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차설아는 당최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항상 호들갑 떠는 성격인 배경윤이 하는 얘기라 조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성도윤이랑!”배경윤이 큰 소리로 외쳤다.“언니! 만약 정말 성도윤과 그런 거라면, 난 다시 볼 거야. 내가 예전엔 둘의 팬이었다지만 그놈이 언니한테 어떻게 했는데! 헤어지는 마당에 그 인간이랑 잤다는 게 말이 돼?”그녀가 이렇게 흥분한 이유는 단지 자기가 좋아하는 언니가 다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누가. 내가. 그 인간이랑 잤대?”차설아는 어제저녁 방송이 언뜻 생각났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어제는 쇼였어. 키스를 당했고 대가로 그 인간 뺨을 한 대 쳤고.” 성도윤을 후려치고 느낀 쾌감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그 키스는 차설아가 손해 본 것 같지도 않았다.“뺨을 쳤다고? 언니, 대단해!”배경윤은 바로 이어서 얘기했다.“그런데, 그게 둘이 잠자리를 한 이유로는 설명이 안 되잖아. 솔직히 말해. 어제 라이브 끝나고 앞뒤로 집에 간 게, 혹시 같이 간 거야? 설마... 지금 그 인간 거기 있는 건 아니겠지?”“너무 갔다. 브레이크!”차설아는 성도윤과 앞뒤로 집에 돌아온 기억이 전혀 없었다.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배경윤이 보낸 찌라시 기사 캡쳐본을 보고서야 깜짝 놀랐다.기사 사진은 어제저녁 성도윤과 그녀는 놀랍게도 ‘샘천 레지던스’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둘의 투 샷은 아니었지만, 앞뒤 간격이 10분도 안 되는 시간 차였다.‘샘천 레지던스’는 그녀가 현재 묵고 있는 리버 뷰 아파트고, 한 층에 두 가구가 들어사는 대평층이었다. 배경수가 직접 골라서 찾아 준 곳이 바로 여기였고 아무에게도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성도윤이 그녀를 미행했을 거라는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 있을 법했다. “아우, 변태!”차설아는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고 배경윤과의 전화를 끊고 성도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당신이야?”성도윤의 나른한 목소리에서 약간의 의외라는 감정이
“막장 드라마 적당히 좀 봐. 나 요 앞에 4년째 살고 있는데, 미행이라면 당신이 날 미행했다고 봐야지 않겠어?”성도윤이 쌀쌀맞게 말을 하더니 긴 다리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곧장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뭐? 앞... 앞에 산다고?”그러고 보니 맞은편 저택의 문이 한 뼘 열려있는 게 보였다. 차설아는 무안함에 귀를 만지작거렸고 한참 헛발질을 했던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떠올라 민망함이 허를 찔렀다. 따라다닐 의사가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스토커라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는 사실이 혼자 김칫국 한 사발 마신 것 같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성도윤은 날렵한 눈매로 집안을 무심하게 훑어봤고 시선 끝에는 그녀의 침실에 멈춰 섰다.“당신 안방 구조가 나랑 아주 다르네.”성도윤은 그녀의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고 차설아는 서둘러 안방 문 앞에서 막아섰다.차설아는 언뜻 침대 위에 놓인 육아 책이 생각났고, 그걸 성도윤이 본다면 임신 사실이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쏜살같이 움직였다.“안 돼!”“안 되는 나도 안 돼.”성도윤의 캐릭터상 하고 자 하는 일을 꼭 해야 할뿐더러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진짜 안 돼!”차설아는 두 팔을 벌린 채 성도윤이 방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아섰고 때려 막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당신이 뭔데! 나랑 무슨 사이라고 내 침실을 함부로 들어가려 해?”“남편이라는 이유.”키 차이로 인해 성도윤은 아담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그의 깊은 눈매엔 서늘한 기운이 담겼다.“아님, 뭐 딴 남자라도 숨겼어?”“성도윤!!!”차설아는 손에 힘을 다해 주먹을 꽉 쥐었다.‘좋은 말로 할 때 좀 듣지. 거 참 힘쓰 게 만드네.’어차피 그녀의 솜씨면 3할의 공력으로도 성도윤을 회의가 들게 만들 수 있었다.“움직이면, 다 보여.”성도윤은 유유자적하게 또 한 번‘가슴꼴 주의’를 줬다.“아! 미친!”차설아는 급하게 두 팔로 감싸면서 앞을 단단히 단속했다. 성도윤은 큰 장신을 옆으로 비껴가면서 설아의 빈틈을 치고 안
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불쾌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성 대표님, 해킹 거물 바람 님이 그룹 본사에 와 있습니다. 스파크가 누군지 직접 알려드리겠다고, 지금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그래?”성도윤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성대 그룹을 난장판 만들어 놓은 ‘스파크'의 신분을 밝힐 수 있다는 생각에 흥미를 느낀 듯하였다.‘재밌네!’“기다리라고 해. 지금 갈 거니까.”성도윤은 전화를 끊고는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였다. 차갑고 절제된 성도윤의 모습에서 아까의 뜨겁고 정열적인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차설아는 자연스럽게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사실 바람이라는 작자를 일찍부터 만나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던터. 이렇게 제 발로 나타나 주니 그녀로서는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수가 없었다.“도윤 씨, 이제 가?”차설아는 남자의 우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본사에 처리 할 일이 있어.”