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은 인내심이 바닥나 언짢은 얼굴로 다그쳤다.“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지? 계속 우물쭈물하면서 뭐 하는 거야!”“홍보팀에서 각종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현재 네티즌 10명 중 9명은 사모님 편에 서서 대표님께 불만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대표님께서 나서서 사모님한테 용서를 빈다면 소동을 가장 빨리 잠재울 수 있으리라 예측합니다. 사모님과 다시 라이브 방송을 켜고 네티즌들 앞에서 사랑을 과시한다면 여론은 완전히 뒤집힐 것입니다.”예서는 조심스럽게 말을 마쳤다. 그녀는 감히 성도윤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도 성도윤이 얼마나 도도하고 오만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홍보팀에서 전달한 먼저 꼬리 내리기 방안에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말도 안 되는 소리!”역시나 성도윤은 단칼에 거절했다.“할 일 없이 집에 처박혀 키보드 두드리는 맛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둬. 그리고 성대 그룹을 보이콧해?”성도윤은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순진한 녀석들!”이 말은 결코 성도윤의 거만함에서만 나온 말이 아니었다.성대 그룹은 셀 수 없이 많은 산업에 발 담고 있었다. 요식업, 부동산, 의류, 전자, 자동차 제조는 물론, 군용기 제조에까지 발 담고 있었기에 일개 네티즌들이 보이콧하고 싶다고 해서 보이콧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그럼 더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지워!”성도윤은 독기 어린 눈동자로 예서를 쳐다보며 말했다.“3일 내로 나에 관한 그 어떤 언급도 남아있지 않게 만들어.”“그건...”예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섣불리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없었다.“그럼... 홍보팀에 연락해서 홍보비용을 더 추가하라고 하겠습니다.”그녀도 이렇게 하는 것은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도하고 오만한 대표님이 버티고 있으니 별다른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예서가 막 나가려던 그때, 성도윤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네, 대표님. 더 하실
성도윤은 이 커플 팬덤의 규모가 30여만 명이라는 것에서 한 번 놀랐고 활약이 모든 팬덤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동네 구멍가게 일 줄 알았더니 거대한 상가였다.어쩐지, 라이브 방송 한 번으로 ‘쓰레기' 라고 실검에 오르더라니...성도윤은 마우스를 내리며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핑크빛 썸! ‘차성윤설’ 한 앵글에 들어오다!”“달달함이 극치에 달하다! 성도윤 왕자를 바라볼 때 나오는 설아 공주의 꿀 떨어지는 눈빛!”“서로를 마주 보다! 도윤 도련님이 아내를 바라보는 꿀 떨어지는 순간 모음!”“...”이 팬덤의 활약에 성도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게시물을 업로드했고 오래된 게시물 아래에 댓글을 달아 열띤 토론을 했다. 이제 보니 차설아와 같은 앵글에 담긴 사진이 꽤 많았다. 그리고 이 사진들 속에서, 그를 몰래 바라보는 차설아의 눈빛은 그렇게나 애틋했다.이 게시물 중 조회수가 가장 많고 댓글 수가 가장 많은 게시물은 ID가 ‘차성커플 바라기' 인 네티즌이 쓴 팬 픽션이었다.“첫 만남, 한여름날 어느 오후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모두가 허둥지둥 비를 피하느라 바빴다. 그때 그와 그녀가 운명처럼 마주쳤다...”성도윤도 홀린 듯 팬 픽션을 읽다 보니 어느새 404페이지까지 읽었고 새로 고침하자마자 글이 삭제되었다고 알림이 떴다.“빌어먹을!”성도윤은 나지막하게 짜증 나는 마음을 털어놓았다.그제야 이 팬덤의 규모가 크고 활약이 뛰어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런 팬 픽션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울 정도였다.성도윤은 침착하려고 애쓰며 홈페이지를 닫았다. 더 보다가는 그마저도 팬클럽 일원이 될 것 같았다.어느덧 밤이 되었다. 성도윤은 분명 바쁜 하루를 보냈는데, 어쩐지 마음이 허전했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이리저리 뒤적이며,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골똘히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같은 시간, 차설아는 소파에 누워 육아책을 뒤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뜻밖에
