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이 아직 열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이때 문이 열리고, 회색 잠옷을 입고있는 진정우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새로 온 이웃이 정우 씨였다니. 요 며칠 날 보러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예 맞은편에 이사 온 거였네. 야간 근무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왜 이사 온 사실을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지? 수도관을 수리해 줄 때부터 맞은편에 이사 오기로 마음먹었던 거야.’나는 진정우를 보는 순간 깨닫는 것이 많았다.“들어오세요.”나한테 들켜버린 진정우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이웃집에 이사 온 것은 잘못한 일도 아니지만 나는 평온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그래서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진 기사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시죠?”“들어오시면 말씀드릴게요.”진정우가 안으로 들어오라면서 몸을 비켜주자, 나는 이를 꽉 깨문 채 안으로 들어갔다.나를 위해 이곳에 이사 온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를 가지고 논 듯한 느낌이 들어 화가 났다. 전에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안의 모습에 나는 들어가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원래 있었던 물건들은 온데간데없이 전체 거실에는 소파 하나만 놓여있었다.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곳은 마치 도둑맞은 집처럼 텅 비어있었다.“방 안에 있던 물건은요?”내가 본능적으로 묻자 진정우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언제 와보셨어요?”늘 내 물음에 똑바로 대답하지 않는 진정우의 모습에 나는 또 놀아났다는 생각에 힘껏 그를 째려보았다.진정우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방을 가리키더니 말했다.“다 저 방에 넣어뒀어요.”‘그런데 이 큰 거실에 필요한 물건이 소파뿐이라고? 사람 사는 곳이라면 TV랑 테이블 정도는 있어 줘야 하지 않나? 물컵도 놓을 수 있고 핸드폰도 올려놓을 수 있잖아. 너저분한 것이 싫은 사람이었다면 청평에 있는 우리 부모님 집에서는 왜 방을 정리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저희 둘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친구 사이도 될수 없을 것 같네요. 저는 다른 사람을 찾아볼게요.”우두커니 서 있던 진정우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면서 말했다.“어떤 사람을 찾고 싶은데요?”나는 본능적으로 후퇴했지만 내가 뒤로 물러날수록 진정우는 나한테 더욱 가까이했다.“다시 소개팅할 거예요? 아니면 아는 오빠나 친구를 찾을 거예요?”질투심이 가득한 말투였다.“정우 씨!”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손으로 막았다.“저 지원 씨한테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인데 지원 씨가 거절한 이상 치근덕거리지 않을 거예요.”‘응?’나는 당황하고 말았다.진정우는 차가운 표정과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저는 이제 아무 상관도 없는 이웃이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셔도 돼요.”나는 할 말을 잃었다.‘내 생각이 불순하다는 건가?’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진정우가 먼저 말했다.“아까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뻘쭘해하고 있던 나는 마침 할 말이 생겼다.“지금이 몇 시인데 벌써 퇴근하신 거예요? 놀이동산 쪽에 있는 일은 이미 다 끝냈어요?”“아니요.”진정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나는 장난스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진 기사님, 일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퇴근한 걸 보면 이 프로젝트를 사전에 끝낼 수 있는 거 맞아요?”“저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에요.”진정우의 확고한 말투에 내 입도 따라서 움찔거렸다.“그런데 이제 와서 테스트방식을 바꿨다가 마지막 테스트 때 문제가 생기면 시간 낭비하는 거잖아요.”“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제가 전적으로 책임질 거예요.”진정우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나는 그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몰랐지만 메인 테스터로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2초간 망설이다 한마디 했다.“정우 씨, 비록 제가 퇴사해서 이제는
새벽 5시.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새로운 일자리에 임하려고 아침부터 일어나 요가까지 했다.6시. 샤워를 마치고 아침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진정우한테서 온 문자였다.[아침밥 준비해 뒀어요. 키는 지원 씨 집 문손잡이에 있어요.]나는 이 문자를 보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문을 열어보니 정말 키가 걸려 있었고, 진정우의 집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아침밥이 준비되어 있었다.어제저녁, 나는 음식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결국 그를 도와 먹어주기로 했다.‘그런데 오늘 이 아침밥은 어떻게 된 일이지? 무료로 도우미 아줌마라도 하겠다는 건가?’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침밥을 준비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그래도 문자로 물어보기로 했다.[무슨 뜻이에요? 알바라도 하고 싶어요?][네. 지원 씨가 알아서 팁 같은 거 주면 좋죠.]‘말을 잘 받아치는데?’이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있는 나는 잠깐 고민했다.[정우 씨, 너무 선 넘는 거 아니에요? 저희는 가짜 연애를 하고 있다고요.][연애는 가짜라고 해도 연기 기간에 지원 씨 건강은 제가 책임져야죠. 아니면 또 시간 내서 지원 씨를 보살펴야 하잖아요.]그의 보살핌 따위 필요 없는 나는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괜히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연기만 하면 되니까 제가 죽든 살든 정우 씨랑 상관없어요. 다음부터 저를 위해 요리를 안 하셔도 돼요. 해도 어차피 안 먹을 거예요.]내가 너무 냉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보살핌에 익숙해지지 말아야 했고, 또 가능성 없는 일에 목매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아침밥은 나름대로 맛이 좋았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어서 그런지 출근길에 힘이 났다.회사로 가는 길에 아직 해고통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만나서 직접 말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생각 때문에 기분이 확 나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회사에 가보기로 했다.“윤 부장님, 환영해요.”제일 먼저 허진호가 눈에 들어왔고, 그가 반갑게
