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제 물어보고 싶었던 게 생각나서 물었다. “어제 그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진 않았어요?”말을 꺼내면서 무심코 그의 손과 얼굴을 훑어봤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아니요.” 진정우가 내 속을 꿰뚫어 본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설령 온다고 해도 저한테 상대가 되겠어요?”그의 당당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입의 죽을 마시고 나서 다시 물었다.“혹시 아버님 사고 건은 진전이 좀 있었어요? 대체 어떤 사람들을 건드렸길래 당신을 협박하는 거예요?”진정우는 눈빛이 깊어지며 말했다. “그들이 겁내는 건, 제 아버지의 사장님이 돌아가신 이유를 제가 파헤치려는 거예요.”진정우는 이야기를 절반쯤만 하며 말끝을 흐렸고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사장님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그분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줄 만큼?”“그분은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젠 직접적인 이익에 관련된 건 아닌데...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그 사장님의 아이가 언젠가 자신들을 원망하게 될까 봐 그래요.” 진정우의 말이 끝나자 나는 묘하게 목이 메어 왔다.“그 사장님에게 자식이 있었군요. 혹시 그 사람을 본 적 있어요? 그 사람도 당신이 조사하는 걸 알기나 하나요?” 나도 모르게 세 가지 질문을 쏟아냈다.진정우는 잠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몰라요.”내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계속 조사할 거예요?”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네.”“근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제 그 사람들 보니까, 배후에 꽤 큰 세력이 있는 것 같던데.” 진정우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다치는 게 걱정돼요?”그의 말이 살짝 애매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정우 씨, 당신 아버님도 그 사장님도 이미 돌아가셨잖아요. 지금 무언가를 밝혀낸다고 해서 그분들이 돌아올 순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 위험해지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요.”진정우의 눈빛이 깊어
말이 먼저 나가고 생각이 따라오는 이 버릇, 정말 큰 일이다. 내가 무심코 말해버린 걸 스스로 인지하는 순간, 진정우가 뜻밖에도 대답을 했다.“그래요.”진짜 동의한 거야?! 보통은 자존심 세우면서 거절할 법도 한데... 돈을 빌리는 건 둘째 치고라도 내 제안을 진짜로 받아들이는 줄은 몰랐다. 그가 그렇게 간절히 필요한 돈이라면, 정말로 여동생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거겠지. 그 생각에 괜스레 짠해졌다.순간, 내 속이 들킨 듯 어색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여동생이 병원에서 진찰받은 적 있죠? 혹시 진찰 기록이 남아 있다면 저한테 주세요.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볼게요.”“그래요.” 그가 또다시 흔쾌히 대답했다.더 이상 할 말이 없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이제 가볼게요.”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상태 안 좋으면 꼭 연락해요.”“그래요.” 나는 미소로 답하고 뒤돌아 나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따뜻한 배려도 어느새 나에게는 부담처럼 느껴진다.집에 돌아와 문에 기대어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강유형에게서 온 전화였다. 왜 이 시간에 나를 찾는 걸까 싶어서 그냥 두었는데 통화 목록을 보니 그동안 20통이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거의 다 강유형이었고 몇 통은 고준석에게서도 와 있었다. 고준석도 역시 강유형의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전화를 하는 걸 보면, 아마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지원아, 지금 어디야? 나 좀 만나자.” 그의 목소리가 힘겹게 떨렸고 살짝 술에 취한 듯했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이제 나한테 마음이 없지.”내가 여전히 침묵하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지원아, 정말 날 떠나는 거야? 우리... 10년 동안 함께였잖아. 넌 항상 나를 좋아했잖아...”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샤워를 마친 후, 진정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 앞에 준비해 둔 아침 식사를 챙겨가라는 내용이었다. 왜 그동안 그의 아침을 먹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지만 여전히 챙겨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의 정성을 저버리지 않으려 아침을 챙겨 먹고 회사로 출근했다.출근이 일렀던 탓에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의 일정을 정리하고 팀원들의 업무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나니 아직 근무 시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모처럼 친구들의 소식을 보기 위해 SNS를 확인했다. 비록 대화는 자주 하지 않지만 이곳을 통해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신지태는 당구 챌린지에 나가겠다고 올렸고 안리영은 오늘 맞이한 아기 천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녀는 출산을 돕는 일마다 하나씩 기록하는데 오늘로 5,566번째 아기를 맞이한 셈이다. 그녀 자신도 이 숫자에 감탄한 듯했다.안리영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엄지를 치켜드는 이모티콘을 남겼다. 다음으로 넘기다가 강유형이 올린 글이 눈에 들어왔다.“앞으로 남은 삶, 너희를 지키면서 살 거야.”라는 문구와 함께 어머니와 아이가 등장하는 그림이었다.