“같이 가.”성도윤이 뒤돌아서 실눈을 뜨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당신, 또 무슨 꿍꿍이지?”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성도윤은 겉모습은 얌전하고 유순한 그녀, 속은 시커멓고 엉큼한 예비 전처가 어떻게 나올지 가늠하기 어려워 두렵기도 했다.“말을 해도 참... 명성 자자하신 성대 그룹 대표님께서 별거 다 걱정하시네. 여기 해안시에서 당신 앞에서 막 나가는 사람이 어딨다고. 제가 어찌 감히 꿍꿍이가 있겠나요?”차설아는 방실방실 웃으며 성도윤에게 아양을 떨었고, 성도윤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식으로 자세를 취하고 그런 그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차설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여유롭게 겉옷 하나를 집어 들고 얇은 잠옷 위에 걸치며 천천히 말했다.“어젯밤 고민 많이 했어. 당신 얘기대로 그거, 쇼윈도 부부 내가 맞춰 줄게.”“진심?”성도윤은 약간 의외였고 검은 눈동자가 밝아지면서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차설아가 손을 휘이휘이 저으며 말을 막았다.“당신을 위해서도 성씨 집
블랙 착장의 남자가 두 다리를 책상 위에 걸어 놓고 느긋하게 회전의자를 돌리고 있었고 오만방자함을 잔뜩 풍기고 있었다. 그는 빵떡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잘생긴 콧날과 얇은 입술만 드러냈다.그가 바로 수많은 IT 인사의 우상인, 글로벌 해커 리그에서 4년 연속 우승을 거머쥔 사람. 해킹계 양대 산맥 중 한 사람인 거장 바람이다.“바람 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저희 성 대표님 곧 도착하십니다. 곧!”“기다리는 거 힘드시죠? 제가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다리도 두드려 드릴게요!”오늘 운 좋게 우상을 만났다고 친필 사인받으러 온, 또 같이 사진 찍으러 온 직원들이 IT팀에 모여있었다. 이건 완전 핫한 연예인의 행차가 따로 없었다.“다들 한가해?”앞장서 걸어오던 진무열이 모여서 난리부르스를 떠는 직원들을 보고는 화가 났는지 엄포를 놓듯 물었고 직원들은 뒤에서 느껴지는 강한 기세에 갈래 길을 만들면서 뿔불히 흩여졌다.“바람 씨,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분이 저희 성 대표님이십니다.”“대표님,해킹계 거물 바람 님입니다.”진무열은 중간에 선 채 조심스럽게 서로를 소개 해주었다. 바람은 여전히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의자에 기대 채 전혀 일어나 예의 차려 인사할 의지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삐딱하게 성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성도윤도 바람을 내려다보면서 훑었다. 바람이 비아냥거리며 웃어 보였다.“그분이시군요. 최근 들어 실검에 자주 오르신다는. 조강지처 버리고 밖에서 내연녀하고 애까지 만들어서 욕을 바가지로 드신다는 성도윤 씨?”그 말에 모두가 흠칫 놀라며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성도윤 옆에 서 있던 차설아 역시도 감탄해 마지않았다.‘바람 이 인간, 성격이며 코딩하는 스타일이 정말 빼박이네. 공격력 만랩이야!’“허허, 바람 씨 농담도 참!”진무열은 한편으로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시도했고, 한편으로 성도윤이 혹여나 불쾌해하는지 슬쩍 눈치를 보았다. 걱정과 달리, 성도윤은 그쯤이야 전혀
“그 정도 요구는 얼마든지 들어드리죠.”성도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눈에 힘을 주고는 컴퓨터 모니터의 실행 버튼을 응시하며 말했다.“시작해요.”“시원시원하니 좋네요!”바람도 꾸물거리지 않고 프로그램을 돌렸고 모두가 숨을 죽이고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그중 일부 스파크의 팬들은 흥분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긴장했다.“성공! 성공?”“해킹계의 제일 신비스러운 거물 스파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가?”15분이 금방 지나갔고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10. 9. 8. 7......”차설아가 홀가분한 모습으로 스파크를 찾는 현장에 다시 돌아와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긴장한 바람을 보며 조롱하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아이, 뭐야. 아직도 안 나왔어요? 실력자 맞아요? 코드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추적했는데 막 결과가 본인이 나오고 그러지는 않겠죠? 그건 너무 좀 그렇다.”“쓰레기 줍줍 하는 여자가 뭘 안다고!”바람난 남편을 알면서도 손을 놓지 못하고 매달려 사는 그런 여자를 바람은 제일 경멸했다. 그런 차설아를 바람은 하찮게 생각했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자존심도, 능력도 없고, 생각도 없는 여인이 코드를 읽을 줄이나 알면서 껴드나?’팀원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장 바람이 코드엔 늘 완벽하기로 소문났기에 문제 있을 거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고 차설아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다.“3! 2! 1!”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프로그램 추적이 끝났고 모니터엔 확실히 결과 나왔다.“아니... 이게.”화면에 뜬 결과를 본 사람들, 순간 정적이 밀려왔다. 결과는 바로 스파크가 바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역대급 어이없는 사태는 보는 사람들을 말문 막히게 했다!“헐, 봐봐. 내가 맞췄어! 코딩이 진짜 문제가 있다니깐요!”차설아는 바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했다.“총각. 보고 있는 게, 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너무 자만하지는 말죠!”“이럴 리가 없는데, 절대 이럴 수가 없는데! 나의 프로그래밍
