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가 그 말을 듣더니 곧바로 흥분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그래, 아무나 아빠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엄청 중요한 사람이니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고. 아무 남자에게나 아빠라고 부르면 돼? 원이야, 달이가 평소 원이의 말을 잘 듣잖아. 이번에 달이를 제대로 교육해야 해.”그렇다, 차설아가 달이를 설득하기 위한 ‘최종 비밀 병기’는 바로 원이었다.그녀가 한 말이면 달이가 꼭 듣는 건 아니었지만 원이의 말은 무조건 믿으며 따랐다.아니나 다를까, 원이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면서 달이를 교육하기 시작했다.“달이야, 오빠가 말했었잖아. 이 세상은 아주 복잡한 거라고. 엄마랑 오빠, 민이 이모, 경수 아빠랑 경윤이 이모 빼고는 우리를 접근하는 사람 모두 나쁜 사람일 수 있어. 아무 사람을 아빠로 따랐다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면 어떻게 해? 우리를 해치려고, 심지어 엄마를 해치려고 하면 어떻게 해?”평소의 달이라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원이의 말을 새겨듣겠지만 이번에 달이는 보기 드물게 원이의 말을 듣지 않고 반박했다.볼이 빨개진 달이는 귀여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오빠의 말이 맞지 않은 것 같아.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어디 그렇게 많겠어?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은 다 엄청 좋은 사람들이었어. 아빠도 좋은 사람이야. 엄마가 편찮으실 때 챙겨주셨고, 나랑도 놀아주고 비행기도 태워줬어. 그리고 헬리콥터도 타 하늘을 나는 느낌을 받게 해주겠다며 약속했단 말이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어떻게 나쁜 사람일 수 있겠어?”차설아와 원이가 그 말을 듣고는 마음이 답답해 발을 동동 구르며 한숨을 쉬었다.“네 동생 좀 어떻게 해 봐. 이거 완전 사랑에 눈먼 여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얼른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설득해. 아니면 나중에 커서도 나쁜 남자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고생할 게 뻔해.”차설아가 원이에게 말했다.그녀는 모든 희망을 원이에게 걸었다.원이가 더 엄숙한 얼굴로 달이를 보며 말했다.“달이야,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차설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엄숙한 얼굴로 배경윤에게 물었다.“돈을 구했다고? 벌써?”배경윤은 놀란 마음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오빠가 은행에서 빌린 돈에 이자까지 더하면 최소 1조는 된다고 하던데 그렇게 많은 돈을 언니가 벌써 모았다고? 그럴 수가 있나?’“언니, 이 돈 어떻게 구한 거야? 설마 또...”“걱정하지 마. 다시는 그 바닥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할아버지와 약속했었어. 이 돈은 빌린 돈이야. 때가 되면 다시 돌려줘야 해.”“누구한테서 빌렸는데?”“그건 몰라도 돼. 아무튼... 문제없는 돈이니 걱정하지 마. 높은 이자가 붙은 것도 아니고 출처가 불분명한 돈도 아니니 안심하고 써도 돼.”차설아는 배경윤에게 너무 많은 걸 알리고 싶지 않아 미스터 Q와 있었던 일을 숨겼다.“그럴 리가 없어!”배경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하늘에서 이렇게 큰돈이 주어진다고? 1조가 쉽게 빌릴 수 있는 돈이야? 전체 해안시에서 돈 많은 성씨 가문을 빼고는 이 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네. 그래서... 설마 성씨 가문에 가서 빌린 건 아니겠지?”“그게...”차설아는 배경윤이 이런 기상천외한 생각을 할 줄은 몰랐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전체 해안시에서 1조의 큰돈을 내놓을 수 있는 가문은 성씨 가문밖에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차설아는 아예 배경윤을 따라서 말했다.“역시 네가 눈치가 빨라 속일 수 없다니까. 성씨 가문에 가서 돈 빌린 거 맞아. 그때 나에게 미안한 짓을 한 것도 있고, 선뜻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이렇게 생각하면 성씨 가문이 완전히 매정한 것도 아니란 말이야. 만약 성도윤이 언니를 구하려다가 죽은 걸 알게 되고, 또 빌려 간 이 돈을 천신 그룹이 성대 그룹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쓰인 걸 알게 된다면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를까?”“그건 내가 상관할 것 없지. 비즈니스계가 얼마나 살벌한 곳인데, 그건 그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야. 차씨 가문이 재기할 수 있는 기
배성준은 의외인 듯 놀란 표정을 보이더니 차설아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정말 돌아올 줄이야. 그래도 그 패가망신한 자식을 쉽게 안 놓아줄 생각인가 보지? 하지만 경수는 배씨 가문 도련님이라는 이름밖에 없어. 아무리 들볶는다고 해도 돈을 내놓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 얼른 다른 사람에게 빌붙는 게 좋을 거야.”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빠가 먼저 언니에게 달라붙었거든요. 설마 설아 언니가 배씨 가문 돈을 보고 오빠를 받아줬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언니는 성씨 가문도 미련 없이 쿨하게 떠난 여자라고요. 그런데 왜 우리 배씨 가문의 돈을 탐내겠어요. 김칫국 그만 마셔요.”“닥쳐!”배성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가장 아끼는 두 자식이 모두 그의 체면을 구기고 있었으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제가 틀린 말을 했어요? 설아 언니는 전혀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작정하면 몇천억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왜 돈을 보고 오빠를 받아들였겠어요?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그래?”배성준의 얼굴색이 갑자기 바뀌더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당신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찾아온 거란 말이야?”차설아가 씩 웃고는 말했다.“그래요, 돈은 이미 마련했어요. 아버님께서 약속을 지키셨으면 하는데요. 더는 경수를 괴롭히지 마세요. 그리고 약속대로 부성 그룹의 지분도 모두 넘겨주셔야 해요.”배성준이 대답했다.“당신이 돈을 갚는다면 당연히 약속을 지키지. 다만... 조건이 하나 있네. 그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경수에게는 상속권도 차려지지 않을 거야.”“무슨 조건이죠? 말씀해 보세요.”“부성 그룹의 지분은 그 패가망신한 놈에게 넘겨도 돼. 앞으로 부성 그룹은 그놈의 것으로 되겠지. 하지만 당신이 그놈이랑 연을 끊어야 해. 다시는 경수의 마음을 받아주지 말라고. 두 사람 앞으로 얼굴 볼 일도 없었으면 해.”배성준이 단호하게 말
