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에 있던 성명원 부부는 어색한 나머지 온몸에 닭살이 돋을 뻔했는데 서로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등을 돌렸다.소영금: "쯧쯧, 우리 아들이지만 정말 못 봐주겠어.”성명원: "크~ 우리 아들이 뭘 좀 아네.”하지만 차설아는 젓 먹던 힘을 다해 성도윤을 자신의 몸에서 걷어차 버렸다.그리고는 얼른 일어나 헝클어진 옷과 머리를 손질하며 성명원과 소영금을 향해 물었다."어머님, 아버님, 혹시... 차 드실래요?”"괜찮아, 괜찮아, 너희 볼일 봐.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길이였어.”소영금은 그렇게 말하고는 성명원을 잡아끌며 자리를 비켜섰다.“망했어, 내 이미지 완전히 망가졌잖아... 앞으로 너희 부모님, 그리고 친척분들이 날 어떻게 볼 거야!”차설아는 붉게 상기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절규했다.4년 전부터 그녀가 유지했던 ‘완벽한’ 사모님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리지 않았는가!"그들의 눈에는 내가 게으르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남자를 홀리는 것밖에 없는 꽃뱀일 거잖아...”"우리 부모님이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 안 하면 되잖아!”이때 성도윤은 소파에 무심코 기대어 있었는데 얇은 입술 언저리에는 그녀의 입술에서 빨아들인 립스틱이 번져있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여자의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그 꽃뱀이 너라면 난 기꺼이 너한테 홀릴 거야.”"헉, 오글거려 죽겠다!”차설아는 그의 말에 소름이 돋아 재빨리 성도윤과 안전거리를 벌리며 손사래를 쳤다."그냥 멀쩡하게 있어, 좀. 너 이러면 나 무서워.”"괜찮아, 곧 익숙해질 거야.”두 사람은 그 후에도 꽁냥거렸고 그제야 성도윤은 만족스러운 눈치였다.그러다 그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는데 시간이 다 된 걸 보고 입을 열었다."가자, 아이들 데리러. 오늘 우리 네 식구 한번 제대로 축하파티를 해야지.”그렇게 두 사람은 차를 몰고 몬테리 유치원 입구에 도착했다.이런 규모의 국제 사립유치원은 모두 권세가 있지 않으면 어마무시한 재부를 갖고 있는 집 자제들이 다니고 있기에 하교 시간도 되기 전
"그러지 뭐!"성도윤의 오기는 마침내 차설아의 부드러움에 눌렸고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돌려 방향을 바꾸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차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우리 마누라를 봐서라도 오늘은 저 자식들 봐준다.”그리고 두 사람은 따로따로 움직이기로 상의했다. 성도윤은 먼저 1km 떨어진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가고 차설아는 유치원 앞에 줄을 서 아이들이 나오는 걸 기다리고 아이들을 만나면 성도윤이 다시 차를 몰고 와 이들과 합류하는 거로 말이다.이것도 많은 학부모의 일상이었다.유치원 입구에 주차 공간이 너무 적었기에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의 지위가 얼마나 높던, 한 아이의 부모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규칙에 따라야 했다.한편 성도윤이 자리를 피하자 그 파나메라는 ‘부왕’하는 소리와 함께 성도윤이 내준 그 자리에 오만하게 멈춰 섰다.그리고 문이 열렸는데 뽀글뽀글한 머리에 짙은 화장을 하고 온몸에는 샤넬을, 손에는 LV 한정판 가방을 든 젊은 여자가 10인치 높이의 하이힐을 밟고는 안하무인 격으로 차에서 내렸다.한편 유치원 입구에는 벌써부터 긴 줄이 늘어섰고 아이들은 하나둘씩 선생님을 따라 학부모 곁으로 갔다.차설아는 좀 늦는 바람에 줄 맨 끝에 섰다.그녀는 까치발을 하고 학교 안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는데 그때 멀리서 원이와 달이, 그리고 다른 남자아이가 사과 선생님께 구석으로 불려가는 것을 보았다. 망했다. 아이들이 또 사고를 치지는 않았겠지?그 모습을 본 그녀는 비록 애가 탔지만 별수 없이 꾹 참고 얌전히 줄을 섰다.그런데 그때 아까 그 뽀글뽀글한 머리를 한 건방진 여인이 차설아를 훌쩍 뛰어넘어 대열의 맨 앞에 서는 것이었다."뭐야, 저 여자?”작은 소리로 불만을 토로하는 학부모도 있지만 불만은 많지만 잠자코 입 다물고 있는 학부모가 더 많았다."그만 해요. 저 여자... 보통 사람들은 건드릴 수 없어요.....”"뭐 어차피 처음 새치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참자고요.”“......”대다수 학부모는 차설아와 마찬가지
"흥, 알면 됐어!"장윤주는 양팔을 끌어안고 턱을 높이 치켜든 채 오만하게 소리쳤다."당장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내가 용서해주지.”이를 본 주변의 학부모들은 모두 차설아더러 허리를 굽히라고 권했다.장윤주는 서청송의 오랜 정인이었는데 서청송한테 늦둥이를 낳아주는 바람에 지금처럼 오만하게 날뛸 수 있었다.서씨 집안은 대외적으로는 서청송에게 자식이 서은아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내연녀의 자식도 있었는데 이미 네 살 남짓했다.이 아이 덕분에 장윤주는 심지어 서은아의 어머니의 머리 꼭대기에 서서 날뛰었고 밖에서는 천방지축으로 갑질을 해댔다."좋은 생각이야!”차설아는 입꼬리를 살짝 치켜들며 여왕의 자태를 뽐내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까 이제 무릎을 꿇어도 좋아.”"무슨 소리야? 네가 무릎을 꿇어야지!”장윤주는 차설아의 태도에 화가 제대로 났고 팔을 치켜들고 차설아의 얼굴을 향해 귀뺨을 날리려 했다.하지만 차설아는 민첩하게 어깨를 살짝 옆으로 젖혔고 날렵하게 그녀의 손을 피했다."아!"차설아가 피하는 바람에 장윤주는 자기 힘을 못 이겨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나가떨어져 치맛자락까지 찢어졌는데 그 꼴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하하하!”주변 학부모들은 이제는 참지 못하고 한둘씩 웃음을 터뜨렸다.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던 내연녀가 끝내 우스운 꼴을 보였으니 그들은 아주 통쾌하고 속 시원했다.