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할 바 없이 차설아는 재난을 면했다.그러나 그녀는 서은아에게 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여자가 가련하다고 생각했다.이 일은 오빠가 잘못한 것이고 또 서은아에게 빚진 것이니 오빠를 대신해 방법을 대여 보상할 것이다.성도윤에 관해서는... 그녀는 그와 작별인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함께 있지 않더라도 서로 후회하지 말고 나중에 떠올리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나를 놓아줘요, 잔인한 년! 능력 있으면 나를 놓아봐요!”차설아에 의해 창고 기둥에 묶인 서은아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긴장하지 마세요. 나는 너를 잠시 묶어둘 뿐이에요. 내가 하는 일을 마치면 풀어줄 거예요!”차설아는 차분한 어투로 서은아의 정서를 돌보려 했다.“내가 미안한 거 알아요. 당신의 그런 상처를 헛되이 당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악한 년, 능청 부리지 마세요! 날 단칼에 죽이든지 아니면 풀어줘요. 운도 좋게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도망갈 수 있다니 아마 이것이 운명인가 봐요! 나 서은아는 당신에게 패배할 운명이니 망설이지 말고 서둘러 손을 써요! “차설아는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믿거나 말거나 난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어요. 아까 내가 말한 것처럼 당신이 도윤 씨에게 대한 사랑은 나보다 더 깊고 확고하니 난 당신이 앞으로 나 대신 그를 돌보고 아껴주고 도와주길 바래요. 앞으로 난 그이와 더는 아무런 연결이 없을 거예요!”“능청 떨지 마세요!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또 도윤이를 꼬시려고 하는 짓이죠? 아쉽게도... 그는 절대로 널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이미 너를 죽도록 미워하니 찾아간다 해도 헛수고일 뿐이예요!”서은아는 차설아와 성도윤이 다시 사랑에 빠질까 봐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만약 이 두사람이 재결합할 수 있다면 더는 서은아가 좋아하는 그 성도윤이 아닐 것이다.한 남자가 이토록 미천하다는 것은 길가의 개와 뭐가 다를까?“생각대로 하세요!”차설아는 서은아와 더는 말하지 않았고 백매의단 사람
“아직 졸리지 않으니 저를 상관하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성도윤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혼자서 찬 바람을 쐬는 게 무슨 재미가 있어? 방으로 돌아가. 안은 좀 따뜻해.”“혼자 있고 싶어.”“하지만 도윤아...”소영금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그 여자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못 잊은 건 아니겠지?”“...”“바보 같은 우리 아들, 난 네 엄마인데 내가 널 모를 수 있겠어? 넌 그렇게 훌륭하고 뭐든 만점인데 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는 거야. 그 여자만 아니었다면 네 인생은 순탄했을 거고 너도 전혀 고생도 하지 않았을 텐데. 너도...”“엄마, 제가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잖아요.”성도윤의 목소리는 점점 분노가 쌓였고 그는 긴 손가락을 살짝 조였다.“그래. 알았어. 엄마가 그만할게. 필요한 게 있으면 벨을 눌러.”소영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며 말없이 뒷마당을 떠났다.차설아는 구석에 잘 숨어있었기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그녀는 돌기둥 뒤에 숨어서 한참이나 성도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도윤 씨, 정말 살이 많이 빠졌네. 이 정도로 약했어? 단지 뱀에게 물렸을 뿐인데 왜 이렇게 풀이 죽어있는 거야? 정신 차리라고. 한밤중에 잠도 안 자고 왜 슬퍼하고 있는 거야. 분명히 말하는데 난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도윤 씨가 목숨이 위태로울 때, 난 하느님과 거래했어. 도윤 씨가 살 수만 있다면 난 평생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고 매달리지 않겠다고 했지. 도윤 씨가 날 미워하고 싶다면 마음껏 미워해도 돼. 날 사랑하는 것보다 날 미워하는 게 더 행복할 거야...”“앞으로 도윤 씨는 서은아 씨와 함께 행복하게 살면 돼. 은아 씨는 당신을 정말 사랑해. 당신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큰 모욕을 당했어. 은아 씨가 했던 희생은 나도 할 수 없었어. 당신이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하고 편할 거야...”차설아는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줄곧 중얼댔
성도윤이 그런 말을 하자 차설아는 자기 생각을 확신했다.‘도윤 씨는... 정말 실명했어.’차설아는 성도윤의 바로 앞에 서 있는 데도 전혀 알지 못했다.“말을 안 하는 것을 보니 은아가 맞네.”성도윤은 별다른 생각 없이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오늘 밤 달빛이 좋을 것 같아. 밤바람도 살살 불고 있으니 말이야. 내 옆에 있어 줘.”“알았어.”차설아는 서은아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성도윤은 아무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어머니와 서은아 외에 다른 사람이 쉽게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기에 그는 당연히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차설아는 그가 손으로 뭔가를 더듬는 것을 보고 아마 커피를 찾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얼른 커피잔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두 사람의 손가락이 잠시 닿았다.