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태가 경운기 뒷좌석의 난간을 붙잡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도현을 향해 외쳤다.“사 대표님, 꽉 잡지 않으면 튕겨 나갈 수도 있어요! 길이 험해서 잘 잡고 있으세요.”사도현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때문인지 오늘따라 사도현이 더 멋져 보였다. 깔끔하던 회사 대표가 아닌 야생적인 남자의 모습이었다.“진찬영이 누구죠?”사도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장윤태한테 물었다.“사 대표님, 진찬영은 연예계에서 유명한 남자 배우예요. 연기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겸손하거든요. 예능에 출연하는 배우는 아니라서 잘 모를 수도 있어요.”장윤태는 거칠게 부는 바람을 견뎌내면서 사도현을 향해 외쳤다.“남자 배우라고요?”사도현은 남자라는 말에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계속해서 물었다.“몇 살인데요? 어떻게 생겼어요? 어떤 스타일인데요?”“아마 사 대표님보다 세 살 정도 어릴 거예요. 너무 잘생겨서 어릴 때부터 연예인 할 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대요. 언뜻 보기에는 차갑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에요. 진찬영이 겸손하기도 하고 조용하게 지냈지만 진찬영한테 푹 빠진 사람이 엄청 많아요. 배경윤 씨도 진찬영의 팬이라기에 제가 섭외했거든요. 그럼 배경윤 씨도 고정 멤버로 몇 회차 출연하겠다고 했어요.”장윤태는 점점 어두워지는 사도현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배경윤은 운전에 집중했고 경운기 특유의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차에서 내렸다. 장윤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배경윤 씨, 어디 가세요?”“들꽃이 너무 예뻐서 따다가 우리 진찬영 씨한테 주려고요.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 선물도 없이 만나러 가겠어요.”배경윤은 말하면서 허리를 굽혀 길가에 예쁘게 핀 들꽃을 하나둘 꺾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들꽃은 햇볕 아래에서 유난히 빛났다. 이때 사도현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차갑게 말했다.“꽃을 마음대로 꺾으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이렇게 생각이 없
진찬영은 배경윤 앞으로 걸어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혹시 장 감독님이 얘기하신 배경윤 씨인가요? 독특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아, 네! 저 맞아요.”배경윤은 고개를 들고 맑은 호숫가를 담은 듯한 진찬영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멍하니 바라보면서 넋을 잃었다.‘역시 찬영 오빠는 잘생겼어. 어떻게 사람이 조각보다 더 각진 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겼다고! 신이 공을 들여 만든 사람이 바로 찬영 오빠일까?’배경윤이 진찬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찬영은 먼저 손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겨우 진찬영의 손을 잡았다. 진찬영의 손은 차가웠지만 배경윤의 손에 땀이 흥건해서 어쩐지 낯부끄러웠다. 손을 잡는 순간, 배경윤은 이곳이 천국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앞으로 일주일 동안 손을 씻지 말아야겠어!’“잘, 잘 부탁드려요!”배경윤은 잔뜩 긴장한 채 말하더니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건넸다.“이건 제가 길가에서 꺾은 들꽃인데 찬영 오빠한테 드릴게요. 들꽃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저의 마음을 담았어요.”“들꽃이라고요?”진찬영은 꽃다발을 건네받고 천천히 냄새를 맡아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주인공을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빛이 났다.“많은 꽃다발을 선물 받았었지만 이런 들꽃은 처음이라 기뻐요. 이렇게 예쁜 들꽃을 선물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마음 소중히 간직할게요.”“괜, 괜찮아요! 마음에 든다면 매일 산에 올라가서 들꽃을 따다 줄게요!”배경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헤프게 웃었다. 경운기 뒤에 앉은 사도현은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째려보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화가 난 사도현은 곁에 앉아 있는 장윤태를 향해 말했다.“진찬영인지 진천영인지 겸손하다면서요? 그런 놈이 나처럼 여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보다 더 능숙하게 여자를 유
