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화 좀 푸세요. 그리고 사모님 때리지 마세요!”“가정폭력은 엄연한 범법행위입니다. 사모님처럼 좋은 분을 왜 때리시는 겁니까! 또 대표님을 이렇게나 사랑하시는데... 때리시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진 않으셨나요?”“우리 사모님을 또 때리려 한다면 우리는 단체로 파업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을 법정에 세우는 것에 힘을 보태겠습니다!”“...”지금 앞장서서 차설아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성대 그룹 행정부의 임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차설아를 대신하여 성도윤에게 그녀의 사랑이 담긴 도시락과 선물을 전달하며 그녀와 친분을 트게 되었는데, 그들은 일찌감치 차설아를 친구로 여겨왔다.성도윤과 차설아는 아직도 낯 뜨거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성도윤이 다부진 몸으로 연약한 차설아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성도윤은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그의 가장 유능한 조수인 진무열마저 나서서 차설아를 대신하여 억울함을 호소했다.“대표님, 저도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우리 사모님처럼 착한 분이 어디 있다고 이러십니까! 몇 년 동안 사모님이 아내로서 본분을 다한 것은 우리가 모두 두 눈으로 지켜본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 분을 두고 바람을 피우시다니... 이젠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버티시는 겁니까, 정말 너무하시네요!”진무열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다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혹시 아직 사모님을 사랑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래서 이혼 합의서에 서명을 못 하겠다고 하시는 겁니까?”누군가의 말에 현장은 다시 뜨거워졌다.“그런가 보네! 대표님은 그저 잠시 유혹에 못 이겨 바람이 났을 뿐인가 봐! 사실 아직 사모님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지... 상간녀가 사모님보다 나은 구석은 눈을 뜨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잖아, 그저 한때의 신선함을 노렸을 뿐일 거야!”“대표님,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사모님한테 무릎 꿇고 빌면 사모님께서 분명히 용서해 주실 겁니다!”“저였으면 이미 무릎을 꿇고도 남았겠네요.
라이브 방송 이후, 성도윤은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다. 게다가 의분이 가득 찬 네티즌들이 작성한 저주 글들이 봇물 터지듯 넘쳐났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상간녀’ 임채원과 그의 큰형 성도현이 교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증거를 끄집어냈다.네티즌들은 성도윤의 도덕성을 지적하며 그를 친형님의 여자를 탐하는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고 욕했다.성대 그룹도 비난받았다. 고객 시스템 해킹 소동에서 벗어나자마자, CEO가 실검에 오르며 욕을 먹고 있으니, 주가는 또 한 번 대폭 하락했다.“도윤아, 라이브 방송은 뭐야! 설아한테 잘 좀 해... 어쩌다 나 성명원에게서 너 같은 자식이 나온 건지... 바람피운 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이제 온 세상이 다 알게 됐더구나! 게다가 설아한테 가정폭력을 가하다니! 할아버지께서 심장이식 때문에 외국에 나와 있지 않았다면 반드시 네 다리를 부러뜨렸을 것이야!”이른 아침부터 성도윤은 그의 아버지 성명원의 핀잔에 짜증이 났다.그는 잘생긴 얼굴을 찡그리며 길쭉한 손가락으로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모두 그 여우 같은 여자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요.”“X소리 집어치워!”성명원은 화를 참지 못하고 바로 욕설을 퍼부으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설아가 어떤 성격인지 내가 몰라? 그렇게 착하고 참한 애가... 네가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설아가 집안 사정을 밖에 알리려 했을까?”‘착하고 참한 애?’성도윤은 화가 치밀어올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싶었다.물론 예전의 차설아라면 착하고 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계략만 많은 교활한 여우 한 마리 같았다.“아니면 정말 아직도 설아에게 미련이 남아서 놓아주지 못하는 거야?”성명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물었다.“아직 사랑한다면 잘못을 인정해야지, 여자는 어르고 달래야 하는 거야. 아빠가 다 경험이 있으니 돌아가는 대로 제대로 전수해 줄게. 여자는 말이야...”“사랑이라니요? 절대로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거예요.”얼음같이