성도윤은 먹물처럼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무언가를 발견한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두 사람은 그렇게 조용히 앉아 있었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성도윤은 말하기 싫었고 차설아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밤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꽃향기가 그윽했다. 오히려 말할 수 없는 낭만이 흘렀다.한침이 지나서야 성도윤이 입을 열었다.“은아야, 그래도 네가 옆에 있으니 참 좋아. 엄마처럼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고 내가 이런 핸드드립 커피를 제일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으니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난 예전에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어. 특히 밤에 커피를 마시면 그날 밤은 도저히 잘 수가 없었지. 하지만 내 전처는 커피를 너무 좋아했어. 어디서 커피콩과 커피 머신을 사 왔는지도 모르겠어. 게다가 그녀는 어떻게 커피콩을 그렇게 곱게 갈았는지도 몰라. 아무튼 그녀가 타 준 커피는 특별한 매력이 있어서 한 모금 마시면 중독이 되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어.”“그랬구나.”차설아는 계속하여 서은아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얼버무리며 대답했다.차설아는 성도윤이 자기가 탄 커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성도윤은 웃으며 모든 것을 꿰뚫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들통났구나. 넌 전혀 은아가 아니야. 은아는 차설아가 죽도록 미울 텐데 어떻게 그녀의 좋은 말을 할 수 있겠어. 네가 도대체 누구인지 내가 맞춰볼게...”성도윤은 이마를 찌푸리며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청하야? 아니면 윤설... 알았어. 넌 분명히 어머니가 날 돌봐주라고 새로 모집했다는 라윤이지? 왜냐하면 네 목소리는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어.”“...”차설아는 원래 슬픔에 겨워 눈물이 우박처럼 주르륵 떨어졌지만 성도윤의 말을 듣자 순간 눈이 뒤집혔다.‘성도윤, 정말 대단하네. 임채원과 서은아 외에도 여자가 이렇게 많았던 거야?’알고 있는 여자라는 여자는 전부 말했고 만나보지도 못했던 하녀도 말했으나 차설아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도윤 씨는 정말 애틋한 감정이 있는 거야? 아니면 애틋한 척하는 거야?’성도윤은 여자가 말하지 않자 계속하여 말했다.“누가 되든 절대 차설아일 리는 없어. 차설아라면 방금 내 옆에서 날 챙겨주면서 날 안지 않을 수는 없었을 거야. 그건 설아 스타일이 아니라고.”“...”차설아는 멍해져서 묵묵히 성도윤을 바라보고 있었다.“네가 만약 차설아라면 와서 날 안아줘. 난 과거를 불문하고 네가 한 모든 짓을 전부 다 용서할 수 있어.”성도윤은 마지막 일말의 환상을 품고 두 팔을 벌린 채 여자가 품에 안기기를 기다렸다.그는 비록 실명했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일부러 서은아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다만 앞에 있는 여자가 차설아라는 확신은 없었다.그래서 그는 평소와 달리 수다를 많이 떨었다. 그녀에게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고 그녀가 용감하게 그에게 말해주기를 원했다.성도윤은 비굴하고 자존심을 버린 채 오랫동안 팔을 벌리고 기다렸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기지 않았다.“내가 눈이 멀었으니 역시 넌 나를 이제 싫어하는구나. 기본적인 생활도 혼자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너에게 어울릴 수 있겠니?”성도윤은 자
그의 품에 안긴 여자는 불편하듯 몸을 움직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성... 성도윤 씨, 오해하셨어요. 전 설아 씨가 아니에요.”그러자 성도윤은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졌다. 잘생긴 얼굴에는 서운함이 가득했고 그는 차갑게 말했다.“넌 누구야?”“저... 사모님께서 특별히 도윤 씨를 돌보라고 저를 보냈어요. 제 이름은 려윤이에요.”려윤은 작은 얼굴에 하얀 피부를 가졌고 딱 봐도 착하게 생겼다.성도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신사답지 않게 바로 그녀를 밀어내며 기분이 언짢은 듯 말했다.“온 지 얼마나 되었어?”“한, 한참이나 되었어요.”“그러면 아까 커피도 따라주고 밤바람도 쐬어주고 내 말도 들어준 여자가 계속 너였단 말이야?”“네. 맞아요.”려윤은 성도윤의 호감을 사기 위해 차설아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완전히 숨겼다.“사모님께서 도윤 씨가 기분이 좋지 않으니 조용히 모셔야 한다고 해서 전 말하지 않고 도윤 씨의 말을 줄곧 듣고 있었어요. 뜻밖에도 설아 씨로 오해하셨네요. 정말 죄송합니다.”“네 탓이 아니야.”성도윤은 무뚝뚝한 눈빛으로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냥 내가 너무 순진해서 인간의 매정함을 잊었던 거야.”“도윤 씨, 아직 설아 씨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저를 믿어주신다면 제가 한번 연락해 드리겠어요.”려윤은 용기를 내서 능청스럽게 말했다.성도윤은 비록 시력을 잃었지만 그의 완벽한 얼굴과 타고난 고귀한 카리스마는 여전히 많은 여자가 봐도 설렜다.려윤은 그렇게 해서라도 성도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꿈만 같을 것이다.“됐어.”성도윤은 침울하고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나와 그녀는 이미 끝났어. 사실 난 그녀의 냉담함에 감사해야 해. 이제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어.”“그... 그러면 도윤 씨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거예요?”려윤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용기를 내어 성도윤의 팔짱을 꼈다.“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 없이 자랐고 양아버지가 저를 키웠어요. 양아버지는
