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한 상황이었기에 차설아는 당장 출발하고 싶었다. 늦게 출발할수록 차성철의 상태가 악화할 것이다. “모터보트면 운전 요금을 더 지불해야 하거든요.”센터 담당자가 차갑게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직접 운전하면 돼요.”“직접 운전한다고요? 여자가 보트를 운전한다는 건 처음 들어봐요.”“요트 면허증도 땄는데, 뭐 문제 있어요? 센터 직원보다 제가 운전을 더 잘할 거예요.”“당신처럼 이상한 여자는 처음이에요. 열쇠 가져가세요.”센터 담당자가 빌려준 모터보트는 아주 작았고 오래된 보트라 액셀을 밟자마자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가장 저렴한 보트를 렌트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차설아는 검은 연기 때문에 계속 기침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서 다급히 출발했다.그리고 센터 담당자가 알려준 위치로 향했고 보트 뒤로 물결이 출렁거렸다. 파도를 가르면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이 어쩐지 멋있어 보였다. 28마일 정도면 바다로 멀리 나간 것이었기에 값비싼 물고기를 낚을 수 있었다. 하지만 출항 비용이 많이 들었기에 사람이 적었다. 차설아는 어렴풋이 보이는 고급 요트를 바라보면서 그 요트에 박성훈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차설아는 재빨리 요트 쪽으로 향했고 요트 갑판 근처에서 멈추었다. 그러고는 요트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안녕하세요. 낚시하러 오셨나 봐요?”요트는 두 층으로 된 구조였고 호화로운 장식과 작은 수영장이 눈에 띄었다. 그에 비해 요트 옆에 세워진 차설아의 보트는 한없이 초라했다. 요트의 수영장 옆에 누워있던 여자들은 차설아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저건 또 뭐야? 요트 센터에서 보낸 직원 아니야?”“요트를 운전하는 여자는 처음 봐. 설마 여장한 남자 직원은 아니겠지?”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은 계속 떠들어대자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보디가드가 입을 열었다.“두 분이 낚시할 때는 조용히 하세요.”그러자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은 입을 다물었고 서로 눈치만 보기
“당연히 어디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이겠지.”단발머리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휴대폰으로 해안시 8대 명문가 중 제일 명문가 성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을 검색해 봐. 성대 그룹 대표 성도윤이잖아!”“서, 설마 박 선생님 옆에 있는 남자가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좋아했다는 그 성도윤이라고?”긴 생머리 여자가 입을 틀어막은 채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고는 한참 후에야 말을 이었다.“성 대표님과 이렇게 만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 예전에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많았잖아. 여자가 아무리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왜 갑자기 요트 아가씨인 우리를 불러서 바다 낚시하는 거래?”“재벌가 사람은 뻔하지 뭐... 이제는 아무 여자나 안고 싶은 거겠지.”“그럼 우리도 이제는 부자 될 일만 남은 거야?”“그렇긴 한데 우리가 아니라 물고기한테만 집중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괜찮아. 저 남자들은 물고기를 유혹하고 우리는 두 남자를 유혹하면 돼.”두 여자는 귓속말로 작전을 짜고는 비키니 끈을 헐렁하게 묶은 채 갑판 앞으로 걸어갔다.“박 선생님, 술 한잔하실래요?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이렇게 많이 낚으신 거예요?”“성 대표님, 배고프지 않으세요? 금방 씻은 딸기 드셔보세요.”단발머리 여자가 술잔을 든 채 박성훈 곁에 앉았고 긴 생머리 여자는 성도윤 옆에 앉아 딸기를 입에 넣어주었다. 하필 이때 차설아가 그 상황을 보게 되었다.‘나쁜 놈, 여자들과 놀 거면서 왜 나한테는 그랬던 거야!’차설아는 오늘 재수가 없는 날이라서 성도윤과 마주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성훈을 설득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참아야만 했다. 차설아는 오태섭이 준 사진을 들고 성도윤 곁에 앉아 바다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그 남자가 박성훈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차설아가 씩 웃더니 입을 열었다.“박 선생님, 여기 참치가 엄청 많아요! 저의 보트에서 낚으실래요?”차설아는 요트 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구조 요청 연막총을 하늘에 대고 쏘
