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일 후면 이혼할 사람이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기에 차설아는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칠 수도 있었다. 오늘 밤에 그가 불행하게 운명을 다한다면 그녀는 유산 상속으로 크게 재산 분할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차설아가 그런 독한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다시 자선 행사장으로 돌아갔다.냉혈한 그 나쁜 남자가 그녀 뱃속 쌍둥이의 아빠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냥 죽게 내버려뒀다가 아이들이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평생 그녀 마음의 짊이 될 게 뻔했다.경매장 분위기는 이미 과열되어 있었다.“70억 원!”“80억 원!”“90억 원!”자선 경매장의 각계 유명 인사들은 흥분된 모습으로 활발히 호가에 참여하였다.오늘 경매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그녀가 빼놓은 결혼반지였다.차설아가 자리에 앉았을 땐 이미 누군가 95억 원을 호가했다.!“이건 좀 오버다. 말이 안 되는데.”차설아의 기억이 맞는다면 반지 가격대는 오십억 정도였다. 역시 돈 많은 사람은 씀씀이가 헤픈 바보 같았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옆에 마실 것을 든다는 게 마침 성도윤의 손을 터치했고 그 남자의 손은 차가웠다. 마치 차가운 미남이 거리를 두는 것처럼. 성도윤은 차설아를 쳐다보더니 눈빛 차갑게 말을 했다.“오늘 밤 당신 정말 제대로 주목받았어. 나의 와이프가 이렇게 대범한 사람인지 몰랐었네. 4년을 끼고 있는 반지를 기부한답시고 그렇게 쉽게 빼?”차설아는 여유롭게 한 모금 물을 마시더니 웃으며 말했다.“도윤 씨 그렇게 비꼬아 얘기할 거 없어. 난 다만 저기서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야.”성도윤의 눈길은 더 차가워졌고 눈동자에는 억누를 수 없는 화가 타오르는 게 차설아의눈에도 보였다. 밖이었으니 망정이지, 집이였으면 못 참고 터졌을 것이다.“도윤 씨, 여태까지의 정을 생각해서 얘기하는데. 꼭 들어. 이따가 저기 올라가지 마. 누군가의 타깃이 될 수 있어.”차설아는 목소리를 낮추어 성도윤에게 주의를 주었다. 방금 장내를 한 바퀴 돌아 보았지만, 수
둘은 그렇게 같이 걸어 올라갔다.번쩍이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그들은 너무 어울리게 멋있고 이뻤다.사회자가 현장 분위기를 끌어올리면서 성도윤과 그녀의 일들을 물었고 무대 아래의 사람들도 덩달아 소란스럽게 궁금해했다.하지만 차설아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눈길은 현장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스캔하며 그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모두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혐의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특정하지 못했다.‘혹시 아까 들은 건 그냥 장난친 소리였나?’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문득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자, 도우미께서 성 대표님이 200억 원에 낙찰한 오늘의 주인공 반지를 이분들에게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모델같이 키가 훤칠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의전 도우미는 반지가 든 경매함을 성도윤에게 전달했다.“자, 성도윤 씨 다시 한번 다이아몬드 반지를 부인의 오른손에 끼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우리 모두가 두 분의 한결같이 아름다운 사랑의 증인이 되겠습니다.”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진행하는데, 왠지 모르게 결혼식 사회자가 돼 있는 듯했고 성도윤과 차설아, 두 사람의 웨딩마치를 진행하는 것 같았다. 현장의 분위기도 점점 고조가 돼가고 사람들이 성도윤과 차설아의 결혼식에 참석한 듯했다.그 폭발적으로 열렬한 현장은 사 년 전 그들의 결혼식을 방불케 했다.성도윤의 얼굴은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무표정이었다. 굳이 200억을 들여 본시 자기들의 결혼반지를 다시 샀으니 얼간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쓸어 담지도 못하니 대세 분위기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오늘 이 자리에서 저와 제 아내의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드릴 기회가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 반지의 제일 의미 있는 귀속이 제 아내의 네 번째 손가락이라고 생각합니다.”말을 마친 성도윤은 젠틀하게 반지를 들어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다시 끼워주려고 했다.“호호!”차설아는 그런 멘트를 하는 성도윤이 어색하기 그지없었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경직된 채 서서는 손을 내밀 생각
