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방송 이후, 성도윤은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다. 게다가 의분이 가득 찬 네티즌들이 작성한 저주 글들이 봇물 터지듯 넘쳐났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상간녀’ 임채원과 그의 큰형 성도현이 교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증거를 끄집어냈다.네티즌들은 성도윤의 도덕성을 지적하며 그를 친형님의 여자를 탐하는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고 욕했다.성대 그룹도 비난받았다. 고객 시스템 해킹 소동에서 벗어나자마자, CEO가 실검에 오르며 욕을 먹고 있으니, 주가는 또 한 번 대폭 하락했다.“도윤아, 라이브 방송은 뭐야! 설아한테 잘 좀 해... 어쩌다 나 성명원에게서 너 같은 자식이 나온 건지... 바람피운 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이제 온 세상이 다 알게 됐더구나! 게다가 설아한테 가정폭력을 가하다니! 할아버지께서 심장이식 때문에 외국에 나와 있지 않았다면 반드시 네 다리를 부러뜨렸을 것이야!”이른 아침부터 성도윤은 그의 아버지 성명원의 핀잔에 짜증이 났다.그는 잘생긴 얼굴을 찡그리며 길쭉한 손가락으로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모두 그 여우 같은 여자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요.”“X소리 집어치워!”성명원은 화를 참지 못하고 바로 욕설을 퍼부으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설아가 어떤 성격인지 내가 몰라? 그렇게 착하고 참한 애가... 네가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설아가 집안 사정을 밖에 알리려 했을까?”‘착하고 참한 애?’성도윤은 화가 치밀어올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싶었다.물론 예전의 차설아라면 착하고 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계략만 많은 교활한 여우 한 마리 같았다.“아니면 정말 아직도 설아에게 미련이 남아서 놓아주지 못하는 거야?”성명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물었다.“아직 사랑한다면 잘못을 인정해야지, 여자는 어르고 달래야 하는 거야. 아빠가 다 경험이 있으니 돌아가는 대로 제대로 전수해 줄게. 여자는 말이야...”“사랑이라니요? 절대로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거예요.”얼음같이
성도윤은 인내심이 바닥나 언짢은 얼굴로 다그쳤다.“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지? 계속 우물쭈물하면서 뭐 하는 거야!”“홍보팀에서 각종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현재 네티즌 10명 중 9명은 사모님 편에 서서 대표님께 불만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대표님께서 나서서 사모님한테 용서를 빈다면 소동을 가장 빨리 잠재울 수 있으리라 예측합니다. 사모님과 다시 라이브 방송을 켜고 네티즌들 앞에서 사랑을 과시한다면 여론은 완전히 뒤집힐 것입니다.”예서는 조심스럽게 말을 마쳤다. 그녀는 감히 성도윤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도 성도윤이 얼마나 도도하고 오만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홍보팀에서 전달한 먼저 꼬리 내리기 방안에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말도 안 되는 소리!”역시나 성도윤은 단칼에 거절했다.“할 일 없이 집에 처박혀 키보드 두드리는 맛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둬. 그리고 성대 그룹을 보이콧해?”성도윤은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순진한 녀석들!”이 말은 결코 성도윤의 거만함에서만 나온 말이 아니었다.성대 그룹은 셀 수 없이 많은 산업에 발 담고 있었다. 요식업, 부동산, 의류, 전자, 자동차 제조는 물론, 군용기 제조에까지 발 담고 있었기에 일개 네티즌들이 보이콧하고 싶다고 해서 보이콧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그럼 더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지워!”성도윤은 독기 어린 눈동자로 예서를 쳐다보며 말했다.“3일 내로 나에 관한 그 어떤 언급도 남아있지 않게 만들어.”“그건...”예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섣불리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없었다.“그럼... 홍보팀에 연락해서 홍보비용을 더 추가하라고 하겠습니다.”그녀도 이렇게 하는 것은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도하고 오만한 대표님이 버티고 있으니 별다른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예서가 막 나가려던 그때, 성도윤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네, 대표님. 더 하실
