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유형과의 관계를 깔끔하게 해결하고 싶었는데 진정우가 중간에서 큰 역할을 해줬으면 했다.고준석과의 통화를 마친 나는 계속해서 집 안을 정리했다. 어제저녁 진정우가 덮었던 핑크색 이불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로 침대 위에 놓여있었다.나는 갑자기 진정우가 이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어 피식 웃고 말았다.생활은 매일 같이 어려움이 닥쳐오지만 이렇게 생각지 못한 웃음 포인트가 나타나기 마련이었다.고준석이 한 말로 마음이 복잡해져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고 담담하게 회사 해고통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집 안 구석구석을 다 정리하고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물까지 주었지만, 핸드폰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차를 끓여놓고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아래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궁금한 마음에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더니 가구센터 직원들이었다.그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얼마 안 지나 집주인 아줌마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아, 새로 이사 오신 분한테 새로운 가구를 준비해 주셨나 보네.’갑자기 어제저녁 나를 미행한 소개팅남이 생각나 이웃집에 집주인 아줌마가 말한 그 남자가 입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위험이 닥쳤을 때 문 두드려서 도움을 요청하면 모르는 체하지는 않을 것이다.다시 의자에 앉아 책 보면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자, 집주인 아줌마가 웃으면서 인사했다.“지원 씨, 미안해요.”집주인 아줌마가 임대 이야기가 잘 끝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길래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이때 나는 활짝 열린 이웃집 문을 통해 발견한 준비된 가구들을 보면서 물었다.“언제쯤 입주하시는 거예요?”“아마도 오늘일 거예요.”집주인 아줌마는 말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급하지 않다고 하더니 오늘 아침부터 전화 와서 입주하고 싶다지 뭐예요. 그러면서 가구 같은 걸 미리 준비해달라고 하더라고요.”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그렇게 급하대요?”
안리영과 한창 이야기 나누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주인 아줌마가 오늘 입주할 수도 있다더니, 지금 왔나 보네.’“리영아, 새로 오신 이웃분한테 인사해야 하나? 어제 같은 일이 벌어지면 도움을 청하기도 좋잖아.”내가 안리영한테 물었다.“이웃이 남자라면서. 이제 막 입주했는데 바로 문 두드리러 가면 변태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안리영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그런가?”안리영이 대답했다.“당연하지.”‘그래. 그러면 우연한 만남을 기대해 보지, 뭐. 이웃과 만날 확률은 그래도 많으니까.’하지만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앞으로 며칠동안 만나보지 못했고, 진정우 역시 다시는 오지 않았다.‘소개팅남이 다시 찾아와서 복수할까 봐 걱정되지도 않나?’나는 갑자기 진정우에 대한 호감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주말 저녁까지 해고통지 전화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도 내일은 정상적으로 입사하기로 했다.출근룩을 정리하고 있을 때, 이소희한테서 연락이 왔다.“언니, 왜 놀이동산 일을 하나도 관심하지 않는 거예요?”“신경 쓰지 않으려고요.”사실 신경 쓰지 않을수가 없었는데 진정우가 건넨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쪽지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나는 그제야 진정우를 많이 믿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때 이소희가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언니, 진 기사님 이제는 저희 야간근무 못하게 해요.”“네?”나는 의문이 가득했다.‘조명 테스트를 하려면 낮에 1차 테스트를 진행하고 저녁에 2차 테스트를 해야 하는데 야간근무를 안 하고 어떻게 한다는 거지?’“진 기사님께서 마지막에 한 번에 테스트하자고 하더라고요.”이소희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이러면 어떡해.’‘마지막 테스트 때 문제가 생겨서야 수습하다 보면 다른 테스트가 통과된 부분에도 영향이 미칠 텐데. 테스트하면서 진행하자고 했던 거, 나랑 같이 상의한 뒤에 결정 내린 일이었잖아. 왜 갑자기 바꾸는 거지?’나는 말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소희와
이어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이 아직 열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이때 문이 열리고, 회색 잠옷을 입고있는 진정우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새로 온 이웃이 정우 씨였다니. 요 며칠 날 보러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예 맞은편에 이사 온 거였네. 야간 근무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왜 이사 온 사실을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지? 수도관을 수리해 줄 때부터 맞은편에 이사 오기로 마음먹었던 거야.’나는 진정우를 보는 순간 깨닫는 것이 많았다.“들어오세요.”나한테 들켜버린 진정우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이웃집에 이사 온 것은 잘못한 일도 아니지만 나는 평온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그래서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진 기사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시죠?”“들어오시면 말씀드릴게요.”