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차설아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우처럼 신비롭고 요염한 웃음을 날리며 종잡을 수 없게 했다.그녀는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을 뻗어 남자의 완벽한 뺨을 어루만졌다. 약간 까칠한 수염과 얼굴의 냉기는 너무나 익숙했다. 옛날의 금슬이 아직도 눈에 선하지만 두 사람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당신이 무슨 목적으로 왔든 당장 나가. 여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성도윤은 애써 냉혹한 모습을 보이며 차설아가 떠나게 하려 했다.그는 차설아가 갑작스레 나타나서 그가 힘들게 쌓아 온 노력을 깨뜨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마지막 순간에 차설아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만약 마음이 약해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나를 급히 쫓아내는 건 당신이 찔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차설아는 정곡을 찔렀다.“...”성도윤은 차설아를 외면한 채 그의 손을 놓으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려 했다.성도윤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보기엔 새침한 뇌섹남이지만 실제로는 사랑밖에 모르는 단세포 동물이었다. 차설아와 가까이할수록 이성은 더욱 흐려졌다.하필이면 차설아는 청개구리처럼 말을 듣지 않았고 거리를 두려 하면 오히려 더 껴안으며 달라붙었다. 어깨를 껴안고 뜨거운 입술을 얼굴에 대며 유혹했다. “오늘 밤 당신을 되찾기 위해 올 거야. 나 믿지?”“그만 좀 해!”성도윤은 차설아가 이렇게 주동적일 줄 생각지도 못했으며 내심 기뻐했으나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갑게 대했다.“당신은 나와 헤어질 준비를 다 했다고 하지 않았어? 난 그저 당신의 백업일 뿐 내가 없어도 여전히 눈부실 거라고 했지. 헤어질 날이 되니 도리어 당신이 손을 떼지 못하네.”“당신도 헤어지는 날까지 라고 했어. 하지만 우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잖아.”차설아는 고양이처럼 자신의 머리를 성도윤의 어깨에 기대며 애교를 부렸다. “나는 당신이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 분명히 고민 탓에 별수 없었을 거야. 여기에 다른 사람이 없고 오직 나와 당신뿐이야. 내가 기회를
테라스의 다른 구석에서 성진이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말쑥한 차림새에 테 없는 안경까지 쓰고는 웃는 듯 마는 듯 걸어 나왔다.“자기야, 이젠 여한이 없을 테니 슬슬 준비 시작해도 돼.”성진은 손목에 있는 비싼 시계를 가리키며 차설아를 귀띔해주었다.“맞아, 쇼 타임 시작이야!”차설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나서 씩씩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의 초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성 대표, 자업자득이야.”차설아는 성도윤의 어깨를 툭 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또 성진에게 다가가 그의 팔짱을 끼고는 연회장으로 갔다.“...”성도윤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가볍게 웃었다.차설아 답게 복수를 하든 다른 무엇을 원하든 더는 그를 위해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는 만족할 거다.차설아와 성진이 연회장에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의 눈총을 받았다. 하나는 권력 찬탈을 하려 했으나 실패한 2인자.하나는 가문이 몰락하고 남자에게 버림받은 무능한 여자.이 둘은 이런 자리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잘못이었고 무시당했다.뭇사람들의 받들림속에 있던 서은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자 마음이 다소 불편해졌다.화려한 회전계단을 바라보니 차설아와 성진이 그곳에 있었다.서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설아 앞으로 다가가 도도하게 물었다.“차설아 씨, 성 부사장의 파트너 신분으로 이번 회의에 참여했어요?”서은아는 차설아 앞으로 다가가 일부러 언성을 높여 비아냥거렸다.“오늘 이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업계에 일정한 공헌을 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걸 잘 모르나 봐요. 성 부사장도 자격이 없지만, 당신처럼 멋만 부리는 여자는 더더욱 자격이 없어요.”“이런 규칙도 있었나요? 어머 미안, 난 전혀 몰랐어요!”성진은 예전처럼 어리바리하게 보이기 위해 히죽히죽 웃었다.“그리고 울 허니가 나를 따라 이번 회의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허니를 따라 회의에 들러리로 온 거야. 허니는 하이 테크 협회 회장이거든. 나는 허니를 따라서 식견을 넓