배경윤은 고개를 돌려 사도현을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비가 와서 바닥에 물이 고였던데 그거나 핥아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사도현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강아지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았다. 화가 난 사도현은 경운기에서 뛰어내렸고 배경윤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두 사람은 함께 매점으로 들어갔고 배경윤은 진찬영을 위해 비싼 생수를 찾고 있었다.“제일 좋고 비싼 물로 주세요. 제일 좋은 걸로요!”배경윤은 진찬영이 평소에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기름과 설탕이 들어간 음식을 적게 먹고 깨끗하고 고급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물만 마셨다. 하지만 마을 매점에는 일반 생수밖에 없었기에 비싼 생수를 살 수 없었다.배경윤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5만 원짜리를 여러 장 꺼내면서 말했다.“이 돈으로 비싼 생수를 주문해 주세요. 저의 오빠가 그런 생수만 마시거든요.”사도현은 매점의 진열대에 기대고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말했다.“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비싸고 말고 할 게 뭐 있다고 그래? 다 같은 거 아니야?”“네가 뭘 안다고 그래!”배경윤은 사도현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생수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야. 어떤 생수는 살짝 단맛이 맴돌아서 마실 때마다 기분이 좋지만 어떤 생수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악취만 나서 입도 대기 싫거든.”배경윤은 분명 생수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얼핏 들으면 나쁜 남자를 악취 나는 생수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사도현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넌 아직도 참 순진하구나? 물도 겉면만 보면 안 되지만 사람은 더더욱 그래. 아까 그 진춘영인지 진찬영인지 하는 놈도 말이야! 겸손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한 사람이라고? 내가 보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너처럼 재벌가에서 자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유혹해서 사기 치려는 거야. 넌 또 바보처럼 웃으면서 좋아하더라. 그럴 거면 차라리 네 재산을 아예 다 주지 그래?”“사도현, 찬영 오빠는 내가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이야. 그러니까 함부로 찬영
차에 오른 배경윤은 경운기에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에는 두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가 남아있었고 운전석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배경윤은 조심스럽게 진찬영한테 말을 걸었다.“찬영 오빠, 혹시 괜찮다면 제 옆에 앉을래요? 저 운전 잘해서 차가 뒤집어질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오늘 아침에 씻어서 머리에서 냄새도 안 나요!”진찬영은 배경윤의 말에 웃더니 배경윤이 사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햇볕 아래 진찬영은 더욱 빛났고 머리를 뒤로 넘기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차가 뒤집어져도 괜찮으니 편하게 운전해요.”“차가 뒤집어지면 안 되죠!”사도현은 진찬영을 뒤로 하고 운전석에 앉으면서 말했다.“진찬영 씨는 얼굴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인데 위험한 자리에 앉으면 안 되지. 난 얼굴이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여기 앉아도 돼.”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내 옆에 앉았다는 건 각오했다는 뜻이지?”진찬영은 배경윤과 사도현을 번갈아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사도현 씨가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 저는 뒤에 앉을게요.”“진찬영 씨는 눈치도 빠르네요.”사도현은 진찬영을 째려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진찬영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사도현을 쳐다보더니 도발했다.“어차피 앞으로 배경윤 씨랑 계속 같이 앉을 텐데요.”장윤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눈치를 보았다.“경, 경운기 조수석에 제가 타도 될 것 같은데요. 바람도 쐬고 좋죠!”한 사람은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는 회사 대표이고 한 사람은 연예계 톱스타였기에 일개 예능 감독인 장윤태는 두 사람한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난 허락한 적 없는데요?”사도현은 장윤태를 째려보면서 조수석이 아닌 황위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진찬영은 장윤태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윤태 형, 왜 사서 고생이에요?”“그러게 말이야. 괜히 나섰다가 눈치만 보게 되었네.”