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일 후면 이혼할 사람이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기에 차설아는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칠 수도 있었다. 오늘 밤에 그가 불행하게 운명을 다한다면 그녀는 유산 상속으로 크게 재산 분할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차설아가 그런 독한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다시 자선 행사장으로 돌아갔다.냉혈한 그 나쁜 남자가 그녀 뱃속 쌍둥이의 아빠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냥 죽게 내버려뒀다가 아이들이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평생 그녀 마음의 짊이 될 게 뻔했다.경매장 분위기는 이미 과열되어 있었다.“70억 원!”“80억 원!”“90억 원!”자선 경매장의 각계 유명 인사들은 흥분된 모습으로 활발히 호가에 참여하였다.오늘 경매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그녀가 빼놓은 결혼반지였다.차설아가 자리에 앉았을 땐 이미 누군가 95억 원을 호가했다.!“이건 좀 오버다. 말이 안 되는데.”차설아의 기억이 맞는다면 반지 가격대는 오십억 정도였다. 역시 돈 많은 사람은 씀씀이가 헤픈 바보 같았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옆에 마실 것을 든다는 게 마침 성도윤의 손을 터치했고 그 남자의 손은 차가웠다. 마치 차가운 미남이 거리를 두는 것처럼. 성도윤은 차설아를 쳐다보더니 눈빛 차갑게 말을 했다.“오늘 밤 당신 정말 제대로 주목받았어. 나의 와이프가 이렇게 대범한 사람인지 몰랐었네. 4년을 끼고 있는 반지를 기부한답시고 그렇게 쉽게 빼?”차설아는 여유롭게 한 모금 물을 마시더니 웃으며 말했다.“도윤 씨 그렇게 비꼬아 얘기할 거 없어. 난 다만 저기서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야.”성도윤의 눈길은 더 차가워졌고 눈동자에는 억누를 수 없는 화가 타오르는 게 차설아의눈에도 보였다. 밖이었으니 망정이지, 집이였으면 못 참고 터졌을 것이다.“도윤 씨, 여태까지의 정을 생각해서 얘기하는데. 꼭 들어. 이따가 저기 올라가지 마. 누군가의 타깃이 될 수 있어.”차설아는 목소리를 낮추어 성도윤에게 주의를 주었다. 방금 장내를 한 바퀴 돌아 보았지만, 수
둘은 그렇게 같이 걸어 올라갔다.번쩍이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그들은 너무 어울리게 멋있고 이뻤다.사회자가 현장 분위기를 끌어올리면서 성도윤과 그녀의 일들을 물었고 무대 아래의 사람들도 덩달아 소란스럽게 궁금해했다.하지만 차설아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눈길은 현장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스캔하며 그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모두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혐의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특정하지 못했다.‘혹시 아까 들은 건 그냥 장난친 소리였나?’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문득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자, 도우미께서 성 대표님이 200억 원에 낙찰한 오늘의 주인공 반지를 이분들에게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모델같이 키가 훤칠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의전 도우미는 반지가 든 경매함을 성도윤에게 전달했다.“자, 성도윤 씨 다시 한번 다이아몬드 반지를 부인의 오른손에 끼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우리 모두가 두 분의 한결같이 아름다운 사랑의 증인이 되겠습니다.”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진행하는데, 왠지 모르게 결혼식 사회자가 돼 있는 듯했고 성도윤과 차설아, 두 사람의 웨딩마치를 진행하는 것 같았다. 현장의 분위기도 점점 고조가 돼가고 사람들이 성도윤과 차설아의 결혼식에 참석한 듯했다.그 폭발적으로 열렬한 현장은 사 년 전 그들의 결혼식을 방불케 했다.성도윤의 얼굴은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무표정이었다. 굳이 200억을 들여 본시 자기들의 결혼반지를 다시 샀으니 얼간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쓸어 담지도 못하니 대세 분위기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오늘 이 자리에서 저와 제 아내의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드릴 기회가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 반지의 제일 의미 있는 귀속이 제 아내의 네 번째 손가락이라고 생각합니다.”말을 마친 성도윤은 젠틀하게 반지를 들어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다시 끼워주려고 했다.“호호!”차설아는 그런 멘트를 하는 성도윤이 어색하기 그지없었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경직된 채 서서는 손을 내밀 생각
