가 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가는 동안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안리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정말 뭐가 있긴 한 거지?”“우리 그 얘기 그만하자.”안리영의 말을 듣자 나는 뭔가 비밀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손으로 안리영을 톡톡 쳤다.“내가 한번 맞춰볼까? 혹시 네가 그 사람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 뭔가 더 과한 짓을 한 거 아니야?”“무슨 말이야, 내 삼촌이라고.” 안리영이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그럼 왜 그를 보면 그렇게 떨고 겁을 먹고 있어?”나는 정말 궁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안리영이 이렇게 떨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별거 아니야, 그냥 내가 한 번 우연히 삼촌이 샤워하는 걸 봤거든.” 안리영의 말에 나는 놀라서 멈췄다.“뭐라고? 어디서 봤어? 다 봤어?”안리영이 눈을 감았다. “그만 말해.”“왜?”그 말에 안리영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솔직히 말했다.“욕실에서... 다 봤어.”“뭐야! 대박!”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혹시 술 취해서 실수로 들어간 거 아니야?”“아니야.” 안리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내가 외할머니 집에 갔었고 그 집엔 아무도 없었어. 나는 땀을 흘려서 씻고 싶어서 위층에 올라갔고 그 방에 들어갔어. 그리고 욕실로 가서...”그 뒤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다 짐작이 갔다.“그 욕실에서 물소리 안 들렸어?”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내가 이어폰 끼고 음악 듣고 있었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지.”“잠깐만!”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 옷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고? 그러면... 너도 그 사람처럼 전부 다 보여준 거네?”안리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화가 난 안리영은 내 머리를 쳤다. “그럼 너도 이제 신경 쓸 필요 없겠네, 다 봤으니 서로 부끄러울 것도 없잖아?”“나야말로 부
안리영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왜 이렇게 소심해. 손 한 번 만지는 것도 안 되나요?”배성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저는 몸은 팔지 않아요. 부담스럽네요.”그렇게 똑 부러지면서도 예의 바른 남자를 마주하자 안리영은 더 이상 그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손을 빼며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올해 몇 살이에요?”“스물아홉입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며 물었다.“키는요?”“183.7cm예요.”안리영은 또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대학교는 다녔나요?”“네, 청수대 인공지능 전공입니다.”“음, 요즘 그 전공 많이 인기 있죠.” 그 말은, 이렇게 좋은 전공을 하고도 남자 모델을 한다는 게 아깝다는 뜻이었다.“이건 제 알바예요.”배성재가 덧붙였다.안리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나? 제대로 된 본업도 있으면서 왜 알바를 할까?’그와 같은 열정적인 사람과 비교하니 나는 내 자신이 정말 게으른 사람 같았다.“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네요.”안리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배성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해 안리영에게 말했다.“가자, 공연 곧 시작해.”안리영은 배성재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모님이 아이를 잃어본 적 있어요?”“저는 외동이에요.”안리영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부모님 유전자 정말 좋네요.”그녀는 나를 밀며 조용히 속삭였다.“아까 말한 것 중에 진정우랑 겹치는 부분이 있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 외에는 진정우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었다.“그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고 하는데 얼굴은 진짜 똑같고 목소리도 아니고 정보도 다르고... 진짜 진정우인지 모르겠어.” 안리영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 남자를 어떻게 더 시험해 볼지 고민하고 있었다. 진정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윤지원, 왜 휠체어에 앉아 있어?”강유형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자 고개를 돌리니 그와 조시언이 다가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각 흰색 셔츠와 검은 셔츠를 입고 흑백 조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오늘 정말 시끌시끌하네, 하나같이 다 왔네.”안리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이렇게 작은 조명 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안리영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조시언이 오기 싫어서였겠지만 그는 고객이었고 이번 쇼를 보러 온 사람 중 하나였다.강유형이 내 쪽으로 걸어오며 내 다리를 쳐다봤다. “어디 다친 거야?”“무릎을 살짝 긁혔어. 별일 아니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강유형은 믿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사람은 휠체어에 앉지 않아.”“정말 괜찮아요. 강진혁 씨가 너무 걱정해서 휠체어를 가져온 거예요. 지원이도 안 타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된 거죠.” 안리영이 대신 설명했다. 안리영 덕분에 강유형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럴 만도 했다.