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여기 왜 있어?”차설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찾아온 불청객을 바라봤다.“환영 안 해?”바람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검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우린 서로 잘 모르는 사이인 것 같은데?”해커계의 거물이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차설아는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잘 모른다고?”바람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비록 만난 적은 없어도 인터넷에서 이미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으니 이 정도면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거장 스파크?”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헛웃음이 나왔다.아니나 다를까, 그날 성대그룹에서 이 녀석은 모든 게 계획이었고 사실은 진작에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안 그래도 빅보스를 만나고 싶어 했던 차설아에게 잘된 일이었다.“안녕, 난 거장 스파크야. 차설아라고 해.”그녀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안녕, 난 거장 바람이야. 선우시원이라고 불러도 돼.”차설아의 손을 맞잡은 바람은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그는 수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거장 스파크가 처음으로 글로벌 해커 리그에서 근소한 차이로 바람을 이긴 뒤부터 그는 꼭 거장 스파크를 찾겠다며 각오를 다졌다.소문대로 오십이 넘는 백발노인인 줄 알았는데 남편에게 바람맞은 미모의 여인이라니... 정말 흥미로운 일이었다!“선우시원?”선우라는 성이 흔치 않아 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물었다.“실례지만, S시의 유명한 선우도환과는 어떤 관계야?”“우리 할아버지야.”바람은 어깨를 으쓱이며 솔직하게 답했다.“불패 신화에 마귀 용병을 가진 S 시의 선우도환이 당신 할아버지라고?”차설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어릴 적에 할아버지한테서 자주 들었다. 전쟁터에 나갔을 때 가장 친한 형제가 두 명 있었는데 하나는 차무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우도환이었다.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지금 사이가 틀어져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할아버지는 차무진의 편에 섰기
차설아는 바람의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명함을 그대로 버렸다.어쨌든 목숨 한번을 구해줬으니 이런 장난 때문에 죽이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폭로를 하든 말든 대수롭지 않았다.바람의 입에서 나온 ‘성씨 가문이 곤경에 처했다’는 말은 그녀를 매우 궁금하게 만들었다.‘설마 성도윤이 계속 습격을 당한 것도 이것 때문인가? 도대체 누가 감히 8대 가문의 우두머리인 성씨 가문을 도발하는 거지?’배경수에게 알아보라고 시키려던 찰나 이혼할 마당에 전남편 걱정하는 자신을 보며 정신을 번쩍 차렸고 남 걱정하는 사이에 자신부터 챙기자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4년 동안 성씨 가문을 위해 많은 일을 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듣지 못했고 되레 욕설을 퍼붓는 그들에게 정이 털렸다.날씨가 좋은 걸 보고 차설아는 오랜 만에 외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배경윤한테 전화를 걸었고 두 사람은 오후 3시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뱃속에 있는 두 아이는 곧 두 달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슬슬 기대되어 아기용품을 미리 사두고 싶을 정도였다.“경윤아.”한껏 꾸미고 나온 배경윤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그녀는 배경수의 쌍둥이 여동생으로 배경수와 마찬가지로 배성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그래서 배경윤한테서는 타고난 자신감이 느껴졌고 화려한 카리스마로 사방을 휘어잡는 모습은 시선을 사로잡았다.오직 차설아 앞에서만 그녀는 털털한 모습을 보이며 ‘바보’가 된다.“우리 언니 그동안 잘 지냈어? 연락도 없고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상처는 괜찮아졌는지 어디 한번 봐봐...”배경윤은 커다란 포옹을 하고선 다급하게 차설아의 상처를 살폈다.“오빠가 너무했어. 언니 귀찮을 거라며 죽어도 못 만나게 하잖아. 언니를 독차지하려고 그러는 게 틀림없어! 자기 주제도 모르고 감히 언니를 넘보다니, 설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언니는 내 껀데.”말을 마친 배경윤은 차설아를 안으며 그녀에게 입맞춤했다.“됐어, 오글거리니까 그만해. 간만에 나왔는데 쇼핑이나