장윤주가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차설아는 넘어진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경멸의 눈길을 하고는 진담 반 농담 반인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음... 자세는 좀 별로지만 그래도 꿇긴 꿇었으니까 이번엔 넘어가 주지. 앞으로 더 새치기하다가 내 눈에 띄면 그때는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너...너...그리고 너희, 죽고 싶어?”너무 쪽팔린 장윤주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독한 말을 내뱉었다."다 기다려, 오늘 다 죽었어. 누구도 도망칠 생각하지마!”험한 말을 내뱉은 후 그녀의 요염한 얼굴은 즉시 교태로 변했고 그녀는 핸드폰을 꺼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담임인 사과 선생님이 그들에게 손짓했다."원이, 달이 어머님, 그리고 콩이 어머님, 마침 오늘 두 분 다 계시니 이쪽으로 오셔서 얘기 좀 할까요? 아이들에 대해 말씀드릴 일이 좀 있습니다.”"그래요, 선생님. 지금 가요~”차설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똥 씹은 듯한 표정이더니 사과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리자 얼굴에 금세 미소를 띠였는데 봄바람보다 더 따뜻한 미소였다.장윤주도 잽싸게 땅에서 일어나 몸의 먼지를 툭툭 털고는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사과 선생님, 바로 갈게요!”두 사람이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고 굽신굽신하는 모습은 적지 않게 우스웠다.하지만 이 또한 별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 같은 세월에 아이들은 엄마가 사회에 내놓은 인질이고 유치원 선생님은 그 인질을 관리하는 인원이니 어쩔 수 없이 태도를 바로 할 수 밖에...그래서 거의 모든 학부모는 그가 고급정치관원이건 평범한 직장인이건을 막론하고 모두 유치원 선생님 앞에서는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 했으며 물론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장윤주도 예외는 없다.사과 선생님은 이들을 어린이집 상담실로 안내했고 세 아이도 상담실 벤치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지금 서로 다툼이 일촉즉발 한 상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특히 원이와 콩이는 만약 선생님이 막지 않았다면 벌써 싸웠을 것이다."어머, 사과 선생님, 누가 우리 콩이를 때렸어요? 애 얼굴이 왜 이래요?”장윤주는 호들갑스럽게 자기 아들 앞으로 달려가 위아래로 한바탕 검사한 후 사납게 원이와 달이를 노려보았다."너희 둘이 우리 콩이를 괴롭힌 거야?”"잠깐만요, 콩이 어머님. 잠시 진정하시고 원이 달이 어머님이랑 먼저 앉으시면 안 될까요?”사과 선생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앞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그런데 사과 선생님, 우리 콩이......”"걱정하지 마세요, 콩이 어머님, 아이들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그러시는 게 좋을 거예요.”장윤주는 입을 삐죽거리며 마
차설아의 태도는 장윤주의 오만방자한 자질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차설아의 말에 사과 선생님은 황급히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아녜요. 원이와 달이는 특히 똑똑해서 제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안타깝게도 일부 아이들이 집에서 너무 오냐오냐 키웠는지 항상 이 아이를 건드리고 저 아이를 괴롭히기를 좋아해서 선생님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죠...”사과 선생님이 여기까지 말하고는 장윤주와 콩이를 차갑게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원이와 달이는 특히 정의감이 있는 아이들이에요. 특히 원이는 우리 반의 모든 소녀의 영웅이에요. 아이들이 다 원이를 좋아하죠.”"오늘 점심에 콩이가 반 여학생의 케이크를 빼앗아 갔어요. 그걸 보고 원이가 여학생을 도와 케이크를 돌려받으려고 하자 콩이가 무슨 말을 해도 돌려주기 싫다고 하면서 케이크를 원이의 몸에 던져버렸죠. 그래서 두 녀석이 싸우기 시작했는데 달이가 이를 보고는 원이를 도와준다고 같이 싸우는 바람에... 지금 이 상황이 된 거예요.”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장윤주는 그 자리에서 화를 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사과 선생님, 어떻게 어린이집 선생님이 된 거예요? 아이들이 싸우도록 그냥 내버려 두다니... 가정교육 안 된 아이들이 연합하여 우리 집 콩이 하나를 괴롭혔잖아요! 정말 지독하군요. 우리 콩이 얼굴을 좀 봐요! 오늘 이 일은 나한테 만족스러운 설명을 하지 않으면 나 그냥 못 넘어가요.”사과 선생님은 장윤주의 높은 목청에 머리가 아파나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콩이 어머니, 제가 방금 분명히 말했겠지만 콩이가 반에서 횡포를 부리면서 종일 아이들을 괴롭힌다고요. 원이는 단지 정의감이 있어서 그걸 막았을 뿐입니다. 어머님은 이럴 때 본인 아이를 먼저 교육하고 너무 짓궂게 굴지 않도록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그들은 선생님으로서 장윤주 같은 학부모를 만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돈과 지위를 믿고 자신의 아이가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다가 결국 큰 사고를 치면 그 책임은 선생님이 져야