하이 테크 협회 현임 회장 단기혁은 곧게 선 양복을 입고 안경을 밀며 차분하게 말했다.“여러분, 급해서 하지 마세요. 제가 차설아 씨에게 초청장을 보낸 이유는 그의 특별한 신분, 그리고 하이 테크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차설아 씨는 누구보다도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어요. 업계의 좋은 발전을 위해 차분한 교류를 바래요.”단기혁의 말에 나이가 좀 많은 몇몇 어른 들은 몹시 불쾌해하였다.“단기혁,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20대 계집애의 공로와 지위가 우리를 초과할 수 있다니! 이 자식 미인계에 속았나?”“단기혁, 우리는 당신을 하이 테크 협회 회장으로 뽑을 수 있지만 쫓아낼 수도 있어.”단기혁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원탁회의가 시작되면 나의 깊은 뜻을 알게 될 거에요. 만약 그때가 되어도 차설아 씨가 이번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투표되면 난 기꺼이 해임하겠어요.”단기혁 회장이 패기 있게 말하자 차설아를 더는 난처하게 하지 않고 각자 흩어지고 말았다.서은아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술을 한잔 가득 따른 후 능청스럽게 차설아에게 건넸다.“차설아 씨, 내 판단이 맞는다면 당신은 도윤 씨를 위해 온 거죠? 날짜도 참 잘 골랐어요. 오늘 이 연회를 빌어 나와 도윤 씨는 사랑 발표를 하기로 했어요. 진심으로 축복해줄 거죠?”차설아는 술잔을 건네받은 다음 쿨하게 건배했다.“나의 축복이 당신의 마음을 안정시킨다면 기꺼이 해드리죠. 하지만 당신은 도윤 씨를 지킬 수 없어요.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 나는 이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자랑하지만, 나중에 차이게 되면 낭패가 따로 없어요.”이 말을 들은 서은아는 명문가 아가씨의 체면을 돌보지도 못하고 포효했다.“우리를 저주하지 마세요! 나와 도윤 씨는 항상 함께 할 거에요. 4년 전에도, 4년 후에도 버림받은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죠!”그러면서 차설아의 얼굴에 와인을 뿌렸다.성진은 재빨리 차설아를 품에 감싸며 서은아에게 경고했다.“서은아 씨, 과분했어요. 계
차설아와 성진은 재력도 없고 실력도 없어 미움을 사더라도 그만이다.성진은 한 경비원의 멱살을 잡고는 표독스럽게 말했다.“죽을래? 우리를 내쫓다니!”차설아는 손을 털며 대수롭지 않게 성진을 말렸다.“아르바이트생을 괴롭히지 마. 그들이 우리보고 가라고 하면 그냥 가면 돼.”“그럼 되겠어? 난 결코 고분고분 물러설 사람이 아니야! 우린 초청장을 가지고 당당하게 들어왔어!”성진은 단단히 화가 났다.차설아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괜찮아, 이제 우리한테 와서 애원할 거야.”서은아는 코웃음을 했다.“주제를 알아야지! 이번 회의에서 탑 전문가 외에 다 대체할 수 있어.”차설아는 성진을 끌고 연회장소를 나갔다.그는 주차장의 고급 차에 앉아 유유히 온라인 게임을 했다.성진은 손으로 게임 화면을 막으며 말했다.“이렇게 힘들게 구한 초청장인데 한 대 때리지도 못하고 나오다니! 분해!”“한창 이기고 있어, 방해하지 마.”차설아는 휴대폰을 빼앗으며 거침없이 게임을 했다.“급해서 하지 마! 우리한테 돌아와 달라고 부탁할 거야.”“원탁회의가 10분 후면 시작이야! KCL의 현임 사장도 참석한다고 했어.”성진은 조바심이 났다.“이 사장은 혼자 힘으로 G6 칩카드를 개발한 뒤 기술 인입 방식으로 2년 만에 LCL의 최대 주주가 되었어. 결국, KCL 제치에 성공했던 Y 씨를 이기고는 이젠 1인자가 되었지.”“그래서?”채설아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우리는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해. KCL과 천신 그룹의 협력기회를 마련하여 성대 그룹에 치명 타격을 줘야 해. 그래야 성도윤을 이길 수 있어!”성진은 말을 할수록 흥분해 했다.“예전엔 성도윤은 KCL의 Y 씨와의 인연을 이용하여 KCL과 협력을 맺어왔어. KCL의 핵심 기술을 사용하여 하이 테크의 선두주자가 되었어. 하지만 KCL에서 사장을 바꾸었고 이번엔 글로벌 협력 파트너를 물색한다고 했어. 즉 KCL과 협력하는 회사가 향후 하이 테크 분야의 선두주자야.”“일리가 있어!”차설아는 가볍게 웃었다.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 중 가장 중요한 회의가 곧 시작된다. 성도윤을 비롯한 회의 의장, 업계 거물 등 8명의 주요 인사가 차례로 회의 테이블에 앉았다.나머지 인원은 설사 그 사람이 이번 회의의 최대 후원자인 서은아라도 외부 대회의실에서만 방청할 수 있고 참여할 자격이 없었다.약속 시간에 맞춰 회의가 시작됐어야 했고 다들 실시간 번역기를 끼고 가슴 설레며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다."파이브, 포, 스리, 투......”하지만 라운드 테이블의 가장 상징적인 시작 버튼은 카운트 다운이 끝났는데도 눌리지 않았다.이 시작 버튼은 8명의 대표가 동시에 테이블 중앙에 있는 지구를 누르면 작동이 되는 것인데 지구는 총 8개의 모듈로 나뉘고 이는 전자 기술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 세계 8개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 곳도 빠지면 작동이 되지 않는다."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겨서 잠시는 회의를 제시간에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하이 테크 협회장이자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의 사회자인 단혁이 초조한 어조로 사람들에게 알렸다."아, 무슨 일이지?”회의 바깥쪽 회의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귓속말로 이론이 분분했다.