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더 때리면 안 돼요. 우리 경수 당신한테 맞아 죽겠어요...”강혜정은 울면서 아들을 꼭 끌어안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배성준에게 빌었다.“경수는 당신의 유일한 아들이잖아요. 이대로 때려죽이면 배씨 가문의 가업은 누구에게 맡길 거예요?”“엄마, 그 말 참 듣기 불편하네요!”배씨 가문 셋째 딸인 배경림이 눈을 부라리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는 뭐 배씨 가문 사람이 아니에요? 엄마가 길바닥에서 주워 온 애들이냐고요. 경수가 없다고 우리 배씨 가문의 대가 끊겨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남녀 차별을 하세요.”“경림이 말이 맞아.”배성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나 배성준의 자식이 얘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놈을 때려죽여도 딸이 여섯이나 있어. 딸들이 다 이 패가망신하는 놈보다는 낫지. 특히 우리 경림이, 내가 그동안 맡긴 업무를 얼마나 잘 해내고 있어. 내가 마음 놓고 우리 배씨 가문의 가업을 맡길 수 있을 정도라고!”배경림이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더니 거실에 무릎 꿇고 있는 배경수를 향해 말했다.“경수야, 그때 돈을 받아 천신 그룹을 설립한 것도 여자를 꼬시려고 그런 거잖아. 그때 네가 곧 흥미 잃을 줄 알았는데 천신 그룹에 점점 더 많은 돈을 투자할 줄 누가 알았겠어? 네가 배씨 가문의 돈을 다 성도윤이 갖고 놀다가 질려서 이혼한 여자에게 갖다 바쳤잖아. 그래서 결국 네가 얻은 게 뭔데? 성도윤과 이혼한 여자가 너에게 고마워했어? 너랑 연애를 해준다고 했어? 잘 보이려고 몇 년 동안 고생했는데 뭘 얻었는데? 지금 네가 거의 맞아 죽고 있는데 그 여자가 눈곱만큼이라도 신경을 써?”배경수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벌게진 눈으로 배경림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누나,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보스는 내 목숨을 살려줬던 은인이야. 내 마음속의 신이라고. 계속 그런 보스에 대해 함부로 말한다면 아무리 누나라고 해도 난 안 봐줘.”그 말을 들은 배성준은 벌컥 역정을 냈다.“이놈의 자식, 진짜 마가 씐 거야? 나 배성준이 너 같은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 우리 아들을 제대로 홀려 정신줄을 놓게 만든 여자가 드디어 나타났구먼?”배성준은 차설아를 위아래로 훑어봤는데 마치 상품을 훑어보듯 눈빛이 매서웠다. 그러고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 말 진심이야? 정말 이 패가망신한 놈을 구하기 위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어?”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저는 큰소리만 떵떵 치는 사람이 아닙니다.”“좋아, 그래도 양심은 있구먼.”차설아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경멸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그녀를 바라보는 배성준의 눈빛이 복잡해졌고, 이어서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얼굴이 예쁘긴 하네, 우리 아들이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네...”바닥에서 무릎 꿇고 있던 배경수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보스, 나 상관하지 말고 얼른 여길 떠나. 아빠가 나를 아끼기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도 나를 죽이진 않으실 거야. 하지만 보스는 달라. 우리 아빠는 여색을 좋아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단 말이야. 보스한테 변태적인 일을 저지를 수도 있어!”배성준은 소문이 자자한 바람둥이였다. 일곱 명의 자녀 외에 그의 혼외자식은 수두룩했고, 많은 여자들을 울리기도 했다.배경수는 그런 아빠의 본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설아가 걱정되는 것이었다.하지만 차설아는 아주 덤덤했고, 심지어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변태는 많이 만나봤지. 한 사람 더 만나봤자 뭐 어떻게 되겠어?”그녀도 배성준에 관한 소문을 일찍부터 들은 바가 있었지만 자기에게까지 그런 변태적인 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닥쳐!”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배성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특히 어릴 때부터 예뻐했던 배경수가 여자에게 모든 걸 갖다 바치는 패가망신하는 놈일 뿐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바보라니. 마음속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모든 여자를 손안에 넣고 마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단 말인가?“내 요구는 아주 간단해. 이 패가망신한 놈이 너를 그렇게 오