려윤은 비굴하게 갑자기 성난 성도윤을 달래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밀쳐내서 땅에 넘어뜨렸다.으악!려윤이 돌기둥에 머리를 부딪치자 즉시 피가 흘렀고 그녀는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이제 성도윤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겠지? 살고 싶다면 당장 꺼져.”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려윤을 향해 경고했다.그는 도도한 남자였다. 누구의 동정도 필요 없었고 누구에게도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여자가 결혼하지도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대가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건 정말 너무 웃기고 슬프기도 했다.“도윤 씨, 제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에요. 도윤 씨가 저를 쫓아낸다고 해도 전 이곳에 남아 있을 겁니다. 저에게 도윤 씨를 돌볼 기회를 주세요. 오늘 도윤 씨의 손에 죽더라도 저는 원망 한마디 하지 않을 거예요.”머리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려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표했다.먼 곳에서 한참 지켜보던 소영금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었다.“됐어. 려윤아, 내 선택이 틀리지는 않았어. 넌 내 아들을 돌보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야. 빨리 돌아가서 상처부터 처리해.”소영금은 려윤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다.“오늘 고생 많았으니 앞으로 내가 잘해줄게.”“사... 사모님, 그러면 이만 물러갈게요.”려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묵묵히 물러갔다.오늘의 고육지책 때문에 려윤은 이제 성씨 가문에서 자기 자리를 잡았다. 성도윤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받아들여야 했다.소영금은 성도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영금도 속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도윤아, 려윤이는 내가 신중하게 골라서 널 돌볼 사람이야. 려윤은 의술도 알고 매일 너와 함께 있으면 네 눈 회복에도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 려윤에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도망가면 어떡하려고.”“지금 전 초라한 나머지 하녀에게도 뭐라고 못하는 처지에요? 아니면... 하녀도 이제는 저를 미워하고 저를 버릴 수 있는 거죠?”성도윤은 스스로 자기를 비웃었다.시력을 잃자 그는 자존
소영금은 성도윤의 차가운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백매 의료단은 정말 신비한 존재이지. 어디서 기원했고 단장이 누구인지도 미스터리야. 하지만 의학계에서 그들의 지위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뛰어나지. 특히 그들이 발명한 방혈 훈골 치료법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아무리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백매 의료단 단장님께 찾아 가면 기껏해야 열흘이면 나을 수 있다고 했어. 우리가 려윤이를 통해서 백매 의료단 단장님을 만날 수 있다면 너의 시력이 회복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줄곧 널 괴롭히던 어지럼증도 완치될 수 있을 거야!”소영금은 여기까지 말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훔쳤다.“너의 병만 고칠 수 있다면 난 지금 바로 죽어도 한이 없겠어.”성도윤은 처음에 어머니가 헛소리하신다고 생각했는데 방혈 훈골이라는 치료법을 듣자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뼈를 깎는 치료법은 들어보았어도 방혈 훈골이라는 건 들어도 보지 못했어요. 단장님이라 하는 사람도 정말 대단하네요. 환자의 피를 빼내는 거예요?”“그건 누가 알겠어? 거봐. 너도 궁금해하잖아. 어차피 우리는 지금 다른 방법도 없으니, 단장님을 찾아서 한번 시도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니?”“어머니께서 그 신의님을 찾으신다면 한번 시도해 보죠.”성도윤은 태도가 변했다. 처음에는 스스로를 가둬 두고 어떤 치료도 거부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을 열고 치료받는 걸 시도해 보려고 했다. 이미 큰 진보였다.하지만 그가 시도를 해보려는 건 완쾌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었다.그의 신분으로서 자살할 수 없었다. 너무 나약한 표현이었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평생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치료하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면 또 달랐다. 