“저야 너무 영광이죠. 감사해요!”차설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계단을 올랐지만 속으로는 성도윤을 엄청나게 욕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와 노는 것도 모자라서 박성훈한테도 요트 아가씨를 배정해 주었다. 이 요트 위에 얼마나 많은 아가씨가 탔을지, 얼마나 더럽고 비겁한 짓을 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박성훈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절대 이 요트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차설아가 요트 위에 올라가자마자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비웃었다.“어머, 언니는 옷차림이 왜 이래? 없는 가슴 드러내기 두려워서 그런 거야? 아무도 보지 않을 텐데 지레 겁먹는 꼴이 더 웃겨.”“우리는 성 대표님과 박 선생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올라왔어. 당신은 보트를 타고 쫓아왔으면서 뭘 또 아닌 척하고 그래? 가식 그만 떨어.”“성 대표님, 분위기 흐리는 이 여자를 쫓아내면 안 돼요?”성도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차설아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예전에 내가 너무 섹시해서 남자들이 줄을 설 때, 너희들은 성형병원에서 가슴 수술이나 받았겠지. 박 선생님을 즐겁게 해주겠으면 개그 코너나 하나 짜든지 그래? 그리고 가식 떠는 건 나보다 너희들이 너 잘하지 않아? 남자 품에 안기고 싶어서 안달 난 년들이 뭔 말이 많아!”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은 말문이 막혔고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성 대표님, 저 여자 좀 보세요. 오자마자 분위기나 흐리는 걸 보면 성 대표님과 박 선생님 심기를 건드리러 온 게 분명해요. 아무래도 쫓아내는 게 맞는 것 같아요.”성도윤에게 딸기를 먹여주던 긴 생머리 여자가 성도윤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딸기를 건넸을 때 성도윤이 거절하지 않았기에 이미 넘어온 줄 알고 주제넘은 요구를 했던 것이다. 성도윤은 긴 생머리 여자를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지금 내 심기를 건드리는 건 너야.”그러자 긴 생머리 여자가 깜짝 놀라더니 손을 거두고는 말했다.“죄, 죄송해요. 성 대표님의 뜻에 따를게요. 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말해서 죄송해요.”“지금부터 그 입 다물어. 내 허
박성훈은 성도윤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위대한 성도윤 대표님이 저를 위해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셨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죠. 주제를 알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네요. 지금 환자 어디에 있죠? 얼른 가서 치료해 줄게요.”성도윤은 차성철이 있는 병원을 알려주었다.“지금 가면 딱 되겠네요. 도윤 씨를 도와주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박성훈은 시계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차설아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오빠를 구하러 간다고요?”차설아는 그제야 성도윤이 박성훈과 바다낚시를 나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성도윤도 차설아와 마찬가지로 차성철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차설아와 성도윤은 사이가 틀어졌고 차성철과 성도윤은 원수 사이였다. 성도윤이 굳이 고개를 숙이면서 의사한테 잘 보이고 바다낚시를 같이 하면서 원수를 치료해 달라고 부탁할 리가 없었다. 차설아가 알고 있는 성도윤은 교활한 여우 같은 사람이었기에 손해를 보면 미친 듯이 보복했다. 그런데 오늘 성도윤은 어쩐지 원수한테도 도움을 주는 착한 사람 같았다.“내가 언제 그렇다고 말했어?”성도윤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거만하게 말했다.“당신 오빠를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실험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표정은 집어치워.”“실험한다고요?”차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무슨 뜻이에요?”성도윤은 입술을 깨물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박성훈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차설아 씨라고 했죠? 도윤 씨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차설아 씨의 오빠를 치료해서 다 나으면 도윤 씨의 뇌수술도 저한테 맡길 거래요. 말로는 저의 의학 실력을 검증하겠다고 하지만 사실은 차설아 씨의 오빠를 도와주려고 그런 건데 부끄러워서 괜히 차갑게 말한 거고요. 도윤 씨가 은근히 마음이 여리다는 걸 차설아 씨가 알아야 할 텐데...”“성훈 씨, 저는 그 두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니까요. 도와주는 게 아니라