사람들은 저마다 한시름을 놓았고, 또 차설아를 마구 비웃었다.“모두 닥쳐요. 설아 언니를 그렇게 말하지 마요. 나랑 경수 오빠의 목숨을 설아 언니가 구해준 거라고요. 우리 배씨 가문이 아무리 노력해도 설아 언니에 걸맞은 가문이 될 수 없을 거예요.”배경윤은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빨개졌고,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빨리 보스 데리고 가!”고개를 푹 숙인 배경수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배경윤을 향해 명령했다.자기가 사랑한 여자가 이토록 가족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으니 그는 부끄러워 차설아를 바라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아버지, 저를 오늘 제발 저를 때려죽이세요. 만약 죽이지 못한다면 저는 제대로 불효자식이 될 겁니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배성준을 보며 경고했다.배성준은 그가 존경하는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그런 아버지가 제대로 선을 넘었으니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이놈의 자식. 이혼한 여자 때문에 감히 아버지에게 그런 불효의 말을 해? 그럼 네 소원을 들어주지. 죽을 때까지 때려주겠어.”배성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또 배경수를 향해 살갗이 찢어지도록 채찍을 휘둘렀다.강혜정은 울면서 그를 말렸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그만해요!”계속 침묵을 지키던 차설아가 무표정으로 말했다.“아버님 말씀 모두 지당하세요.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이혼한 여자로서 경수와 거리를 둬야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경수와 거리를 두기는커녕 오히려 가깝게 지냈고, 또 당연하다는 듯이 경수가 해준 모든 걸 그대로 누렸으니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습니다.”“흥, 그래도 자기가 누렸다는 걸 인정하긴 하네.”배성준이 차설아에게 이토록 치욕스러운 수모를 안겨준 이유는 바로 차설아가 자기 신분을 확실히 알고 앞으로 더는 금쪽같은 자기 아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서였다.차설아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동안 경수가 저에게 쓴 돈, 그리고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은 모두 이자까지 더해서 갚겠습니다. 그러니 더는 경수를 탓하지 마
차설아는 이미 배씨 저택을 나섰다.배경수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는데 몸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따라 나왔어. 돌아가서 잘 치료 받아. 채찍을 제대로 맞은 것 같은데 제대로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평생 곪을지도 몰라.”“보스, 미안해. 나한테 화가 났어?”입술이 창백하고 허약한 배경수의 잘생긴 얼굴에는 자책하는 미안한 감정이 드러났다.그의 가족들은 줄곧 그가 차설아와 가깝게 지내는 걸 반대했지만 그가 큰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으니 가족들은 많은 간섭을 하지 않았었다.이번에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일이 아버지에게 알려져 노여움을 사지 않았더라면 차설아가 온 가족들에게 수모를 당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경수야, 내가 왜 너에게 화가 나겠어?”“그럼 왜 나를 등지고 있어? 내 얼굴 보기도 싫어?”“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하네...”차설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이유는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라 배경수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야. 그동안 나 대신 고생을 한 거잖아. 난 그것도 모르고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리는 줄 알았지...”배경수는 흥분된 목소리로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고는 말했다.“그런 말 하지 마. 보스는 나에게 있어서 빛 같은 존재야. 그만큼 보스를 따르고 싶고 보스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 나...”“그만해.”차설아는 손을 휙 저으며 배경수의 고백을 제지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너에게 빚진 게 너무 많아. 이제 갚을 때도 되었지. 돈을 구할 방법을 생각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 소식만 기다려.”“무슨 방법?”배경수가 미간을 구겼다.6000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는 차설아가 무슨 방법으로 갑자기 그렇게 많은 돈을 구할 수 있는지 몰랐다. 설마...“보스, 설마 다시 그 바닥에 입성해서 그 늙은 여우들과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니지? 그건 너무 위험해!”전에 배경수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차설아는 손을 저으며 작별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는데 다시 돌아오며 물었다.“참, 성심 전당포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배경수는 순간 경계심을 높이며 물었다.“그건 왜 물어보는데?”차설아는 정색을 하고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성심 전당포는 영흥 부둣가에 있어. 하지만 절대 좋은 곳이 아니야. 많은 나라의 국경 지역으로 경찰들도 손을 대지 못하는 곳이야. 위험만 가득한 곳이라고...”배경수는 전에 배성준과 한두 번 가봤는데 유난히 인상이 깊었다. 악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끔찍했었다.“그리고 성심 전당포도 보스가 생각하는 평범한 전당포가 아니야. 전당포 사장인 미스터 Q는 보스도 알다시피 자정 살인마로 소문이 자자해. 절대 그 사람과 딜을 할 생각은 마. 그건 악마와 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 번 가면 돌아오기도 힘들 걸?”그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겁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흥미를 보였다.‘악마? 갑자기 더 가고 싶어지네.’