성도윤은 이 커플 팬덤의 규모가 30여만 명이라는 것에서 한 번 놀랐고 활약이 모든 팬덤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동네 구멍가게 일 줄 알았더니 거대한 상가였다.어쩐지, 라이브 방송 한 번으로 ‘쓰레기' 라고 실검에 오르더라니...성도윤은 마우스를 내리며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핑크빛 썸! ‘차성윤설’ 한 앵글에 들어오다!”“달달함이 극치에 달하다! 성도윤 왕자를 바라볼 때 나오는 설아 공주의 꿀 떨어지는 눈빛!”“서로를 마주 보다! 도윤 도련님이 아내를 바라보는 꿀 떨어지는 순간 모음!”“...”이 팬덤의 활약에 성도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게시물을 업로드했고 오래된 게시물 아래에 댓글을 달아 열띤 토론을 했다. 이제 보니 차설아와 같은 앵글에 담긴 사진이 꽤 많았다. 그리고 이 사진들 속에서, 그를 몰래 바라보는 차설아의 눈빛은 그렇게나 애틋했다.이 게시물 중 조회수가 가장 많고 댓글 수가 가장 많은 게시물은 ID가 ‘차성커플 바라기' 인 네티즌이 쓴 팬 픽션이었다.“첫 만남, 한여름날 어느 오후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모두가 허둥지둥 비를 피하느라 바빴다. 그때 그와 그녀가 운명처럼 마주쳤다...”성도윤도 홀린 듯 팬 픽션을 읽다 보니 어느새 404페이지까지 읽었고 새로 고침하자마자 글이 삭제되었다고 알림이 떴다.“빌어먹을!”성도윤은 나지막하게 짜증 나는 마음을 털어놓았다.그제야 이 팬덤의 규모가 크고 활약이 뛰어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런 팬 픽션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울 정도였다.성도윤은 침착하려고 애쓰며 홈페이지를 닫았다. 더 보다가는 그마저도 팬클럽 일원이 될 것 같았다.어느덧 밤이 되었다. 성도윤은 분명 바쁜 하루를 보냈는데, 어쩐지 마음이 허전했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이리저리 뒤적이며,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골똘히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같은 시간, 차설아는 소파에 누워 육아책을 뒤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뜻밖에
“푸읍!”마시던 레모네이드를 뿜는 차설아.좀처럼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던 차도남 성도윤이었기에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돌직구였다.“나르시시즘 아니야? 사랑은 무슨.”차설아는 날카로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딱 걸린 도둑처럼 자신감 없게 대답했다.“사람들이 그러는데, 당신이 나를 많이 사랑했었다고.”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꼬리가 올라간 성도윤, 여자들이 막 들이대면 귀찮아하고 느낌 없는 모습이었다면, 유독 차설아의 애정은 왠지 모르게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처럼 즐기는 모양새였다.“사람들은 몰라도, 그거 다 생방송이라 연기라는 걸 본인이 더 잘 알면서.”차설아은 손을 내저으며 소탈한 척 행동했다.그녀는 자신이 성도윤을 많이 사랑했다는 지난 사실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만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고 얘기할 수 있고, 알량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성도윤은 범죄를 캐는 조사관처럼 그녀의 위선을 벗겨내려는 듯 한발 한발 몰아붙였다.“사랑하지 않은 거라면 나 몰래 챙겨준 건 뭐고? 우리 투 샷 사진들에서 나를 다정하게 쳐다본 건 뭐고? 또... 사랑하지 않은 거라면 임채원을 적대시 한 건? 질투를 한 게 아니면 뭔데?”성도윤의 연이은 질문에 차설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이 훤히 다 비친 듯한 상황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그래서?”‘지금 뭐 하자는 거지? 굳이 밝혀서 내 마음을 저당 삼아 날 마음대로 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이러나? 아니면 울며불며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리는 모습이 보고 싶은 걸까? 허세를 부리는 거야, 뭐야? 웃겨, 정말!’차설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성도윤, 당신은 정말 내가 본 사람 중 제일 야박하고, 제일 나르시시즘에 꽉 찬 사람 같아. 여기서 당신을 사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앞으로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지. 굳이 이 야심한 밤에 사람을 불러내서 이런 대화를 하는 것도 참시답지 않네. 사랑했다