순간 가슴이 꽉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조나연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분명했다. 강유형이 밤중에 올린 게시글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요’와 축하 댓글을 달았고 심지어 나와 강유형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둘을 엮어 축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짧게 댓글을 남겼다. “축하해. 행복하길.” 그러고는 곧바로 SNS를 닫았다. 핸드폰을 옆에 두고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주 아프다기보다는 그저 무겁고 답답할 뿐이었다. 이 감정을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다.그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보니 허진호였다. 그의 사무실을 봤더니 아직 출근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부대표님.”“지원 씨, 당분간 회사에 안 나와도 돼요.
신지태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내자 그의 전화가 바로 걸려 왔다.“왜? 그 사람이 너한테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신지태의 직설적인 물음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오히려 내가 그 사람한테 이상한 짓 하고 싶은데, 문제는 그 사람 얼굴도 못 봤다는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겠어?”“얼굴도 못 봤다고? 그러면 단순히 궁금해서 알아보라는 거야?” 신지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너, 내가 한가한 줄 알아?”며칠 전에 당구 대회 준비한다고 바쁜 신지태가 문득 떠올랐다. 내가 좀 성급했나 싶은 생각에 약간 미안해지며 대답했다.“바쁘면 됐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꼭 확인해야 하는 건 아니고.”“네 그 말이 오빠를 속상하게 만드는 거 알지?” 신지태가 장난스레 투덜거렸다.나도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진짜야, 오빠. 시간 되면 알아봐 주고, 아니면 말고.”“그래, 알았어. 다른 사람 일은 몰라도 네 부탁은 들어줘야지. 어떻게든 알아볼게.” 신지태는 흔쾌히 응답했다.하지만 통화를 끊지 않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신지태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려다 말고는 “됐어. 그냥 네가 힘든 일 생기면 언제든 말해.”하고 말을 맺었다.그가 별말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어제 있었던 일, 특히 강유형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면 서로 난감했을 테니까.“고마워. 대회 때 응원하러 갈게. 티켓 구해줘!” 내가 활기차게 말하자 신지태도 웃으며 대답했다.“좋아! 준비해 줄게!”전화를 끊고 난 후, 나는 집으로 향했다. 어제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친 탓에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집 앞에 도착해 보니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나는 차를 주차하고 다가가 보니 공고문이 눈에 들어왔다.재개발!이 세 글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가 언젠가 재개발될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당황스러웠다.다른 사람들에게 재개발은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다. 하룻밤 사이에 부
나는 앞으로 어디에서 부모님과의 추억을 찾아야 할까?“다윤아.”현관 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바로 맞은편 집에 사는 집주인 아주머니였다.재개발 소식을 듣고 온 것이 분명했다.“여기가 곧 철거된다니, 아쉽네.”아주머니는 흔치 않게 탄식을 내뱉었다.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그러자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나도 얼마 전에 돈 들여 집을 조금 손봤는데 겨우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이사를 해야 한다니, 억울하네.”나는 말없이 웃음만 지었다.“방을 빌린 청년한테 전화했는데 연락이 안 되네. 혹시 그 친구 보게 되면 이 소식 좀 전해주고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줘. 곧 철거될 거라 미리 준비하라고 말이야. 짐도 챙기게.”아주머니가 나에게 부탁했다.“네, 그렇게 할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 아주머니가 감사 인사를 전하더니 갑자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청년 만나봤지? 괜찮은 사람이지?”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나쁘지 않아요.”“그 정도가 뭐야? 그 청년 같은 인물 드물어. 딸이 없어서 아쉽지, 있었으면 사위 삼고 싶을 정도로 괜찮은 청년이던데.”아주머니도 진정우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아줌마도 낳으세요.” 나는 농담처럼 받아쳤다.평소 같으면 불쾌하게 들렸을 수도 있지만 요즘에 60대 노인의 출산 뉴스가 화제가 되면서 분위기가 가벼워졌다.“나는 그럴 체력도 없지. 그만 놀려.”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나도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슬슬 너도 이사 준비해야겠다. 쓸모없는 건 버리고 팔 수 있는 건 팔아라. 내가 아는 고물상 전화번호가 있는데 사람도 괜찮고 가격도 잘 쳐줘. 필요하면 번호 줄게.”그 따뜻한 배려에 거절하기가 미안할 정도였다.아주머니는 고물상 전화번호를 건네고 가셨고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열자 온 집안 가득히 묻어 있는 추억이 나를 맞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
