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윤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내가 매일 울면서 윤설 앞에 무릎이라도 꿇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아니면 억울하다고 이곳에서 내 목이라도 그을까?”“그럴 필요 없어.”사도현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적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지는 말았어야지. 이곳 사람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 같아?”사도현은 모든 게스트가 윤설을 맞이하면서 안부를 물을 때, 배경윤이 진심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먼저 다가가서 인사해야 한다고 여겼다. 모두 배경윤 때문에 촬영이 미루어졌다고 생각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더 큰 미움을 살 것이다.“나랑 상관없으니까 비켜. 난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보든지!”말을 마친 배경윤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얼굴 위로 덮고는 해먹에 누워 다리를 꼰 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재수 없어 보일 수는 있지만 윤설처럼 앞뒤 다르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드는 사람한테는 재수 없게 구는 게 맞아!’윤설은 매니저의 부축을 받아 뒷마당으로 걸어갔고 사도현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도현 씨, 배경윤 씨가 쉬고 있으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요. 저는 배경윤 씨를 용서했다고 여러 번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우연히 일어난 일 때문에 배경윤 씨를 자꾸 비난하지 말아요.”누가 들어도 윤설은 아량이 넓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자들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던 사도현도 윤설이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도현은 배경윤을 내려다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윤설이 착하니까 널 봐준 거야. 고마운 줄 알아.”“흥!”배경윤은 콧방귀를 뀌었다. 윤설의 얕은수에 사도현이 넘어갈 줄 몰랐던 것이다. 이때 감독 장윤태가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찬영아, 벌써 다 왔다고?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내가 마중 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정말 고마워!”“진찬영 씨가 온 걸까?”배경윤은 장윤태의 목소리를 듣고는 얼굴에 덮은 책을 내팽개치더니 재빨리 일어났다. 그러고는 앞을 막고 있는 사도현과 윤설을 뒤로 하고 장윤
장윤태가 경운기 뒷좌석의 난간을 붙잡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도현을 향해 외쳤다.“사 대표님, 꽉 잡지 않으면 튕겨 나갈 수도 있어요! 길이 험해서 잘 잡고 있으세요.”사도현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때문인지 오늘따라 사도현이 더 멋져 보였다. 깔끔하던 회사 대표가 아닌 야생적인 남자의 모습이었다.“진찬영이 누구죠?”사도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장윤태한테 물었다.“사 대표님, 진찬영은 연예계에서 유명한 남자 배우예요. 연기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겸손하거든요. 예능에 출연하는 배우는 아니라서 잘 모를 수도 있어요.”장윤태는 거칠게 부는 바람을 견뎌내면서 사도현을 향해 외쳤다.“남자 배우라고요?”사도현은 남자라는 말에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계속해서 물었다.“몇 살인데요? 어떻게 생겼어요? 어떤 스타일인데요?”“아마 사 대표님보다 세 살 정도 어릴 거예요. 너무 잘생겨서 어릴 때부터 연예인 할 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대요. 언뜻 보기에는 차갑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에요. 진찬영이 겸손하기도 하고 조용하게 지냈지만 진찬영한테 푹 빠진 사람이 엄청 많아요. 배경윤 씨도 진찬영의 팬이라기에 제가 섭외했거든요. 그럼 배경윤 씨도 고정 멤버로 몇 회차 출연하겠다고 했어요.”장윤태는 점점 어두워지는 사도현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배경윤은 운전에 집중했고 경운기 특유의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차에서 내렸다. 장윤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배경윤 씨, 어디 가세요?”“들꽃이 너무 예뻐서 따다가 우리 진찬영 씨한테 주려고요.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 선물도 없이 만나러 가겠어요.”배경윤은 말하면서 허리를 굽혀 길가에 예쁘게 핀 들꽃을 하나둘 꺾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들꽃은 햇볕 아래에서 유난히 빛났다. 이때 사도현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차갑게 말했다.“꽃을 마음대로 꺾으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이렇게 생각이 없
진찬영은 배경윤 앞으로 걸어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혹시 장 감독님이 얘기하신 배경윤 씨인가요? 독특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아, 네! 저 맞아요.”배경윤은 고개를 들고 맑은 호숫가를 담은 듯한 진찬영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멍하니 바라보면서 넋을 잃었다.‘역시 찬영 오빠는 잘생겼어. 어떻게 사람이 조각보다 더 각진 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겼다고! 신이 공을 들여 만든 사람이 바로 찬영 오빠일까?’배경윤이 진찬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찬영은 먼저 손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겨우 진찬영의 손을 잡았다. 진찬영의 손은 차가웠지만 배경윤의 손에 땀이 흥건해서 어쩐지 낯부끄러웠다. 손을 잡는 순간, 배경윤은 이곳이 천국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앞으로 일주일 동안 손을 씻지 말아야겠어!’“잘, 잘 부탁드려요!”배경윤은 잔뜩 긴장한 채 말하더니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건넸다.