장윤태는 뒷좌석에 올라타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진찬영이 온다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같이 녹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이참에 진찬영한테 잘 보여서...”“잘 보여도 소용없어요. 진찬영이 얼마나 차갑게 구는지 몰라서 그래요? 가까이 다가갔다가 기세에 눌려서 말도 못 꺼낸다니까요.”게스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진찬영과 장윤태가 경운기에서 내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역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사람이라 그런지 정말 멋지네요. 어떻게 경운기에서 내리는 모습까지 멋있을 수 있죠? 너무 완벽하잖아요.”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걸그룹 리더 민지가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진찬영 씨, 이곳에 온 걸 환영해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어요. 제가 짐을 들어드릴게요!”민지가 진찬영의 가방을 들어주려고 하자 진찬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죄송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이 저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게 싫어서요.”“아, 죄송해요...”민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얼음 왕자 같은 사람이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거절하는 모습도 멋져!’배경윤은 경운기를 주차하고는 차에서 내렸고 진찬영이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달려갔다.“찬영 오빠, 손님으로 오셨는데 가방까지 들게 할 수는 없죠. 이리 줘요! 저 보기보다 힘세거든요.”“고마워요. 가방이 무거워서 괜히 미안하네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하면서 배경윤에게 가방을 건넸다. 그러고는 미소를 짓더니 배경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모습을 본 여자 연예인들은 질투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다른 사람이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게 싫다면서 왜 저 여자한테는 가방을 주는 거야!”민지는 씩씩거리면서 배경윤을 노려보았다. 이때 사도현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저런 컨셉인 걸 어떡해요?”“아, 사 대표님. 안녕하세요.”민지는 사도현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환하게 웃었다.‘진찬영은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사 대표님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으니
배경윤은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진찬영을 바라보았다. 진찬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찬영 오빠가 그걸 어떻게...”배경윤은 처음 만난 진찬영이 어떻게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는지 궁금했다.“내가 어떻게 배경윤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냐고 묻고 싶은 거죠?”진찬영이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이래 봬도 배우인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배경윤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찬영 오빠한테 계속 못난 모습만 보이는 것 같네요. 오빠가 보기에도 제가 참 바보 같죠?”“그렇지 않아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배경윤 씨는 내가 여태껏 봐왔던 연예인들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착하고 배려심 깊은 배경윤 씨가 연예인들보다 더 멋져요. 그러니까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고 아껴주세요.”배경윤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한테 위로받자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고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찬영 오빠, 정말 고마워요. 집구경을 시켜줄 테니 잘 따라와요.”배경윤은 이 집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앞장서서 진찬영에게 집구경을 시켜주었다. “여기가 주방이에요. 주로 이곳에서 요리하거든요. 그리고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외양간인데 이 암소 콩순이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안 돼요. 아, 이곳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인데 심심하면 해먹에 누워서 책을 볼 수도 있어요. 맞은 편에 있는 연못 안에 미꾸라지가 많다고 들었어요. 다음에 제가 가득 잡아서 맛있는 요리를 해드릴게요.”진찬영은 배경윤의 뒤를 따라가면서 두리번거렸다. 그저 은인인 장윤태한테 보답하기 위해 출연하려고 했지만 정작 촬영 장소에 와보니 흥미가 생겼다.“미꾸라지를 잡는다고요?”진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지금 잡을래요?”“지금요?”“네!”“찬영 오빠, 미꾸라지 잡을 줄 알아요? 진흙이 오빠의 옷이거나 머리에 묻을 수도 있거든요. 정말 괜찮겠어요?”“여기까지 온 마당에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추어탕을 만들어 먹어도 좋겠네요. 그래요! 오
