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요주의 인물이 된 차설아는 되레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하하하, 다들 설마 내가 스파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냥 화장실을 잠깐 다녀왔는데, 그걸로 내가 명성 자자한 거장 스파크가 된다고? 에이. 그런 좋은 일이 나한테 떨어지면 내가 나가서 축제라도 벌이고 불꽃놀이라도 해야죠.”진무열이 나서서 아니라고 했다.“제가 봐도 이번 일은 우연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모님은 마음이 세심하고 가정적인 분이지, 컴퓨터 같은 건 동영상을 보는 정도지 게임도 잘 못하실 거예요. 이분이 해킹계 거장이면 저는 XX 국의 대통령이게요?”그 말이 비록 듣기엔 거북해도 차설아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말이긴 했다. 모두 진무열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차설아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순진하고 무해한 척 말했다.“그래요. 도윤 씨 안사람인 제가 해커였으면 저 사람을 해칠 일이 있겠어요. 도우면 도왔지.”침묵을 지키고 있던 냉소적인 성도윤이 예리한 눈길로 그녀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그래? 적잖이 하지 않은 것 같긴 한데.”“호호! 농담도 참.”차설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괘씸하기도 하셔라.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성도윤은 한발 한발 차설아를 향해 다가가서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갸름한 턱을 살짝 잡고 올렸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분석하듯 세심하게 쳐다보았다.“그래서, 당신 아니야?”딴사람은 몰라도 성도윤을 속이기는 쉽지 않다는 걸 아는 차설아는 제 발이 저려 차가운 그의 시선을 피했고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당신이 맞다고 생각하면 맞는 거고, 아니라고 하면 아닐 거고.”“좋아, 쓸데없이 맞는 말.”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에는 큰 정서적인 변화가 없었고 차갑게 그녀를 향해 명령투로 말했다.“핸드폰 줘봐.”요새 젊은 사람들의 비밀은 모두 핸드폰에 담겨있으니 만약 차설아가 문제가 있으면 핸드폰만 뒤지면 다 나올 수 있었다.차설아도 핸드폰을 성도윤에게 넘겨 검사받을 수 없었다. 핸드폰에는 많은 비밀
바람이 떠난 뒤 모든 것이 제자리로 평온하게 돌아왔다.“별다른 일 없으면 나도 먼저 갈게.”차설아가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 쇼윈도 부부 모습도 보여줬고 바람의 실물도 봤으니 성대 그룹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저녁 시간 비워 둬.”성도윤은 사무실 책상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불쑥 말했다. 이런 명령적인 뉘앙스에 차설아는 불쾌했다.“왜?”성도윤은 그에 답하지 않고 서랍을 열어 이쁘게 포장된 박스를 차설아의 앞에 놓았다.“저녁 여덟 시에 플라자 호텔 연회장에서 점잖게 입고 와”“나한테 주는 선물?”차설아는 보기 드문 상황에 순간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싶었고 호기심에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어보았다.포장에 담긴 건 실버 그레이 드레스였고, 색감과 질감으로 가격이 만만치 않음이 한눈에 보였다. 다만 드레스가 너무 보수적이고 단정한 스타일이었다.차설아는 몇 마디 비꼬아 물으려 하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얼굴에 교활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알겠어. 시간 맞춰 갈게.”저녁 여덟시 플라자 호텔.호텔 앞 주차장은 고급지고 화려한 값비싼 차들로 가득 찼고 모터쇼를 방불케 하였다. 연회로 열리는 해안시 자선행사에 국내외 유명 인사들로 붐볐다.차설아는 택시를 타고 도착했고 보기에도 심플하고 심지어 싸 보이는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머리도 대충 묶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른 셀럽들의 화려한 모습과는 선명한 대비가 되었다. 