수술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차설아는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이 잘 끝나는 일만 남자 성도윤은 자리를 뜨려고 했다.“잠깐만요.”차설아는 성도윤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성도윤은 멈춰서더니 뒤돌아보면서 거만하게 말했다.“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차설아는 입술을 깨물다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고마워요.”그러고는 심호흡하더니 말을 이었다.“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 예전부터 사이가 좋았어요. 그런데 우리 세대부터 이상하게 싸움이 잦았고요. 그래서 오빠가 다 나으면 차씨 가문, 성씨 가문 그리고 선우 가문까지 세 가문이 평화롭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가문 어르신들이 알게 되면 기뻐하실 거예요.”성도윤은 차설아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차갑게 웃었다.“당신은 나한테 할 말이 고작 가문의 평화, 그딴 말밖에 없어?”“그, 그럼 무슨 말을...”차설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도윤을 어떤 감정으로 대해야 할지 몰랐다. 지난 과거가 눈에 밟혀서 성도윤과 가까이하고 싶었지만 애매한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갈 수도 없었다.“아니, 필요 없어졌어.”성도윤은 차설아를 비웃는 동시에 스스로 미련하다고 비난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 병원을 나섰다. 성도윤은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차설아 오빠를 위해서 의사를 찾아다니고 같이 바다낚시까지 하다니... 지금 무슨 일을 벌인 거지? 서은아랑 데이트할 시간에 도대체 왜 그 여자를...’서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같은 목표를 지향하면서 협력하는 사이였고 이익공동체로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서은아가 성도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명예와 재산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성도윤은 서은아한테 더 잘해주어야겠다고 여겼다.성도윤이 떠난 뒤, 차설아는 성도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바람은 곁에서 차설아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같이 있을 때는 차갑게 말하더니 가버리니까 또
한편 성형병원.“당장 나오지 못해? 나오라고!”맑고 깨끗하지만 박력 있는 목소리가 성형병원 안에 울려 퍼졌다. 배경윤은 차성철이 들어갔던 수술실을 향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나와서 설명하지 않는다면 나올 때까지 여기서 소란을 피울 거야. 성형병원도 망하고 당신들도 직장 날리는 거라고!”차설아와 병원에서 헤어진 날, 배경윤은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고 의사한테 물어보았다. 그래서 차성철의 상황은 허점투성이였고 체질 문제거나 의료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배경윤이 차설아한테 차성철의 흉터 회복 수술을 제안했고 사도현을 찾아가서 성형병원 의사 연락처까지 얻어냈기에 자신한테 80퍼센트 정도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성형병원에 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려고 한 것이다.차성철의 흉터 회복 수술을 책임진 의사가 아닌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배경윤 씨, 저희도 큰 사고로 마음이 편치 않아서 거액 배상금을 드리기로 했어요. 이것으로 실수를 만회할 수 없는 건 알지만 더 이상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성형병원도 곧 망할 거라고요.”“거액 배상금?”배경윤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차성철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 성심 전당포 사장이라 전당포 물건 중에 아무거나 들고나와도 수천억이야. 그런데 그깟 배상금으로 날 내쫓겠다고?”“흉터 회복 수술을 한 환자가 성심 전당포 사장이라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서워서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던 자정 살인마란 뜻이에요?”“그걸 이제야 알았어?”배경윤이 씩씩거리면서 말을 이었다.“지금 성심 전당포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어. 진정한 보물만 취급하고 사장도 자정 살인마라는 타이틀을 떼어내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차성철의 실력은 여전해. 당신들이 차성철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성심 전당포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천만에! 작정하고 미친 듯이 날뛰면 너희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까?”“성, 성심 전당포 사장님인 줄 알았
“자, 이곳은 아무도 없으니 말해봐.”간호사 이서연은 커피잔을 잡더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그날 수술은 저도 좀 이상했어요. 오승준 선생님은 세심한 성격이라 리스크가 낮은 마취제만 조금 쓰거든요. 그날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의학계에서 이미 금기된 마취제를 쓰겠다는 거예요. 비록 효과는 좋지만 환자가 쇼크 하거나 오랫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서 뇌사 판정을 받을 수도 있거든요.”“금기된 마취제라고?”배경윤은 이서연의 말에 깜짝 놀랐다. 금기된 마취제를 대놓고 사용할 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설아 말대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꾸민 사고였어.’“처음에는 이 마취제를 쓰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오승준 선생님은 병원에 있는 마취제를 다 써서 어쩔 수 없다고 했어요. 