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 적당히 좀 봐. 나 요 앞에 4년째 살고 있는데, 미행이라면 당신이 날 미행했다고 봐야지 않겠어?”성도윤이 쌀쌀맞게 말을 하더니 긴 다리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곧장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뭐? 앞... 앞에 산다고?”그러고 보니 맞은편 저택의 문이 한 뼘 열려있는 게 보였다. 차설아는 무안함에 귀를 만지작거렸고 한참 헛발질을 했던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떠올라 민망함이 허를 찔렀다. 따라다닐 의사가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스토커라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는 사실이 혼자 김칫국 한 사발 마신 것 같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성도윤은 날렵한 눈매로 집안을 무심하게 훑어봤고 시선 끝에는 그녀의 침실에 멈춰 섰다.“당신 안방 구조가 나랑 아주 다르네.”성도윤은 그녀의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고 차설아는 서둘러 안방 문 앞에서 막아섰다.차설아는 언뜻 침대 위에 놓인 육아 책이 생각났고, 그걸 성도윤이 본다면 임신 사실이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쏜살같이 움직였다.“안 돼!”“안 되는 나도 안 돼.”성도윤의 캐릭터상 하고 자 하는 일을 꼭 해야 할뿐더러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진짜 안 돼!”차설아는 두 팔을 벌린 채 성도윤이 방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아섰고 때려 막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당신이 뭔데! 나랑 무슨 사이라고 내 침실을 함부로 들어가려 해?”“남편이라는 이유.”키 차이로 인해 성도윤은 아담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그의 깊은 눈매엔 서늘한 기운이 담겼다.“아님, 뭐 딴 남자라도 숨겼어?”“성도윤!!!”차설아는 손에 힘을 다해 주먹을 꽉 쥐었다.‘좋은 말로 할 때 좀 듣지. 거 참 힘쓰 게 만드네.’어차피 그녀의 솜씨면 3할의 공력으로도 성도윤을 회의가 들게 만들 수 있었다.“움직이면, 다 보여.”성도윤은 유유자적하게 또 한 번‘가슴꼴 주의’를 줬다.“아! 미친!”차설아는 급하게 두 팔로 감싸면서 앞을 단단히 단속했다. 성도윤은 큰 장신을 옆으로 비껴가면서 설아의 빈틈을 치고 안
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불쾌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성 대표님, 해킹 거물 바람 님이 그룹 본사에 와 있습니다. 스파크가 누군지 직접 알려드리겠다고, 지금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그래?”성도윤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성대 그룹을 난장판 만들어 놓은 ‘스파크'의 신분을 밝힐 수 있다는 생각에 흥미를 느낀 듯하였다.‘재밌네!’“기다리라고 해. 지금 갈 거니까.”성도윤은 전화를 끊고는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였다. 차갑고 절제된 성도윤의 모습에서 아까의 뜨겁고 정열적인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차설아는 자연스럽게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사실 바람이라는 작자를 일찍부터 만나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던터. 이렇게 제 발로 나타나 주니 그녀로서는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수가 없었다.“도윤 씨, 이제 가?”차설아는 남자의 우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본사에 처리 할 일이 있어.”“같이 가.”성도윤이 뒤돌아서 실눈을 뜨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당신, 또 무슨 꿍꿍이지?”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성도윤은 겉모습은 얌전하고 유순한 그녀, 속은 시커멓고 엉큼한 예비 전처가 어떻게 나올지 가늠하기 어려워 두렵기도 했다.“말을 해도 참... 명성 자자하신 성대 그룹 대표님께서 별거 다 걱정하시네. 여기 해안시에서 당신 앞에서 막 나가는 사람이 어딨다고. 제가 어찌 감히 꿍꿍이가 있겠나요?”차설아는 방실방실 웃으며 성도윤에게 아양을 떨었고, 성도윤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식으로 자세를 취하고 그런 그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차설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여유롭게 겉옷 하나를 집어 들고 얇은 잠옷 위에 걸치며 천천히 말했다.“어젯밤 고민 많이 했어. 당신 얘기대로 그거, 쇼윈도 부부 내가 맞춰 줄게.”“진심?”성도윤은 약간 의외였고 검은 눈동자가 밝아지면서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차설아가 손을 휘이휘이 저으며 말을 막았다.“당신을 위해서도 성씨 집