입장하려는데 자연스럽게 경비가 막아섰다.“초청장 보여주세요.”경비는 딱딱한 말투로 차설아를 보며 말했고 차설아는 솔직하게 답했다.“그거 없어요.”“없으면 못 들어갑니다. 여기 보이죠, 아무나 못 들어 갑니다. 저쪽에 가면 되고요.”경비는 아마도 뉴스를 잘 안 보는 눈치다. 그러니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신분 높은 성도윤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수밖에. 적어도... 지금이 그랬다.차설아가 설명하려는 때 빨간색 페라리가 “끼익” 하고 주차했다. 성도윤의 사촌 여동생 소이서가 핑크 드레스를 입고 고고한 자태로 차에서 내렸다. 그녀와 함
소이서는 평소에 멋대로 괴롭혀도 다 받아주던 차설아의 반격에 화난 나머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너무 염치없는 거 아냐? 주제 파악은 할 줄 알아야지. 다 망한 가문의 당신이 감히 오빠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해? 언제까지 이혼을 미룰 건데? 이혼이 미루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아? 채원 언니 배도 이젠 점점 불러오고 있다고. 오빠 새 결혼은 바뀔 수가 없어. 이혼은 뭐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거 같아?”차설아는 담담하게 답했다.“글쎄. 내가 결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사촌 동생인 이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 건 확실하지. 배가 점점 불러오는 걸 어쩌라고. 이혼 도장 찍기 전까지는 난 그 사람의 안사람이고 채원 씨는 첩이야. 배 안에 든 아이는 호적에도 올릴 수 없는 첩의 자식이고.”임채원은 차설아의 말에 비수가 꽂혔지만 당장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인지하고 다시 연약한 척 말했다.“설아 씨, 화난 거 있으면 나한테 풀어. 우리 애는 모욕하지 말아 줘!”“누굴 모욕하려는 말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알려 준 것뿐인데. 첩의 자식은 결국엔 태자가 못 되지 않나?”“그건...”임채원은 말문이 막혔고 여전히 연약한 모습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나 도윤 씨와 진심으로 사랑해. 이 관계에선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 첩 아닌가?”“채원 언니. 저런 사람하고 시간 끌 필요도 없어요. 주제 파악 못 하는 사람은 바로 끝내줘야 해요.”소이서가 이 갈면서 목소리를 높였고 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설아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만 뻗은 손이 누군가의 강한 힘에 눌려 뺨을 치지 못했다.“감히 누가 간섭해!”소이서가 그녀를 막아 나선 사람을 쳐다보더니 욕설을 퍼붓다 말고는 갑자기 수줍은 모습을 보였다.“배, 배경수 씨.”흰색 정장 차림의 배경수는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이 마치 소설 속 백마 왕자와 똑같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이서 씨. 대체 뭘 먹었는데 이렇게 화가 나 있어?”배경수는 소이서를 쳐다보며 물었고 표정은 미소를 지어
차설아는 배경수와 같이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배경수는 방금까지 고귀하고 패기 넘치는 귀족 도련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귀여운 강아지처럼 미소로 꽉 찬 표정으로 시선은 시종일관 차설아만 따라다녔다.“성씨 집안사람들이 감히 누님를 괴롭혀? 다음에 또 괴롭히면 내가 절대 가만 안 둬!”차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이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도련님, 평소랑 달리 진지한 모습에 많이 놀랐어.”“그럼, 나 배씨 집안의 여섯째 도련님인걸!”