소영금은 코웃음을 친 뒤,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며 비아냥거렸다.“내 아들은 쟤 만지기도 싫어해. 임신은 무슨! 애도 못 낳는 주제에 우리 집안의 좋은 건 다 빨아 먹으면서 참 염치도 없지.”소영금의 말에 심기가 상한 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반박하려던 순간 배경윤이 다가와 소영금한테 욕설을 퍼부었다.“하하하, 아줌마는 잘 낳아서 자식 하나는 억울하게 죽고 하나는 제멋대로 살고 있나 봐요? 내가 아줌마라면 자식들이 왜 이 모양인지 반성했을 거예요. 당신이 내뱉은 그 독한 말은 전부 자식한테 돌아갈 거예요.”이혼 계획이 없었을 때 배경윤은 차설아의 처지를 생각해 그녀가 난처해질까봐 소영금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혼하게 될 마당에 더 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쉴 틈 없는 공격에 얼굴마저 새하얗게 질린 소영금은 배경윤을 가리켰다.“너. 너, 너...”그 모습을 본 임채원은 시어머니께 잘 보일 신이 주신 기회라며 기뻐하더니 옆으로 다가가 연약한 척 입을 열었다.“배경윤 씨,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그렇지 어떻게 윗사람한테 억지 부르며 무례하게 대할 수가 있죠?”‘억지를 부린다고?’그녀의 말에 화가 난 배경윤은 헛웃음이 나왔고, 손을 써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말을 아끼자는 원칙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팔을 뻗어 임채원의 뺨을 내리쳤다.“짝!”경쾌하고 우렁찬 소리에 소영금과 임채원은 정신이 멍해졌다.연약해 보이는 차설아와 달리 친구인 배경윤은 무서울 게 하나 없는 불같은 성격이었고 차마 건드릴 수 없었던 소영금은 차설아를 바라보며 건방지게 말했다.“재수 없는 것, 너는 어쩜 이딴 친구를 사귀었니. 무릎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얼굴이 너무 두꺼워서 제 친구가 손을 다쳤을 것 같은데 사과하려면 그쪽이 해야죠.”“너!”차설아가 가만히 있자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소영금은 미래의 며느리를 대신해 화풀이하려고 팔을 걷어 올렸다.그런데
차설아는 더 이상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차가운 남자의 시선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때리면 때린 거지, 더 이상 해명할 것도 없어.”차설아가 억지를 부린다고 해도 좋고,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상관없다.해명 같은 건 의미가 없어졌다.성도윤과 이혼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차설아는 성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내연녀에 억센 여자 한 명을 추가한들 또 어떻겠는가?소영금은 거만한 표정으로 흥분하며 말했다.“거봐, 인정하잖아. 아들 뭐 하고 있어? 얼른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해!”옆에서 보고 있던 배경윤은 또 화가 치밀어 올라 폭주했다.“사과는 개뿔. 당신 엄마랑 이 여우 년이 애도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언니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뺨을 때렸겠어요?”성도윤은 이 말을 듣고 차갑게 눈살을 찌푸리며 소영금과 임채원을 보았다.“사실이야?”임채원은 좀 켕기는 듯 우물쭈물하며 한참 동안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소영금은 오히려 당당하게 콧방귀를 뀌었다.“오해는 무슨. 애를 갖지 못하는 건 사실이 아니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배경윤은 목에 뭐가 걸린 듯 말문이 턱 막혔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대체 누가 그래요? 언니가 애를 못 낳는다고?”배경윤은 홧김에 차설아를 끌어당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내가 말해주죠. 언니 임신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가요. 그것도 이란성 쌍둥이라고요!”배경윤의 말은 중핵무기에 버금갈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차설아는 더욱 어리둥절했다.‘뭐지? 경윤이한테 임신 사실을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소영금은 착잡한 심정으로 차설아의 배를 쳐다보며 반신반의했다.“아들, 설아한테 마음이 없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애가 생겨?”성도윤은 얇은 입술을 오므렸다. 차가운 눈으로 차설아의 배를 바라보며 안색이 굳어졌다. 그와 차설아는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 수 있겠는가?배경윤은 사람들의 반응에 만족하며 진지하게 헛소리를 이어갔