성도윤은 깨어나 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보고 놀라면서 말했다.“드디어 깨어났네요. 하루 종일 기절해 있었어요.”“온종일?!”‘빌어먹을!’피 공포증은 점점 심해만 갔다. 늘 이렇게 중요할 때 발작하곤 한다.기절하기 전, 마지막 기억이 차설아가 총에 맞는 화면이어서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그는 단번에 간호사의 팔을 꽉 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차설아는 괜찮아요?”간호사는 성도윤의 급격한 반응에 깜짝 놀라서 우물쭈물하며 말했다.“혹시, 아내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제 같이 병원에 이송해 왔는데 다친 데만 치료받고 싸매고 돌아갔어요.”“싸매고 바로?”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차설아는 총에 맞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네, 싸매고 배 도련님과 함께 가셨어요.”간호사가 덧붙여 말을 해줬다.“배경수 그 자식이랑?!”성도윤은 그 말에 바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딩동! 딩동!”차설아는 라면을 갓 준비해 놓고 먹으려는 데 누군가가 찾아와서 기분이 언짢은 표정이었다.‘배경수, 아! 짜증나. 어제 금방 쫓아냈는데 또 바로 오네. 혼자 있기 이렇게 힘든 일인가?’그녀는 본인이 다친 데가 그저 작은 상처라고 생각했고 혼자 조용히 쉬고 싶었다.문을 열자, 성도윤이 눈앞에 서 있는 게 보였고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놀라웠고 차설아는 이유 없이 긴장해졌다.“왜? 당신이 여기에 왜?”‘피 현기증이 생각보다 심한 것 같던데.’성도윤은 대답은 하지 않고 되레 그녀에게 혼자냐고 물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방 구석구석을 스캔하는데 그 모습은 바람피운 아내의 현장 잡으러 온 남편을 방불케 했다.“그건 당신하고 상관없지 않아?”“왜 상관없어. 부부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이웃끼리 서로 관심해 주는 게 우리 민족의 미덕이니까.”성도윤은 대꾸하면서 몸은 벌써 당당하게 방안에 들어갔다.“...”차설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전에는 왜 이 사람이
“성도윤, 말로 하자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안아서 뭐 하자는 건데! 우리가 이런 사이가 아니잖아. 나 좀 내려놔!”차설아는 성도윤의 품 안에서 발버둥 쳤다.그녀도 솜씨가 만만치 않아 그들 사회에서는 그래도 지위가 있는 신분인데 매번 성도윤에게만은 고양이처럼 목덜미를 잡혀 사는 건지? 정말이지 체면이 서지 않는 노릇이다.“움직이지 마, 당신 환자야.”성도윤은 이미 욕실 앞에 도착했다.품 안의 여인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그의 보호욕을 자극했다.“...”그냥 팔을 살짝 다쳤을 뿐, 허리가 다친 것도 아니고, 다리도 멀쩡한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도움을 준다고 이 난리를 치니 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 성도윤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고 욕실로 들어가서 나갈 생각을 않고 시중들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으니 차설아는 당황스러웠다.“성도윤, 당신 설마 진짜 나 목욕시켜 주려는 건 아니지? 경고하는데 적당히 해. 딴짓하면 죽어!”성도윤은 차도남답게 나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그녀를 욕조에 살짝 앉히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앙증맞은 턱을 올리며 말했다. “딴짓 하겠다면? 욕조가 이렇게 좋고 넓은데 둘이 들어가기 딱 좋은 싸이즈인데?”“안 돼!”차설아는 목덜미까지 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자기가 사랑했던 넘사벽 도도한 그 남자가 이렇게 대놓고 끼 부리는 모습이 있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역시나 시크한 건 다 컨셉이었다. 겉보기에 얼마만큼 진중하면, 안으로 그만큼 응큼하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도윤 씨, 함부로 하지 마. 나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어!”“신고해. 경찰이 부부 동반 목욕까지 관여할까나?”성도윤은 말하면서 팔을 걷어붙여 이미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고 셔츠의 단추도 두 개나 풀어헤치더니 몸을 숙여 얼굴을 그녀 가까이 대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어차피 이혼할 사인데, 우리 특별하게 작별 인사로 부부 동반 목욕 어때? 의미 있게?”너무 대놓고 하는 유혹! 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외쳤다.‘경
“무슨 일이야?”성도윤은 진무열의 전화를 끊고는 바로 욕실로 달려가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안에서 차설아의 허둥대는 소리가 들렸다.“아니, 나 괜찮아! 들어오지 마! 제발 들어오지 마!”그리고 바로 안에서 쿵쾅쿵쾅 소리가 났다. 전혀 괜찮지가 않은 소리였다.성도윤은 잠시 머뭇하더니 결국 문을 밀고 들어갔다.“야! 누가 들어오래! 나가! 당장... 나가!”욕실의 차설아는 이미 욕조에서 일어나 있었고 아무것도 걸치지 못 한 채 뛰어 들어온 성도윤을 보고 급하게 목욕 타월을 하나 집어 몸을 가렸다. 그런데 아무리 그녀가 빠르게 가렸어도 성도윤에게 다 보이고 말았다.“...”성도윤은 큰 체구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서는 입술이 말랐는지 관능적으로 목젖을 젖혔다.마른 차설아의 몸은 늘 옷에 가려져 있어서 이렇게 은근히 좋은 몸매인 줄 몰랐다. 지나간 사 년 동안 이렇게 어여쁜 보석 같은 여인을 두고 뭘 했기에 이제야 그걸 안단 말인가!성도윤은 한참 지나서야 마음의 진정을 찾았고 몸뚱아리의 충동을 가라앉혔다.그제야 욕조 위쪽에 옷을 올려둔 선반이 떨어진 게 눈에 들어왔다. 차설아의 옷가지들이떨어져 욕조에 빠져 젖어 있었다. 차설아가 두른 목욕 수건도 축축하니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도와줄까?”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고 차설아는 축축한 수건을 두르고 그렇게 남자 앞에 굳어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연못에 떠오른 연꽃처럼 사랑스럽고 유혹적이었다.“그래 보여?”얼굴부터 발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이 상황이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이 사람은 뭘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나? 친하지도 않으면서? 옷도 입고 있지 않는데 달려 들어오면, 그게 괜찮을 일인가?’그녀가 타월로 몸을 가렸으니 망정이지,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어떻게 도와줄까?”성도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향해 두어 걸음 걸어갔다.“잠시만. 오지 마! 그게 지금 나한테는 제일 큰 도움이야!”차설아는 욕