게다가 이 수술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으니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다른 성형병원에서는 이 마취제를 몰래 쓰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피해자도 없었고 저는 그저 잡일이나 하는 간호사라서 협조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가난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나서...”이서연은 눈물을 흘리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정말 죄송해요. 고의로 그런 건 아닌데 정말 이럴 줄 몰랐어요. 환자분이 의식을 잃을 줄 알았다면 그때 마취제를 쓰지 못하게 말려야 했는데... 제발 살려주세요! 집에 자식이라고는 저밖에 없어서 저마저도 죽으면 우리 부모님은 버티지 못할 거예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먼저 울지 말고 내 말 들어봐. 네가 무고하다면 너한테 손대는 일 없을 거야.”배경윤은 울고 있는 이서연을 바라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줄게. 수술실에서 오승준이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이 있는지 다시 떠올려봐. 네 말대로라면 수술 경험이 많은 오승준이 일부러 환자한테 장난질했을 리 없잖아.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움직였을 거야.”“그, 그게...”이서연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오승준 선생님이 이상한 행동을 하긴 했는데, 그저 제 생각일 뿐
윤설은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큰 팬덤으로 유명해졌지만 수익은 기대치만큼 높지 않았다. 그래서 윤설의 행적을 파악하기 어려웠고 인맥을 동원해도 알 수 없었다. 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윈스 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배경윤은 사도현한테 윤설을 불러내라고 할 생각이었다. 윤설은 사도현의 첫사랑이니 사도현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윈스 엔터테인먼트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배경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반갑게 인사했다.“배경윤 씨, 대표님을 찾으러 온 거죠? 지금 사무실에 계시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시면 돼요. 배경윤 씨는 사전 방문을 위해 전화하거나 예약할 필요 없어요.”“아, 그래요? 고마워요.”배경윤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환하게 웃는 카운터 여직원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도현과 배경윤은 비밀 연애를 했기에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매번 윈스 엔터테인먼트에 올 때면 여러 절차를 거쳤고 만나기 어려웠다. 사도현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오늘따라 윈스 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은 배경윤한테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지그시 쳐다보면서 정신을 놓고 있다가 서로 부딪힐 정도였다. 그러다가 배경윤과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딴청을 피웠다. 어둠이 드리운 건물에서 직원들은 혹여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일했다. 그러나 배경윤은 으스스한 건물에 햇빛을 드리웠고 직원들을 살려줄 구세주가 되었다.“배경윤 씨, 이쪽으로 오세요.”또 다른 여직원이 미소를 지으면서 엘리베이터로 안내했고 티슈를 건네면서 말했다.“배경윤 씨, 조금 있다고 쓰게 될 수도 있으니 받아주세요.”“네?”배경윤은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지옥에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여직원한테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회사 직원들이 잔뜩 긴장한 채 업무를 보는 것 같더라고요. 설마 이 건물에 테러범이 들어와서 직원들을 인질로 삼았나요?”“아, 그게...”여직원이 침을
이튿날, 성진이 다시 눈을 뜨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그의 부모님과 박서영을 비롯한 성대 그룹의 이사진들이 그의 방안에 빼곡히 둘러서 있었다.“이제 붕대 풀 건데 준비되셨어요?”“네.”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진지하게 묻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그에게 있어서 눈을 뜬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았기에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더 흥분하고 있었다.성진의 동의를 구하고 붕대를 풀던 의사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었다.“오랜만에 빛을 보는 거라 처음에는 눈이 아프고 시야도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다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강한 빛은 막아주는 안경을 따로 맞춰뒀으니까 계속 끼고 계시면 도움 될 거에요.”