“푸읍!”마시던 레모네이드를 뿜는 차설아.좀처럼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던 차도남 성도윤이었기에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돌직구였다.“나르시시즘 아니야? 사랑은 무슨.”차설아는 날카로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딱 걸린 도둑처럼 자신감 없게 대답했다.“사람들이 그러는데, 당신이 나를 많이 사랑했었다고.”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꼬리가 올라간 성도윤, 여자들이 막 들이대면 귀찮아하고 느낌 없는 모습이었다면, 유독 차설아의 애정은 왠지 모르게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처럼 즐기는 모양새였다.“사람들은 몰라도, 그거 다 생방송이라 연기라는 걸 본인이 더 잘 알면서.”차설아은 손을 내저으며 소탈한 척 행동했다.그녀는 자신이 성도윤을 많이 사랑했다는 지난 사실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만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고 얘기할 수 있고, 알량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성도윤은 범죄를 캐는 조사관처럼 그녀의 위선을 벗겨내려는 듯 한발 한발 몰아붙였다.“사랑하지 않은 거라면 나 몰래 챙겨준 건 뭐고? 우리 투 샷 사진들에서 나를 다정하게 쳐다본 건 뭐고? 또... 사랑하지 않은 거라면 임채원을 적대시 한 건? 질투를 한 게 아니면 뭔데?”성도윤의 연이은 질문에 차설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이 훤히 다 비친 듯한 상황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그래서?”‘지금 뭐 하자는 거지? 굳이 밝혀서 내 마음을 저당 삼아 날 마음대로 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이러나? 아니면 울며불며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리는 모습이 보고 싶은 걸까? 허세를 부리는 거야, 뭐야? 웃겨, 정말!’차설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성도윤, 당신은 정말 내가 본 사람 중 제일 야박하고, 제일 나르시시즘에 꽉 찬 사람 같아. 여기서 당신을 사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앞으로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지. 굳이 이 야심한 밤에 사람을 불러내서 이런 대화를 하는 것도 참시답지 않네. 사랑했다
“...”차설아는 멍하니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고 꼼짝하지 않고 굳은 채 서 있었다.비록 둘이 하룻밤 잠자리는 했다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가 상상했던 대로 그의 입술은 극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그와의 키스는 너무 간질간질했고 뜨거웠다.갑자기 훅 들어온 성도윤의 애틋한 감정에 휘감긴 그녀는 꽉 쥐었던 손에 힘이 풀렸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몇 분이 흐른 뒤.“자, 이제 끝났어요.”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레스토랑의 불이 다시 켜졌다.차설아도 순간 제정신이 돌아왔고 재수 없는 물건을 피하듯 재빨리 성도윤과 거리를 두고 섰다.‘정신 나간 거야? 당장 이혼할 남편이랑 키스한다는 게 말이 돼?’그녀는 서둘러 손등으로 입술을 닦는 행동을 보였고, 도도하고 고고하신 성대표가 보기엔 어딘가 모르게 기분 나쁜 제스처였다.“뭘 닦기까지 해? 그렇게 몰입하신 분이?”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그녀는 이 수치스럽고 어이없는 상황에 화를 내며 따져 물었다.“도윤 씨,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친 거 아니야?”성도윤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약간은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답했다.“글쎄.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성도윤은 붉게 활짝 핀 장미같이 유혹스러운 그녀의 입술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뚫어지게 보았다.그쯤 카메라를 든 뚱뚱한 남자가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성 대표님, 방금 장면은 너무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찍혔습니다. 마치 환상적인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같이 말입니다. 라이브를 본 네티즌들 반응이 폭발적이에요. 전에 욕하던 건 감쪽같이 사라졌고 하나같이 긍정적인 반응들뿐이고, 댓글 창은 축하 댓글로 도배되었어요. 이번 위기는 라이브 홍보가 제대로 먹혀서 효과가 죽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방금 키스를 너무 오래 딮하게 해서 타임 오버했다는 점에서 일부 누리꾼들이 둘이 쇼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 거 빼
“아니면?”차설아가 뒤돌아섰고, 자기 손목을 잡은 성도윤의 손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뭐, 뺨을 되돌려 주기라고 할 건가?”“...”성도윤은 말없이 우주같이 깊은 눈길로 차갑게 그녀를 쳐다만 보았다.차설아가 되려 성도윤에게 가까이 서서 하얀 얼굴을 그의 눈앞에 갖다 대며 화를 돋우듯이 말했다.“당한 건 반드시 되갚아 준다고 익히 들어 알고 있어. 불쾌하면 나 한 대 쳐.”성도윤은 당연히 손을 대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줬다. 곧, 큰 레스토랑에는 홀연히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성도윤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을 이용만 하려던 건 아니야. 사랑의 장면은 거짓이지만, 미안한 마음은 진짜니까.”눈 부신 불빛 아래에 선 남자는 실루엣마저 잘생기고 완벽했다. 그럼에도 그녀와는 너무 멀고 너무 비현실적이었다.“당신... 지금 나한테 사과하는 건가?”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단 한 번도 성도윤이, 저밖에 없는 안하무인격의 성도윤이 고귀한 자태를 내려놓고 사과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아니, 잘못 들었어.”