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배경윤은 씩씩거리면서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배경윤은 20 몇 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렇게 억울하고 답답한 적은 처음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뜨겁게 타오르다가도 식는 것이 사랑이구나.’배경윤이 밀어서 언덕에서 떨어졌다고 주장하는 윤설 곁에 사도현이 늘 함께했다. 배경윤은 차성철에 관한 얘기를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윤설의 상태가 나아지면 다시 얘기를 해보면서 그 사건의 배후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했다.그래서 배경윤은 마을에서 지냈고 윤설이 가는 곳마다 따라서 갔다. 윤설의 부상으로 인해 예능 >은 촬영이 중단되었고 고정 멤버들은 마당에 모여 앉아 불만을 토로했다. 감독 장윤태는 연못가에 앉아서 한숨만 내쉬는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혹시라도 안 좋은 마음이라도 먹을까 봐 말을 걸었다.“배경윤 씨, 촬영할 때 원래 이러저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거든요. 저는 배경윤 씨가 일부러 윤설 씨를 민 게 아니라고 믿고 있으니 자책하지 말아요. 그 영상은 공개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티즌의 질타를 받을 일이 없도록 제가 책임질게요.”장윤태는 자연스럽게 배경윤 곁에 앉았다.“제가 자책한다고요?”배경윤은 장윤태를 힐끗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저는 자책한 적 없는데요? 제가 밀었다는 듯이 거짓말하는 여자랑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남자 때문에 속상해한 적도 없어요. 그리고 저는 악플이든 질타든 두렵지 않아요. 예전에 좋아하는 연예인 팬덤 내부에서 말싸움이 벌어졌을 때 제가 결국 이겼고 팬클럽 회장 자리를 이어받았거든요. 그런데 그깟 네티즌의 질타를 두려워할 것 같아요?”배경윤의 말에 장윤태가 껄껄 웃었다.“여전히 씩씩한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요. 배경윤 씨가 계속 연못을 바라보고 있어서 뛰어내릴까 봐 조마조마하더군요.”“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아니라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이곳에 던져버리고 싶거든요. 연못에 물고기가 꽤 많더라고요?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었다.“아, 아니에요. 지금은 서로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난 사이가 된 것 같아요.”장윤태는 배경윤과 사도현이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했기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배경윤 씨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요. 혹시 연예계에 진출할 생각은 없어요? 연예인이 되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텐데요.”“연예계에 진출하라고요?”“네. 이 프로그램의 고정 멤버로 출연하면서 데뷔하는 거죠. 한 회차로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감독 장윤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예능을 통해 배경윤이 인기를 얻는다면 사도현에게 잘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장윤태는 오랫동안 예능을 촬영하면서 슬럼프에 빠졌기에 배경윤처럼 독특한 캐릭터를 이용해서 시청률을 높인다면 감독으로서 더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인기를 얻어서 뭘 한다는 거죠?”배경윤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윤태한테 물었다.“명예와 돈을 얻을 수 있고 누군가가 배경윤 씨를 일부러 비하하면 팬들이 나서서 보호해 줄 거예요. 그리고 배경윤 씨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직접 만날 수도 있는데, 이것보다 좋은 일이 어딨겠어요!”장윤태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배경윤을 설득하려고 안간힘을 썼다.“제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직접 만날 수 있다고요?”배경윤의 두 눈이 반짝였다. 배경윤은 예전부터 팬 활동에만 전념하던 열정적인 팬이었다. 하지만 사도현을 만난 뒤로 팬 활동을 할 시간이 줄어들면서 잠시 관심을 끄게 되었다. 사도현과 이미 멀어진 지금, 팬 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던 것이다. “당연하죠. 제가 이래 봬도 연예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저희 프로그램 고정 멤버로 출연하신다면 배경윤 씨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섭외할게요. 지금 당장 전화 걸 테니까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배경윤 씨가 좋아하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저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장윤태의 말에 배경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상상의 나래에 빠졌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힐끔 쳐다
“진찬영과 감독님은 각별한 사이인 것 같아요. 진찬영은 잘생기기도 했지만 인성도 좋고 연기가 일품이라 안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늘 겸손하기에 제가 오랫동안 좋아한 배우예요.”배경윤은 말하면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사도현, 너만 첫사랑을 못 잊은 줄 알아? 나도 첫사랑을 여전히 잊지 못했거든!’“장 감독님, 혹시 진찬영한테 연락할 수 있나요? 듣기로는 진찬영이 연예계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다더라고요.”배경윤이 장윤태한테 물었다. 사실 처음부터 장윤태한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진찬영을 존경한다는 말에 곧바로 흥미가 생겼다. 배경윤은 장윤태와 내적 친밀감이 생겨서인지 장윤태와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졌다.“당연하죠. 배경윤 씨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제가 사실 찬영이를 살려준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연락해서 부탁하면 한 회차 정도는 촬영하러 올 거예요.”