갑자기 요주의 인물이 된 차설아는 되레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하하하, 다들 설마 내가 스파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냥 화장실을 잠깐 다녀왔는데, 그걸로 내가 명성 자자한 거장 스파크가 된다고? 에이. 그런 좋은 일이 나한테 떨어지면 내가 나가서 축제라도 벌이고 불꽃놀이라도 해야죠.”진무열이 나서서 아니라고 했다.“제가 봐도 이번 일은 우연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모님은 마음이 세심하고 가정적인 분이지, 컴퓨터 같은 건 동영상을 보는 정도지 게임도 잘 못하실 거예요. 이분이 해킹계 거장이면 저는 XX 국의 대통령이게요?”그 말이 비록 듣기엔 거북해도 차설아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말이긴 했다. 모두 진무열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차설아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순진하고 무해한 척 말했다.“그래요. 도윤 씨 안사람인 제가 해커였으면 저 사람을 해칠 일이 있겠어요. 도우면 도왔지.”침묵을 지키고 있던 냉소적인 성도윤이 예리한 눈길로 그녀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그래? 적잖이 하지 않은 것 같긴 한데.”“호호! 농담도 참.”차설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괘씸하기도 하셔라.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성도윤은 한발 한발 차설아를 향해 다가가서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갸름한 턱을 살짝 잡고 올렸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분석하듯 세심하게 쳐다보았다.“그래서, 당신 아니야?”딴사람은 몰라도 성도윤을 속이기는 쉽지 않다는 걸 아는 차설아는 제 발이 저려 차가운 그의 시선을 피했고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당신이 맞다고 생각하면 맞는 거고, 아니라고 하면 아닐 거고.”“좋아, 쓸데없이 맞는 말.”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에는 큰 정서적인 변화가 없었고 차갑게 그녀를 향해 명령투로 말했다.“핸드폰 줘봐.”요새 젊은 사람들의 비밀은 모두 핸드폰에 담겨있으니 만약 차설아가 문제가 있으면 핸드폰만 뒤지면 다 나올 수 있었다.차설아도 핸드폰을 성도윤에게 넘겨 검사받을 수 없었다. 핸드폰에는 많은 비밀
바람이 떠난 뒤 모든 것이 제자리로 평온하게 돌아왔다.“별다른 일 없으면 나도 먼저 갈게.”차설아가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 쇼윈도 부부 모습도 보여줬고 바람의 실물도 봤으니 성대 그룹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저녁 시간 비워 둬.”성도윤은 사무실 책상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불쑥 말했다. 이런 명령적인 뉘앙스에 차설아는 불쾌했다.“왜?”성도윤은 그에 답하지 않고 서랍을 열어 이쁘게 포장된 박스를 차설아의 앞에 놓았다.“저녁 여덟 시에 플라자 호텔 연회장에서 점잖게 입고 와”“나한테 주는 선물?”차설아는 보기 드문 상황에 순간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싶었고 호기심에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어보았다.포장에 담긴 건 실버 그레이 드레스였고, 색감과 질감으로 가격이 만만치 않음이 한눈에 보였다. 다만 드레스가 너무 보수적이고 단정한 스타일이었다.차설아는 몇 마디 비꼬아 물으려 하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얼굴에 교활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알겠어. 시간 맞춰 갈게.”저녁 여덟시 플라자 호텔.호텔 앞 주차장은 고급지고 화려한 값비싼 차들로 가득 찼고 모터쇼를 방불케 하였다. 연회로 열리는 해안시 자선행사에 국내외 유명 인사들로 붐볐다.차설아는 택시를 타고 도착했고 보기에도 심플하고 심지어 싸 보이는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머리도 대충 묶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른 셀럽들의 화려한 모습과는 선명한 대비가 되었다. 입장하려는데 자연스럽게 경비가 막아섰다.“초청장 보여주세요.”경비는 딱딱한 말투로 차설아를 보며 말했고 차설아는 솔직하게 답했다.“그거 없어요.”“없으면 못 들어갑니다. 여기 보이죠, 아무나 못 들어 갑니다. 저쪽에 가면 되고요.”경비는 아마도 뉴스를 잘 안 보는 눈치다. 그러니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신분 높은 성도윤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수밖에. 적어도... 지금이 그랬다.차설아가 설명하려는 때 빨간색 페라리가 “끼익” 하고 주차했다. 성도윤의 사촌 여동생 소이서가 핑크 드레스를 입고 고고한 자태로 차에서 내렸다. 그녀와 함
소이서는 평소에 멋대로 괴롭혀도 다 받아주던 차설아의 반격에 화난 나머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너무 염치없는 거 아냐? 주제 파악은 할 줄 알아야지. 다 망한 가문의 당신이 감히 오빠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해? 언제까지 이혼을 미룰 건데? 이혼이 미루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아? 채원 언니 배도 이젠 점점 불러오고 있다고. 오빠 새 결혼은 바뀔 수가 없어. 이혼은 뭐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거 같아?”차설아는 담담하게 답했다.“글쎄. 내가 결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사촌 동생인 이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 건 확실하지. 배가 점점 불러오는 걸 어쩌라고. 이혼 도장 찍기 전까지는 난 그 사람의 안사람이고 채원 씨는 첩이야. 배 안에 든 아이는 호적에도 올릴 수 없는 첩의 자식이고.”임채원은 차설아의 말에 비수가 꽂혔지만 당장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인지하고 다시 연약한 척 말했다.“설아 씨, 화난 거 있으면 나한테 풀어. 우리 애는 모욕하지 말아 줘!”