재수 없게 성도윤의 일행들을 만나 쇼핑에 흥미를 잃은 차설아는 배경윤과 쇼핑몰에서 나와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다음날, 차설아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그녀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올리고, 꽃집에 가서 흰색 데이지 한 다발을 산 뒤, 차를 몰고 묘지로 향했다.3월 3일.차설아 부모님의 기일이다.부모님이 투신해 돌아가신 지 4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한 번도 제사를 지낸 적이 없었다.남들은 모두 차설아가 성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조상도 모른 체 하는 냉혈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직 차설아만이 집안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다.차설아는 그들이 용감하지 못한 것에 화가 났고, 너무 나약한 것에 화가 났고, 또 어리석은 방식으로 떠나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둔 것에 화가 났다.그리고 그녀가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도 감히 이 사실을 마주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이 용기는 뱃속의 두 아이가 그녀에게 준 것이다.이번 제사를 지낸 후, 그녀는 해안 시를 떠날지도 모른다.다음에 또 언제 돌아올지 그녀 자신도 모른다...그러나 묘지 앞에 이르자 차설아는 멍해졌다.합장된 묘비 앞에는 꽃다발이 늘어서 있었다.꽃은 싱싱하고 정교해서 가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4년 전 그녀의 집이 변을 당한 이후로 친척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일부러 차가를 멀리하고 있어 올 사람이 없었다.그렇다면 이 꽃은 누가 보낸 것일까?이런 의문을 품고 차설아는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때 꽃다발 옆에 있는 호박 펜던트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차설아는 조심스럽게 주웠다.이 펜던트는 매우 정교하고 안에 특수한 문자가 조각되어 있었다.차설아는 왠지 눈에 익은 것 같았지만, 누가 착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차설아는 펜던트를 호주머니에 넣고, 기회가 되면 원주인에게 돌려주려 했다.묘지를 떠날 때, 차설아는 한 남
묘지를 떠난 차설아는 집으로 돌아갔다.차설아가 집에 막 도착했을 때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받아보니 뜻밖에도 임채원이었다.임채원은 이왕의 오만함과 안하무인의 태도를 버리고 아주 상냥한 말투였다.“설아 씨, 내가 요즘 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설아 씨 물건이 아직 있더라고. 미안하지만 오늘 시간 되면 가지러 올래?” ‘임채원이 언제 이렇게 친절했지?’차설아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또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누가 알겠는가?하지만 차설아는 물러서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좋아, 오늘 갈게.”저번에 급하게 나오느라 확실히 중요한 물건들을 챙기지 못했었다.임채원이 전화를 하지 않았어도 시간을 내서 별장으로 가려고 했었다.저녁 8시쯤 차설아는 택시를 타고 성가 별장으로 향했다.성가 별장의 도우미는 원래 여주인이 돌아왔는데 인사도 하지 않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권세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차설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별장 문으로 들어갔다.차설아가 4년 동안 머물렀던 이곳, 그녀가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아쉽게도... 사람이 변했다.차설아는 마음속으로 탄식하며 슬퍼졌다.‘흥, 4년의 청춘을 이런 귀신 같은 곳에서 낭비했다니, 정말 재수 없군!’호화로운 별장 홀은 유난히 떠들썩했다.새 주인 임채원뿐만 아니라 소이서, 그리고 소이서의 남자친구 육장훈도 있었다.차설아가 들어오자, 임채원는 여주인의 모습으로 반갑게 맞이했다.“설아 씨 왔어? 마침 설아 씨 얘기하고 있었어.”차설아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내 물건은?”차설아는 자기의 물건을 챙기러 온 것이다. 물건만 가지고 바로 떠나면 되지 여기서 그녀의 가식을 받아 줄 생각이 전혀없다.“물건은 설아 씨 원래 방에 있어. 내가 도우미들한테 언제든지 가져갈 수 있게 챙겨놓으라고 했어.”“고마워.”차설아는 회전계단으로 향했다.임채원은 차설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밥 먹고 갈래?”“밥을 먹어?”차설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임채원을