“...”차설아는 멍하니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고 꼼짝하지 않고 굳은 채 서 있었다.비록 둘이 하룻밤 잠자리는 했다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가 상상했던 대로 그의 입술은 극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그와의 키스는 너무 간질간질했고 뜨거웠다.갑자기 훅 들어온 성도윤의 애틋한 감정에 휘감긴 그녀는 꽉 쥐었던 손에 힘이 풀렸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몇 분이 흐른 뒤.“자, 이제 끝났어요.”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레스토랑의 불이 다시 켜졌다.차설아도 순간 제정신이 돌아왔고 재수 없는 물건을 피하듯 재빨리 성도윤과 거리를 두고 섰다.‘정신 나간 거야? 당장 이혼할 남편이랑 키스한다는 게 말이 돼?’그녀는 서둘러 손등으로 입술을 닦는 행동을 보였고, 도도하고 고고하신 성대표가 보기엔 어딘가 모르게 기분 나쁜 제스처였다.“뭘 닦기까지 해? 그렇게 몰입하신 분이?”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그녀는 이 수치스럽고 어이없는 상황에 화를 내며 따져 물었다.“도윤 씨,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친 거 아니야?”성도윤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약간은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답했다.“글쎄.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성도윤은 붉게 활짝 핀 장미같이 유혹스러운 그녀의 입술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뚫어지게 보았다.그쯤 카메라를 든 뚱뚱한 남자가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성 대표님, 방금 장면은 너무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찍혔습니다. 마치 환상적인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같이 말입니다. 라이브를 본 네티즌들 반응이 폭발적이에요. 전에 욕하던 건 감쪽같이 사라졌고 하나같이 긍정적인 반응들뿐이고, 댓글 창은 축하 댓글로 도배되었어요. 이번 위기는 라이브 홍보가 제대로 먹혀서 효과가 죽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방금 키스를 너무 오래 딮하게 해서 타임 오버했다는 점에서 일부 누리꾼들이 둘이 쇼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 거 빼
“아니면?”차설아가 뒤돌아섰고, 자기 손목을 잡은 성도윤의 손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뭐, 뺨을 되돌려 주기라고 할 건가?”“...”성도윤은 말없이 우주같이 깊은 눈길로 차갑게 그녀를 쳐다만 보았다.차설아가 되려 성도윤에게 가까이 서서 하얀 얼굴을 그의 눈앞에 갖다 대며 화를 돋우듯이 말했다.“당한 건 반드시 되갚아 준다고 익히 들어 알고 있어. 불쾌하면 나 한 대 쳐.”성도윤은 당연히 손을 대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줬다. 곧, 큰 레스토랑에는 홀연히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성도윤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을 이용만 하려던 건 아니야. 사랑의 장면은 거짓이지만, 미안한 마음은 진짜니까.”눈 부신 불빛 아래에 선 남자는 실루엣마저 잘생기고 완벽했다. 그럼에도 그녀와는 너무 멀고 너무 비현실적이었다.“당신... 지금 나한테 사과하는 건가?”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단 한 번도 성도윤이, 저밖에 없는 안하무인격의 성도윤이 고귀한 자태를 내려놓고 사과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아니, 잘못 들었어.”성도윤은 가볍게 기침 두 번 하며 멋쩍게 부인했다. 그의 차갑고 준수한 얼굴엔 보통 때와는 다른 정서를 담은 채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성대 그룹이 당신의 그 장난질, 라이브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았어. 당신이 만든 일이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아까 쇼에 맞춰 줬으니 내 책임은 다하지 않았어? 당신 이미지까지 챙겨갔잖아. 더 할 게 뭐 있어?”차설아는 자기는 이제 할 만큼 다했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그의 이미지에 똥칠하고도 모자라 엄청 다 뜯어냈을 것이다. 그러기엔 그녀는 착했고 성도윤을 사랑했던 자신의 4년이 애틋했다.“지금 라이브를 본 사람들이 이제 우리 커플 팬이 될 거야. 이혼은 해도 되지만 대외적으로는...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보여줘야 해.”성도윤은 너무도 당당하게 심지어 당연하게 말을 했고 차설아의 사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차설아는 당최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항상 호들갑 떠는 성격인 배경윤이 하는 얘기라 조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성도윤이랑!”