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원과 단사란은 모두 성도윤의 위협에 화들짝 놀랐다.성도윤의 오만방자한 성격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날뛰는 줄은 몰랐다. 보잘것없는 출신의 여자를 위해 집안 어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마저 지키지 않을 줄이야!이것은 규율이 삼엄한 성씨 가문에 있어서는 대역무도한 죄가 틀림없었다.현장에 있던 다른 어른들은 저마다 불평을 참지 못했다.“도윤아, 어떻게 웃어른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이것이 밖에 알려지면 성가의 체면이 어디 서겠어?”“아무리 두 사람이 잘못했다 해도 그래도 네 숙부, 숙모야. 차근차근 말하면 될 것을 그렇게 화낼 필요 있어?”“당장 두 사람에게 사과해, 도윤아!”성도윤은 그의 오만함으로 인해 단번에 가문의 도마 위에 올랐다.단사란은 더욱 흥이 나서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성명원과 소영금을 향해 비꼬아 말했다.“역시 형님과 아주버님의 교육이 선진적이시군요. 이렇게 제멋대로 날뛰는 아들을 두셨으니. 거북하게 말하자면... 교양이 없는 거죠. 계속 이렇게 내버려 두시면 내일 우리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 오줌이라도 싸겠네요!”“맞아요, 도윤이는 반드시 우리에게 사과해야 해요. 아니면 이 일은 절대 쉽게 끝나지 않을 거예요!”성주원이 끈질기게 말했다.“미안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일이니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사과할지는 알아서 해결하세요. 내 아들은 어른을 공경하기로 유명해요.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아랫사람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죠!”소영금은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찰지게 반격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아랫사람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단사란은 화가 나서 이미지도 버리고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앞으로 달려들어 소영금과 머리채라도 잡고 싸울 기세였다.이미 두 집안은 사이가 벌어졌으니 체면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유독 차설아만이 조금 난처했다.어쨌든 자신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일어났으니, 이 일로 인해 가족의 분열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단사란의 앞을 가로막고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숙모님,
“사과하세요.”성도윤의 말투는 너무 무겁지 않았지만 아주 차가운 명령이었고 단사란에게 한 발짝씩 다가갔다.“뭐 하려는 거야. 오지 마. 너... 너...”단사란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고 얼굴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당장이라도 울 기세였다.차설아는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성도윤, 나 괜찮아. 그렇게 사람 잡아먹을 얼굴 하지 마. 그래도 우리가 아랫사람이니까...”“사과하라고 말했습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매서운 태도로 단사란에게 명령했다.마치 당장이라도 단사란의 목숨을 앗아갈 기세였다.이 상황을 본 성주원은 앞으로 달려들어 대담하게 성도윤을 혼냈다.“도윤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네 둘째 숙모에게 그게 무슨 태도야?”“셋만 셀 테니 두 분 모두 제 아내에게 사과하세요.”성도윤의 얼굴은 이미 살얼음판이나 다름없었고 눈빛은 더욱 매서웠다.“하나, 둘...”마지막 ‘셋’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주원 부부는 두 손을 들고 패배를 인정했다.“미안해, 미안해!”성주원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조카며느리, 오늘은 우리가 장난이 심했어. 만약 기분 상했다면 우리가 정중하게 사과할 테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 앞으로는 말조심 할게.”단사란은 속으로는 억울함이 가득했지만 성도윤과 그 가족들의 노여움을 사는 것이 두려웠다. 특히 성진에게 피해가 갈까 봐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미안해, 방금은 내가 말을 심하게 했어.”“아니에요, 괜찮아요. 사과는 저희가 해야죠. 저희가 농담도 받아들이지 못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어요.”차설아는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 서둘러 이 상황을 넘기려 했다.‘쯧쯧, 오늘이 지나면 이 집 사람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웃어른이 나에게 사과를 했으니 당연히 규칙도 없고 게으르고 악독한 여자라고 생각하겠지!’성도윤의 안색은 비로소 조금 누그러져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저는 줄곧 두 분을 존경해왔어요. 특히 제 사촌 동생을 그렇게 훌륭하게 키우