광화그룹.용진표.회사 이름도, 대표의 이름도 너무나 익숙했다.왜냐하면 광화 그룹은 강유형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KS그룹의 최대 파트너였고 강유형의 부모님과 용 대표님은 사적으로도 아주 친한 사이였다.하지만 이 계약서가 열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했다.아버지는 KS 그룹의 직원도 아니었고 당시에는 KS과 아무런 연관이 없던 분이셨다. 그런데 왜 이 계약서를 아버지가 갖고 계셨던 걸까?계약 내용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청정에너지 개발을 위한 협약이었다.현재 그 사업은 KS 그룹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어, 엄청난 수익을 내는 분야였다.엄밀히 말하면 이 계약서는 KS 그룹의 자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유형의 아버지 서명이 없었다.나는 계약서를 옆에 두고 아버지의 노트를 펼쳤다.노트에는 대부분 업무 계획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화학 기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계약이 순조롭기를"이라는 짧은 문구를 발견했다.그리고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아마도 그 이후로 아버지는 사고를 당하신 것 같다.갑자기 아버지가 사고 나기 전날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다윤야, 내일이 지나면 아빠가 너에게 놀이공원을 지어줄 수 있을 거야.”그때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신나서 아빠에게 달려가 안기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광화 그룹과 계약을 성사했다면, 아마 지금의 KS 못지않은 대기업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놀이공원이 아니라 상업 제국을 이룰 수도 있었겠지.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사고가 정말 단순한 사고였을까? 이 계약과 관련된 누군가가 개입한 것은 아니었을까?머릿속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생각들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나는 그대로 물건들 사이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결국 이 일을 직접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꼭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강진혁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득력 있는 이유가 필요했다.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형이가 우리 부부를 미치게 하려는 모양이야! 그 여자와 진짜로 결혼하려고 한다면, 나랑 네 삼촌은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아줌마의 반응은 놀랍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달랬다.“아줌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요즘은 결혼 문제에 부모가 관여하기 어려운 세상이잖아요.”“우린 그걸 알지만, 이혼한 여자와의 결혼은 절대 안 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내 마음도 이미 복잡하고 상처받은 상태였기에, 더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힘들었다. 사실 그런 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강유형과 조나연이 나에게 상처를 준 건데, 내가 굳이 그들을 변호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대한 태도라고 생각했다.“지원아, 너희 삼촌이 너무 화가 나서 식사도 거부하고 있어. 너밖에 못 말려. 네가 와서 좀 말려줄래?” 아줌마가 전화한 이유가 드러났다.아줌마의 부탁을 듣고 마음이 설렜다. 어쩌면 이 기회에 삼촌의 차량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나는 곧장 가겠다고 대답했고, 아줌마는 전화기 너머에서 강유형을 계속해서 꾸짖다가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이렇게 바로 강유형 집에 가는 것만으로는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안전하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강진혁에게도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강진혁 오빠는 여전히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진혁 오빠.” 나는 먼저 그를 이렇게 불렀다.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그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내 자신도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이용하려는 건 아닌지
“삼촌...” 내 목소리가 떨리며 나도 모르게 삼촌을 불렀다.“지원아.” 삼촌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머리가... 어떻게...”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만지려 했다.그는 살짝 놀란 듯 물었다. “내 머리가 왜? 헝클어졌니?”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삼촌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아줌마가 무슨 말이라도 했니? 그 사람 말은 신경 쓰지 마. 늘 과장하잖아.”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거의 하얗게 변한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새까맸던 머리가, 하루아침에 80%는 희어져 있었다. 한순간에 정정한 중년에서 늙어버린 것 같았다.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그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삼촌은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왜 울어? 나 괜찮아. 그저 혼자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네 아줌마가 계속 성가시게 해서 너까지 부른 거야.”그는 내가 하루 종일 문을 잠그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걸 걱정한 줄 알았다.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젓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자, 안에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자. 