그러면 그의 죄책감도 적을 것이다.이 신의님의 방혈 훈골 치료법은 듣자 하니 황당한 치료법인 것 같았고 성도윤도 이런 사람의 치료를 받으면 사고가 쉽게 나겠다고 생각했다.소영금은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원이, 달이...”성도윤이 묵묵히 아이들을 떠올리자 눈 밑의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제가 지금 이 꼴이 되었는데 무슨 체면으로 더 이상 그들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겠어요. 그들도 나처럼 쓸모없는 아버지를 원하지 않을 거예요.”“그러면 쓸모가 있으면 되잖아. 넌 단지 눈이 안 보이는 것뿐이야. 머리는 아직 남아 있으니 회사의 일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야. 다만 이 기간에 넌 모습을 드러낼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특히 성진 이 자식에게 네가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돼. 들통나면 일이 곤란해질 거야.”소영금은 신중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녀는 성도윤이 엄중한 전염병에 걸려 지금 투병 중이기에 잠시 회사 업무를 처리하지 않고 외부인도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하지만 그런 거짓말도 잠시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들통이 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빨리 백매 의료단 단장님을 찾아야 했다.바로 그때 밖에서 하인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돼요. 성진 도련님, 사모님의 허락 없이 절대 누구도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으니 협조해 주세요.”“그게 다 뭐예요. 저도 성씨 가문의 사람인데. 둘째 형님께서 투병 중이시라 하니 제가 너무 걱정되어서 병문안을 온 거죠.”성진은 하인이 말리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가면서 경멸의 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빌어먹을 자식!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소영금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성도윤에게 당부했다.“넌 먼저 방에 돌아가. 내가 저 자식을 상대할게. 명심해... 절대 나서지 마!”거실 안.성진은 이미 뛰어 들어왔고 두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큰어머니, 하인 교육을 잘했어야죠. 정말 왜 그러는 거죠. 저는 좋은 마음으로 투병 중이신 도윤 형님의 병문안을 왔는데 저 여자가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될 부끄러운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요.”소영금은 현재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
성도윤은 묵묵히 참다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배경윤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랑 차설아의 관계는 너 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지금 행복해. 네가 보기 불편하면 그냥 나가면 되잖아.”“...”배경윤이 성도윤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손목이 붙잡히자 이번엔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차려 했다.성도윤은 체격이 크고 힘도 센 편이었지만 배경윤의 저돌적인 공격에 살짝 밀리는 기분이 들어 결국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단단히 옭아맸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바로 그 순간, 사도현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상황이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성도윤과 배경윤도 순간 굳어버렸다.“오해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성도윤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배경윤을 놓아주었고 배경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도윤의 발을 힘껏 밟았다.“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성도윤은 발끝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차설아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차설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는데 그녀의 절친인 배경윤까지 보니 정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슬쩍 사도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너, 보험 많이 들어둬.”“무슨 뜻이야?”사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뜻이긴? 저 호랑이 같은 여자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성도윤이 배경윤에게 얻어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투덜댔다.그러자 사도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우리 경윤이는 원래 이렇게 폭력적인 애가 아니야. 분명 형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런 거겠지.”그는 중요한 순간에 배경윤 편을 들기로 했다.사실 예전에는 서로 의견이 다를 때마다 배경윤과 말다툼이 잦았다.배경윤은 성도윤을 두고 철저히 쓰레기라고 욕했고 사도현은 차설아가 너무 까다롭다고 반박하며 두 사람은 끝없는 논쟁을 벌이곤 했다.하지만 이