성도윤은 인내심이 바닥나 언짢은 얼굴로 다그쳤다.“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지? 계속 우물쭈물하면서 뭐 하는 거야!”“홍보팀에서 각종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현재 네티즌 10명 중 9명은 사모님 편에 서서 대표님께 불만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대표님께서 나서서 사모님한테 용서를 빈다면 소동을 가장 빨리 잠재울 수 있으리라 예측합니다. 사모님과 다시 라이브 방송을 켜고 네티즌들 앞에서 사랑을 과시한다면 여론은 완전히 뒤집힐 것입니다.”예서는 조심스럽게 말을 마쳤다. 그녀는 감히 성도윤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도 성도윤이 얼마나 도도하고 오만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홍보팀에서 전달한 먼저 꼬리 내리기 방안에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말도 안 되는 소리!”역시나 성도윤은 단칼에 거절했다.“할 일 없이 집에 처박혀 키보드 두드리는 맛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둬. 그리고 성대 그룹을 보이콧해?”성도윤은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순진한 녀석들!”이 말은 결코 성도윤의 거만함에서만 나온 말이 아니었다.성대 그룹은 셀 수 없이 많은 산업에 발 담고 있었다. 요식업, 부동산, 의류, 전자, 자동차 제조는 물론, 군용기 제조에까지 발 담고 있었기에 일개 네티즌들이 보이콧하고 싶다고 해서 보이콧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그럼 더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지워!”성도윤은 독기 어린 눈동자로 예서를 쳐다보며 말했다.“3일 내로 나에 관한 그 어떤 언급도 남아있지 않게 만들어.”“그건...”예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섣불리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없었다.“그럼... 홍보팀에 연락해서 홍보비용을 더 추가하라고 하겠습니다.”그녀도 이렇게 하는 것은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도하고 오만한 대표님이 버티고 있으니 별다른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예서가 막 나가려던 그때, 성도윤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네, 대표님. 더 하실
성도윤은 이 커플 팬덤의 규모가 30여만 명이라는 것에서 한 번 놀랐고 활약이 모든 팬덤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동네 구멍가게 일 줄 알았더니 거대한 상가였다.어쩐지, 라이브 방송 한 번으로 ‘쓰레기' 라고 실검에 오르더라니...성도윤은 마우스를 내리며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핑크빛 썸! ‘차성윤설’ 한 앵글에 들어오다!”“달달함이 극치에 달하다! 성도윤 왕자를 바라볼 때 나오는 설아 공주의 꿀 떨어지는 눈빛!”“서로를 마주 보다! 도윤 도련님이 아내를 바라보는 꿀 떨어지는 순간 모음!”“...”이 팬덤의 활약에 성도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게시물을 업로드했고 오래된 게시물 아래에 댓글을 달아 열띤 토론을 했다. 이제 보니 차설아와 같은 앵글에 담긴 사진이 꽤 많았다. 그리고 이 사진들 속에서, 그를 몰래 바라보는 차설아의 눈빛은 그렇게나 애틋했다.이 게시물 중 조회수가 가장 많고 댓글 수가 가장 많은 게시물은 ID가 ‘차성커플 바라기' 인 네티즌이 쓴 팬 픽션이었다.“첫 만남, 한여름날 어느 오후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모두가 허둥지둥 비를 피하느라 바빴다. 그때 그와 그녀가 운명처럼 마주쳤다...”성도윤도 홀린 듯 팬 픽션을 읽다 보니 어느새 404페이지까지 읽었고 새로 고침하자마자 글이 삭제되었다고 알림이 떴다.“빌어먹을!”성도윤은 나지막하게 짜증 나는 마음을 털어놓았다.그제야 이 팬덤의 규모가 크고 활약이 뛰어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런 팬 픽션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울 정도였다.성도윤은 침착하려고 애쓰며 홈페이지를 닫았다. 더 보다가는 그마저도 팬클럽 일원이 될 것 같았다.어느덧 밤이 되었다. 성도윤은 분명 바쁜 하루를 보냈는데, 어쩐지 마음이 허전했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이리저리 뒤적이며,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골똘히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같은 시간, 차설아는 소파에 누워 육아책을 뒤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뜻밖에