성도윤이 으름장을 놓자 더 이상 비꼬는 소리가 나지 않고 아주 화목한 가족 모임이 되었다.예전의 차설아는 온갖 푸대접을 받아 지나가던 개들도 그녀를 밟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모두의 주인공이 되었다.까다로운 어른들이 잇달아 그녀를 둘러싸고 서둘러 칭찬을 하기 바빴다.차설아는 그제야 깨달았다.시댁에서 환영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는 차설아의 능력과 노력에는 큰 관계가 없이, 모두 남편이 자신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 차설아가 아무리 게으르고 버릇이 없어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가 되는 것이다.반대로 남편의 홀대를 받으면, 차설아가 아무리 예의 바르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해도, 그저 누구의 눈에도 찰 수 없는 비천한 존재에 불과했다.모임이 끝나고 차설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럭셔리한 천장을 바라보았다.“힘들어?”성도윤은 여자의 잘록한 허리에 팔을 두르고 조용히 물었다.“안 힘들겠어?”차설아는 굳어버릴 것 같은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불평했다.“당신들 친척들을 향해 하루 종일 거짓 웃음을 지었는데 힘들지 않은 게 이상하지!”성도윤의 친척들은 모두 순풍에 돛을 다는 사람들이라, 차설아가 성씨 가문에서의 지위가 예전과 다른 것을 보고 모두 그녀를 둘러싸고 아첨하고 환심을 사느라 바빴다. 그런 어른들을 접대하니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수고했어.”성도윤은 여자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애틋하게 말했다.“앞으로는 웃고 싶으면 웃고, 웃고 싶지 않으면 웃지 않아도 돼. 나 성도윤의 아내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니까.”남자의 말에 차설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차설아는 반짝반짝 빛나는 큰 눈을 깜박이며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눈을 보면서 물었다.“성도윤 씨, 그 말은 듣기 아주 황송하네요. 솔직히 말해 봐. 왜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진작 잘해주고 싶었어. 당신이 늘 기회를 주지 않
계단에 있던 성명원 부부는 어색한 나머지 온몸에 닭살이 돋을 뻔했는데 서로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등을 돌렸다.소영금: "쯧쯧, 우리 아들이지만 정말 못 봐주겠어.”성명원: "크~ 우리 아들이 뭘 좀 아네.”하지만 차설아는 젓 먹던 힘을 다해 성도윤을 자신의 몸에서 걷어차 버렸다.그리고는 얼른 일어나 헝클어진 옷과 머리를 손질하며 성명원과 소영금을 향해 물었다."어머님, 아버님, 혹시... 차 드실래요?”"괜찮아, 괜찮아, 너희 볼일 봐.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길이였어.”소영금은 그렇게 말하고는 성명원을 잡아끌며 자리를 비켜섰다.“망했어, 내 이미지 완전히 망가졌잖아... 앞으로 너희 부모님, 그리고 친척분들이 날 어떻게 볼 거야!”차설아는 붉게 상기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절규했다.4년 전부터 그녀가 유지했던 ‘완벽한’ 사모님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리지 않았는가!"그들의 눈에는 내가 게으르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남자를 홀리는 것밖에 없는 꽃뱀일 거잖아...”"우리 부모님이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 안 하면 되잖아!”이때 성도윤은 소파에 무심코 기대어 있었는데 얇은 입술 언저리에는 그녀의 입술에서 빨아들인 립스틱이 번져있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여자의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그 꽃뱀이 너라면 난 기꺼이 너한테 홀릴 거야.”"헉, 오글거려 죽겠다!”차설아는 그의 말에 소름이 돋아 재빨리 성도윤과 안전거리를 벌리며 손사래를 쳤다."그냥 멀쩡하게 있어, 좀. 너 이러면 나 무서워.”"괜찮아, 곧 익숙해질 거야.”두 사람은 그 후에도 꽁냥거렸고 그제야 성도윤은 만족스러운 눈치였다.그러다 그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는데 시간이 다 된 걸 보고 입을 열었다."가자, 아이들 데리러. 오늘 우리 네 식구 한번 제대로 축하파티를 해야지.”그렇게 두 사람은 차를 몰고 몬테리 유치원 입구에 도착했다.이런 규모의 국제 사립유치원은 모두 권세가 있지 않으면 어마무시한 재부를 갖고 있는 집 자제들이 다니고 있기에 하교 시간도 되기 전
"그러지 뭐!"성도윤의 오기는 마침내 차설아의 부드러움에 눌렸고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돌려 방향을 바꾸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차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우리 마누라를 봐서라도 오늘은 저 자식들 봐준다.”그리고 두 사람은 따로따로 움직이기로 상의했다. 성도윤은 먼저 1km 떨어진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가고 차설아는 유치원 앞에 줄을 서 아이들이 나오는 걸 기다리고 아이들을 만나면 성도윤이 다시 차를 몰고 와 이들과 합류하는 거로 말이다.이것도 많은 학부모의 일상이었다.유치원 입구에 주차 공간이 너무 적었기에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의 지위가 얼마나 높던, 한 아이의 부모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규칙에 따라야 했다.한편 성도윤이 자리를 피하자 그 파나메라는 ‘부왕’하는 소리와 함께 성도윤이 내준 그 자리에 오만하게 멈춰 섰다.그리고 문이 열렸는데 뽀글뽀글한 머리에 짙은 화장을 하고 온몸에는 샤넬을, 손에는 LV 한정판 가방을 든 젊은 여자가 10인치 높이의 하이힐을 밟고는 안하무인 격으로 차에서 내렸다.한편 유치원 입구에는 벌써부터 긴 줄이 늘어섰고 아이들은 하나둘씩 선생님을 따라 학부모 곁으로 갔다.차설아는 좀 늦는 바람에 줄 맨 끝에 섰다.그녀는 까치발을 하고 학교 안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는데 그때 멀리서 원이와 달이, 그리고 다른 남자아이가 사과 선생님께 구석으로 불려가는 것을 보았다. 망했다. 아이들이 또 사고를 치지는 않았겠지?그 모습을 본 그녀는 비록 애가 탔지만 별수 없이 꾹 참고 얌전히 줄을 섰다.그런데 그때 아까 그 뽀글뽀글한 머리를 한 건방진 여인이 차설아를 훌쩍 뛰어넘어 대열의 맨 앞에 서는 것이었다."뭐야, 저 여자?”작은 소리로 불만을 토로하는 학부모도 있지만 불만은 많지만 잠자코 입 다물고 있는 학부모가 더 많았다."그만 해요. 저 여자... 보통 사람들은 건드릴 수 없어요.....”"뭐 어차피 처음 새치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참자고요.”“......”대다수 학부모는 차설아와 마찬가지