의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지막 한 겹 남았던 붕대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마침내 성진은 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진아, 어때? 우리 보여?”“네, 엄마. 엄마가 보여요 이제.”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봐서 그런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은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만방자한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제 아들의 변화를 눈치챈 성주원은 의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아들이 눈을 뜬 것뿐인데 왜 성격도 바뀐 것 같죠? 다 큰 성인이 엄마를 보고 울리기나 하고, 전혀 남자답지 않잖아요 지금은!”“이것도 정상입니다...”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성주원에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도련님이 기증받으신 게 여성분의 눈이라서 여성 특유의 세포나 DNA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쉽게 공감하시는 걸 겁니다.”“어쩐지 저 눈은 우리 아들 눈빛이 아닌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증자를 좀 더 골라볼 걸, 성도윤 그 자식이랑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하는 사내자식 눈이 저래서 어떡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
“나도 너 이해하니까 이 일은 그냥 묻어두고 싶어. 그러니까 너도 나랑 도윤이 좀 이해해줘.”소영금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은아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눈물을 떨어트리며 말했다.“대체 뭘 원하시는 거예요? 제가 어떻게 이해하길 바라시는 거냐고요.”“흥분하지 말고...”서은아를 위로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소영금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내 아들 옆에서 떠나라는 말은 안 할게. 걔가 널 선택하든 다른 사람을 선택하든 나는 걔 선택을 존중할 거야. 하지만 내가 너한테 딱 하나 바라는 게 있어. 도윤이가 회복을 마칠 동안에만 그 앞에 나타나지 말아줘.”“네?”소영금이 이토록 단번에 저를 내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서은아가 두 주먹을 말아쥔 채 원망 어린 눈길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아주머니는 제가 도윤이를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이제 쓸모없어졌으니 떨어져라 이거에요? 진짜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저한테는 도윤이를 볼 자격조차 없는 거예요?”서씨 집안의 유일한 적통인 서은아는 아빠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들을 집에 들이기 전까지는 무남독녀였기에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해왔었다.그랬던 그녀에게 이런 홀대는 너무나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다.“너의 극단적인 선택이 내 믿음을 깬 거야. 나도 내 아들을 지켜야 하는데 걔한테 위험한 너를 가까이할 수는 없지 않겠니?”수술을 막기 위해 사고까지 낸 서은아가 제 아들 옆에 계속 붙어 있는다면 성도윤의 기억이 돌아오는 걸 막으려고 또 무슨 짓이든 저지를 것 같아 소영금은 그녀의 원망 섞인 말을 들으면서도 매정해질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서은아를 떼어놓는 게 가장 급선무였기에 소영금은 그녀를 진무열에게 맡겨버렸다.“진 비서가 은아 좀 봐줘.”그 뒤로 며칠의 시간이 더 흐르자 차설아는 이미 빛이 없는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었다.어차피 눈이 보이지 않으니 지하실에 있든 다른 곳에 있든 그녀에게는 다 똑같은 장소처럼 느껴졌다.앞이 캄캄한 그 날들을 보
박성훈을 본 그들은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교수님, 제 아들은 괜찮은 거죠?”“수술은 잘 됐으니까 걱정 마세요. 며칠 푹 쉬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장시간의 수술을 진행한 탓에 피곤했던 박성훈은 흥분한 채로 달려오는 소영금을 진정시키기 위해 짤막하게 환자의 상태에 대해 알려주고는 바로 탈의실로 들어가 버렸다.성도윤의 뇌 수술에 대해서는 궁금한 게 아주 많았기에 박성훈은 그것도 성도윤의 깨어난 뒤에 다시 차근차근 물어볼 생각이었다.“무사하다니 다행이네.”아들이 무사한 게 가장 중요했던 소영금은 마침내 한 시름 놓으며 주저앉았다.“...”하지만 한쪽에 서 있던 서은아는 한껏 어두워진 얼굴을 하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성도윤의 수술이 잘 끝났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성도윤이 일어나면 자신부터 내칠까 봐 걱정돼서 근심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아가씨, 괜찮으세요?”“아, 네. 괜찮아요.”그때 진무열이 평소답지 않은 서은아의 상태를 눈치채고 다가가자 당황한 서은아는 그의 눈을 피하며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아가씨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요? 