“푸읍!”마시던 레모네이드를 뿜는 차설아.좀처럼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던 차도남 성도윤이었기에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돌직구였다.“나르시시즘 아니야? 사랑은 무슨.”차설아는 날카로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딱 걸린 도둑처럼 자신감 없게 대답했다.“사람들이 그러는데, 당신이 나를 많이 사랑했었다고.”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꼬리가 올라간 성도윤, 여자들이 막 들이대면 귀찮아하고 느낌 없는 모습이었다면, 유독 차설아의 애정은 왠지 모르게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처럼 즐기는 모양새였다.“사람들은 몰라도, 그거 다 생방송이라 연기라는 걸 본인이 더 잘 알면서.”차설아은 손을 내저으며 소탈한 척 행동했다.그녀는 자신이 성도윤을 많이 사랑했다는 지난 사실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만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고 얘기할 수 있고, 알량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성도윤은 범죄를 캐는 조사관처럼 그녀의 위선을 벗겨내려는 듯 한발 한발 몰아붙였다.“사랑하지 않은 거라면 나 몰래 챙겨준 건 뭐고? 우리 투 샷 사진들에서 나를 다정하게 쳐다본 건 뭐고? 또... 사랑하지 않은 거라면 임채원을 적대시 한 건? 질투를 한 게 아니면 뭔데?”성도윤의 연이은 질문에 차설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이 훤히 다 비친 듯한 상황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그래서?”‘지금 뭐 하자는 거지? 굳이 밝혀서 내 마음을 저당 삼아 날 마음대로 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이러나? 아니면 울며불며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리는 모습이 보고 싶은 걸까? 허세를 부리는 거야, 뭐야? 웃겨, 정말!’차설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성도윤, 당신은 정말 내가 본 사람 중 제일 야박하고, 제일 나르시시즘에 꽉 찬 사람 같아. 여기서 당신을 사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앞으로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지. 굳이 이 야심한 밤에 사람을 불러내서 이런 대화를 하는 것도 참시답지 않네. 사랑했다
“...”차설아는 멍하니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고 꼼짝하지 않고 굳은 채 서 있었다.비록 둘이 하룻밤 잠자리는 했다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가 상상했던 대로 그의 입술은 극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그와의 키스는 너무 간질간질했고 뜨거웠다.갑자기 훅 들어온 성도윤의 애틋한 감정에 휘감긴 그녀는 꽉 쥐었던 손에 힘이 풀렸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몇 분이 흐른 뒤.“자, 이제 끝났어요.”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레스토랑의 불이 다시 켜졌다.차설아도 순간 제정신이 돌아왔고 재수 없는 물건을 피하듯 재빨리 성도윤과 거리를 두고 섰다.‘정신 나간 거야? 당장 이혼할 남편이랑 키스한다는 게 말이 돼?’그녀는 서둘러 손등으로 입술을 닦는 행동을 보였고, 도도하고 고고하신 성대표가 보기엔 어딘가 모르게 기분 나쁜 제스처였다.“뭘 닦기까지 해? 그렇게 몰입하신 분이?”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그녀는 이 수치스럽고 어이없는 상황에 화를 내며 따져 물었다.“도윤 씨,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친 거 아니야?”성도윤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약간은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답했다.“글쎄.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성도윤은 붉게 활짝 핀 장미같이 유혹스러운 그녀의 입술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뚫어지게 보았다.그쯤 카메라를 든 뚱뚱한 남자가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성 대표님, 방금 장면은 너무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찍혔습니다. 마치 환상적인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같이 말입니다. 라이브를 본 네티즌들 반응이 폭발적이에요. 전에 욕하던 건 감쪽같이 사라졌고 하나같이 긍정적인 반응들뿐이고, 댓글 창은 축하 댓글로 도배되었어요. 이번 위기는 라이브 홍보가 제대로 먹혀서 효과가 죽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방금 키스를 너무 오래 딮하게 해서 타임 오버했다는 점에서 일부 누리꾼들이 둘이 쇼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 거 빼
