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준이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이 집에서 나 배성준의 말을 듣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거야? 다들 나 화나게 만들려고 작정한 거야?”차설아는 그들이 싸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그저 조용히 계약서에 사인하고는 말했다.“사인했어요, 그리고 돈은 경수 개인 계좌에 보낼게요. 경수에게 한 마디만 전해주세요. 그동안 저를 위해 한 모든 것이 고마웠다고요. 앞으로는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배씨 저택을 떠났다.허전한 마음보다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그동안 차설아는 배경수의 도움을 무상으로 받아왔기 때문에 사실 마음의 부담이 매우 큰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배성준이 얘기를 꺼냈으니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도 자연스레 그와 선을 그을 수 있다.다만 천신 그룹은 그녀와 배경수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나 두 사람이 완전히 선을 긋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차설아는 이 일을 될수록 빨리 처리해야겠다며 다짐했다.배씨 저택에서.배경수는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배경윤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왜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풀어주신 거야? 상속권도 넘겨주시겠다고... 설마 보스가 정말 돈을 모은 거야?”배경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배경윤을 보며 물었다.“그래, 설아 언니가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을 구한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아빠가 오빠를 풀어준 거고. 두 사람 계약서까지 하나 만들어 사인했어...”배경수는 계약 내용을 배경수에게 알려줬다.“젠장!”배경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상처에 약을 채 바르지 못했는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는 씩씩거리며 말했다.“보스 방금 떠났지? 내가 쫓아가야겠어.”“그냥 가지 마. 내가 말했잖아, 계약 내용 중에 두 사람 다시 얼굴을 보게 된다면 설아 언니가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조항이 있다고. 지금 쫓아간다고 해도 설아 언니에게 폐만 끼칠 거야.”“무슨 계약 내용이 그래? 내가 당장 가서 찢어버리겠어.”“오빠, 좀 진정해. 급
배경윤의 ‘좋은 방법’을 들은 배경수는 그제야 구겨진 미간을 폈다.이때 배성준이 그의 방 앞으로 다가왔는데 그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득의양양했다.“아들, 기분이 어때? 맞은 곳은 많이 아파?”그는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머금은 채 배경수에게 말을 걸었다.배경수는 차가운 얼굴을 보였다. 배성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래도 아버지가 봐주신 덕분에 이렇게 숨을 붙이고 살고 있잖아요.”“쯧쯧, 말투를 들어보니 아직도 나에게 화가 난 거야? 내가 다 너를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 아니야. 나 배성준의 아들로 살아가는데 너에게 시집오고 싶어 하는 여자가 한둘이야? 왜 꼭 이혼한 여자에게 매달리는 건데? 그래도 그 여자가 양심은 있어. 네가 은행에서 빌린 돈을 모았다니. 이렇게 보면 넌 역시 나 배성준의 아들이야. 여자를 홀리는 마성의 매력이 있다고.”배성준이 말하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배경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배경수의 어깨에는 아직 깊은 채찍 자국이 남아 있었다.배성준이 그 상처를 건드리자마자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는데도 배경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배경윤이 얼른 배경수의 편을 들어주며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왜 그렇게 매정하게 구신 거예요? 오빠가 설아 언니를 얼마나 오랫동안 쫓아다녔는데요. 이제 설아 언니가 겨우 마음을 열었는데 아빠도 참... 두 사람 사이를 그대로 갈라놓다니. 정말 독하시네요. 아빠처럼 독한 사람을 평생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이제 와서 오빠를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전에는 패가망신한 놈이라고, 때려죽이겠다고 욕하시더니. 역시 돈이 최고네요. 아빠의 마음을 돌려놨으니. 사람들이 우리 배씨 가문을 무시하는 것도 이유가 있어요, 돈에 눈이 먼 게 맞잖아요.”“안 닥쳐? 이 계집애가 가만히 보면 맨날 내 체면을 구겨!”배성준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막냇딸을 워낙 예뻐했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씩 웃으며 말했다.“아빠가 일석이조인 일을 한