임채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아직은 법적 아내인데 그건 좀 심하지 않을까?”소이서는 임채원의 팔짱을 끼고 대신해서 불평했다.“언니, 왜 그렇게 착해빠졌어요? 저번 자선행사에서 저년이 언니한테 어떻게 했는데요? 좀 혼내줘야 하지 않겠어요?”“방금 간지러워 미치겠어하는 모습 못 봤어요? 제가 선뜻 남자친구까지 빌려줬는데, 오히려 나중에 저한테 감사해야죠!”“어쨌든 걱정하지 말아요.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책임져요.”“이서야, 나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마워.”임채원은 겉으로는 감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소이서를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비웃었다. ‘총받이로 쓰이는 주제에 목숨까지 바치다니!’얼마 후 성도윤이 별장에 도착했다. 큰 덩치에서 서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어디 있어?”성도윤은 넓은 별장 홀을 차갑게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임채원은 나서서 난처한 척하며 우물쭈물 말했다. “도윤 씨, 설아 씨는 위층에 있어. 장훈 씨랑 같이...”소이서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오빠의 그 현모양처 마누라가 나랑 채원 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내 남자친구를 꼬셔 침대에 올라갔어요!”소이서는 말을 마치고 재빨리 성도윤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성도윤은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들이 차설아의 옛 침실에 도착했을 때,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야릇한 소리가 들려왔다.임채원은 능청스럽게 문을 열려 했지만 안에서 잠겨 있었다.“도윤 씨, 안에서 문이 잠겨서 열리지 않아...”성도윤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게 되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쾅”하는 소리와 함께 성도윤은 발로 문을 걷어 찼다.하지만 안의 장면을 본 그들은 멍해졌다.침실 안에서는 눈빛이 흐트러진 채 바닥에 엎드려 곰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육장훈의 동작이 매우 용속했다.“이쁜이, 이쁜이...”한편 차설아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촬영을 하
차설아는 몸부림치며 그를 밀어냈다.“성도윤, 당신 미쳤어!”‘왜 다른 사람의 고상한 흥취를 방해하는 거야?’“어린이는 보면 안 돼!”성도윤은 아직 순수한 차설아가 나쁜 것을 배울까 봐 걱정하는 아버지처럼 보였다. 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나도 알 만큼 알 거든?”“그래? 그럼 말해봐. 어느 만큼 아는데?”성도윤의 차가운 얼굴에는 이미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의 노기는 사라지고, 오히려 약간재밌다는 표정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차설아는 그날 밤 성도윤과의 야릇한 모습이 금세 머리에 떠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볼이 붉어졌다.이 수줍은 반응은 성도윤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차설아가 임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남자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했다.곧이어 임채원도 난처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와 서둘러 발뺌했다.“설아 씨 괜찮아? 나도 장훈이가 그런 일을 할 줄은 몰랐어. 둘이 안에 꽤 오래 갇혀 있었는데, 설마 설아 씨한테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지?”이건 분명 차설아를 궁지에 모는 질문이다. 두 청춘남녀가 한 방에 있었고, 게다가 남자가 저 상태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믿기 어려울 것이다.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만약 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면 넌 실망하겠지?”“방금 나한테 준 술잔에 뭔가를 듬뿍 넣었잖아.”차설아의 말에 임채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설아 씨,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그저 사과의 뜻으로 진심으로 술 한잔을 권하고 싶었을 뿐이야.”“일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는 나도 몰라. 술은 이서가 가져왔어. 안에 뭐가 있는지는 이서한테 물어봐봐.”“확실해? 우리 미련한 아가씨 머리에서 나올법한 수법이 아닌데?”‘배은망덕한 년! 몇 마디 말로 깨끗이 선을 그었어!’차설아는 소이서를 조금 동정했다.“설아 씨, 나 싫어하는 거 알아. 다 내 잘못이야. 이 아이를 임신해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게 아니었어. 당장 짐을 싸서 나갈게...”
