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되찾은 서은아는 재빨리 창고 입구에 있는 성도윤에게 달려갔다.“도윤아, 어때?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아주머니는... 너 혼자 온 거 아니겠지?”서은아는 자기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도윤의 팔을 붙잡고 소영금을 찾기 시작했다.“혼자 왔어.”성도윤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별 감정이 없었다.“뭐? 혼자 왔다고? 너... 정말 어떻게 왔어. 진짜 다친 데는 없어?”서은아는 눈이 먼 성도윤이 어떻게 몇십 킬로미터 떨어진 별장에서 이 험악한 외딴 창고에 도착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 설아는 어디에 있어?”성도윤은 그윽한 눈동자로 서은아를 쳐다보며 다급하게 물었다.“정말 그렇게 사랑해?”서은아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붉히면서 말했다.“걔가 우리 둘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너는 전혀 원망스럽지 않아? 혼자 이렇게 먼 곳까지 오면서 원수와 부딪히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 그런 상황이 없다고 해도 기차나 자동차에 치인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냐고. 진짜 그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어?”“내가 말했잖아. 이건 다 중요하지 않다고.”성도윤은 차가운 표정으로 서은아의 팔을 뿌리치고 벽을 더듬으면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알려주기 싫으면 내가 직접 찾을 거야.”“같... 같이 가줄게. 어디 있는지 알아.”서은아는 속으로 아무리 미워하고 화가 나더라도 성도윤 혼자 내둘 수 없었다. 게다가 성진이 부근에 있기에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재빨리 앞으로 다가가 성도윤을 부축했다.“말했지. 나는 곧 네 지팡이야. 네가 어디를 가든 나는 너와 함께할 거야.”“고마워. 은아야. 너는 좋은 사람이야. 절대 설아를 죽이지 않았을 거야.”성도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은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제발 찾아줘. 설아가 무사하기만 하면 나는 따지는 않을게.”“잠깐만! 나도 같이 갈 거야.”성진은 줄곧 창고 안쪽에 서서 성도윤과 서은아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서은아와 성도윤의 대화는 너무 이상했
하지만 성진과 성도윤은 전혀 믿지 않았다. 성진은 버럭 화를 내면서 서은아를 위협했다.“아직도 우리를 속여? 내가 믿을 것 같아? 네가 강으로 밀어 넣은 거잖아. 일부러 시간을 끌려고 이러는 거지. 설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너도 같이 죽을 줄 알아.”성도윤도 말했다.“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숨기지 마. 설아가 살아 있는면 아무것도 따지지 않을게. 강물이 이렇게 철철 흐르는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난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숨길 생각도 없고. 설아는 정말 투신하지 않았어. 너희들이 강물을 다 뺀다고 해도 찾을 수 없어. 그냥 헛수고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해주는 거야.”서은아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때 성진은 핸드폰의 불빛으로 강가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저 옷! 설아 옷이잖아. 이곳에서 떨어졌네.”서은아는 그쪽을 보고 깜짝 놀랐다.“설아 옷 맞아. 정말 발을 헛디뎌 빠진 건 아니겠지?”“...”성도윤은 물살 소리를 듣더니 서은아의 팔을 내던지고 강가를 향해 달려갔다.“차설아!”그는 난간을 더듬으며 차설아의 이름을 불렀고 그에 응답한 것은 물소리뿐이었다. 성진도 따라가 물살을 살피고 옆에 있는 성도윤을 살폈다. 그리고 강 중앙의 한 곳을 가리키며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저것 봐. 떠다니는 게 혹시 설아인가? 꼼짝도 하지 않네...”“어디?”“바로 형 정면 두 시쯤 방향에. 이럴 게 뻔한데도 못 봤단 말이야?”성진은 다급한 목소리로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당장 구조 전화를 걸게... 빌어먹을, 여기 신호가 안 좋네. 내가 다른 곳에 가서 전화를 걸게. 여기 있어.”“늦었어.”성도윤은 성진을 아랑곳하지 않고 단숨에 강에 뛰어들었다. 강물이 너무 세서 성도윤은 여러 번 탐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그대로 떠내려갔다.“도윤아!”서은아가 올라왔을 때 그녀는 성도윤이 점점 더 멀리 떠내려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성진은 핸드폰을 들고 덤덤하게 걸어와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차설아가 운전석 문을 열고 도도하게 걸어왔고 자동차 불빛에 서은아와 성진이 환하게 비쳤다.