성도윤은 깨어나 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보고 놀라면서 말했다.“드디어 깨어났네요. 하루 종일 기절해 있었어요.”“온종일?!”‘빌어먹을!’피 공포증은 점점 심해만 갔다. 늘 이렇게 중요할 때 발작하곤 한다.기절하기 전, 마지막 기억이 차설아가 총에 맞는 화면이어서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그는 단번에 간호사의 팔을 꽉 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차설아는 괜찮아요?”간호사는 성도윤의 급격한 반응에 깜짝 놀라서 우물쭈물하며 말했다.“혹시, 아내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제 같이 병원에 이송해 왔는데 다친 데만 치료받고 싸매고 돌아갔어요.”“싸매고 바로?”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차설아는 총에 맞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네, 싸매고 배 도련님과 함께 가셨어요.”간호사가 덧붙여 말을 해줬다.“배경수 그 자식이랑?!”성도윤은 그 말에 바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딩동! 딩동!”차설아는 라면을 갓 준비해 놓고 먹으려는 데 누군가가 찾아와서 기분이 언짢은 표정이었다.‘배경수, 아! 짜증나. 어제 금방 쫓아냈는데 또 바로 오네. 혼자 있기 이렇게 힘든 일인가?’그녀는 본인이 다친 데가 그저 작은 상처라고 생각했고 혼자 조용히 쉬고 싶었다.문을 열자, 성도윤이 눈앞에 서 있는 게 보였고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놀라웠고 차설아는 이유 없이 긴장해졌다.“왜? 당신이 여기에 왜?”‘피 현기증이 생각보다 심한 것 같던데.’성도윤은 대답은 하지 않고 되레 그녀에게 혼자냐고 물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방 구석구석을 스캔하는데 그 모습은 바람피운 아내의 현장 잡으러 온 남편을 방불케 했다.“그건 당신하고 상관없지 않아?”“왜 상관없어. 부부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이웃끼리 서로 관심해 주는 게 우리 민족의 미덕이니까.”성도윤은 대꾸하면서 몸은 벌써 당당하게 방안에 들어갔다.“...”차설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전에는 왜 이 사람이
“성도윤, 말로 하자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안아서 뭐 하자는 건데! 우리가 이런 사이가 아니잖아. 나 좀 내려놔!”차설아는 성도윤의 품 안에서 발버둥 쳤다.그녀도 솜씨가 만만치 않아 그들 사회에서는 그래도 지위가 있는 신분인데 매번 성도윤에게만은 고양이처럼 목덜미를 잡혀 사는 건지? 정말이지 체면이 서지 않는 노릇이다.“움직이지 마, 당신 환자야.”성도윤은 이미 욕실 앞에 도착했다.품 안의 여인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그의 보호욕을 자극했다.“...”그냥 팔을 살짝 다쳤을 뿐, 허리가 다친 것도 아니고, 다리도 멀쩡한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도움을 준다고 이 난리를 치니 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 성도윤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고 욕실로 들어가서 나갈 생각을 않고 시중들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으니 차설아는 당황스러웠다.“성도윤, 당신 설마 진짜 나 목욕시켜 주려는 건 아니지? 경고하는데 적당히 해. 딴짓하면 죽어!”성도윤은 차도남답게 나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그녀를 욕조에 살짝 앉히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앙증맞은 턱을 올리며 말했다. “딴짓 하겠다면? 욕조가 이렇게 좋고 넓은데 둘이 들어가기 딱 좋은 싸이즈인데?”“안 돼!”차설아는 목덜미까지 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자기가 사랑했던 넘사벽 도도한 그 남자가 이렇게 대놓고 끼 부리는 모습이 있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역시나 시크한 건 다 컨셉이었다. 겉보기에 얼마만큼 진중하면, 안으로 그만큼 응큼하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도윤 씨, 함부로 하지 마. 나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어!”“신고해. 경찰이 부부 동반 목욕까지 관여할까나?”성도윤은 말하면서 팔을 걷어붙여 이미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고 셔츠의 단추도 두 개나 풀어헤치더니 몸을 숙여 얼굴을 그녀 가까이 대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어차피 이혼할 사인데, 우리 특별하게 작별 인사로 부부 동반 목욕 어때? 의미 있게?”너무 대놓고 하는 유혹! 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외쳤다.‘경