간호사는 차설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없었어요. 혹시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착각이었으면 좋겠네요.”그날 저녁, 민이 이모가 원이와 달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왔다.“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몸은 좀 괜찮아요?”원이는 마음이 아주 따듯한 남자아이였다.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차설아의 손을 잡더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귀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었다.“응, 엄마 많이 괜찮아졌어. 며칠만 더 있으면 엄마는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아.”차설아도 원이의 볼을 만졌다.보드랍고 통통한 아이의 볼살을 만지니 아프던 것도 전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약보다 더 효과가 강력했다.달이는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분홍색 멜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차설아에게 토마토를 건넸다.“엄마, 이건 달이가 어린이집에서 심은 토마토에요. 하나만 익어서 엄마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이거 먹고 얼른 나아야 해요.”“하나만 익었는데 엄마 주려고 가져온 거야? 우리 달이는 안 먹었어?”차설아는 달이가 들고 있는 토마토를 보았다. 달이는 토마토를 세상에서 아주 귀한 물건이라도 된 것처럼 들고 있었다. 너무도 행복했다.“달이는 안 먹어도 돼요. 맛있는 건 엄마한테 드릴 거예요. 이 토마토는 달이가 매일 물도 주고 쑥쑥 자라는 거 지켜본 거예요. 마법 토마토니까 분명 엄마를 지켜줄 수 있을 거예요!”달이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달이가 이 토마토를 얼마나 정성을 들여 키웠는지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 아이는 분명 이 토마토에 마법처럼 신기한 힘이 깃들어 어떤 병이던 다 낫게 해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차설아는 당연히 그런 아이의 마음을 짓밟을 생각이 없었기에 토마토를 받아들고 입안에 쏙 넣었다.“음, 이 토마토 아주 달구나. 엄마가 먹어본 토마토 중에 세상에서 제일 달아. 게다가 먹고 나니까 몸도 가뿐해지고 아픈 곳이 없는 것 같네... 세상에, 설마 우리 달리 마법사였어? 그래서 마법 토마토를 심을 수
“맞아. 곧 서른이라니. 나랑 설아는 영원한 낭랑 18세라고. 죽을 때까지 영원히 소녀야. 이제 알겠어?”배경윤도 전투태세를 보였다. 차설아와 함께 나이 공격하는 차성철을 공격할 생각이었다.차성철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바로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했다.“그래, 그래. 내가 잘 못 했네. 너희들은 아직도 어린 소녀였지. 그래, 영원히 낭랑 18세야. 적어도 내 눈엔 너희 둘은 18세... 아니지, 18세도 생각해보니 너무 많네. 세 살이랑 다섯 살이 어울리네.”배경윤은 눈을 깜빡이며 헤실 웃었다.“누가 세 살이고, 누가 다섯 살인데?”차설아와 차성철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차성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걸 물어봐야 아나? 뻔히 보이잖아.”“하, 말하고 나니 나도 좀 걱정되네. 촬영하면서 누가 널 괴롭히면 어떡해?”“날 괴롭힌다고?”배경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내가 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지.”“그럼 됐어. 어쨌든 내가 전에 가르쳐준 호신술 잊지 않았지? 틈만 나면 연습해둬. 적어도 네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테니까.”차설아는 그럼에도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의 모습은 꼭 아이를 학교에 처음 혼자 보내고 불안해하는 엄마의 모습 같았다.“걱정하지 마. 난 그냥 촬영하러 가는 것뿐이야. 전쟁 나가는 것도 아닌데 괜찮을 거야.”배경윤과 차설아는 대화를 조금 더 나누었다. 결국 배경윤은 아쉬움이 가득 남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병실에 남은 건 차설아와 차성철이었다.차성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말했다.“동생아,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오늘 이렇게 온 건 나도 너한테 작별인사하려고 온 거야.”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소 긴장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오빠는 어디 가는데?”“지난번에 말했다시피 장재혁이 행방불명된 상태라서 내가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거든.”차성철은 계속 장재혁의 소식을 알아보고 있었다. 비록 장재혁이 이미 바다에 던져졌을 확률이 높았지만 죽었다고 해도 그는 시체