진정우가 안으로 들어오라면서 몸을 비켜주자, 나는 이를 꽉 깨문 채 안으로 들어갔다.나를 위해 이곳에 이사 온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를 가지고 논 듯한 느낌이 들어 화가 났다. 전에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안의 모습에 나는 들어가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원래 있었던 물건들은 온데간데없이 전체 거실에는 소파 하나만 놓여있었다.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곳은 마치 도둑맞은 집처럼 텅 비어있었다.“방 안에 있던 물건은요?”내가 본능적으로 묻자 진정우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언제 와보셨어요?”늘 내 물음에 똑바로 대답하지 않는 진정우의 모습에 나는 또 놀아났다는 생각에 힘껏 그를 째려보았다.진정우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방을 가리키더니 말했다.“다 저 방에 넣어뒀어요.”‘그런데 이 큰 거실에 필요한 물건이 소파뿐이라고? 사람 사는 곳이라면 TV랑 테이블 정도는 있어 줘야 하지 않나? 물컵도 놓을 수 있고 핸드폰도 올려놓을 수 있잖아. 너저분한 것이 싫은 사람이었다면 청평에 있는 우리 부모님 집에서는 왜 방을 정리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저희 둘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친구 사이도 될수 없을 것 같네요. 저는 다른 사람을 찾아볼게요.”우두커니 서 있던 진정우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면서 말했다.“어떤 사람을 찾고 싶은데요?”나는 본능적으로 후퇴했지만 내가 뒤로 물러날수록 진정우는 나한테 더욱 가까이했다.“다시 소개팅할 거예요? 아니면 아는 오빠나 친구를 찾을 거예요?”질투심이 가득한 말투였다.“정우 씨!”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손으로 막았다.“저 지원 씨한테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인데 지원 씨가 거절한 이상 치근덕거리지 않을 거예요.”‘응?’나는 당황하고 말았다.진정우는 차가운 표정과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저는 이제 아무 상관도 없는 이웃이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셔도 돼요.”나는 할 말을 잃었다.‘내 생각이 불순하다는 건가?’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진정우가 먼저 말했다.“아까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뻘쭘해하고 있던 나는 마침 할 말이 생겼다.“지금이 몇 시인데 벌써 퇴근하신 거예요? 놀이동산 쪽에 있는 일은 이미 다 끝냈어요?”“아니요.”진정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나는 장난스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진 기사님, 일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퇴근한 걸 보면 이 프로젝트를 사전에 끝낼 수 있는 거 맞아요?”“저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에요.”진정우의 확고한 말투에 내 입도 따라서 움찔거렸다.“그런데 이제 와서 테스트방식을 바꿨다가 마지막 테스트 때 문제가 생기면 시간 낭비하는 거잖아요.”“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제가 전적으로 책임질 거예요.”진정우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나는 그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몰랐지만 메인 테스터로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2초간 망설이다 한마디 했다.“정우 씨, 비록 제가 퇴사해서 이제는
새벽 5시.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새로운 일자리에 임하려고 아침부터 일어나 요가까지 했다.6시. 샤워를 마치고 아침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진정우한테서 온 문자였다.[아침밥 준비해 뒀어요. 키는 지원 씨 집 문손잡이에 있어요.]나는 이 문자를 보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문을 열어보니 정말 키가 걸려 있었고, 진정우의 집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아침밥이 준비되어 있었다.어제저녁, 나는 음식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결국 그를 도와 먹어주기로 했다.‘그런데 오늘 이 아침밥은 어떻게 된 일이지? 무료로 도우미 아줌마라도 하겠다는 건가?’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침밥을 준비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그래도 문자로 물어보기로 했다.[무슨 뜻이에요? 알바라도 하고 싶어요?][네. 지원 씨가 알아서 팁 같은 거 주면 좋죠.]‘말을 잘 받아치는데?’이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있는 나는 잠깐 고민했다.[정우 씨, 너무 선 넘는 거 아니에요? 저희는 가짜 연애를 하고 있다고요.][연애는 가짜라고 해도 연기 기간에 지원 씨 건강은 제가 책임져야죠. 아니면 또 시간 내서 지원 씨를 보살펴야 하잖아요.]그의 보살핌 따위 필요 없는 나는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괜히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연기만 하면 되니까 제가 죽든 살든 정우 씨랑 상관없어요. 다음부터 저를 위해 요리를 안 하셔도 돼요. 해도 어차피 안 먹을 거예요.]내가 너무 냉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보살핌에 익숙해지지 말아야 했고, 또 가능성 없는 일에 목매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아침밥은 나름대로 맛이 좋았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어서 그런지 출근길에 힘이 났다.회사로 가는 길에 아직 해고통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만나서 직접 말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생각 때문에 기분이 확 나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회사에 가보기로 했다.“윤 부장님, 환영해요.”제일 먼저 허진호가 눈에 들어왔고, 그가 반갑게