“이건 제가 길가에서 꺾은 들꽃인데 찬영 오빠한테 드릴게요. 들꽃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저의 마음을 담았어요.”“들꽃이라고요?”진찬영은 꽃다발을 건네받고 천천히 냄새를 맡아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주인공을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빛이 났다.“많은 꽃다발을 선물 받았었지만 이런 들꽃은 처음이라 기뻐요. 이렇게 예쁜 들꽃을 선물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마음 소중히 간직할게요.”“괜, 괜찮아요! 마음에 든다면 매일 산에 올라가서 들꽃을 따다 줄게요!”배경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헤프게 웃었다. 경운기 뒤에 앉은 사도현은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째려보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화가 난 사도현은 곁에 앉아 있는 장윤태를 향해 말했다.“진찬영인지 진천영인지 겸손하다면서요? 그런 놈이 나처럼 여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보다 더 능숙하게 여자를 유
배경윤은 고개를 돌려 사도현을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비가 와서 바닥에 물이 고였던데 그거나 핥아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사도현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강아지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았다. 화가 난 사도현은 경운기에서 뛰어내렸고 배경윤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두 사람은 함께 매점으로 들어갔고 배경윤은 진찬영을 위해 비싼 생수를 찾고 있었다.“제일 좋고 비싼 물로 주세요. 제일 좋은 걸로요!”배경윤은 진찬영이 평소에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기름과 설탕이 들어간 음식을 적게 먹고 깨끗하고 고급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물만 마셨다. 하지만 마을 매점에는 일반 생수밖에 없었기에 비싼 생수를 살 수 없었다.배경윤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5만 원짜리를 여러 장 꺼내면서 말했다.“이 돈으로 비싼 생수를 주문해 주세요. 저의 오빠가 그런 생수만 마시거든요.”사도현은 매점의 진열대에 기대고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말했다.“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비싸고 말고 할 게 뭐 있다고 그래? 다 같은 거 아니야?”“네가 뭘 안다고 그래!”배경윤은 사도현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생수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야. 어떤 생수는 살짝 단맛이 맴돌아서 마실 때마다 기분이 좋지만 어떤 생수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악취만 나서 입도 대기 싫거든.”배경윤은 분명 생수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얼핏 들으면 나쁜 남자를 악취 나는 생수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사도현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넌 아직도 참 순진하구나? 물도 겉면만 보면 안 되지만 사람은 더더욱 그래. 아까 그 진춘영인지 진찬영인지 하는 놈도 말이야! 겸손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한 사람이라고? 내가 보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너처럼 재벌가에서 자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유혹해서 사기 치려는 거야. 넌 또 바보처럼 웃으면서 좋아하더라. 그럴 거면 차라리 네 재산을 아예 다 주지 그래?”“사도현, 찬영 오빠는 내가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이야. 그러니까 함부로 찬영
차에 오른 배경윤은 경운기에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에는 두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가 남아있었고 운전석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배경윤은 조심스럽게 진찬영한테 말을 걸었다.“찬영 오빠, 혹시 괜찮다면 제 옆에 앉을래요? 저 운전 잘해서 차가 뒤집어질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오늘 아침에 씻어서 머리에서 냄새도 안 나요!”진찬영은 배경윤의 말에 웃더니 배경윤이 사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햇볕 아래 진찬영은 더욱 빛났고 머리를 뒤로 넘기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차가 뒤집어져도 괜찮으니 편하게 운전해요.”“차가 뒤집어지면 안 되죠!”사도현은 진찬영을 뒤로 하고 운전석에 앉으면서 말했다.“진찬영 씨는 얼굴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인데 위험한 자리에 앉으면 안 되지. 난 얼굴이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여기 앉아도 돼.”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내 옆에 앉았다는 건 각오했다는 뜻이지?”진찬영은 배경윤과 사도현을 번갈아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사도현 씨가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 저는 뒤에 앉을게요.”“진찬영 씨는 눈치도 빠르네요.”사도현은 진찬영을 째려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진찬영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사도현을 쳐다보더니 도발했다.“어차피 앞으로 배경윤 씨랑 계속 같이 앉을 텐데요.”장윤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눈치를 보았다.“경, 경운기 조수석에 제가 타도 될 것 같은데요. 바람도 쐬고 좋죠!”한 사람은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는 회사 대표이고 한 사람은 연예계 톱스타였기에 일개 예능 감독인 장윤태는 두 사람한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난 허락한 적 없는데요?”사도현은 장윤태를 째려보면서 조수석이 아닌 황위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진찬영은 장윤태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윤태 형, 왜 사서 고생이에요?”