오직 회의에 참여한 여덟 명의 회원만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곱 명의 멤버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보시다시피 회의에 참여해야 할 8명의 멤버 중 현재 7명만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또 한 명의 중요한 멤버가 있는데 그분이 대표하는 부문은 성대 그룹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부문으로, 그분이 오시지 않아 불을 켤 수 없어 회의 전체가 가동되지 못하고 있습니다.”단혁은 미안한 표정으로 성도윤 옆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늦은 이 멤버는 바로 KCL 그룹의 신임 대표님이십니다. 그분이 전자 과학 기술 분야에서의 공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나죠. KCL 그룹은 매우 강력한 연구 개발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고 업계를 끊임없이 최고봉으로 이끌고 있죠...”"KCL의 신임 회
그 옆에는 동부 인공지능(AI) 개발을 총괄하는 오가미 히가시노무라 이치가 앉아 있었다.이 사람은 전자공학 분야에서 성도윤과 KCL 신임 대표에 버금가는 지위에 있었다.히가시노무라는 야망이 매우 커서 줄곧 대외적으로 확장하고 싶어 했고 그의 연구개발 방향에는 인공지능 외에 전자 칩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시종 기술의 돌파를 할 수 없었기에 이에 상응하는 과학 기술 제품을 생산할 수 없었고 업계 3위에 머물렀다.그는 연속 10년째 성대 그룹과 KCL의 협력을 깨뜨리려 시도했고 성대 그룹을 대신해 KCL과 손을 잡으려 했다.그의 산하의 히가시노 그룹이 KCL과 협력할 수 있다면 히가시노 그룹이 성대 그룹을 앞지르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성 대표님, 표정이 담담한 걸 보니 KCL 그룹과 이미 손을 잡았나 보군요.”히가시노무라는 웃으며 성도윤과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등 가식적인 모습을 보였다.사실 그는 KCL 신임 대표와 성도윤이 어떤 인연이 있는지 모른 채 떠본 것일 뿐이다."아직 KCL 신임 대표와는 잘 모르는 사이예요.”성도윤은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잘 모른다고요?”히가시노무라는 성도윤의 말을 듣자마자 눈이 번쩍번쩍 빛났는데 아예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렇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거죠, KCL은 성대 그룹과 협력할 수도 있고 히가시노 그룹과 협력할 수도 있겠네요. 심지어 오늘 참석한 모든 그룹과 협력할 수도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그럼요. 여러분이 협력하고 싶고 성의를 보이기만 한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성도윤은 사실대로 말했다.과거 그와 성지훈의 관계로 인해 성대 그룹은 KCL의 독점 협력그룹이었지만 지금은 성지훈이 신임 회장에 의해 교체된 이상 KCL과의 합작이 성사될 수 있을지 성도윤도 자신이 없었다.전에도 KCL의 신임 회장이 누구인지 성지훈에게 알아봤지만 웃긴 것은 성지훈도 모른다는 거다.그래서 오늘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성도윤도 이 미스터리한 인물에
생방송 카메라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서은아에게 집중되었다."네? 저한테 달렸다고요?”서은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서가네는 비록 이번 정상회의의 최대 후원자였지만 솔직히 전자업계와 잘 어울리지 않았고 서은아가 정상회의에서의 존재감도 돈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 그녀도 큰 성취감은 없었다.정상회의의 순조로운 개최 여부가 본인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네, 서은아 씨. KCL 신임 대표님이 은아 씨를 콕 집어 말씀하셨는데요...”"제가 뭘 하면 될까요, 회장님의 말씀이라면 제가 받아들여야죠. 이 또한 제 영광 아니겠어요?”서은아는 내로라하는 KCL 신임 대표가 직접 자신을 호명하자 너무 감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을 뻔했다.어찌 됐든 그녀가 KCL의 신임 회장과 친하게 지낸다면 그녀는 전자 기술 업계에서 큰 관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 거물들은 KCL과 협력하기 위해 반드시 그녀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었다.그렇게 되면 성도윤의 마음속에서의 그녀의 지위는 더욱 높아지게 되고 성도윤은 더욱 그녀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어, 그니까 그게...”단혁은 안경을 밀면서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KCL 신임 회장이 해안을 좋아하시는데 이곳에서 양녀를 만들고 싶대요. 그래서 은아 씨가 전 세계로 방송되는 카메라 앵글을 보며 ‘아버지, 이 딸이 잘못했어요. 노여움 푸시고 회의에 참석해주세요’라고 하시라고...”이 말이 나오자 현장은 발칵 뒤집혔다.서은아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회장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무 유머 감각이 있으신걸요...”회의실의 일곱 멤버 중, 여섯 명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히가시노무라 카즈요시: "하하하, 이 새로운 회장 마음에 들어, 너무 개성이 있는걸. 반드시 그와 협력해야겠어!”성도윤만이 무관심한 듯하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고 그는 짙은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왜 이런 조작이 좀 익숙하다고 생각되는 걸까? 설마...서은아는 한바탕 생각을 하더니 인츰 표정
