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서는 강한서가 기억을 잃게 된 원인이 다 송가람의 짓이었다는 사실과 그녀가 강한서에게 먹여서는 안 될 금지품을 먹였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오빠가 계속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야?’ 강민서는 백미러로 민경하를 슥 쳐다보았지만 민경하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다 알고 있었던 건가?’ 강민서는 그들이 지금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자신에게 숨기지 않으려는 건지를 몰랐다. 빠르게 달리는 차의 시속이 불편한지 송가람은 미간을 찌푸렸다. 민경하는 행여나 그녀가 차에 구토를 할까 두려워 얼른 비닐봉투 하나를 꺼내 손에 들었고 송가람은 그런 민경하를 꼭 안으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서 오빠.” 민경하는 갑작스러운 송가람의 스킨십에 당황해 몸이 굳었고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송가람 씨,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송가람은 그의 대답을 아랑곳하지도 않으며 계속 중얼댔다. “한서 오빠, 저 오빠를 진짜 많이 좋아해요. 정말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오빠는요? 저 좋아하세요?” 민경하는 송가람을 힘껏 밀어낼 수가 없었고 말을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응, 싫어하지는 않아.” 송가람은 강한서가 대답한 줄 알고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인데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겠어요. 한현진 그 사람은 그냥 나보다 먼저 오빠를 가로챈 것뿐이죠. 그렇죠?” “응...” 민경하는 혹시라도 송가람이 갑자기 소리를 지를까 두려워 그냥 그녀의 말에 강한서인 척 하며 대충 대답해주고 있었다. 강민서는 운전대를 꼭 잡고 있었지만 시선은 백미러에서 떼지를 못했다. “한서 오빠, 오빠.” 송가람은 갑자기 민경하의 목을 꼭 끌어안더니 그의 얼굴에 뽀뽀를 했다. 그 모습을 본 강민서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하였다. 송가람의 뽀뽀에 빠르게 반응을 한 민경하는 깜짝 놀라 옆으로 비켜나다가 머리가 유리에 세게 부딪혔고 생각
지현성은 강한서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저랑 같은 연도에 대학에 들어선 최면술사, 특히는 박사 학위까지 딴 최면술사는 몇 없어서 제가 다 알고 있는데... 제 기억 속에 황 씨 성을 가진 한국인인 없었습니다.” 강한서는 핸드폰을 열어 사진 한 장을 지현성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입니다. 아세요?” 지현성은 사진 속 남자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 해지더니 말했다. “야마다 쇼타?” 강한서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일본말에 당황하며 물었다. “일본인입니까?” 지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희 학교 학생 아닙니다. 저랑 같은 연도에 대학에 붙은 같은 학번학생도 아니고요. 근데 이 사람 매일이다시피 저희 교수님 수업을 들으러 왔었습니다.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머리도 총명해서 교수님도 이 사람을 좋아했고요. 하지만 저희 업계에서 이 사람 명성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전에 불법으로 어떤 여자에게 최면을 걸어 소송을 걸라고 협박했었습니다. 그런데 증거가 부족해 그냥 풀려나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산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혼자 사무실을 열어 자신이 우리 학교에서 들은 지식을 이용해 천천히 이름을 알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사람은 쉽게 안 변하는지 하는 수법도 아주 차하고 악질이라고 합니다. 돈을 벌어서는 다 유흥에 쓰고 술에 찌들어 살면서 알코올중독까지 걸릴 뻔했다고 하고 실력은 그 자리 그대로 발전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후에 고객에게 금지된 제품을 사용한 일이 밝혀지고 나서는 자격증도 다 회수되고 감옥에서 몇 년 살았습니다.” “그리고나서는 더는 저 사람 소식을 못 들었는데... 여기서 들을 줄이야.” 강한서는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어 지현성에게 물었다. “황닥터와 교수님은 아직 연락을 하는 가요?” “이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현성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이어갔다. “아마 하는 것 같습니다. 전에 교수님 따님분이 결혼할 때 식장에서 야마다 쇼타 씨를 마주친 적 있습니다. 근데
민경하는 강민서의 성격이 참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자주 바뀐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강민서의 옆으로 다가갔다. 민경하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 강민서는 물티슈를 꺼내들더니 발뒤꿈치를 조금 든 채로 민경하의 얼굴을 벅벅 닦았다. 강민서가 민경하의 얼굴을 닦아주는 그 힘은 마치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것 같았기에 아픔을 느낀 민경하는 인상을 쓴 채로 피해버렸다. 그러자 강민서는 짜증이 잔뜩 난 얼굴을 하고 그에게 물었다. “왜 피해요? 얼굴에 립스틱 자국 묻은게 아주 자랑인가 봐요?” 민경하는 강민서의 말에 얼굴을 어루만지던 행동을 멈추고는 되물었다. “립스틱 자국이요?” 강민서는 그를 째려보며 대답했다. “송가람 씨가 차에서 뽀뽀했잖아요. 기분 좋았나 봐요? 송가람 씨는 송 씨 삼촌 딸이 아니니까 이 틈을 타 재벌 집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말아요.” “...” 침묵하던 민경하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의 뜻은 우리도 가능성이 없다는 건가요?” “네? 뭐라고요?” 민경하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가씨께서 재벌 집안에 들어갈 제 꿈의 불길을 꺼버렸잖아요.” 강민서는 그의 말에 이빨을 꽉 깨물며 반박했다. “전 지금 송가람 씨 말을 하는 건데요? 누가 지금 이 말 하라고 했어요?”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제 고작 얼마나 만나봤다고 뭘 그렇게 아는 척 해요? 아니면 여기서 끝을 내고 싶은 건가? 뭐 하나 알려줄게요. 만약 정말 끝을 내고 싶은 거라면 가서 할머니께 말씀드려요. 저는 절대로 민경하 씨랑 같이 혼날 생각은 없으니까!” 민경하는 화가 나 씩씩 거리며 서있는 강민서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재벌 집안에 들어갈 꿈은 다시 꿔도 된다는 거죠?”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민경하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강민서는 물티슈를 그에게 툭 던져주며 말했다. “혼자 닦아요. 난 더러워 죽겠으니까.” ‘이래서 아까 차에 올라 탈 때 한현진 씨가 우리 오빠를 기어코 조수석에 앉힌