“무슨 일이야?”성도윤은 진무열의 전화를 끊고는 바로 욕실로 달려가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안에서 차설아의 허둥대는 소리가 들렸다.“아니, 나 괜찮아! 들어오지 마! 제발 들어오지 마!”그리고 바로 안에서 쿵쾅쿵쾅 소리가 났다. 전혀 괜찮지가 않은 소리였다.성도윤은 잠시 머뭇하더니 결국 문을 밀고 들어갔다.“야! 누가 들어오래! 나가! 당장... 나가!”욕실의 차설아는 이미 욕조에서 일어나 있었고 아무것도 걸치지 못 한 채 뛰어 들어온 성도윤을 보고 급하게 목욕 타월을 하나 집어 몸을 가렸다. 그런데 아무리 그녀가 빠르게 가렸어도 성도윤에게 다 보이고 말았다.“...”성도윤은 큰 체구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서는 입술이 말랐는지 관능적으로 목젖을 젖혔다.마른 차설아의 몸은 늘 옷에 가려져 있어서 이렇게 은근히 좋은 몸매인 줄 몰랐다. 지나간 사 년 동안 이렇게 어여쁜 보석 같은 여인을 두고 뭘 했기에 이제야 그걸 안단 말인가!성도윤은 한참 지나서야 마음의 진정을 찾았고 몸뚱아리의 충동을 가라앉혔다.그제야 욕조 위쪽에 옷을 올려둔 선반이 떨어진 게 눈에 들어왔다. 차설아의 옷가지들이떨어져 욕조에 빠져 젖어 있었다. 차설아가 두른 목욕 수건도 축축하니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도와줄까?”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고 차설아는 축축한 수건을 두르고 그렇게 남자 앞에 굳어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연못에 떠오른 연꽃처럼 사랑스럽고 유혹적이었다.“그래 보여?”얼굴부터 발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이 상황이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이 사람은 뭘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나? 친하지도 않으면서? 옷도 입고 있지 않는데 달려 들어오면, 그게 괜찮을 일인가?’그녀가 타월로 몸을 가렸으니 망정이지,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어떻게 도와줄까?”성도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향해 두어 걸음 걸어갔다.“잠시만. 오지 마! 그게 지금 나한테는 제일 큰 도움이야!”차설아는 욕
성도윤과 차설아가 모두 옷을 갈아입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졌다.차설아는 침대에 기대고 있었고 성도윤은 파란 가운을 입고 나른하게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런 성도윤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저기... 그저 찰과상을 입었을 뿐인데, 진짜 이렇게 지켜준다고 진 치고 있을 건가? 당신은 당신 집에 가서 잠을 자. 우리는 늘 그래왔듯이 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성도윤은 신문을 덮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서 침대 위의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며 정색해서 말했다.“당신은 나를 구하기 위해 상처를 입었고, 나는 당신이 다 나을 때까지 돌봐 줄 책임이 있는 사람이지. 혹시, 혼자서는 잠을 못 자니까 재워 달라고 앙탈 부리는 건가?”“아니!”차설아는 두 팔로 대문자 X자를 취하고는 남자를 등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더는 의미 없는 말다툼하기 싫었다.‘됐다. 됐어. 지키고 싶으면 지키라고 해. 어차피 소파에서 저러고 있으면 힘든 건 본인이니까. 난 내 잠이나 잘란다!’시간은 1분 1초 지나갔고 은은한 스탠드 조명에, 집안은 고요하고 평화로웠고 가끔 성도윤이 잡지를 뒤집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요즘 잠을 설치던 차설아는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고 처음 느끼는 든든함에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성도윤도 눈이 피곤한 듯 잡지를 내려놓고 눈을 감더니 눈 주위 혈을 눌렀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부드러운 조명이 더해서 완벽했다.등지고 누운 그녀는 작은 토끼처럼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성도윤은 마음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흠, 스치는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이 어찌 나를 보호할 용기가 났지?’성도윤이 이렇게 옆에서 지키려는 이유는 그녀가 한밤중에 깨어나 목마를 때, 돌봐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되는 것도 있고, 또 그를 해치려는 그 세력이 그녀에게 보복하러 올까 봐 걱정해서였다.그 세력이 거듭 그를 죽이려고 달려드니, 그 역시도 한 치의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성도윤은 심호