성도윤과 차설아가 모두 옷을 갈아입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졌다.차설아는 침대에 기대고 있었고 성도윤은 파란 가운을 입고 나른하게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런 성도윤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저기... 그저 찰과상을 입었을 뿐인데, 진짜 이렇게 지켜준다고 진 치고 있을 건가? 당신은 당신 집에 가서 잠을 자. 우리는 늘 그래왔듯이 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성도윤은 신문을 덮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서 침대 위의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며 정색해서 말했다.“당신은 나를 구하기 위해 상처를 입었고, 나는 당신이 다 나을 때까지 돌봐 줄 책임이 있는 사람이지. 혹시, 혼자서는 잠을 못 자니까 재워 달라고 앙탈 부리는 건가?”“아니!”차설아는 두 팔로 대문자 X자를 취하고는 남자를 등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더는 의미 없는 말다툼하기 싫었다.‘됐다. 됐어. 지키고 싶으면 지키라고 해. 어차피 소파에서 저러고 있으면 힘든 건 본인이니까. 난 내 잠이나 잘란다!’시간은 1분 1초 지나갔고 은은한 스탠드 조명에, 집안은 고요하고 평화로웠고 가끔 성도윤이 잡지를 뒤집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요즘 잠을 설치던 차설아는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고 처음 느끼는 든든함에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성도윤도 눈이 피곤한 듯 잡지를 내려놓고 눈을 감더니 눈 주위 혈을 눌렀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부드러운 조명이 더해서 완벽했다.등지고 누운 그녀는 작은 토끼처럼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성도윤은 마음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흠, 스치는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이 어찌 나를 보호할 용기가 났지?’성도윤이 이렇게 옆에서 지키려는 이유는 그녀가 한밤중에 깨어나 목마를 때, 돌봐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되는 것도 있고, 또 그를 해치려는 그 세력이 그녀에게 보복하러 올까 봐 걱정해서였다.그 세력이 거듭 그를 죽이려고 달려드니, 그 역시도 한 치의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성도윤은 심호
햇빛이 눈 부신 다음날, 진무열은 일찌감치 차설아의 개인 파일을 보내왔다.그건 성도윤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고 그는 충격에 빠졌다.차설아와 결혼한 지 4년이 되었는데, 이혼 직전에야 자기 아내가 해안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이름난 학생이라는 걸 알았다!성적이 좋은 덕분에 2년이나 월반한 그녀는 수능 없이 해안대학의 간판 학과인 전자통신학과에 입학했고 전자기장과 전자파를 전공했다.대학교 2학년 때는 보조강사로 실험 수업을 가르쳤고 그녀의 강의는 늘 학생들로 꽉꽉 찼다.대학원생 2년 차, X 국의 가장 유명한 대학에 교환 학생으로 갔고, 그곳에서도 여러 차례의 전설이 되었다.대학원생 3년 차에 모든 게 변했다.어느 날 갑자기 파산당하여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채무를 감당하지 못한 부모님은 투신자살했다. 한때 8대 가문의 하나였던 차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원수가 수도 없이 많아졌다.차설아의 할아버지 차무진은 임종 전에 그녀를 맡겼다.성도윤은 집안 어르신의 회유 끝에 어쩔 수 없이 해외에서 돌아와 차설아와 급히 결혼식을 올렸다.계약 결혼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성도윤은 차설아를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둘이 처음 만나게 된 그날에는 축축하게 비가 내렸다.단정한 옷차림의 차설아는 마르고 연약한 몸에 귀에는 꽃을 꽂고 있었는데,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성도윤은 과묵한 여자는 별로였기에 둘은 첫인상부터 서로 맞지 않았다.그래서 지난 4년 동안 그는 법적인 아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녀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공개적인 석상에서 금실 좋은 부부로 연기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 차설아는 그저 집안을 장식하는 가구일 뿐이었다.4년 동안 차설아는 성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그 자리에 맞는 최적화된 사람이었다.단장하고 우아하며 시부모님께 효도하는 그녀는 4년 동안 그 어떤 구설에도 오르지 않았다.임채원만 없었더라면 성도윤도 이 결혼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따사롭게 비추는 햇살 사이로 차설아가