장윤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얀 슈트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세네 명의 검은 슈트를 입은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사모님, 도련님, 괜찮으세요?”하얀 슈트를 입은 남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장윤주를 향해 물었다.“민규 씨, 왜 이제 왔어... 흑흑...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 모자 이 사람들한테 당했을 거야...”장윤주는 그 남자의 팔목을 덥석 잡더니 훌쩍이기 시작했고 그러다 손가락으로 차설아와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저 사람들 다 나랑 우리 콩이를 만만하게 본다고... 글쎄 선생님까지 합세해서 우리 둘을 욕보이잖아!”“우리 콩이 얼굴 좀 봐... 회장님이 보시면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난 몰라, 오늘 꼭 나랑 우리 콩이를 위해 복수해줘. 아니면 우리 회장님 얼굴을 깎는 거 아니겠어?”서청송의 조수인 김민규는 가볍게 장윤주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낮은 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회장님께서 이미 저한테 당부하셨어요. 사모님과 도련님을 건드리는 사람은 모두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고요.”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사과 선생님은 두 아이와 차설아 앞에 막아서며 한 무리의 남정네들과 대치를 했다.“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여기 학교라고요. 막 나오면 경찰에 신고하는 수가 있어요.”“신고라고요?”김민규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경찰에 신고하는 게 쓸모가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쳐들어 왔겠어요? 이 넓은 해안에서 성가를 빼고 우리 회장님을 건들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그쪽 배경이 대단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안 되죠. 원래도 애들 사이의 일인데 일을 크게 만들 필요도 없잖아요?”사과 선생님도 물론 서가의 세력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차설아와 아이들이 당하는 모습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고 그 또한 많이 난처한 상황이었다.장윤주는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이 오니 더욱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다.“사과 선생님, 저희도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했죠... 하지만 이렇게 비천한
콩이는 너무 무서워 자리에 서서 옴짝달싹 못 하다 끝내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엄마~ 나 무서워!””너, 우리 아들 건드리지 마. 무슨 일 있으면 나랑 말해.”장윤주는 얼른 콩이를 자신의 뒤로 감췄다. 위풍당당하던 그녀는 김민규 일당이 차설아 앞에서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물에 젖은 쥐마냥 벌벌 떨며 마른 침을 삼켰다.“무슨 일 있으면 말로 하자.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그쪽에서 먼저 폭력으로 해결하자면서요? 왜요? 내가 아직 덜 폭력적인가?””아, 아니. 그게 아니라...”장윤주는 얼른 부정했고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아이들이니까 옥신각신 할 수도 있는 거고... 이런 일에 어른들이 끼는 건 좀 아니지 않아? 그리고 당신도 애들 보는 앞에서 이렇게 폭력적이진 말아야 하지 않나 싶어서..”“그럼... 우리 폭력으로 해결하지 말고...”여기까지 말한 차설아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계속하여 콩이를 웃으며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꼬마야, 네가 누구를 괴롭혔으면 가서 사과해. 아니면 아줌마 화낼 거야? 아줌마 화나면 콩이 엉덩이 때릴 수도 있어?””아 앙...엄마 콩이 무서워... 살려줘...!”콩이는 너무 놀라 거의 대성통곡 할 지경이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장윤주도 두려웠다. 아이를 안고는 차설아를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차설아가 순간 기분이 안 좋아 그들 모자까지 발차기로 날려 보낼까 봐 두려워서였다.“이미 잘 말한 거 같은데? 아들보고 괴롭혔던 아이들한테 사과하라고 해요.”“알았어, 사... 사과하라고 할게... 지금 당장 하라고 할게.”그렇게 평소에는 오만하기 그지없던 장윤주 모자는 드디어 그 꼿꼿한 고개를 떨구고 평소에 괴롭힘을 당했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님을 하나하나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같은 반에 다니던 아이들의 학부모들은 모두 통쾌하기 그지없었는데 모두 차설아와 원이, 달이를 정의로운 히어로라 불렀다.“다시 한번 말할게요. 내 이름은 차설아에요. 만약 마음
성도윤은 차설아가 일부러 말을 돌리는 것을 눈치채고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그래, 맞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우리 네 식구, 특별한 곳에 가서 제대로 축하하자고!”말을 하며 그는 핸들을 고쳐잡고는 페달을 힘껏 밟으며 이름 모를 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성도윤의 말은 한순간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무슨 특별한 날? 특별한 곳은 또 어디고? 미리 힌트라도 주면 안 돼?”“응, 안돼!”성도윤은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능숙하게 차를 운전하여 학교 구역을 빠져나와 해변 도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먼저 눈이라도 붙여. 몇 시간 후면 자연히 알게 돼 있으니까, 너무 급해 하지 말고. 