햇빛이 눈 부신 다음날, 진무열은 일찌감치 차설아의 개인 파일을 보내왔다.그건 성도윤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고 그는 충격에 빠졌다.차설아와 결혼한 지 4년이 되었는데, 이혼 직전에야 자기 아내가 해안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이름난 학생이라는 걸 알았다!성적이 좋은 덕분에 2년이나 월반한 그녀는 수능 없이 해안대학의 간판 학과인 전자통신학과에 입학했고 전자기장과 전자파를 전공했다.대학교 2학년 때는 보조강사로 실험 수업을 가르쳤고 그녀의 강의는 늘 학생들로 꽉꽉 찼다.대학원생 2년 차, X 국의 가장 유명한 대학에 교환 학생으로 갔고, 그곳에서도 여러 차례의 전설이 되었다.대학원생 3년 차에 모든 게 변했다.어느 날 갑자기 파산당하여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채무를 감당하지 못한 부모님은 투신자살했다. 한때 8대 가문의 하나였던 차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원수가 수도 없이 많아졌다.차설아의 할아버지 차무진은 임종 전에 그녀를 맡겼다.성도윤은 집안 어르신의 회유 끝에 어쩔 수 없이 해외에서 돌아와 차설아와 급히 결혼식을 올렸다.계약 결혼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성도윤은 차설아를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둘이 처음 만나게 된 그날에는 축축하게 비가 내렸다.단정한 옷차림의 차설아는 마르고 연약한 몸에 귀에는 꽃을 꽂고 있었는데,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성도윤은 과묵한 여자는 별로였기에 둘은 첫인상부터 서로 맞지 않았다.그래서 지난 4년 동안 그는 법적인 아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녀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공개적인 석상에서 금실 좋은 부부로 연기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 차설아는 그저 집안을 장식하는 가구일 뿐이었다.4년 동안 차설아는 성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그 자리에 맞는 최적화된 사람이었다.단장하고 우아하며 시부모님께 효도하는 그녀는 4년 동안 그 어떤 구설에도 오르지 않았다.임채원만 없었더라면 성도윤도 이 결혼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따사롭게 비추는 햇살 사이로 차설아가
차설아는 불편한 듯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 시미치를 떼는 거야. 내가 뭘 오해하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야?!’성도윤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마. 내가 한 모든 일들은 당신이 목숨 걸고 날 구해준 거에 대한 감사의 표시니까. 다른 생각은 전혀 없어.”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4년 동안 성도윤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겠는가?“그럼 됐어.”한결 마음이 편해진 차설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린 서로 아무 감정 없으니까 이혼 증명서만 받으면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겠네.”“...”성도윤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역시도 같은 생각인데 차설아가 이런 말을 하자 저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차설아는 잠옷을 걷어 올리더니 팔에 난 상처를 짚으며 말했다.“봐봐, 상처에 딱지가 앉았어. 이제는 스스로 잘 돌볼 수 있으니까 정말 가도 돼.”남자는 그녀의 팔에 난 상처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약은? 내가 발라줄게.”“아니야, 정말 괜찮아.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차설아의 거절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물약을 꺼내 면봉으로 상처를 닦아줬다.생각보다 크고 깊은 상처를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아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아파!”물약이 살에 닿자 차설아는 너무 아픈 나머지 이를 악물었다.“참아...”성도윤은 부드럽게 상처를 소독하며 가볍게 호호 불었다.“아픈 걸 싫어하는 사람이 왜 굳이 나서서... ”“어머, 말하는 것 좀 봐. 널 구하려고 이렇게 된 건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차설아는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이 배은망덕한 자식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다음부터 이런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난 네가 위험을 감수하고 나설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야.”성도윤은