하지만 나는 실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KS 그룹에서도 안방마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면서 가만히 놀고먹지는 않았다.일주일 동안 나는 모든 고객의 자료와 회사자료를 한번 다 훑어보았고, 또 각 마케팅 부서 직원들의 2년간 업무 상황과 반년 동안의 KPI도 알아보았다.나는 다시 업무를 분배했고, 보너스와 벌칙 제도까지 내놓았다.다들 처음에는 의욕이 활활 타오르다 마지막에는 의욕을 잃는다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하는 목적은 열심히 하는 만큼 얻는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회사에 헌신하는 것도 강유형의 압력도 무시하고 나를 채용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함이었다.내가 한창 자신감 넘쳐있을 때, 직원을 통해 현재 담담하고 있는 고객들이 전부 계약해지를 제출했다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이미 얘기가 끝난 고객들도 갖은 이유를 대면서까지 계약을 미루고 있다고 했다.순간 나는 강유형의 짓이라고 생각했다.회사에 압력을 주지 못해 고객을 뺏는 비겁한 방식으로 회사에서 나를 포기하기를 바라는 거였다.이번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허진호한테 보고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신경 쓰지 마세요. 그분이 뺏어갈 수 있는 고객이라면 애초에 저희 고객이 아닌 거예요. 또다시 찾으면 되죠.”나는 80%의 고객이 강유형 쪽으로 유실되었다는 보고서까지 보여주었다.“괜찮아요. 윤 부장님만 빼앗아 가지 않으면 잃어버린 고객만큼 윤 부장님께서 또다시 확보할 수 있다고 봐요.”허진호는 유난히 나한테 믿음이 강했다.사실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부대표님, 대표님께 보고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나는 설명을 늘려놓기 시작했다.“다른 뜻은 없지만, 고객을 이렇게 많이 유실했는데 보고드리지 않았다가 대표님께서 갑자기 이 일을 따지기 시작하면 부대표님께서 난처해하실까 봐요.”피식 웃기만 하는 그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메모를 확인했더니 강두식의 생일이 3날밖에 남지 않았다.생일날에 이런 말을 하기에는 민폐가 되는 것 않아 미리 생일을 축하해 줄 겸 찾아뵙기로 했다. 이러면 생일날에 또 만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강진혁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놀이동산을 떠나서부터 한번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피부가 너무 까매져서 날 못 알아보는 거야?’강진혁이 먼저 자신을 비웃는 모습에 나는 갑자기 진정우가 생각나 피식 웃고 말았다.“아줌마가 보시면 마음 아파하시겠어요.”“아니. 엄마가 그러는 데 더 남성적으로 변했다고 했어.”강진혁은 하는 말마다 나를 웃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더 남성적으로 변하긴 했네요.”강진혁이 자기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비록 강진혁이 일부러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이런 말을 했지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랐다.나는 강두식을 만날 일이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아줌마 아저씨는 잘 지내세요?”“응. 다들 너 보고 싶어 하셔.”이 말에 나는 마음이 씁쓸해지는 느낌이었다.예전에는 퇴근해서 강씨 가문으로 가면 매일 볼 수 있었지만 나와서 독립한 뒤로 한번도 뵈러 간 적 없었다.“오늘 뵈러 가려고요.”나는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아저씨한테 할 말도 있고요.’강진혁의 눈빛만 봐도 무엇을 궁금해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굳이 속이려고도 하지 않았다.“유형이가 요즘 미친 듯이 제가 입사한 회사를 건드리려고 발악하고 있거든요. 심지어 고객들마저도 다 빼앗아 가는 추세예요.”강진혁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다음 순간 그가 이렇게 말했다.“이미 아버지한테 말씀드렸어. 그리고 네가 퇴사하는 것도 극구 반대하셨어.”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강진혁이 계속해서 말했다.“사실 오늘 아버지 부탁 때문에 너 보러 온 거야. 지원아... 회사로 돌아와.”나는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임무를 완수하지 못하
그동안 강씨 가문에서 지내면서 나는 강두식이라는 사람과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공과 사가 확실한 그였기 때문에 강유형이 무슨 실수를 범하면 매번 혼내고 했다.하지만 나는 강유형이 여전히 미친 듯이 고객을 뺏는 행위가 떠올라 감탄하고 말았다.“아저씨 경고도 먹히지 않았나 봐요.”강진혁도 이 말에 숨긴 뜻을 알아채고 물었다.“유형이가 아직도 멈추지 않았어?”“아니요. 제가 다니는 회사를 아주 짓밟아 버릴 생각인가 봐요.”나는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화가 나서가 아니라 회사 또는 고객에 영향이 갈까 봐서였다.“너무 심했네.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야겠어.”강진혁도 화가 난 모양이다.“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낫겠어요. 마침 생신 선물을 준비했는데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강진혁은 눈이 반짝거리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그래. 오늘 가려고? 마침 같이 가면 되겠네.”기대에 찬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오늘이긴 한데 데리고 갈 사람이 있어요.”“누군데?”강진혁은 여전히 기대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친구야?”“네. 남자친구요.”내가 한 말에 강진혁은 표정이 굳어버리고 말았다.멘탈이 바사삭 털리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김희연이 말해줬기 때문에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처를 줄 바에 희망 고문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한참 지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지원아... 남자친구가 누군데?”“진정우 씨요!”강진혁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지원아...”“오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제 행복을 가지고 장난칠 사람이 아니에요.”나는 마음에 찔리는 말을 내뱉었다.강진혁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난 네가 이렇게 빨리 유형이와의 감정을 정리했을 거라고 믿지 않아.”나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알고 있으면서 왜 나를 좋아하는 거지? 아, 출국할 때부터 나를 좋아한 건가?’몇 년 동안 외국에 있은 것도 나