차설아는 불편한 듯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 시미치를 떼는 거야. 내가 뭘 오해하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야?!’성도윤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마. 내가 한 모든 일들은 당신이 목숨 걸고 날 구해준 거에 대한 감사의 표시니까. 다른 생각은 전혀 없어.”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4년 동안 성도윤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겠는가?“그럼 됐어.”한결 마음이 편해진 차설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린 서로 아무 감정 없으니까 이혼 증명서만 받으면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겠네.”“...”성도윤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역시도 같은 생각인데 차설아가 이런 말을 하자 저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차설아는 잠옷을 걷어 올리더니 팔에 난 상처를 짚으며 말했다.“봐봐, 상처에 딱지가 앉았어. 이제는 스스로 잘 돌볼 수 있으니까 정말 가도 돼.”남자는 그녀의 팔에 난 상처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약은? 내가 발라줄게.”“아니야, 정말 괜찮아.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차설아의 거절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물약을 꺼내 면봉으로 상처를 닦아줬다.생각보다 크고 깊은 상처를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아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아파!”물약이 살에 닿자 차설아는 너무 아픈 나머지 이를 악물었다.“참아...”성도윤은 부드럽게 상처를 소독하며 가볍게 호호 불었다.“아픈 걸 싫어하는 사람이 왜 굳이 나서서... ”“어머, 말하는 것 좀 봐. 널 구하려고 이렇게 된 건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차설아는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이 배은망덕한 자식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다음부터 이런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난 네가 위험을 감수하고 나설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야.”성도윤은
하지만 차설아는 현이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오후가 되자 김정민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현이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텅 빈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서인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내가 시킨 일은 제대로 했어?”검은 옷을 입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말씀하신 대로 다 했어요. 제발 엄마를 놓아주세요.”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계속해. 열흘 뒤에야 풀어줄 거야.”여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현이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헛짓거리할 생각은 마. 날 속이거나, 하루라도 늦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네 엄마는 죽는 거야. 알아?”“네, 알겠어요.”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살짝 떨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제야 그 여자는 현이를 놓아주고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 순간, 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그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뭔데?”“그냥 궁금해서요. 설아 씨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설아 씨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시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현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그녀는 이 여자에게 조종당해 차설아를 해치는 일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만약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그녀는 언젠가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러자 그 모자를 쓴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착하다고?”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자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뱀과도 같았다.“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여자가 누굴 해쳤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그럴
“현이 씨?”차설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사람이라면 현이 뿐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현이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차설아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녀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현이 씨 아니죠?”“설아 씨, 저 맞아요.”현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활기차고 상냥한 말투와 달랐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설아 씨,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아,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옷장 맨 왼쪽에 있는 니트 한 벌이면 돼요.”차설아가 또렷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으로 가 그녀가 원하는 옷을 꺼냈다. 니트를 받아 든 차설아는 능숙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립심이 강했기에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오히려 현이 입장에서는 여느 고용인들보다 차설아를 돌보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차설아를 좋아했다.