“둘이 뭐해?”차설아는 차갑게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모두 멍해졌다.“잘됐네요! 드디어 나타났네요. 설아 씨!”성진은 긴장이 풀리며 감격에 눈시울을 붉혔다.“너무 놀랐잖아요. 하마터면 뛰어내려 설아 씨를 찾을 뻔했어요.”그러자 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날 찾으려고 뛰어내려?”차설아는 큰집을 떠난 후 바로 성심 전당포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서은아가 마음에 걸려 다시 돌아와 그녀를 놓아주고 성도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려고 했다.그리고 창조에 도착했을 때, 강변 쪽에서 두 사람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것을 보자 그녀는 차를 멈춰 세웠다. 두 사람이 바로 서은아와 성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성진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 서은아는 성진의 팔을 뿌리치고 차설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더니 그녀의 뺨을 호되게 내리쳤다.“이 재수 없는 년아. 도윤이가 너를 구하려고 강에 뛰어들었어. 만약 도윤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너를 죽일 거야.”“성도윤?”그러자 차설아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무슨 농담을 하세요? 도윤이는 큰집에 있는데 어떻게 강에 뛰어들어요.”“당연히 너를 구하기 위해서지. 왜 안 죽었어. 이 계집애야. 네가 죽으면 우리가 모두 해방되는 건데.”서은아가 차설아에 대한 원한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차설아의 머리를 잡아당겼다.“서은아. 미쳤어? 설아 씨를 다치지 마!”성진은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서은아의 머리채를 잡아 그녀를 옆으로 내동댕이쳤다.“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얼굴은요?”성진은 차설아의 얼굴을 부여잡고 선명하게 보이는 손바닥 자국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제가 차라리 저 계집애도 강에 밀어 넣을까요? 앞으로 설아 씨 털끝도 다치지 못
차설아는 창백한 얼굴로 얼음보다 차가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너 같은 사람은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어. 오늘 밤을 기억해. 오늘 밤 내가 죽으면 바로 네 탓이야. 네가 직접 죽인 거야. 네가 말하는 소위 사랑으로 한 사람을 죽인 거야.”성진은 눈을 끔뻑거리며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무슨 뜻이에요?”“다음 생에 보자!”차설아는 그렇게 말하고 성진을 밀어 던지고 단호하게 강에 뛰어들었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 때문에 차설아는 사정없이 떠내려갔다.“제... 제발!”성진은 철철 흘러넘치는 강물을 보면서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차설아처럼 똑똑하고 이성적인 여자가 이렇게 충동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는 온갖 계략을 다 생각해 보았지만 차설아가 성도윤을 위해 투신할 줄은 몰랐다.지금 그는 모든 것을 이긴 것 같기도 하고 또 모든 것을 잃은 것 같기도 하다.서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강가로 달려갔다.“정말, 정말로 뛰어들었다고? 이 두 사람 다 미친 거 아니야. 이건 자살과 무슨 차이가 있어?”“그래. 둘 다 미쳤어.”성진은 영혼 없이 말했다.“그럼 지금 어떡해? 혹시... 너도 뛰려고?”서은아는 넋이 나간 듯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물었다.“너도 뛰어내리고 싶어?”성진은 사악한 눈빛으로 성은아를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성도윤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다며? 사랑한다며? 왜 같이 뛰지 않아?”서은아는 거센 물살을 바라보며 다리를 떨었다. 긴장한 그녀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이런 상황에서 뛰어내리면 무조건 죽을 거야. 내가 죽는다고 달라질 게 없잖아.”“그러면 사랑하지 않는 거잖아!”“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평가해. 너... 너도 뛰어내리지 않았잖아. 너도 사랑한다며!”“그래서 우리는 같은 사람이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야. 저 두 사람이야말로 완전히 미쳐버린 거지...”성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이성을 되찾은 후 핸드폰으로 구조 요청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도윤은 강바닥의 평평한 바위 옆에 누워 있었다.