안리영은 깊이 가라앉은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원의 외삼촌과 외숙모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자책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함께 살아갈 수는 없었어도 죽음은 함께하겠다는 그들의 선택이 그녀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사랑은 함께 죽는 서사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랑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가 꿈꾸는 사랑은 서로를 붙잡고 끝까지 함께 늙어가는 것, 그뿐이었다.예전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사랑은 단순한 줄만 알았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면 그걸로 족한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서로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랑, 그걸 얻는 게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늙을 때까지 함께하자는 건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었다.구안석이 돌아온 건 깊은 밤이었다. 안리영은 잠들지 않았고 테라스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기다리지 말랬잖아.”구안석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지친 숨을 내쉬며 작은 위로를 찾는 듯했다.“많이 피곤해?”안리영이 조용히 물었다.그는 그렇다는 뜻으로 낮게 대답하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는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리영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이러다 병나겠어. 선배, 이제 좀 자신을 덜 힘들게 해줄 생각은 없어?”“아직은 안 돼. 2년만 더 지나면 그땐 좀 괜찮아질 거야.”구안석의 말에 안리영은 웃었다.쓴웃음이었다.“정말 대단하다, 선배. 선배는 정말이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그녀의 말엔 약간의 농담도 섞여 있었다.구안석은 말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정말 말 한마디조차 하기 싫은 듯했다.안리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참이나 망설였던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그가 이런 모습인 걸 보니 결국 다시 삼켜버렸다.“너무 피곤해 보이네. 얼른 자자.”“응.”그는 대답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지쳐서 도무지 몸
“유정철 씨께서 신희선 씨께 먼저 약을 먹이시고 그다음 본인이 복용하셨어요. 이게 그분들이 드신 약입니다.”의사는 약병을 내게 건넸다.약병에 적힌 글자를 바라보자 목이 턱 막히고 쓴맛이 올라왔다.“그분들 정말 너무 고통스러웠던 거예요.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신 거겠죠.”사실 예전부터 외삼촌은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땐 단지 외숙모가 세상을 떠난 뒤 함께 하려는 결심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숙모가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걸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먼저 보내드렸고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이건 유정철 씨가 남기신 유서입니다. 지원 씨께 드리라고 하셨어요.”의사가 봉투 하나를 내게 건넸다.나는 그걸 받아 들고 외삼촌이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을 읽어 내려갔다.‘얘야, 미안하구나. 외삼촌이 더는 너를 돌봐줄 수 없게 됐구나. 이런 방식으로 끝을 맺기로 한 건 사실 희연이가 떠났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결심했던 일이란다. 네 외숙모와도 충분히 상의한 일이야.얘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외삼촌을 원망하지도 말길 바란다. 이젠 정말로 세상에 미련도 남지 않았단다. 그래서 네 외숙모의 손을 잡고 희연이를 만나러 간다.얘야, 마지막 순간까지 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기뻤단다. 다만 외삼촌이 너무 이기적이라 끝내는 내 친딸을 잊지 못하겠더구나. 그래서… 그 아이를 따라가기로 했단다.얘야, 우리가 떠난 뒤엔 병원이나 그 누구도 탓하지 마라. 나와 외숙모는 화장해서 희연이 곁에 묻어다오. 우리 셋, 한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게 말이다.지원아, 우리에겐 네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외숙모와 희연이 그리고 내가 남긴 모든 재산은 너에게 물려주려 한다.네가 이런 돈에 욕심이 없는 거 외삼촌은 안다. 그러니 필요 없다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써다오.얘야, 다음 생이 있다면 우리 다시 만나 평안하고 건강하게, 행복한 삶을 살자꾸나.’편지를 다 읽으니 눈물이 뚝뚝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눈물이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외숙모의 상태는 대략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떠났다는 말을 들어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외삼촌은 멀쩡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우리 외삼촌... 