“아니면?”차설아가 뒤돌아섰고, 자기 손목을 잡은 성도윤의 손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뭐, 뺨을 되돌려 주기라고 할 건가?”“...”성도윤은 말없이 우주같이 깊은 눈길로 차갑게 그녀를 쳐다만 보았다.차설아가 되려 성도윤에게 가까이 서서 하얀 얼굴을 그의 눈앞에 갖다 대며 화를 돋우듯이 말했다.“당한 건 반드시 되갚아 준다고 익히 들어 알고 있어. 불쾌하면 나 한 대 쳐.”성도윤은 당연히 손을 대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줬다. 곧, 큰 레스토랑에는 홀연히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성도윤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을 이용만 하려던 건 아니야. 사랑의 장면은 거짓이지만, 미안한 마음은 진짜니까.”눈 부신 불빛 아래에 선 남자는 실루엣마저 잘생기고 완벽했다. 그럼에도 그녀와는 너무 멀고 너무 비현실적이었다.“당신... 지금 나한테 사과하는 건가?”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단 한 번도 성도윤이, 저밖에 없는 안하무인격의 성도윤이 고귀한 자태를 내려놓고 사과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아니, 잘못 들었어.”성도윤은 가볍게 기침 두 번 하며 멋쩍게 부인했다. 그의 차갑고 준수한 얼굴엔 보통 때와는 다른 정서를 담은 채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성대 그룹이 당신의 그 장난질, 라이브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았어. 당신이 만든 일이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아까 쇼에 맞춰 줬으니 내 책임은 다하지 않았어? 당신 이미지까지 챙겨갔잖아. 더 할 게 뭐 있어?”차설아는 자기는 이제 할 만큼 다했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그의 이미지에 똥칠하고도 모자라 엄청 다 뜯어냈을 것이다. 그러기엔 그녀는 착했고 성도윤을 사랑했던 자신의 4년이 애틋했다.“지금 라이브를 본 사람들이 이제 우리 커플 팬이 될 거야. 이혼은 해도 되지만 대외적으로는...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보여줘야 해.”성도윤은 너무도 당당하게 심지어 당연하게 말을 했고 차설아의 사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차설아는 당최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항상 호들갑 떠는 성격인 배경윤이 하는 얘기라 조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성도윤이랑!”배경윤이 큰 소리로 외쳤다.“언니! 만약 정말 성도윤과 그런 거라면, 난 다시 볼 거야. 내가 예전엔 둘의 팬이었다지만 그놈이 언니한테 어떻게 했는데! 헤어지는 마당에 그 인간이랑 잤다는 게 말이 돼?”그녀가 이렇게 흥분한 이유는 단지 자기가 좋아하는 언니가 다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누가. 내가. 그 인간이랑 잤대?”차설아는 어제저녁 방송이 언뜻 생각났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어제는 쇼였어. 키스를 당했고 대가로 그 인간 뺨을 한 대 쳤고.” 성도윤을 후려치고 느낀 쾌감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그 키스는 차설아가 손해 본 것 같지도 않았다.“뺨을 쳤다고? 언니, 대단해!”배경윤은 바로 이어서 얘기했다.“그런데, 그게 둘이 잠자리를 한 이유로는 설명이 안 되잖아. 솔직히 말해. 어제 라이브 끝나고 앞뒤로 집에 간 게, 혹시 같이 간 거야? 설마... 지금 그 인간 거기 있는 건 아니겠지?”“너무 갔다. 브레이크!”차설아는 성도윤과 앞뒤로 집에 돌아온 기억이 전혀 없었다.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배경윤이 보낸 찌라시 기사 캡쳐본을 보고서야 깜짝 놀랐다.기사 사진은 어제저녁 성도윤과 그녀는 놀랍게도 ‘샘천 레지던스’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둘의 투 샷은 아니었지만, 앞뒤 간격이 10분도 안 되는 시간 차였다.‘샘천 레지던스’는 그녀가 현재 묵고 있는 리버 뷰 아파트고, 한 층에 두 가구가 들어사는 대평층이었다. 배경수가 직접 골라서 찾아 준 곳이 바로 여기였고 아무에게도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성도윤이 그녀를 미행했을 거라는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 있을 법했다. “아우, 변태!”차설아는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고 배경윤과의 전화를 끊고 성도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당신이야?”성도윤의 나른한 목소리에서 약간의 의외라는 감정이
박성훈을 본 그들은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교수님, 제 아들은 괜찮은 거죠?”“수술은 잘 됐으니까 걱정 마세요. 며칠 푹 쉬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장시간의 수술을 진행한 탓에 피곤했던 박성훈은 흥분한 채로 달려오는 소영금을 진정시키기 위해 짤막하게 환자의 상태에 대해 알려주고는 바로 탈의실로 들어가 버렸다.성도윤의 뇌 수술에 대해서는 궁금한 게 아주 많았기에 박성훈은 그것도 성도윤의 깨어난 뒤에 다시 차근차근 물어볼 생각이었다.“무사하다니 다행이네.”아들이 무사한 게 가장 중요했던 소영금은 마침내 한 시름 놓으며 주저앉았다.“...”하지만 한쪽에 서 있던 서은아는 한껏 어두워진 얼굴을 하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성도윤의 수술이 잘 끝났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성도윤이 일어나면 자신부터 내칠까 봐 걱정돼서 근심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아가씨, 괜찮으세요?”“아, 네. 괜찮아요.”그때 진무열이 평소답지 않은 서은아의 상태를 눈치채고 다가가자 당황한 서은아는 그의 눈을 피하며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아가씨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요? 혹시 대표님 수술이 잘 끝난 게 싫으신 거예요?”