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떠난 뒤 모든 것이 제자리로 평온하게 돌아왔다.“별다른 일 없으면 나도 먼저 갈게.”차설아가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 쇼윈도 부부 모습도 보여줬고 바람의 실물도 봤으니 성대 그룹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저녁 시간 비워 둬.”성도윤은 사무실 책상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불쑥 말했다. 이런 명령적인 뉘앙스에 차설아는 불쾌했다.“왜?”성도윤은 그에 답하지 않고 서랍을 열어 이쁘게 포장된 박스를 차설아의 앞에 놓았다.“저녁 여덟 시에 플라자 호텔 연회장에서 점잖게 입고 와”“나한테 주는 선물?”차설아는 보기 드문 상황에 순간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싶었고 호기심에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어보았다.포장에 담긴 건 실버 그레이 드레스였고, 색감과 질감으로 가격이 만만치 않음이 한눈에 보였다. 다만 드레스가 너무 보수적이고 단정한 스타일이었다.차설아는 몇 마디 비꼬아 물으려 하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얼굴에 교활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알겠어. 시간 맞춰 갈게.”저녁 여덟시 플라자 호텔.호텔 앞 주차장은 고급지고 화려한 값비싼 차들로 가득 찼고 모터쇼를 방불케 하였다. 연회로 열리는 해안시 자선행사에 국내외 유명 인사들로 붐볐다.차설아는 택시를 타고 도착했고 보기에도 심플하고 심지어 싸 보이는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머리도 대충 묶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른 셀럽들의 화려한 모습과는 선명한 대비가 되었다. 입장하려는데 자연스럽게 경비가 막아섰다.“초청장 보여주세요.”경비는 딱딱한 말투로 차설아를 보며 말했고 차설아는 솔직하게 답했다.“그거 없어요.”“없으면 못 들어갑니다. 여기 보이죠, 아무나 못 들어 갑니다. 저쪽에 가면 되고요.”경비는 아마도 뉴스를 잘 안 보는 눈치다. 그러니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신분 높은 성도윤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수밖에. 적어도... 지금이 그랬다.차설아가 설명하려는 때 빨간색 페라리가 “끼익” 하고 주차했다. 성도윤의 사촌 여동생 소이서가 핑크 드레스를 입고 고고한 자태로 차에서 내렸다. 그녀와 함
소이서는 평소에 멋대로 괴롭혀도 다 받아주던 차설아의 반격에 화난 나머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너무 염치없는 거 아냐? 주제 파악은 할 줄 알아야지. 다 망한 가문의 당신이 감히 오빠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해? 언제까지 이혼을 미룰 건데? 이혼이 미루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아? 채원 언니 배도 이젠 점점 불러오고 있다고. 오빠 새 결혼은 바뀔 수가 없어. 이혼은 뭐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거 같아?”차설아는 담담하게 답했다.“글쎄. 내가 결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사촌 동생인 이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 건 확실하지. 배가 점점 불러오는 걸 어쩌라고. 이혼 도장 찍기 전까지는 난 그 사람의 안사람이고 채원 씨는 첩이야. 배 안에 든 아이는 호적에도 올릴 수 없는 첩의 자식이고.”임채원은 차설아의 말에 비수가 꽂혔지만 당장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인지하고 다시 연약한 척 말했다.“설아 씨, 화난 거 있으면 나한테 풀어. 우리 애는 모욕하지 말아 줘!”“누굴 모욕하려는 말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알려 준 것뿐인데. 첩의 자식은 결국엔 태자가 못 되지 않나?”“그건...”임채원은 말문이 막혔고 여전히 연약한 모습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나 도윤 씨와 진심으로 사랑해. 이 관계에선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 첩 아닌가?”“채원 언니. 저런 사람하고 시간 끌 필요도 없어요. 주제 파악 못 하는 사람은 바로 끝내줘야 해요.”소이서가 이 갈면서 목소리를 높였고 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설아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만 뻗은 손이 누군가의 강한 힘에 눌려 뺨을 치지 못했다.“감히 누가 간섭해!”소이서가 그녀를 막아 나선 사람을 쳐다보더니 욕설을 퍼붓다 말고는 갑자기 수줍은 모습을 보였다.“배, 배경수 씨.”흰색 정장 차림의 배경수는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이 마치 소설 속 백마 왕자와 똑같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이서 씨. 대체 뭘 먹었는데 이렇게 화가 나 있어?”배경수는 소이서를 쳐다보며 물었고 표정은 미소를 지어
