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죠, 누님께서 부탁한 일인데 제가 어찌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배경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우고 두툼한 자료 뭉치를 예의 바르게 건넸다.자료를 건네받은 차설아는 고열에 시달려 불편한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곧이어 그녀의 뽀얗고 여린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차츰 떠올랐다.“역시 평범한 변호사들이 아니었어. 가치를 따지면 800억 현금과 아파트 펜트하우스는 아무것도 아니야.”“쳇, 성도윤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어요?”배경수는 늘씬한 다리를 꼬고 침대 난간에 몸을 기대며 시큰둥하게 말했다.“이 사람들보다 더 잘나가는 변호사를 알고 있거든요? 만약 필요하다면 당장 소개해줄게요.”“아니야, 난 이 사람들이 필요해.”차설아는 서류를 정리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이혼 따위 전혀 영향받지 않은 듯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누님, 지금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예요? 내 레이더망에 음모가 탐지되었는걸요?”배경수는 급 관심이 생겼다.드디어 4년 만에 사업의 여신이 다시금 부활하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얼른 얘기해 봐요!”차설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됐어, 곧 알게 될 테니까.”차설아의 성격을 잘 아는 배경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어차피 물어봤자 알려줄 사람도 아니었고,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또 차단당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다만...”배경수는 똑바로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차설아를 떠보았다.“진짜 그 사람을 포기할 수 있어요?”그는 차설아가 성도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어찌 쉽게 잊겠는가?“내가 붙잡는다고 해서 될 일인가?”차설아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무심하게 말했다.“성도윤의 와이프로 산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야. 애초에 손해 보는 장사라서 이제 진짜 차설아로 살아가고 싶어.”...성가네 별장.성명원과 소영금은 배가 나온 임채원을 보고 서로 다른 표정을 지었다.소영금은 기쁨을 주체하지
늘씬한 몸매를 가진 성도윤은 특유의 카리스마를 뿜어냈고, 마치 이 막장 싸움과 무관한 사람 같았다.그는 살짝 튀어나온 임채원의 배로 천천히 시선을 돌리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보시다시피 채원은 임신한 지 3개월이 되었죠. 아이는 우리 성씨 집안의 혈육인지라 떳떳한 신분이 필요해요. 전 이미 차설아와 이혼을 신청했고, 혼인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나면 채원이랑 결혼할 겁니다.”그의 말에 소영금과 임채원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만 성명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 불효자 녀석을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었다.“이 자식아, 진심이야? 밖에서 얻은 여자는 갖고 놀면 그만이지, 지금 내연녀를 집에 들이려고 와이프까지 내팽개칠 정도로 어리석은 거야? 정신 나갔어? 설아 할아버지께서 알게 된다면 저승에서 쫓아올지도 몰라. 왕년에 얼마나 용맹한 장군이었는지 알기나 해? 수십만 명의 대군을 이끄는 모습은 정말 위풍당당했는데, 설아 할아버지가 널 해코지하는 게 두렵지도 않냐?”“말도 마세요.”소영금은 팔짱을 끼고 잔뜩 경멸하는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그렇게 대단하다는 사람이 결국에는 한순간에 몰락했잖아요. 그동안 우리가 차씨 집안 하나뿐인 손녀딸을 거둬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대가 끊겼을 거예요. 당시 차씨 집안과 원수를 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잊었어요? 그런 압박까지 무릅쓰고 차설아와 결혼하면서 본의 아니게 적을 만들게 되었는데, 아무리 은혜를 갚는다고 해도 할 만큼 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그때 노인네가 직접 둘이 결혼 생활을 4년 동안만 이어가면 된다고 정했잖아요. 4년이 지나도 여전히 정이 없으면 좋게 헤어지는 거라고 했는데, 딱히 우리 도윤의 잘못도 아니잖아요?”당장이라도 말다툼을 벌일 것 같은 부모님을 보자, 성도윤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두 분이 싸우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싸우세요.”“됐다, 됐어!”성명원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탄식했다.“넌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성도윤은 평생을 걸더라도 3개월 전 그날 밤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당시 형과 함께 뉴욕 거리를 걸으며 성씨 집안의 미래 발전 방향에 대해 논의하던 중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하면서 그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형이 대신하여 온몸으로 막아줬었다.형은 숨을 거두기 전 정말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는데 임채원이라고 했다.게다가 그녀는 아이를 가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채원이랑 결혼해서 나 대신 보살펴 줘. 그리고 채원과 아이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줘.”그는 피범벅이 된 손으로 자신을 꽉 붙잡고 애원하던 형의 간절한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성도윤은 자기 앞을 가로막은 형을 밀어내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나랑 아이를 위해 아버님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설아 씨한테도 상처를 줬잖아. 솔직히 말하면 진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데... 