하지만 나는 실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KS 그룹에서도 안방마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면서 가만히 놀고먹지는 않았다.일주일 동안 나는 모든 고객의 자료와 회사자료를 한번 다 훑어보았고, 또 각 마케팅 부서 직원들의 2년간 업무 상황과 반년 동안의 KPI도 알아보았다.나는 다시 업무를 분배했고, 보너스와 벌칙 제도까지 내놓았다.다들 처음에는 의욕이 활활 타오르다 마지막에는 의욕을 잃는다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하는 목적은 열심히 하는 만큼 얻는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회사에 헌신하는 것도 강유형의 압력도 무시하고 나를 채용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함이었다.내가 한창 자신감 넘쳐있을 때, 직원을 통해 현재 담담하고 있는 고객들이 전부 계약해지를 제출했다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이미 얘기가 끝난 고객들도 갖은 이유를 대면서까지 계약을 미루고 있다고 했다.순간 나는 강유형의 짓이라고 생각했다.회사에 압력을 주지 못해 고객을 뺏는 비겁한 방식으로 회사에서 나를 포기하기를 바라는 거였다.이번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허진호한테 보고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신경 쓰지 마세요. 그분이 뺏어갈 수 있는 고객이라면 애초에 저희 고객이 아닌 거예요. 또다시 찾으면 되죠.”나는 80%의 고객이 강유형 쪽으로 유실되었다는 보고서까지 보여주었다.“괜찮아요. 윤 부장님만 빼앗아 가지 않으면 잃어버린 고객만큼 윤 부장님께서 또다시 확보할 수 있다고 봐요.”허진호는 유난히 나한테 믿음이 강했다.사실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부대표님, 대표님께 보고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나는 설명을 늘려놓기 시작했다.“다른 뜻은 없지만, 고객을 이렇게 많이 유실했는데 보고드리지 않았다가 대표님께서 갑자기 이 일을 따지기 시작하면 부대표님께서 난처해하실까 봐요.”피식 웃기만 하는 그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메모를 확인했더니 강두식의 생일이 3날밖에 남지 않았다.생일날에 이런 말을 하기에는 민폐가 되는 것 않아 미리 생일을 축하해 줄 겸 찾아뵙기로 했다. 이러면 생일날에 또 만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강진혁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놀이동산을 떠나서부터 한번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피부가 너무 까매져서 날 못 알아보는 거야?’강진혁이 먼저 자신을 비웃는 모습에 나는 갑자기 진정우가 생각나 피식 웃고 말았다.“아줌마가 보시면 마음 아파하시겠어요.”“아니. 엄마가 그러는 데 더 남성적으로 변했다고 했어.”강진혁은 하는 말마다 나를 웃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더 남성적으로 변하긴 했네요.”강진혁이 자기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비록 강진혁이 일부러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이런 말을 했지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랐다.나는 강두식을 만날 일이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아줌마 아저씨는 잘 지내세요?”“응. 다들 너 보고 싶어 하셔.”이 말에 나는 마음이 씁쓸해지는 느낌이었다.예전에는 퇴근해서 강씨 가문으로 가면 매일 볼 수 있었지만 나와서 독립한 뒤로 한번도 뵈러 간 적 없었다.“오늘 뵈러 가려고요.”나는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아저씨한테 할 말도 있고요.’강진혁의 눈빛만 봐도 무엇을 궁금해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굳이 속이려고도 하지 않았다.“유형이가 요즘 미친 듯이 제가 입사한 회사를 건드리려고 발악하고 있거든요. 심지어 고객들마저도 다 빼앗아 가는 추세예요.”강진혁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다음 순간 그가 이렇게 말했다.“이미 아버지한테 말씀드렸어. 그리고 네가 퇴사하는 것도 극구 반대하셨어.”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강진혁이 계속해서 말했다.“사실 오늘 아버지 부탁 때문에 너 보러 온 거야. 지원아... 회사로 돌아와.”나는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임무를 완수하지 못하
그동안 강씨 가문에서 지내면서 나는 강두식이라는 사람과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공과 사가 확실한 그였기 때문에 강유형이 무슨 실수를 범하면 매번 혼내고 했다.하지만 나는 강유형이 여전히 미친 듯이 고객을 뺏는 행위가 떠올라 감탄하고 말았다.“아저씨 경고도 먹히지 않았나 봐요.”강진혁도 이 말에 숨긴 뜻을 알아채고 물었다.“유형이가 아직도 멈추지 않았어?”“아니요. 제가 다니는 회사를 아주 짓밟아 버릴 생각인가 봐요.”나는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화가 나서가 아니라 회사 또는 고객에 영향이 갈까 봐서였다.“너무 심했네.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야겠어.”강진혁도 화가 난 모양이다.“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낫겠어요. 마침 생신 선물을 준비했는데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강진혁은 눈이 반짝거리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그래. 오늘 가려고? 마침 같이 가면 되겠네.”기대에 찬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오늘이긴 한데 데리고 갈 사람이 있어요.”“누군데?”강진혁은 여전히 기대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친구야?”“네. 남자친구요.”내가 한 말에 강진혁은 표정이 굳어버리고 말았다.멘탈이 바사삭 털리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김희연이 말해줬기 때문에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처를 줄 바에 희망 고문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한참 지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지원아... 남자친구가 누군데?”“진정우 씨요!”강진혁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지원아...”“오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제 행복을 가지고 장난칠 사람이 아니에요.”나는 마음에 찔리는 말을 내뱉었다.강진혁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난 네가 이렇게 빨리 유형이와의 감정을 정리했을 거라고 믿지 않아.”나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알고 있으면서 왜 나를 좋아하는 거지? 아, 출국할 때부터 나를 좋아한 건가?’몇 년 동안 외국에 있은 것도 나