어떻게 된 거죠?”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직접 오셔서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간호사는 더 설명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나는 한동안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니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날이 떠올랐다.그날은 햇살이 유난히 밝았고 영어 수업 시간이었다.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와 나를 불러냈고 복도 끝에서 강두식 삼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품에 안고 한마디를 건넸다.“이제 우리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어렸던 나는 그 말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삼촌, 무슨 일 있었어요?”눈가에 눈물이 고인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이 돌아가셨어.”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한 상태였던 건지, 아니면 정말 몰랐던 건지, 바보처럼 되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강두식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거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이란다.”“정말 다시는 못 보는 거예요?”그땐 너무 어렸고 아마도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삼촌은 다시 나를 껴안았고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한순간에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는다는 건 더없이 참혹한 일이었다. 그런 비극을 내 인생에서 두 번이나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하늘은 정말이지 나를 참으로 특별히 사랑해 주시는 모양이다.비록 외삼촌과 외숙모와는 큰 정도, 함께 밥 한 끼 제대로 먹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가족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병원에 도착하니 외삼촌과 외숙모는 이미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윤지원 씨,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후에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드릴게요.”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이끌었다.나는 도저
용준호가 바로 좋아요를 눌렀다. 거기에 덧붙여 댓글도 남겼다.‘어수선함도 하나의 아름다움이지.’강진혁 쪽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못 본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나는 용준호의 댓글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경찰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어요.’용준호가 다시 답글을 달았다.‘이 정도 사소한 일은 내가 해결해 주지. 경찰 아저씨까지 귀찮게 할 필요가 있나?’‘오빠가 해결하면 더 엉망이 될까 봐 그래요.’‘이 오빠 못 믿어?’‘네.’‘아침부터 상처받았어.’‘파스 붙여 드릴 게요.’‘속을 다스려야지.’그의 마지막 답글을 보고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강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무슨 일이야?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어?”갓 잠에서 깬 듯한 나른한 목소리였다.“네, 근데 잡았어요. 누군가가 시켜서 왔대요.”나는 그에게 힌트를 던졌다.사실 내게 사람을 보낼 만한 사람은 강진혁 아니면 용준호였다. 원하는 걸 찾지 못하니 나를 일부러 귀찮게 해서 불안하게 만들고 나 스스로 허점을 드러내길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그래야 그들이 실마리를 잡을 테니 말이다.“그래? 그럼 제대로 심문해야겠네. 경찰에 넘겼어?”강진혁이 물었다.나는 가볍게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덧붙였다.“경찰이 저런 녀석들한테서 뭘 제대로 캐낼 수 있을까.”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그 말 경찰 아저씨들이 들으면 기분 상하겠는데요.”강진혁이 가볍게 기침을 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원하는 걸 얻기 어렵다는 뜻이야.”“그래도 원칙대로 가는 게 낫죠. 난 경찰 아저씨를 믿어요.”내 말에 그는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오빠 생각엔 누가 시킨 것 같아요?”한참을 돌려 말하다가 결국 본론을 꺼냈다.강진혁도 바로 이해했다.“설마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쓸데없이 돌려 말할 필요 없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오빠 아니면 준호 오빠잖아요.”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나는 야구 배트를 그에게 겨눈 채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낯선 남자였다.“누구 지시로 온 거야? 내 집엔 어떻게 들어왔고?”나는 곧장 다그쳤다.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태도였다. 나도 긴말 없이 바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경찰서로 가서 말해.”“신고하지 마세요!”남자는 겁에 질렸다.“그냥 뭐 좀 훔치려고 했을 뿐이에요. 지금 다 돌려드릴 테니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면서 그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나는 혹시라도 무기를 꺼낼까 싶어 차갑게 경고했다.“손 함부로 놀리지 마.”