“그럴 리가요. 그냥...”“도윤이가 눈만 뜨면 나랑은 이제 끝이니까 그게 서운해서 그러죠.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진 비서님도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죠.”“진짜 그 이유뿐이에요?”미간을 찌푸린 진무열은 서은아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며 물었다.손을 가만히 못 두고 눈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은 실망이라기보다는 초조함에 가까웠다.꼭 무언가를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같아서 진무열은 그녀가 성도윤에게 말 못 할 큰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하지만 우선은 성도윤의 회복이 먼저였기에 그가 깨어날 때까지 자신의 의심은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한편 흥분을 가라앉힌 소영금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서은아를 보며 물었다.“은아야,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말해. 박 교수
“됐어, 사람 안 다쳤다니까 수술은 제대로 할 수 있겠네. 교수는 지금 어딨는 거야?”“아, 교수님이요?”소영금의 질문에 진무열은 수술실 쪽을 보며 답했다.“아까 직원 통로로 들어가셨으니까 지금쯤 수술하고 계실 거에요.”“뭐? 이미 시작했다고?”진무열의 대답에 소영금의 심장은 갑자기 뛰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그녀는 다급히 두 손을 모아 하늘에 대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하느님,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제 아들 무사하게만 해주세요... 그리고 제 아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설아랑은 못 만나게 할게요.”그녀의 기도를 듣던 진무열은 이상한 문구에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수술도 다 동의하셨으면서 왜 차설아 씨랑은 자꾸 갈라놓으려고 하세요? 아까는 더 이상 대표님 선택에 관여 안 하신다면서요?”“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내가 우리 도윤이 사주를 봤는데 도윤이랑 설아는 서로 상극이래. 같이 있으면 둘 중 하나는 다치기 마련이라는데 그런 애들을 어떻게 붙여놔? 둘을 위해서라도 내가 악역 자처해야지.”자신이 아무리 훼방을 놓는다 해도 둘의 마음이 간절하기만 하다면 어떤 곤란도 함께 이겨낼 것이었기에 소영금은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보기로 했다.“사모님, 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신다면서요? 언제부터 그런 미신을 다 믿기 시작하셨어요?”소영금의 대답을 들은 진무열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젊었을 때의 소영금이 유명했던 건 그녀가 남긴 대단한 업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차설아와 성도윤을 뛰어넘는 역경을 이겨낸 사랑 스토리도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데 한몫했었다.그때 소영금의 좌우명은 ‘사람의 의지는 하늘도 이긴다.’였는데 그랬던 사람이 나이가 들고나니 하느님에게 저렇게 기도를 하며 사주를 철석같이 믿는 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만약 소영금이 저 이유를 내세우며 차설아와 성도윤의 사이를 계속 방해한다면 어떤 대책을 내세워 여야 할지도 벌써부터 막막했다.하지만 서은아는 이때다 싶어 성도윤과 차설아가 잘되는
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소영금을 안은 채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건넸다.“아주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거 어차피 위험한 수술이었잖아요, 안 하게 된 게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니에요? 하늘도 우릴 도우신 거예요.”“나는 괜찮은데 수술 시작 전에 갑자기 사고가 난 게 우연이 아닌 것 같아서 좀 찝찝하네.”한숨을 쉬던 소영금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도윤이가 알면 화낼 텐데, 쟤 성격에 꼭 끝까지 알아내려 들 거야.”“아...”그 말에 서은아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켜내고 있었는데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살펴보던 진무열이 입을 열었다.“서은아 씨는 아까까지만 해도 수술 못 시킨다면서 큰소리치더니 왜 지금은 또 이렇게 아쉬워하는 거예요? 대표님이 수술받길 원하시는 건 맞아요?”“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서은아는 이를 악문 채 진무열을 노려보며 말했다.“수술에 관해서는 별생각 없었어요. 저는 도윤이만 좋아질 수 있다면 무조건 그 사람 선택 존중하니까요.”“그래요? 본인이 뱉은 말이니까 갑자기 말을 바꾸거나 하진 않겠죠?”서은아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진무열은 이상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당연하죠, 제가 직접 한 말인데.”