간호사는 차설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없었어요. 혹시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착각이었으면 좋겠네요.”그날 저녁, 민이 이모가 원이와 달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왔다.“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몸은 좀 괜찮아요?”원이는 마음이 아주 따듯한 남자아이였다.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차설아의 손을 잡더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귀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었다.“응, 엄마 많이 괜찮아졌어. 며칠만 더 있으면 엄마는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아.”차설아도 원이의 볼을 만졌다.보드랍고 통통한 아이의 볼살을 만지니 아프던 것도 전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약보다 더 효과가 강력했다.달이는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분홍색 멜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차설아에게 토마토를 건넸다.“엄마, 이건 달이가 어린이집에서 심은 토마토에요. 하나만 익어서 엄마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이거 먹고 얼른 나아야 해요.”“하나만 익었는데 엄마 주려고 가져온 거야? 우리 달이는 안 먹었어?”차설아는 달이가 들고 있는 토마토를 보았다. 달이는 토마토를 세상에서 아주 귀한 물건이라도 된 것처럼 들고 있었다. 너무도 행복했다.“달이는 안 먹어도 돼요. 맛있는 건 엄마한테 드릴 거예요. 이 토마토는 달이가 매일 물도 주고 쑥쑥 자라는 거 지켜본 거예요. 마법 토마토니까 분명 엄마를 지켜줄 수 있을 거예요!”달이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달이가 이 토마토를 얼마나 정성을 들여 키웠는지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 아이는 분명 이 토마토에 마법처럼 신기한 힘이 깃들어 어떤 병이던 다 낫게 해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차설아는 당연히 그런 아이의 마음을 짓밟을 생각이 없었기에 토마토를 받아들고 입안에 쏙 넣었다.“음, 이 토마토 아주 달구나. 엄마가 먹어본 토마토 중에 세상에서 제일 달아. 게다가 먹고 나니까 몸도 가뿐해지고 아픈 곳이 없는 것 같네... 세상에, 설마 우리 달리 마법사였어? 그래서 마법 토마토를 심을 수
“맞아. 곧 서른이라니. 나랑 설아는 영원한 낭랑 18세라고. 죽을 때까지 영원히 소녀야. 이제 알겠어?”배경윤도 전투태세를 보였다. 차설아와 함께 나이 공격하는 차성철을 공격할 생각이었다.차성철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바로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했다.“그래, 그래. 내가 잘 못 했네. 너희들은 아직도 어린 소녀였지. 그래, 영원히 낭랑 18세야. 적어도 내 눈엔 너희 둘은 18세... 아니지, 18세도 생각해보니 너무 많네. 세 살이랑 다섯 살이 어울리네.”배경윤은 눈을 깜빡이며 헤실 웃었다.“누가 세 살이고, 누가 다섯 살인데?”차설아와 차성철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차성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걸 물어봐야 아나? 뻔히 보이잖아.”“하, 말하고 나니 나도 좀 걱정되네. 촬영하면서 누가 널 괴롭히면 어떡해?”“날 괴롭힌다고?”배경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내가 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지.”“그럼 됐어. 어쨌든 내가 전에 가르쳐준 호신술 잊지 않았지? 틈만 나면 연습해둬. 적어도 네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테니까.”차설아는 그럼에도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의 모습은 꼭 아이를 학교에 처음 혼자 보내고 불안해하는 엄마의 모습 같았다.“걱정하지 마. 난 그냥 촬영하러 가는 것뿐이야. 전쟁 나가는 것도 아닌데 괜찮을 거야.”배경윤과 차설아는 대화를 조금 더 나누었다. 결국 배경윤은 아쉬움이 가득 남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병실에 남은 건 차설아와 차성철이었다.차성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말했다.“동생아,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오늘 이렇게 온 건 나도 너한테 작별인사하려고 온 거야.”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소 긴장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오빠는 어디 가는데?”“지난번에 말했다시피 장재혁이 행방불명된 상태라서 내가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거든.”차성철은 계속 장재혁의 소식을 알아보고 있었다. 비록 장재혁이 이미 바다에 던져졌을 확률이 높았지만 죽었다고 해도 그는 시체