“그러게 말이야. 괜히 나섰다가 눈치만 보게 되었네.”장윤태는 뒷좌석에 올라타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진찬영이 온다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같이 녹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이참에 진찬영한테 잘 보여서...”“잘 보여도 소용없어요. 진찬영이 얼마나 차갑게 구는지 몰라서 그래요? 가까이 다가갔다가 기세에 눌려서 말도 못 꺼낸다니까요.”게스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진찬영과 장윤태가 경운기에서 내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역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사람이라 그런지 정말 멋지네요. 어떻게 경운기에서 내리는 모습까지 멋있을 수 있죠? 너무 완벽하잖아요.”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걸그룹 리더 민지가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진찬영 씨, 이곳에 온 걸 환영해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어요. 제가 짐을 들어드릴게요!”민지가 진찬영의 가방을 들어주려고 하자 진찬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죄송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이 저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게 싫어서요.”“아, 죄송해요...”민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얼음 왕자 같은 사람이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거절하는 모습도 멋져!’배경윤은 경운기를 주차하고는 차에서 내렸고 진찬영이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달려갔다.“찬영 오빠, 손님으로 오셨는데 가방까지 들게 할 수는 없죠. 이리 줘요! 저 보기보다 힘세거든요.”“고마워요. 가방이 무거워서 괜히 미안하네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하면서 배경윤에게 가방을 건넸다. 그러고는 미소를 짓더니 배경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모습을 본 여자 연예인들은 질투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다른 사람이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게 싫다면서 왜 저 여자한테는 가방을 주는 거야!”민지는 씩씩거리면서 배경윤을 노려보았다. 이때 사도현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저런 컨셉인 걸 어떡해요?”“아, 사 대표님. 안녕하세요.”민지는 사도현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환하게 웃었다.‘진찬영은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사 대표님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으니
배경윤은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진찬영을 바라보았다. 진찬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찬영 오빠가 그걸 어떻게...”배경윤은 처음 만난 진찬영이 어떻게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는지 궁금했다.“내가 어떻게 배경윤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냐고 묻고 싶은 거죠?”진찬영이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이래 봬도 배우인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배경윤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찬영 오빠한테 계속 못난 모습만 보이는 것 같네요. 오빠가 보기에도 제가 참 바보 같죠?”“그렇지 않아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배경윤 씨는 내가 여태껏 봐왔던 연예인들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착하고 배려심 깊은 배경윤 씨가 연예인들보다 더 멋져요. 그러니까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고 아껴주세요.”배경윤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한테 위로받자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고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찬영 오빠, 정말 고마워요. 집구경을 시켜줄 테니 잘 따라와요.”배경윤은 이 집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앞장서서 진찬영에게 집구경을 시켜주었다. “여기가 주방이에요. 주로 이곳에서 요리하거든요. 그리고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외양간인데 이 암소 콩순이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안 돼요. 아, 이곳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인데 심심하면 해먹에 누워서 책을 볼 수도 있어요. 맞은 편에 있는 연못 안에 미꾸라지가 많다고 들었어요. 다음에 제가 가득 잡아서 맛있는 요리를 해드릴게요.”진찬영은 배경윤의 뒤를 따라가면서 두리번거렸다. 그저 은인인 장윤태한테 보답하기 위해 출연하려고 했지만 정작 촬영 장소에 와보니 흥미가 생겼다.“미꾸라지를 잡는다고요?”진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지금 잡을래요?”“지금요?”“네!”“찬영 오빠, 미꾸라지 잡을 줄 알아요? 진흙이 오빠의 옷이거나 머리에 묻을 수도 있거든요. 정말 괜찮겠어요?”“여기까지 온 마당에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추어탕을 만들어 먹어도 좋겠네요. 그래요! 오
