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늘은 일단 들어가지 않겠어요.”배경윤은 의아해하며 차설아를 끌어당겨 물었다.“언니, 진짜 이대로 간다고? 언니한테 추억이 가득한 집이 쓰레기 처리장으로 된다는데,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있어?”차설아는 심호흡을 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당연히 못 참지. 하지만 경비원이랑 따지고 싶지 않아. 저분도 그냥 자기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뿐이잖아.”“그럼 어떻게 할 건데?”“이런 결정을 내린 진짜 배후를 찾아내서, 이 땅을 포기하게 할 거야.”“진짜 배후?”배경윤은 얼떨떨해서 계속 물었다.“방금 저 경비원이 이건 도시 계획이라고 했잖아? 분명 공식적인 결정인데 진짜 배후가 있다고?”“공식적인 결정 뒤에는, 자본의 압력이 있기 마련이야.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배후의 자본을 먼저 찾아야 해.”차설아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녀는 약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 배후의 자본은 상대하기 어렵고, 그녀를 겨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차설아와 배경윤은 아파트로 돌아갔다.배경윤은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러 갔고, 차설아만 집에 혼자 남게 되었다.그녀는 컴퓨터를 꺼내 차씨 저택 지역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고 깊이 조사하기 시작했다.이 지역은 반년 전에 도시 계획의 징수 범위에 포함되었다.이 지역에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차설아 부모의 동반 자살, 귀신 출몰, 보복에 의한 방화 등.차씨 저택이 잿더미로 변한 후, 방화를 저지른 부부는 차설아 집 문 앞에서 목을 매 숨졌다.이 부부는 바로, 딸이 사도현의 클럽에서 죽었고, 성우가 법정에 나와 변호해 결국 패소했던 부부였다. 그래서 이 지역은 외부인에게 사악한 땅이라고 생각되었고,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이미 이사를 가서 몇 년 동안 땅은 황폐해졌다.반년 전 시청은 대규모 쓰레기 처리장을 건설하기 위해 대중의 의견을 수렴했고, 이 지역이 최고 투표로 당선되어 징수되었다.겉으로 보기에 이 일은 합리적이었다. 만약 차설아가 징수에 동의하지 않
“그래?”차설아는 순간 흥미가 생겼다.방금 조인성을 조사할 때, 1위 오빠의 IP도 확인했더니 성대 그룹으로 나타났다. 아이디 뒤에 숨겨진 사람이 누군지는 이미 확실했다.하지만, 성도윤처럼 오만한 사람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토록 저속한 방식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그의 냉혹하고 도도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그래서 차설아는 당장 달려가 그를 비웃고 싶었다.“기다리라고 해. 당장 갈 테니까!”차설아는 일어나 컴퓨터를 덮고 편안하게 기지개를 켜고 곧바로 레드하우스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언니, 여기에요.”허민희는 레스토랑 문 앞에 서서 멀리서 차설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제의 라이브 방송으로 허민희는 많은 돈을 벌었기에, 거액을 지급하여 해안에서 내로라하는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다.차설아는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웨이브 있는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기자 정교한 다이아몬드 헤어핀이 보였고, 상의는 클라인 블루색의 블라우스, 하의는 하늘색 와이드 팬츠에 실버색 하이힐을 매치해 키가 더욱 커 보였고, 강력한 포스를 풍기며 무한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대박, 언니. 오늘 너무 예뻐요. 모델 런웨이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아름답네요!”허민희는 차설아의 강한 카리스마에 눌려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서 감탄만 연발했다.“하하, 너 입에 꿀이라도 발랐어? 말을 참 예쁘게 하네.”차설아는 자연스럽게 허민희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성도윤 그 자식 온 지 얼마나 됐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 보여?”“성 대표님이요?”허민희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성 대표님이 아니신데요?”“그 자식이 아니라고?”“네, 대표님 아니고, 아주 잘생긴 오빠예요. 절대 성 대표님에 밀리지 않는 외모지만, 성격은 좀 더 온화해 보였어요. 하지만... 좀 사람이 가벼워 보인달까?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않아요!”허민희는 진지하게 평가했다.한창 잘생긴 남자에게 약할 나이었다.지금까지 그녀의 눈에 들어온 잘생긴 남자 중에서 성도윤은 단연