장윤태가 턱을 살짝 쳐들고는 자랑스럽게 말했다.연예계에서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관건적인 순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었다. “예전에 제가 영화감독을 맡았을 때 특별 출연으로 찬영이가 왔거든요. 잠수해야 하는 장면인데 찬영이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소화했어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물에 뛰어들었다가 몇 분이 지나도 올라오지 않는 거예요. 저는 찬영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그대로 뛰어 들어가서 구해냈어요. 그래서 찬영이랑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온 거고요.”“설마 >를 촬영할 때 있었던 사고 말하는 거예요? 장 감독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진찬영의 목숨뿐만 아니라 진찬영의 팬들을 살려준 거나 마찬가지예요!”배경윤은 그 당시 전국을 뒤흔들었던 기사를 회억했다. 누군가가 거짓 제보를 했다고 믿었지만 장윤태의 말을 들어보니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배경윤은 진찬영과 장윤태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만약 제가 찬영이를 섭외한다면 저희 프로그램 고정 멤버로 출연해 줄 건가요?”장윤태는 배경윤을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모두 제가 윤설을 다치게 했다고 믿으면서 저를 피하고 있어요. 저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기 어려울 것 같아요.”오전에 몇몇 게스트의 질타를 받은 배경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람에 돛을 다는 게스트들은 사도현이 윤설 곁에서 맴돌자 윤설을 찾아가서 아부를 떨었다. 게스트들이 배경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이 상황에 섣불리 출연했다가는 카메라 앞에서 게스트들과 싸우게 될 수도 있었다. “여러 명이 지내다 보면 싸울 수도 있는 거죠. 누군가가 선을 넘으면 배경윤 씨 성격대로 대처하세요. 싸워도 상관없으니 편하게 촬영하면 돼요. 저는 앞뒤 다른 사람을 제일 싫어하거든요.”장윤태가 배경윤을 고정 멤버로 확정한 것은 배경윤이 솔직하고 털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예능에 출연한 다른 연예인들은 카메라가 켜졌을 때와 꺼졌을 때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 예능은 점점 구설수에 오른 연예인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작용을 하게 되어 시청자들의 반감을 샀다. 장윤태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제작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 출연 계약서에 사인했다. 앞으로 몇 회차 동안 고정 멤버로 출연하게 될 것이다.배경윤에게는 손해 볼 것 없는 결정이었다. 윤설은 다 낫고 나서 촬영하기 때문에 나을 때까지 촬영지에 머무를 것이다. 그러면 배경윤은 윤설과 얘기를 나눌 시간이 많아졌고 차설아와 차성철을 위해 진실을 캐낼 수 있었다.두 날 후, 윤설은 깁스한 채로 마을 병원에서 다시 촬영 현장으로 돌아왔다. 사도현은 두 날 동안 윤설을 보살펴주고는 직접 부축하면서 마당으로 들어왔다. 배경윤은 마당에 있는 해먹에 누워서 쏟아지는 햇볕을 만끽하며 미소를 지었다. 계속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사도현이 윤설을 부축하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표정이 일그러졌다.“윤설 씨, 드디어 돌아왔군요! 윤설 씨와 사 대표님이 없는 동안 분위기가 얼마나 안
배경윤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내가 매일 울면서 윤설 앞에 무릎이라도 꿇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아니면 억울하다고 이곳에서 내 목이라도 그을까?”“그럴 필요 없어.”사도현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적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지는 말았어야지. 이곳 사람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 같아?”사도현은 모든 게스트가 윤설을 맞이하면서 안부를 물을 때, 배경윤이 진심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먼저 다가가서 인사해야 한다고 여겼다. 모두 배경윤 때문에 촬영이 미루어졌다고 생각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더 큰 미움을 살 것이다.“나랑 상관없으니까 비켜. 난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보든지!”말을 마친 배경윤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얼굴 위로 덮고는 해먹에 누워 다리를 꼰 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재수 없어 보일 수는 있지만 윤설처럼 앞뒤 다르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드는 사람한테는 재수 없게 구는 게 맞아!’윤설은 매니저의 부축을 받아 뒷마당으로 걸어갔고 사도현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도현 씨, 배경윤 씨가 쉬고 있으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요. 저는 배경윤 씨를 용서했다고 여러 번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우연히 일어난 일 때문에 배경윤 씨를 자꾸 비난하지 말아요.”누가 들어도 윤설은 아량이 넓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자들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던 사도현도 윤설이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도현은 배경윤을 내려다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윤설이 착하니까 널 봐준 거야. 고마운 줄 알아.”“흥!”배경윤은 콧방귀를 뀌었다. 윤설의 얕은수에 사도현이 넘어갈 줄 몰랐던 것이다. 이때 감독 장윤태가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찬영아, 벌써 다 왔다고?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내가 마중 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정말 고마워!”“진찬영 씨가 온 걸까?”배경윤은 장윤태의 목소리를 듣고는 얼굴에 덮은 책을 내팽개치더니 재빨리 일어났다. 그러고는 앞을 막고 있는 사도현과 윤설을 뒤로 하고 장윤