하지만...아름답고 따뜻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현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현이는 평소처럼 우유 한 잔에 통밀 토스트, 그리고 과일 몇 조각을 준비했다.차설아는 식탁에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토스트를 씹으며 현이에게 말했다.“혹시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아, 아니에요.”현이는 입술을 꼭 깨물며 망설였다.“그냥... 가족끼리 또 싸웠을 뿐이에요. 사실 맨날 싸워서 이제 익숙하지만요.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뭘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요? 앞을 못 보고 나서 지금까지 현이 씨가 절 도와주고 있잖아요. 오히려 제가 현이 씨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차
성도윤은 남자로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그로 하여금 닭살 돋는 말을 하게 만들었고 눈물도 흘리게 했다.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평생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알면 됐어요. 제가 얼마나 좋은 아내인데요! 그러니까 평생 저만 사랑해 주세요.”차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도윤의 목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술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 주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게 해 줬으니 말이다.사실 차설아는 오래전부터 성도윤과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려 그동안 부족했던 만큼 한꺼번에 채울 생각이었다.“너, 너... 취한 거 아냐?”성도윤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차설아를 보고 당황했다. 평소에 그녀가 이러는 건 꿈이거나 아니면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으니 말이다.그는 어찌할 바 몰랐다. 괜히 진하게 키스했다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취했든 안 취했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그냥 키스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두 손으로 성도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술을 포갰다. 차설아가 워낙 격렬하게 덤벼드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갈까?”성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살짝 쉬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은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위층으로 가면 단순히 키스만 하는 게 아닐 텐데 괜찮아요?”“상관없어. 오늘 밤, 난 주인님의 말씀만 잘 따를 테니까.”그렇게 말한 성도윤은 차설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긴 다리로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고 단숨에 침실까지 도착했다.아이들이 캠프를 떠난 타이밍이 이렇게 절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토록 완벽한 둘만의 시간을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성진은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쳤다.분명 이 싸움에서 이긴 건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철저하게 패배한 기분이었다.성도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책상을 정리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설아야, 오늘 어땠어?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퇴근하고 가서 만들어 줄게.”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성도윤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달달한 그 분위기는 옆에서 듣는 사람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성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두 사람이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성도윤이 사무실을 떠나려 하자 성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형, 설아랑 다시 잘 지낸다며? 다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근데 이렇게 빨리 화해했다고? 설마 또 한 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거야?”성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끝난 사이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완전히 남남이 되어 다시는 엮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한두 달 만에 원래 사이로 돌아간 데다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눈동자까지 희생해 가면서 이루고 싶었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에 성진은 절망스러웠다. 성도윤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쉽게 그 모든 걸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성도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었다.“내가 설아랑 어떻게 지내는지 너한테 보고해야 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부러우면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찾아서 결혼하면 되잖아. 따뜻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을 누리면 되잖아. 다만...”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회의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지금 너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을까?”성도윤의 말투는 누가