허민희는 엘리베이터에 기댄 채 화려하고 현란한 야경에 감탄을 내뱉었다.차설아는 이런 전설을 믿는 허민희가 귀여워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 돈에 환장하니까 돈이 듬뿍 담긴 엘리베이터를 만날 수는 없을까?”“휴, 언니, 나 진지하단 말이에요. 왜 이렇게 낭만을 몰라요? 로맨틱한 사랑이 기대되지 않으면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겠어요?”“민희야, 내가 경험자로서 충고 하나 하는데, 네가 잘만 살아간다면 사랑도 필요 없어. 돈이야말로 최고라고. 사랑 같은 건 다른 사람이 너를 공격하는 무기밖에 더 안 돼!”차설아가 허민희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농담이 전혀 섞이지 않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막 열여덟 살 된 여자애에겐 너무 잔혹한 말일지는 몰라도 이 도리를 일찍 알수록 상처를 더 적게 받을 것이다.허민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설아 언니, 저는 언니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사랑이야말로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죠, 왜 고통을 가져오겠어요? 언니가 남자한테 너무 심하게 상처받아서 예민해진 거 아니에요? 겉으로 보기엔 호탕하고 용감한 것 같아도 사실 그 누구보다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잖아요. 더는 사람을 사랑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요.”“그게...”차설아는 말문이 막혔다.‘지금 애들이 다 이렇게 성숙하나?’엘리베이터는 마침내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레스토랑의 인테리어는 우아하고 세련되었고, 사방에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심지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도 있어 매우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겼다.“언니, 1위를 한 남자가 언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은 두 사람 만의 로맨틱한 식사가 기다릴 테니 저는 두 분 방해하지 않을게요. 이만 갈게요!”허민희가 말하고는 맞은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를 떴다.“어서 오세요, 유일한 고객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웨이터가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차설아를 데리고 레스토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통창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훤칠한 뒷모습은 그의 몸매를 잘 보여줬다. 블랙 캐쥬얼 정
“그만해!”차설아가 손을 내밀고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낯 간지럽게 굴지 말아줄래? 우리는 순수한 남녀 사이잖아. 적당한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겠어.”“설아가 날 그렇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난 설아랑 순수한 남녀 사이로 지내고 싶지 않은데?”바람은 잘생긴 얼굴로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거리를 두기는커녕 심지어 과감하게 차설아의 가는 손목을 확 잡고는 그녀를 자기 품 안에 끌어안으려고 했다.물론, 어마어마한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차설아는 민첩하게 그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바람의 팔을 잡고는 등 뒤로 해 거의 190cm 가까운 훤칠한 남성을 손쉽게 제압했다.“녀석, 감히 누나한테 장난을 쳐? 심심했던 거야? 이제 잘못을 알겠어?”차설아가 힘을 주며 바람에게 제대로 교훈을 주고 싶었다.바람은 팔이 거의 부러질 정도로 아팠는데도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씩 웃으며 말했다.“내가 뭘 잘못했는데? 설아를 좋아하는 게 죄가 아니잖아. 갑자기 4년 동안 사라져 버렸어. 난 설아를 4년이나 보고 싶었다고. 그런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너!”차설아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4년 만에 다시 보니 바람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말을 설레게 하는 거야... 아니지, 4년 전에도 이런 말 잘했었던 것 같은데?’도도하고 차가울 뿐만 아니라 애정 표현을 전혀 하지 않는 성도윤과는 달리, 바람은 단도직입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했다.그는 사랑하는 마음을 열 배, 백 배 모두 드러내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성도윤은 한 사람을 좋아해도 전혀 티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를 싫어하나 싶을 정도로 착각하게 했다.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선우시원, 오늘 이 팔이 부러져도 상관없나 봐? 그럼 네 소원을 들어주지, 당장 팔을 부러뜨려야겠어!”차설아는 이 자식에게 더는 설렌 마음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거친 방식으로 혼내줄 수밖에 없었다.바람은