사도현의 갑작스러운 출연으로 배경윤은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출연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진찬영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도망치고 싶어요? 원한다면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그러고는 싶은데 여기서 제가 도망치면 감독님이 절 가만두지 않으실 것 같네요. 게다가...”배경윤은 소녀처럼 수줍어하면서 말을 이었다.“전 찬영 오빠랑 같이 긴 시간을 보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그럼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출연자들이 많았고 식탁에 젓가락 한 쌍 더 올려놓는 것일 뿐이잖아요. 우리가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하하하, 찬영 오빠가 이렇게 쿨한 사람인 줄 몰랐네요.”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고 즐거운 분위기가 옆에 있던 출연자에게도 전해졌다.사도현은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당연히 두 사람의 모습을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심드렁했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굳어져 있었고 조금 어두운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큼큼, 두 사람. 벌써 서로 귓속말하는 사이가 된 거예요?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남은 건 촬영하면서 하는 건 어때요. 일단 계약서에 사인부터 하자고요.”장윤태는 이미 진찬영과 배경윤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부터 촬영하면서 두 사람을 엮어줄 생각이었다.그러나 그가 엮어주기도 전에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주 다정했기에 장윤태는 너무도 기뻤다. 다만 아쉽게도... 갑자기 나타난 사도현 때문에 마지막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배경윤과 진찬영은 출연 동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촬영은 사흘 뒤부터 시작한다고 했다.촬영장으로 떠나기 전 배경윤은 차설아와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설아, 나 아마도 한동안은 너랑 만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그동안 꼭 밥 잘 챙겨 먹고 나 돌아올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야 해!”그녀는 차설아의 손을 꼭 잡았다.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혔고 여전히 손을 놓기 아쉬
“하하하, 역시 금메달리스트 승부욕 답네요! 아주 직설적이었어요!”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장윤태는 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사도현처럼 신과 같은 존재가 그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면 재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와 라이벌로 겨우 쳐줄 수 있는 사람은 톱배우 진창영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정말이지 그냥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했다.게다가 사도현이 출연한다면 많은 재밌는 일화도 쉽게 공개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건 사도현의 동의를 받아야 방영할 수 있는 것이다... 촬영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벌써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자칫하면 네티즌들의 악플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자본에 굴한 거냐고 하면서 말이다.‘하... 벌써 머리가 아프네.'사도현은 웃는 둥 마는 둥 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배경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럼 저도 먼저 설레는 상대를 찜해도 되는 거죠?”“와, 세상에! 그럼 사도현 님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하신 거예요? 우와, 정말 너무 기대돼요!”소수민은 눈치 있게 분위기를 아주 잘 띄우고 있었다.현재 인기가 많은 배우로서 그녀의 상황 대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자신이 그 유명한 사도현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바로 파악하고 사도현 친구가 되어보기로 루트를 바꾸었다.“전 확신이 없는 일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에요. 확신이 있기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을 결정한 거고 어떻게든 그 사람을 제 여자친구로 만들고 말 거예요.”사도현은 이 말을 하면서도 오로지 배경윤만 빤히 보고 있었다.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바보들이 아니었다. 사도현이 말한 그 사람이 배경윤이라는 것을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하하, 사도현 씨 안목이 아주 좋으시네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여성 출연자 중 사도현 씨랑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은 배경윤 씨죠. 두 사람 집안도 해안시에서 8대 가문에 손꼽히는 가문이잖아요. 나이도 비슷하니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기도 하겠죠.