“성도윤!”그녀는 속으로 너무 기쁜 나머지 발에 난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쏜살같이 성도윤을 향해 달려갔다.성도윤은 물에 빠졌기에 이미 혼수상태였고 몸도 차설아처럼 여러 군데 상처가 있었다. 왼쪽 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정도였다.“버텨야 해. 반드시 버텨야 해.”차설아는 칼로 심장을 베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성도윤을 밖으로 끌고 나온 후 즉시 몸을 숙여 인공 호흡을 시작했다.성도윤의 입술은 그의 몸처럼 차가웠고 잘생긴 얼굴은 물에 너무 오랜 시간 담갔기 때문에 전혀 사람처럼 핏기가 없었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도윤 씨, 빨리 일어나. 빨리!”차설아는 그의 가슴을 빠르게 누르며 입으로 공기를 그의 입에 불어넣었다. 구슬 같은 눈물이 멈출 수 없이 뚝뚝 떨어졌다.그녀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당했지만 지금처럼 당황하고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설령 성도윤과 어떤 미래도 있을 수 없다고 일찌감치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성도윤이 무사하고 행복하기를 바랐다.“콜록. 콜록! 콜록.”성도윤은 차설아의 필사적인 구조 속에서 겨우 의식을 되찾았고 그의 손바닥은 차설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마치 지옥에 있는 사람이 다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잡은 듯했다.“그래. 좋아. 잘했어. 조금만 버티면 구조대가 올 거야...”차설아는 계속 엎드려 성도윤에게 인공 호흡을 했다.성도윤의 입술은 너무 익숙했고 매혹적이었다. 몸이 얼음처럼 차갑던 성도윤도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했다.성도윤의 의식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반혼수 상태였다. 그는 마치 구름 위를 밟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하늘거려 지금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성도윤이 유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바로 차설아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시력을 잃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해도 차설아가 무사한지 확인해야 했다.“차설아... 차설아, 무서워하지 마. 내
구조대의 대원이 기뻐서 소리쳤다.“정말 말도 안 돼요. 이렇게 급한 강에서 살아남다니. 이건 기적이에요.”“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병원으로 옮겨요.”서은아는 사지가 온전하게 바닥에 누워있는 성도윤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또 한편으로 마음이 답답했다.그녀는 나약한 자신이 싫었다. 만약에 성도윤을 구하려고 가장 먼저 뛰어내렸다면 지금 그의 옆에 함께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일 것이다.“우리도 병원에 옮기고 싶은데... 두 사람은 떨어지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꽉 안고 있어요. 빨리 서 있지만 말고 와서 도와줘요.”구조대 대장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안간힘을 쓰며 성도윤과 차설아를 갈라놓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전혀 꼼짝하지 않았다.여러 사람들이 와서 손을 썼지만 전혀 갈라놓을 수 없었다.“제가 할 게요.”옆에서 굳은 얼굴로 이 모든 걸 구경하던 성진이 차갑게 말했다.지금 그의 마음은 서은아와 마찬가지로 온통 질투뿐이었다.하지만 서은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성진은 차설아 따라 강에 뛰어들지 않는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그녀를 가지려면 천만 가지 방법이 있다. 함께 죽는다는 건 가장 미련한 짓이었다.성진이 입을 열자, 구조대원들은 자리를 비켜주었다.성진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차설아의 얼굴을 움켜쥔 다음 그녀의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변태 같은 새끼. 사람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넌... 정말 너무 변태 같아.”성진은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차설아가 숨을 못 쉴 정도로 입맞춤했다.“으으...”이 방법은 정말 효과가 있었다.혼수상태이던 차설아는 숨을 쉬지 못해서 괴로운 모습을 보였고 몸이 불편한지 팔을 벌려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밀쳐내려고 했다.“빨리. 빨리! 손을 놓았어요. 빨리 떨어지게 잡아당기세요.”구조대원은 그 기회를 타서 재빨리 성도윤과 차설아를 떼어 놓았다.성도윤은 이내 구급차에 실려 갔고 성진은 차설아를 안