모든 조치가 끝난 뒤라 믿는 구석이 있었던 그녀는 이제 와서 배려심 깊은 모습을 연출하며 진무열과 소영금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그런데 아까부터 입꼬리를 씰룩이던 진무열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대표님도 아가씨 말 들으면 마음이 한결 놓이시겠어요. 역시 서씨 집안 아가씨는 인품도 남다르네요.”진무열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수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말했다.“교수님, 여기 준비 끝났으니까 바로 수술 진행해주세요.”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언성을 높여 물었다.“진 비서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수술을 진행한다니요?”“박 교수님이죠 당연히, 그분이 오늘 뇌수술 집도의이신데 그분한테 연락해야겠죠?”“박 교수님은
“그런데 박 교수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수술 삼십 분 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전화 한 통이 없어.”소영금은 시계를 보며 아직도 오지 않는 박성훈에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성대 그룹 후계자라는 지위와 신분은 국가 간부급인데 그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수술 시작 30분 전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으니 자연스레 교수의 실력에 대한 의심도 생기기 시작했다.“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 성격이 워낙 그런 분이시라 항상 시간 딱 맞춰오세요. 그리고 원래 이런 수술도 잘 안 맡는데 대표님이랑 친분이 있으셔서 특별히 해주시는 거예요.”“뭐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얼굴이나 봐야겠네. 수술 잘하면 다행이지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진무열의 말에 소영금은 성격을 죽이며 복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한편, 수술실 밖으로 나온 서은아는 눈물을 닦아내고 눈을 번뜩이며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내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렇다면 나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예정대로 일 진행해,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그 뒤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수술 시작 시간이 되자 소영금은 초조해하며 물었다.“약속한 시간 다 됐는데 이 의사는 왜 안 와?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야?”“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진무열은 바로 박성훈의 비서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무슨 말을 전해 들었는지 벙찐 상태로 돌아왔다.소영금은 그런 진무열의 모습을 보고 놀라며 다급히 묻기 시작했다.“왜 그래 진 비서? 어디까지 왔대?”진무열은 낯빛이 창백해진 채로 소영금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박 교수님 비서랑 연락이 됐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교수님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크게 다치셨대요.”“뭐라고?!”“어떻게 수술 앞두고 마침 그런 사고가 나? 오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그건 아닌 것 같아요.”반신반의하는 소영금에 진무열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도윤이가 이미 결정을 내린 거지. 어차피 쟤 인생인데 나도 쟤 뜻 존중해주기로 했어.”소영금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사실 예전의 소영금은 사사건건 아들을 속박하려 들며 성도윤의 결혼까지 간섭했었다.그래서 차설아와 함께 살 때도 둘 사이에 자꾸 끼어들며 둘의 감정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쳤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제 아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인데 그냥 내버려 뒀으면 임채원 같은 여자가 꼬일 일도 없을 것 같아 소영금은 그 일이 늘 후회스러웠다.그래서 이번에는 아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해주기로 한 것이다.“그럼 제 생각은 안 하시는 거예요? 도윤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기억을 회복하든 저는 어차피 다 상처받는 거잖아요.”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것들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 서은아는 허무한 마음에 소영금을 보며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주머니도 아시잖아요, 제가 도윤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도윤이 때문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다 아시면서 어떻게 이래요? 