장윤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긴장한 듯 손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감독님, 무슨 일이에요?”배경윤도 따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읽어내고 궁금한 얼굴로 장윤태를 보았다.“우리 프로그램에 변동이 생길 것 같네요. 원래 계획은 남자 세 명 여자 네 명으로 촬영하려고 했는데 지금 갑자기 합류하게 된 출연자가 있어서 남자 넷, 여자 넷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장윤태는 주먹을 쥐며 책상을 내리쳤다.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어머, 그럼 잘된 일이잖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모두가 짝이 있게 되는 거잖아요! 그럼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소수민은 눈을 깜빡이며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맞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쪽수도 맞아서 누구 한 명 외로워지는 사람은 없잖아요.”다른 출연자들도 맞장구를 쳤다.“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조금 특별한 분이라서요. 그 사람이 오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촬영을 할 수 없을까 봐 조금 걱정이네요.”장윤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대체 누가 투입되기에 촬영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하늘이 다소 건방진 어투로 말했다.“제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이 꽤나 돼요. 대통령이든 세계에 손꼽을만한 재벌이든 전부 만나 대화를 나눠봤죠. 그런데 긴급 투입되는 사람이 누구기에 감독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죠? 말해 보세요. 저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요!”장윤태를 보고 있던 배경윤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그들의 촬영을 방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건... 제가 말하기 어렵네요. 곧 도착한다고 하니 다들 알게 될 거예요.”장윤태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듯 얼굴엔 절망이 가득했다.“자자, 도착하셨다고 하니 다들 기쁘게 환영해주자고요!”별빛 엔터의 홍보팀 팀장이 흥분하며 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그
소식이 퍼지자 인터넷은 며칠 동안 떠들썩했고 팬들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나와 현장 사진을 찍으러 갈 준비를 했다. 소식이 뜨자마자 바로 달려나갈 수 있게.오늘은 원래 진찬영과 배경윤의 계약식이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별빛 엔터테인먼트도 준비 태세를 보였다. 그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소속사 임원진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별빛 엔터의 문턱을 넘는 순간 여기저기서 종이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했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부부를 축하해주는 것처럼 두 사람을 반겼다.“찬영아, 경윤 씨. 이렇게 두 사람이 우리 회사로 온 걸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자자, 거두절미하고 우리 얼른 회의실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하죠!”장윤태 감독은 한시라도 더 빨리 계약하고 싶었기에 두 사람을 바로 회의실로 안내했다.회의실엔 두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이번 연애 프로그램의 또 다른 출연자들이었다.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전부 외모가 빼어나다는 것이다. 길가면 무조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정도로 말이다. “세상에, 진창영 배우님! 정말 잘생기셨어요. 티브이에서도 그렇고 실물도 정말 똑같이 잘생기셨어요!”인기 배우 소수민이 일어나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다른 두 여자 중 한 명은 명문대를 다니는 4학년 장유빈이었고, 남은 한 명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이나였다.두 사람은 열정적인 소수민과 달리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두 눈에 진찬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저기요. 아직 촬영 시작도 안 했거든요? 벌써 그렇게 티를 내시면 어떡해요. 명한 씨, 저희 둘은 들러리가 확정이겠네요!”스포티하게 입은 남자가 단정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운동복 차림의 남자는 지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 선수 하늘이었고 단정한 모습의 남자는 유명한 보험계리사 백호연이었다.“늘이 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러리가 확정이라
배경윤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진찬영을 바라보았다.“찬영 오빠!”그러고는 진찬영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길 맞은편에 서 있는 진찬영은 누구보다도 더 멋있어 보였다. 길을 건너던 배경윤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조심해요!”진찬영은 잔뜩 긴장한 채 달려갔고 배경윤을 와락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를 간신히 피했고 같이 바닥에 넘어졌다. 누가 보아도 애틋한 커플인 것 같았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경윤은 진찬영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전류가 온몸을 뚫고 흐르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은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머쓱하게 웃었다.“찬영 오빠,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까지 다칠 뻔했어요.”배경윤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횡설수설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좋아하는 연예인 앞에서 배경윤은 수줍은 소녀가 된 것 같았다.“내가 길을 건넜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전부 제 탓이에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늘색 셔츠에 카키색 청바지를 입은 진찬영은 특유의 분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타고난 매력이었다.길을 걷고 있어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여자도 진찬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길 건너에서 걸어오는 배경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결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진찬영이었다.“곧 커플로 촬영할 사이인데 편하게 말 놓아도 돼요. 제가 오빠보다 어리잖아요.”진찬영이 진지하게 사과하자 배경윤은 마음이 불편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아, 그러네요. 나의 여자 친구, 앞으로 잘 부탁해요.”진찬영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애틋하게 쳐다보았다. 진찬영의 행동 하나가 배경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흠! 얼른 회사로 가요. 장 감독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말을 마친 배경윤은 뒤돌아