"흥, 알면 됐어!"장윤주는 양팔을 끌어안고 턱을 높이 치켜든 채 오만하게 소리쳤다."당장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내가 용서해주지.”이를 본 주변의 학부모들은 모두 차설아더러 허리를 굽히라고 권했다.장윤주는 서청송의 오랜 정인이었는데 서청송한테 늦둥이를 낳아주는 바람에 지금처럼 오만하게 날뛸 수 있었다.서씨 집안은 대외적으로는 서청송에게 자식이 서은아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내연녀의 자식도 있었는데 이미 네 살 남짓했다.이 아이 덕분에 장윤주는 심지어 서은아의 어머니의 머리 꼭대기에 서서 날뛰었고 밖에서는 천방지축으로 갑질을 해댔다."좋은 생각이야!”차설아는 입꼬리를 살짝 치켜들며 여왕의 자태를 뽐내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까 이제 무릎을 꿇어도 좋아.”"무슨 소리야? 네가 무릎을 꿇어야지!”장윤주는 차설아의 태도에 화가 제대로 났고 팔을 치켜들고 차설아의 얼굴을 향해 귀뺨을 날리려 했다.하지만 차설아는 민첩하게 어깨를 살짝 옆으로 젖혔고 날렵하게 그녀의 손을 피했다."아!"차설아가 피하는 바람에 장윤주는 자기 힘을 못 이겨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나가떨어져 치맛자락까지 찢어졌는데 그 꼴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하하하!”주변 학부모들은 이제는 참지 못하고 한둘씩 웃음을 터뜨렸다.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던 내연녀가 끝내 우스운 꼴을 보였으니 그들은 아주 통쾌하고 속 시원했다.장윤주가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차설아는 넘어진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경멸의 눈길을 하고는 진담 반 농담 반인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음... 자세는 좀 별로지만 그래도 꿇긴 꿇었으니까 이번엔 넘어가 주지. 앞으로 더 새치기하다가 내 눈에 띄면 그때는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너...너...그리고 너희, 죽고 싶어?”너무 쪽팔린 장윤주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독한 말을 내뱉었다."다 기다려, 오늘 다 죽었어. 누구도 도망칠 생각하지마!”험한 말을 내뱉은 후 그녀의 요염한 얼굴은 즉시 교태로 변했고 그녀는 핸드폰을 꺼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담임인 사과 선생님이 그들에게 손짓했다."원이, 달이 어머님, 그리고 콩이 어머님, 마침 오늘 두 분 다 계시니 이쪽으로 오셔서 얘기 좀 할까요? 아이들에 대해 말씀드릴 일이 좀 있습니다.”"그래요, 선생님. 지금 가요~”차설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똥 씹은 듯한 표정이더니 사과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리자 얼굴에 금세 미소를 띠였는데 봄바람보다 더 따뜻한 미소였다.장윤주도 잽싸게 땅에서 일어나 몸의 먼지를 툭툭 털고는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사과 선생님, 바로 갈게요!”두 사람이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고 굽신굽신하는 모습은 적지 않게 우스웠다.하지만 이 또한 별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 같은 세월에 아이들은 엄마가 사회에 내놓은 인질이고 유치원 선생님은 그 인질을 관리하는 인원이니 어쩔 수 없이 태도를 바로 할 수 밖에...그래서 거의 모든 학부모는 그가 고급정치관원이건 평범한 직장인이건을 막론하고 모두 유치원 선생님 앞에서는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 했으며 물론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장윤주도 예외는 없다.사과 선생님은 이들을 어린이집 상담실로 안내했고 세 아이도 상담실 벤치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지금 서로 다툼이 일촉즉발 한 상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특히 원이와 콩이는 만약 선생님이 막지 않았다면 벌써 싸웠을 것이다."어머, 사과 선생님, 누가 우리 콩이를 때렸어요? 애 얼굴이 왜 이래요?”장윤주는 호들갑스럽게 자기 아들 앞으로 달려가 위아래로 한바탕 검사한 후 사납게 원이와 달이를 노려보았다."너희 둘이 우리 콩이를 괴롭힌 거야?”"잠깐만요, 콩이 어머님. 잠시 진정하시고 원이 달이 어머님이랑 먼저 앉으시면 안 될까요?”사과 선생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앞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그런데 사과 선생님, 우리 콩이......”"걱정하지 마세요, 콩이 어머님, 아이들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그러시는 게 좋을 거예요.”장윤주는 입을 삐죽거리며 마
차설아의 태도는 장윤주의 오만방자한 자질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차설아의 말에 사과 선생님은 황급히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아녜요. 원이와 달이는 특히 똑똑해서 제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안타깝게도 일부 아이들이 집에서 너무 오냐오냐 키웠는지 항상 이 아이를 건드리고 저 아이를 괴롭히기를 좋아해서 선생님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죠...”사과 선생님이 여기까지 말하고는 장윤주와 콩이를 차갑게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원이와 달이는 특히 정의감이 있는 아이들이에요. 특히 원이는 우리 반의 모든 소녀의 영웅이에요. 아이들이 다 원이를 좋아하죠.”"오늘 점심에 콩이가 반 여학생의 케이크를 빼앗아 갔어요. 그걸 보고 원이가 여학생을 도와 케이크를 돌려받으려고 하자 콩이가 무슨 말을 해도 돌려주기 싫다고 하면서 케이크를 원이의 몸에 던져버렸죠. 그래서 두 녀석이 싸우기 시작했는데 달이가 이를 보고는 원이를 도와준다고 같이 싸우는 바람에... 지금 이 상황이 된 거예요.”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장윤주는 그 자리에서 화를 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사과 선생님, 어떻게 어린이집 선생님이 된 거예요? 아이들이 싸우도록 그냥 내버려 두다니... 가정교육 안 된 아이들이 연합하여 우리 집 콩이 하나를 괴롭혔잖아요! 정말 지독하군요. 우리 콩이 얼굴을 좀 봐요! 오늘 이 일은 나한테 만족스러운 설명을 하지 않으면 나 그냥 못 넘어가요.”사과 선생님은 장윤주의 높은 목청에 머리가 아파나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콩이 어머니, 제가 방금 분명히 말했겠지만 콩이가 반에서 횡포를 부리면서 종일 아이들을 괴롭힌다고요. 원이는 단지 정의감이 있어서 그걸 막았을 뿐입니다. 어머님은 이럴 때 본인 아이를 먼저 교육하고 너무 짓궂게 굴지 않도록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그들은 선생님으로서 장윤주 같은 학부모를 만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돈과 지위를 믿고 자신의 아이가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다가 결국 큰 사고를 치면 그 책임은 선생님이 져야