“그동안 보스와의 인연이 깊어요. 특히 천신 그룹은 보스와 함께 시작한 회사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천신 그룹은 보스의 노력으로 성장한 회사죠, 저는 그저 돈만 냈고. 만약 정말 보스와 인연을 끊으려고 하면 천신 그룹의 경영권 소속을 제대로 나눠야 해요.”배경수가 잠깐 뜸을 들이며 배성준의 표정을 관찰하고는 조심스럽게 떠보듯 물었다.“만약 제 이름으로 된다면 저는 보스에게 돈을 물어야 하고 보스 이름으로 된다고 해도 나는 돈을 달라고 차마 입을 열지 못하겠어요. 아니면...”배성준이 손을 젓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보잘것없는 회사 가지고 뭘 고민을 해? 계속 빚지고 있다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살릴 방법이 없을 거야. 차설아와 더 얽히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냥 차설아에게 경영권 넘겨줘.”배성준은 천신 그룹이 배경수가 차설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회사라고 생각했다. 배씨 가문에서 투자해 80%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맞지만 지금 계속 적자를 보고 있기 때문에 빨리 넘겨주는 것도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인 듯싶었다.“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런데 경림 누나가 천신 그룹의 세 번째 주주예요. 누나가 동의할까요?”배경수가 한숨을 푹 쉬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만약 경림 누나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배씨 가문은 결국 천신 그룹과 연을 끊으려야 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보스 얼굴을 보지 않고 산다는 일도 절대 이루어질 수 없겠죠.”“경림이는 내가 잘 설득할게. 계속 적자를 보는 회사를 왜 시간 낭비를 하면서 경영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배성준은 천신 그룹이 절대 일어서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배경수는 묵묵히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차설아가 배씨 저택을 떠날 때 이미 늦은 밤이었다.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그녀는 차를 성씨 저택으로 운전했다.이곳은 그녀가 4년 동안 지내온, 그녀와 성도윤의 집이었다.물론 그녀에게만 ‘집’이었을 것이다. 집주인인 성도윤에게는
성씨 저택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텅 비었다. 정원에 꽃도 심어있지 않았고 거실에 불도 안 켜져 별장 내부는 어두컴컴했을 뿐만 아니라 쿰쿰한 냄새까지 났다.하지만 유독 2층에 있는 성도윤의 방에만 어두운 등이 켜져 있었고, 창문에 큰 체구 남자의 그림자가 위에 비쳤다.차설아는 거실을 지나고 계단을 따라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갔다.성도윤의 방문은 반쯤 닫혀 있었다. 문틈 사이로 그녀는 창가에 한 남자가 서 있다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하지만 남자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훤칠하고 꼿꼿하고 차가운 뒷모습을 가진 남자가 성도윤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순간 차설아는 오랜만에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다짜고짜 앞으로 걸어가더니 문을 확 열고는 말했다.“성도윤, 역시 살아있을 줄 알았어!”창가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리고는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형수님, 아쉽게 되었네요. 실망하게 해 죄송합니다. 나는 형수님이 그리워하는 남자가 아닌걸요?”“성진? 당... 당신이 왜 여기에?”피가 들끓던 차설아는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본 뒤 곧바로 마음이 식어버렸다.그녀는 창피한 마음에 이마를 짚었는데 당장이라도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었다.‘X발, 또 사람을 잘못 본 거야? 정말 너무 부끄러워.’“내일이면 나는 그 잘난 도윤 형을 대신해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에 앉게 될 거예요. 그리고 도윤 형이 가졌었던 모든 걸 손에 넣게 되겠죠. 그래서 오늘 밤에 형이 누리던 형의 인생을 미리 느껴보려고 온 거예요. 너무나도 당연한 거 아닌가요?”성진의 잘생긴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모든 걸 손에 넣어 두려울 게 없다는 자신이 담겨 있었다.차설아는 괜히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렇다고 우쭐댈 게 뭐가 있어. 당신은 결국 성대 그룹이 가장 혼란스러운 틈을 타 대표 자리에 앉은 비겁한 사람일 뿐인데 말이야. 정말 치사하다고.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영