됐어! 나 혼자서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어. 비록 아이까지 딸린 미혼모라서 생활이 어려울 테지만, 도현 오빠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난 참을 수 있어.”임채원은 계속해서 훌쩍거렸다.그녀는 자신의 필살기에도 성도윤이 끄떡없을 거로 믿지 않았다.성도윤은 싸늘한 얼굴로 임채원과 슬며시 거리를 두었다.“아빠는 속사정까지 모르니까 너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그래.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차설아는...”성도윤은 멈칫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애초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어. 심지어 4년 동안 관계를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너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혼했을 거야.”“그럼 설아 씨는? 아마 널 많이 사랑하고 있을 거야. 너처럼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임채원의 목소리는 애교가 넘쳤고, 성도윤을 바라보는 눈빛에 미련이 가득했다.그녀는 진정한 어장관리녀로서 사실은 재미로 성도현처럼 고분고분한 남자한테 대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너무 고지식하고 아부만 떨어서 정이 안 갔다.하지만 성도윤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드디어 깨달았다.따
차설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간호사가 건넨 검사 결과를 본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차설아 씨, 혈액 검사 결과 HCG 수치와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높은 편이라 임신한 지 한 달 정도 된다고 볼 수 있겠네요.”“뭐라고요? 임신한 지 한 달 됐다고요?”“네, 축하드립니다. 이제 엄마가 되셨네요.”간호사가 떠난 후에도 차설아는 여전히 넋을 잃고 있었다.막장도 이런 막장이 어디 있냐는 말이다.그딴 짓거리를 딱 한 번 저질렀을 뿐인데 바로 당첨되다니? 그녀의 생식 기능이 뛰어난 건가, 아니면 그놈의 유전자가 너무 강한 탓인가? 대체 하느님은 왜 그녀에게 이런 시련을 준단 말이지?물론 성도윤의 아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한 달 전 그날 밤, 성도현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 집안 분위기는 유난히 가라앉았다.차설아는 그동안 늘 안하무인에 고고하던 성도윤이 모든 벽을 허물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며 술을 연신 들이켜는 모습을 처음 봤다.결국 함께 슬퍼해 주다가 같이 울면서 술까지 마셔줬다.그러다 술에 취해 잠자리도 들게 되었는데...결혼 4년 만에 그날은 부부로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눈 밤이었다.차설아는 그날 밤 이후로 성도윤과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친해지기는커녕 이대로 끝날 줄이야!게다가 깔끔하게 끝내면 그만일 텐데, 뜬금없이 아이까지 생겨 그녀의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역시 남자는 동정하는 게 아니라더니, 이렇게 재수 없을 줄이야.”차설아는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과연 성도윤에게 임신 소식을 알려줘야 할까? 어쨌거나 아이의 아버지로서 살릴지 말지 두 사람이 함께 결정해야 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설아 씨, 이런 우연이 있나? 병원에는 무슨 일이야?”이때, 뒤에서 임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차설아가 돌아서는 순간 허리를 짚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임채원이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임채원의 옆에는 곧 전남편이 될 성도윤이 서 있었다.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
성도윤의 진지한 눈빛과 단호한 표정을 본 차설아는 손에 검사 결과를 꼭 쥔 채 속으로 몇 번이고 망설였다.옆에 있던 임채원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더니 자기 검사 결과를 꺼내 차설아에게 다가갔다.“설아 씨, 우리 아가 좀 봐봐. 벌써 3개월이야. 방금 입체 초음파 검사를 받았거든? 벌써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대, 사진 볼래? 어때? 귀엽지? 오늘 모처럼 설아 씨를 만났는데, 배 속의 아이를 대신해서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해야겠어. 설아 씨가 넓은 마음으로 허락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이한테 온전한 가정은 사치였을 테니까. 게다가 도윤처럼 완벽한 아빠도 없었을 거야.”이건 누가 봐도 자랑이었다.차설아는 임채원이 건넨 입체 초음파 사진을 흘끗 내려다보았다.아니나 다를까 팔다리와 이목구비가 또렷한 다 자란 아기 사진이었다.반면, 그녀의 아이는 엄밀히 따지면 아직 생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배아에 불과했다.이러한 격차는 그녀에게 무언의 조롱거리로 다가왔다.마치 그녀와 아이가 성도윤에게 얼마나 불필요한 존재인지 조롱하는 것처럼 말이다.말없이 꾹 참고 있는 차설아가 만만하게 느껴진 임채원이 계속해서 비꼬았다.“설아 씨는 우리 아기한테 은인과 다름없잖아. 참,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설아 씨가 우리 아기의 이름을 대신 지어주는 거야. 그렇다면 아기도 감사한 마음을 안고 평생 고마워할 테니까.”차설아는 처음으로 임채원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장난하나?자기 남편과 바람 핀 것도 모자라 그녀한테 아이의 이름마저 지어달라니? 지금 너 죽고 나 죽자는 건가? 그녀의 아픈 곳에 비수를 꽂는 상황이 따로 없었다.차설아는 피식 웃으며 마치 임채원이 하찮은 듯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진심으로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당연하지, 설아 씨만 원한다면.”임채원은 최대한 겸손하게 말했다. 물론 본심은 성도윤 앞에서 차설아를 망신 주는 것이다.왜냐하면 차설아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로 예상했기 때문이다.아무리 마음이 넓고 인내심이 강하더라