성도윤은 가볍게 기침 두 번 하며 멋쩍게 부인했다. 그의 차갑고 준수한 얼굴엔 보통 때와는 다른 정서를 담은 채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성대 그룹이 당신의 그 장난질, 라이브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았어. 당신이 만든 일이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아까 쇼에 맞춰 줬으니 내 책임은 다하지 않았어? 당신 이미지까지 챙겨갔잖아. 더 할 게 뭐 있어?”차설아는 자기는 이제 할 만큼 다했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그의 이미지에 똥칠하고도 모자라 엄청 다 뜯어냈을 것이다. 그러기엔 그녀는 착했고 성도윤을 사랑했던 자신의 4년이 애틋했다.“지금 라이브를 본 사람들이 이제 우리 커플 팬이 될 거야. 이혼은 해도 되지만 대외적으로는...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보여줘야 해.”성도윤은 너무도 당당하게 심지어 당연하게 말을 했고 차설아의 사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차설아는 당최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항상 호들갑 떠는 성격인 배경윤이 하는 얘기라 조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성도윤이랑!”배경윤이 큰 소리로 외쳤다.“언니! 만약 정말 성도윤과 그런 거라면, 난 다시 볼 거야. 내가 예전엔 둘의 팬이었다지만 그놈이 언니한테 어떻게 했는데! 헤어지는 마당에 그 인간이랑 잤다는 게 말이 돼?”그녀가 이렇게 흥분한 이유는 단지 자기가 좋아하는 언니가 다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누가. 내가. 그 인간이랑 잤대?”차설아는 어제저녁 방송이 언뜻 생각났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어제는 쇼였어. 키스를 당했고 대가로 그 인간 뺨을 한 대 쳤고.” 성도윤을 후려치고 느낀 쾌감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그 키스는 차설아가 손해 본 것 같지도 않았다.“뺨을 쳤다고? 언니, 대단해!”배경윤은 바로 이어서 얘기했다.“그런데, 그게 둘이 잠자리를 한 이유로는 설명이 안 되잖아. 솔직히 말해. 어제 라이브 끝나고 앞뒤로 집에 간 게, 혹시 같이 간 거야? 설마... 지금 그 인간 거기 있는 건 아니겠지?”“너무 갔다. 브레이크!”차설아는 성도윤과 앞뒤로 집에 돌아온 기억이 전혀 없었다.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배경윤이 보낸 찌라시 기사 캡쳐본을 보고서야 깜짝 놀랐다.기사 사진은 어제저녁 성도윤과 그녀는 놀랍게도 ‘샘천 레지던스’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둘의 투 샷은 아니었지만, 앞뒤 간격이 10분도 안 되는 시간 차였다.‘샘천 레지던스’는 그녀가 현재 묵고 있는 리버 뷰 아파트고, 한 층에 두 가구가 들어사는 대평층이었다. 배경수가 직접 골라서 찾아 준 곳이 바로 여기였고 아무에게도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성도윤이 그녀를 미행했을 거라는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 있을 법했다. “아우, 변태!”차설아는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고 배경윤과의 전화를 끊고 성도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당신이야?”성도윤의 나른한 목소리에서 약간의 의외라는 감정이
“막장 드라마 적당히 좀 봐. 나 요 앞에 4년째 살고 있는데, 미행이라면 당신이 날 미행했다고 봐야지 않겠어?”성도윤이 쌀쌀맞게 말을 하더니 긴 다리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곧장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뭐? 앞... 앞에 산다고?”그러고 보니 맞은편 저택의 문이 한 뼘 열려있는 게 보였다. 차설아는 무안함에 귀를 만지작거렸고 한참 헛발질을 했던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떠올라 민망함이 허를 찔렀다. 따라다닐 의사가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스토커라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는 사실이 혼자 김칫국 한 사발 마신 것 같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성도윤은 날렵한 눈매로 집안을 무심하게 훑어봤고 시선 끝에는 그녀의 침실에 멈춰 섰다.“당신 안방 구조가 나랑 아주 다르네.”성도윤은 그녀의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고 차설아는 서둘러 안방 문 앞에서 막아섰다.차설아는 언뜻 침대 위에 놓인 육아 책이 생각났고, 그걸 성도윤이 본다면 임신 사실이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쏜살같이 움직였다.“안 돼!”“안 되는 나도 안 돼.”성도윤의 캐릭터상 하고 자 하는 일을 꼭 해야 할뿐더러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진짜 안 돼!”차설아는 두 팔을 벌린 채 성도윤이 방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아섰고 때려 막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당신이 뭔데! 나랑 무슨 사이라고 내 침실을 함부로 들어가려 해?”“남편이라는 이유.”키 차이로 인해 성도윤은 아담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그의 깊은 눈매엔 서늘한 기운이 담겼다.“아님, 뭐 딴 남자라도 숨겼어?”“성도윤!!!”차설아는 손에 힘을 다해 주먹을 꽉 쥐었다.‘좋은 말로 할 때 좀 듣지. 거 참 힘쓰 게 만드네.’어차피 그녀의 솜씨면 3할의 공력으로도 성도윤을 회의가 들게 만들 수 있었다.“움직이면, 다 보여.”성도윤은 유유자적하게 또 한 번‘가슴꼴 주의’를 줬다.“아! 미친!”차설아는 급하게 두 팔로 감싸면서 앞을 단단히 단속했다. 성도윤은 큰 장신을 옆으로 비껴가면서 설아의 빈틈을 치고 안