배경윤이 큰 소리로 외쳤다.“언니! 만약 정말 성도윤과 그런 거라면, 난 다시 볼 거야. 내가 예전엔 둘의 팬이었다지만 그놈이 언니한테 어떻게 했는데! 헤어지는 마당에 그 인간이랑 잤다는 게 말이 돼?”그녀가 이렇게 흥분한 이유는 단지 자기가 좋아하는 언니가 다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누가. 내가. 그 인간이랑 잤대?”차설아는 어제저녁 방송이 언뜻 생각났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어제는 쇼였어. 키스를 당했고 대가로 그 인간 뺨을 한 대 쳤고.” 성도윤을 후려치고 느낀 쾌감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그 키스는 차설아가 손해 본 것 같지도 않았다.“뺨을 쳤다고? 언니, 대단해!”배경윤은 바로 이어서 얘기했다.“그런데, 그게 둘이 잠자리를 한 이유로는 설명이 안 되잖아. 솔직히 말해. 어제 라이브 끝나고 앞뒤로 집에 간 게, 혹시 같이 간 거야? 설마... 지금 그 인간 거기 있는 건 아니겠지?”“너무 갔다. 브레이크!”차설아는 성도윤과 앞뒤로 집에 돌아온 기억이 전혀 없었다.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배경윤이 보낸 찌라시 기사 캡쳐본을 보고서야 깜짝 놀랐다.기사 사진은 어제저녁 성도윤과 그녀는 놀랍게도 ‘샘천 레지던스’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둘의 투 샷은 아니었지만, 앞뒤 간격이 10분도 안 되는 시간 차였다.‘샘천 레지던스’는 그녀가 현재 묵고 있는 리버 뷰 아파트고, 한 층에 두 가구가 들어사는 대평층이었다. 배경수가 직접 골라서 찾아 준 곳이 바로 여기였고 아무에게도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성도윤이 그녀를 미행했을 거라는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 있을 법했다. “아우, 변태!”차설아는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고 배경윤과의 전화를 끊고 성도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당신이야?”성도윤의 나른한 목소리에서 약간의 의외라는 감정이
“막장 드라마 적당히 좀 봐. 나 요 앞에 4년째 살고 있는데, 미행이라면 당신이 날 미행했다고 봐야지 않겠어?”성도윤이 쌀쌀맞게 말을 하더니 긴 다리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곧장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뭐? 앞... 앞에 산다고?”그러고 보니 맞은편 저택의 문이 한 뼘 열려있는 게 보였다. 차설아는 무안함에 귀를 만지작거렸고 한참 헛발질을 했던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떠올라 민망함이 허를 찔렀다. 따라다닐 의사가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스토커라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는 사실이 혼자 김칫국 한 사발 마신 것 같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성도윤은 날렵한 눈매로 집안을 무심하게 훑어봤고 시선 끝에는 그녀의 침실에 멈춰 섰다.“당신 안방 구조가 나랑 아주 다르네.”성도윤은 그녀의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고 차설아는 서둘러 안방 문 앞에서 막아섰다.차설아는 언뜻 침대 위에 놓인 육아 책이 생각났고, 그걸 성도윤이 본다면 임신 사실이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쏜살같이 움직였다.“안 돼!”“안 되는 나도 안 돼.”성도윤의 캐릭터상 하고 자 하는 일을 꼭 해야 할뿐더러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진짜 안 돼!”차설아는 두 팔을 벌린 채 성도윤이 방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아섰고 때려 막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당신이 뭔데! 나랑 무슨 사이라고 내 침실을 함부로 들어가려 해?”“남편이라는 이유.”키 차이로 인해 성도윤은 아담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그의 깊은 눈매엔 서늘한 기운이 담겼다.“아님, 뭐 딴 남자라도 숨겼어?”“성도윤!!!”차설아는 손에 힘을 다해 주먹을 꽉 쥐었다.‘좋은 말로 할 때 좀 듣지. 거 참 힘쓰 게 만드네.’어차피 그녀의 솜씨면 3할의 공력으로도 성도윤을 회의가 들게 만들 수 있었다.“움직이면, 다 보여.”성도윤은 유유자적하게 또 한 번‘가슴꼴 주의’를 줬다.“아! 미친!”차설아는 급하게 두 팔로 감싸면서 앞을 단단히 단속했다. 성도윤은 큰 장신을 옆으로 비껴가면서 설아의 빈틈을 치고 안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