성도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동안 아무런 의지가 없는 꼭두각시처럼 따분한 줄만 알았던 여자에게 이토록 날카롭고 톡 쏘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왜 인제야 깨달았지? 마치 발톱을 바짝 세운 새끼 고양이가 긁어대는 것처럼 사람을 미치게 했다.대체 어딜 봐서 보호가 필요한 모양새인가!이를 본 임채원은 곧바로 다시 아양을 떨며 성도윤의 팔을 잡아당겼다.“도윤아, 설아 씨 탓하지 마. 따지고 보면 나랑 아기 잘못이지, 뭐. 설아 씨가 널 그렇게 사랑하는데 우리의 행복을 지켜주려고 강제로 이혼당했으니, 나랑 아기를 미워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냥 화풀이하도록...”“아니.”차설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굳이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있나? 아까도 말했다시피 당신들의 행복 따위를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개념도 없는 쓰레기를 버렸다가 마침 그쪽이 재활용했을 뿐이야. 그래서 아이 이름이 성재기라고 하는 게 찰떡이라고 했잖아.”곧이어 그녀는 성도윤을 바라보며 웃는 둥 마는 둥 했다.“개념이 없는 사람은 보통 운이 좋지 않기 마련이라던데, 성도윤 씨... 최근에 재수 털리는 일이 생길 거로 감히 예상해 볼게.”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드리웠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어릴 때부터 엄마가 재수 없는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라고 가르쳐줬거든. 아니면 같이 불행해질 수 있다고. 둘이 끼리끼리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오래오래 함께하길 바랄게. 축하해, 안녕!”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었다.죽고 싶어 환장했나?해안시에서 ‘성도윤’이라는 세 글자는 절대적인 권위를 의미하기에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따라서 성도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차설아는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어차피 화풀이는 다 했으니 기분은 후련했다. 물론 한 쌍의 불륜 남녀가 화를 내든 말든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차설아가 떠난 후 임채원은 성도윤을 몰래 살폈다.그의 성격대로라면 대놓고 모욕당했으니 절대로 가만있지
성대 그룹.우뚝 솟은 건물 내부에 감도는 저기압 때문에 사람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꼬박 이틀이 지났는데, 어떻게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 단서를 못 찾는단 말입니까? IT팀 직원들은 밥만 축내는 사람이에요?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고작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됩니까? 고객 정보가 지금도 외부로 유출되고 있는데, 얼른 이 사태를 수습하지 않으면 성대 그룹은 해안시의 웃음거리가 될지도 몰라요. 그때가 되면 다들 가차 없이 잘릴 줄 알아요!”진무열의 호통에 하늘 높이 뻗은 건물이 흔들릴 지경이었다.그는 성도윤의 믿음을 한 몸에 받는 비서로서 회사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했다.이틀 전 성대 그룹 업무 시스템이 알 수 없는 바이러스 프로그램의 공격을 받은 이후로 그는 100명에 가까운 IT팀 직원들과 여태껏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실장님, 말은 바른대로 하자면 저희가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넘사벽이라서 그래요. 범인의 IP 주소가 랜덤으로 계속 바뀌는데 세계 각국이라서 당최 추적할 방법이 없습니다.”IT팀 팀장 강민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계속해서 총대를 메고 말했다.“실장님도 아시다시피 성대 그룹 IT팀은 해안시 IT업계 거물이 전부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저희마저 속수무책이면 해결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이때, 구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사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검은 테 안경을 쓴 청년을 발견했다.“무슨 방법인지 얼른 얘기하지 않고 뭐 해요?”진무열이 조급한 듯 얼른 말을 보탰다.청년은 검은 테 안경을 고쳐 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해결 방법인즉슨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예요. 3일만 더 기다리면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제거될 테니까요.”“그게 무슨 소리죠?”진무열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IT팀 별종들을 혼내려고 소매를 걷어붙였다.“계속해요.”회의실 상석에서 성도윤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는 기
“에취!”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포장마차에서 차설아는 연달아 재채기하더니 귀까지 후끈거릴 지경이었다.“뭐지? 감기가 다 나았을 텐데 왜 자꾸 재채기해?”차설아는 코를 훌쩍이며 감기약을 더 먹어야 하나 고민했다.“누군가 언니 얘기만 하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배경윤은 차설아 앞에 ‘해안신문’을 내려놓으며 싱글벙글 말했다.“언니 지금 큰일 났어. 곧 전 남편이 될 분이 2천억을 내걸고 언니를 공개수배한대.”배경수의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으로서 배경윤도 차설아와 생사를 같이 한 사이였다.다만 차설아에게 간이고 쓸개고 빼줄 듯한 배경수와 달리 그녀는 차설아의 가장 친한 친구에 가까웠다. 둘은 모이기만 한다면 티격태격하는데 그것조차 즐거웠다.차설아는 신문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피식 비웃었다.“지금처럼 허세 부릴 시간이 있으면 얼른 버그를 수정할 방법이나 찾지. 벌써 몇 년째인데 성대 그룹 내부 시스템이 이렇게 물러터져서 쓰겠어? 공격 한 번에 바로 다운되다니, 전혀 도전할 맛이 안 나잖아.”“간지 작렬이네.”배경윤은 저도 모르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언니라서 이런 얘기할 자격이 있겠지? 