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불쾌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성 대표님, 해킹 거물 바람 님이 그룹 본사에 와 있습니다. 스파크가 누군지 직접 알려드리겠다고, 지금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그래?”성도윤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성대 그룹을 난장판 만들어 놓은 ‘스파크'의 신분을 밝힐 수 있다는 생각에 흥미를 느낀 듯하였다.‘재밌네!’“기다리라고 해. 지금 갈 거니까.”성도윤은 전화를 끊고는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였다. 차갑고 절제된 성도윤의 모습에서 아까의 뜨겁고 정열적인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차설아는 자연스럽게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사실 바람이라는 작자를 일찍부터 만나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던터. 이렇게 제 발로 나타나 주니 그녀로서는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수가 없었다.“도윤 씨, 이제 가?”차설아는 남자의 우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본사에 처리 할 일이 있어.”“같이 가.”성도윤이 뒤돌아서 실눈을 뜨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당신, 또 무슨 꿍꿍이지?”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성도윤은 겉모습은 얌전하고 유순한 그녀, 속은 시커멓고 엉큼한 예비 전처가 어떻게 나올지 가늠하기 어려워 두렵기도 했다.“말을 해도 참... 명성 자자하신 성대 그룹 대표님께서 별거 다 걱정하시네. 여기 해안시에서 당신 앞에서 막 나가는 사람이 어딨다고. 제가 어찌 감히 꿍꿍이가 있겠나요?”차설아는 방실방실 웃으며 성도윤에게 아양을 떨었고, 성도윤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식으로 자세를 취하고 그런 그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차설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여유롭게 겉옷 하나를 집어 들고 얇은 잠옷 위에 걸치며 천천히 말했다.“어젯밤 고민 많이 했어. 당신 얘기대로 그거, 쇼윈도 부부 내가 맞춰 줄게.”“진심?”성도윤은 약간 의외였고 검은 눈동자가 밝아지면서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차설아가 손을 휘이휘이 저으며 말을 막았다.“당신을 위해서도 성씨 집
장윤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긴장한 듯 손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감독님, 무슨 일이에요?”배경윤도 따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읽어내고 궁금한 얼굴로 장윤태를 보았다.“우리 프로그램에 변동이 생길 것 같네요. 원래 계획은 남자 세 명 여자 네 명으로 촬영하려고 했는데 지금 갑자기 합류하게 된 출연자가 있어서 남자 넷, 여자 넷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장윤태는 주먹을 쥐며 책상을 내리쳤다.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어머, 그럼 잘된 일이잖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모두가 짝이 있게 되는 거잖아요! 그럼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소수민은 눈을 깜빡이며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맞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쪽수도 맞아서 누구 한 명 외로워지는 사람은 없잖아요.”다른 출연자들도 맞장구를 쳤다.“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조금 특별한 분이라서요. 그 사람이 오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촬영을 할 수 없을까 봐 조금 걱정이네요.”장윤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대체 누가 투입되기에 촬영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하늘이 다소 건방진 어투로 말했다.“제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이 꽤나 돼요. 대통령이든 세계에 손꼽을만한 재벌이든 전부 만나 대화를 나눠봤죠. 그런데 긴급 투입되는 사람이 누구기에 감독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죠? 말해 보세요. 저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요!”장윤태를 보고 있던 배경윤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그들의 촬영을 방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건... 제가 말하기 어렵네요. 곧 도착한다고 하니 다들 알게 될 거예요.”장윤태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듯 얼굴엔 절망이 가득했다.“자자, 도착하셨다고 하니 다들 기쁘게 환영해주자고요!”별빛 엔터의 홍보팀 팀장이 흥분하며 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그
