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차설아가 정식으로 천수 하우스를 떠나는 날이다.이렇게 빨리 이사를 가는 이유는 맞은 편에 사는 전 남편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입주를 앞둔 곳은 그녀가 4년 내내 바라던 꿈의 집이기 때문이다.그곳은 바로 차씨 가문의 저택이다!4년 전, 가문이 파산하고 화려한 3층짜리 별장도 법원에 압류되어 경매에 부쳐졌다.하지만 차설아의 부모가 투신하여 사망하면서, 이 집은 외부인에게 흉가가 되었다. 경매 가격이 이미 시장 가격보다 훨씬 낮았지만 아무도 감히 사지 않으려 했다.며칠 전, 법원은 또 한 번 경매를 진행했다.차설아는 망설이지 않고 2억 원의 가격으로 낙찰받았다.그녀가 이사한다는 소식은 배경수와 배경윤만 알고 있었다. 두 남매는 일찍부터 집들이를 하겠다고 소란을 피웠고, 배경윤은 신비한 친구까지 데려오겠다고 했다.차설아도 여러 해 동안 황폐해진 집이 시끌벅적하기를 바라며 흔쾌히 승낙했다.천수 하우스에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짐이 별로 없어 화물차 한 대로 충분했다.떠나기 전에 차설아는 맞은편 문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지금쯤 성도윤은 침대에 누워 임채원과 알콩달콩 결혼 문제를 상의하고 있겠지.그녀가 이사한다는 사실도 어쩌면 그 남자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차설아는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내저으며, 빨리 머리에서 성도윤의 생각을 떨쳐내려했다.끝났다. 모든 것이 끝났다!앞으로 두 사람은 두 개의 평행선이다. 사업상의 라이벌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교점도 없고, 교점이 있어서도 안 된다.차는 번화한 시내를 지나 서쪽 외곽의 한적한 곳에 이르렀다.해안시에는 ‘남쪽이 북쪽보다 부유하고 서쪽이 동쪽보다 고귀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그래서 예로부터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이었다.예를 들어, 권세가 높은 관리거나, 학계의 거물급 인물, 혹은 조상 3대가 황친국척인 귀족 인사들. 오히려 부를 추구하는 재벌들은 여기에 잘 살지 않았다.차설아의 할아버지는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대장군이고,
녹슨 철책의 핀은 누군가에 의해 뽑혔고, 정원에 있는 잡초도 밟힌 흔적이 있는 것 같았고, 젖은 흙에는 깊고 옅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분명 누군가가 미리 집에 왔다는 것을 설명한다. 발자국은 안으로 들어가는 방향만 있고 나오는 방향은 없었다.즉, 누군가 아직 집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뒤에서 이삿짐 아저씨는 차설아의 짐을 문 앞에 두고 땀을 닦으며 말했다.“아가씨, 물건은 모두 여기에 둘게요. 전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게요... 여긴 너무 음산해요.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빨리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세요.”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아저씨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아저씨, 모두들 이 집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아세요?”아저씨는 침을 삼키고 겁에 질린 얼굴로 집을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못 들어봤어요? 집주인 부부가 투신해서 죽었는데 망혼이 떠나지 않아서 이 집은 귀신 나오는 흉가가 되었어요.”“주인 부부가 투신해 죽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귀신이 나온다는 건 실제 증거가없는 헛소문 아닌가요?”“아니에요, 절대로 헛소문 아니에요.”아저씨는 손을 흔들며 딱 잘라 말했다.“많은 사람들이 직접 봤어요. 전에 내가 이 근처에 왔을 때도 한 번 봤어요!”“여주인이 한밤중이 되면 흰 옷을 입고 창문을 서성거리고, 울음소리는 밤하늘에 퍼지고, 아주 괴이했다니까요!”“내 팔자가 좋으니 망정이죠. 게다가 내가 돈이 궁핍하지 않았다면 오늘 안 왔어요!”말을 마친 아저씨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더니, 발바닥에 기름을 바른 듯 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차설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아가씨, 나 먼저 가요. 몸 조심해요!”차설아는 아저씨의 말에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기대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밤중에 목격한 ‘흰옷 여자’가 오늘 밤에도 나타날까?차설아는 짐에서 야구 방망이를 꺼내 철책을 밀어젖히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살던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구석구석 하나에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차설아