하지만 배경수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핑계를 둘러댔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원이가 하도 미스터 Q에 대해 말하니까 너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거야... 미스터 Q도 바보는 아니겠지. 내가 아무리 딜을 하고 싶어도 뭐로 딜을 하겠어?”...아파트로 돌아간 후.원이는 이미 저녁을 먹고 서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는데 발을 흔들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원이 정말 착하다. 이제 스스로를 잘 챙길 수 있네.”차설아는 원이 옆에 앉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당연하죠. 엄마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원이가 말썽을 일으키면 안 되죠.”원이의 손에 영어판 물리학 서적이 들고 있었다. 그는 이미 대학 지식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뛰어난 천재였다.차설아는 원이가 너무 우수하지만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면 조금 외로운 편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런 날도 곧 끝날 것이다.차설아는 신이 나서 말했다.“원이야, 오늘 몬
새벽 한 시.고요해야 할 깊은 밤은 영흥 부둣가가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고 시끌벅적한 때였다.차설아는 홀로 영흥 부둣가에 도착했는데 손에는 중고 시장에서 비싼 돈으로 주고 산 영흥 부둣가의 ‘기밀’ 지도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지도를 따라 성심 전당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영흥 부둣가는 역시 소문대로 혼란스러운 곳이었고 곳곳에서 범죄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절대 정상적인 사회에서 일어날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영흥 부둣가에서는 밥 먹듯이 자주 일어나고 있어 놀라움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사실 부둣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상류, 중류, 하류, 세 개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상류는 가장 바깥쪽 가장자리에 있어 비교적 정상적인 편이었고, 여러 가지 상품의 거래 중심지였다. 꼼꼼하게 살펴보면 꽤 좋은 물건도 건질 수 있어 세 개 구역 중에서는 가장 안전했다.중류부터 상황이 위험해지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불법 도박장, 불법 경기장, 불법 기원, 그리고 불법 물자의 집결지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 모인 곳이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할 수 있었는데 매일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었다.하류는 정말 인간 지옥이 따로 없었다. 너무 위험해서 보통 사람은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고 배경수의 말대로 경찰들이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곳이었다.성심 전당포는 그런 영흥 부둣가 하류의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니 전당포 사장인 미스터 Q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얼굴 한 번 보기 얼마나 힘든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차설아는 급하게 돈이 필요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런 위험한 곳에 오거나 위험한 인물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그녀도 한때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거물이었고, 영흥 부둣가보다 더 피비린내 나는 장면도 많이 겪었기에 이 정도로 겁을 먹진 않았다.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아이가 생겼기에 많이 신중해졌다. 예전에는 열정으로 최후를 생각하지 않고 일을 했었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당신, 해주의 전설인 성이란의 손녀, 맞죠?”노인이 고개를 들더니 웃는 듯 마는 듯이 말했다.웃음이 걸려있던 차설아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어떻게 아셨어요?”만약 노인이 그녀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면 차설아는 그저 노인을 뉴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성씨 가문 둘째 사모님으로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노인은 그녀의 할머니가 성이란인 걸 알고 있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차씨 가문은 그때 대외적으로 할아버지와 결혼한 여자가 바로 해주 성이란인 걸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내가 맞췄네요?”노인이 흰 수염을 만지며 말을 이어갔다.“이제 내 말을 좀 믿겠어요?”“점을 쳐서 알아내신 거라면 정말 고수시군요. 탄복합니다!”차설아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내 말을 믿는다면 궁금한 걸 한 번 운세를 보는 건 어때요?”노인이 대나무 통을 보며 차설아에게 제의했다.“좋아요, 마침 그러려던 참이었어요.”차설아는 호기롭게 대나무 통을 들고는 마구 흔들더니 막대기 하나를 들었다.노인이 결과를 보며 말했다.“제59번, 대길이네요. 어떤 일을 물어보고 싶은 거죠?”“그게...”차설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한참 주저하고는 물었다.“이번 생에 남자와의 인연이 더 있을까요?”