블랙 착장의 남자가 두 다리를 책상 위에 걸어 놓고 느긋하게 회전의자를 돌리고 있었고 오만방자함을 잔뜩 풍기고 있었다. 그는 빵떡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잘생긴 콧날과 얇은 입술만 드러냈다.그가 바로 수많은 IT 인사의 우상인, 글로벌 해커 리그에서 4년 연속 우승을 거머쥔 사람. 해킹계 양대 산맥 중 한 사람인 거장 바람이다.“바람 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저희 성 대표님 곧 도착하십니다. 곧!”“기다리는 거 힘드시죠? 제가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다리도 두드려 드릴게요!”오늘 운 좋게 우상을 만났다고 친필 사인받으러 온, 또 같이 사진 찍으러 온 직원들이 IT팀에 모여있었다. 이건 완전 핫한 연예인의 행차가 따로 없었다.“다들 한가해?”앞장서 걸어오던 진무열이 모여서 난리부르스를 떠는 직원들을 보고는 화가 났는지 엄포를 놓듯 물었고 직원들은 뒤에서 느껴지는 강한 기세에 갈래 길을 만들면서 뿔불히 흩여졌다.“바람 씨,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분이 저희 성 대표님이십니다.”“대표님,해킹계 거물 바람 님입니다.”진무열은 중간에 선 채 조심스럽게 서로를 소개 해주었다. 바람은 여전히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의자에 기대 채 전혀 일어나 예의 차려 인사할 의지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삐딱하게 성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성도윤도 바람을 내려다보면서 훑었다. 바람이 비아냥거리며 웃어 보였다.“그분이시군요. 최근 들어 실검에 자주 오르신다는. 조강지처 버리고 밖에서 내연녀하고 애까지 만들어서 욕을 바가지로 드신다는 성도윤 씨?”그 말에 모두가 흠칫 놀라며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성도윤 옆에 서 있던 차설아 역시도 감탄해 마지않았다.‘바람 이 인간, 성격이며 코딩하는 스타일이 정말 빼박이네. 공격력 만랩이야!’“허허, 바람 씨 농담도 참!”진무열은 한편으로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시도했고, 한편으로 성도윤이 혹여나 불쾌해하는지 슬쩍 눈치를 보았다. 걱정과 달리, 성도윤은 그쯤이야 전혀
“그 정도 요구는 얼마든지 들어드리죠.”성도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눈에 힘을 주고는 컴퓨터 모니터의 실행 버튼을 응시하며 말했다.“시작해요.”“시원시원하니 좋네요!”바람도 꾸물거리지 않고 프로그램을 돌렸고 모두가 숨을 죽이고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그중 일부 스파크의 팬들은 흥분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긴장했다.“성공! 성공?”“해킹계의 제일 신비스러운 거물 스파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가?”15분이 금방 지나갔고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10. 9. 8. 7......”차설아가 홀가분한 모습으로 스파크를 찾는 현장에 다시 돌아와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긴장한 바람을 보며 조롱하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아이, 뭐야. 아직도 안 나왔어요? 실력자 맞아요? 코드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추적했는데 막 결과가 본인이 나오고 그러지는 않겠죠? 그건 너무 좀 그렇다.”“쓰레기 줍줍 하는 여자가 뭘 안다고!”바람난 남편을 알면서도 손을 놓지 못하고 매달려 사는 그런 여자를 바람은 제일 경멸했다. 그런 차설아를 바람은 하찮게 생각했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자존심도, 능력도 없고, 생각도 없는 여인이 코드를 읽을 줄이나 알면서 껴드나?’팀원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장 바람이 코드엔 늘 완벽하기로 소문났기에 문제 있을 거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고 차설아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다.“3! 2! 1!”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프로그램 추적이 끝났고 모니터엔 확실히 결과 나왔다.“아니... 이게.”화면에 뜬 결과를 본 사람들, 순간 정적이 밀려왔다. 결과는 바로 스파크가 바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역대급 어이없는 사태는 보는 사람들을 말문 막히게 했다!“헐, 봐봐. 내가 맞췄어! 코딩이 진짜 문제가 있다니깐요!”차설아는 바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했다.“총각. 보고 있는 게, 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너무 자만하지는 말죠!”“이럴 리가 없는데, 절대 이럴 수가 없는데! 나의 프로그래밍