반대로 사도현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배경윤을 쳐다보았다.“급한 일도 없잖아.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커피나 마시면 얼마나 좋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해.”“사도현, 너는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바빠.”배경윤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사도현이 끌어당기면 질질 끌려갔고 기세로 사도현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뻔뻔스러운 사도현을 어쩌지 못하기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할 일이 없겠어? 너를 만나는 게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야.”사도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배경윤을 바라보았다.“이 멍청한 놈!”배경윤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욕했다. 사도현이 능글맞은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사도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듣기로는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결정했다더라? 진찬영이랑 커플로 연기하는 대본도 받았지?”“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아니야.”배경윤이 부정하자 사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나랑 찬영 오빠는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커플이야. 그런 대본 따위 필요 없어.”“배경윤!”사도현은 배경윤의 도발에 휘말린 듯한 느낌을 받아서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사도현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왜? 내가 기뻐하니까 오히려 화가 나?”배경윤은 늘 싸움에서 기세에 눌렸지만 사도현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이번에 드디어 이기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배경윤은 신이 나서 환하게 웃었다.“내가 화가 나서 쓰러져야 네 속이 시원하지? 그런 거야?”사도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커플이라면 싸울 때도 있을 거야. 작은 다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이건 상대의 마음에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야.”“이게 커플 사이에 싸우는 거로 보여?”배경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피식 웃었다.“내가 네 여자 친구라는 거야, 아니면
“누가 네 전 여자 친구라는 거야? 나는 너랑 모르는 사이야. 친한 척하지 마!”배경윤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사도현한테 아주 실망했기에 다정하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경윤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자던 사이였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모르는 사이야.”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부러 장난을 쳤다. 배경윤이 차갑게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놀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고는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다 잊어버려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게. 내가 몇 번이고 너한테 말해주면 되거든.”“뭐, 뭐 어떻게 말해줄 건데?”배경윤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사도현을 피하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나의 전 여자 친구는 내가 벽에 밀치고 키스하는 걸 제일 좋아했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알려줄 수도 있어.”사도현은 천천히 배경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배경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사도현,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민망해서 사도현의 뺨을 후려갈기려고 했다. 이때 사도현이 배경윤의 손목을 잡더니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이제는 우리가 친한 사이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어?”“나는...”배경윤은 거칠게 뛰는 심장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인정할 수 없어.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야.”“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잖아.”사도현은 배경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끝으로 배경윤의 코를 쓰다듬었다.배경윤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도현이 미웠지만 제일 미운 건 자신이었다. 사도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우스웠다.사도현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배경윤은 반격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배경윤은 사랑의 싸움에서 사도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도현이 잡아당기면 끌려가고 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