"성 대표님, 공교롭게도 우리가 다시 만났군요.”차설아는 성도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는데 입꼬리는 올라갔고 표정에는 그녀의 한껏 흥분된 기분이 다 드러나 있었다."그래, 또 만났네. 계획한 지 오래됐겠네, 대단한걸.”역시 그녀였어!이 순간, 성도윤은 놀라움이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기쁨의 표정이 서렸다.역시 차설아야, 이렇게 큰 판을 짜다니 그도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여자의 대응 방식 또한 그를 더욱 안심시켰다.적어도 'KCL 회장'이라는 신분이 있으니 그녀가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는 염려가 없어졌고 적어도 앞으로 그녀부터 3대까지는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다."단혁,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이 여자가 정말 KCL의 신임 회장이야?”"그러니까. KCL 그룹이 우리를 가지고 노는 거야?”라운드 테이블의 다른 멤버들은 앞다투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그들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여자가 업계에서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거나 KCL 그룹이 일부러 그들을 조롱하는 것일 거다.밖에서 서은아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당장 들여보내 줘, 당장! 그렇지 않으면 서가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의 현재의 난폭함과 방금의 조신함은 강렬한 대조를 이루었다.다만, 그녀가 지금 얼마나 날뛰던 이미 서씨 집안 전체가 체면을 구겼고 전 세계에 망신을 당했다는 거다!단혁은 사람들에게 급급히 해명에 나섰다."여러분, 흥분하지 마세요, 차설아 씨는 확실히 KCL의 신임 회장이자 G6 칩의 최종 개발자입니다. 기술 지분 참여 방식으로 KCL 그룹의 최대 주주가 되었고 한 사람의 힘으로 전체 업계의 프로세스를 거의 10년이나 앞당겼습니다. 우리 업계의 영웅과도 같은 존재이니 여러분 모두 존중하고 지지해 주세요!”오직 단혁의 설명만으로는 이 늙은이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 여자는 분명 부적절한 방법으로 KCL 회장 자리에 앉은 걸 거야. KCL
“누가 네 전 여자 친구라는 거야? 나는 너랑 모르는 사이야. 친한 척하지 마!”배경윤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사도현한테 아주 실망했기에 다정하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경윤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자던 사이였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모르는 사이야.”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부러 장난을 쳤다. 배경윤이 차갑게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놀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고는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다 잊어버려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게. 내가 몇 번이고 너한테 말해주면 되거든.”“뭐, 뭐 어떻게 말해줄 건데?”배경윤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사도현을 피하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나의 전 여자 친구는 내가 벽에 밀치고 키스하는 걸 제일 좋아했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알려줄 수도 있어.”사도현은 천천히 배경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배경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사도현,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민망해서 사도현의 뺨을 후려갈기려고 했다. 이때 사도현이 배경윤의 손목을 잡더니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이제는 우리가 친한 사이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어?”“나는...”배경윤은 거칠게 뛰는 심장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인정할 수 없어.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야.”“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잖아.”사도현은 배경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끝으로 배경윤의 코를 쓰다듬었다.배경윤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도현이 미웠지만 제일 미운 건 자신이었다. 사도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우스웠다.사도현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배경윤은 반격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배경윤은 사랑의 싸움에서 사도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도현이 잡아당기면 끌려가고 밀