알고 나서 너무 놀라지는 마.”그의 얼굴에는 감추지 못할 유쾌한 기색이 역력했다.그가 운전하는 차에 아내는 조수석, 아이들은 뒷좌석에 앉아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꿈꿔온 장면이 아니겠는가. 지금이 바로 그가 꿈에 그리던 순간이니 이 순간만큼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같았다.차는 해안선을 따라 빠르게 달렸다. 오렌지같은 태양 아래 주홍빛으로 물든 바다 위로 햇살이 물길에 비춰 부서지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차설아와 두 아이는 피곤했는지 점점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차는 바다 위에 있는 헬기장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은 차 내부 등을 켰는데 은은한 불빛이 차설아와 아이들의 얼굴에 하여 더욱 아름답게 보였는데 마치 꿈만 같았다.그는 안전벨트를 풀었고 천천히 차설아한테로 다가가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어...”차설아는 성도윤의 움직임에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성도윤을 뒤로 밀어내며 아이들이 있으니 조심하자는 눈치를 보냈다.하지만 성도윤은 되려 더 강하게 밀어붙였는데 눈을 감고 온전히 그녀의 향기와 현재의 분위기를 느꼈다.“...”성도윤이 멈출 생각이 없자 차설아도 별수 없
하지만 차설아는 현이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오후가 되자 김정민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현이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텅 빈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서인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내가 시킨 일은 제대로 했어?”검은 옷을 입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말씀하신 대로 다 했어요. 제발 엄마를 놓아주세요.”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계속해. 열흘 뒤에야 풀어줄 거야.”여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현이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헛짓거리할 생각은 마. 날 속이거나, 하루라도 늦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네 엄마는 죽는 거야. 알아?”“네, 알겠어요.”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살짝 떨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제야 그 여자는 현이를 놓아주고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 순간, 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그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뭔데?”“그냥 궁금해서요. 설아 씨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설아 씨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시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현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그녀는 이 여자에게 조종당해 차설아를 해치는 일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만약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그녀는 언젠가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러자 그 모자를 쓴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착하다고?”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자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뱀과도 같았다.“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여자가 누굴 해쳤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그럴
“현이 씨?”차설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사람이라면 현이 뿐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현이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차설아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녀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현이 씨 아니죠?”“설아 씨, 저 맞아요.”현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활기차고 상냥한 말투와 달랐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설아 씨,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아,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옷장 맨 왼쪽에 있는 니트 한 벌이면 돼요.”차설아가 또렷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으로 가 그녀가 원하는 옷을 꺼냈다. 니트를 받아 든 차설아는 능숙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립심이 강했기에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오히려 현이 입장에서는 여느 고용인들보다 차설아를 돌보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차설아를 좋아했다.하지만...아름답고 따뜻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현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현이는 평소처럼 우유 한 잔에 통밀 토스트, 그리고 과일 몇 조각을 준비했다.차설아는 식탁에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토스트를 씹으며 현이에게 말했다.“혹시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아, 아니에요.”현이는 입술을 꼭 깨물며 망설였다.“그냥... 가족끼리 또 싸웠을 뿐이에요. 사실 맨날 싸워서 이제 익숙하지만요.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뭘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요? 앞을 못 보고 나서 지금까지 현이 씨가 절 도와주고 있잖아요. 오히려 제가 현이 씨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차