바람의 잘생긴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만약 차설아가 정말 성도윤을 내려놨다면, 언젠간 자신의 진심이 차설아의 마음을 움직일 거로 생각했다.“너한테 기회 없어. 나 요새 일 다 끝내면 재혼할 거야.”차설아가 덤덤하게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바람의 얼굴색은 확 변하더니 다급하게 물었다.“재혼한다고? 누구랑?”“그건 네가 꼭 알아야 하는 거 아니잖아.”바람은 긴장한 얼굴을 보이더니 이내 여유롭고 자신 있게 말했다.“누구든지 상관없어. 성도윤만 아니라면, 아직 재혼을 한 게 아니라면 설아가 다시 나한테 사랑에 빠지게 할 자신 있어.”“자신이 있는 건 좋지만, 잔머리를 다른 데로 굴리는 게 좋지 않아?”차설아가 고개를 들더니 바람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그럼 이제 말해줄 수 있어? 오늘 밤 성도윤 스케줄이 뭔지?”“뭐야, 아직도 엄청 신경 쓰고 있네...”바람이 한숨을 푹 쉬고는 솔직하게 말했다.“설아랑 똑같이 저녁 약속이 있던데? 이런 로맨틱한 레스토랑에서 말이야.”“그래?”차설아는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누구랑?”“임채원이라는 여자랑. 아마 설아는 모를 거야. 설아가 사라진 이 몇 년 동안 성도윤은 꽤 알차게 산 모양이야. 임채원과 안정적인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는 것 같아. 아마 임채원과 재혼... 하는 거 아닐까?”“그럼 정말 잘됐네!”차설아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만약 성도윤이 정말 임채원과 재혼한다면 그녀의 두 아이를 뺏진 않을 것이니 말이다.임채원도 자존심이 강한 여자라 계모 노릇 따위는 하기 싫을 것이니 더더욱 말릴 것이고.“하느님, 제발 부탁합니다. 제발 두 사람 남은 평생 사랑하게 해주세요. 만약 두 사람이 결혼한다면 저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네요.”차설아가 흥분된 얼굴로 말했다.바람은 미간을 구기더니 차설아의 반응을 보며 말했다.“지금 일부러 괜찮은 척하는 거야?”“그렇게 보여?”차설아는 너무 기쁜 나머지 활짝 미소를 지었다.바람이 말했다.“4년 전, 성도윤이랑 설아랑 그렇게 비장하게
다만 두 사람이 만난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하늘에 별똥별 스치듯 성도윤은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한 사람은 위로, 한 사람은 아래로, 아무도 서로를 위해 멈춰 서지 않았다.“하하, 1위를 한 형님이 그래도 네가 마음이 쓰였나 봐, 약속 지키러 온 걸 보니.”바람은 엘리베이터가 밑층으로 내려갔을 때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말했다.“일이 있어서 여기로 온 거겠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하이힐을 신은 차설아는 또각또각 주차장으로 향해 걸어갔다. 마치 방금 성도윤과의 만남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오늘 저녁 성도윤이랑 잘 얘기해 볼 생각이 없어?”“약속한 저녁 시간은 여덟 시부터 열한 시야, 지금은 이미 열한 시 1분이잖아. 지각했으니 뭐 어쩌겠어. 내 시간은 안 소중해? 내가 왜 성도윤 때문에 멈춰 서야 하는데?”덤덤한 얼굴의 차설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하긴, 임채원이랑 약속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아니면 아까 설아를 보고 성도윤이 그렇게 차가운 얼굴을 보일 리가 없잖아. 마치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바람이 두 손을 주머니에 꽂고는 끝이 보이지 않은 꼭대기 층을 보며 분석하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포츠카 키를 꺼내고는 차 문을 열었다.“시간이 늦었어. 이제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고. 다음에 시간 되면 다시 만나.”차설아가 바람을 향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예쁘장한 그녀의 얼굴에는 냉기가 감돌았고,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네가 말한 거야, 시간 나면 다시 만나자고.”바람은 아쉬운 마음으로 차설아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쯧쯧, 4년 만에 겨우 만나 같이 식사를 했는데, 이렇게 이별하다니. 많이 아쉽네. 하지만 성도윤은 아까 설아의 얼굴을 몇 초밖에 못 봤잖아? 그럼 내가 훨씬 운이 좋은 거 아닌가?’빨간색 스포츠카는 ‘슉’하고 어둠 속에 질주하면서 사라졌다. 마치 한 번 결심하면 절대 뒤 돌아보지 않는 차설아처럼 말이다.같은 시각, 520미터 높이 레스토랑 통창 앞에 서