그에 차설아가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성도윤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차설아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불쾌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죽은 줄 알았잖아!”그에 핸드폰을 귀에서 뗀 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전화는 왜 한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로 친한 사이였어요?”“하하, 아니지.”그녀의 말에 성도윤은 웃으며 비꼬기 시작했다.“그냥 하룻밤 잔 사이니까 이런 연락은 불필요한 거긴 하지.”남사스러운 말에 얼굴이 빨개진 차설아는 차갑게 대꾸했다.“용건 있으면 빨리 말하고 없으면 끊을게요.”“잠깐만!”끊는다는 말에 조급해진 성도윤이 소리치며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 누구랑 같이 있어? 거기 안전하긴 한 거야?”“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랑 같이 있는지를 당신한테 보고할 이유는 없죠. 그래도 물어보니까 얘기는 하는데... 아주 안전해요. 그러니까 당신이랑 이딴 쓸데없는 통화도 하는 거겠죠?”차설아는 혹시나 성도윤이 의심할까 봐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진짜야?”하지만 성도윤은 조심성이 많고 예리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나는 못 믿겠는데, 네가 영상통화를 건다면 몰라도.”“영상통화라니, 드디어 미친 거예요? 우리는 친구도 못 되는 사이인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뭐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해요?”“굳이 그걸 알자는 게 아니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표정을 잔뜩 굳힌 성도윤은 진지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을게. 지금 어디야, 혹시 내 도움 필요해?”“친구 집에 있어요. 친구랑 사이도 좋고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본인이나 잘 챙겨요.”성도윤의 관심 따위 매정하게 넘기면 그만이었겠지만 얼마 전 원이가 한 말이 떠오른 차설아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마디 덧붙였다.“그건 무슨 말이야? 뭘 알기라도 한 거야?”성도윤처럼 예민한 사람은 차설아가 흘리듯
“제가 그분이었으면 진작에 신분을 밝히고 감사 인사라도 받았겠죠. 뭐하러 성진 씨를 속이겠어요?”“그 사람은 나한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청아 씨가 더... 그 사람 같은 거예요.”“착각하신 거예요. 저는 그분이 아니에요. 제가 눈을 내어주는 건 돈을 위해서인데 그분은 뭘 위해서 당신에게 눈을 내어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은...”자신의 커리어가 있고 아이도 있고 성도윤과 한평생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그녀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 같은 병신을 구해줄 리가 없었기에 성진은 차설아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정말 헛된 꿈을 꾼 것만 같아 성진은 차설아의 손을 놓으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이만 돌아가 보세요. 이틀 뒤에 뵙죠. 수술만 잘 끝나면 얼마를 원하든지 다 드릴게요, 그쪽이랑 가족분들 노후까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든든하네요.”말을 마친 차설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남자와 가슴을 부딪치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그때 아래에서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박서영이 내려오는 그녀를 보더니 빠르게 달려가며 물었다.“어때요, 안 들켰어요?”“들킬뻔했어요.”“그래서 어떻게 했어요?”“잘 넘어갔죠.”정원 쪽을 보며 한숨을 쉬던 차설아가 말을 이었다.“저 정도로 순정파일 줄 몰랐는데, 이젠 눈을 줄 수밖에 없게 됐네요. 안 돌려주면 발 뻗고 못 잘 것 같아요.”“잘 부탁드려요.”“다른 볼일 없으면 난 이만 지하실로 돌아갈게요. 밖에 돌아다니다가 들키면 곤란하잖아요.”차설아는 눈시울을 붉힌 채 말하는 박서영을 보면서도‘움직이는 기관창고’답게 담담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죄송해요...”그녀의 태연함 앞에서 박서영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전에는 차설아가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데려오려고 애썼는데... 제 도련님이 눈여겨 본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너그
