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정곡에 찔려 분노의 표정으로 말했다.“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기 아이들이 아버지 없이 자라길 바라겠어요? 아이들 아버지가 너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이 다른 상처를 받지 않도록 보호할 수밖에 없었어요.”“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요?”미스터 Q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믿을 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당신의 그 기준이 아이들의 생각보다 중요한가요? 오히려 아이들은 당신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요.”“당신이 뭘 알아요?”차설아가 반박했다.“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내가 키웠어요. 세상에서 나보다 아이들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요. 아이들이 어떤 아버지를 원하는지 내가 알아서 판단할 수 있으니 당신이 지적할 필요는 없어요.”“정말로 고집불통이네.”미스터 Q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럼 나는 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왜 꼭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데요?”‘당신이 아이들 아버지의 원수니까!’하지만 차설아는 차마 이 말을 내뱉지 못했다.“그럼 이렇게 하죠...”차설아가 난감한 얼굴을 보이자 남자가 말했다.“나한테 시간을 주는 건 어때요? 지금부터 당신이 다시 섬을 되찾아갈 때까지 내가 달이 아버지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때도 내가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나도 포기할게요. 어때요?”미스터 Q의 말은 너무나도 의외였다.자정 살인마라고 불리는 사람이 물러설 줄이야?그녀는 남자를 바라보더니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되기는 하지만 왜...”“이유는 없어요. 그냥 달이와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요. 어쩌면 내가 전생에 달이 아빠였을지도 모르죠.”남자가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결국 돈이 필요한 차설아는 일단 미스터 Q의 제의에 동의했다.계약서를 체결한 그녀는 순조롭게 돈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워낙 새로운 것을 좋아하던 달이 녀석은 더는 그녀에게 달라붙지 않고, 미스터
차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차설아와 미스터 Q는 가는 길이 달라 헤어지려고 했다.차설아는 이 순간을 진작 바랐지만 순수한 달이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남자에게 달라붙고는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아빠, 이제 헤어지는 거예요? 너무 아쉬워요. 같이 집으로 가서 엄마와 오빠랑 같이 살면 안 돼요?”“그게...”미스터 Q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설아가 굳은 얼굴로 거절했다.“안 돼!”“왜 안 돼요? 엄마랑 아빠랑 달이가 같은 집에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달이야, 엄마 말 들어봐. 이 사람 말이야, 좋은 사람이 아니거든. 그냥 같이 놀면 모르겠는데 왜 집까지 들이려고 해? 이거 완전 나쁜 사람 집에 초대하는 격이야, 너무 위험해. 그래서 안 되는 거야.”“하지만 미스터 Q는 나쁜 사람이 아닌 좋은 사람 같아요. 우리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잘해주고 챙겨주고 있잖아요.”귀여운 달이는 이제 미스터 Q를 굳게 믿고 있었다.달이는 미스터 Q와 알고 지낸 지 이틀밖에 안 되었지만 미스터 Q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잘해주는 걸 느낄 수 있었다.엄마와 똑같이 오직 그녀를 위한 순수한 마음이 느껴졌고, 충분히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얘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차설아는 정말 화가 나 두 팔을 두르면서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미스터 Q를 따라가. 엄마를 왜 따라오는 거야?”그 말을 들은 달이는 얼른 미스터 Q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차설아의 허벅지를 끌어안으며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질투하지 마세요. 달이는 영원히 엄마를 제일 사랑해요. 달이에게 엄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없다고요. 두 사람 중에 굳이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엄마를 선택하죠.”“됐어, 나랑 얘기하지 마.”차설아가 고개를 홱 돌리고는 씩씩거리며 말했다.