성도윤이 엄숙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드디어 올라온대요?”“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죠?”웨이터가 어안이 벙벙했다.“누구겠어요?”“엇, 죄송합니다, 대표님.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일그러졌다.그는 겨우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누군지 모르면서 왜 나를 찾아왔어요?”“이제 곧 레스토랑이 영업을 종료할 거라서요.”웨이터가 눈을 내리깔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실 레스토랑은 30분 전에 이미 영업 종료했다.다만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존재인 성도윤이 차가운 얼굴로 서 있고, 전혀 떠날 뜻이 없는 것 같아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 일깨워 주지 않았을 뿐이다.“혹시 기다리시는 사람 있으세요? 저희가 전화를 해서 재촉해 볼까요?”웨이터는 어두운 안색의 성도윤을 보더니 용기 내어 한마디 물었다.“필요 없어요!”성도윤이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건 바로... 차설아는 정말 그에게 미련이 남지 않은 것 같았다!성도윤은 ‘휘황찬란’했던 20여 년 동안의 과거를 떠올렸다.그의 인생은 순탄했기에 이렇게 좌절감이 들 때는 아주 드물었다.좌절감을 몇 번 느꼈던 것도 모두 차설아 때문이었기에 차설아를 향한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리고 차설아의 마음을 정복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차설아, 나 만나기 싫다 이거지? 그럼 이제 만나달라고 빌게 만들어 줄 거야.”성도윤은 뭔가를 계획한 듯 곧바로 레스토랑을 걸어 나가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층으로 내려갔다.밤은 점점 깊어졌고, 가로등도 어둑어둑해져 거리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가끔 도로에 한두 대의 차가 쌩쌩 지나가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성도윤은 차가운 얼굴을 한 채 긴 다리를 뻗으며 야외 주차장으로 향했다.“삑!”갑자기 고요한 밤하늘 아래서 경적이 울려 그의 눈길을 이끌었다.훤칠한 그는 몸을 돌렸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매혹적인 차설아는 나른하게 빨간색 스포츠카에 기대고 있었다.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은
성도윤은 입술을 차설아의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차가우면서도 분노와 고통이 담긴 쉰 목소리로 말했다.“차설아, 당신은 내가 본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매정한 여자야!”4년 동안 쌓아온 감정이 이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렸다.성도윤은 차설아를 있는 힘을 다해 꽉 끌어안았다. 마치 그녀는 부스러뜨리고 자기 몸속으로 녹아낼 듯이 말이다...그래야만 차설아를 묶어둘 수 있고, 그녀가 다시 떠날 기회가 없듯이 말이다!“...”차설아는 너무 꽉 끌어안겨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실력으로 충분히 성도윤을 쓰러 눕힐 수 있었지만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토끼처럼 얌전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그녀가 그토록 갈망하고 그리워했던 그의 품이었다. 넓고 든든한 그의 가슴팍은 한없이 따뜻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쉽지만, 그 감정을 내려놓는 것도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4년의 세월이 흘렀기에 그녀는 충분히 이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짧고도 긴 포옹 후, 성도윤은 자기가 너무 과격한 반응을 보였다는 걸 인지하고는 미련 있는 얼굴로 천천히 차설아를 놓아줬다. 하지만 여전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오해하지마, 이 포옹에는 그 어떤 뜻도 담겨있지 않아.”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아.”여유롭고 차분한 여자의 모습에 성도윤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마치... 힘껏 주먹을 휘둘렀는데 솜에 맞은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그는 모든 것을 손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유독 눈앞의 이 여자는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다.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으니 그는 좌절감이 들었다.“나한테 불만이 있다면 왜 아까 날 밀어내지 않았어? 분명 그럴 수 있었잖아!”성도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차설아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당신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니야? 당신한테 불만 없어. 우리 부부였잖아. 오랜만이니까 그냥 포옹한 거지. 포옹한 게 뭔가 대단한 일도 아니고.”“부부였다고?”