갑자기 말을 거는 성진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손을 빼려다 커피잔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죄송해요!”서둘러 종이로 커피를 닦아내기 시작한 차설아는 여전히 대학생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성진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오며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굽니까?”“저는 강청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몸은 안 팔아요.”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기에 차설아는 일부러 언짢은 척하며 성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강청아라고요?”하지만 성진은 초점 잃은 두 눈을 하고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아까 그 이름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름인가 보네요. 혹시... 제 오랜 친구예요?”“도대체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 같아요...”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나 같은 병신을 기억하진 못할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줄곧 침착하던 차설아는 성진이 자신을 병신이라 칭하는 걸 듣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성진 씨가 그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그분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혹시 알아요?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진 씨 걱정만 하고 있을지?”“내 걱정을 한다고요?”성진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날 걱정할 리가 없어요. 내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반년이나 곁에 뒀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지난 반년을 떠올리던 성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점차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라 나한테는 엄청 소중해요. 청아 씨가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년 동안 나는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았어요.”성진은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나 아쉬운 건 내가 보지도 못하
담담히 말하는 차설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눈을 팔겠다고 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다른 방법으로도 벌 수 있잖아요. 굳이 여생을 망치면서까지 벌 이유가 따로 있는 거예요?”“그건...”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꾸했다.“돈이 영혼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영혼이 갇히는 건 그저 심심할 뿐이지만 가난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더라고요.”“얼마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그 돈 줄게요, 눈 안 팔아도 줄 수 있어요.”“네?”그냥 장난삼아 한 말인데 가난에 찌든 소녀를 구원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성진에 차설아가 오히려 더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너무 의외예요?”성진은 두 손을 맞잡으며 여전히 감정 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비도 맞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우산을 쥐여준다고 하잖아요. 실명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굳이 이 길은 가지 않았으면 해서요.”그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던 차설아가 코를 매만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듣던 거랑은 전혀 다른 분이셨었네요. 엄청 매정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본인은 지옥을 사시면서 다른 사람은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어린 나이에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에요.”“잘못된 길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전 돈이 필요해서 눈을 파는 것뿐이에요.”“눈 안 팔아도 돈 준다니까요.”“그건 싫어요.”자꾸만 거절하는 성진에 차설아는 그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챈 건가 싶어 조급해하며 말했다.“가난하다고 해서 동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저도 빚지는 걸 싫어해서 돈만 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요.”“빚지는 걸 싫어한 다라...”그 말을 들은 성진은 추억에 잠긴 듯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내 친구도 청아 씨처럼 빚지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 친구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나한