검은 캐주얼 차림의 멋진 남자가 위층에서 내려왔다.“바람?”차설아는 놀라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다.지난번에 바람은 자비를 베풀어 성도윤의 앞에서 차설아의 스파크 신분을 폭로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사라졌었다.차설아는 그가 미국으로 간 줄 알았었다. 어쨌든 그곳은 바람의 본거지이니 말이다.그런데 갑자기 차설아의 집에 나타나 부지런하게 청소부 역할을 했으니, 차설아는 그의 목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바람은 계단 중앙으로 와서 차설아를 내려다보며 사악하게 웃었다.“오전 내내 청소를 했더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이러다 병이라도 나면 네가 책임져.”“콜록!”차설아는 난처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소문만 무성하고 지능이 하늘을 찌르는 해커계의 거물이 원래 이렇게 느끼한 사람이었나?“됐어, 까불지 말고 얼른 내려와!”배경수는 바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쌀쌀맞게 말했다.“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래? 못된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누가 알아. 내 동생이 굳이 널 데려오지 않았다면, 널 이 집안 근처에 발도 못 붙이게 했어.”“못된 꿍꿍이라!”바람은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고 비웃은 표정으로 배경수를 바라보았다.“경수 도련님은 스파크 주위에서 몇 년이나 공을 들였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으려나?”“내가 너랑 같아? 난 보스의 동생이야. 우리는 생사를 같이 한 사이라고!”“그럼 내가 한 수 위네...”바람은 턱을 치켜들고 완벽한 턱선을 드러내며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나랑 스파크는 해커계의 ‘환상의 커플’이야. 우리는 소울메이트라고. 알기는 해?”“퉷!”배경수는 평소 멋지고 잘생긴 재벌남의 모습을 접고 유치한 표정을 지었다.“소울 메이트는 무슨. 넌 영혼이라는 게 있긴 하고? 보스의 거룩한 영혼에 어울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지. 지금 스파크는 혼자의 몸이 되었으니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는 평등해. 네가 자격이 있다면 나도 있는 것이고, 내가 어림없다면, 너도 가망이 없는 거야!”두 남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어리둥절해하며 각자의 휴대전화를 확인했다.곧 귀신을 본 듯한 배경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헐, 대박. 내가 지금 뭘 잘못 본 거야? 실시간 검색어 1위가 설마 쓰레기 성도윤이랑 언니야?”차설아와 배경수도 실검 내용에 충격을 받고 휴대전화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검색어 1위, 3위, 5위, 10위가 모두 성도윤과 차설아에 관한 내용이었다.“대박! 성도윤이 무릎 꿇고 전처에게 울면서 매달리는 영상 유출!”“짝사랑의 아픔이라니!”“성 대표도 여자에게 매달리는데 평범한 남자들이 결혼자금이나 따지고 있으니!”“성도윤의 절절한 구애 1화!”모든 검색어를 클릭하면, 성도윤이 차설아에게 끈질기게 매달리면서 가지 말라고 하는 동영상이 있었다. 진심 어린 구애를 아주 코믹하게 하고 있어 확실히... 어메이징했다.네티즌들은 열띤 토론을 펼쳤고, 동영상을 유령과 동물의 각종 패러디로 만들어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하하하, 하하하!”배경수와 배경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보스, 이 동영상 진짜야? 아니면 합성이야? 너무 웃기잖아!”“그 냉혈한 빙산 성도윤이 이렇게 비굴해지다니! 너무 통쾌해!”“아무리 잘난체하면 뭐 해.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이 비굴한 모습을 다 봤는데. 아주 절실한 사랑이야, 내가 졌어!”차설아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공개 처형당한 것 같아 이내 두 사람의 휴대전화를 빼앗았다.“보지 마. 술주정 부리고 있는 거야. 술만 먹으면 누구나 끌어 안는대!”“하지만 언니 이름을 부르고 있잖아. 진짜 언니를 놓지 못하고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배경윤은 눈을 반짝였다. 새드엔딩으로 끝난 커플에게 다시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관심이 확 생겼다.“불가능해!”차설아는 이성적으로 말했다.“그냥 게임에서 져서 나한테 복수하는 것뿐이야.”“너희 아무것도 못 본 척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인간 복수심이 얼마나 강한데. 너희들 보복당할지도 몰라.”두려워할 리 없는 배경수는 웃으며 말했다