소식이 퍼지자 인터넷은 며칠 동안 떠들썩했고 팬들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나와 현장 사진을 찍으러 갈 준비를 했다. 소식이 뜨자마자 바로 달려나갈 수 있게.오늘은 원래 진찬영과 배경윤의 계약식이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별빛 엔터테인먼트도 준비 태세를 보였다. 그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소속사 임원진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별빛 엔터의 문턱을 넘는 순간 여기저기서 종이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했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부부를 축하해주는 것처럼 두 사람을 반겼다.“찬영아, 경윤 씨. 이렇게 두 사람이 우리 회사로 온 걸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자자, 거두절미하고 우리 얼른 회의실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하죠!”장윤태 감독은 한시라도 더 빨리 계약하고 싶었기에 두 사람을 바로 회의실로 안내했다.회의실엔 두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이번 연애 프로그램의 또 다른 출연자들이었다.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전부 외모가 빼어나다는 것이다. 길가면 무조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정도로 말이다. “세상에, 진창영 배우님! 정말 잘생기셨어요. 티브이에서도 그렇고 실물도 정말 똑같이 잘생기셨어요!”인기 배우 소수민이 일어나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다른 두 여자 중 한 명은 명문대를 다니는 4학년 장유빈이었고, 남은 한 명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이나였다.두 사람은 열정적인 소수민과 달리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두 눈에 진찬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저기요. 아직 촬영 시작도 안 했거든요? 벌써 그렇게 티를 내시면 어떡해요. 명한 씨, 저희 둘은 들러리가 확정이겠네요!”스포티하게 입은 남자가 단정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운동복 차림의 남자는 지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 선수 하늘이었고 단정한 모습의 남자는 유명한 보험계리사 백호연이었다.“늘이 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러리가 확정이라
배경윤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진찬영을 바라보았다.“찬영 오빠!”그러고는 진찬영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길 맞은편에 서 있는 진찬영은 누구보다도 더 멋있어 보였다. 길을 건너던 배경윤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조심해요!”진찬영은 잔뜩 긴장한 채 달려갔고 배경윤을 와락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를 간신히 피했고 같이 바닥에 넘어졌다. 누가 보아도 애틋한 커플인 것 같았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경윤은 진찬영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전류가 온몸을 뚫고 흐르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은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머쓱하게 웃었다.“찬영 오빠,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까지 다칠 뻔했어요.”배경윤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횡설수설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좋아하는 연예인 앞에서 배경윤은 수줍은 소녀가 된 것 같았다.“내가 길을 건넜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전부 제 탓이에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늘색 셔츠에 카키색 청바지를 입은 진찬영은 특유의 분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타고난 매력이었다.길을 걷고 있어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여자도 진찬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길 건너에서 걸어오는 배경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결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진찬영이었다.“곧 커플로 촬영할 사이인데 편하게 말 놓아도 돼요. 제가 오빠보다 어리잖아요.”진찬영이 진지하게 사과하자 배경윤은 마음이 불편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아, 그러네요. 나의 여자 친구, 앞으로 잘 부탁해요.”진찬영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애틋하게 쳐다보았다. 진찬영의 행동 하나가 배경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흠! 얼른 회사로 가요. 장 감독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말을 마친 배경윤은 뒤돌아