차설아는 배경수와 같이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배경수는 방금까지 고귀하고 패기 넘치는 귀족 도련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귀여운 강아지처럼 미소로 꽉 찬 표정으로 시선은 시종일관 차설아만 따라다녔다.“성씨 집안사람들이 감히 누님를 괴롭혀? 다음에 또 괴롭히면 내가 절대 가만 안 둬!”차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이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도련님, 평소랑 달리 진지한 모습에 많이 놀랐어.”“그럼, 나 배씨 집안의 여섯째 도련님인걸!”배경수는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순둥순둥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배경수는 차설아를 훑어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근데 차설아, 아무리 그래도 연회에 참석하는데 너무 단아하고 보수적인 차림 아닌가?”“누나야! 버릇없게!”차설아가 호칭을 정정해 줬고 배경수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따졌다.“아니, 그럼, 배경윤은 왜 그렇게 부르는데? 나 몰라! 앞으로는 보스도 아니고 누님도 아니고 그냥 설아라고 할 거야!”“안 돼!”차설아는 훈계하듯 주의를 줬다.“보통은 연하가 누나라고 안 하는 건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너... 너 어쩌려고 그래?”“이혼도 하는 마당에 내가 마음 있으면 뭐 어때서?”배경수는 말 나온 김에 당당하게 인정해 버렸다. 그녀가 솔로로 돌아오기를 몇 년간 기다렸던 게 동생이나 하려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니까.차설아는 그저 웃어넘기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연회장 앞에 거의 다가와서 그녀는 여린 손으로 코트 단추를 풀더니 한쪽에 뿌려 던지고는 묶은 머리를 풀었고, 빨간 립스틱을 아랫입술에 바르더니 대범하게 입술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보스, 아니 너무...”그런 모습을 본 배경수도 놀랄 정도였다.들어서는 순간 연회장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고 다들 그녀의 모습에 넋이 나갔다.차설아는 빨간색 튜브톱 롱 드레스로 늘씬한 각선미를 선보였고 그 모습은 명랑하고 밝은데 고귀함과 단아함까지 잃지 않았다. 특히 파격적인 옆 라인 트인 디자인은 개성 넘치면서도 여신 미가 더해져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
성도윤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차설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자신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소유욕이 꽉 찬 말투로 답했다.“당신 몸매가 드러낼 만하든 아니든! 그건 나만 알면 될 일이고. 여기서 다 드러내놓는 건 ‘날 좀 보소’ 하며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여. 품위는 지켜야지. 나! 성도윤의 부인이라는 본인 신분을 잊지 말지 그래. 아무튼 단정하고 단아하게 기본은 지켜.”사실 방금 여기저기 남정네들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시선이 차설아만 따라가는 모습을 떠올린 성도윤은 알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고 그 눈들을 파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이거라도 걸쳐!”성도윤은 외투를 벗어 거칠게 차설아에게 걸쳐주며 꽁꽁 싸매듯 옷매무새를 만져줬다. 매혹적인 차설아의 눈빛에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빈정상한 티가 났다.“꼰대 느낌! 성도윤 씨, 여기가 뭐 조선시대입니까? 제 몸은 제가 알아서. 내가 주목을 끌든지 받든지, 당신하고는 이젠 상관없지 않아?”말을 하던 그녀는 외투를 벗어 손가락에 걸고는 또박또박 전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사절할게.”말을 끝으로 성도윤의 블랙슈트가 그녀의 손가락에서 미끄러지듯 땅에 떨어졌고, 차설아는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걸었다.“...”너무 쿨하고 또 가녀린 그녀의 뒷모습에 성도윤의 안색은 어두웠다. 화가 났지만... 그녀가 언급했듯 이젠 서로를 간섭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행사 사회자가 샴페인 잔을 치면서 자선 만회의 시작을 알렸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자선행사는 해안 시 전체 거물급 인사들이 총출동 한 자리였다. 성도윤, 차설아, 배경수는 맨 앞줄에 자리했고 소이서, 육장훈, 임채원은 그들 바로 뒤의 두 번째 줄에 앉았다.“채원 언니, 봐요. 내가 차설아 천하다고 했죠. 남정네들 꼬실 생각밖에 안 해요!”소이서는 차설아의 섹시한 뒷모습을 노려보며 이 갈듯이 불만을 토했고, 임채원이 그런 그녀에게 주의를 줬다. “이서야, 목소리 좀 낮춰. 누가 듣겠어.”