성진의 말에 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성진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에게 놓고 말하면 성진이 생명의 은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그렇다면 일단 부대표님 뜻대로 진행하죠. 일단 한 분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시도해 보세요. 지켜보겠습니다.”성도윤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고 이는 곧 성대 그룹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역시 형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아는...”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 나서 성대 그룹의 이익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 어떡할 건데?”“넌 내가 어떤 결정을 했으면 좋겠어?”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성도윤을 지지하는 세력과 성진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도 말이다.그때, 오준현이 입을 열었다.“성 대표님은 항상 회사를 위해서 생각해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부대표님께서 정말 그룹에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성 대표님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시겠죠, 그렇지 않습니까?”그러자 박지훈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오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오준현 씨, 회사의 대표 자리는 인간성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회사에 수천 명의 직원이 있어도 성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인간성이요? 그게 수익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주인 저희의 관심사는 오직 이익뿐이라고요. 누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우리가 대표를 선택하는 기준입니다.”두 파벌은 서로 다른 의견을 두고 대립해서 싸우기 시작했다.보다 못한 성도윤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
“제 비서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지금은 성대 그룹을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에요. 확장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성도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성 대표님, 언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너무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이 작은 규모만 지키려다가 무너지고 싶으세요?”장기준이 가감 없이 성도윤에게 의문을 제기했다.“다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형이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형은 지난 반년 동안 큰 충격을 겪었어요. 건강도 많이 나빠졌죠. 그로 인해서 성격까지 바뀐 겁니다. 좀 더 신중해진 거죠.”“그리고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 형은 뇌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거든요.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 가세요? 석현아, 주주님들께 보여 드려.”“네, 부대표님.”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둔 성도윤의 건강 검진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그러자 진무열이 분노하며 성진에게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성 대표님의 건강 검진 결과는 개인 정보예요! 함부로 유포해도 된다고 생각해요?”“진 비서님, 진정하세요. 형을 생각해서라면 건강 검진 결과는 당연히 비밀로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형은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에요. 형의 건강 상태도 곧 성대 그룹의 미래와 이어진다는 겁니다. 다들 성대 그룹의 수익이 감소한 원인을 찾고 있지 않나요? 전 이 검진 결과가 그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해요.”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주주들은 검진 결과를 확인한 후, 믿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이럴 수가! 성 대표님의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었을 줄은...”“뇌를 다친 데다가 기억 상실증까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경영 방식이 전과 너무 다르더라니... 그 원인이 여기 있었군요.”“성대 그룹이 갑자기 변한 건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