“정말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네.”서은아는 손가락을 꼭 쥔 채 험악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성진이 한 말은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 셈이었다.요 몇 년 동안 서은아는 성도윤과 친한 친구로 지내면서 손은 잡은 건 물론이고 같이 먹고 같이 잔 적도 있었다.하지만 그런 관계로 손을 잡는 것과 커플이 손을 잡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서은아는 꿈에서도 성도윤과 진정한 커플이 되어서 손을 잡고 키스하고 달콤한 스킨십을 하고 싶었다.“이렇게 화를 내는 걸 봐서는 내 말이 맞았네. 오히려 넌 지금 고상한 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달갑지 않을 거야. 그런 마음이 널 점점 더 비뚤어지게 할 뿐이지. 결국에는 나보다 더 심한 변태가 될 거고.”성진은 서은아에게 다가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너와 달라. 난 도윤 씨를 사랑하기에 그를 해치지 않아. 넌 네가 차설아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네가 한 일은 전부 그녀를 해치는 짓이었지. 차설아의 말이 맞았어. 너의 사랑은 사람을 상처 주었고 넌 변태 같은 사람이었어.”서은아는 경멸하는 어조로 성진에게 말했다.그녀와 성진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었지만 그녀는 성도윤의 편을 들기 때문에 자연히 이 녀석과 같은 편이 아니었다.성진이 자기 말만 들으면 서은아는 성도윤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평생 성진과 말 한마디 하기도 귀찮았을 것이다.비록 성진은 확실히 약속을 지켰고 그녀는 성도윤과 함께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하하하. 우리 서 아가씨께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이제 물러서려는 거야? 설마 이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할 만큼 마음이 너그러운 건 아니겠지?”성진은 마치 무슨 큰 우스갯거리라도 발견한 듯 소리 내어 웃었다.“축복은 됐고... 다만 이렇게 많은 일을 겪었으니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싸우지 못할 것 같아...”서은아는 동시에 켜져 있는 두 개의 구급 등을 보고 마음이 착잡했다.“난 항상 차설아 이
하룻밤이 지나자 체력이 차츰 돌아온 차설아가 깨어났다.“깨났군요. 느낌이 어때요?”성진은 침대 옆에 앉아서 그녀에게 사과를 깎아주고 있었다.그는 껍질을 아주 얇고 길게 사과를 깎고 있었다. 사과를 다 깎았는데도 껍질은 끊어지지 않았다.그가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빈틈이 없고 완벽했다.차설아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병실을 보자 살짝 당황해서 말했다.“이게 어디야. 내가 살아 있었어?”“물론이죠. 이렇게 운이 좋은 사람이신데 작은 강이 어떻게 설아 씨 목숨을 빼앗아 가겠어요. 의지력이 정말 대단해요. 그렇게 심하게 상처를 입은 다리로 하류까지 버티다니요. 정말 잘한 거죠.”성진은 마치 귀여운 애완견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다 깎은 사과를 차설아에게 주었다.차설아는 사과를 먹을 마음이 없었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도윤 씨는? 어떻게 됐어?”“걱정하지 마세요. 그놈의 의지력은 설아 씨보다 더 놀라워요. 피를 그렇게 많이 흘리고도 살아남다니. 그것도 대단한 거죠.”성진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차설아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뭐라고. 그... 그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고... 으악!”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녀는 일어서려다가 다리의 상처 때문에 너무 아파서 얼굴이 찡그려졌다.“아이고. 뭐가 그리 급해요. 몹시 아프죠?”성진은 얼른 비틀거리는 차설아를 부축하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의사는 다리 부상 때문에 설아 씨는 보름 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난 괜찮아. 도윤 씨는 어떻게 됐어? 왜 피를 많이 흘린 거야? 그렇게 엄중하게 다쳤어? 그러면...”“진정하세요. 그는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어요. 지금 그의 곁에는 서은아가 지키고 있어요. 상황도 꽤 좋아졌어요.”“그러면... 잘됐네.”차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눈빛도 좀 어두워졌다.비록 성도윤을 서은아에게 양보할 준비는 다 되었지만... 정말 상황이 그렇게 되니 마음이 괴로웠다.“몸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정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