나는 온몸이 굳어지면서 본능적으로 이런 신체접촉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가 하도 꽉 쥐고 있는 바람에 피할 수도 없었다.이런 컨트롤 당하는 느낌이 너무 싫은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오빠...”강진혁은 내 말도 채 듣지 않고 말했다.“지원아. 유형이는 내 동생이라 뭐라 하지 못하겠지만 걔 때문에 너의 원칙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그의 손을 통해 긴장감과 떨림을 느낄수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두운 눈빛과 진지한 말투는 나를 애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지원아, 남자친구를 사귀는 건 장난이 아니야. 꼭 신중했으면 좋겠어. 잘못했다간 네가 다칠 수도 있어.”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서 순간 진정우가 나의 가짜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하지만 강씨 가문과 인연을 끊고 싶은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아니면 진정우가 남자친구라고 연기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수도 있었다.“오빠, 난 3살짜리 어린애가 아니야. 난 내가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 알아.”내가 그에게 반박했다.“그러면 진정우랑 서로 알고 지낸 지 며칠이나 됐는데?”강진혁은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더욱 진지해졌다.그가 믿지 않길래 나는 파격적인 소식을 들려주기로 했다.“서로 알고 지낸 지는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는 청평군으로 갔을 때 이미 확정된 거예요.”강진혁은 나의 친오빠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너무 심한 말은 하기 싫었다.강진혁도 이 정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라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내 어깨를 꽉 잡았다.그는 이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아무 말 없이 실망스럽고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이 눈빛을 읽은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오빠,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 거예요. 저랑 정우 씨는 만날 운명이었어요.”나는 강진혁이 휘청거리고 있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그는 여전히 내 어깨를 잡고 있었지만, 아까처럼은 꽉 잡지 않았다.우리 둘이 대치하고 있을 때, 어디서 갑자
마음속에 의문이 스쳤다. 막 말을 꺼내려는 찰나, 허진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크음! 윤 팀장, 왜 문틈에서 엿듣고 있었어요? 깜짝 놀랐네.”허진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오해하지 마세요. 엿들은 게 아니라 마침 찾아뵈려던 참이었어요.”“하하!”허진호는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그가 손짓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주자 나는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입사한 지 며칠 지났지만 그의 사무실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인상은 어딘가 자유롭고 독특했다. 허진호는 회사의 부대표였지만 대표가 회사 업무에 관여하지 않으니 사실상 최고 결정권자나 다름없었다. 보통 대표의 사무실이라면 차분하고 세련된 분위기여야 할 텐데 그의 사무실은 좀 달랐다.소파는 다채로운 색상이었고 디자인도 반달 모양의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방 안 곳곳에는 알록달록한 생화가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귀여운 장식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여성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그가 부대표라는 걸 몰랐다면 사무실을 잘못 찾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어때요, 마음에 들어요?”허진호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물었다.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였다. 사무실치고는 너무 가벼운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곳의 주인은 그였으니 그가 좋아하면 그만이었다.“대표님 사무실 스타일이 참 독특하시네요.”나는 약간의 아부를 섞어 말했다.허진호는 웃으며 나를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나는 딱딱한 분위기는 싫더라고요. 형도 늘 그런 얘길 해요. 아, 그 형이 바로 대표예요. 방금 그와 통화 중이었는데, 지원 씨가 문 앞에 불쑥 나타나서 놀랐잖아요.”나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생각이 많았다. 그가 대표를 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둘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듯했다. 어쩐지 모든 걸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이유가 있겠지.“다음엔 조심할게요.”나는 겸손하게 말했다.“괜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
수혈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지원아, 꼭 조심해야 해.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왜 그렇게 많은 피를 준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바보 같은 년, 누가 너더러 피를 주라고 했어?”“지원아, 제발 날 구해줘. 나... 너무 추워.”꿈속의 목소리는 부모님, 진정우, 그리고 강유형이었다.나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꿈속 장면이 멈췄고 강유형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다.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강유형! 강유형!”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피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공포에 몸이 떨리며 나는 그를 계속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지원아, 일어나. 제발 정신 좀 차려!”급한 목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지원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강진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악몽이라도 꿨어?”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려 했다.강진혁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나는 목이 칼에 베인 듯 아파 말을 내뱉는 게 너무 힘들었다.“너와 유형한테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강유형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며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그가 위급했던 모습이 겹쳤다.나는 아픈 목소리로 물었다.“강유형... 어때요?”강진혁은 다행히도 평온하게 대답했다.“이미 깨어났어. 너를 몇 번 보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쉬게 하려고 내가 다시 병실로 돌려보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제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요?”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밝았고 사고가