사도현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연못 안에서 재밌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다들 재밌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배경윤 씨랑 진찬영 씨는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고 했지만 오래 사귄 커플처럼 죽이 척척 맞네요. 진찬영 씨가 생각보다 털털하고 친절해서 신기해요. 남자들이 배경윤 씨만 유독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네요.”윤설은 사도현이 노려보는 쪽을 쳐다보면서 일부러 부채질했다.“경윤이가 매력 있는 여자라서 그래.”침묵하던 사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윤설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렇게 주시하고 있지 않았겠지.”윤설은 당황하더니 말을 버벅거렸다.“그, 그게 무슨...”“내 말이 틀렸어? 입만 열면 배경윤이 누구랑 어울리고 누구랑 친하게 지낸다는 말뿐이었잖아. 결국 네 입으로 네가 배경윤을 감시한다는 것을 밝힌 셈이지. 아니면 너도 배경윤한테 반해서 관심받고 싶은 거야? 이제는 여자랑 만날 생각인가 봐?”“도현 씨, 설마 방금 제가 장난 좀 친 것 갖고 이러는 건가요?”윤설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저는 사실만 말했을 뿐이에요. 배경윤 씨랑 진찬영 씨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요. 두 사람이 커플 같다는 말에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저한테 화풀이하지 마세요. 계속 저를 따라올 필요도 없고요.”“내가 언제 너를 따라왔다고 그래?”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난 처음부터 널 따라온 게 아니야. 진흙이 싫어서 들어가지 않은 거니까 네 멋대로 생각하지 마.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너랑 상관없거든.”“도현 씨!”윤설은 사도현이 쌀쌀맞게 대답하자 화가 솟구쳐 올랐지만 곧바로 무기력해졌다. 아무리 속이고 유혹해도 사도현은 예전처럼 윤설을 애틋하게 바라보지 않았다.연못 안에서 미꾸라지를 잡던 게스트들은 사도현과 윤설을 쳐다보면서 수군거렸다.“사 대표님은 어쩜 이렇게 다정할까요? 윤설 씨를 지켜주는 수호
배경윤을 안은 사람은 연못을 빠져나와 마당을 들어섰고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의자에 내려놓았다.“찬영 오빠, 혹시 방으로 들어온 거예요? 우리를 오해하고 누군가가 소문을 내면 어떡해요? 그럼 오빠한테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해질 것 같아요.”배경윤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싶더니 입을 틀어막으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주여, 찬영 오빠를 사랑하게 된 지 몇 년 만에 결국 만나게 되었어요. 게다가 지금 단둘이 한 방에 있다니,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요! 찬영 오빠는 역시 얼음 왕자가 맞나봐요. 날 안고 한참을 걸었는데도 힘들다고 투덜거리지도 않았어요. 눈을 감고 있어도 차가운 기운은 잘 느껴지더라고요.’몇 분 후,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배경윤 앞에서 멈추었다. 누군가가 젖은 수건으로 배경윤의 눈과 이마를 세심하게 닦아주었다. 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찬영 오빠,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괜찮아요. 우리 둘이 한 방에 있었다는 걸 팬들이 알게 되면 난리 날 거라고요.”“하, 이 와중에 할 말은 다 하면서 그놈한테 안기고 싶어서 쓰러진 척한 거야?”익숙한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깜짝 놀란 배경윤은 눈을 떴고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는 진찬영이 아닌 사도현이 눈앞에 서 있었다.배경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눈에 살기가 돌았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돼?”사도현이 코웃음치고는 말을 이었다.“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널 여기까지 안고 올 것 같아? 도와줘도 욕만 먹는데 나 말고 누가 너를 이렇게 보살펴주겠어!”“찬영 오빠는 어디에 있어? 오빠한테 수작질한 건 아니지?”배경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묵었던 방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문은 굳게 닫혔고 이 방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미꾸라지를 신나게 잡는 사람한테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진찬영은 여우 같은 놈이라고!”