장윤태가 경운기 뒷좌석의 난간을 붙잡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도현을 향해 외쳤다.“사 대표님, 꽉 잡지 않으면 튕겨 나갈 수도 있어요! 길이 험해서 잘 잡고 있으세요.”사도현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때문인지 오늘따라 사도현이 더 멋져 보였다. 깔끔하던 회사 대표가 아닌 야생적인 남자의 모습이었다.“진찬영이 누구죠?”사도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장윤태한테 물었다.“사 대표님, 진찬영은 연예계에서 유명한 남자 배우예요. 연기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겸손하거든요. 예능에 출연하는 배우는 아니라서 잘 모를 수도 있어요.”장윤태는 거칠게 부는 바람을 견뎌내면서 사도현을 향해 외쳤다.“남자 배우라고요?”사도현은 남자라는 말에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계속해서 물었다.“몇 살인데요? 어떻게 생겼어요? 어떤 스타일인데요?”“아마 사 대표님보다 세 살 정도 어릴 거예요. 너무 잘생겨서 어릴 때부터 연예인 할 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대요. 언뜻 보기에는 차갑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에요. 진찬영이 겸손하기도 하고 조용하게 지냈지만 진찬영한테 푹 빠진 사람이 엄청 많아요. 배경윤 씨도 진찬영의 팬이라기에 제가 섭외했거든요. 그럼 배경윤 씨도 고정 멤버로 몇 회차 출연하겠다고 했어요.”장윤태는 점점 어두워지는 사도현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배경윤은 운전에 집중했고 경운기 특유의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차에서 내렸다. 장윤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배경윤 씨, 어디 가세요?”“들꽃이 너무 예뻐서 따다가 우리 진찬영 씨한테 주려고요.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 선물도 없이 만나러 가겠어요.”배경윤은 말하면서 허리를 굽혀 길가에 예쁘게 핀 들꽃을 하나둘 꺾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들꽃은 햇볕 아래에서 유난히 빛났다. 이때 사도현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차갑게 말했다.“꽃을 마음대로 꺾으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이렇게 생각이 없
진찬영은 배경윤 앞으로 걸어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혹시 장 감독님이 얘기하신 배경윤 씨인가요? 독특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아, 네! 저 맞아요.”배경윤은 고개를 들고 맑은 호숫가를 담은 듯한 진찬영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멍하니 바라보면서 넋을 잃었다.‘역시 찬영 오빠는 잘생겼어. 어떻게 사람이 조각보다 더 각진 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겼다고! 신이 공을 들여 만든 사람이 바로 찬영 오빠일까?’배경윤이 진찬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찬영은 먼저 손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겨우 진찬영의 손을 잡았다. 진찬영의 손은 차가웠지만 배경윤의 손에 땀이 흥건해서 어쩐지 낯부끄러웠다. 손을 잡는 순간, 배경윤은 이곳이 천국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앞으로 일주일 동안 손을 씻지 말아야겠어!’“잘, 잘 부탁드려요!”배경윤은 잔뜩 긴장한 채 말하더니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건넸다.“이건 제가 길가에서 꺾은 들꽃인데 찬영 오빠한테 드릴게요. 들꽃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저의 마음을 담았어요.”“들꽃이라고요?”진찬영은 꽃다발을 건네받고 천천히 냄새를 맡아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주인공을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빛이 났다.“많은 꽃다발을 선물 받았었지만 이런 들꽃은 처음이라 기뻐요. 이렇게 예쁜 들꽃을 선물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마음 소중히 간직할게요.”“괜, 괜찮아요! 마음에 든다면 매일 산에 올라가서 들꽃을 따다 줄게요!”배경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헤프게 웃었다. 경운기 뒤에 앉은 사도현은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째려보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화가 난 사도현은 곁에 앉아 있는 장윤태를 향해 말했다.“진찬영인지 진천영인지 겸손하다면서요? 그런 놈이 나처럼 여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보다 더 능숙하게 여자를 유
배경윤은 고개를 돌려 사도현을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비가 와서 바닥에 물이 고였던데 그거나 핥아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사도현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강아지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았다. 화가 난 사도현은 경운기에서 뛰어내렸고 배경윤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두 사람은 함께 매점으로 들어갔고 배경윤은 진찬영을 위해 비싼 생수를 찾고 있었다.“제일 좋고 비싼 물로 주세요. 제일 좋은 걸로요!”배경윤은 진찬영이 평소에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기름과 설탕이 들어간 음식을 적게 먹고 깨끗하고 고급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물만 마셨다. 하지만 마을 매점에는 일반 생수밖에 없었기에 비싼 생수를 살 수 없었다.배경윤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5만 원짜리를 여러 장 꺼내면서 말했다.“이 돈으로 비싼 생수를 주문해 주세요. 저의 오빠가 그런 생수만 마시거든요.”사도현은 매점의 진열대에 기대고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말했다.“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비싸고 말고 할 게 뭐 있다고 그래? 다 같은 거 아니야?”“네가 뭘 안다고 그래!”배경윤은 사도현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생수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야. 