삼촌이 직접 끓여줄게.” 삼촌은 나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듯 의연하게 말했다.하지만 하룻밤 사이 그렇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삼촌.” 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유형... 그냥 두세요. 더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지금의 삼촌이 너무 안쓰러웠다. 마치 친아버지처럼 가슴이 아려왔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이 무거웠다. “너무 실망스러웠어. 내가 그 아이를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이야.”“그건 삼촌 탓이 아니에요. 강유형도 이제는 자기 주관을 가진 어른이잖아요.” 나는 애써 그를 달랬지만 삼촌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삼촌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속으로는 굳건하게 자신을 지키는 성격이었다. 누구의 말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성격이었다.“지원아, 여기 앉
“그럼 돌아가. 하지만 지금 네 상태로는 혼자 갈 수 없어.”강유형이 단호하게 말했고 잠시 침묵하다가 강진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형, 지원이랑 같이 가줘.”강진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아무리 거절해도 그들이 날 혼자 두고 갈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 너는?”나는 강유형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난 여기 남아서 신지태 나오면 같이 갈 거야.”강유형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신지태가 낯선 곳에서 그런 일을 겪고 나왔는데 아무도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할까. 하지만 강유형의 지금 상태로 남아 있는 것도 신지태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이 상태로 있으면 신지태가 더 죄책감 느낄 텐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괜찮아. 사고 얘기는 꺼내지 않을 거니까.”강유형은 단호히 답했다. 더는 설득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지태 오빠, 경기 다시 뛸 수 있을까?”이번에는 강진혁이 대답했다.“아직 몰라. 구단 쪽 반응도 봐야 하고 Q클럽의 태도에 따라 다를 거야.”문득 진정우가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줄 사람은 진정우일 텐데 지금은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나는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귀국 비행기표를 예약하기 시작했다.“내 것도 같이 예약해 줘.”강진혁이 말하기 전까지는 그의 표까지 예약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그럼 여권 정보 줘.”강진혁은 여권을 건네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들고 말했다.“이미 예약했어. 두 장.”그의 말에 잠시 놀랐지만 그는 이어 말했다.“짐 챙겨. 한 시간 뒤에 공항으로 가자.”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고 강진혁이 먼저 강유형을 향해 말했다.“머리 다친 건 별일 아니지만 이제 몸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 해. 네 몸 상태가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는 걸 잊지 마.”그의 말
뉴스?무슨 뉴스?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내가 깨어난 이후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고 문 앞에 있던 강유형과 강진혁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무슨 뉴스야?”내가 직설적으로 묻자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아마도 나한테 뭔가를 숨기려는 듯했다.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다 들었으니까 숨기지 말고 제대로 말해줘.”강진혁은 짧게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꺼냈다.강유형이 말리려는 듯 보였지만 내가 강한 눈빛으로 제지하자 그도 말없이 물러섰다.“이미 알게 된 이상 차라리 직접 확인하고 진정우랑 제대로 얘기하는 게 나을 거야.”강진혁이 말하며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 화면에는 웹 기사 캡처가 떠 있었다.[희귀한 황금 혈액형 연인, 여자 친구가 800cc의 피로 남자 친구를 구해줌. 이제 내 피가 당신의 몸속에 흐르고 있어요.]로맨틱한 제목과 함께 내가 강유형의 손가락을 잡고 응원하던 사진이 실려 있었다.그저 힘내라는 뜻에서 손을 잡았던 순간이었지만 제목과 사진이 더해지니 마치 우리가 생사를 함께하는 연인처럼 보였다.“이 뉴스 언제 올라온 거야?”나는 강진혁을 보며 물었다.“3일 전이야. 네가 수혈을 끝내고 바로 올라왔어.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고 진정우도 이미 와 있던 상태였어. 진정우가 아마 이걸 봤던 게 분명해.”그 순간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강진혁은 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눈치채고 조용히 덧붙였다.“바로 사람을 시켜 이 뉴스는 삭제했어. 지금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어.”그게 무슨 소용일까.진정우는 이미 이 기사를 봤을 텐데 말이다.나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진정우만큼은 아니었다.그가 아무리 나를 믿고 있더라도 이 사진과 제목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이 일은... 내가 진정우한테 직접 설명할게.”강유형이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이런 일은 설명할수록 더 복잡