배경수는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순둥순둥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배경수는 차설아를 훑어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근데 차설아, 아무리 그래도 연회에 참석하는데 너무 단아하고 보수적인 차림 아닌가?”“누나야! 버릇없게!”차설아가 호칭을 정정해 줬고 배경수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따졌다.“아니, 그럼, 배경윤은 왜 그렇게 부르는데? 나 몰라! 앞으로는 보스도 아니고 누님도 아니고 그냥 설아라고 할 거야!”“안 돼!”차설아는 훈계하듯 주의를 줬다.“보통은 연하가 누나라고 안 하는 건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너... 너 어쩌려고 그래?”“이혼도 하는 마당에 내가 마음 있으면 뭐 어때서?”배경수는 말 나온 김에 당당하게 인정해 버렸다. 그녀가 솔로로 돌아오기를 몇 년간 기다렸던 게 동생이나 하려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니까.차설아는 그저 웃어넘기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연회장 앞에 거의 다가와서 그녀는 여린 손으로 코트 단추를 풀더니 한쪽에 뿌려 던지고는 묶은 머리를 풀었고, 빨간 립스틱을 아랫입술에 바르더니 대범하게 입술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보스, 아니 너무...”그런 모습을 본 배경수도 놀랄 정도였다.들어서는 순간 연회장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고 다들 그녀의 모습에 넋이 나갔다.차설아는 빨간색 튜브톱 롱 드레스로 늘씬한 각선미를 선보였고 그 모습은 명랑하고 밝은데 고귀함과 단아함까지 잃지 않았다. 특히 파격적인 옆 라인 트인 디자인은 개성 넘치면서도 여신 미가 더해져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
성도윤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차설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자신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소유욕이 꽉 찬 말투로 답했다.“당신 몸매가 드러낼 만하든 아니든! 그건 나만 알면 될 일이고. 여기서 다 드러내놓는 건 ‘날 좀 보소’ 하며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여. 품위는 지켜야지. 나! 성도윤의 부인이라는 본인 신분을 잊지 말지 그래. 아무튼 단정하고 단아하게 기본은 지켜.”사실 방금 여기저기 남정네들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시선이 차설아만 따라가는 모습을 떠올린 성도윤은 알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고 그 눈들을 파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이거라도 걸쳐!”성도윤은 외투를 벗어 거칠게 차설아에게 걸쳐주며 꽁꽁 싸매듯 옷매무새를 만져줬다. 매혹적인 차설아의 눈빛에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빈정상한 티가 났다.“꼰대 느낌! 성도윤 씨, 여기가 뭐 조선시대입니까? 제 몸은 제가 알아서. 내가 주목을 끌든지 받든지, 당신하고는 이젠 상관없지 않아?”말을 하던 그녀는 외투를 벗어 손가락에 걸고는 또박또박 전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사절할게.”말을 끝으로 성도윤의 블랙슈트가 그녀의 손가락에서 미끄러지듯 땅에 떨어졌고, 차설아는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걸었다.“...”너무 쿨하고 또 가녀린 그녀의 뒷모습에 성도윤의 안색은 어두웠다. 화가 났지만... 그녀가 언급했듯 이젠 서로를 간섭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행사 사회자가 샴페인 잔을 치면서 자선 만회의 시작을 알렸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자선행사는 해안 시 전체 거물급 인사들이 총출동 한 자리였다. 성도윤, 차설아, 배경수는 맨 앞줄에 자리했고 소이서, 육장훈, 임채원은 그들 바로 뒤의 두 번째 줄에 앉았다.“채원 언니, 봐요. 내가 차설아 천하다고 했죠. 남정네들 꼬실 생각밖에 안 해요!”소이서는 차설아의 섹시한 뒷모습을 노려보며 이 갈듯이 불만을 토했고, 임채원이 그런 그녀에게 주의를 줬다. “이서야, 목소리 좀 낮춰. 누가 듣겠어.”