일주일 뒤, 병원에서 정밀 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차설아의 허리가 심하게 다친 건 맞지만 치료를 제때 받고 푹 쉬어서 생각보다 빨리 나았다. 그러기에 반신불수가 될 거라는 의심을 거두어도 되었다.그 소식을 알게 된 뭇사람들은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복 받은 사람들은 내가 딱 알아본다고 했잖아. 우리 설아가 복 받아서 빨리 나은 거야.”배경윤은 차설아를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배경윤은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경윤이 다친 줄 알 것이다.“앞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운동은 절대 하면 안 돼! 암벽 등반, 등산은 절대 안 되고 계단을 오를 때는 꼭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해.”차성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 한 번 큰 사고를 당했기에 차설아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더 신경 쓰고 싶었다.“성철 형,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붙어있으면서 스파크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게요.”선우시원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면서 사뭇 엄숙하게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 달 정도 입원하면 거의 다 나을 거래. 병실에만 있어서 답답하겠지만 참아. 오빠가 병원에 퇴원 신청을 하면 예정일보다 더 빨리 퇴원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간병인을 미리 알아보았으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차성철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울상을 지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나는 병원에 있는 게 좋아. VIP 병실이라 편하게 지낼 수 있잖아. 미리 퇴원 신청을 하지 않아도 돼. 귀찮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설아야, 너를 위해서라면 귀찮은 일도 다 해줄 수 있어. 너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퇴원 예정일을 앞당기는 건 복잡한 절차도 아니야.”차성철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오빠가 다 해놓을 테니 그날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자. 설아야, 오빠 믿지?”“아...”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차설아가
사실 차성철은 최근 들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차설아의 병실에 긴급 신고 버튼을 설치해 주었다. 버튼만 누르면 병원의 긴급 벨이 울리면서 차성철이 배치한 보디가드가 병실로 달려올 것이다.차설아는 성도윤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 차성철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성도윤을 향한 마음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선을 지키지 못했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떠보다가 결국 그 선을 넘어왔다.“나는 그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행복할 뿐이야. 그래서 당신의 입도 닦아준 건데 싫으면 얘기해. 내일 밤부터 다시 오지 않을게. 케이크를 사던 가게의 파티시에를 스카우트해서 매일 케이크를 만들게 했지만 이제는 필요 없겠지...”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을 이었다.“내일 메뉴는 헤이즐넛 케이크라고 했어. 아쉽지만...”“잠시만요!”차설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차설아가 제일 기대하던 메뉴가 바로 헤이즐넛 케이크였기에 성도윤을 내쫓을 수 없었다.“파티시에도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어떻게 함부로 자르겠어요. 내일도 와주면 고맙겠지만 앞으로는 뭐가 묻어도 도와주지 말아요. 손은 멀쩡하니까 내가 직접 닦을게요.”“그래. 당신이 이토록 애원하니 한 번 고려해 볼게.”성도윤은 피식 웃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눈빛은 여우처럼 교활하기 그지없었다.“휴...”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후회하기 시작했다. 성도윤은 예전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차설아를 부드럽게 다가가면 마음을 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맛있는 케이크로 경계심을 무너뜨렸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 되어갈 때쯤 차설아는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성도윤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의 성과는 그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다.“이제는 병실로 돌아갈 테니 푹 쉬어. 내일 밤에도 올 테니까 기다려. 잘자.”차설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했다. 머릿속은 두 사람이 뜨겁게 키스를 퍼붓던 화면으로 가득 차서 얼굴이 화끈