갑자기 요주의 인물이 된 차설아는 되레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하하하, 다들 설마 내가 스파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냥 화장실을 잠깐 다녀왔는데, 그걸로 내가 명성 자자한 거장 스파크가 된다고? 에이. 그런 좋은 일이 나한테 떨어지면 내가 나가서 축제라도 벌이고 불꽃놀이라도 해야죠.”진무열이 나서서 아니라고 했다.“제가 봐도 이번 일은 우연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모님은 마음이 세심하고 가정적인 분이지, 컴퓨터 같은 건 동영상을 보는 정도지 게임도 잘 못하실 거예요. 이분이 해킹계 거장이면 저는 XX 국의 대통령이게요?”그 말이 비록 듣기엔 거북해도 차설아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말이긴 했다. 모두 진무열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차설아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순진하고 무해한 척 말했다.“그래요. 도윤 씨 안사람인 제가 해커였으면 저 사람을 해칠 일이 있겠어요. 도우면 도왔지.”침묵을 지키고 있던 냉소적인 성도윤이 예리한 눈길로 그녀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그래? 적잖이 하지 않은 것 같긴 한데.”“호호! 농담도 참.”차설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괘씸하기도 하셔라.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성도윤은 한발 한발 차설아를 향해 다가가서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갸름한 턱을 살짝 잡고 올렸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분석하듯 세심하게 쳐다보았다.“그래서, 당신 아니야?”딴사람은 몰라도 성도윤을 속이기는 쉽지 않다는 걸 아는 차설아는 제 발이 저려 차가운 그의 시선을 피했고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당신이 맞다고 생각하면 맞는 거고, 아니라고 하면 아닐 거고.”“좋아, 쓸데없이 맞는 말.”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에는 큰 정서적인 변화가 없었고 차갑게 그녀를 향해 명령투로 말했다.“핸드폰 줘봐.”요새 젊은 사람들의 비밀은 모두 핸드폰에 담겨있으니 만약 차설아가 문제가 있으면 핸드폰만 뒤지면 다 나올 수 있었다.차설아도 핸드폰을 성도윤에게 넘겨 검사받을 수 없었다. 핸드폰에는 많은 비밀
바람이 떠난 뒤 모든 것이 제자리로 평온하게 돌아왔다.“별다른 일 없으면 나도 먼저 갈게.”차설아가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 쇼윈도 부부 모습도 보여줬고 바람의 실물도 봤으니 성대 그룹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저녁 시간 비워 둬.”성도윤은 사무실 책상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불쑥 말했다. 이런 명령적인 뉘앙스에 차설아는 불쾌했다.“왜?”성도윤은 그에 답하지 않고 서랍을 열어 이쁘게 포장된 박스를 차설아의 앞에 놓았다.“저녁 여덟 시에 플라자 호텔 연회장에서 점잖게 입고 와”“나한테 주는 선물?”차설아는 보기 드문 상황에 순간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싶었고 호기심에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어보았다.포장에 담긴 건 실버 그레이 드레스였고, 색감과 질감으로 가격이 만만치 않음이 한눈에 보였다. 다만 드레스가 너무 보수적이고 단정한 스타일이었다.차설아는 몇 마디 비꼬아 물으려 하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얼굴에 교활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알겠어. 시간 맞춰 갈게.”저녁 여덟시 플라자 호텔.호텔 앞 주차장은 고급지고 화려한 값비싼 차들로 가득 찼고 모터쇼를 방불케 하였다. 연회로 열리는 해안시 자선행사에 국내외 유명 인사들로 붐볐다.차설아는 택시를 타고 도착했고 보기에도 심플하고 심지어 싸 보이는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머리도 대충 묶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른 셀럽들의 화려한 모습과는 선명한 대비가 되었다. 입장하려는데 자연스럽게 경비가 막아섰다.“초청장 보여주세요.”경비는 딱딱한 말투로 차설아를 보며 말했고 차설아는 솔직하게 답했다.“그거 없어요.”“없으면 못 들어갑니다. 여기 보이죠, 아무나 못 들어 갑니다. 저쪽에 가면 되고요.”경비는 아마도 뉴스를 잘 안 보는 눈치다. 그러니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신분 높은 성도윤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수밖에. 적어도... 지금이 그랬다.차설아가 설명하려는 때 빨간색 페라리가 “끼익” 하고 주차했다. 성도윤의 사촌 여동생 소이서가 핑크 드레스를 입고 고고한 자태로 차에서 내렸다. 그녀와 함