쟤가 실명해서 성대 그룹 이사들한테 공격받을 때도 모든 자원, 인맥 동원해서 도윤이 일으켜 세운 것도 저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저더러 모든 걸 포기하라고요?”“은아야, 일단 흥분하지 말고 진정 좀 해.”소영금은 그런 서은아를 달래며 말했다.“그냥 뇌수술하는 것뿐이지 죽는 것도 아니고 너랑 있었던 일을 다 잊는 것도 아니야. 네가 한 희생 도윤이도 알고 나도 알아, 쟤가 배은망덕한 사람도 아니잖니.”“저는 안 잊겠지만 바로 차설아를 찾아가겠죠. 그러면 저는 바로 버려지는 거잖아요, 아니에요?”“그럴 리가 없잖아. 도윤이랑 설아는 이미 지나간 인연이야.”“누가 그래요! 도윤이는 그냥 차설아를 잠시 잊어서 저를 그 여자로 생각하고 곁에 두는 거예요. 지금 나한테 다정했던 만큼 기억만 돌아오면 바로 매정해질 거라고요! 그리고 모든 사랑은 또 차설아한테 퍼주겠죠.”“그럴 수도 있지만...”엉엉 우는 서은아를 보며 측은지심이 생겨난 소영금은 그녀를 다독이
“유감일 것도 없어요. 내어준 게 아니라 갚은 거니까.”차설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나 위해서 말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내가 손해 볼 건 없는 거래에요.”“알겠어요... 설아 씨가 비밀로 해주길 원하신다면 저희도 당연히 말은 안 하죠. 떠나고 싶으실 때 저한테 알려주시면 제가 서영 언니한테 물어볼게요. 하지만 언니도 별말 없이 보내줄 거에요.”“아직은 급하지 않아요.”차설아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진이 아직 안 깨어났다면서요, 일어나서 눈은 제대로 보이는지 확인한 뒤에 기회 봐서 나갈게요. 만약 수술이 성공적이지 않아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더 효율적이긴 하잖아요.”“설아 씨는 어쩜 이렇게 착해요? 우리 도련님을 이렇게 다 생각해주시고, 설아 씨는 우리 도련님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요.”차설아의 말에 제대로 감동받은 현이는 순진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도련님도 설아 씨한테만큼은 진심이니까 아무 걱정 마세요. 회복 마치고 나면 성대 그룹 주권도 성도윤 손에서 빼앗아 오실 거에요. 그때는 도련님이 성도윤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을 테니 설아 씨한테도 꼭 제대로 보상해주실 거예요.”“그런 생각까진 안 해봤는데...”차설아도 자신의 행동이 성대 그룹의 내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눈이 보이지 않아 잠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긴 했지만 성진은 그리 쉽게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동안 필시 성도윤에 대응할 방도를 마련했을 것이다.그런 성진과 맞서려면 성도윤도 한동안 바빠질 것 같았다.하지만 차설아는 그래도 멀어버린 눈 덕분에 그 꼴사나운 모습들을 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이렇게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사고회로를 돌리는 게 바로 차설아였다.---그 시각, 성도윤의 뇌수술도 한창 준비 중이었다.이미 수술복으로 환복을 마친 성도윤은 수술실에 들어가 있었고 문밖에는 소영금, 서은아, 진무열 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주머니, 아직 시간
“아, 아니야!”똑똑한 원이가 눈치라도 채면 집요하게 캐물을 걸 알기에 차설아는 당황하며 다급히 부인했다.“엄마 아무 일도 없이 잘 있어. 엄마한테 언제 무슨 일 생기는 거 봤어? 걱정 말고 동생 잘 챙기고 민이 이모 말씀 잘 듣고 있어.”말을 마친 차설아는 바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원이는 그렇게 놔두질 않았다.“엄마한테 생긴 일이 적진 않죠.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데요,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니까 영상통화 못 하는 거잖아요. 1초만 켜요, 아무 일 없다는 거 내 눈으로 확인하면 믿어줄게요.”“그게...”원이를 속이지 못한다는 걸 알아챈 차설아는 핸드폰을 멀리 놓고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원아, 뭐라는지 잘 안 들리네? 엄마 지금 친구랑 등산 하고 있어서 신호가 안 좋아. 나중에 통화하자!”말을 마친 차설아가 통화를 끝내자 옆에서 보고 있던 현이가 감탄하며 말했다.“설아 씨는 정말 행복하겠어요. 아들딸 다 저렇게 귀엽고 똑똑한데 엄마도 엄청 사랑하는 게 눈에 보여요!”“나는 행복한데 애들은 행복하지 않아요...”“나 따라다니면서 겁도 많아졌고 힘든 일도 많이 겪었어요. 나는 좋은 엄마는 아니에요.”“그런 말씀 마세요. 애들한테 설아 씨처럼 착하고 대단한 엄마가 있어서 행복할 거예요. 설아 씨는 애들이 설아 씨랑 살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생각해도 애들은 엄마랑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을 거예요.”아직 어리지만 아이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현이는 아들딸을 모두 둔 차설아가 부러웠다.그렇게 아름다운 가정인데 엄마가 시각장애인이 돼버렸으니 아이들이 얼마나 가슴 아플지 눈에 선해 현이는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집에... 모셔다드릴까요?”동정심이 차오른 현이는 차설아에게 앞으로의 생각을 물었다.“나 나갈 수 있어요?”그에 차설아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하죠, 설아 씨는 도련님한테 빛을 보게 해준 은인인데 하늘의 별을 따달라 해도 다 드려야죠. 자유를 원하시면 두말없이 보내드릴