차설아는 병실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에 성도윤이 늦은 밤에 가져다주는 야식이 유일한 낙이었다. 차설아는 누워서 입을 벌리고 성도윤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애틋한 커플 같아서 오글거렸지만 케이크를 먹기 위해 꾹 참았다.“역시 다크 초콜릿 케이크는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이런 맛을...”크림과 초콜릿이 조화를 이루어서 입안에 가득 퍼졌다. 차설아는 케이크를 먹으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내일도 가져올 테니까 천천히 먹어. 체하면 어쩌려고 그래.”성도윤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하면서 허겁지겁 먹는 차설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먹다가 의도치 않게 성도윤의 손가락을 물게 되었다.긴 손가락이 차설아의 입에 들어가자 성도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했고 닭살이 돋았다.“어머.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급하게 먹다보니...”차설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면서 성도윤한테 사과했다.“더 먹을래?”성도윤은 뜨거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아, 아니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차설아는 민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성도윤을 쳐다볼 수가 없었고 더 이상 케이크를 먹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숨을 기세였다.“안 먹으면 입부터 닦아. 다 묻히고 먹었잖아.”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차설아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설아의 입가에 크림이 묻어있었는데 그 모습은 음식을 몰래 훔쳐먹은 고양이 같아서 더 귀여웠다.“그럼 티슈 좀 주세요. 입에 묻은 줄도 몰랐어요.”차설아는 혀로 입가를 날름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성도윤은 내가 며칠 굶은 줄 알겠어. 아, 손가락까지 물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왜 그랬지?’“그럴 필요 없어.”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뭐가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티슈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뜻이야.”“왜요? 다 썼어요?”“아니. 내가 닦아
박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뉴스에서 차설아 씨가 허리를 다쳤다고 했어요...”성진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성진은 심호흡하고는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당장 그 병원으로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정확히 어쩌다가 다쳤고 상황이 어떤지 알아내서 보고해.”“하지만 제가 성진 도련님의 곁을 떠나면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설아한테 가봐. 설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거야.”성진은 잔뜩 긴장한 채 박서영을 재촉했다.“알겠어요. 준비하고 바로 갈게요.”박서영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성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기 전에 뒷마당에 있는 해바라기 꽃을 가져가. 해바라기 꽃을 보면 설아도 좋아할 거야.”“네. 그렇게 할게요.”박서영은 성진을 바라보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사람은 감정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동물이었다.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죽여도 눈 깜빡이지 않던 성진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순애보가 되어있었다.한편, 병원.성도윤은 늦은 시간마다 차설아의 병실에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기도 했고 때로는 얘기를 나누면서 웃기도 했다.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이 된 차설아는 점점 마음이 편해졌다. 가끔 성도윤을 만나기 위해 차성철 혹은 병문안을 온 사람들을 일부러 내보내기도 했다.성도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던 차설아는 어쩐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도윤이 찾아오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내가 허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당신을 제일 먼저 내쫓았을 거예요.”어느 조용한 밤, 차설아는 성도윤이 몰래 가져온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먹으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자 성도윤은 차갑게 대꾸했다.“말로만 그러지 말고 직접 날 내쫓아 봐. 얼른 나아서 나를 내쫓기를 바랄게.”“딱
“그럴 필요 없어!”성진이 부르짖는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울려 퍼졌다. 귀신 같은 몰골로 도저히 차설아를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 성진은 긴 한숨을 내어 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차설아를 두고 떠난 건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라서였어. 나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야.”성진은 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차설아한테 평생 책임지라고 말하면 차설아는 주저 없이 승낙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반년 전에 어렵게 상봉한 차성철과 귀여운 아이들, 겨우 이어가고 있던 사업을 내팽개치고 성진과 함께 멀리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차설아는 반년 동안 성진을 아기처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힘들다고 투정 부린 적이 없었다. 성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두 눈과 피를 기부함으로써 사랑하는 여자와 반년 동안 같이 살았기에 이번 생에 여한이 없었다. 성진은 평생 그 나날들을 기억할 것이고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하지만 박서영은 성진을 이해하지 못했다. 