혹시 대표님 수술이 잘 끝난 게 싫으신 거예요?”“그럴 리가요. 그냥...”“도윤이가 눈만 뜨면 나랑은 이제 끝이니까 그게 서운해서 그러죠.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진 비서님도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죠.”“진짜 그 이유뿐이에요?”미간을 찌푸린 진무열은 서은아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며 물었다.손을 가만히 못 두고 눈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은 실망이라기보다는 초조함에 가까웠다.꼭 무언가를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같아서 진무열은 그녀가 성도윤에게 말 못 할 큰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하지만 우선은 성도윤의 회복이 먼저였기에 그가 깨어날 때까지 자신의 의심은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한편 흥분을 가라앉힌 소영금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서은아를 보며 물었다.“은아야,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말해. 박 교수
“됐어, 사람 안 다쳤다니까 수술은 제대로 할 수 있겠네. 교수는 지금 어딨는 거야?”“아, 교수님이요?”소영금의 질문에 진무열은 수술실 쪽을 보며 답했다.“아까 직원 통로로 들어가셨으니까 지금쯤 수술하고 계실 거에요.”“뭐? 이미 시작했다고?”진무열의 대답에 소영금의 심장은 갑자기 뛰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그녀는 다급히 두 손을 모아 하늘에 대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하느님,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제 아들 무사하게만 해주세요... 그리고 제 아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설아랑은 못 만나게 할게요.”그녀의 기도를 듣던 진무열은 이상한 문구에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수술도 다 동의하셨으면서 왜 차설아 씨랑은 자꾸 갈라놓으려고 하세요? 아까는 더 이상 대표님 선택에 관여 안 하신다면서요?”“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내가 우리 도윤이 사주를 봤는데 도윤이랑 설아는 서로 상극이래. 같이 있으면 둘 중 하나는 다치기 마련이라는데 그런 애들을 어떻게 붙여놔? 둘을 위해서라도 내가 악역 자처해야지.”자신이 아무리 훼방을 놓는다 해도 둘의 마음이 간절하기만 하다면 어떤 곤란도 함께 이겨낼 것이었기에 소영금은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보기로 했다.“사모님, 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신다면서요? 언제부터 그런 미신을 다 믿기 시작하셨어요?”소영금의 대답을 들은 진무열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젊었을 때의 소영금이 유명했던 건 그녀가 남긴 대단한 업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차설아와 성도윤을 뛰어넘는 역경을 이겨낸 사랑 스토리도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데 한몫했었다.그때 소영금의 좌우명은 ‘사람의 의지는 하늘도 이긴다.’였는데 그랬던 사람이 나이가 들고나니 하느님에게 저렇게 기도를 하며 사주를 철석같이 믿는 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만약 소영금이 저 이유를 내세우며 차설아와 성도윤의 사이를 계속 방해한다면 어떤 대책을 내세워 여야 할지도 벌써부터 막막했다.하지만 서은아는 이때다 싶어 성도윤과 차설아가 잘되는
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소영금을 안은 채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건넸다.“아주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거 어차피 위험한 수술이었잖아요, 안 하게 된 게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니에요? 하늘도 우릴 도우신 거예요.”“나는 괜찮은데 수술 시작 전에 갑자기 사고가 난 게 우연이 아닌 것 같아서 좀 찝찝하네.”한숨을 쉬던 소영금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도윤이가 알면 화낼 텐데, 쟤 성격에 꼭 끝까지 알아내려 들 거야.”“아...”그 말에 서은아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켜내고 있었는데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살펴보던 진무열이 입을 열었다.“서은아 씨는 아까까지만 해도 수술 못 시킨다면서 큰소리치더니 왜 지금은 또 이렇게 아쉬워하는 거예요? 대표님이 수술받길 원하시는 건 맞아요?”“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서은아는 이를 악문 채 진무열을 노려보며 말했다.“수술에 관해서는 별생각 없었어요. 저는 도윤이만 좋아질 수 있다면 무조건 그 사람 선택 존중하니까요.”“그래요? 본인이 뱉은 말이니까 갑자기 말을 바꾸거나 하진 않겠죠?”서은아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진무열은 이상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당연하죠, 제가 직접 한 말인데.”