소이서는 평소에 멋대로 괴롭혀도 다 받아주던 차설아의 반격에 화난 나머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너무 염치없는 거 아냐? 주제 파악은 할 줄 알아야지. 다 망한 가문의 당신이 감히 오빠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해? 언제까지 이혼을 미룰 건데? 이혼이 미루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아? 채원 언니 배도 이젠 점점 불러오고 있다고. 오빠 새 결혼은 바뀔 수가 없어. 이혼은 뭐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거 같아?”차설아는 담담하게 답했다.“글쎄. 내가 결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사촌 동생인 이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 건 확실하지. 배가 점점 불러오는 걸 어쩌라고. 이혼 도장 찍기 전까지는 난 그 사람의 안사람이고 채원 씨는 첩이야. 배 안에 든 아이는 호적에도 올릴 수 없는 첩의 자식이고.”임채원은 차설아의 말에 비수가 꽂혔지만 당장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인지하고 다시 연약한 척 말했다.“설아 씨, 화난 거 있으면 나한테 풀어. 우리 애는 모욕하지 말아 줘!”“누굴 모욕하려는 말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알려 준 것뿐인데. 첩의 자식은 결국엔 태자가 못 되지 않나?”“그건...”임채원은 말문이 막혔고 여전히 연약한 모습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나 도윤 씨와 진심으로 사랑해. 이 관계에선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 첩 아닌가?”“채원 언니. 저런 사람하고 시간 끌 필요도 없어요. 주제 파악 못 하는 사람은 바로 끝내줘야 해요.”소이서가 이 갈면서 목소리를 높였고 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설아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만 뻗은 손이 누군가의 강한 힘에 눌려 뺨을 치지 못했다.“감히 누가 간섭해!”소이서가 그녀를 막아 나선 사람을 쳐다보더니 욕설을 퍼붓다 말고는 갑자기 수줍은 모습을 보였다.“배, 배경수 씨.”흰색 정장 차림의 배경수는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이 마치 소설 속 백마 왕자와 똑같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이서 씨. 대체 뭘 먹었는데 이렇게 화가 나 있어?”배경수는 소이서를 쳐다보며 물었고 표정은 미소를 지어
차설아는 배경수와 같이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배경수는 방금까지 고귀하고 패기 넘치는 귀족 도련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귀여운 강아지처럼 미소로 꽉 찬 표정으로 시선은 시종일관 차설아만 따라다녔다.“성씨 집안사람들이 감히 누님를 괴롭혀? 다음에 또 괴롭히면 내가 절대 가만 안 둬!”차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이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도련님, 평소랑 달리 진지한 모습에 많이 놀랐어.”“그럼, 나 배씨 집안의 여섯째 도련님인걸!”배경수는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순둥순둥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배경수는 차설아를 훑어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근데 차설아, 아무리 그래도 연회에 참석하는데 너무 단아하고 보수적인 차림 아닌가?”“누나야! 버릇없게!”차설아가 호칭을 정정해 줬고 배경수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따졌다.“아니, 그럼, 배경윤은 왜 그렇게 부르는데? 나 몰라! 앞으로는 보스도 아니고 누님도 아니고 그냥 설아라고 할 거야!”“안 돼!”차설아는 훈계하듯 주의를 줬다.“보통은 연하가 누나라고 안 하는 건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너... 너 어쩌려고 그래?”“이혼도 하는 마당에 내가 마음 있으면 뭐 어때서?”배경수는 말 나온 김에 당당하게 인정해 버렸다. 그녀가 솔로로 돌아오기를 몇 년간 기다렸던 게 동생이나 하려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니까.차설아는 그저 웃어넘기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연회장 앞에 거의 다가와서 그녀는 여린 손으로 코트 단추를 풀더니 한쪽에 뿌려 던지고는 묶은 머리를 풀었고, 빨간 립스틱을 아랫입술에 바르더니 대범하게 입술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보스, 아니 너무...”그런 모습을 본 배경수도 놀랄 정도였다.들어서는 순간 연회장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고 다들 그녀의 모습에 넋이 나갔다.차설아는 빨간색 튜브톱 롱 드레스로 늘씬한 각선미를 선보였고 그 모습은 명랑하고 밝은데 고귀함과 단아함까지 잃지 않았다. 특히 파격적인 옆 라인 트인 디자인은 개성 넘치면서도 여신 미가 더해져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