나는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래.]그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들었다.잠시 후, 나는 내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때 강유형이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저 자식,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그는 다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빠르게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공기가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내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요.”강유형과 강진혁은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더는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내가 왜 울고 있는 걸까? 그가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한 말 때문일까?아니면 내가 이렇게 기다렸음에도 나를 보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일까?나는 진정우를 기다렸고 그는 왔지만 나는 결국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그저 긴 잠에 빠졌을 뿐인데 겨우 사흘 동안 못 봤다고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걸까?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나를 구하는 과정에서 크게 다쳐서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걸까?아니면 그가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의 가족, 특히 그 유명한 진씨 가문이 나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머릿속은 온갖 상상으로 뒤엉켰지만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며 생각을 멈췄다.이럴 때일수록 직접 확인하는 게 나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전화를 꺼둔 탓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그 순간, 문득 진소영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와 시차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전화를 걸었다.“언니!”진소영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언니?”그녀가 다시 불렀다.“잘못 걸었어. 미안해, 자는데 깨웠지?”내 목소리에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분명히 걱정할 것이다.“아니에요
“지원아!”강유형이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나는 그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와 함께 들어온 강진혁을 향해 말했다.“정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러자 강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 어떻게 알아?”“확실한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그래요.”나는 힘없이 대답했다.“전화했더니 바쁘다면서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요.”나는 이유를 설명했다.“그럼 다시 전화해 봤어?”강유형이 물었다. 사실 다시 걸어보진 않았다.진정우가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나는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다.“내가 걸어볼게.”강유형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강 대표님.”바로 내 앞에서 전화했기에 대화가 또렷하게 들렸다.“정우 씨, 지금 어디예요?”강유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비행기 안이에요.”진정우의 대답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강유형이 나를 힐끗 보며 다시 물었다.“비행기? 어디로 가는 중이죠?”“귀국 중입니다.”이 짧은 두 글자에 내 심장은 쥐어짜이는 듯했다. 나는 강유형의 휴대폰을 낚아채며 말했다.“정우야, 무슨 일 생긴 거야?”아무 대답이 없자 내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말 좀 해봐. 무슨 일 있는 거야? 지금 어디에 있어?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그가 깨어난 나를 보러 오지 않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이런 일에는 반드시 와야 하지 않나?“아니야. 거짓말 안 했어.”진정우가 차분하게 답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못 믿어. 전에 나 속인 적 있잖아.”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래, 나는 거짓말쟁이야.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못 믿겠으면 사진 보내줄게.”전화가 끊기고 곧 내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그는 비행기 좌석에 앉은 자신의 사진과 함께 비행기표 사진을 보내왔다.그가 진짜 귀국 중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
수혈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지원아, 꼭 조심해야 해.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왜 그렇게 많은 피를 준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바보 같은 년, 누가 너더러 피를 주라고 했어?”“지원아, 제발 날 구해줘. 나... 너무 추워.”꿈속의 목소리는 부모님, 진정우, 그리고 강유형이었다.나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꿈속 장면이 멈췄고 강유형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다.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강유형! 강유형!”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피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공포에 몸이 떨리며 나는 그를 계속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지원아, 일어나. 