상대방이 악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한숨 돌린 차설아가 말했다.“수술은 다 끝난 거죠? 잘 됐어요? 진이는 어때요? 이제 보인대요?”“언니가 그러는데 수술은 잘 끝났고 일주일 뒤에 실 빼면 도련님은 볼 수 있대요. 그런데 설아 씨는...”현이는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은 창백한 얼굴의 차설아를 보며 가슴 아파했다.“설아 씨는 앞으로 어떡해요...”“난 괜찮아요. 눈만 잃었지 죽은 것도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살아지겠죠. 세상에 시각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사람들도 잘살고 있잖아요.”자신의 상황이 더 고통스러울 텐데 차설아는 이 와중에도 현이를 위로해주고 있었다.그래서 현이는 그런 차설아를 보는 게 더 마음이 아팠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요 며칠은 제가 잘 보살펴드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릴게요.”착하고 긍정적인 차설아를 보며 현이는 아까부터 마음속으로 수십 번도 넘게 감탄하고 있었다.이런 좋은 사람에게 가혹한 일이 생긴 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그럼 나 부탁하나 있는데 좀 도와줄래요?”현이가 착한 사람이라는 걸 보아낸 차설아는 사양하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내 핸드폰으로 민이 이모한테 전화 좀 해줄래요? 며칠 동안 연락을 안 해서 아마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알겠어요.”침대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찾아낸 현이는 차설아의 말대로 핸드폰 잠금을 풀고 ‘민이 이모’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자 상대방은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왜 이제야 전화하세요! 어디 가셨던 거에요 그동안? 갈 만한 데는 다 찾아봐도 없어서 원이랑 달이가 얼마나 놀랐는데요.”민이 이모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어제는 경찰서에 신고까지 했다고 말했다.“저 친구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원이랑 달이는 잘 있어요? 통화라도 하고 싶은데.”“방금 일어난 것 같아요. 진짜 하루종일 아가씨 얘기만
이틀 뒤, 차설아는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성진과 함께 별장의 무균 수술실로 들어갔다.“두 분은 수술대에 누워주세요.”안과 교수는 둘을 데리고 간단한 검사를 진행한 뒤 마취 테스트를 마치고는 간호사더러 그들을 수술대에 눕히게 했다.차설아는 검사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모자만 푹 눌러쓰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수술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엄청 큰 수술대 위에는 환한 전등이 아주 많이 달려있었는데 그것들이 하도 눈부셔서 차설아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광환이 감긴 눈앞을 스쳐 지나가자 차설아는 그제야 자신이 지옥문 앞에 와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후회돼요?”그때 옆에서 성진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후회되면 지금이라도 가요.”“후회 안 해요.”하지만 차설아는 태연하게 웃으며 답했다.“눈 하나로 그렇게 많은 돈을 얻는데 제가 왜 후회하겠어요.”“그래요. 절대 손해 본다고 느끼지 않게 내가 달라는 거 다 줄게요.”성진이 확신에 찬 약속을 하자 마취제 배합을 마친 의사가 차설아와 성진을 향해 말했다.“이제 마취 시작할 건데 전신 마취라서 두 분 다 의식을 잃으실 거예요. 깨어나는 시간은 체질에 따라 다른데 일반적으로 3시간에서 6시간 사이로 의식 차리실 겁니다.”“네.”“시작해주세요.”“시작하시죠.”의사의 말에 차설아와 성진 모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자신의 등을 통해 약물이 주입되는 걸 느끼던 차설아는 빠르게 의식을 잃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차설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건 자신의 세상이 비로소 어두워졌다는 것이다.“거... 거기 누구 있어요?”처음 겪어보는 암흑에 심연에 빠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떨던 차설아는 허공에 대고 손을 저어보았다.“깨어났어요? 어때요, 눈은 안 아파요? 의사 선생님이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 상처가 다 낫는다고 하셨어요. 엄청 아프죠...”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박서영이 아님을 알아챈 차설아는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