모든 조치가 끝난 뒤라 믿는 구석이 있었던 그녀는 이제 와서 배려심 깊은 모습을 연출하며 진무열과 소영금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그런데 아까부터 입꼬리를 씰룩이던 진무열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대표님도 아가씨 말 들으면 마음이 한결 놓이시겠어요. 역시 서씨 집안 아가씨는 인품도 남다르네요.”진무열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수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말했다.“교수님, 여기 준비 끝났으니까 바로 수술 진행해주세요.”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언성을 높여 물었다.“진 비서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수술을 진행한다니요?”“박 교수님이죠 당연히, 그분이 오늘 뇌수술 집도의이신데 그분한테 연락해야겠죠?”“박 교수님은
“그런데 박 교수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수술 삼십 분 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전화 한 통이 없어.”소영금은 시계를 보며 아직도 오지 않는 박성훈에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성대 그룹 후계자라는 지위와 신분은 국가 간부급인데 그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수술 시작 30분 전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으니 자연스레 교수의 실력에 대한 의심도 생기기 시작했다.“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 성격이 워낙 그런 분이시라 항상 시간 딱 맞춰오세요. 그리고 원래 이런 수술도 잘 안 맡는데 대표님이랑 친분이 있으셔서 특별히 해주시는 거예요.”“뭐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얼굴이나 봐야겠네. 수술 잘하면 다행이지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진무열의 말에 소영금은 성격을 죽이며 복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한편, 수술실 밖으로 나온 서은아는 눈물을 닦아내고 눈을 번뜩이며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내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렇다면 나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예정대로 일 진행해,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그 뒤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수술 시작 시간이 되자 소영금은 초조해하며 물었다.“약속한 시간 다 됐는데 이 의사는 왜 안 와?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야?”“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진무열은 바로 박성훈의 비서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무슨 말을 전해 들었는지 벙찐 상태로 돌아왔다.소영금은 그런 진무열의 모습을 보고 놀라며 다급히 묻기 시작했다.“왜 그래 진 비서? 어디까지 왔대?”진무열은 낯빛이 창백해진 채로 소영금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박 교수님 비서랑 연락이 됐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교수님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크게 다치셨대요.”“뭐라고?!”“어떻게 수술 앞두고 마침 그런 사고가 나? 오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그건 아닌 것 같아요.”반신반의하는 소영금에 진무열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도윤이가 이미 결정을 내린 거지. 어차피 쟤 인생인데 나도 쟤 뜻 존중해주기로 했어.”소영금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사실 예전의 소영금은 사사건건 아들을 속박하려 들며 성도윤의 결혼까지 간섭했었다.그래서 차설아와 함께 살 때도 둘 사이에 자꾸 끼어들며 둘의 감정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쳤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제 아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인데 그냥 내버려 뒀으면 임채원 같은 여자가 꼬일 일도 없을 것 같아 소영금은 그 일이 늘 후회스러웠다.그래서 이번에는 아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해주기로 한 것이다.“그럼 제 생각은 안 하시는 거예요? 도윤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기억을 회복하든 저는 어차피 다 상처받는 거잖아요.”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것들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 서은아는 허무한 마음에 소영금을 보며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주머니도 아시잖아요, 제가 도윤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도윤이 때문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다 아시면서 어떻게 이래요? 쟤가 실명해서 성대 그룹 이사들한테 공격받을 때도 모든 자원, 인맥 동원해서 도윤이 일으켜 세운 것도 저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저더러 모든 걸 포기하라고요?”“은아야, 일단 흥분하지 말고 진정 좀 해.”소영금은 그런 서은아를 달래며 말했다.“그냥 뇌수술하는 것뿐이지 죽는 것도 아니고 너랑 있었던 일을 다 잊는 것도 아니야. 네가 한 희생 도윤이도 알고 나도 알아, 쟤가 배은망덕한 사람도 아니잖니.”“저는 안 잊겠지만 바로 차설아를 찾아가겠죠. 그러면 저는 바로 버려지는 거잖아요, 아니에요?”“그럴 리가 없잖아. 도윤이랑 설아는 이미 지나간 인연이야.”“누가 그래요! 도윤이는 그냥 차설아를 잠시 잊어서 저를 그 여자로 생각하고 곁에 두는 거예요. 지금 나한테 다정했던 만큼 기억만 돌아오면 바로 매정해질 거라고요! 그리고 모든 사랑은 또 차설아한테 퍼주겠죠.”“그럴 수도 있지만...”엉엉 우는 서은아를 보며 측은지심이 생겨난 소영금은 그녀를 다독이