사도현의 갑작스러운 출연으로 배경윤은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출연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진찬영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도망치고 싶어요? 원한다면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그러고는 싶은데 여기서 제가 도망치면 감독님이 절 가만두지 않으실 것 같네요. 게다가...”배경윤은 소녀처럼 수줍어하면서 말을 이었다.“전 찬영 오빠랑 같이 긴 시간을 보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그럼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출연자들이 많았고 식탁에 젓가락 한 쌍 더 올려놓는 것일 뿐이잖아요. 우리가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하하하, 찬영 오빠가 이렇게 쿨한 사람인 줄 몰랐네요.”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고 즐거운 분위기가 옆에 있던 출연자에게도 전해졌다.사도현은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당연히 두 사람의 모습을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심드렁했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굳어져 있었고 조금 어두운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큼큼, 두 사람. 벌써 서로 귓속말하는 사이가 된 거예요?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남은 건 촬영하면서 하는 건 어때요. 일단 계약서에 사인부터 하자고요.”장윤태는 이미 진찬영과 배경윤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부터 촬영하면서 두 사람을 엮어줄 생각이었다.그러나 그가 엮어주기도 전에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주 다정했기에 장윤태는 너무도 기뻤다. 다만 아쉽게도... 갑자기 나타난 사도현 때문에 마지막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배경윤과 진찬영은 출연 동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촬영은 사흘 뒤부터 시작한다고 했다.촬영장으로 떠나기 전 배경윤은 차설아와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설아, 나 아마도 한동안은 너랑 만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그동안 꼭 밥 잘 챙겨 먹고 나 돌아올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야 해!”그녀는 차설아의 손을 꼭 잡았다.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혔고 여전히 손을 놓기 아쉬
“하하하, 역시 금메달리스트 승부욕 답네요! 아주 직설적이었어요!”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장윤태는 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사도현처럼 신과 같은 존재가 그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면 재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와 라이벌로 겨우 쳐줄 수 있는 사람은 톱배우 진창영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정말이지 그냥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했다.게다가 사도현이 출연한다면 많은 재밌는 일화도 쉽게 공개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건 사도현의 동의를 받아야 방영할 수 있는 것이다... 촬영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벌써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자칫하면 네티즌들의 악플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자본에 굴한 거냐고 하면서 말이다.‘하... 벌써 머리가 아프네.'사도현은 웃는 둥 마는 둥 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배경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럼 저도 먼저 설레는 상대를 찜해도 되는 거죠?”“와, 세상에! 그럼 사도현 님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하신 거예요? 우와, 정말 너무 기대돼요!”소수민은 눈치 있게 분위기를 아주 잘 띄우고 있었다.현재 인기가 많은 배우로서 그녀의 상황 대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자신이 그 유명한 사도현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바로 파악하고 사도현 친구가 되어보기로 루트를 바꾸었다.“전 확신이 없는 일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에요. 확신이 있기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을 결정한 거고 어떻게든 그 사람을 제 여자친구로 만들고 말 거예요.”사도현은 이 말을 하면서도 오로지 배경윤만 빤히 보고 있었다.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바보들이 아니었다. 사도현이 말한 그 사람이 배경윤이라는 것을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하하, 사도현 씨 안목이 아주 좋으시네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여성 출연자 중 사도현 씨랑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은 배경윤 씨죠. 두 사람 집안도 해안시에서 8대 가문에 손꼽히는 가문이잖아요. 나이도 비슷하니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기도 하겠죠.