“왔어요.”차설아를 데리고 야외정원으로 온 박서영이 성진의 말에 답을 했다.박서영은 이미 차설아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만약 도망을 가거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눈을 성진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박서영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어디 계셔?”“바로 앞에 앉아계시니까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 성진을 향해 박서영이 차분히 대답했다.야외정원에는 라운지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둘은 다과가 올려진 그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서영아, 넌 내려가 있어.”“도련님, 저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얘기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박서영은 차설아는 완전히 믿지만 혹시나 성진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둘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모험적인 일인데 만약 자신이 자리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박서영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방해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옆에 제삼자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하지만...”“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차가운 표정을 한 성진을 보면서도 용기 내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더 냉랭해진 태도라 박서영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알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가져올게요.”박서영은 내려가기 전에 차설아를 향해 부탁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 저를 향해 눈썹을 움직여주니 박서영은 한결 안심이 됐다.박서영이 나가고 넓은 정원에는 성진과 차설아만이 남게 되었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정원이라 협곡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던 그곳에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 아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이름이 뭐예요?”고개를 들고 바람을 느끼던 차설아는 들려오는 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여한이 없다는 말까지 하는 차설아에 측은지심이 생겨난 박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차설아 씨 말고는 도련님이랑 맞는 눈이 없어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부담 갖지 마요. 이건 내가 진이한테 빚진 거니까 내가 갚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럼 내일 오전 두 분 만나게 해드릴게요.”그 말에 박서영은 마음을 독하게 먹으려고 심호흡을 하며 방을 나섰고 그날 밤을 차설아는 뜬 눈으로 새우게 되었다.하지만 잠을 설친 건 성도윤도 마찬가지였다.차설아와 연락이 안 된다는 사도현의 말에 자신도 연락을 해봤지만 차설아는 줄곧 묵묵부답이었다.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을 때 성도윤은 차설아가 올린 새 스토리를 확인하게 되었다.[내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어, 오직 너뿐이야.]해바라기를 안고 활짝 웃는 사진을 저런 문구와 함께 올렸는데 꽃을 사본 사람이라면 해바라기의 꽃말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진심이 가득한 그 스토리를 본 성도윤은 차설아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나 싶었다.아무 소식 없다가 갑자기 저런 자신을 올리는 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그는 순간 오만해졌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이유를 알고 싶어 처음으로 그녀의 스토리에 댓글을 달았다.“너 지금 어디야?”하지만 그는 한참을 기다려도 차설아에게서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이미 끝난 사이이니 연락을 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답답했던 성도윤은 새벽 두 시에 비서에게 연락했다.“진무열, 차설아 현재 위치 알아보고 나한테 보내.”보스의 전화에 잠에서 깬 탓에 정신이 흐리멍텅했던 진무열은 눈을 비비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보스, 저는 비서지 해커가 아닙니다. 스토리에 올린 사진 한 장 보고 위치를 어떻게 알아냅니까?”“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일 아침 날 밝기 전까지 무조건 알아내.”말을 마친 성도윤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잠에 들었지만 새벽에 임무를 전달받은 진무열은 자신이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어리둥절하기만
박서영의 망설임을 보아낸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불편해?”“아니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분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박서영은 원래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성진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거절 대신 저런 질문을 한 것이다.“당연히 봐야지.”“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눈을 기증해준 사람이라면 나 대신 어두운 여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나한테 새로운 삶을 선사해준 그런 은인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 마련할게요...”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성진의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 괜히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박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차설아와의 만남은 없을수록 좋겠지만 그래도 수술 전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내일 오전 열 시에 별장으로 모셔올 테니까 두 분 얘기 나누세요.”