“유감일 것도 없어요. 내어준 게 아니라 갚은 거니까.”차설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나 위해서 말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내가 손해 볼 건 없는 거래에요.”“알겠어요... 설아 씨가 비밀로 해주길 원하신다면 저희도 당연히 말은 안 하죠. 떠나고 싶으실 때 저한테 알려주시면 제가 서영 언니한테 물어볼게요. 하지만 언니도 별말 없이 보내줄 거에요.”“아직은 급하지 않아요.”차설아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진이 아직 안 깨어났다면서요, 일어나서 눈은 제대로 보이는지 확인한 뒤에 기회 봐서 나갈게요. 만약 수술이 성공적이지 않아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더 효율적이긴 하잖아요.”“설아 씨는 어쩜 이렇게 착해요? 우리 도련님을 이렇게 다 생각해주시고, 설아 씨는 우리 도련님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요.”차설아의 말에 제대로 감동받은 현이는 순진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도련님도 설아 씨한테만큼은 진심이니까 아무 걱정 마세요. 회복 마치고 나면 성대 그룹 주권도 성도윤 손에서 빼앗아 오실 거에요. 그때는 도련님이 성도윤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을 테니 설아 씨한테도 꼭 제대로 보상해주실 거예요.”“그런 생각까진 안 해봤는데...”차설아도 자신의 행동이 성대 그룹의 내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눈이 보이지 않아 잠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긴 했지만 성진은 그리 쉽게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동안 필시 성도윤에 대응할 방도를 마련했을 것이다.그런 성진과 맞서려면 성도윤도 한동안 바빠질 것 같았다.하지만 차설아는 그래도 멀어버린 눈 덕분에 그 꼴사나운 모습들을 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이렇게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사고회로를 돌리는 게 바로 차설아였다.---그 시각, 성도윤의 뇌수술도 한창 준비 중이었다.이미 수술복으로 환복을 마친 성도윤은 수술실에 들어가 있었고 문밖에는 소영금, 서은아, 진무열 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주머니, 아직 시간
“아, 아니야!”똑똑한 원이가 눈치라도 채면 집요하게 캐물을 걸 알기에 차설아는 당황하며 다급히 부인했다.“엄마 아무 일도 없이 잘 있어. 엄마한테 언제 무슨 일 생기는 거 봤어? 걱정 말고 동생 잘 챙기고 민이 이모 말씀 잘 듣고 있어.”말을 마친 차설아는 바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원이는 그렇게 놔두질 않았다.“엄마한테 생긴 일이 적진 않죠.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데요,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니까 영상통화 못 하는 거잖아요. 1초만 켜요, 아무 일 없다는 거 내 눈으로 확인하면 믿어줄게요.”“그게...”원이를 속이지 못한다는 걸 알아챈 차설아는 핸드폰을 멀리 놓고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원아, 뭐라는지 잘 안 들리네? 엄마 지금 친구랑 등산 하고 있어서 신호가 안 좋아. 나중에 통화하자!”말을 마친 차설아가 통화를 끝내자 옆에서 보고 있던 현이가 감탄하며 말했다.“설아 씨는 정말 행복하겠어요. 아들딸 다 저렇게 귀엽고 똑똑한데 엄마도 엄청 사랑하는 게 눈에 보여요!”“나는 행복한데 애들은 행복하지 않아요...”“나 따라다니면서 겁도 많아졌고 힘든 일도 많이 겪었어요. 나는 좋은 엄마는 아니에요.”“그런 말씀 마세요. 애들한테 설아 씨처럼 착하고 대단한 엄마가 있어서 행복할 거예요. 설아 씨는 애들이 설아 씨랑 살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생각해도 애들은 엄마랑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을 거예요.”아직 어리지만 아이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현이는 아들딸을 모두 둔 차설아가 부러웠다.그렇게 아름다운 가정인데 엄마가 시각장애인이 돼버렸으니 아이들이 얼마나 가슴 아플지 눈에 선해 현이는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집에... 모셔다드릴까요?”동정심이 차오른 현이는 차설아에게 앞으로의 생각을 물었다.“나 나갈 수 있어요?”그에 차설아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하죠, 설아 씨는 도련님한테 빛을 보게 해준 은인인데 하늘의 별을 따달라 해도 다 드려야죠. 자유를 원하시면 두말없이 보내드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