“누굴 모욕하려는 말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알려 준 것뿐인데. 첩의 자식은 결국엔 태자가 못 되지 않나?”“그건...”임채원은 말문이 막혔고 여전히 연약한 모습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나 도윤 씨와 진심으로 사랑해. 이 관계에선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 첩 아닌가?”“채원 언니. 저런 사람하고 시간 끌 필요도 없어요. 주제 파악 못 하는 사람은 바로 끝내줘야 해요.”소이서가 이 갈면서 목소리를 높였고 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설아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만 뻗은 손이 누군가의 강한 힘에 눌려 뺨을 치지 못했다.“감히 누가 간섭해!”소이서가 그녀를 막아 나선 사람을 쳐다보더니 욕설을 퍼붓다 말고는 갑자기 수줍은 모습을 보였다.“배, 배경수 씨.”흰색 정장 차림의 배경수는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이 마치 소설 속 백마 왕자와 똑같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이서 씨. 대체 뭘 먹었는데 이렇게 화가 나 있어?”배경수는 소이서를 쳐다보며 물었고 표정은 미소를 지어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성진은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쳤다.분명 이 싸움에서 이긴 건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철저하게 패배한 기분이었다.성도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책상을 정리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설아야, 오늘 어땠어?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퇴근하고 가서 만들어 줄게.”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성도윤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달달한 그 분위기는 옆에서 듣는 사람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성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두 사람이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성도윤이 사무실을 떠나려 하자 성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형, 설아랑 다시 잘 지낸다며? 다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근데 이렇게 빨리 화해했다고? 설마 또 한 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거야?”성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끝난 사이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완전히 남남이 되어 다시는 엮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한두 달 만에 원래 사이로 돌아간 데다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눈동자까지 희생해 가면서 이루고 싶었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에 성진은 절망스러웠다. 성도윤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쉽게 그 모든 걸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성도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었다.“내가 설아랑 어떻게 지내는지 너한테 보고해야 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부러우면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찾아서 결혼하면 되잖아. 따뜻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을 누리면 되잖아. 다만...”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회의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지금 너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을까?”성도윤의 말투는 누가
성진의 말에 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성진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에게 놓고 말하면 성진이 생명의 은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그렇다면 일단 부대표님 뜻대로 진행하죠. 일단 한 분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시도해 보세요. 지켜보겠습니다.”성도윤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고 이는 곧 성대 그룹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역시 형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아는...”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 나서 성대 그룹의 이익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 어떡할 건데?”“넌 내가 어떤 결정을 했으면 좋겠어?”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성도윤을 지지하는 세력과 성진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도 말이다.그때, 오준현이 입을 열었다.“성 대표님은 항상 회사를 위해서 생각해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부대표님께서 정말 그룹에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성 대표님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시겠죠, 그렇지 않습니까?”그러자 박지훈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오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오준현 씨, 회사의 대표 자리는 인간성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회사에 수천 명의 직원이 있어도 성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인간성이요? 그게 수익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주인 저희의 관심사는 오직 이익뿐이라고요. 누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우리가 대표를 선택하는 기준입니다.”두 파벌은 서로 다른 의견을 두고 대립해서 싸우기 시작했다.보다 못한 성도윤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