안리영은 강유형의 반응을 무시하고 내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 휠체어는 꽤 괜찮아. 이렇게 밀고 다니면 다리가 좀 더 편하겠네. 널 세심하게 챙기고 다니는 건 확실히 강유형보다 나아.”그러자 강유형이 턱을 굳게 다물었 그 옆에서 조시언이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줬다.“너희 어디 가는 거야?”“멋진 남자들 보러 가요.”안리영이 대답했다. 그 말에 강유형은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는 그저 그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백스테이지에 들어서자 마자 대기 중인 남자 모델들이 보였다. 모두 이미 의상을 갈아입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다들 비슷한 체형에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와, 이 몸매들 정말 장난 아니네!” 안리영은 역시 중요한 포인트를 잘 찝었다.“몸매보다는 얼굴이 중요하지.” 나는 살짝 눈치를 주며 말했다.“그거야 알지만 자세히 볼 수 있으면 좋겠네.” 안리영은 발끝으로 서서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그때, 무대 감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 2년이나 됐다고요?” 나는 놀라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더 큰 실망감을 느꼈다.진정우가 사고를 당한 지 몇달 밖에 안 되었으니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히 진정우가 아니다.그런데 왜 이 사람은 진정우랑 이렇게 똑같이 생긴 걸까?혹시 이 사람과 진정우의 관계는, 내가 유희연과 같은 관계처럼 비슷한 건가?나는 그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며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강진혁이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그가 왔다는 것도 몰랐다. “너, 얼굴이 안 좋다. 어디 아파?” 강진혁은 나의 상태를 바로 알아챘다.“다쳤어.” 용준호가 그 말을 대신했다.하지만 그가 말한‘다쳤다’는 내 몸의 상처뿐 아니라, 내 마음의 상처도 포함된 말이었다. 용준호가 이렇게 진정우랑 닮은 사람을 일부러 데려다 놓은 건, 분명히 나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무릎을 다쳤어요.” 이번엔 허진호가 또 내 말을 대신해 주었다. 정말 고마운 두 남자 덕분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겠다.강진혁은 살짝 찡그리며 내 바지를 올리려고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강진혁의 손은 매우 빠르고 금세 내 발목을 잡았다. 그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잠깐만 볼게.”그가 내 바지를 살짝 올리자 상처가 드러났다. 강진혁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 다친 거야? 이렇게 심각한데 왜 말 안 했어?”그 모습이 마치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나에게 화가 난, 그런 전형적인 남자 친구의 모습 같았다. 만약 내가 그가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사실 그의 행동에 감동했을지도 모르겠다.“이미 안리영한테 확인을 받았어요. 별일 없었어요.” 나는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그의 얼굴은 굳어졌고 다시 내 상처를 살펴본 후, 몇 초 후에야 바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이렇게 다정한 모습은 지원이 앞에서만 볼 수 있네. 강진혁.” 용준호가 놀리듯 말했지만 강진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우였다!지난번 골목에서 봤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그때 내가 넘어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보겠다고 결심하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또다시 내 상처를 잊고 움직이자 그대로 넘어졌다.“어이, 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날 안고 싶으면 그냥 말해.”용준호는 장난스럽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불 켜!”내 말에 연습 중이던 사람들이 모두 멈췄지만 여전히 무대 뒤쪽의 불은 꺼져 있었다.“불 켜!” 내가 다시 소리쳤다. 밖에서 들어온 허진호가 내 소리에 놀라며 말했다.“뭐야? 불 켜, 빨리 켜!”허진호의 말에 모두가 움직여, 뒤쪽의 조명이 켜지자 눈이 부셔서 모두 눈을 찡그렸다.나는 무대 위의 모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나씩 얼굴을 살피다가, 결국 가장 중앙에 있는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그 얼굴은 내가 매일 밤 꿈에서 그리워했던 얼굴, 진정우의 얼굴이었다.그가 드디어 살아 돌아와 내 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 낯설고 심지어 어쩐지 혼란스럽고 불안한 기색까지 감돌았다.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리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무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너 뭐 하는 거야?” 용준호가 물었다. 허진호는 무대 위 사람을 가리키며 혼란스러워했다. “정우 씨, 정... 정우 씨가 여기 어떻게...”허진호 역시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나는 비틀거리며 무대 앞에 다가가 그 얼굴을 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말 진정우의 얼굴이 맞다고 나는 확신했다.“진정우.” 나는 그토록 많이 부른 이름을 낮게 불렀다. 하지만 무대 위의 남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나를 부축하던 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이 남자는 진정우가 아니야. 배성재야. 여기서 제일 유명한 모델이야.”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곧장 다가왔다. “준호 도련님.”“윤지원 씨야, 인사해.” 용준호가 말했다.배성재는 순순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