총명하고 이득을 위해 기회를 쟁취하던 성진이 도대체 왜 소극적으로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성진 도련님, 차설아 씨를 잊지 못했으면서 왜 만나러 가지 않는 거예요? 성진 도련님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때 갑자기 나타나면 감동해서 성진 도련님과 결혼하려고 할 수도 있어요.”박서영은 굳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성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설아가 그러자고 해도 내가 거절할 거야.”성진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자존심이 있는 남자라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할 거야.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감히...”성진은 고상한 품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성진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지만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성진 도련님, 다른 사람들이 도련님을 나쁘고 간사한 사람이라고 욕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서은아는 심호흡하고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여겼다. 성진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궁금해 난 서은아는 천천히 물었다.“요즘 어디로 갔기에 도통 보이지 않는 거야? 차설아를 데리고 해안시를 떠나겠다고 약속했었잖아. 그런데 차설아가 왜 아직도 내 눈앞에서 알짱대는지 설명해 봐. 네가 나타나지 않으면 차설아는 또 성도윤한테 달라붙어 있을 거야. 그럼 네 눈과 피를 성도윤한테 준 건 뭐가 되는데?”성진의 희생은 차설아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서은아도 놀라게 했다.멀쩡하던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를 위해서 자신의 눈과 피를 기부했다. 그로 인해 성진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다.이 세상에서 가장 헌신적인 순애보는 성진일 것이다. 서은아는 성도윤을 위해 이 정도로 희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성진은 큰 희생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차설아는 반년 동안 성진과 가까이 지내다가 자신만의 삶을 위해 떠났다. 성진의 노력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뭐가 되든 네가 알 바 아니야. 나는 너랑 달라. 설아를 많이 사랑하고 설아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 하지만 너는 성도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국 너를 위해서 수술을 막으려는 거잖아. 너는 성도윤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성진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서은아는 허를 찔려 제대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서은아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야? 차설아를 사랑하는 순애보가 이런 끔찍한 일을 꾸며냈다는 걸 누가 알았겠어... 나는 그저 네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야. 성도윤을 이렇게 만든 것도 전부 너라고!”“여기서 멈추라고 하면 멈출 거야? 너는 나의 꼭두각시라고 했잖아.”“뭐? 뭘 멈추라는 건데?”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는 차갑게 물었다.“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야. 성도윤이 수술을 받게 내버려둬. 잊었던 기억을 찾고 나서 너한테 따지면 내가 꾸민 일이라고 말해. 너는
긴 연결음만 이어질 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 개같은 놈!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제발 좀 받아. 할 얘기가 있단 말이야.”서은아는 서태원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전화를 걸었다. 여러 통 걸었지만 상대는 전화를 계속 받지 않았다. 서은아의 전화번호를 진작에 스팸 번호로 설정했거나 전화번호를 아예 바꾸었을 수도 있었다.“하, 정말 짜증 나! 아직 살아있다면 전화라도 좀 받으라고! 정말 속 터져.”서은아는 방에 놓여있던 화분을 전부 바닥에 던지면서 씩씩거렸다. 서은아가 절망스러워서 힘없이 주저앉자 갑자기 조용하던 전화가 울렸다.“무슨 일로 전화했어?”전화를 건 사람은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서은아와 말을 섞기 싫은 모양이었다.“성진, 이 개자식아! 도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내가 몇 번이나 전화를 건 줄 알아?”서은아는 휴대폰을 꽉 잡고 울분을 토해냈다. 긴급상황이 아니었다면 서은아는 절대 이런 나쁜 놈과 엮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니까 무슨 일인데?”성진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러자 서은아는 잔뜩 겁을 먹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성도윤이 벌써 의심하고 있어. 대단한 신경외과 의사를 찾았다고 하면서 뇌수술을 다시 받겠다고 했단 말이야. 만약 성도윤이 뇌수술을 받으면 지난 기억도 다 떠오를 거고 우리가 한 짓이 들통날 것 같아. 우리 이제 어떡해?”“그럼 어쩔 수 없어. 나의 실력은 예전과 달리 많이 녹쓸었지만 성도윤이 복수하고 싶다면 기다리고 있어야지.”“나쁜 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서은아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나한테 부탁할 때와 말이 다르잖아. 들통나면 너는 성도윤한테 좀 맞으면 되겠지만 나는 어떡해? 성도윤이 알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우리 부모님까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서 연락한 거야.”“그러니까 네 말은 성도윤이 뇌수술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거지?”