배성준이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이 집에서 나 배성준의 말을 듣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거야? 다들 나 화나게 만들려고 작정한 거야?”차설아는 그들이 싸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그저 조용히 계약서에 사인하고는 말했다.“사인했어요, 그리고 돈은 경수 개인 계좌에 보낼게요. 경수에게 한 마디만 전해주세요. 그동안 저를 위해 한 모든 것이 고마웠다고요. 앞으로는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배씨 저택을 떠났다.허전한 마음보다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그동안 차설아는 배경수의 도움을 무상으로 받아왔기 때문에 사실 마음의 부담이 매우 큰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배성준이 얘기를 꺼냈으니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도 자연스레 그와 선을 그을 수 있다.다만 천신 그룹은 그녀와 배경수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나 두 사람이 완전히 선을 긋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차설아는 이 일을 될수록 빨리 처리해야겠다며 다짐했다.배씨 저택에서.배경수는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배경윤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왜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풀어주신 거야? 상속권도 넘겨주시겠다고... 설마 보스가 정말 돈을 모은 거야?”배경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배경윤을 보며 물었다.“그래, 설아 언니가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을 구한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아빠가 오빠를 풀어준 거고. 두 사람 계약서까지 하나 만들어 사인했어...”배경수는 계약 내용을 배경수에게 알려줬다.“젠장!”배경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상처에 약을 채 바르지 못했는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는 씩씩거리며 말했다.“보스 방금 떠났지? 내가 쫓아가야겠어.”“그냥 가지 마. 내가 말했잖아, 계약 내용 중에 두 사람 다시 얼굴을 보게 된다면 설아 언니가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조항이 있다고. 지금 쫓아간다고 해도 설아 언니에게 폐만 끼칠 거야.”“무슨 계약 내용이 그래? 내가 당장 가서 찢어버리겠어.”“오빠, 좀 진정해. 급
배경윤의 ‘좋은 방법’을 들은 배경수는 그제야 구겨진 미간을 폈다.이때 배성준이 그의 방 앞으로 다가왔는데 그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득의양양했다.“아들, 기분이 어때? 맞은 곳은 많이 아파?”그는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머금은 채 배경수에게 말을 걸었다.배경수는 차가운 얼굴을 보였다. 배성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래도 아버지가 봐주신 덕분에 이렇게 숨을 붙이고 살고 있잖아요.”“쯧쯧, 말투를 들어보니 아직도 나에게 화가 난 거야? 내가 다 너를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 아니야. 나 배성준의 아들로 살아가는데 너에게 시집오고 싶어 하는 여자가 한둘이야? 왜 꼭 이혼한 여자에게 매달리는 건데? 그래도 그 여자가 양심은 있어. 네가 은행에서 빌린 돈을 모았다니. 이렇게 보면 넌 역시 나 배성준의 아들이야. 여자를 홀리는 마성의 매력이 있다고.”배성준이 말하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배경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배경수의 어깨에는 아직 깊은 채찍 자국이 남아 있었다.배성준이 그 상처를 건드리자마자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는데도 배경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배경윤이 얼른 배경수의 편을 들어주며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왜 그렇게 매정하게 구신 거예요? 오빠가 설아 언니를 얼마나 오랫동안 쫓아다녔는데요. 이제 설아 언니가 겨우 마음을 열었는데 아빠도 참... 두 사람 사이를 그대로 갈라놓다니. 정말 독하시네요. 아빠처럼 독한 사람을 평생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이제 와서 오빠를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전에는 패가망신한 놈이라고, 때려죽이겠다고 욕하시더니. 역시 돈이 최고네요. 아빠의 마음을 돌려놨으니. 사람들이 우리 배씨 가문을 무시하는 것도 이유가 있어요, 돈에 눈이 먼 게 맞잖아요.”“안 닥쳐? 이 계집애가 가만히 보면 맨날 내 체면을 구겨!”배성준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막냇딸을 워낙 예뻐했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씩 웃으며 말했다.“아빠가 일석이조인 일을 한