보석상자 안에는 핑크색 피치 펜던트가 조명 아래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을 내뿜었다.“여러분께서 보시는 이 펜던트는 완전한 로즈 쿼츠를 잘라서 만들어 낸 작품으로, 로맨틱한 이름을 갖고 있어요. 이름하여 바로‘차공주', 일반적인 로즈 쿼츠의 펜던트가 아닙니다. 유럽의 한 나라 국왕께서 수양딸을 위해 전문으로 제작한 귀중품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는 왕실에서 나온 보물이자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펜던트입니다. 현재 가치는 40억 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사회자의 설명에 빛이 나는 펜던트는 고귀함이 한층 더해졌고 무대아래 사람들의 감탄 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다. 이 또한 로즈 쿼츠 펜던트의 진귀한 정도를 반영해 줬다.자선행사장의 여인들은 소이서를 향해 부러운 눈빛을 쏟아냈다.“자기야. 준비한 서프라이즈 맘에 들어?”육장훈은 소이서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환심을 사듯 물었다. 소이서는 허영심이 제대로채워졌던지 입꼬리가 귀여 걸렸고 너무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앞자리의 배경수는 눈썹을 찡그리고 로즈쿼츠 펜던트를 유심히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로즈 쿼츠 자체는 광택도 그렇고 보통인데, 왕실의 껍데기를 씌웠을 뿐인데 40억이라 불리네요.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이 바보로 보이나 봐요? ”“로즈쿼츠는 좋은지 몰라도, 왕실 출품 일지는...”차설아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사회자가 진행을 이어갔다.“자, 이렇게 오늘 경매에 올려질 모든 기증품의 소개를 마쳤습니다. 현재까지 기부된 귀중품 중에 제일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작품은 육장훈 씨께서 소이서 양의 이름으로 기증한 로즈쿼츠 펜던트입니다. 그럼, 지금 소이서 씨를 무대로 모시겠습니다.”소이서는 뜨거운 환호 속에서 도도한 자태로 무대에 올라갔다. 그녀는 마이크를 잡고 가식적인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했다.“여러분의 박수갈채에 감사합니다. 오늘 너무 기분 좋네요. 자선행사로 이 자리에 함께하니 너무 기쁘고 설렙니다. 우리의 사랑 널리, 또 멀리 이어져 가
그 말은 단번에 소이서를 폭발시켰다.“이런 미친. 질투에 눈이 멀어서 이성을 잃었어? 내 남자친구가 몇십억을 들여 준비한 걸 어떻게 가품이라고 막 내뱉어?! 어디서 감히 헛소리야. 아갈머리 찢어버릴라!”소이서는 명문가 낭자의 품위를 팽개친 채 차설아를 향해 발길질했고 차설아는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가볍게 몸을 옆으로 젖혔다. 그 바람에 소이서는 헛발질이 됐고 자기 힘에 넘어졌다. 우스꽝스러운 장면에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다.성도윤은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어두운 그의 기운에 번개가 칠 듯한 분노가 섞여 보였다.‘차설아, 당신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거야?!’체통 없이 몸매를 다 드러낸 모습도 불만스러운데 이젠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사촌 여동생과 물어뜯는 모습까지 보여주다니. 내일 기사 일 면에 헤드라인이 어떻게 잡힐지 걱정부터 앞섰다.사회자가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잠재우려고 애를 써보았다.“설아 님, 농담으로 분위기 띄우시려는 건가요? 아니면 펜던트가 가품이라는 증거라도 있으신 건지?”“물론 증거가 있습니다.”차설아는 레이저 펜 하나를 집어 들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중을 향해 설명했다.“진짜‘차공주’는 엄청 세심하게 다듬어진 아이예요. 펜던트는 총 13번에 걸쳐 커팅됬고 마침 13개 획으로 그어져‘차공주’라는 글자가 찍혀있죠. 국왕께서 그런 방식으로 수양딸에 대한 사랑을 담은 것입니다. 레이저로 비춰보면 ‘차공주’세 글자가 밖으로 투영될 거예요. 하면 이 펜던트가 진품인지 가품인지는 레이저를 쏴 보면 알겠죠?”구경난 사람들은 흥미롭게 얘기를 들었고, 그중 누군가는‘차공주’에 그런 전언이 있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차설아는 망설임 없이 보석 상자의 펜던트에 레이저를 비췄다. 물론 투영되어 나온 글자는 없었다.“에이 뭐야. 결국엔 가짜잖아!”“쯧쯧, 자선 한다면서 가짜를 들이밀어? 늘 허영심이 문제지. 선을 넘네, 넘어!”갑작스러운 반전에 방금까지 의기양양하던 소이서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소이서는 자신이 쪽팔렸단 생각에 이를 갈며 육장훈에게
“이건 저와 남편의 결혼반지입니다. 비록 가격이 엄청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반지입니다. 이자리를 빌려 기부하고 싶네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더 많은 나눔이 될 수 있게, 여러분, 많이 호가 해주세요.”그녀의 말과 행동에 현장은 웅성웅성했다. 결혼반지라니, 그것도 이렇게 흔쾌히 결혼반지를 꺼내 들다니!어떤 이는 그녀가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사랑을 나눌 줄 안다고 칭찬했고, 어떤 이는 차설아와 성도윤의 결혼이 소문대로 진짜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추측을 했다.관중석 맨 앞자리에 앉은 성도윤은 음산하고도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고 잘생긴 얼굴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반면 배경수는 기쁜 나머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즐거워하며 성도윤의 가슴에 비수로 꽂힐 말들을 뱉어냈다.“어이구. 우리 여신 누님께서, 예전엔 참 결혼반지를 귀하게 여기고 뭘 하던 꼭 끼고 빼지 않았었는데, 저리 쉽게 기부하는 걸 보니 바깥양반에 이만저만 실망 한 게 아니네요. 이 결혼생활을 내려놓으려고 마음 먹었나 보네요. 정말 축하할 일이죠!”말을 마친 배경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 설아를 향해 환호 대신 휘파람을 불었다.“여신 누님,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 이 배경수가 배가의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누님의 반지를 끝까지 경매낙찰 할 테니, 같이 해요 그 나눔!”