보석상자 안에는 핑크색 피치 펜던트가 조명 아래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을 내뿜었다.“여러분께서 보시는 이 펜던트는 완전한 로즈 쿼츠를 잘라서 만들어 낸 작품으로, 로맨틱한 이름을 갖고 있어요. 이름하여 바로‘차공주', 일반적인 로즈 쿼츠의 펜던트가 아닙니다. 유럽의 한 나라 국왕께서 수양딸을 위해 전문으로 제작한 귀중품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는 왕실에서 나온 보물이자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펜던트입니다. 현재 가치는 40억 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사회자의 설명에 빛이 나는 펜던트는 고귀함이 한층 더해졌고 무대아래 사람들의 감탄 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다. 이 또한 로즈 쿼츠 펜던트의 진귀한 정도를 반영해 줬다.자선행사장의 여인들은 소이서를 향해 부러운 눈빛을 쏟아냈다.“자기야. 준비한 서프라이즈 맘에 들어?”육장훈은 소이서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환심을 사듯 물었다. 소이서는 허영심이 제대로채워졌던지 입꼬리가 귀여 걸렸고 너무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앞자리의 배경수는 눈썹을 찡그리고 로즈쿼츠 펜던트를 유심히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로즈 쿼츠 자체는 광택도 그렇고 보통인데, 왕실의 껍데기를 씌웠을 뿐인데 40억이라 불리네요.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이 바보로 보이나 봐요? ”“로즈쿼츠는 좋은지 몰라도, 왕실 출품 일지는...”차설아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사회자가 진행을 이어갔다.“자, 이렇게 오늘 경매에 올려질 모든 기증품의 소개를 마쳤습니다. 현재까지 기부된 귀중품 중에 제일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작품은 육장훈 씨께서 소이서 양의 이름으로 기증한 로즈쿼츠 펜던트입니다. 그럼, 지금 소이서 씨를 무대로 모시겠습니다.”소이서는 뜨거운 환호 속에서 도도한 자태로 무대에 올라갔다. 그녀는 마이크를 잡고 가식적인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했다.“여러분의 박수갈채에 감사합니다. 오늘 너무 기분 좋네요. 자선행사로 이 자리에 함께하니 너무 기쁘고 설렙니다. 우리의 사랑 널리, 또 멀리 이어져 가
그 말은 단번에 소이서를 폭발시켰다.“이런 미친. 질투에 눈이 멀어서 이성을 잃었어? 내 남자친구가 몇십억을 들여 준비한 걸 어떻게 가품이라고 막 내뱉어?! 어디서 감히 헛소리야. 아갈머리 찢어버릴라!”소이서는 명문가 낭자의 품위를 팽개친 채 차설아를 향해 발길질했고 차설아는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가볍게 몸을 옆으로 젖혔다. 그 바람에 소이서는 헛발질이 됐고 자기 힘에 넘어졌다. 우스꽝스러운 장면에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다.성도윤은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어두운 그의 기운에 번개가 칠 듯한 분노가 섞여 보였다.‘차설아, 당신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거야?!’체통 없이 몸매를 다 드러낸 모습도 불만스러운데 이젠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사촌 여동생과 물어뜯는 모습까지 보여주다니. 내일 기사 일 면에 헤드라인이 어떻게 잡힐지 걱정부터 앞섰다.사회자가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잠재우려고 애를 써보았다.“설아 님, 농담으로 분위기 띄우시려는 건가요? 아니면 펜던트가 가품이라는 증거라도 있으신 건지?”“물론 증거가 있습니다.”차설아는 레이저 펜 하나를 집어 들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중을 향해 설명했다.“진짜‘차공주’는 엄청 세심하게 다듬어진 아이예요. 펜던트는 총 13번에 걸쳐 커팅됬고 마침 13개 획으로 그어져‘차공주’라는 글자가 찍혀있죠. 국왕께서 그런 방식으로 수양딸에 대한 사랑을 담은 것입니다. 레이저로 비춰보면 ‘차공주’세 글자가 밖으로 투영될 거예요. 하면 이 펜던트가 진품인지 가품인지는 레이저를 쏴 보면 알겠죠?”구경난 사람들은 흥미롭게 얘기를 들었고, 그중 누군가는‘차공주’에 그런 전언이 있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차설아는 망설임 없이 보석 상자의 펜던트에 레이저를 비췄다. 물론 투영되어 나온 글자는 없었다.“에이 뭐야. 결국엔 가짜잖아!”“쯧쯧, 자선 한다면서 가짜를 들이밀어? 늘 허영심이 문제지. 선을 넘네, 넘어!”갑작스러운 반전에 방금까지 의기양양하던 소이서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소이서는 자신이 쪽팔렸단 생각에 이를 갈며 육장훈에게
“이건 저와 남편의 결혼반지입니다. 비록 가격이 엄청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반지입니다. 이자리를 빌려 기부하고 싶네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더 많은 나눔이 될 수 있게, 여러분, 많이 호가 해주세요.”그녀의 말과 행동에 현장은 웅성웅성했다. 결혼반지라니, 그것도 이렇게 흔쾌히 결혼반지를 꺼내 들다니!어떤 이는 그녀가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사랑을 나눌 줄 안다고 칭찬했고, 어떤 이는 차설아와 성도윤의 결혼이 소문대로 진짜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추측을 했다.관중석 맨 앞자리에 앉은 성도윤은 음산하고도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고 잘생긴 얼굴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반면 배경수는 기쁜 나머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즐거워하며 성도윤의 가슴에 비수로 꽂힐 말들을 뱉어냈다.“어이구. 우리 여신 누님께서, 예전엔 참 결혼반지를 귀하게 여기고 뭘 하던 꼭 끼고 빼지 않았었는데, 저리 쉽게 기부하는 걸 보니 바깥양반에 이만저만 실망 한 게 아니네요. 이 결혼생활을 내려놓으려고 마음 먹었나 보네요. 정말 축하할 일이죠!”말을 마친 배경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 설아를 향해 환호 대신 휘파람을 불었다.“여신 누님,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 이 배경수가 배가의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누님의 반지를 끝까지 경매낙찰 할 테니, 같이 해요 그 나눔!”배경수의 화끈한 고백은 현장을 다시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고백도 고백이지만, 평소 단정하고 단아한 성씨 집안 둘째 사모님과 바람둥이로 소문난 배씨 집안 여섯째 도련님, 전혀 교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사연 있어 보이는 대화에 모두 진심으로 놀랐다. 무대 위, 차설아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배경수를 향해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오늘 배경수가 제대로 자신의 체면을 세워줬으니 차설아는 아주 고마웠다.사회자는 차설아에게 한 번 더 확인하며 물었다.“성가 댁 사모님, 다이아반지는 보통 의미하는 바가 큰 데, 정말 기부하시겠나요?”차설아는 황금알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쳐다보며