사도현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연못 안에서 재밌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다들 재밌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배경윤 씨랑 진찬영 씨는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고 했지만 오래 사귄 커플처럼 죽이 척척 맞네요. 진찬영 씨가 생각보다 털털하고 친절해서 신기해요. 남자들이 배경윤 씨만 유독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네요.”윤설은 사도현이 노려보는 쪽을 쳐다보면서 일부러 부채질했다.“경윤이가 매력 있는 여자라서 그래.”침묵하던 사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윤설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렇게 주시하고 있지 않았겠지.”윤설은 당황하더니 말을 버벅거렸다.“그, 그게 무슨...”“내 말이 틀렸어? 입만 열면 배경윤이 누구랑 어울리고 누구랑 친하게 지낸다는 말뿐이었잖아. 결국 네 입으로 네가 배경윤을 감시한다는 것을 밝힌 셈이지. 아니면 너도 배경윤한테 반해서 관심받고 싶은 거야? 이제는 여자랑 만날 생각인가 봐?”“도현 씨, 설마 방금 제가 장난 좀 친 것 갖고 이러는 건가요?”윤설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저는 사실만 말했을 뿐이에요. 배경윤 씨랑 진찬영 씨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요. 두 사람이 커플 같다는 말에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저한테 화풀이하지 마세요. 계속 저를 따라올 필요도 없고요.”“내가 언제 너를 따라왔다고 그래?”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난 처음부터 널 따라온 게 아니야. 진흙이 싫어서 들어가지 않은 거니까 네 멋대로 생각하지 마.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너랑 상관없거든.”“도현 씨!”윤설은 사도현이 쌀쌀맞게 대답하자 화가 솟구쳐 올랐지만 곧바로 무기력해졌다. 아무리 속이고 유혹해도 사도현은 예전처럼 윤설을 애틋하게 바라보지 않았다.연못 안에서 미꾸라지를 잡던 게스트들은 사도현과 윤설을 쳐다보면서 수군거렸다.“사 대표님은 어쩜 이렇게 다정할까요? 윤설 씨를 지켜주는 수호
“꼬마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당장 돌아가.”키가 훤칠한 보디가드는 무기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원이를 노려보았다. 소영금은 병실과 엘리베이터 앞, 병원 내부 곳곳에 보디가드를 배정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원이는 순리롭게 병원 내부로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이 저의 보호자예요. 얼른 만나게 해주세요.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원이는 덩치가 몇십 배 더 큰 보디가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네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감히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님을 만나려고 해? 꼬마야, 장난칠 거면 집으로 돌아가.”보디가드는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더니 말을 이었다.“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대표님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보디가드는 어느 가문에서 성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는 원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어떤 무기를 갖고 왔는지 당장 말해! 내놓으란 말이야! 이번에는 독약인가?”“이것 좀 놓으세요. 나를 괴롭힌 걸 엄마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 손 놓으라고요.”원이는 허공에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하던 원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성도윤이 원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줄 수도 있어. 그 입 당장 다물어! 어린놈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보디가드는 다른 환자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원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보디가드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꼬맹이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우스운 모습을 보였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하지만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쌀쌀해진 날씨와 빨리 지는 해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산책로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그런 길을 원이를 데리고 걷던 서은아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꼬맹이, 넌 왜 혼자 온 거야? 엄마는? 너 혼자 나가는 데 걱정도 안 해?”“엄마가 사라져서 엄마 좀 찾아달라고 유전학적 아빠 찾아온 거예요.”성도윤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도 차설아가 성진의 별장에 있다는 걸 알아낸 원이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먼 산까지 가서 엄마를 데려오는 건 비현실적일 것 같아 자신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성도윤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온 것이다.“그런데 네 엄마 아빠는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네 아빠가 엄마를 찾아줄 이유는 없는데 자꾸 이런 일로 아빠 귀찮게 하면...”“당신이 뭔데 의무가 있다 없다 에요,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쪽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네 아빠랑 무슨 사인지 너도 잘 알잖아.”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원이를 내려다보던 서은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난 네 아빠랑 곧 결혼할 사람이야. 네 아빠는 네 엄마를 버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상관없는 사람이야?”“내연녀라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아줌마 입으로도 직접 말했잖아요, 곧 결혼할 사이라고. 그럼 아직은 상관없는 사람 맞네요.”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사리로 서은아를 상대한 원이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물론 원이도 제 엄마를 버린 아빠를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연녀 앞에서만은 밀릴 수가 없었다.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이상, 엄마에 관한 일을 책임질 사람은 여전히 아빠였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데... 네 엄마는 너무 바보 같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널 혼자 내보냈으니 말이야.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의 마음인데, 오늘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내가 친절히 가르쳐줄게.”말을 마친 서은아는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원이의 어깨를 잡고 그를