사도현의 갑작스러운 출연으로 배경윤은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출연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진찬영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도망치고 싶어요? 원한다면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그러고는 싶은데 여기서 제가 도망치면 감독님이 절 가만두지 않으실 것 같네요. 게다가...”배경윤은 소녀처럼 수줍어하면서 말을 이었다.“전 찬영 오빠랑 같이 긴 시간을 보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그럼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출연자들이 많았고 식탁에 젓가락 한 쌍 더 올려놓는 것일 뿐이잖아요. 우리가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하하하, 찬영 오빠가 이렇게 쿨한 사람인 줄 몰랐네요.”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고 즐거운 분위기가 옆에 있던 출연자에게도 전해졌다.사도현은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당연히 두 사람의 모습을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심드렁했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굳어져 있었고 조금 어두운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큼큼, 두 사람. 벌써 서로 귓속말하는 사이가 된 거예요?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남은 건 촬영하면서 하는 건 어때요. 일단 계약서에 사인부터 하자고요.”장윤태는 이미 진찬영과 배경윤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부터 촬영하면서 두 사람을 엮어줄 생각이었다.그러나 그가 엮어주기도 전에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주 다정했기에 장윤태는 너무도 기뻤다. 다만 아쉽게도... 갑자기 나타난 사도현 때문에 마지막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배경윤과 진찬영은 출연 동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촬영은 사흘 뒤부터 시작한다고 했다.촬영장으로 떠나기 전 배경윤은 차설아와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설아, 나 아마도 한동안은 너랑 만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그동안 꼭 밥 잘 챙겨 먹고 나 돌아올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야 해!”그녀는 차설아의 손을 꼭 잡았다.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혔고 여전히 손을 놓기 아쉬
“하하하, 역시 금메달리스트 승부욕 답네요! 아주 직설적이었어요!”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장윤태는 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사도현처럼 신과 같은 존재가 그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면 재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와 라이벌로 겨우 쳐줄 수 있는 사람은 톱배우 진창영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정말이지 그냥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했다.게다가 사도현이 출연한다면 많은 재밌는 일화도 쉽게 공개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건 사도현의 동의를 받아야 방영할 수 있는 것이다... 촬영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벌써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자칫하면 네티즌들의 악플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자본에 굴한 거냐고 하면서 말이다.‘하... 벌써 머리가 아프네.'사도현은 웃는 둥 마는 둥 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배경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럼 저도 먼저 설레는 상대를 찜해도 되는 거죠?”“와, 세상에! 그럼 사도현 님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하신 거예요? 우와, 정말 너무 기대돼요!”소수민은 눈치 있게 분위기를 아주 잘 띄우고 있었다.현재 인기가 많은 배우로서 그녀의 상황 대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자신이 그 유명한 사도현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바로 파악하고 사도현 친구가 되어보기로 루트를 바꾸었다.“전 확신이 없는 일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에요. 확신이 있기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을 결정한 거고 어떻게든 그 사람을 제 여자친구로 만들고 말 거예요.”사도현은 이 말을 하면서도 오로지 배경윤만 빤히 보고 있었다.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바보들이 아니었다. 사도현이 말한 그 사람이 배경윤이라는 것을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하하, 사도현 씨 안목이 아주 좋으시네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여성 출연자 중 사도현 씨랑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은 배경윤 씨죠. 두 사람 집안도 해안시에서 8대 가문에 손꼽히는 가문이잖아요. 나이도 비슷하니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기도 하겠죠.