제발 정신 좀 차려!”급한 목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지원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강진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악몽이라도 꿨어?”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려 했다.강진혁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나는 목이 칼에 베인 듯 아파 말을 내뱉는 게 너무 힘들었다.“너와 유형한테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강유형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며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그가 위급했던 모습이 겹쳤다.나는 아픈 목소리로 물었다.“강유형... 어때요?”강진혁은 다행히도 평온하게 대답했다.“이미 깨어났어. 너를 몇 번 보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쉬게 하려고 내가 다시 병실로 돌려보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제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요?”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밝았고 사고가
평소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이번엔 단 몇 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좋습니다. 지금 바로 수혈을 진행해야 합니다. 대략 400cc에서 600cc 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 더 필요하다면 더 해도 돼요.”강유형이 내 탓에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나는 의사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구급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의사가 그가 언제든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한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강유형, 꼭 버텨야 해. 힘내.”그는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되었고 나는 그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수혈을 해야 했다.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피가 계속 빠져나가자 나는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이것이 혈액 손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수혈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유형을 살리려면 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미 600cc나 뽑았습니다.”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환자의 혈압과 호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 계속 수혈해야 합니다.”주치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더 뽑아주세요. 괜찮아요.”“더 뽑으면 윤지원 씨가 실신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나를 보며 경고했다.“아니에요. 지금 제 상태는 아직 아주 좋아요. 정말 괜찮아요. 더 뽑아주세요.”아마도 내가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았기에 의사는 주치의에게 물었
우리는 마침내 구조되었다.구조대원 중 한 명은 신지태를 만나러 갈 때 나를 태워준 운전기사였다.나는 그가 진정우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차가 심하게 찌그러져서 차를 절단해야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강유형의 핸드폰도 함께 찾아냈다.“어? 이 전화 아직도 통화 중이네요.”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이 아니라 강유형의 것이었다.나는 전에 이 핸드폰으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통화가 막 끝난 상태였고 통화 시간은 67분 12초로 표시되어 있었다.진정우가 계속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강유형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하지만 강유형과 나는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안도했다.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나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강유형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고 운전기사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이 없었다.셋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이는 전적으로 강유형이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강유형 씨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계십니까?”의사가 다가와 물었다.우리는 낯선 나라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강유형의 가족은 그의 곁에 없었다.나는 결국 나서야 했다.“제가 가족입니다. 강유형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의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현재 환자가 과다 출혈 상태입니다. 문제는 환자의 혈액형이 매우 희귀한 RhD 음성, RhNULL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병원에는 이 혈액의 재고가 전혀 없어서 즉시 수혈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의사가 강유형 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혈액형이 RhNULL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혹시 같은 혈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