“그동안 보스와의 인연이 깊어요. 특히 천신 그룹은 보스와 함께 시작한 회사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천신 그룹은 보스의 노력으로 성장한 회사죠, 저는 그저 돈만 냈고. 만약 정말 보스와 인연을 끊으려고 하면 천신 그룹의 경영권 소속을 제대로 나눠야 해요.”배경수가 잠깐 뜸을 들이며 배성준의 표정을 관찰하고는 조심스럽게 떠보듯 물었다.“만약 제 이름으로 된다면 저는 보스에게 돈을 물어야 하고 보스 이름으로 된다고 해도 나는 돈을 달라고 차마 입을 열지 못하겠어요. 아니면...”배성준이 손을 젓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보잘것없는 회사 가지고 뭘 고민을 해? 계속 빚지고 있다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살릴 방법이 없을 거야. 차설아와 더 얽히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냥 차설아에게 경영권 넘겨줘.”배성준은 천신 그룹이 배경수가 차설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회사라고 생각했다. 배씨 가문에서 투자해 80%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맞지만 지금 계속 적자를 보고 있기 때문에 빨리 넘겨주는 것도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인 듯싶었다.“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런데 경림 누나가 천신 그룹의 세 번째 주주예요. 누나가 동의할까요?”배경수가 한숨을 푹 쉬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만약 경림 누나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배씨 가문은 결국 천신 그룹과 연을 끊으려야 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보스 얼굴을 보지 않고 산다는 일도 절대 이루어질 수 없겠죠.”“경림이는 내가 잘 설득할게. 계속 적자를 보는 회사를 왜 시간 낭비를 하면서 경영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배성준은 천신 그룹이 절대 일어서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배경수는 묵묵히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차설아가 배씨 저택을 떠날 때 이미 늦은 밤이었다.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그녀는 차를 성씨 저택으로 운전했다.이곳은 그녀가 4년 동안 지내온, 그녀와 성도윤의 집이었다.물론 그녀에게만 ‘집’이었을 것이다. 집주인인 성도윤에게는
성씨 저택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텅 비었다. 정원에 꽃도 심어있지 않았고 거실에 불도 안 켜져 별장 내부는 어두컴컴했을 뿐만 아니라 쿰쿰한 냄새까지 났다.하지만 유독 2층에 있는 성도윤의 방에만 어두운 등이 켜져 있었고, 창문에 큰 체구 남자의 그림자가 위에 비쳤다.차설아는 거실을 지나고 계단을 따라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갔다.성도윤의 방문은 반쯤 닫혀 있었다. 문틈 사이로 그녀는 창가에 한 남자가 서 있다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하지만 남자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훤칠하고 꼿꼿하고 차가운 뒷모습을 가진 남자가 성도윤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순간 차설아는 오랜만에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다짜고짜 앞으로 걸어가더니 문을 확 열고는 말했다.“성도윤, 역시 살아있을 줄 알았어!”창가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리고는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형수님, 아쉽게 되었네요. 실망하게 해 죄송합니다. 나는 형수님이 그리워하는 남자가 아닌걸요?”“성진? 당... 당신이 왜 여기에?”피가 들끓던 차설아는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본 뒤 곧바로 마음이 식어버렸다.그녀는 창피한 마음에 이마를 짚었는데 당장이라도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었다.‘X발, 또 사람을 잘못 본 거야? 정말 너무 부끄러워.’“내일이면 나는 그 잘난 도윤 형을 대신해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에 앉게 될 거예요. 그리고 도윤 형이 가졌었던 모든 걸 손에 넣게 되겠죠. 그래서 오늘 밤에 형이 누리던 형의 인생을 미리 느껴보려고 온 거예요. 너무나도 당연한 거 아닌가요?”성진의 잘생긴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모든 걸 손에 넣어 두려울 게 없다는 자신이 담겨 있었다.차설아는 괜히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렇다고 우쭐댈 게 뭐가 있어. 당신은 결국 성대 그룹이 가장 혼란스러운 틈을 타 대표 자리에 앉은 비겁한 사람일 뿐인데 말이야. 정말 치사하다고.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영
괜히 이 미친놈의 팔다리를 부러뜨렸다가는 그가 평생 매달릴 수도 있었다!“역시 형수님이 저를 아끼시네요. 힘을 쓰지도 않는 걸 보니...”성진은 거의 빠질 뻔한 팔을 휙휙 돌리고는 계속 겁 없이 촐싹거리면서 차설아의 한계를 도발했다.차설아는 겨우 진정하고는 떠보듯 물었다.“설마 진짜 도윤 씨 자리를 대신하고 도윤 씨의 모든 것을 가지려는 건 아니지?”“도윤 형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고요. 성대 그룹이 계속 대표 없이 운영될 수도 없고. 지금 내가 성대 그룹을 맡는 게 성대 그룹을 돕는 것이지, 가져가려고 한다는 말은 타당치 않죠.”“흥, 네 생각대로 쉽게 일이 진행되진 않을 거야. 도윤 씨가 없다고 해도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님이 계시잖아. 당신이 제멋대로 움직일 때까지 그분들이 가만히 있겠어? 빨리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스스로 궁지에 몰아넣는 뻘쭘한 짓이나 하지 말고.”차설아는 성대 그룹의 세대교체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성주혁은 자기가 겨우 쌓아 올린 결과를 쉽게 남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형수님,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거예요?”“김칫국이나 마시고 있네!”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눈을 희번덕거렸다.