장윤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긴장한 듯 손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감독님, 무슨 일이에요?”배경윤도 따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읽어내고 궁금한 얼굴로 장윤태를 보았다.“우리 프로그램에 변동이 생길 것 같네요. 원래 계획은 남자 세 명 여자 네 명으로 촬영하려고 했는데 지금 갑자기 합류하게 된 출연자가 있어서 남자 넷, 여자 넷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장윤태는 주먹을 쥐며 책상을 내리쳤다.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어머, 그럼 잘된 일이잖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모두가 짝이 있게 되는 거잖아요! 그럼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소수민은 눈을 깜빡이며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맞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쪽수도 맞아서 누구 한 명 외로워지는 사람은 없잖아요.”다른 출연자들도 맞장구를 쳤다.“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조금 특별한 분이라서요. 그 사람이 오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촬영을 할 수 없을까 봐 조금 걱정이네요.”장윤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대체 누가 투입되기에 촬영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하늘이 다소 건방진 어투로 말했다.“제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이 꽤나 돼요. 대통령이든 세계에 손꼽을만한 재벌이든 전부 만나 대화를 나눠봤죠. 그런데 긴급 투입되는 사람이 누구기에 감독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죠? 말해 보세요. 저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요!”장윤태를 보고 있던 배경윤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그들의 촬영을 방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건... 제가 말하기 어렵네요. 곧 도착한다고 하니 다들 알게 될 거예요.”장윤태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듯 얼굴엔 절망이 가득했다.“자자, 도착하셨다고 하니 다들 기쁘게 환영해주자고요!”별빛 엔터의 홍보팀 팀장이 흥분하며 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그
소식이 퍼지자 인터넷은 며칠 동안 떠들썩했고 팬들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나와 현장 사진을 찍으러 갈 준비를 했다. 소식이 뜨자마자 바로 달려나갈 수 있게.오늘은 원래 진찬영과 배경윤의 계약식이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별빛 엔터테인먼트도 준비 태세를 보였다. 그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소속사 임원진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별빛 엔터의 문턱을 넘는 순간 여기저기서 종이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했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부부를 축하해주는 것처럼 두 사람을 반겼다.“찬영아, 경윤 씨. 이렇게 두 사람이 우리 회사로 온 걸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자자, 거두절미하고 우리 얼른 회의실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하죠!”장윤태 감독은 한시라도 더 빨리 계약하고 싶었기에 두 사람을 바로 회의실로 안내했다.회의실엔 두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이번 연애 프로그램의 또 다른 출연자들이었다.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전부 외모가 빼어나다는 것이다. 길가면 무조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정도로 말이다. “세상에, 진창영 배우님! 정말 잘생기셨어요. 티브이에서도 그렇고 실물도 정말 똑같이 잘생기셨어요!”인기 배우 소수민이 일어나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다른 두 여자 중 한 명은 명문대를 다니는 4학년 장유빈이었고, 남은 한 명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이나였다.두 사람은 열정적인 소수민과 달리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두 눈에 진찬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저기요. 아직 촬영 시작도 안 했거든요? 벌써 그렇게 티를 내시면 어떡해요. 명한 씨, 저희 둘은 들러리가 확정이겠네요!”스포티하게 입은 남자가 단정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운동복 차림의 남자는 지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 선수 하늘이었고 단정한 모습의 남자는 유명한 보험계리사 백호연이었다.“늘이 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러리가 확정이라
배경윤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진찬영을 바라보았다.“찬영 오빠!”그러고는 진찬영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길 맞은편에 서 있는 진찬영은 누구보다도 더 멋있어 보였다. 길을 건너던 배경윤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조심해요!”진찬영은 잔뜩 긴장한 채 달려갔고 배경윤을 와락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를 간신히 피했고 같이 바닥에 넘어졌다. 누가 보아도 애틋한 커플인 것 같았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경윤은 진찬영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전류가 온몸을 뚫고 흐르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은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머쓱하게 웃었다.“찬영 오빠,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까지 다칠 뻔했어요.”배경윤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횡설수설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좋아하는 연예인 앞에서 배경윤은 수줍은 소녀가 된 것 같았다.“내가 길을 건넜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전부 제 탓이에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늘색 셔츠에 카키색 청바지를 입은 진찬영은 특유의 분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타고난 매력이었다.길을 걷고 있어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여자도 진찬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길 건너에서 걸어오는 배경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결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진찬영이었다.“곧 커플로 촬영할 사이인데 편하게 말 놓아도 돼요. 제가 오빠보다 어리잖아요.”진찬영이 진지하게 사과하자 배경윤은 마음이 불편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아, 그러네요. 나의 여자 친구, 앞으로 잘 부탁해요.”진찬영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애틋하게 쳐다보았다. 진찬영의 행동 하나가 배경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흠! 얼른 회사로 가요. 장 감독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말을 마친 배경윤은 뒤돌아