잘생긴 원이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간호사는 성도윤과 묘하게 닮은듯한 이목구비에 가십거리를 알아낸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 너 대표님 아들이지?! 엄청 똑같게 생겼다!”성도윤의 아들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던 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어른 같은 말투로 말했다.“저는 그분 아들이 아니에요. 그분도 제 아빠가 아니시고요. 그냥 유전자로 엮여있는 것뿐이에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빠는 세상에 없잖아요?”“어...”원이의 말에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씨 집안에서 보내온 영양제를 잔뜩 챙겨 들고 성도윤을 보러 온 서은아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성도윤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가 차설아를 기억해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전혀 없었기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금이 앞뒤로 경호원만 열댓 명을 붙여놓은 탓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간호사와 얘기 중이던 원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제야 방법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꼬마야, 너 나 알아?”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은아를 힐끗 본 원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알죠, 내 유전학적 아빠한테 들러붙는 여우 아줌마잖아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서은아는 주먹만 꼭 쥐며 말했다.“날 안다니 다행이네, 그럼 잘됐다. 너 아빠 보러 가고 싶은 거지? 아줌마랑 같이 가자.”“싫어요.”똑똑한 원이는 서은아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우 아줌마는 나 갖다 팔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서 떨어져요!”그 말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공공장소라 안간힘을 쓰며 참아냈다.“간호사 누나, 나 빨리 유전학적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서은아에게 한마디 하고 난 원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그래, 나 따라와 아가야.”그런데
드디어 한시름 놓은 차설아가 묻자 달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야 오빠가 괜히 어른들 걱정시킨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걱정할 걸 알았으면 혼자 나가질 말았어야지.”차설아는 화낼 새도 없이 김정민을 향해 말했다.“이모, 얼른 원이한테 연락해서 어딨는지 물어봐 줘요.”“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위치추적은 돼요?”“워치가 꺼져있어서 그것도 안 돼요.”“괜찮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노트북 좀 줘보세요.”달이랑 원이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차설아는 전에 아이들의 워치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둔 적이 있었다. 그건 핸드폰이 꺼졌거나 배터리가 없을 때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어플이었기에 차설아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지막 로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화면에 원이 위치가 뜰 텐데, 보여요?”“내, 보여요!”눈을 감고도 키보드를 치는 차설아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 김정민은 다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지금... 재원 병원에 있다고 나오는데요?”“병원이요?”원이의 코딩기술 정도라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쯤 성진의 별장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차설아는 뜬금없는 위치에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가... 재원 병원까지 간 거지?---한편 재원 병원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병원 이름을 읽어보던 원이는 틀림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작지만 당찬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지나치던 간호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야, 너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원이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혹시 성도윤이라는 환자분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는지 아세요?”“성 대표님 찾아온 거야?”간호사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알려주었다.“그럼 사람 잘 찾았네. 대표님 며칠 전에 뇌수술 마치고 입원해계신 데 내가 담당