장윤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긴장한 듯 손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감독님, 무슨 일이에요?”배경윤도 따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읽어내고 궁금한 얼굴로 장윤태를 보았다.“우리 프로그램에 변동이 생길 것 같네요. 원래 계획은 남자 세 명 여자 네 명으로 촬영하려고 했는데 지금 갑자기 합류하게 된 출연자가 있어서 남자 넷, 여자 넷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장윤태는 주먹을 쥐며 책상을 내리쳤다.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어머, 그럼 잘된 일이잖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모두가 짝이 있게 되는 거잖아요! 그럼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소수민은 눈을 깜빡이며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맞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쪽수도 맞아서 누구 한 명 외로워지는 사람은 없잖아요.”다른 출연자들도 맞장구를 쳤다.“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조금 특별한 분이라서요. 그 사람이 오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촬영을 할 수 없을까 봐 조금 걱정이네요.”장윤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대체 누가 투입되기에 촬영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하늘이 다소 건방진 어투로 말했다.“제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이 꽤나 돼요. 대통령이든 세계에 손꼽을만한 재벌이든 전부 만나 대화를 나눠봤죠. 그런데 긴급 투입되는 사람이 누구기에 감독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죠? 말해 보세요. 저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요!”장윤태를 보고 있던 배경윤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그들의 촬영을 방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건... 제가 말하기 어렵네요. 곧 도착한다고 하니 다들 알게 될 거예요.”장윤태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듯 얼굴엔 절망이 가득했다.“자자, 도착하셨다고 하니 다들 기쁘게 환영해주자고요!”별빛 엔터의 홍보팀 팀장이 흥분하며 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그
소식이 퍼지자 인터넷은 며칠 동안 떠들썩했고 팬들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나와 현장 사진을 찍으러 갈 준비를 했다. 소식이 뜨자마자 바로 달려나갈 수 있게.오늘은 원래 진찬영과 배경윤의 계약식이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별빛 엔터테인먼트도 준비 태세를 보였다. 그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소속사 임원진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별빛 엔터의 문턱을 넘는 순간 여기저기서 종이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했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부부를 축하해주는 것처럼 두 사람을 반겼다.“찬영아, 경윤 씨. 이렇게 두 사람이 우리 회사로 온 걸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자자, 거두절미하고 우리 얼른 회의실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하죠!”장윤태 감독은 한시라도 더 빨리 계약하고 싶었기에 두 사람을 바로 회의실로 안내했다.회의실엔 두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이번 연애 프로그램의 또 다른 출연자들이었다.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전부 외모가 빼어나다는 것이다. 길가면 무조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정도로 말이다. “세상에, 진창영 배우님! 정말 잘생기셨어요. 티브이에서도 그렇고 실물도 정말 똑같이 잘생기셨어요!”인기 배우 소수민이 일어나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다른 두 여자 중 한 명은 명문대를 다니는 4학년 장유빈이었고, 남은 한 명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이나였다.두 사람은 열정적인 소수민과 달리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두 눈에 진찬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저기요. 아직 촬영 시작도 안 했거든요? 벌써 그렇게 티를 내시면 어떡해요. 명한 씨, 저희 둘은 들러리가 확정이겠네요!”스포티하게 입은 남자가 단정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운동복 차림의 남자는 지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 선수 하늘이었고 단정한 모습의 남자는 유명한 보험계리사 백호연이었다.“늘이 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러리가 확정이라
배경윤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진찬영을 바라보았다.“찬영 오빠!”그러고는 진찬영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길 맞은편에 서 있는 진찬영은 누구보다도 더 멋있어 보였다. 길을 건너던 배경윤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조심해요!”진찬영은 잔뜩 긴장한 채 달려갔고 배경윤을 와락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를 간신히 피했고 같이 바닥에 넘어졌다. 누가 보아도 애틋한 커플인 것 같았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경윤은 진찬영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전류가 온몸을 뚫고 흐르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은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머쓱하게 웃었다.“찬영 오빠,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까지 다칠 뻔했어요.”