“정말 예상도 못 했어. 분명히 조치를 다 했는데 말이야.”차설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미 찾아온 생명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키울 생각이었다.“이건 운명이야! 아무리 막아도 올 아이는 오게 돼 있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성 대표, 또 아빠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배경윤이 진심으로 차설아를 축하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지금 우리 상황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지금은 그녀와 성도윤에게 가장 큰 압박이 몰려오는 시기였다.정확히 말하면, 성도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밖으로는 성대그룹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했고 안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돌봐야 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생긴다면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이 부담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감정적인 부담이 더 컸다.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들에게 잡힐 약점도 많아지는 법이었고 지금의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미 온 생명인데, 어쩌겠어? 애초에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사랑스럽니? 후회해?”“당연히 후회 안 해.”“그럼 됐잖아!”배경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달이랑 원이 장점만 쏙 빼닮았다고 생각해 봐! 완벽하지 않겠어?”“그러게... 그러면 정말 좋겠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야 이 갑작스러운 생명이 조금씩 기대되기 시작했다.“임신 초기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칼슘 보충해야 하나? 엽산도 챙겨야 하고, DHA도 먹어야 하지?”배경윤이 이미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폭풍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뱃속 아이를 챙기며 태어나기도 전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근데 이번 아기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니면 또 쌍둥이일 수도 있
“임신이라고...?”차설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정말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면 알겠지.”배경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내가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배경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정부 현이가 커피에 무언가를 섞고 있었다.“현이 씨, 그게 뭐예요?”배경윤이 커피잔을 흘끗 보며 물었다.“어... 아무것도 아니에요!”현이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커피를 쏟으며 말했다.“설아 씨가 커피가 많이 쓰다면서 설탕을 좀 많이 넣으라고 해서요.”“그래요?”배경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아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고? 입맛이 바뀌었나?’분명 차설아는 블랙커피만 선호했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차설아를 찾으러 갔다.차설아는 처음엔 테스트하기를 꺼렸다.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거절했지만 배경윤이 끈질기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마지못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그리고 얼마 후,“꺅!”배경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진짜 임신이잖아! 내가 뭐랬어! 네가 원래 그렇게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축 처지고 졸린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차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배경윤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지난번에 네가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잖아. 이번엔 달라! 내가 반드시 널 전적으로 돌볼 거야. 꼭 좋은 대모가 되고 말겠어!”배경윤은 차설아의 팔을 붙잡고는 벌써 세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설레했다.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들떠서는 말을 이었다.“근데 성도윤 그놈, 이번엔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우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지. 아이
만약 할아버지마저 성진의 꾀에 넘어갔다면 앞으로 가문에서 그의 발언권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지위도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될 터였다.이런 일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지만 차설아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도윤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나에겐 당신과 아이들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자, 이제 자자.”성도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를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예민한 차설아는 그의 말투에서 나는 실망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도 덩달아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되던 그를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다음 날 아침성도윤은 또다시 성대그룹으로 향했고 배경윤은 집에 머물며 차설아를 돌보기로 했다.“다시는 설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마. 또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떠나기 전에 배경윤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절대 안 데리고 나갈게. 설령 데리고 나가더라도 걱정 마, 이제 내 목소리도 돌아왔잖아. 누가 감히 어제처럼 날 괴롭히면 정말 지 엄마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 줄 거야.”배경윤이 우유를 마시면서 신나서 떠들어댔다.성도윤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차라리 말 못 하는 게 나았을지도... 대체 사도현은 어떻게 견디는 거야?’성정엽이 떠난 후, 배경윤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는 차설아가 어젯밤 몰래 방문한 오두막으로 향했다.차설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아직도 안 일어났어? 요즘 너 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예전 같지 않네.”배경윤이 침대 옆에 앉아 축 늘어진 차설아를 보며 감탄했다.“으음... 몰라. 요즘 너무 졸려. 너무 여유롭게 지내서 그런가 봐. 자꾸 나태해지네.”차설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활력이 넘치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마치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앉아 있는 것조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