차설아는 해바라기 꽃을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옛 친구가 보낸 선물이야.”“어느 친구가 보낸 거야? 너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구라면 내가 아는 사람일 텐데 말이야.”배경윤은 해바라기 꽃의 내음을 맡으면서 싱글벙글 웃었다.“네가 아는 사람이야.”차설아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갑자기 불안해 난 선우시원이 그 꽃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급히 물었다.“설마 나도 아는 사람이야?”“네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어.”차설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선우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럼 적어도 성도윤은 아니라는 거네? 누가 꽃을 보냈는지 몰라도 참 좋은 친구인 것 같아. 성도윤만 아니면 돼.”“왜 성도윤만 아니면 된다는 건데?”차설아는 선우시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성도윤이 보낸 것이 아니라면 누가 보냈든 상관없어. 나의 라이벌은 성도윤 한 명뿐이잖아.”차설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총명해 보였던 선우시원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해서 의외였다.만약 선우시원이 밤마다 성도윤이 찾아와서 차설아한테 디저트를 먹여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댈 것이다.“누가 보낸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설아가 좋아하는 꽃을 보냈으니 좋은 사람 같아.”배경윤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차설아를 관심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이 전생에 차설아의 엄마였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내 얘기는 그만하고 네 얘기나 해줘. 어떻게 되었어?”차설아는 배경윤이 걱정되어 계속해서 물었다.“그 사람이랑 화해한 거야? 나 때문에 괜히 너도 그 사람이랑 싸운 건 아니지?”“내가 그놈이랑 싸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야.”배경윤은 다른 사람의 말을 할 때면 신이 났다가 자신의 감정사를 얘기하려고 하면 잔뜩 긴장했다. 배경윤은 말을 버벅거렸다.“나는
일주일 뒤, 병원에서 정밀 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차설아의 허리가 심하게 다친 건 맞지만 치료를 제때 받고 푹 쉬어서 생각보다 빨리 나았다. 그러기에 반신불수가 될 거라는 의심을 거두어도 되었다.그 소식을 알게 된 뭇사람들은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복 받은 사람들은 내가 딱 알아본다고 했잖아. 우리 설아가 복 받아서 빨리 나은 거야.”배경윤은 차설아를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배경윤은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경윤이 다친 줄 알 것이다.“앞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운동은 절대 하면 안 돼! 암벽 등반, 등산은 절대 안 되고 계단을 오를 때는 꼭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해.”차성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 한 번 큰 사고를 당했기에 차설아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더 신경 쓰고 싶었다.“성철 형,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붙어있으면서 스파크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게요.”선우시원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면서 사뭇 엄숙하게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 달 정도 입원하면 거의 다 나을 거래. 병실에만 있어서 답답하겠지만 참아. 오빠가 병원에 퇴원 신청을 하면 예정일보다 더 빨리 퇴원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간병인을 미리 알아보았으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차성철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울상을 지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나는 병원에 있는 게 좋아. VIP 병실이라 편하게 지낼 수 있잖아. 미리 퇴원 신청을 하지 않아도 돼. 귀찮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설아야, 너를 위해서라면 귀찮은 일도 다 해줄 수 있어. 너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퇴원 예정일을 앞당기는 건 복잡한 절차도 아니야.”차성철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오빠가 다 해놓을 테니 그날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자. 설아야, 오빠 믿지?”“아...”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차설아가