배경윤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횡설수설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좋아하는 연예인 앞에서 배경윤은 수줍은 소녀가 된 것 같았다.“내가 길을 건넜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전부 제 탓이에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늘색 셔츠에 카키색 청바지를 입은 진찬영은 특유의 분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타고난 매력이었다.길을 걷고 있어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여자도 진찬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길 건너에서 걸어오는 배경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결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진찬영이었다.“곧 커플로 촬영할 사이인데 편하게 말 놓아도 돼요. 제가 오빠보다 어리잖아요.”진찬영이 진지하게 사과하자 배경윤은 마음이 불편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아, 그러네요. 나의 여자 친구, 앞으로 잘 부탁해요.”진찬영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애틋하게 쳐다보았다. 진찬영의 행동 하나가 배경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흠! 얼른 회사로 가요. 장 감독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말을 마친 배경윤은 뒤돌아
반대로 사도현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배경윤을 쳐다보았다.“급한 일도 없잖아.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커피나 마시면 얼마나 좋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해.”“사도현, 너는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바빠.”배경윤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사도현이 끌어당기면 질질 끌려갔고 기세로 사도현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뻔뻔스러운 사도현을 어쩌지 못하기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할 일이 없겠어? 너를 만나는 게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야.”사도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배경윤을 바라보았다.“이 멍청한 놈!”배경윤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욕했다. 사도현이 능글맞은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사도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듣기로는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결정했다더라? 진찬영이랑 커플로 연기하는 대본도 받았지?”“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아니야.”배경윤이 부정하자 사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나랑 찬영 오빠는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커플이야. 그런 대본 따위 필요 없어.”“배경윤!”사도현은 배경윤의 도발에 휘말린 듯한 느낌을 받아서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사도현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왜? 내가 기뻐하니까 오히려 화가 나?”배경윤은 늘 싸움에서 기세에 눌렸지만 사도현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이번에 드디어 이기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배경윤은 신이 나서 환하게 웃었다.“내가 화가 나서 쓰러져야 네 속이 시원하지? 그런 거야?”사도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커플이라면 싸울 때도 있을 거야. 작은 다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이건 상대의 마음에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야.”“이게 커플 사이에 싸우는 거로 보여?”배경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피식 웃었다.“내가 네 여자 친구라는 거야, 아니면
“누가 네 전 여자 친구라는 거야? 나는 너랑 모르는 사이야. 친한 척하지 마!”배경윤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사도현한테 아주 실망했기에 다정하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경윤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자던 사이였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모르는 사이야.”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부러 장난을 쳤다. 배경윤이 차갑게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놀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고는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다 잊어버려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게. 내가 몇 번이고 너한테 말해주면 되거든.”“뭐, 뭐 어떻게 말해줄 건데?”배경윤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사도현을 피하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나의 전 여자 친구는 내가 벽에 밀치고 키스하는 걸 제일 좋아했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알려줄 수도 있어.”사도현은 천천히 배경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배경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사도현,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민망해서 사도현의 뺨을 후려갈기려고 했다. 이때 사도현이 배경윤의 손목을 잡더니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이제는 우리가 친한 사이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어?”