“제 비서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지금은 성대 그룹을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에요. 확장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성도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성 대표님, 언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너무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이 작은 규모만 지키려다가 무너지고 싶으세요?”장기준이 가감 없이 성도윤에게 의문을 제기했다.“다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형이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형은 지난 반년 동안 큰 충격을 겪었어요. 건강도 많이 나빠졌죠. 그로 인해서 성격까지 바뀐 겁니다. 좀 더 신중해진 거죠.”“그리고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 형은 뇌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거든요.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 가세요? 석현아, 주주님들께 보여 드려.”“네, 부대표님.”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둔 성도윤의 건강 검진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그러자 진무열이 분노하며 성진에게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성 대표님의 건강 검진 결과는 개인 정보예요! 함부로 유포해도 된다고 생각해요?”“진 비서님, 진정하세요. 형을 생각해서라면 건강 검진 결과는 당연히 비밀로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형은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에요. 형의 건강 상태도 곧 성대 그룹의 미래와 이어진다는 겁니다. 다들 성대 그룹의 수익이 감소한 원인을 찾고 있지 않나요? 전 이 검진 결과가 그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해요.”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주주들은 검진 결과를 확인한 후, 믿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이럴 수가! 성 대표님의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었을 줄은...”“뇌를 다친 데다가 기억 상실증까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경영 방식이 전과 너무 다르더라니... 그 원인이 여기 있었군요.”“성대 그룹이 갑자기 변한 건 대표님
모든 주주들이 일제히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충격이 서려 있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부대표님께서 실명했다고 하지 않았어?”“전에는 몸 상태도 많이 약해서 부대표님 자리까지 내려놓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생기가 넘치잖아?”“돌아왔다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제 성대 그룹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겠어!”주주들은 성진의 복귀를 환영해 주었다. 그들은 성진이 성도윤을 대신해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를 기대하며 중얼거렸다.성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곧장 성도윤의 곁으로 다가갔다.“형, 미안해. 그동안 형 혼자 성대 그룹을 관리하느라 정말 힘들었을 텐데... 이젠 나도 회복했으니 형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성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성진을 응시했다.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성도윤은 심장이 순간적으로 옥죄어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성도윤은 그 생각을 깊이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회복했다니 다행이네. 앞으로 잘해보자. 우린 같은 배를 탄 사람이니까. 정말로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만 있다면 나도 네가 돌아온 걸 환영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성도윤은 마음속의 불안을 접어두고 형식적인 말로 대응했다.“역시 형은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이야. 걱정 마,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내가 형의 자리를 대신해 성대 그룹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속에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순간, 주주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좋아, 그럴 실력이 있다면 말이지.”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성진은 의자를 당겨서 자리에 앉았고 그의 비서인 석현이 나서서 주주들에게 새로운 전략과 방안을 설명했다.주주들은 숨죽이며 그의 말을 들었고 그들의 표정은 점점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해외 지사를 맡아왔던 만큼 확실히 사고방식이 개방적이네. 만약 이 계