괜히 이 미친놈의 팔다리를 부러뜨렸다가는 그가 평생 매달릴 수도 있었다!“역시 형수님이 저를 아끼시네요. 힘을 쓰지도 않는 걸 보니...”성진은 거의 빠질 뻔한 팔을 휙휙 돌리고는 계속 겁 없이 촐싹거리면서 차설아의 한계를 도발했다.차설아는 겨우 진정하고는 떠보듯 물었다.“설마 진짜 도윤 씨 자리를 대신하고 도윤 씨의 모든 것을 가지려는 건 아니지?”“도윤 형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고요. 성대 그룹이 계속 대표 없이 운영될 수도 없고. 지금 내가 성대 그룹을 맡는 게 성대 그룹을 돕는 것이지, 가져가려고 한다는 말은 타당치 않죠.”“흥, 네 생각대로 쉽게 일이 진행되진 않을 거야. 도윤 씨가 없다고 해도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님이 계시잖아. 당신이 제멋대로 움직일 때까지 그분들이 가만히 있겠어? 빨리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스스로 궁지에 몰아넣는 뻘쭘한 짓이나 하지 말고.”차설아는 성대 그룹의 세대교체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성주혁은 자기가 겨우 쌓아 올린 결과를 쉽게 남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형수님,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거예요?”“김칫국이나 마시고 있네!”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눈을 희번덕거렸다.성진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그저 일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쉽게 진행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성진이 이렇게 쉽게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를 차지하는 게 너무나도 이상했다!“할아버지와 아버님뿐만 아니라 성대 그룹의 직원부터 사업 파트너까지 모두 도윤 씨만 인정할 텐데. 당신이 성대 그룹의 대표로 된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야.”차설아는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성진을 바라봤다.이런 비겁한 사람이 성도윤의 자리를 대신하다니, 세상에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어디 더 있겠는가?“그건 형수님이 걱정하실 바가 아니죠. 인심을 매수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어요? 내가 성대 그룹 대표 자리에 앉으면 바로 KCL 그룹과 G6 칩에 관한 계약을 체결할 거예요. 그때면 하이 테크 분야
차설아는 눈썹을 치켜들면서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난 잘 못 알아듣겠는데?”“이렇게 말했는데도 모르겠어요?”성진은 자신이 한때 한없이 동경하던 여신과 가까운 거리를 둔 이 순간을 즐겼다.그는 겁도 없이 차설아의 가는 허리를 꼭 잡고는 낮은 목소리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사람들이 내가 무능하다고 해도 당신만 얻을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당신에게 바칠 수 있어요.”차설아는 눈을 희번덕거렸다.“그게 무슨 말인데?”“그러니까 내 여자로 되어주겠다면 성대 그룹을 당신에게 바치겠다고요. 그러면 성대 그룹의 운명은 당신의 손에 쥐어질 수 있어요.”성진이 냉혹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성진이 무능력한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사실은 사람들 모두 알고 있었다.그는 권력 다툼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해 전혀 흥미가 없었다.그동안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에 오르기 위해, 또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성도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한 모든 노력은 오직 눈앞의 여자를 얻기 위해서였다.만약 차설아가 정말 그녀의 여자로 되어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성대 그룹의 대표고 뭐고 안중에도 두지 않을 수 있었다.“정말이야?”차설아는 조금 의외인 듯 남자를 바라봤다.광기가 어린 남자의 눈빛에 차설아는 그가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돈을 버는 거야 쉽지만 진짜 사랑을 찾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모든 사람이 다 로봇 같은 도윤 형처럼 사업, 부, 가족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게 아니에요. 나 성진은 그런 욕심이 없어요. 그냥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하고 싶다고요.”성진이 모처럼 진지한 모습을 보였는데 의외로 애틋해 보이기도 했다.차설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그리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웃겨.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내가 들었던 그 어떤 농담보다 더 웃긴데?”“그래도 믿지 않네요...”성진이 고개를 젓고는 한숨을 푹