사실 차성철은 최근 들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차설아의 병실에 긴급 신고 버튼을 설치해 주었다. 버튼만 누르면 병원의 긴급 벨이 울리면서 차성철이 배치한 보디가드가 병실로 달려올 것이다.차설아는 성도윤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 차성철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성도윤을 향한 마음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선을 지키지 못했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떠보다가 결국 그 선을 넘어왔다.“나는 그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행복할 뿐이야. 그래서 당신의 입도 닦아준 건데 싫으면 얘기해. 내일 밤부터 다시 오지 않을게. 케이크를 사던 가게의 파티시에를 스카우트해서 매일 케이크를 만들게 했지만 이제는 필요 없겠지...”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을 이었다.“내일 메뉴는 헤이즐넛 케이크라고 했어. 아쉽지만...”“잠시만요!”차설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차설아가 제일 기대하던 메뉴가 바로 헤이즐넛 케이크였기에 성도윤을 내쫓을 수 없었다.“파티시에도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어떻게 함부로 자르겠어요. 내일도 와주면 고맙겠지만 앞으로는 뭐가 묻어도 도와주지 말아요. 손은 멀쩡하니까 내가 직접 닦을게요.”“그래. 당신이 이토록 애원하니 한 번 고려해 볼게.”성도윤은 피식 웃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눈빛은 여우처럼 교활하기 그지없었다.“휴...”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후회하기 시작했다. 성도윤은 예전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차설아를 부드럽게 다가가면 마음을 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맛있는 케이크로 경계심을 무너뜨렸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 되어갈 때쯤 차설아는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성도윤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의 성과는 그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다.“이제는 병실로 돌아갈 테니 푹 쉬어. 내일 밤에도 올 테니까 기다려. 잘자.”차설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했다. 머릿속은 두 사람이 뜨겁게 키스를 퍼붓던 화면으로 가득 차서 얼굴이 화끈
차설아는 병실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에 성도윤이 늦은 밤에 가져다주는 야식이 유일한 낙이었다. 차설아는 누워서 입을 벌리고 성도윤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애틋한 커플 같아서 오글거렸지만 케이크를 먹기 위해 꾹 참았다.“역시 다크 초콜릿 케이크는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이런 맛을...”크림과 초콜릿이 조화를 이루어서 입안에 가득 퍼졌다. 차설아는 케이크를 먹으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내일도 가져올 테니까 천천히 먹어. 체하면 어쩌려고 그래.”성도윤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하면서 허겁지겁 먹는 차설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먹다가 의도치 않게 성도윤의 손가락을 물게 되었다.긴 손가락이 차설아의 입에 들어가자 성도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했고 닭살이 돋았다.“어머.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급하게 먹다보니...”차설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면서 성도윤한테 사과했다.“더 먹을래?”성도윤은 뜨거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아, 아니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차설아는 민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성도윤을 쳐다볼 수가 없었고 더 이상 케이크를 먹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숨을 기세였다.“안 먹으면 입부터 닦아. 다 묻히고 먹었잖아.”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차설아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설아의 입가에 크림이 묻어있었는데 그 모습은 음식을 몰래 훔쳐먹은 고양이 같아서 더 귀여웠다.“그럼 티슈 좀 주세요. 입에 묻은 줄도 몰랐어요.”차설아는 혀로 입가를 날름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성도윤은 내가 며칠 굶은 줄 알겠어. 아, 손가락까지 물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왜 그랬지?’“그럴 필요 없어.”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뭐가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티슈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뜻이야.”“왜요? 다 썼어요?”“아니. 내가 닦아