평소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이번엔 단 몇 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좋습니다. 지금 바로 수혈을 진행해야 합니다. 대략 400cc에서 600cc 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 더 필요하다면 더 해도 돼요.”강유형이 내 탓에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나는 의사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구급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의사가 그가 언제든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한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강유형, 꼭 버텨야 해. 힘내.”그는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되었고 나는 그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수혈을 해야 했다.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피가 계속 빠져나가자 나는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이것이 혈액 손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수혈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유형을 살리려면 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미 600cc나 뽑았습니다.”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환자의 혈압과 호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 계속 수혈해야 합니다.”주치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더 뽑아주세요. 괜찮아요.”“더 뽑으면 윤지원 씨가 실신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나를 보며 경고했다.“아니에요. 지금 제 상태는 아직 아주 좋아요. 정말 괜찮아요. 더 뽑아주세요.”아마도 내가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았기에 의사는 주치의에게 물었
우리는 마침내 구조되었다.구조대원 중 한 명은 신지태를 만나러 갈 때 나를 태워준 운전기사였다.나는 그가 진정우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차가 심하게 찌그러져서 차를 절단해야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강유형의 핸드폰도 함께 찾아냈다.“어? 이 전화 아직도 통화 중이네요.”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이 아니라 강유형의 것이었다.나는 전에 이 핸드폰으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통화가 막 끝난 상태였고 통화 시간은 67분 12초로 표시되어 있었다.진정우가 계속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강유형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하지만 강유형과 나는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안도했다.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나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강유형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고 운전기사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이 없었다.셋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이는 전적으로 강유형이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강유형 씨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계십니까?”의사가 다가와 물었다.우리는 낯선 나라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강유형의 가족은 그의 곁에 없었다.나는 결국 나서야 했다.“제가 가족입니다. 강유형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의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현재 환자가 과다 출혈 상태입니다. 문제는 환자의 혈액형이 매우 희귀한 RhD 음성, RhNULL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병원에는 이 혈액의 재고가 전혀 없어서 즉시 수혈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의사가 강유형 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혈액형이 RhNULL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혹시 같은 혈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
교통사고는 정말 내게 악몽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내가 그 악몽을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이 절망감은 얼마나 깊은지...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던 순간에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니, 어쩌면 더 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한 상처를 입은 끝에 돌아가셨으니까.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진정우는 그런 나를 잡아주려고 애썼다.“지원아, 괜찮아. 곧 사람들이 너희를 구하러 갈 거야. 나도 금방 갈게.”그는 내게 계속 말을 걸며 진정시키려 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아파...”강유형의 힘없는 신음이 내 옆에서 들려왔다.그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심지어 말조차 하지 못했다.“지원아, 왜 대답 안 해? 괜찮아?”진정우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괜찮아...”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차에서 불이 나거나 휘발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 봐.”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기 전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나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차 앞쪽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차가 또다시 흔들리더니 곧이어 세상이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으악!”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잡으려 했지만 다시 차가 뒤집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다시 멈췄을 때 나는 이미 온몸이 탈진한 상태였다.“지원아! 지원아!”멀리서 진정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 있었고 내 핸드폰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까 차가 뒤집힐 때 핸드폰은 어디론가 던져졌고 나는 간절히 외쳤다.“진정우! 차가 또 뒤집혔어!”“진정우, 제발 사람들 빨리 보내줘. 제발!”커가는 공포감에 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나는 이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을 볼 용기가 없었다. 만약 불이 나