20여 일 후면 이혼할 사람이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기에 차설아는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칠 수도 있었다. 오늘 밤에 그가 불행하게 운명을 다한다면 그녀는 유산 상속으로 크게 재산 분할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차설아가 그런 독한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다시 자선 행사장으로 돌아갔다.냉혈한 그 나쁜 남자가 그녀 뱃속 쌍둥이의 아빠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냥 죽게 내버려뒀다가 아이들이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평생 그녀 마음의 짊이 될 게 뻔했다.경매장 분위기는 이미 과열되어 있었다.“70억 원!”“80억 원!”“90억 원!”자선 경매장의 각계 유명 인사들은 흥분된 모습으로 활발히 호가에 참여하였다.오늘 경매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그녀가 빼놓은 결혼반지였다.차설아가 자리에 앉았을 땐 이미 누군가 95억 원을 호가했다.!“이건 좀 오버다. 말이 안 되는데.”차설아의 기억이 맞는다면 반지 가격대는 오십억 정도였다. 역시 돈 많은 사람은 씀씀이가 헤픈 바보 같았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옆에 마실 것을 든다는 게 마침 성도윤의 손을 터치했고 그 남자의 손은 차가웠다. 마치 차가운 미남이 거리를 두는 것처럼. 성도윤은 차설아를 쳐다보더니 눈빛 차갑게 말을 했다.“오늘 밤 당신 정말 제대로 주목받았어. 나의 와이프가 이렇게 대범한 사람인지 몰랐었네. 4년을 끼고 있는 반지를 기부한답시고 그렇게 쉽게 빼?”차설아는 여유롭게 한 모금 물을 마시더니 웃으며 말했다.“도윤 씨 그렇게 비꼬아 얘기할 거 없어. 난 다만 저기서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야.”성도윤의 눈길은 더 차가워졌고 눈동자에는 억누를 수 없는 화가 타오르는 게 차설아의눈에도 보였다. 밖이었으니 망정이지, 집이였으면 못 참고 터졌을 것이다.“도윤 씨, 여태까지의 정을 생각해서 얘기하는데. 꼭 들어. 이따가 저기 올라가지 마. 누군가의 타깃이 될 수 있어.”차설아는 목소리를 낮추어 성도윤에게 주의를 주었다. 방금 장내를 한 바퀴 돌아 보았지만, 수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성진은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쳤다.분명 이 싸움에서 이긴 건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철저하게 패배한 기분이었다.성도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책상을 정리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설아야, 오늘 어땠어?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퇴근하고 가서 만들어 줄게.”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성도윤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달달한 그 분위기는 옆에서 듣는 사람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성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두 사람이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성도윤이 사무실을 떠나려 하자 성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형, 설아랑 다시 잘 지낸다며? 다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근데 이렇게 빨리 화해했다고? 설마 또 한 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거야?”성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끝난 사이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완전히 남남이 되어 다시는 엮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한두 달 만에 원래 사이로 돌아간 데다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눈동자까지 희생해 가면서 이루고 싶었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에 성진은 절망스러웠다. 성도윤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쉽게 그 모든 걸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성도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었다.“내가 설아랑 어떻게 지내는지 너한테 보고해야 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부러우면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찾아서 결혼하면 되잖아. 따뜻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을 누리면 되잖아. 다만...”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회의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지금 너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을까?”성도윤의 말투는 누가