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가 선우시원이었다면 모든 방법을 써서라도 아이를 데려올 거야. 아이의 엄마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 알 바 아니지. 강요하지도 않을 거고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둘 거야.”“그, 그래요?”차설아는 멋쩍게 웃더니 차오르는 슬픔을 겨우 삼켰다. 선우시원은 차설아와 결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성도윤은 두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했다.차설아는 성도윤이 기억을 잃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씨 가문에서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으려고 차설아와 싸울 것이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가서 쉬어요. 궁금한 거에 대해 다 알려주었잖아요.”차설아는 마음이 아파서 혼자 있고 싶었다. 성도윤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대답했다.“이제는 가봐야겠어...”병실 문을 열려던 성도윤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말했다.“만약 당신이라면 뭐라고 하든 내 곁으로 데려왔을 거야.”“뭐라고요?”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캐물으려고 했지만 성도윤은 이미 가버렸다. 아직 기억해 내지 못한 부분이 있었기에 성도윤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모든 것은 박성훈한테 수술을 받고 나서 기억이 돌아온 뒤에 결정될 것이다.한편, 서씨 가문 저택.병원에서 돌아온 서은아는 화가 나서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모조리 바닥에 던졌다.“은아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설마 성도윤 그놈이 너를 화나게 했어? 지금 당장 그놈한테 전화해서 따져야겠어.”서태원은 서은아를 끔찍이 사랑했기에 다른 사람이 자신의 딸을 괴롭힌다면 두 눈이 뒤집어질 것이다. 상대가 성도윤이라고 해도 서은아를 위해서 따져 물을 수 있었다.“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서 화풀이하고 있었던 거예요.”서은아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펑펑 흘렸다.“아빠, 저는 이제 끝이에요. 도윤이가 기억을 되찾으면 저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요!”“기억을 되찾는다고?”서태원이 미간을 찌
병실 안은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고 오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성도윤은 이를 부득부득 갈더니 차갑게 말했다.“차설아, 당신은 정말 대단해. 얌전해 보였는데 어느새 아이를 두 명이나 낳은 거야? 당신에 비하면 나의 인생은 보잘것없어 보여.”“서씨 가문 아가씨와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요. 지금 도윤 씨의 실력이라면 몇 년 안에 아이를 세 명 정도는 낳을 수 있어요.”차설아는 성도윤이 오해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오해로 인해 두 사람이 멀어진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다.“나는 아이를 가지지 않을 거야.”성도윤이 차갑게 받아쳤다.“왜 가지지 않겠다는 거예요? 아이한테 발목이 잡힐까 봐 그러는 건가요? 아직도 다른 여자랑 놀아나고 싶은가 보죠.”차설아는 성도윤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아이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가지지 않는 게 좋긴 해요. 책임감으로만 키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이를 향한 사랑을 꾸준히 표현해 주고 아이의 곁에 있어 줘야 해요. 나처럼 자유분방한 삶을 꿈꾸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거예요. 우리 아이들도 나 때문에 고생했고요.”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차설아는 잘 알고 있었다. 아이의 삶을 위해서 부모는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극진히 사랑하지 않는 이상 해낼 수 없었다. 달이와 원이를 키우는 동안, 차설아는 수도 없이 포기하고 싶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당신 말대로라면 잘 고려해보고 아이를 가졌다는 거네?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나 봐?”성도윤을 차설아를 쳐다보면서 차갑게 물었다.“애초에 아이를 가질 생각조차 없었어요.”차설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두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어요. 처음에는 아이를 지우려고 했었지만 의사가 이란성 쌍둥이를 임신하는 건 드문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아이를 지우면 다시 아이를 가지기 힘들다고 해서 낳은 거예요. 두 아이는 내가 원해서 생긴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무도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