차가 크게 충돌하며 뒤집히고 마침내 모든 게 멈췄다. 온 세상이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 마치 내 생명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한참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보려고 하자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단순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유형?”“나... 여기 있어.”그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렸지만 무척 힘이 없어 보였다.“좀 비켜봐.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그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몸을 빼내려 했다.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서 겨우 빼낼 수 있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찌그러진 차체와 피를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운전기사가 보였다.나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강유형! 강유형!”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를 돌아보니 얼굴 역시 피투성이였다.‘큰일이야. 둘 다 다쳤어. 어떡하면 좋아.’나는 내가 다쳤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강유형의 아래에 깔려 있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찌그러진 차체에 더 깊이 눌려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우리 모두 더 큰 위험에 처할 게 분명했다.“강유형,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몸을 웅크려 봐. 그래야 내가 빠져나올 수 있어.”내 말에 그는 힘겹게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웅크렸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침내 나는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내가 나올 수 있게 하느라 그는 막심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나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먼저... 경찰에 신고해.”“아니... 진정우한테 전화해.”나는 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혹시라도 경찰이 Q 클럽과 연루
감금실을 나올 때까지도 신지태의 절박한 외침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강유형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신지태의 감정 상태는 순간적으로 격앙되었다가 금세 우울해질 정도로 정말 불안정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말이 기억났다.“지원아,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난 결백해. 제발 나 좀 꺼내줘!”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강유형이 빠르게 다가왔다.그는 내 안색이 나빠진 걸 보자 재빨리 날 부축하며 말했다.“너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신지태가 무슨 얘기라도 했어?”신지태가 나한테 부탁한 걸 떠올리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신지태는 내가 이곳을 빨리 떠나길 바랐다. 아마도 Q 클럽의 감시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는 나마저 위험에 빠질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강유형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진정 좀 해.”하지만 나는 물을 받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지태 오빠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고 했어.”나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지태 오빠 말로는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고 우리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대.”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차 앞쪽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고 운전기사는 당황하며 욕을 내뱉었다.“젠장!”강유형은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신지태를 만난 지 10분도 안 돼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어떡해?”나는 공포가 밀려와 본능적으로 강유형의 팔을 붙잡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운전사에게 지시했다.“앞뒤 좌우로 네 대가 따라붙었어. 네가 알아서 어떻게든 따돌려.”운전기사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대표님, 뒷좌석 안전벨트 꼭 하세요.”강유형은 재빠르게 내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주었다.차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휘청거리자 강유형은
진정우는 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드디어 신지태를 만났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있었고 멋있던 헤어스타일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삭발된 상태였다.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신지태는 강유형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며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지태 오빠.”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늘 그랬듯이 그는 내 앞에서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치 그의 세상은 언제나 맑은 햇살로 가득한 듯했다.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침묵하게 했다.“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아니면 너무 못생겨져서 날 못 알아보겠어?”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건 전부 연기였을 것이다. 나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아니야. 오빠는 언제나 멋져.”나는 그의 말을 받아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위로하지 않아도 돼.”“우리는 오빠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다 알아. 강유형과 진정우도 오빠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어. 그러니까 오빠는 꼭 침착하게 기다려야 해. 분명 잘 해결될 거야.”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며 준비한 질문으로 대화를 유도했고 신지태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니 우리의 말이 의외였던 것 같았다.“누가 오빠를 찾아왔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디크랑 왜 다투게 됐는지. 최대한 자세히 말해줘. 혹시 다른 중요한 일도 있었다면 모두 얘기해줘.”내가 간절히 말하자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내 일은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괜히 너희까지 휘말리게 될 수도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포기와 체념이 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