박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뉴스에서 차설아 씨가 허리를 다쳤다고 했어요...”성진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성진은 심호흡하고는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당장 그 병원으로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정확히 어쩌다가 다쳤고 상황이 어떤지 알아내서 보고해.”“하지만 제가 성진 도련님의 곁을 떠나면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설아한테 가봐. 설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거야.”성진은 잔뜩 긴장한 채 박서영을 재촉했다.“알겠어요. 준비하고 바로 갈게요.”박서영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성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기 전에 뒷마당에 있는 해바라기 꽃을 가져가. 해바라기 꽃을 보면 설아도 좋아할 거야.”“네. 그렇게 할게요.”박서영은 성진을 바라보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사람은 감정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동물이었다.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죽여도 눈 깜빡이지 않던 성진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순애보가 되어있었다.한편, 병원.성도윤은 늦은 시간마다 차설아의 병실에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기도 했고 때로는 얘기를 나누면서 웃기도 했다.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이 된 차설아는 점점 마음이 편해졌다. 가끔 성도윤을 만나기 위해 차성철 혹은 병문안을 온 사람들을 일부러 내보내기도 했다.성도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던 차설아는 어쩐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도윤이 찾아오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내가 허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당신을 제일 먼저 내쫓았을 거예요.”어느 조용한 밤, 차설아는 성도윤이 몰래 가져온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먹으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자 성도윤은 차갑게 대꾸했다.“말로만 그러지 말고 직접 날 내쫓아 봐. 얼른 나아서 나를 내쫓기를 바랄게.”“딱
“그럴 필요 없어!”성진이 부르짖는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울려 퍼졌다. 귀신 같은 몰골로 도저히 차설아를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 성진은 긴 한숨을 내어 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차설아를 두고 떠난 건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라서였어. 나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야.”성진은 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차설아한테 평생 책임지라고 말하면 차설아는 주저 없이 승낙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반년 전에 어렵게 상봉한 차성철과 귀여운 아이들, 겨우 이어가고 있던 사업을 내팽개치고 성진과 함께 멀리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차설아는 반년 동안 성진을 아기처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힘들다고 투정 부린 적이 없었다. 성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두 눈과 피를 기부함으로써 사랑하는 여자와 반년 동안 같이 살았기에 이번 생에 여한이 없었다. 성진은 평생 그 나날들을 기억할 것이고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하지만 박서영은 성진을 이해하지 못했다. 총명하고 이득을 위해 기회를 쟁취하던 성진이 도대체 왜 소극적으로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성진 도련님, 차설아 씨를 잊지 못했으면서 왜 만나러 가지 않는 거예요? 성진 도련님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때 갑자기 나타나면 감동해서 성진 도련님과 결혼하려고 할 수도 있어요.”박서영은 굳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성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설아가 그러자고 해도 내가 거절할 거야.”성진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자존심이 있는 남자라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할 거야.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감히...”