“그래, 수고했어.”처음으로 박서영을 대놓고 칭찬한 성진은 밤바람을 느끼며 내일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달을 향해 고개를 든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움찔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 아름다운 별빛도 얼마 안 있으면 보겠네.”성진을 방으로 데려다준 박서영은 곧바로 지하실로 향했다.차설아는 그곳에 놓인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장기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관창고 같은 모습이었다.“아까 도련님이랑 달구경 좀 했어요. 3일 뒤에 수술하는 거 도련님도 동의하셨어요. 하지만 기증자가 차설아 씨라는 말은 못 했어요.”박서영의 말에 눈을 뜬 차설아가 천장을 보고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말 못 하겠죠. 그 사람이 알면 안 받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도 나 위해서 자기 눈을 성도윤한테 내어줬겠죠.”“그러게요.
“하느님도 도련님의 억울함을 느꼈나 보죠.”“기증자는 어떤 사람인데? 남자야? 여자야? 성씨 가문의 사람이야?”성진은 기쁘긴 했지만, 생각은 꽤 신중했다.세상에 공짜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그는 진실부터 파헤쳐 보기로 했다.“그게...”박서영은 성진이 기증자에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손톱을 뜯으면서 아무렇지않게 말했다.“여대생인데 집안에 돈이 부족해서 저희 모집 정보를 보고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만약 눈을 기증한 사람이 바로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차설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수술을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 크게 화를 낼지도 몰랐다.“아, 가난한 여대생이라...”성진은 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몸을 팔고, 누군가는 신장을 팔고, 심지어 누군가는 목숨을 팔기도 했다. 한 쌍의 눈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시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정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면, 돈을 섭섭지 않게 챙겨드려. 가능하다면 그녀와 가족의 남은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해.”성진이 매우 의리 있게 말했다.그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잘 진행될 거예요. 도련님, 수술을 받으실 거예요?”박서영은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는지 기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해. 그리고 누가 괜히 시각장애인이 되고 싶겠어? 만약 정말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복수해서 설아를 내 곁에 단단히 붙잡아 놓을 거야.”“도련님, 시력을 회복하면 첫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설아 씨를 되찾는 거예요?”“그럼!”성진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그동안 난 설아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
박서영은 이렇게 슬프고 비관적인 성진을 보며 마음이 아파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도련님은 그 여자 때문에 너무 많이 변했어요. 예전의 도련님은 이렇게 비관적이지 않았어요...”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그녀를 만나면서 더욱 나 자신으로 변해버린 거고.”성진은 깊고도 막연한 초점 없는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를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아니잖아요!”박서영은 이해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감정은 사람을 얽매이게 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요. 분명 그때 성도윤 씨는 도련님을 상대로 패배했잖아요. 도련님이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지금 성대 그룹은 도련님이 지배하고 있었을 텐데, 결국엔... 그 여자를 위해서 어떻게 성도윤 씨한테 골수와 눈을 내어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저희는 구석에서 세월이나 한탄하면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잖아요. 너무 억울해요!”박서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성진은 손가락을 움찔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그렇다. 예전의 그는 사고가 명확하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배부른 나머지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의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 될 줄 몰랐다.“도련님,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박서영은 흔들리는 성진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잘 모르겠어.”아주 진솔한 대답이었다.“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사랑에 미친다고 하잖아. 나는 이미 그래봤으니까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과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