어떤 생수는 살짝 단맛이 맴돌아서 마실 때마다 기분이 좋지만 어떤 생수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악취만 나서 입도 대기 싫거든.”배경윤은 분명 생수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얼핏 들으면 나쁜 남자를 악취 나는 생수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사도현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넌 아직도 참 순진하구나? 물도 겉면만 보면 안 되지만 사람은 더더욱 그래. 아까 그 진춘영인지 진찬영인지 하는 놈도 말이야! 겸손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한 사람이라고? 내가 보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너처럼 재벌가에서 자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유혹해서 사기 치려는 거야. 넌 또 바보처럼 웃으면서 좋아하더라. 그럴 거면 차라리 네 재산을 아예 다 주지 그래?”“사도현, 찬영 오빠는 내가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이야. 그러니까 함부로 찬영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
배경윤은 윤설이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은 차설아 친오빠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윤설의 의도를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내 방으로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은 앞장서서 사도현과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은 윤설을 방까지 부축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윤설은 울퉁불퉁한 방바닥, 구멍이 난 천장과 낡아서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침대를 보면서 말문이 막혔다.윤설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현 씨랑 이런 방에서 같이 지낸 거예요?”“네. 침대도 푹신하고 공기가 좋아서 잘 잤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배경윤은 윤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줄 몰랐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윤설 곁을 지켰다.‘이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서 도현 씨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도현 씨는 결벽증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지 못했을 거라고요.”“쓰레기 소각장이라고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방이 아니면 외양간에서 소랑 같이 자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꽤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윤설 씨가 결벽증인 것 같아요.”“도현 씨가 배경윤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네요. 배경윤 씨를 위해서 이런 누추한 방에서 자고 더러운 진흙으로 들어가 배경윤 씨를 안아 들다니... 내가 배경윤 씨를 얕잡아 봤네요.”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배경윤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본론만 얘기하세요. 배후가 누구기에 성형외과 의사한테 전화하게 된 거죠?”“말해도 배경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걸요?”윤설은 차갑게 웃더니 거만한 눈빛을 하고서 배경윤을 훑어보았다. 배경윤이 목을 치려고 하는 배후는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배후가 누구인
게스트들은 사도현의 표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불을 피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 같은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가 불을 피운다고?”그러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장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불을 피우다니, 네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방에서 나오는 게 도움이 되겠어.”배경윤은 불을 피우고 진찬영이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몹시 당황했다.‘사도현은 왜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야! 찬영 오빠랑 같이 경운기를 타려고 할 때, 찬영 오빠랑 미꾸라지를 잡을 때, 찬영 오빠랑 같이 요리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만 하잖아. 명색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 피우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아니면 여자가 옆에 있어야 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잖아.”사도현은 팔짱을 낀 채 진찬영을 쳐다보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사도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도현은 일부러 진찬영을 저격했다.“너 자꾸 함부로 말할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팬으로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여우 같은 놈, 여자가 없으면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괜찮아요.”진찬영이 피식 웃더니 배경윤의 팔목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배경윤 씨가 옆에서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혼자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던데요?”진찬영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도현 씨께서 불을 잘 피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죠. 다들 쉬고 계세요.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진찬영과 사도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