성진은 고상한 품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성진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지만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성진 도련님, 다른 사람들이 도련님을 나쁘고 간사한 사람이라고 욕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서은아는 심호흡하고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여겼다. 성진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궁금해 난 서은아는 천천히 물었다.“요즘 어디로 갔기에 도통 보이지 않는 거야? 차설아를 데리고 해안시를 떠나겠다고 약속했었잖아. 그런데 차설아가 왜 아직도 내 눈앞에서 알짱대는지 설명해 봐. 네가 나타나지 않으면 차설아는 또 성도윤한테 달라붙어 있을 거야. 그럼 네 눈과 피를 성도윤한테 준 건 뭐가 되는데?”성진의 희생은 차설아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서은아도 놀라게 했다.멀쩡하던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를 위해서 자신의 눈과 피를 기부했다. 그로 인해 성진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다.이 세상에서 가장 헌신적인 순애보는 성진일 것이다. 서은아는 성도윤을 위해 이 정도로 희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성진은 큰 희생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차설아는 반년 동안 성진과 가까이 지내다가 자신만의 삶을 위해 떠났다. 성진의 노력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뭐가 되든 네가 알 바 아니야. 나는 너랑 달라. 설아를 많이 사랑하고 설아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 하지만 너는 성도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국 너를 위해서 수술을 막으려는 거잖아. 너는 성도윤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성진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서은아는 허를 찔려 제대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서은아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야? 차설아를 사랑하는 순애보가 이런 끔찍한 일을 꾸며냈다는 걸 누가 알았겠어... 나는 그저 네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야. 성도윤을 이렇게 만든 것도 전부 너라고!”“여기서 멈추라고 하면 멈출 거야? 너는 나의 꼭두각시라고 했잖아.”“뭐? 뭘 멈추라는 건데?”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는 차갑게 물었다.“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야. 성도윤이 수술을 받게 내버려둬. 잊었던 기억을 찾고 나서 너한테 따지면 내가 꾸민 일이라고 말해. 너는
긴 연결음만 이어질 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 개같은 놈!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제발 좀 받아. 할 얘기가 있단 말이야.”서은아는 서태원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전화를 걸었다. 여러 통 걸었지만 상대는 전화를 계속 받지 않았다. 서은아의 전화번호를 진작에 스팸 번호로 설정했거나 전화번호를 아예 바꾸었을 수도 있었다.“하, 정말 짜증 나! 아직 살아있다면 전화라도 좀 받으라고! 정말 속 터져.”서은아는 방에 놓여있던 화분을 전부 바닥에 던지면서 씩씩거렸다. 서은아가 절망스러워서 힘없이 주저앉자 갑자기 조용하던 전화가 울렸다.“무슨 일로 전화했어?”전화를 건 사람은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서은아와 말을 섞기 싫은 모양이었다.“성진, 이 개자식아! 도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내가 몇 번이나 전화를 건 줄 알아?”서은아는 휴대폰을 꽉 잡고 울분을 토해냈다. 긴급상황이 아니었다면 서은아는 절대 이런 나쁜 놈과 엮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니까 무슨 일인데?”성진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러자 서은아는 잔뜩 겁을 먹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성도윤이 벌써 의심하고 있어. 대단한 신경외과 의사를 찾았다고 하면서 뇌수술을 다시 받겠다고 했단 말이야. 만약 성도윤이 뇌수술을 받으면 지난 기억도 다 떠오를 거고 우리가 한 짓이 들통날 것 같아. 우리 이제 어떡해?”“그럼 어쩔 수 없어. 나의 실력은 예전과 달리 많이 녹쓸었지만 성도윤이 복수하고 싶다면 기다리고 있어야지.”“나쁜 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서은아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나한테 부탁할 때와 말이 다르잖아. 들통나면 너는 성도윤한테 좀 맞으면 되겠지만 나는 어떡해? 성도윤이 알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우리 부모님까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서 연락한 거야.”“그러니까 네 말은 성도윤이 뇌수술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