“나는...”배경윤은 거칠게 뛰는 심장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인정할 수 없어.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야.”“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잖아.”사도현은 배경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끝으로 배경윤의 코를 쓰다듬었다.배경윤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도현이 미웠지만 제일 미운 건 자신이었다. 사도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우스웠다.사도현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배경윤은 반격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배경윤은 사랑의 싸움에서 사도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도현이 잡아당기면 끌려가고 밀
차설아는 해바라기 꽃을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옛 친구가 보낸 선물이야.”“어느 친구가 보낸 거야? 너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구라면 내가 아는 사람일 텐데 말이야.”배경윤은 해바라기 꽃의 내음을 맡으면서 싱글벙글 웃었다.“네가 아는 사람이야.”차설아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갑자기 불안해 난 선우시원이 그 꽃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급히 물었다.“설마 나도 아는 사람이야?”“네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어.”차설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선우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럼 적어도 성도윤은 아니라는 거네? 누가 꽃을 보냈는지 몰라도 참 좋은 친구인 것 같아. 성도윤만 아니면 돼.”“왜 성도윤만 아니면 된다는 건데?”차설아는 선우시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성도윤이 보낸 것이 아니라면 누가 보냈든 상관없어. 나의 라이벌은 성도윤 한 명뿐이잖아.”차설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총명해 보였던 선우시원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해서 의외였다.만약 선우시원이 밤마다 성도윤이 찾아와서 차설아한테 디저트를 먹여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댈 것이다.“누가 보낸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설아가 좋아하는 꽃을 보냈으니 좋은 사람 같아.”배경윤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차설아를 관심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이 전생에 차설아의 엄마였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내 얘기는 그만하고 네 얘기나 해줘. 어떻게 되었어?”차설아는 배경윤이 걱정되어 계속해서 물었다.“그 사람이랑 화해한 거야? 나 때문에 괜히 너도 그 사람이랑 싸운 건 아니지?”“내가 그놈이랑 싸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야.”배경윤은 다른 사람의 말을 할 때면 신이 났다가 자신의 감정사를 얘기하려고 하면 잔뜩 긴장했다. 배경윤은 말을 버벅거렸다.“나는
일주일 뒤, 병원에서 정밀 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차설아의 허리가 심하게 다친 건 맞지만 치료를 제때 받고 푹 쉬어서 생각보다 빨리 나았다. 그러기에 반신불수가 될 거라는 의심을 거두어도 되었다.그 소식을 알게 된 뭇사람들은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복 받은 사람들은 내가 딱 알아본다고 했잖아. 우리 설아가 복 받아서 빨리 나은 거야.”배경윤은 차설아를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배경윤은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경윤이 다친 줄 알 것이다.“앞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운동은 절대 하면 안 돼! 암벽 등반, 등산은 절대 안 되고 계단을 오를 때는 꼭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해.”차성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 한 번 큰 사고를 당했기에 차설아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더 신경 쓰고 싶었다.“성철 형,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붙어있으면서 스파크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게요.”선우시원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면서 사뭇 엄숙하게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 달 정도 입원하면 거의 다 나을 거래. 병실에만 있어서 답답하겠지만 참아. 오빠가 병원에 퇴원 신청을 하면 예정일보다 더 빨리 퇴원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간병인을 미리 알아보았으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차성철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울상을 지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나는 병원에 있는 게 좋아. VIP 병실이라 편하게 지낼 수 있잖아. 미리 퇴원 신청을 하지 않아도 돼. 귀찮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설아야, 너를 위해서라면 귀찮은 일도 다 해줄 수 있어. 너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퇴원 예정일을 앞당기는 건 복잡한 절차도 아니야.”차성철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오빠가 다 해놓을 테니 그날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자. 설아야, 오빠 믿지?”“아...”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차설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