‘흥, 내가 그렇게 쉽게 달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차설아는 오늘 오는 길에도 여러 번 질투를 느꼈다. 달이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차설아는 달이가 연애에 눈이 멀어 모든 걸 포기하는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가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얼마 후 택시는 곧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차설아는 아직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난리가 난 집 안의 상황을 예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배경윤은 울면서 난리를 부리고 있었고, 원이는 덤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원이야, 제발, 내가 부탁할게. 내 휴대폰에 있는 바이러스를 지워줘. 휴대폰에 엄청 중요한 파일이 있단 말이야, 절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돼.”“무슨 중요한 파일이 있겠어요? 한 번 봤는데 이모 셀카 사진밖에 없던데요?”“셀카 사진이 안 중요해? 이모 부탁을 들어줘. 다른 건 몰라도 휴대폰을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단 말이야. 경윤 이모가 패배를 인정할 테니까 제발 지워줘. 이렇게 부탁할게.”“패배를 인정하면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 빨리 알려주세요. 엄마는 왜 인사도 안 하고 떠난 거예요? 엄마가 제 연락을 받지 않던데 설마 저를 버린 건 아니겠죠?”원이가 입을 삐죽 내밀더니 씩씩거리며 배경윤에게 물었다.배경윤은 죽고 싶은 마음이 다 생겼다.“그게, 나도... 나도 잘 몰라. 그냥 너를 잘 돌봐달라고 문자가 왔었어. 그리고 사라졌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너를 돌봐주러 온 게 아니라 완전 너에게 당하고 있잖아. 무슨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더 상대하기 더 까다로워? 내가...”“무슨 일이야?”차설아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는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원이는 듬직하게 앉아있더니 차설아의 목소리를 듣고는 쌩 달려갔다.“엄마, 돌아오셨어요? 원이는 엄마가 원이를 버리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녀석은 엄마 뒤에 있는 사랑스러운 동생과 존경하는 민이 이모까지 발견하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달이랑 민이 이모님도 온 거예요? 정말 잘됐어요!”“오빠, 드디어 달이랑 만나게 되었네. 안아줘!”두 녀석은 반가운 마음에 서로 껴안았다.“언니, 드디어 돌아왔어? 언... 언니 아들이 어떤 짓을 했는
차설아가 그 말을 듣더니 곧바로 흥분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그래, 아무나 아빠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엄청 중요한 사람이니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고. 아무 남자에게나 아빠라고 부르면 돼? 원이야, 달이가 평소 원이의 말을 잘 듣잖아. 이번에 달이를 제대로 교육해야 해.”그렇다, 차설아가 달이를 설득하기 위한 ‘최종 비밀 병기’는 바로 원이었다.그녀가 한 말이면 달이가 꼭 듣는 건 아니었지만 원이의 말은 무조건 믿으며 따랐다.아니나 다를까, 원이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면서 달이를 교육하기 시작했다.“달이야, 오빠가 말했었잖아. 이 세상은 아주 복잡한 거라고. 엄마랑 오빠, 민이 이모, 경수 아빠랑 경윤이 이모 빼고는 우리를 접근하는 사람 모두 나쁜 사람일 수 있어. 아무 사람을 아빠로 따랐다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면 어떻게 해? 우리를 해치려고, 심지어 엄마를 해치려고 하면 어떻게 해?”평소의 달이라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원이의 말을 새겨듣겠지만 이번에 달이는 보기 드물게 원이의 말을 듣지 않고 반박했다.볼이 빨개진 달이는 귀여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오빠의 말이 맞지 않은 것 같아.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어디 그렇게 많겠어?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은 다 엄청 좋은 사람들이었어. 아빠도 좋은 사람이야. 엄마가 편찮으실 때 챙겨주셨고, 나랑도 놀아주고 비행기도 태워줬어. 그리고 헬리콥터도 타 하늘을 나는 느낌을 받게 해주겠다며 약속했단 말이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어떻게 나쁜 사람일 수 있겠어?”차설아와 원이가 그 말을 듣고는 마음이 답답해 발을 동동 구르며 한숨을 쉬었다.“네 동생 좀 어떻게 해 봐. 이거 완전 사랑에 눈먼 여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얼른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설득해. 