해킹계의 신, 그 유명한 ‘스파크’가 바로 언니이잖아. 성도윤 그 만년설 같은 자식이 얼굴만 반반한 했지 머리에 똥만 찼나 봐. 언니처럼 숨겨진 보물을 내팽개치고 불륜을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시켜? 정말 최악이야! 그동안 언니가 암암리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도 모르고, 성대 그룹의 허술한 시스템을 공격하려는 해커를 몰래 방어해 준 언니가 없었더라면 벌써 몇 번이나 다운되고 말았을 텐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이번에 쌤통이야.”배경윤은 성도윤과 차설아 커플의 덕후로서 둘이 결혼하고 사랑이 싹트면서 날이 갈수록 사이가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결국 사랑이 싹트기도 전에 갑자기 튀어나온 내연녀와 아이 때문에 바로 탈덕했다.젠장!차설아보다 화가 더 난 듯한 그녀는 지금 당장 성대 그룹에 쳐들어가 쓰레기 같은 놈을 패고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
배경윤은 윤설이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은 차설아 친오빠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윤설의 의도를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내 방으로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은 앞장서서 사도현과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은 윤설을 방까지 부축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윤설은 울퉁불퉁한 방바닥, 구멍이 난 천장과 낡아서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침대를 보면서 말문이 막혔다.윤설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현 씨랑 이런 방에서 같이 지낸 거예요?”“네. 침대도 푹신하고 공기가 좋아서 잘 잤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배경윤은 윤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줄 몰랐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윤설 곁을 지켰다.‘이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서 도현 씨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도현 씨는 결벽증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지 못했을 거라고요.”“쓰레기 소각장이라고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방이 아니면 외양간에서 소랑 같이 자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꽤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윤설 씨가 결벽증인 것 같아요.”“도현 씨가 배경윤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네요. 배경윤 씨를 위해서 이런 누추한 방에서 자고 더러운 진흙으로 들어가 배경윤 씨를 안아 들다니... 내가 배경윤 씨를 얕잡아 봤네요.”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배경윤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본론만 얘기하세요. 배후가 누구기에 성형외과 의사한테 전화하게 된 거죠?”“말해도 배경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걸요?”윤설은 차갑게 웃더니 거만한 눈빛을 하고서 배경윤을 훑어보았다. 배경윤이 목을 치려고 하는 배후는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배후가 누구인
게스트들은 사도현의 표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불을 피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 같은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가 불을 피운다고?”그러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장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불을 피우다니, 네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방에서 나오는 게 도움이 되겠어.”배경윤은 불을 피우고 진찬영이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몹시 당황했다.‘사도현은 왜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야! 찬영 오빠랑 같이 경운기를 타려고 할 때, 찬영 오빠랑 미꾸라지를 잡을 때, 찬영 오빠랑 같이 요리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만 하잖아. 명색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 피우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아니면 여자가 옆에 있어야 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잖아.”사도현은 팔짱을 낀 채 진찬영을 쳐다보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사도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도현은 일부러 진찬영을 저격했다.“너 자꾸 함부로 말할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팬으로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여우 같은 놈, 여자가 없으면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괜찮아요.”진찬영이 피식 웃더니 배경윤의 팔목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배경윤 씨가 옆에서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혼자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던데요?”진찬영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도현 씨께서 불을 잘 피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죠. 다들 쉬고 계세요.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진찬영과 사도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