밤이 되자, 차설아의 강력한 요구에 배경수 등 세 명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별장을 떠났다.떠나기 전, 배경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설아의 손을 잡고 거듭 확인했다.“언니, 이렇게 큰 집에 진짜 혼자 괜찮겠어? 들어보니까... 저녁이 되면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안 무서워?”“바보, 아무리 이상한 일이라고 해도 난 안 무서워. 여기는 내 집이고, 그 사람들도 내 가족이니까 날 해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안심하고 떠나라고 했다.귀신은 무섭지가 않았다. 차설아는 가장 무서운 사람의 인심을 경험했었고, 그것은 귀신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세 사람이 떠나자, 떠들썩하던 방은 즉시 조용해졌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우울한 분위기가 났다.차설아는 오히려 편안하고 자유로웠다.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마치고, 유리 꽃병에 물을 가득 받아 배경윤이 선물한 해바라기 꽃을 넣어 침실 머리맡에 두었다.4년 동안 별장의 외관은 많이 쇠퇴했지만, 내부는 그녀가 떠날 때와 똑같았다.이 모든 것이 긴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꿈에서 깨어나면 할아버지, 아빠, 엄마가 모두 살아계시고.그들은 침대 옆에 앉아 ‘우리 설아 공주’라고 부드럽게 부르고, 해가 중천에 떴다고 빨리 일어나라고 할 것이다.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차설아는 한때 가장 좋아했던 작은 침대에 누워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어느새 잠이 들었다.어렴풋이 안방에서, 즉 부모님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한 여자가 울고 웃는 듯한 목소리였다. 적막한 밤에 매우 음산하고 처량하게 들려왔다.처음에 차설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피곤해서 환청이 들린 줄 알았다.처량한 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 텅 빈 방에서 침실 문을 통해 그녀의 귓가에 흘러들었다.“흑흑흑, 너무 비참하게 죽었어. 누가 나 좀 구해줘. 너무 아파...”“하하하, 너무 심심해. 누가 좀 내려와서 같이 놀아 줘. 땅속은 너무 추워...”이 소리는 전혀
“설아 아가씨, 혹시 설아 아가씨예요?”음산하고 쉰 목소리는, 설레는 말투로 차설아를 향해 끊임없이 다가갔다.차설아는 제대로 놀라, 두 손을 흔들며 크게 소리쳤다.“경고하는데 나한테서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내 팔자가 얼마나 단단한 줄 알아! 나한테 함부로 한다면 도사를 찾아가서 너를 거두어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 거야!”“무서워하지 마세요, 아가씨, 저예요. 늘 제 옆에 붙어 계셨잖아요. 민이 이모예요.”뼈만 앙상한 ‘여자 귀신’은 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목을 잡아 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검고 긴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넘겨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였다.“민이... 이모?”차설아는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여자 귀신’의 얼굴을 보고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차설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이모, 어떻게, 어떻게 지금까지...”민이 이모는 차설아 집의 집사이자, 어릴 때부터 차설아를 키운 유모였다.어떻게 보면 차설아의 엄마보다 더 친한 관계였다.차씨 가문이 파산한 후, 부모님은 투신하여 자살했고, 수많은 빚쟁이가 집에 찾아왔다. 민이 이모는 끝까지 집을 지키려다가, 한 패거리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난장소에 던져졌다.물론 이런 소식은 차설아가 성가에 시집와서 들은 것이다.그녀가 차가로 돌아갔을 때,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차설아는 난장소에 달려가 사흘 밤낮을 뒤졌지만, 이모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차설아는 돌아가서 몸살이 났다. 거의 보름 동안 흐리멍덩해서 잠만 잤고, 입에서 온갖 귀신에 홀린 듯한 말을 했다.그때부터 소영금은 차설아를 불길한 사람이라며, 주위 사람에게 불운을 가져오는 재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차설아는 언젠가 민이 이모의 복수를 하리라 다짐했다.최근에 마침 민이 이모를 때려죽인 몇몇 사람을 찾아내 손을 쓸 생각이었다.설마 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진심을 느끼고 신통력을 발휘한 것일까?“아가씨, 겁먹지 마세요. 전 귀신이 아니에요. 보세요. 체온이 있잖아요.”민이 이모는 차설