반대로 사도현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배경윤을 쳐다보았다.“급한 일도 없잖아.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커피나 마시면 얼마나 좋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해.”“사도현, 너는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바빠.”배경윤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사도현이 끌어당기면 질질 끌려갔고 기세로 사도현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뻔뻔스러운 사도현을 어쩌지 못하기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할 일이 없겠어? 너를 만나는 게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야.”사도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배경윤을 바라보았다.“이 멍청한 놈!”배경윤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욕했다. 사도현이 능글맞은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사도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듣기로는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결정했다더라? 진찬영이랑 커플로 연기하는 대본도 받았지?”“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아니야.”배경윤이 부정하자 사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나랑 찬영 오빠는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커플이야. 그런 대본 따위 필요 없어.”“배경윤!”사도현은 배경윤의 도발에 휘말린 듯한 느낌을 받아서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사도현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왜? 내가 기뻐하니까 오히려 화가 나?”배경윤은 늘 싸움에서 기세에 눌렸지만 사도현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이번에 드디어 이기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배경윤은 신이 나서 환하게 웃었다.“내가 화가 나서 쓰러져야 네 속이 시원하지? 그런 거야?”사도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커플이라면 싸울 때도 있을 거야. 작은 다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이건 상대의 마음에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야.”“이게 커플 사이에 싸우는 거로 보여?”배경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피식 웃었다.“내가 네 여자 친구라는 거야, 아니면
“누가 네 전 여자 친구라는 거야? 나는 너랑 모르는 사이야. 친한 척하지 마!”배경윤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사도현한테 아주 실망했기에 다정하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경윤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자던 사이였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모르는 사이야.”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부러 장난을 쳤다. 배경윤이 차갑게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놀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고는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다 잊어버려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게. 내가 몇 번이고 너한테 말해주면 되거든.”“뭐, 뭐 어떻게 말해줄 건데?”배경윤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사도현을 피하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나의 전 여자 친구는 내가 벽에 밀치고 키스하는 걸 제일 좋아했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알려줄 수도 있어.”사도현은 천천히 배경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배경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사도현,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민망해서 사도현의 뺨을 후려갈기려고 했다. 이때 사도현이 배경윤의 손목을 잡더니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이제는 우리가 친한 사이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어?”“나는...”배경윤은 거칠게 뛰는 심장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인정할 수 없어.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야.”“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잖아.”사도현은 배경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끝으로 배경윤의 코를 쓰다듬었다.배경윤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도현이 미웠지만 제일 미운 건 자신이었다. 사도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우스웠다.사도현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배경윤은 반격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배경윤은 사랑의 싸움에서 사도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도현이 잡아당기면 끌려가고 밀