“그만 좀 해요, 너무 닭살 돋아요.”차설아는 예전 같았으면 이런 사랑 고백을 들으면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쑥스럽기보다 오히려 닭살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엔 성도윤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전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이었고 실제로는 입만 열면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었다.성도윤이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한 뒤 말했다.“물 받아놨어. 들어가서 몸 좀 풀고 와.”“좋긴 한데... 좀 나가주겠어요?”차설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건 안 되지. 당신이 미끄러지거나 수건이 필요하거나 옷을 입어야 할 때 누가 도와줘?”“괜찮아요,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 줘요. 도윤 씨가 여기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어요.”차설아는 아직 성도윤과 그렇게까지 오픈된 관계는 아니었다.게다가 자신만 벗고 그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알겠어. 그럼 욕조까지만 데려 줄게. 다 끝나면 전화해.”성도윤이 한발 물러나며 휴대폰을 욕조 옆 선반에 올려놨다.“여기 핸드폰 놔뒀어. 손만 뻗으면 닿을 거야.”“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가요!”차설아가 손을 휘저으며 성도윤을 재촉했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차설아는 그가 정말 나갔다고 확신하고서야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원래 몸매가 좋은 편이었다.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피부는 우유처럼 부드럽고 하얬다. 실루엣만 봐도 누구든 넋을 놓을 정도였다.그런데, 옷을 벗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오자 차설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도윤 씨, 변태예요?!”“들켰네.”성도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아쉬운 듯 차설아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불만 지르고... 알겠어, 나 간다.”그는 투덜거리며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더 있다가는 차설아가 진짜로 그를 때려눕힐지도 몰랐다.성도윤은 자
“와, 대박! 이런 주제에 감히 남자를 뺏으려고 했다고?”그 여자들은 비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와 배경윤을 마구 찍어댔다. 조롱과 비아냥이 섞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으...”배경윤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편으로는 차설아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그 여자들과 맞서야 해서 허둥지둥했다.“꺼져!”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성도윤이 험상꿎은 얼굴로 난동을 부리던 여자 하나를 단숨에 잡아채 거침없이 밀쳐버렸다. “설아야!”그는 온몸에 더러운 물을 뒤집어쓴 채 힘없이 서 있는 차설아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주저 없이 배경윤을 밀어내고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았다.“도윤 씨?”차설아가 손을 더듬어 그의 손을 잡았다가 순간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가까이 오지 마요. 나 더러워요.”“상관없어.”성도윤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아 두 손을 꼭 쥐고는 후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너무 늦게 왔지.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그 모습을 본 여자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이 장면은 누군가에 의해 영상으로 찍혀 인터넷에 퍼졌고 각종 편집과 조롱으로 도배되었다.온라인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세상에 공평한 법은 있구나. 이게 바로 업보지!][아무리 그래도 팬들이 너무 폭력적이야.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그리고 바로 이 영상을 통해 차설아가 실명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한편, 성진의 차 안.성진은 무료한 듯 핸드폰을 스크롤내리며 영상을 보고 있었다.최근 권력 싸움에서 그는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했다. 승리를 코앞에 두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러다 우연히 영상 속 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선글라스를 낀 채,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초라하게 서 있는 차설아.그 순간, 그의 심장이 조여들었다.“설아의 눈이...”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졌다.그가 가지고 있는 이 눈은 바로 차설아가 준 것이었다.여러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