내 말이 끝나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의 손과 함께 나온 것은 내 액세서리들이었다.“이것뿐이에요. 다 여기 있습니다.”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단순한 좀도둑인가?나는 믿지 않았다. 이건 그냥 지나가다 슬쩍한 게 분명했다.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이 나는 곧장 신고 버튼을 눌렀다. 남자는 허겁지겁 내 쪽을 향해 애원했다.“누님, 제발 신고하지 마세요! 경찰한테 잡히면 제 인생 끝장이에요.”그렇게 될 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떼고 단호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다 말하면 한 번 봐줄 수도 있어.”남자는 다시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내가 한 마디 더 던지자 움찔했다.“고개를 젓는 순간 바로 신고할 거야.”내 휴대폰 화면에는 선명하게 112가 떠 있었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남자는 몇 초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어떤 형님이 시켰어요.”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덧붙였다.“누군지는 몰라요. 그냥 돈을 좀 줬고 일이 끝나면 추가로 더 준다고 했어요.”“대체 무슨 일을 하라고 했는데? 내 집에서 뭘 찾으라고 했지?”나는 되물었다.“그런 건 말 안 했어요. 그냥 들어가서 이것저것 뒤집어 놓으라고 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내 집은 지금
나는 기껏해야 그녀의 새언니일 뿐인데 지금은 그녀를 보면서 엄마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아마 내 안에 숨어 있던 모성애가 폭발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아이를 가져볼 때가 된 걸지도 모른다.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요즘 들어 자꾸만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곤 했다.“아니야,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진소영이 말하는 고맙다가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내게 화를 내는 일은 드문데 그런 그녀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이 작은 아이는 참으로 감정이 뚜렷한 편이었다. 나는 그녀의 감사를 받아들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오빠는 또 어디 갔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건 아니지?”진소영이 갑자기 진정우에 관해 물었다.나는 솔직히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할까 봐 조금 걱정했었다. 그녀는 한 번 의문을 품으면 끝까지 답을 찾고야 마는 집요한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진정우에 관한 건 내가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일이 많았다.“별일 없어.”나는 진정우가 그녀에게 알리지 않길 원했던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둘이서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마. 요즘 동네에 낯선 사람들이 몇 번이나 다녀갔어. 내가 살던 곳에서 뭔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야.”진소영의 말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사람들이 그곳까지 찾아갔다고? 그렇다면 혹시 무덤을 파헤치거나 유골을 가져가려는 걸까?’“이제 솔직하게 말해 줄 거야?”진소영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예전보다 날카로워졌고 성숙해졌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진정우의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다 오히려 더 큰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침묵 속에서 진소영이 말했다.“언니, 오빠가 말하지 않는 건 내가 겁먹을까 봐, 혹은 나까지 말려들까 봐 그러는 거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나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그래야 만약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더라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역시나 그녀는 냉철하고 이성적
나와 그녀의 교집합은 강유형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남자는 나와 조나연, 그 누구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는 법이다.“어떻게, 요즘 그 사람 못 봤어?”나는 옅은 미소를 띠고 반문했다.조나연은 솔직했다.“못 봤어.”“왜, 보고 싶어졌어?”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조금.”조나연도 담백하게 인정했다.“보고 싶으면 찾아가.”나는 그녀를 부추겼다.그러자 조나연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올랐다.“찾아갈 수 있었다면 왜 굳이 그쪽한테 묻겠어?”이 여자는 나와 대화할 때마다 꼭 불꽃이 튀는 듯했다. 언제나 날카롭고 거칠게 반응했다.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나는 더 차분해졌다.“예전엔 나연 씨를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변했다니... 참, 남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지원 씨, 그렇게 비꼬지 마.”조나연이 불만스럽게 말했다.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강유형이 이런 그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나연 씨, 후회한 적 있어?”나는 문가에 기대어 물었다.“없어.”그녀는 단호했다. 망설임도 없었다.그러나 그럴수록 그녀가 후회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부정하는 건 누군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차릴까 봐 두려운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니 말이다.