성진의 말에 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성진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에게 놓고 말하면 성진이 생명의 은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그렇다면 일단 부대표님 뜻대로 진행하죠. 일단 한 분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시도해 보세요. 지켜보겠습니다.”성도윤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고 이는 곧 성대 그룹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역시 형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아는...”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 나서 성대 그룹의 이익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 어떡할 건데?”“넌 내가 어떤 결정을 했으면 좋겠어?”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성도윤을 지지하는 세력과 성진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도 말이다.그때, 오준현이 입을 열었다.“성 대표님은 항상 회사를 위해서 생각해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부대표님께서 정말 그룹에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성 대표님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시겠죠, 그렇지 않습니까?”그러자 박지훈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오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오준현 씨, 회사의 대표 자리는 인간성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회사에 수천 명의 직원이 있어도 성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인간성이요? 그게 수익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주인 저희의 관심사는 오직 이익뿐이라고요. 누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우리가 대표를 선택하는 기준입니다.”두 파벌은 서로 다른 의견을 두고 대립해서 싸우기 시작했다.보다 못한 성도윤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
“제 비서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지금은 성대 그룹을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에요. 확장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성도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성 대표님, 언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너무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이 작은 규모만 지키려다가 무너지고 싶으세요?”장기준이 가감 없이 성도윤에게 의문을 제기했다.“다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형이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형은 지난 반년 동안 큰 충격을 겪었어요. 건강도 많이 나빠졌죠. 그로 인해서 성격까지 바뀐 겁니다. 좀 더 신중해진 거죠.”“그리고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 형은 뇌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거든요.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 가세요? 석현아, 주주님들께 보여 드려.”“네, 부대표님.”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둔 성도윤의 건강 검진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그러자 진무열이 분노하며 성진에게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성 대표님의 건강 검진 결과는 개인 정보예요! 함부로 유포해도 된다고 생각해요?”“진 비서님, 진정하세요. 형을 생각해서라면 건강 검진 결과는 당연히 비밀로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형은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에요. 형의 건강 상태도 곧 성대 그룹의 미래와 이어진다는 겁니다. 다들 성대 그룹의 수익이 감소한 원인을 찾고 있지 않나요? 전 이 검진 결과가 그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해요.”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주주들은 검진 결과를 확인한 후, 믿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이럴 수가! 성 대표님의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었을 줄은...”“뇌를 다친 데다가 기억 상실증까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경영 방식이 전과 너무 다르더라니... 그 원인이 여기 있었군요.”“성대 그룹이 갑자기 변한 건 대표님
모든 주주들이 일제히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충격이 서려 있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부대표님께서 실명했다고 하지 않았어?”“전에는 몸 상태도 많이 약해서 부대표님 자리까지 내려놓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생기가 넘치잖아?”“돌아왔다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제 성대 그룹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겠어!”주주들은 성진의 복귀를 환영해 주었다. 그들은 성진이 성도윤을 대신해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를 기대하며 중얼거렸다.성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곧장 성도윤의 곁으로 다가갔다.“형, 미안해. 그동안 형 혼자 성대 그룹을 관리하느라 정말 힘들었을 텐데... 이젠 나도 회복했으니 형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성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성진을 응시했다.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성도윤은 심장이 순간적으로 옥죄어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성도윤은 그 생각을 깊이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회복했다니 다행이네. 앞으로 잘해보자. 우린 같은 배를 탄 사람이니까. 정말로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만 있다면 나도 네가 돌아온 걸 환영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성도윤은 마음속의 불안을 접어두고 형식적인 말로 대응했다.“역시 형은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이야. 걱정 마,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내가 형의 자리를 대신해 성대 그룹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속에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순간, 주주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좋아, 그럴 실력이 있다면 말이지.”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성진은 의자를 당겨서 자리에 앉았고 그의 비서인 석현이 나서서 주주들에게 새로운 전략과 방안을 설명했다.주주들은 숨죽이며 그의 말을 들었고 그들의 표정은 점점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해외 지사를 맡아왔던 만큼 확실히 사고방식이 개방적이네. 만약 이 계