반대로 사도현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배경윤을 쳐다보았다.“급한 일도 없잖아.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커피나 마시면 얼마나 좋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해.”“사도현, 너는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바빠.”배경윤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사도현이 끌어당기면 질질 끌려갔고 기세로 사도현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뻔뻔스러운 사도현을 어쩌지 못하기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할 일이 없겠어? 너를 만나는 게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야.”사도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배경윤을 바라보았다.“이 멍청한 놈!”배경윤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욕했다. 사도현이 능글맞은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사도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듣기로는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결정했다더라? 진찬영이랑 커플로 연기하는 대본도 받았지?”“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아니야.”배경윤이 부정하자 사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나랑 찬영 오빠는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커플이야. 그런 대본 따위 필요 없어.”“배경윤!”사도현은 배경윤의 도발에 휘말린 듯한 느낌을 받아서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사도현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왜? 내가 기뻐하니까 오히려 화가 나?”배경윤은 늘 싸움에서 기세에 눌렸지만 사도현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이번에 드디어 이기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배경윤은 신이 나서 환하게 웃었다.“내가 화가 나서 쓰러져야 네 속이 시원하지? 그런 거야?”사도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커플이라면 싸울 때도 있을 거야. 작은 다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이건 상대의 마음에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야.”“이게 커플 사이에 싸우는 거로 보여?”배경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피식 웃었다.“내가 네 여자 친구라는 거야, 아니면
“누가 네 전 여자 친구라는 거야? 나는 너랑 모르는 사이야. 친한 척하지 마!”배경윤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사도현한테 아주 실망했기에 다정하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경윤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자던 사이였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모르는 사이야.”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부러 장난을 쳤다. 배경윤이 차갑게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놀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고는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다 잊어버려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게. 내가 몇 번이고 너한테 말해주면 되거든.”“뭐, 뭐 어떻게 말해줄 건데?”배경윤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사도현을 피하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나의 전 여자 친구는 내가 벽에 밀치고 키스하는 걸 제일 좋아했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알려줄 수도 있어.”사도현은 천천히 배경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배경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사도현,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민망해서 사도현의 뺨을 후려갈기려고 했다. 이때 사도현이 배경윤의 손목을 잡더니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이제는 우리가 친한 사이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어?”“나는...”배경윤은 거칠게 뛰는 심장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인정할 수 없어.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야.”“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잖아.”사도현은 배경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끝으로 배경윤의 코를 쓰다듬었다.배경윤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도현이 미웠지만 제일 미운 건 자신이었다. 사도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우스웠다.사도현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배경윤은 반격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배경윤은 사랑의 싸움에서 사도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도현이 잡아당기면 끌려가고 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