차설아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전혀 사랑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남은 생에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될지, 혹은 누군가와 결혼할지에 대해 궁금하긴 했다.그렇다고 평생 성도윤에게만 묶일 수는 없었다. 이미 그와 이혼했기에 아무리 그가 죽었다고 해도 과부 신세는 될 수 없었으니 말이다.“산과 강물을 건너야 세상에 둘 도 없는 인연을 만날 것이다...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좋은 운세네요.”노인이 운세를 읽으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그게 무슨 뜻이죠?”“그러니까 당신 인연은 아직 길게 남았어요. 둘도 없는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니 외롭게 죽을 일은 절대 없어요.”노인의 말을 들은 차설
“선물이요?”차설아가 걸음을 멈추고는 흥미로운 얼굴로 노인을 바라봤다.‘나 오늘 완전 계 탔네. 이런 신통한 노인에게서 선물도 받고 말이야.’노인 가게에 서 파는 물건들은 값은 물론이고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진귀한 보물들이었다. 그래서 노인이 선물을 준다고 하니 차설아는 잔뜩 신이 났다.하지만 노인은 차설아에게 가게 보물이 아닌, 몸에 지니고 있던 어떤 물건을 주었다.“아가씨, 이 비단을 챙겨요. 이 비단은 언젠간 당신에게 중요한 안내를 할 거예요.”고목처럼 주름진 노인의 손에는 정교하게 만든 비단이 들려 있었다. 그는 비단을 천천히 차설아에게 건넸다.“이 비단은...”차설아는 비단 위에 그려진 도안을 보더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비단 위에 그려진 봉황과 피안꽃은 전에 할머니가 그녀에게 남긴 포대기 위의 그림과 비슷했다. 같은 사람의 작품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하지만 아쉽게도 그 화재가 있은 뒤로 포대기는 이미 새까맣게 타버렸다.차설아가 노인에게 이 비단의 출처를 물어보려던 그때, 갑자기 머리가 피투성이인 사람이 그녀에게 달려오고는 그녀의 허벅지를 안으며 말했다.“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사람들이 저를 찔러 죽이려고 해요.”도움을 청한 사람은 3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죽으면 안 돼요. 저 죽으면 제 아들이 고아가 돼요. 제발 저를 꼭 살려주세요.”차설아는 원래 이 일에 참견할 생각이 없었지만 상대도 아들을 혼자 데리고 있는 엄마라는 말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 천천히 말해봐요.”“저, 저는 골동품 시장으로 물건을 팔러 왔어요. 하지만 여기 사람들이 워낙 법도를 지키지 않잖아요. 여자 혼자 이곳으로 오니까 우습게 보였나 봐요. 바로 제 물건들을 뺏더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여인은 경계심을 높이며 품에 안고 있던 천 가방을 더 꼭 껴안았다.“이건 우리 집 가보란 말이에요. 아들이 병에 걸려 지금 돈이 절실히 필요해요. 아니면 절대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
“그렇다니까?”서은아는 이를 꽉 깨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바로 차설아한테로 갔어. 강아지처럼 따라붙더라고. 난 성도윤 얼굴조차 못 봤다니까? 진짜 한심하기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제일 바보인 것 같아. 안 그러면 이렇게 화내면서 극단적인 제안을 할 이유도 없잖아.”“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차설아는 어떤 반응이었어?”성진은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며 계속해서 물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감정을 감추려 해도 자신이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어떤 반응이겠어? 당연히 좋아하겠지. 가족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잖아.”서은아는 어이없어하며 성진이 뻔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불만을 쏟아내듯 말을 이어갔다.“두 사람은 처음부터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 우리가 힘을 합쳐서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맞긴 하지만 결국 두 사람 사이를 더 깊이 이어준 셈이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바보였던 거야. 어쩌면 우리가 해온 일들도 그들을 돕는 역할밖에 못 했던 거지. 우리는 그저 한낱 도구였을 뿐이라고!”서은아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단순히 속상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진의 질투심을 자극해 성도윤과 차설아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었다.“그렇다고?”성진의 눈빛 속에는 점점 더 강한 분노와 불만이 차올랐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본때를 보여줘야지.”“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네가 말한 거잖아.”성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었다.“성도윤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빈털터리로 만들자며?”“그래, 좋아! 또다시 동맹을 맺게 됐네. 솔직히 너라는 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 처리 하나는 잘하니까 말이야. 너랑 손잡는 게 제일 마음이 놓이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서은아는 기분 좋게 말했다.“너도 만만치 않지.”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사랑해서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