“성 대표님, 지금 하셔야 할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저희는 지금 주주총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인 겁니다. 저희에게는 지금 수많은 경쟁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 내부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능력 있는 인재들조차 불안함을 느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이죠.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장기준이 말했다. 직접적으로 성도윤에게 대표직에서 물러나라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의도는 뻔히 보였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어떤 해결책이 가장 좋다고 보십니까?”“그건 저도 모르죠. 제가 뭘 알겠습니까...”성도윤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장기준은 순간적으로 주춤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오준현이 나섰다.“간단합니다.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거죠. 그리고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해요.”이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에 있던 수십 명의 주주들은 순간 숨을 죽였다.각자의 속셈을 감추듯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도윤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장기준 씨,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아뇨,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성대 그룹을 위해서, 또 성 대표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장기준은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해명했다.“그럼 그 깊은 배려에 감사드려야겠군요.”성도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섬뜩할 정도로 서늘했다.그때, 한 주주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장기준 씨의 의견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 대표님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죠. 괜히 대표 자리를 바꿨다가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닐까요?”그러자 오준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그건 여러분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한편, 성대 그룹에서.성도윤의 지각은 이미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주요 주주들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비서가 연간 그룹의 매출과 주요 프로젝트 성과를 보고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회의실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성 대표님, 보시다시피 올해 성대 그룹의 전체 이익이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관련 주가 역시 계속해서 하락세를 보고 있어요. 지금의 성대 그룹은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회사를 이끄는 책임자로서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있습니까?”7대 주주 중 한 명인 오준현이 말했다.그는 평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매년 주주총회에서만 나타났다. 그리고 나타날 때마다 날카롭게 비판을 던졌는데 항상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도윤을 깎아내렸다.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성씨 가문 사람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러자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박지훈이 나섰다.“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이익을 볼 때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성 대표님께서 성대 그룹을 맡은 후로 회사는 점점 성장해 왔습니다. 주가가 조금 하락했다고 이러시는 건가요?”“다들 아시다시피, 최근 몇 년간 특수 상황 때문에 대다수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성대 그룹은 그나마 하락폭이 적은 편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성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미 파산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요?”박지훈은 성도윤을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지분은 많지 않았지만 성도윤과의 친분 덕분에 회사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그러나 오준현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성대 그룹이 몇 달째 내리막길을 걷는 것도 성 대표님 덕분이란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성 대표님께 상을 하나 드려야겠네요?”그의 냉소적인 말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오준현만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는 단순히 배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