성진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그저 일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쉽게 진행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성진이 이렇게 쉽게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를 차지하는 게 너무나도 이상했다!“할아버지와 아버님뿐만 아니라 성대 그룹의 직원부터 사업 파트너까지 모두 도윤 씨만 인정할 텐데. 당신이 성대 그룹의 대표로 된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야.”차설아는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성진을 바라봤다.이런 비겁한 사람이 성도윤의 자리를 대신하다니, 세상에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어디 더 있겠는가?“그건 형수님이 걱정하실 바가 아니죠. 인심을 매수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어요? 내가 성대 그룹 대표 자리에 앉으면 바로 KCL 그룹과 G6 칩에 관한 계약을 체결할 거예요. 그때면 하이 테크 분야
예상치 못한 성도윤의 반응에 박성훈은 진지하게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성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른 술잔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박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그럴 리 없었을 텐데... 너랑 차설아 씨는 특별한 사이잖아. 차설아 씨의 오빠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특별한 사이 아닌데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뭘 또 부정하고 그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박성훈은 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녀서 해안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성도윤과 차설아가 원래 부부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켜보아도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차설아와 어떤 사이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차설아가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고 차설아도 인정하는 눈치였어요. 차설아는 내가 하마터면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성도윤은 격동된 어조로 말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술만 들이켰다. 박성훈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성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계속해서 물었다.“다쳤다고 했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성도윤은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나 이래봬도 신경외과 의사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어.”“정말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쳐들고는 활짝 웃었다.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도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요?”사실 성도윤은 지난번 수술 뒤로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다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윤이 맞나보네. 스파크, 내 말이 맞지?”바람은 지난 일을 떠올리더니 차설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성도윤이 성철 형을 죽이려고 했다면 박성훈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성도윤이 벌인 짓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글쎄, 박성훈을 데려오면 내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오빠만 죽인다면 차씨 가문과 영흥 부둣가에 배치한 세력은 성도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차설아는 사람을 쉽게 믿었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한테 여러 번 배신당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도윤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물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성도윤은 솔직한 사람이라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만나서 물어봐.”차설아는 바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거지.”차설아는 날이 갈수록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았지만 바람은 의외로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 기회에 나랑 성도윤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오해일 수도 있다면서 직접 물어보라고 부추겼잖아. 오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더욱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난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야. 비열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거라고...”바람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난 네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수할 용기도 없고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마음 아파하고 있었잖아. 공원에서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바에는 직접 찾아가서 물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