성도윤은 남자로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그로 하여금 닭살 돋는 말을 하게 만들었고 눈물도 흘리게 했다.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평생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알면 됐어요. 제가 얼마나 좋은 아내인데요! 그러니까 평생 저만 사랑해 주세요.”차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도윤의 목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술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 주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게 해 줬으니 말이다.사실 차설아는 오래전부터 성도윤과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려 그동안 부족했던 만큼 한꺼번에 채울 생각이었다.“너, 너... 취한 거 아냐?”성도윤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차설아를 보고 당황했다. 평소에 그녀가 이러는 건 꿈이거나 아니면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으니 말이다.그는 어찌할 바 몰랐다. 괜히 진하게 키스했다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취했든 안 취했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그냥 키스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두 손으로 성도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술을 포갰다. 차설아가 워낙 격렬하게 덤벼드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갈까?”성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살짝 쉬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은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위층으로 가면 단순히 키스만 하는 게 아닐 텐데 괜찮아요?”“상관없어. 오늘 밤, 난 주인님의 말씀만 잘 따를 테니까.”그렇게 말한 성도윤은 차설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긴 다리로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고 단숨에 침실까지 도착했다.아이들이 캠프를 떠난 타이밍이 이렇게 절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토록 완벽한 둘만의 시간을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성진은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쳤다.분명 이 싸움에서 이긴 건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철저하게 패배한 기분이었다.성도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책상을 정리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설아야, 오늘 어땠어?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퇴근하고 가서 만들어 줄게.”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성도윤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달달한 그 분위기는 옆에서 듣는 사람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성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두 사람이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성도윤이 사무실을 떠나려 하자 성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형, 설아랑 다시 잘 지낸다며? 다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근데 이렇게 빨리 화해했다고? 설마 또 한 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거야?”성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끝난 사이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완전히 남남이 되어 다시는 엮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한두 달 만에 원래 사이로 돌아간 데다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눈동자까지 희생해 가면서 이루고 싶었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에 성진은 절망스러웠다. 성도윤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쉽게 그 모든 걸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성도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었다.“내가 설아랑 어떻게 지내는지 너한테 보고해야 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부러우면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찾아서 결혼하면 되잖아. 따뜻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을 누리면 되잖아. 다만...”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회의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지금 너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을까?”성도윤의 말투는 누가