배경윤은 윤설이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은 차설아 친오빠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윤설의 의도를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내 방으로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은 앞장서서 사도현과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은 윤설을 방까지 부축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윤설은 울퉁불퉁한 방바닥, 구멍이 난 천장과 낡아서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침대를 보면서 말문이 막혔다.윤설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현 씨랑 이런 방에서 같이 지낸 거예요?”“네. 침대도 푹신하고 공기가 좋아서 잘 잤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배경윤은 윤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줄 몰랐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윤설 곁을 지켰다.‘이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서 도현 씨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도현 씨는 결벽증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지 못했을 거라고요.”“쓰레기 소각장이라고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방이 아니면 외양간에서 소랑 같이 자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꽤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윤설 씨가 결벽증인 것 같아요.”“도현 씨가 배경윤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네요. 배경윤 씨를 위해서 이런 누추한 방에서 자고 더러운 진흙으로 들어가 배경윤 씨를 안아 들다니... 내가 배경윤 씨를 얕잡아 봤네요.”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배경윤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본론만 얘기하세요. 배후가 누구기에 성형외과 의사한테 전화하게 된 거죠?”“말해도 배경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걸요?”윤설은 차갑게 웃더니 거만한 눈빛을 하고서 배경윤을 훑어보았다. 배경윤이 목을 치려고 하는 배후는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배후가 누구인
게스트들은 사도현의 표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불을 피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 같은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가 불을 피운다고?”그러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장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불을 피우다니, 네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방에서 나오는 게 도움이 되겠어.”배경윤은 불을 피우고 진찬영이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몹시 당황했다.‘사도현은 왜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야! 찬영 오빠랑 같이 경운기를 타려고 할 때, 찬영 오빠랑 미꾸라지를 잡을 때, 찬영 오빠랑 같이 요리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만 하잖아. 명색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 피우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아니면 여자가 옆에 있어야 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잖아.”사도현은 팔짱을 낀 채 진찬영을 쳐다보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사도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도현은 일부러 진찬영을 저격했다.“너 자꾸 함부로 말할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팬으로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여우 같은 놈, 여자가 없으면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괜찮아요.”진찬영이 피식 웃더니 배경윤의 팔목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배경윤 씨가 옆에서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혼자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던데요?”진찬영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도현 씨께서 불을 잘 피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죠. 다들 쉬고 계세요.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진찬영과 사도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