차설아는 해바라기 꽃을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옛 친구가 보낸 선물이야.”“어느 친구가 보낸 거야? 너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구라면 내가 아는 사람일 텐데 말이야.”배경윤은 해바라기 꽃의 내음을 맡으면서 싱글벙글 웃었다.“네가 아는 사람이야.”차설아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갑자기 불안해 난 선우시원이 그 꽃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급히 물었다.“설마 나도 아는 사람이야?”“네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어.”차설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선우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럼 적어도 성도윤은 아니라는 거네? 누가 꽃을 보냈는지 몰라도 참 좋은 친구인 것 같아. 성도윤만 아니면 돼.”“왜 성도윤만 아니면 된다는 건데?”차설아는 선우시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성도윤이 보낸 것이 아니라면 누가 보냈든 상관없어. 나의 라이벌은 성도윤 한 명뿐이잖아.”차설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총명해 보였던 선우시원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해서 의외였다.만약 선우시원이 밤마다 성도윤이 찾아와서 차설아한테 디저트를 먹여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댈 것이다.“누가 보낸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설아가 좋아하는 꽃을 보냈으니 좋은 사람 같아.”배경윤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차설아를 관심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이 전생에 차설아의 엄마였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내 얘기는 그만하고 네 얘기나 해줘. 어떻게 되었어?”차설아는 배경윤이 걱정되어 계속해서 물었다.“그 사람이랑 화해한 거야? 나 때문에 괜히 너도 그 사람이랑 싸운 건 아니지?”“내가 그놈이랑 싸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야.”배경윤은 다른 사람의 말을 할 때면 신이 났다가 자신의 감정사를 얘기하려고 하면 잔뜩 긴장했다. 배경윤은 말을 버벅거렸다.“나는
일주일 뒤, 병원에서 정밀 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차설아의 허리가 심하게 다친 건 맞지만 치료를 제때 받고 푹 쉬어서 생각보다 빨리 나았다. 그러기에 반신불수가 될 거라는 의심을 거두어도 되었다.그 소식을 알게 된 뭇사람들은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복 받은 사람들은 내가 딱 알아본다고 했잖아. 우리 설아가 복 받아서 빨리 나은 거야.”배경윤은 차설아를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배경윤은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경윤이 다친 줄 알 것이다.“앞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운동은 절대 하면 안 돼! 암벽 등반, 등산은 절대 안 되고 계단을 오를 때는 꼭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해.”차성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 한 번 큰 사고를 당했기에 차설아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더 신경 쓰고 싶었다.“성철 형,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붙어있으면서 스파크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게요.”선우시원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면서 사뭇 엄숙하게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 달 정도 입원하면 거의 다 나을 거래. 병실에만 있어서 답답하겠지만 참아. 오빠가 병원에 퇴원 신청을 하면 예정일보다 더 빨리 퇴원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간병인을 미리 알아보았으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차성철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울상을 지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나는 병원에 있는 게 좋아. VIP 병실이라 편하게 지낼 수 있잖아. 미리 퇴원 신청을 하지 않아도 돼. 귀찮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설아야, 너를 위해서라면 귀찮은 일도 다 해줄 수 있어. 너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퇴원 예정일을 앞당기는 건 복잡한 절차도 아니야.”차성철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오빠가 다 해놓을 테니 그날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자. 설아야, 오빠 믿지?”“아...”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차설아가