아니면 나중에 커서도 나쁜 남자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고생할 게 뻔해.”차설아가 원이에게 말했다.그녀는 모든 희망을 원이에게 걸었다.원이가 더 엄숙한 얼굴로 달이를 보며 말했다.“달이야,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차설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엄숙한 얼굴로 배경윤에게 물었다.“돈을 구했다고? 벌써?”배경윤은 놀란 마음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오빠가 은행에서 빌린 돈에 이자까지 더하면 최소 1조는 된다고 하던데 그렇게 많은 돈을 언니가 벌써 모았다고? 그럴 수가 있나?’“언니, 이 돈 어떻게 구한 거야? 설마 또...”“걱정하지 마. 다시는 그 바닥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할아버지와 약속했었어. 이 돈은 빌린 돈이야. 때가 되면 다시 돌려줘야 해.”“누구한테서 빌렸는데?”“그건 몰라도 돼. 아무튼... 문제없는 돈이니 걱정하지 마. 높은 이자가 붙은 것도 아니고 출처가 불분명한 돈도 아니니 안심하고 써도 돼.”차설아는 배경윤에게 너무 많은 걸 알리고 싶지 않아 미스터 Q와 있었던 일을 숨겼다.“그럴 리가 없어!”배경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하늘에서 이렇게 큰돈이 주어진다고? 1조가 쉽게 빌릴 수 있는 돈이야? 전체 해안시에서 돈 많은 성씨 가문을 빼고는 이 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네. 그래서... 설마 성씨 가문에 가서 빌린 건 아니겠지?”“그게...”차설아는 배경윤이 이런 기상천외한 생각을 할 줄은 몰랐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전체 해안시에서 1조의 큰돈을 내놓을 수 있는 가문은 성씨 가문밖에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차설아는 아예 배경윤을 따라서 말했다.“역시 네가 눈치가 빨라 속일 수 없다니까. 성씨 가문에 가서 돈 빌린 거 맞아. 그때 나에게 미안한 짓을 한 것도 있고, 선뜻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이렇게 생각하면 성씨 가문이 완전히 매정한 것도 아니란 말이야. 만약 성도윤이 언니를 구하려다가 죽은 걸 알게 되고, 또 빌려 간 이 돈을 천신 그룹이 성대 그룹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쓰인 걸 알게 된다면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를까?”“그건 내가 상관할 것 없지. 비즈니스계가 얼마나 살벌한 곳인데, 그건 그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야. 차씨 가문이 재기할 수 있는 기
배성준은 의외인 듯 놀란 표정을 보이더니 차설아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정말 돌아올 줄이야. 그래도 그 패가망신한 자식을 쉽게 안 놓아줄 생각인가 보지? 하지만 경수는 배씨 가문 도련님이라는 이름밖에 없어. 아무리 들볶는다고 해도 돈을 내놓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 얼른 다른 사람에게 빌붙는 게 좋을 거야.”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빠가 먼저 언니에게 달라붙었거든요. 설마 설아 언니가 배씨 가문 돈을 보고 오빠를 받아줬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언니는 성씨 가문도 미련 없이 쿨하게 떠난 여자라고요. 그런데 왜 우리 배씨 가문의 돈을 탐내겠어요. 김칫국 그만 마셔요.”“닥쳐!”배성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가장 아끼는 두 자식이 모두 그의 체면을 구기고 있었으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제가 틀린 말을 했어요? 설아 언니는 전혀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작정하면 몇천억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왜 돈을 보고 오빠를 받아들였겠어요?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그래?”배성준의 얼굴색이 갑자기 바뀌더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당신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찾아온 거란 말이야?”차설아가 씩 웃고는 말했다.“그래요, 돈은 이미 마련했어요. 아버님께서 약속을 지키셨으면 하는데요. 더는 경수를 괴롭히지 마세요. 그리고 약속대로 부성 그룹의 지분도 모두 넘겨주셔야 해요.”배성준이 대답했다.“당신이 돈을 갚는다면 당연히 약속을 지키지. 다만... 조건이 하나 있네. 그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경수에게는 상속권도 차려지지 않을 거야.”“무슨 조건이죠? 말씀해 보세요.”“부성 그룹의 지분은 그 패가망신한 놈에게 넘겨도 돼. 앞으로 부성 그룹은 그놈의 것으로 되겠지. 하지만 당신이 그놈이랑 연을 끊어야 해. 다시는 경수의 마음을 받아주지 말라고. 두 사람 앞으로 얼굴 볼 일도 없었으면 해.”배성준이 단호하게 말