성진의 말에 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성진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에게 놓고 말하면 성진이 생명의 은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그렇다면 일단 부대표님 뜻대로 진행하죠. 일단 한 분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시도해 보세요. 지켜보겠습니다.”성도윤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고 이는 곧 성대 그룹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역시 형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아는...”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 나서 성대 그룹의 이익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 어떡할 건데?”“넌 내가 어떤 결정을 했으면 좋겠어?”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성도윤을 지지하는 세력과 성진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도 말이다.그때, 오준현이 입을 열었다.“성 대표님은 항상 회사를 위해서 생각해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부대표님께서 정말 그룹에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성 대표님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시겠죠, 그렇지 않습니까?”그러자 박지훈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오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오준현 씨, 회사의 대표 자리는 인간성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회사에 수천 명의 직원이 있어도 성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인간성이요? 그게 수익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주인 저희의 관심사는 오직 이익뿐이라고요. 누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우리가 대표를 선택하는 기준입니다.”두 파벌은 서로 다른 의견을 두고 대립해서 싸우기 시작했다.보다 못한 성도윤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
“제 비서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지금은 성대 그룹을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에요. 확장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성도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성 대표님, 언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너무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이 작은 규모만 지키려다가 무너지고 싶으세요?”장기준이 가감 없이 성도윤에게 의문을 제기했다.“다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형이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형은 지난 반년 동안 큰 충격을 겪었어요. 건강도 많이 나빠졌죠. 그로 인해서 성격까지 바뀐 겁니다. 좀 더 신중해진 거죠.”“그리고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 형은 뇌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거든요.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 가세요? 석현아, 주주님들께 보여 드려.”“네, 부대표님.”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둔 성도윤의 건강 검진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그러자 진무열이 분노하며 성진에게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성 대표님의 건강 검진 결과는 개인 정보예요! 함부로 유포해도 된다고 생각해요?”“진 비서님, 진정하세요. 형을 생각해서라면 건강 검진 결과는 당연히 비밀로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형은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에요. 형의 건강 상태도 곧 성대 그룹의 미래와 이어진다는 겁니다. 다들 성대 그룹의 수익이 감소한 원인을 찾고 있지 않나요? 전 이 검진 결과가 그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해요.”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주주들은 검진 결과를 확인한 후, 믿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이럴 수가! 성 대표님의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었을 줄은...”“뇌를 다친 데다가 기억 상실증까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경영 방식이 전과 너무 다르더라니... 그 원인이 여기 있었군요.”“성대 그룹이 갑자기 변한 건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