[재벌가 도련님과 암컷 돼지의 은밀한 관계!][사도현의 정신 상태 우려스러워...]사도현의 부드러운 노랫소리 덕분에 암컷 돼지는 첫 번째 새끼 돼지를 순리롭게 낳았다.“드디어 아기를 낳았어! 돼지야, 너는 정말 멋진 엄마야. 다른 아기도 힘내서 낳자!”사도현은 새끼 돼지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고는 낡은 옷에 감싸안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마음이 뭉클했다.예전부터 사도현은 딩크족이었다. 아이는 그저 악마 같은 존재일 뿐, 절대 가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갓 태어난 새끼 돼지를 보면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경윤이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거야. 경윤이를 닮은 아이면 얼마나 예쁠까?’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출산이 마무리되었다. 다섯 마리의 암컷 돼지는 순리롭게 몇십 마리의 새끼 돼지를 낳았고 장은학은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사도현이 빨리 달리고 용기를 낸 덕분에 다른 게스트를 제치고 먼저 1000점을 획득했다. 장은학은 마을 이장과 함께 꽃다발을 건넸고 ‘돼지 출산 전문가’라는 글이 적힌 상장도 주었다.사도현의 하얀 셔츠가 더럽혀졌지만 꽃다발과 상장을 안고 있으니 무척 행복했다.사도현은 배경윤 쪽으로 다가가서 환하게 웃더니 상장을 보여주면서 말했다.“경윤아, 내가 결국 해냈어. 네가 후회할 날이 올 거라고 내가 말했었지? 이제는 그렇게 여유롭지 못할 거야. 기대해도 좋아.”배경윤은 싱글벙글 웃는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고 슬며시 엄지를 내밀었다.“네가 진짜 해낼 줄은 몰랐어. 진짜 대단해.”날이 어두워지자 사도현은 게스트들을 불러 해산물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게스트들은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도현은 사람을 시켜 진찬영이 파티에 참가하지 못하고 업무 전화만 받게 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지내는 숙소로 걸어갔다.배경윤은 해산물 바비큐 파티에 참가하지 않고 혼자 별장의 베란다에 기대 넓은 바다를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날이 어두워
암컷 돼지들은 괴로워하면서 소리를 질렀고 허공에 대고 발길질했다. 그러면서 몸에 붙어있던 배설물이 사방으로 튀어서 접근하기 어려웠다.사도현은 토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고 천천히 다가갔다.“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 봐! 난산이어서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장은학은 급한 마음에 목청을 높여 말했다.“확실히 할 줄 아는 사람 맞아? 할 줄 모르면 당장 나와. 자네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잠시만요. 제가 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사도현은 코를 막고 겨우 말했다.‘이 세상에 내가 해내지 못하는 일은 없어. 고작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주는 걸로 겁먹지 말자. 나는 할 수 있어.’고민하던 사도현은 휴대폰을 꺼내 암컷 돼지의 출산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첫째, 산후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깨끗한 출산 공간을 만들어주고 괴망간산칼륨으로 암컷 돼지의 온몸을 한 번 닦는다.][둘째, 가위를 소독하고 새끼 돼지의 탯줄을 자른다.][셋째, 낡은 수건이거나 옷으로 새끼 돼지의 몸을 닦아주고 감싸안는다.][그리고 출산 과정에서 암컷 돼지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부드러운 말투로 다독이거나 노래를 불러서 암컷 돼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암컷 돼지의 출산 절차를 보고 난 사도현은 당장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연예계에서 알아주는 재벌가 도련님, 유명한 회사의 대표가 이제는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황당한 일이 연속 벌어지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사도현 씨, 할 수 있는 거 맞아요? 못 하겠으면 빨리 나오세요. 대학교 때 배웠던 적이 있어서 제가 더 잘할 것 같거든요.”하늘은 돼지우리 밖에서 목을 빼 들고 말했다. 하늘은 사도현 다음으로 제일 초라한 별장을 선택한 사람이었기에 별장을 바꾸고 싶었다.“할 수 있으니 들어오지 마세요. 이건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사도현은 심호흡하고는 가만히 누워있는 암컷 돼지를 괴망간산칼륨으로 닦아주었다.암컷 돼지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서 버둥거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