두 사람 모두 놀란 얼굴을 보였다.소영금을 향한 차설아의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한편으로는 그녀가 미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 아들을 잇달아 잃은 그녀가 불쌍하기도 했다.마찬가지로 전 며느리인 그녀에 대한 소영금의 감정도 복잡할 것이다.처음에는 극도로 미워하다가 두 사람이 이혼한 후 또 마음에 들어 하다가, 결국에는 원한을 품은 사이로 되었다. 영화도 이보다 더 드라마틱할 수는 없을 것이다.“안녕하세요, 여사님.”차설아는 어색한 마음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소영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떻게 여기서 만날 수 있죠...”“내 아들 방에 불이 켜졌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왔어. 그런데 너였던 거야...”소영금의 눈빛에는 증오와 슬픔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결국 모든 걸 내려놓은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역시 이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차설아도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소영금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안타까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다 각자 운명을 타고난 거예요.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인은 개뿔!”평온한 얼굴을 보였던 소영금이 갑자기 눈을 붉히더니 흥분했는지 차설아의 팔을 잡고는 말했다.“내 아들은 죽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우수하고 완벽한 사람이 어떻게 쉽게 죽겠어? 너랑 도윤이가 작정하고 나 속이는 거지? 사실 도윤이 죽지 않았잖아. 그저 사람 없는 곳에 숨어서 은밀한 계획을 짜고 있는 거잖아. 아는 사람이 많으면 계획을 실행할 수 없기에 모두를 속이고 죽은 척을 한 거지?”“하지만 넌 다르잖아. 넌 도윤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잖아. 도윤이가 4년 동안 너를 관심하지 않는 척을 해도 난 도윤이 엄마야. 내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고. 도윤이가 널 내려놓은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래서 네가 돌아온 걸 알고 도윤이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에게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야... 말해, 도윤이
차설아의 반응을 본 소영금은 순간 눈을 번쩍이더니 흥분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혹시 뭐라도 생각난 거야? 어서 말해봐!”“역시 내 아들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어! 분명 너에게 단서를 남겼어!”차설아는 고개를 저으며 솔직한 표정으로 허탈해서 말했다.“저한테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친어머니인 사모님도 생사를 모르고 계신다면 전 더더욱 몰라요... 전 지금까지 모두 다른 사람들 입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묘지까지 정하셨잖아요, 시신을 어디에 안치해두었는지 알고 계신 거 아닌가요?”소영금은 눈시울을 붉히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사고가 나서 병원에서 죽었다고만 했어. 아주 처참한 모습이라 내가 보면 놀랄까 봐 도윤이 아버지가 밤에 화장을 해버렸지. 그 묘지도 나와 함께 상의해서 선택한 것이지만, 아직 난 절대 믿지 않아.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계획이 있는 것 같아서 눈 감고 같이 연기를 해줬을 뿐이야...”“하지만 지금 성대 그룹은 이미 뒤죽박죽이야. 세상에는 내 아들을 모욕하는 유언비어가 가득하고, 가장 무서운 건 내일 회사를 하찮은 잡종에게 빼앗기게 생겼어. 성대 그룹은 우리 가문이 몇 대에 걸쳐 일궈낸 회사야. 특히 도윤이는 회사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어. 만약 살아 있다면, 진짜 소중한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이때, 성진이 방에서 나오더니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회전계단 중앙에 서서, 마치 천하를 내려다보는 왕의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하찮은 잡종?”남자는 비꼬는 듯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큰어머니는 역시 제 가슴을 쿡쿡 찌르는 말만 하시네요.”“성진?”소영금은 이내 비통한 감정을 추스르고 도도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여긴 내 아들 집이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너 같은 출신 없는 사생아는 여기 있을 자격 없어. 당장 나가!”옆에서 듣고 있던 차설아는 간담이 서늘해졌다.‘쯧쯧, 역시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