“그때, 선생님과 사모님이 떠나시고, 어르신도 떠나시고, 아가씨도 성가로 시집을 가니 집안이 텅텅 비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별장에 눈독을 들였죠. 물건을 옮겨가는 사람, 부수는 사람, 특히 어떤 사람들은 바닥의 타일까지 뜯어서 가져갈 기세였죠.”“전 목숨을 걸고 아가씨를 대신해 이 집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러다 맞기도 하고, 보복을 당하기도 하면서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어요. 마지막에 온 몇 명의 독한 사람들은 아예 숨이 넘어갈 정도로 때리고, 내가 정신을 잃으니 난장소에 끌고 가 묻어버렸죠.”이 말을 들은 차설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이모, 너무 고생하셨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모를 다치게 한 자들을 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아가씨, 화내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다시 아가씨를 보게 된 것만으로 충분해요.”모녀만큼 깊은 정을 나눈 두 사람은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지난 4년 동안의 서러움을 모두 쏟아냈다.“그런데 어떻게 탈출했어요?”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며 궁금해서 물었다.“운이 좋았어요. 어느 착한 분이 절 시체로 가득 쌓인 진흙 구덩이에서 꺼내주었고, 그 덕에 목숨을 부지했어요.”민이 이모는 과거를 회상하며, 공허한 두 눈에는 깊은 두려움과 고마움이 가득했다.“절 구해준 그 분은 신분이 범상치 않았어요. 어떤 큰 인물의 부탁을 받았다고 했고, 저보고 해안을 떠나라고 했어요.”“신비로운 큰 인물이요?”차설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누가 이렇게 선심을 베풀었는지 짐작하려했다.그 당시 차씨 가문은 완전히 나락했고, 전 세계인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누가 그때 선뜻 도움을 줄 수 있을까?“저도 잘 모르겠어요. 생명의 은인에게 꼭 보답하고 싶은데 말이에요.”“혹시 도윤 도련님이 아닐까요? 그때 차씨 가문을 나서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건 성가네 뿐이었어요. 그리고 아가씨가 그 집안에 시집을 갔고, 저는 아가씨의 유모이고, 그러니 아가씨를 위해 절 구한 게 아닐까요?”“불가능해요!”차설
민이 이모는 말을 마치고, 서둘러 지하실에서 4년 동안 간직해 온 유서가 담긴 낡은 상자를 가져왔다.“아가씨, 이 유서는 사모님께서 임종 직전 저에게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약 아가씨의 결혼생활이 행복하다면 절대 이걸 보여서는 안 되고, 이혼하면 이 유서를 전하라고 하셨어요.”민이 이모는 정중하게 봉투에 담긴 유서를 차설아에게 건네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사모님이 투신하기 전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사모님의 유일한 걱정은 차설아였다. 차설아가 성도윤과 결혼해서 행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하지만 이 결혼이 4년 만에 깨질 줄은 누가 알았을까?차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봉투를 바라보니 ‘설아 아가에게’라고 적혀 있었다.그 누구도 모사할 수 없는 어머니의 글씨였다.눈물이 핑 돌며 시야가 흐려졌다.4년 전, 부모님이 투신했을 때 차설아는 실험실에 웅크리고 앉아 다양한 행성에서 전자파의 작동 속도를 연구하고 있었다.과학 천재로서 그녀는 데이터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 한 달 이상 실험실 문을 나서지 않았으며 외부와 연락하지 않았다.가족들은 줄곧 그녀의 연구를 지지해 왔으며, 실험을 할 때 방해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마침내 실험에 성공하여 이 기쁨을 부모님에게 나누려고 했을 때, 들려온 건 집안의 파산과 부모님의 비보였다.그때, 차설아는 가문의 사람이 미웠다. 자신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난 부모님이 더욱 미웠다.그녀는 복수를 원했고,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내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하더니, 성도윤과 결혼시켰다.4년 동안, 그녀는 말없이 갑자기 떠나 버린 부모님 때문에 고통에 빠졌다. 심지어 일부러 그들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가문의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엄마 아빠는 말없이 절 떠난 게 아니었네요. 내가 너무 어리석고, 고집스러워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요!”차설아는 울면서 봉투를 뜯었다.유서는 몇십 자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 자 한 자 차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