“오빠는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민이 이모가 오빠 걱정된다고 아까 찾으러 나갔어요.”제 오빠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달이는 차분하게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달이한테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천재였기에 그녀는 오빠가 매일 같이 나가도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뭐? 또 어디 간 거야?”하지만 엄마인 차설아는 잠깐이라도 한눈만 팔면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가버리는 원이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가서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정민이 집으로 들어왔다.“아가씨, 오셨어요? 원이 도련님이 또 집을 나가셨어요! 어떡해요?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어딨는지도 모르겠고...”밥을 하는 사이에 나가버린 원이 때문에 김정민은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원이가 나가기 전에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요즘 이상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별말은 하지 않고 그냥 몰래 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가 영상통화 안 해준다고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다면서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저는 그냥 애니메이션 보고하는 말인 줄 알고 별로 신경을 안 썼었고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차설아 김정민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다.“다 제 불찰이에요. 원이 도련님은 지능이 남달라서 보통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됐던 건데... 구하러 간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손을 휘적이며 김정민에게로 다가간 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이모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모두를 걱정시켰어요.”차설아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아가씨, 이 밤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계세요?”“그냥 산 타다가 눈을 좀 다쳐서 시력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 가봤는데
“어릴 때부터 지내던 곳이라 이곳 구조는 이미 몸에 익었어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걱정 마요.”자신이 정말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또 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그럼 조심하세요.”“네, 이제 그만 가봐요.”현이를 향해 손을 저어주던 차설아는 그녀가 떠났음을 확인하고서야 난간을 더듬으며 현관문을 찾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전부터 감지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차설아는 현이에게 한 말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집안으로 정확히 걸어가 문을 열고 오랜만에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높이 외쳐봤다.“원아, 달아!”“엄마!”차설아의 부름에 2층에 있던 달이는 서둘러 1층으로 뛰어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엄마! 왜 이제야 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자신에게 애교를 부려오는 예쁜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차설아는 웃으며 물었다.“엄마 없을 때 떼 안 쓰고 잘 있었어?”“당연하죠. 나 이제 은하수 어떻게 그리는지도 아는데, 얼른 가요! 내가 보여줄게요!”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달이는 엄마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나서 방방 뛰며 차설아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차설아는 몇 번이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서도 달이를 놀래키지 않으려 힘겹게 아이의 방까지 걸어갔다.발 빠르게 며칠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꺼내온 달이는 칭찬을 바라는듯한 얼굴로 환히 웃어 보였다.“엄마, 이거 내가 그린 은하수예요. 반고흐 할아버지 거랑 비슷하죠? 오빠는 내가 그린 게 더 예쁘다고도 했어요!”“예쁘지, 너무 예쁘다. 우리 달이는 진짜 그림 천잰가 봐.”아무것도 볼 수 없던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도, 아이들이 그린 거, 만든 거 그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점차 저릿해졌다.“엄마는 저녁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색깔도 여러 개 섞어놨는데,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잘 안 보이지 않아요?”천진난만
박서영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약을 받아 마신 성진은 눈이 아픔에도 박서영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그렇게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던 성진이 쓰러질 때, 박서영은 수화기 너머의 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현아, 빨리 차설아 씨 모셔와!”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눈을 푹 쉬게 하라는 의미에서 수면제의 효과도 같이 내는 약이었는데 그래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떠나기 전 성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던 차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박서영이 때마침 성진에게 약을 건넨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차설아가 박서영을 향해 물었다.“어때요? 시력은 회복한 거예요? 배척반응은 없고요?”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선글라스를 낀 탓인지 차설아는 전보다도 더 도도해 보여 전혀 실명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쓸수록 현이와 박서영은 점점 더 마음이 아팠고 그들의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회복은 잘 됐는데 오랜만에 눈을 뜨는 거라 눈이 아플 수는 있대요...”침대에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성진을 보던 박서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 똑똑하셔서 눈만 보고도 차설아 씨 눈이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아요. 저한테 당장 대학생 찾아오라고 하셔서 급한 대로 일단 약부터 먹인 거예요. 이 약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경을 쳤을 거예요.”“그건 내가 미리 대처하라고 했었잖아요. 나랑 눈 비슷한 대학생 찾아두라고. 아직 못 찾은 거예요?”“아니요, 찾긴 찾았는데... 그러면 또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아예...”박서영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앞으로 도련님더러 차설아 씨를 보살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역시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진이 성격은 서영 씨가 나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가 눈을 준 걸 알게 되