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만약 나연 씨가 그렇게 부와 명예만 좇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어. 돈이 많든 적든, 부유하든 평범하든, 결국 가장 소중한 건 담백하고 평온한 삶이란 걸.”나는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려 이런 말을 뱉은 게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요즘 나는 걷는 게 가장 좋아. 길을 걷다가 평범한 부부가 자전거 한 대를 함께 타거나 장을 본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나란히 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조나연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진소영의 월급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까지 함께 내밀며 말했다.“이것도 안 받을 거면 아예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이건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그때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가 일부러 놀란 척을 했다.“어, 나연 씨 방에 사람이 있었네?”진소영은 나를 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물론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철저히 선을 그었다.조나연은 나를 보곤 순간 살짝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바로 감정을 감췄다. 그러곤 진소영에게 말했다.“이건 다 네가 받아야 할 몫이니 가져가.”진소영은 손을 내밀어 봉투만 들고 갔다. 조나연이 준비한 상자는 끝내 손에 들지 않았다.역시 진정우의 손에 자란 아이다웠다. 기개가 남달랐다.“고맙습니다.”진소영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돌아섰다.끝까지 나에게는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아직도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조나연에게 우리 관계를 들키기 싫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나중에 또 아르바이트하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돼.”조나연은 내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나연 씨가 여자라서 다행이지. 남자였으면 진짜 관심 있는 줄 알았겠어.”진소영이 문을 나서자 나는 곧바로 조나연을 놀리듯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나는 그녀가 진소영에게 주려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이거, 실례라고 생각 안 해?”나를 사장으로 대하는 태도 따위는 없었다.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가 들어 있었다. 가격이 꽤 나가 보였다.“직원 잡으려고 돈을 이렇게 쓰는 거 보니, 나연 씨도 진짜 통이 크네.”“하긴 순진한 양 없이 어찌 늑대를 잡겠어.”조나연은 숨김도 없었다.나는 상자를 딱 소리 나게 닫았다.“그 애한테 부리는 수작은 이쯤에서 접어.”조나연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봤다. 뭔가 설명을 바라듯 말이다.나는 그녀가 진소영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따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 애, 진정우의 동생이야.”조나연은 놀란 듯 살
이런 깊은 밤, 바에서 진소영을 마주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요즘 나도 일이 너무 많아 그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진소영은 먹색이 감도는 짙은 녹색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디자인도 아니었고 그저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바의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나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대체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건지 지켜보고 싶었다.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더니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방향을 꺾어 방으로 들어갔다.그곳은 조나연의 사무실이었다.‘조나연이 그녀를 찾은 건가?’순간 가슴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방문 앞에 섰다. 마침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대화 내용도 들을 수 있었다.“조 매니저님, 저 다음 주부터 개강이라 여기 더 이상 못 나와요. 이번 공연비 정산 좀 부탁드려요.”진소영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그녀가 여기서 돈을 벌고 있었다니, 게다가 말투를 보니 꽤 오래 이 일을 해온 것 같았다.“서울대로 가는 거야?”조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울대요.”“좋은 학교지. 우리 남편도 그 학교 나왔어.”그녀는 태연하게 임석진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어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중에 그의 영혼이 그녀를 찾아와 복수를 해도 모자랄 텐데 말이다.“아, 그렇군요.”진소영은 짧게 대꾸했을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나연도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웠는지 화제를 돌렸다.“어떤 전공을 선택했어?”“의학이요.”진소영은 묻는 말에 곧바로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조나연은 가느다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이렇게 예쁜 애가 왜 하필 의대를 가려는 거야?”“그냥 좋아서요.”진소영은 의대를 선택한 진짜 이유를 굳이 밝히지 않았다.“그렇지만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