배성준이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이 집에서 나 배성준의 말을 듣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거야? 다들 나 화나게 만들려고 작정한 거야?”차설아는 그들이 싸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그저 조용히 계약서에 사인하고는 말했다.“사인했어요, 그리고 돈은 경수 개인 계좌에 보낼게요. 경수에게 한 마디만 전해주세요. 그동안 저를 위해 한 모든 것이 고마웠다고요. 앞으로는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배씨 저택을 떠났다.허전한 마음보다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그동안 차설아는 배경수의 도움을 무상으로 받아왔기 때문에 사실 마음의 부담이 매우 큰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배성준이 얘기를 꺼냈으니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도 자연스레 그와 선을 그을 수 있다.다만 천신 그룹은 그녀와 배경수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나 두 사람이 완전히 선을 긋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차설아는 이 일을 될수록 빨리 처리해야겠다며 다짐했다.배씨 저택에서.배경수는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배경윤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왜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풀어주신 거야? 상속권도 넘겨주시겠다고... 설마 보스가 정말 돈을 모은 거야?”배경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배경윤을 보며 물었다.“그래, 설아 언니가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을 구한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아빠가 오빠를 풀어준 거고. 두 사람 계약서까지 하나 만들어 사인했어...”배경수는 계약 내용을 배경수에게 알려줬다.“젠장!”배경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상처에 약을 채 바르지 못했는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는 씩씩거리며 말했다.“보스 방금 떠났지? 내가 쫓아가야겠어.”“그냥 가지 마. 내가 말했잖아, 계약 내용 중에 두 사람 다시 얼굴을 보게 된다면 설아 언니가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조항이 있다고. 지금 쫓아간다고 해도 설아 언니에게 폐만 끼칠 거야.”“무슨 계약 내용이 그래? 내가 당장 가서 찢어버리겠어.”“오빠, 좀 진정해. 급
배경윤의 ‘좋은 방법’을 들은 배경수는 그제야 구겨진 미간을 폈다.이때 배성준이 그의 방 앞으로 다가왔는데 그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득의양양했다.“아들, 기분이 어때? 맞은 곳은 많이 아파?”그는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머금은 채 배경수에게 말을 걸었다.배경수는 차가운 얼굴을 보였다. 배성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래도 아버지가 봐주신 덕분에 이렇게 숨을 붙이고 살고 있잖아요.”“쯧쯧, 말투를 들어보니 아직도 나에게 화가 난 거야? 내가 다 너를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 아니야. 나 배성준의 아들로 살아가는데 너에게 시집오고 싶어 하는 여자가 한둘이야? 왜 꼭 이혼한 여자에게 매달리는 건데? 그래도 그 여자가 양심은 있어. 네가 은행에서 빌린 돈을 모았다니. 이렇게 보면 넌 역시 나 배성준의 아들이야. 여자를 홀리는 마성의 매력이 있다고.”배성준이 말하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배경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배경수의 어깨에는 아직 깊은 채찍 자국이 남아 있었다.배성준이 그 상처를 건드리자마자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는데도 배경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배경윤이 얼른 배경수의 편을 들어주며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왜 그렇게 매정하게 구신 거예요? 오빠가 설아 언니를 얼마나 오랫동안 쫓아다녔는데요. 이제 설아 언니가 겨우 마음을 열었는데 아빠도 참... 두 사람 사이를 그대로 갈라놓다니. 정말 독하시네요. 아빠처럼 독한 사람을 평생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이제 와서 오빠를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전에는 패가망신한 놈이라고, 때려죽이겠다고 욕하시더니. 역시 돈이 최고네요. 아빠의 마음을 돌려놨으니. 사람들이 우리 배씨 가문을 무시하는 것도 이유가 있어요, 돈에 눈이 먼 게 맞잖아요.”“안 닥쳐? 이 계집애가 가만히 보면 맨날 내 체면을 구겨!”배성준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막냇딸을 워낙 예뻐했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씩 웃으며 말했다.“아빠가 일석이조인 일을 한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