사실 차성철은 최근 들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차설아의 병실에 긴급 신고 버튼을 설치해 주었다. 버튼만 누르면 병원의 긴급 벨이 울리면서 차성철이 배치한 보디가드가 병실로 달려올 것이다.차설아는 성도윤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 차성철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성도윤을 향한 마음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선을 지키지 못했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떠보다가 결국 그 선을 넘어왔다.“나는 그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행복할 뿐이야. 그래서 당신의 입도 닦아준 건데 싫으면 얘기해. 내일 밤부터 다시 오지 않을게. 케이크를 사던 가게의 파티시에를 스카우트해서 매일 케이크를 만들게 했지만 이제는 필요 없겠지...”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을 이었다.“내일 메뉴는 헤이즐넛 케이크라고 했어. 아쉽지만...”“잠시만요!”차설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차설아가 제일 기대하던 메뉴가 바로 헤이즐넛 케이크였기에 성도윤을 내쫓을 수 없었다.“파티시에도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어떻게 함부로 자르겠어요. 내일도 와주면 고맙겠지만 앞으로는 뭐가 묻어도 도와주지 말아요. 손은 멀쩡하니까 내가 직접 닦을게요.”“그래. 당신이 이토록 애원하니 한 번 고려해 볼게.”성도윤은 피식 웃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눈빛은 여우처럼 교활하기 그지없었다.“휴...”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후회하기 시작했다. 성도윤은 예전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차설아를 부드럽게 다가가면 마음을 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맛있는 케이크로 경계심을 무너뜨렸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 되어갈 때쯤 차설아는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성도윤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의 성과는 그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다.“이제는 병실로 돌아갈 테니 푹 쉬어. 내일 밤에도 올 테니까 기다려. 잘자.”차설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했다. 머릿속은 두 사람이 뜨겁게 키스를 퍼붓던 화면으로 가득 차서 얼굴이 화끈
차설아는 병실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에 성도윤이 늦은 밤에 가져다주는 야식이 유일한 낙이었다. 차설아는 누워서 입을 벌리고 성도윤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애틋한 커플 같아서 오글거렸지만 케이크를 먹기 위해 꾹 참았다.“역시 다크 초콜릿 케이크는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이런 맛을...”크림과 초콜릿이 조화를 이루어서 입안에 가득 퍼졌다. 차설아는 케이크를 먹으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내일도 가져올 테니까 천천히 먹어. 체하면 어쩌려고 그래.”성도윤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하면서 허겁지겁 먹는 차설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먹다가 의도치 않게 성도윤의 손가락을 물게 되었다.긴 손가락이 차설아의 입에 들어가자 성도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했고 닭살이 돋았다.“어머.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급하게 먹다보니...”차설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면서 성도윤한테 사과했다.“더 먹을래?”성도윤은 뜨거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아, 아니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차설아는 민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성도윤을 쳐다볼 수가 없었고 더 이상 케이크를 먹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숨을 기세였다.“안 먹으면 입부터 닦아. 다 묻히고 먹었잖아.”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차설아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설아의 입가에 크림이 묻어있었는데 그 모습은 음식을 몰래 훔쳐먹은 고양이 같아서 더 귀여웠다.“그럼 티슈 좀 주세요. 입에 묻은 줄도 몰랐어요.”차설아는 혀로 입가를 날름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성도윤은 내가 며칠 굶은 줄 알겠어. 아, 손가락까지 물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왜 그랬지?’“그럴 필요 없어.”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뭐가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티슈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뜻이야.”“왜요? 다 썼어요?”“아니. 내가 닦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