“성 대표님, 지금 하셔야 할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저희는 지금 주주총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인 겁니다. 저희에게는 지금 수많은 경쟁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 내부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능력 있는 인재들조차 불안함을 느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이죠.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장기준이 말했다. 직접적으로 성도윤에게 대표직에서 물러나라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의도는 뻔히 보였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어떤 해결책이 가장 좋다고 보십니까?”“그건 저도 모르죠. 제가 뭘 알겠습니까...”성도윤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장기준은 순간적으로 주춤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오준현이 나섰다.“간단합니다.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거죠. 그리고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해요.”이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에 있던 수십 명의 주주들은 순간 숨을 죽였다.각자의 속셈을 감추듯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도윤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장기준 씨,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아뇨,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성대 그룹을 위해서, 또 성 대표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장기준은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해명했다.“그럼 그 깊은 배려에 감사드려야겠군요.”성도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섬뜩할 정도로 서늘했다.그때, 한 주주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장기준 씨의 의견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 대표님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죠. 괜히 대표 자리를 바꿨다가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닐까요?”그러자 오준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그건 여러분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한편, 성대 그룹에서.성도윤의 지각은 이미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주요 주주들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비서가 연간 그룹의 매출과 주요 프로젝트 성과를 보고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회의실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성 대표님, 보시다시피 올해 성대 그룹의 전체 이익이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관련 주가 역시 계속해서 하락세를 보고 있어요. 지금의 성대 그룹은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회사를 이끄는 책임자로서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있습니까?”7대 주주 중 한 명인 오준현이 말했다.그는 평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매년 주주총회에서만 나타났다. 그리고 나타날 때마다 날카롭게 비판을 던졌는데 항상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도윤을 깎아내렸다.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성씨 가문 사람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러자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박지훈이 나섰다.“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이익을 볼 때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성 대표님께서 성대 그룹을 맡은 후로 회사는 점점 성장해 왔습니다. 주가가 조금 하락했다고 이러시는 건가요?”“다들 아시다시피, 최근 몇 년간 특수 상황 때문에 대다수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성대 그룹은 그나마 하락폭이 적은 편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성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미 파산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요?”박지훈은 성도윤을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지분은 많지 않았지만 성도윤과의 친분 덕분에 회사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그러나 오준현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성대 그룹이 몇 달째 내리막길을 걷는 것도 성 대표님 덕분이란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성 대표님께 상을 하나 드려야겠네요?”그의 냉소적인 말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오준현만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는 단순히 배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