배경수의 화끈한 고백은 현장을 다시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고백도 고백이지만, 평소 단정하고 단아한 성씨 집안 둘째 사모님과 바람둥이로 소문난 배씨 집안 여섯째 도련님, 전혀 교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사연 있어 보이는 대화에 모두 진심으로 놀랐다. 무대 위, 차설아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배경수를 향해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오늘 배경수가 제대로 자신의 체면을 세워줬으니 차설아는 아주 고마웠다.사회자는 차설아에게 한 번 더 확인하며 물었다.“성가 댁 사모님, 다이아반지는 보통 의미하는 바가 큰 데, 정말 기부하시겠나요?”차설아는 황금알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쳐다보며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
배경윤은 윤설이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은 차설아 친오빠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윤설의 의도를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내 방으로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은 앞장서서 사도현과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은 윤설을 방까지 부축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윤설은 울퉁불퉁한 방바닥, 구멍이 난 천장과 낡아서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침대를 보면서 말문이 막혔다.윤설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현 씨랑 이런 방에서 같이 지낸 거예요?”“네. 침대도 푹신하고 공기가 좋아서 잘 잤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배경윤은 윤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줄 몰랐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윤설 곁을 지켰다.‘이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서 도현 씨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도현 씨는 결벽증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지 못했을 거라고요.”“쓰레기 소각장이라고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방이 아니면 외양간에서 소랑 같이 자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꽤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윤설 씨가 결벽증인 것 같아요.”“도현 씨가 배경윤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네요. 배경윤 씨를 위해서 이런 누추한 방에서 자고 더러운 진흙으로 들어가 배경윤 씨를 안아 들다니... 내가 배경윤 씨를 얕잡아 봤네요.”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배경윤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본론만 얘기하세요. 배후가 누구기에 성형외과 의사한테 전화하게 된 거죠?”“말해도 배경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걸요?”윤설은 차갑게 웃더니 거만한 눈빛을 하고서 배경윤을 훑어보았다. 배경윤이 목을 치려고 하는 배후는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배후가 누구인
게스트들은 사도현의 표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불을 피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 같은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가 불을 피운다고?”그러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장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불을 피우다니, 네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방에서 나오는 게 도움이 되겠어.”배경윤은 불을 피우고 진찬영이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몹시 당황했다.‘사도현은 왜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야! 찬영 오빠랑 같이 경운기를 타려고 할 때, 찬영 오빠랑 미꾸라지를 잡을 때, 찬영 오빠랑 같이 요리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만 하잖아. 명색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 피우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아니면 여자가 옆에 있어야 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잖아.”사도현은 팔짱을 낀 채 진찬영을 쳐다보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사도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도현은 일부러 진찬영을 저격했다.“너 자꾸 함부로 말할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팬으로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여우 같은 놈, 여자가 없으면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괜찮아요.”진찬영이 피식 웃더니 배경윤의 팔목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배경윤 씨가 옆에서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혼자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던데요?”진찬영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도현 씨께서 불을 잘 피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죠. 다들 쉬고 계세요.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진찬영과 사도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