하지만 성진은 차분하고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두 눈이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너무나도 달라 적응이 되지 않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너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뭐 하니? 귀까지 이식해줘야겠어?”“금방 깨어난 애한테 그만 좀 해요. 애가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기만 할 거예요?”그때 아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단사란이 성진을 나무라는 성주원을 말리며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갓 깨어난 아들과 몇 마디 나누던 그녀는 성진이 쉴 수 있게 사람들을 데리고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마침내 조용해진 주위에 박서영은 조심스레 성진에게로 다가가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세요? 눈은 안 아프세요? 힘드시면 얼른 누워서 쉬세요.”“거울 줘.”“네?”“거울 달라고.”한층 어두워진 표정에 무거운 말투까지 더해지자 박서영은 잔뜩 긴장한 채로 큰 거울 하나를 성진에게 건넸다.거울을 받아든 성진은 빠르게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봤는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이 눈...”자신이 출구도 찾지 못하고 빠져서 허우적대던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눈이 제 얼굴에 박혀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오랜만에 본인 모습을 보는 거라 익숙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그건 다 정상적인 반응이라고...”한숨을 쉬던 성진은 박서영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물었다.“나한테 눈 기증해줬다던 그 여대생 어딨어, 내가 지금 봐야겠어.”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두 눈이 그녀의 눈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성진은 제 생각인지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서영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도련님, 그 여대생은 이미 해안시를 떠나서 지금 찾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뭐가 힘든데.”“지금 어딨는지만 알아내.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다면 내가 가면 되니까. 바로 차 준비하라고 이르고.”“그... 그게...”강압적인 성진의 태도에 박서영은 어찌할 줄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
이튿날, 성진이 다시 눈을 뜨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그의 부모님과 박서영을 비롯한 성대 그룹의 이사진들이 그의 방안에 빼곡히 둘러서 있었다.“이제 붕대 풀 건데 준비되셨어요?”“네.”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진지하게 묻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그에게 있어서 눈을 뜬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았기에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더 흥분하고 있었다.성진의 동의를 구하고 붕대를 풀던 의사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었다.“오랜만에 빛을 보는 거라 처음에는 눈이 아프고 시야도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다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강한 빛은 막아주는 안경을 따로 맞춰뒀으니까 계속 끼고 계시면 도움 될 거에요.”의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지막 한 겹 남았던 붕대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마침내 성진은 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진아, 어때? 우리 보여?”“네, 엄마. 엄마가 보여요 이제.”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봐서 그런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은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만방자한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제 아들의 변화를 눈치챈 성주원은 의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아들이 눈을 뜬 것뿐인데 왜 성격도 바뀐 것 같죠? 다 큰 성인이 엄마를 보고 울리기나 하고, 전혀 남자답지 않잖아요 지금은!”“이것도 정상입니다...”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성주원에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도련님이 기증받으신 게 여성분의 눈이라서 여성 특유의 세포나 DNA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쉽게 공감하시는 걸 겁니다.”“어쩐지 저 눈은 우리 아들 눈빛이 아닌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증자를 좀 더 골라볼 걸, 성도윤 그 자식이랑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하는 사내자식 눈이 저래서 어떡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