“강한서?”서해금은 확실치가 않았다.‘가람이한테 관심도 없는 강한서가 이런 늦은 시간에 함께 있다고?’“가람이 핸드폰이 왜 너한테 있어?”한현진은 강한서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말했다.“가람이가 취해서 잠깐 저희 집에 데려왔어요. 숙취해소제를 먹였는데 조금 정신이 돌아오면 보내려고요. 가람이가 이 상태로 집에 돌아가면 아줌마가 화낼 거라고 해서요.”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한서야. 가람이가 취했으면 집으로 보내면 되지. 너희 집으로 데려갔다가 이상한 소문이 돌면 어떡해? 아무리 그래도 현진이 약혼자인데 이러면 안 되잖아.”한현진이 일부러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가람이가 말리더라고요. 취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면 아줌마가 화낼 거라면서...”그러고 잠깐 멈칫하고는 계속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비서님이랑 함께 온 거니까 이상한 소문은 돌지 않을 거예요.”서해금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어 이 상황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때,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영상통화로 가람이를 보여줘.”당황한 한현진은 애써 침착하면서 말했다.“네.”음성통화를 끊은 지 몇 초 뒤, 서해금이 바로 송가람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한현진은 받지도, 끊지도 못하고 송가람의 핸드폰 화면 밝기를 가장 밝게 만들었다. 공포스러운 벨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핸드폰으로 강한서에게 문자를 보냈다.“아줌마가 가람 언니 상태를 확인하겠다면서 영상통화를 보내왔어. 얼른 끝내야 할것 같아.”얼마 후, 강한서한테서 알겠다는 답장이 돌아왔다.영상통화를 받지 않자 서해금은 끊고 또다시 걸었다.한현진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던 통화연결음이 재촉하는 것만 같아 불안했다.이때, 강한서가 방 안에서 나오면서 2층으로 올라오라고 했다.한현진은 송가람의 핸드폰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 강한서에게 아까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이때 강한서의 핸드폰이 울렸고, 이번에는 서해금이 강한서에게 전화한 것이다.강한서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서해금이 강한서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물었다.“가람이랑 함께 밥 먹으면서 너는 술 안 마셨어?”강한서가 대답했다.“저는 약을 먹어서 마시지 않았어요.”“가람이 말리지 좀 그랬어. 여자애가 밖에서 술 마시면 어떡해.”한현진은 움찔하고 말았다.‘정말 엄마 딸이 똑같네. 무슨 일이 있으면 맨날 남 탓하기 바빠.’강한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줌마, 저도 말려보긴 했는데 가람이도 이젠 성인이잖아요. 자기만의 선택의 자유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시면 가람이한테 전해주세요. 저도 곤란하니까 저한테서 이만 멀리 떨어지라고요.”서해금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말았다.더 말하기 싫은 강한서는 아예 카메라를 돌려 송가람을 비췄다.옷을 단정하게 입은 송가람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협탁에는 숙취해소제로 보이는 병 하나가 놓여있었다.서해금은 화면에 대고 송가람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지만 그녀는 취기가 올라 일어나지도 못했다.이때, 송가람의 핸드폰이 또 한 번 울렸다. 이번 발신인은 다름아닌 그녀의 아버지인 송병천이었다.한현진은 멈칫하고 말았다.‘아줌마가 집에 없나? 왜 아빠는 아줌마가 한서한테 전화하는 걸 모르고 있는 거지?’한현진은 곧바로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떠보려고 전화한 것이 틀림없어. 아까 가람 언니 핸드폰이 어디 갔냐고 물어봤잖아. 이런 젠장. 눈치가 참 빨라.’그나마 아까 2층으로 올라갈 때 송가람의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았기 다행이었다. 강한서가 통화하고 있을 때 송가람의 핸드폰이 울리면 무조건 무슨 일이 있다고 의심할 것이 뻔했다.한현진은 폐를 끼칠까 봐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이때 강한서가 말했다.“가람이 핸드폰은 민 실장님이 지금 1층에 충전하고 있어요.”서해금이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충전은 됐고, 가람이 얼른 보내.”“저는 지금 바빠서 그러는데 아줌마가 사람을 보내서 데려가시죠? 처음부터 가람이가 우리집에 오는 게 싫었는데 아줌마가 데리러 오면
그것보다도 비밀번호도 모르는데 핸드폰이 잠겨있다는 것이다.강한서가 송가람의 핸드폰을 가져가 잠깐 생각하고는 자기 생일 날짜를 입력하니 바로 풀렸다.한현진이 질투하면서 말했다.“가람 언니가 꽤 순정파네.”강한서는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고는 핸드폰 무선 배터리 공유 기능을 켜고 자신의 핸드폰을 송가람 핸드폰 뒷면에 갖다 댔다.한현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말했다.“이럴 수도 있었어?”강한서가 담담하게 말했다.“핸드폰을 살 때 카메라 화질만 신경 쓰지 않으면 다른 기능도 발견할 수 있을 거야.”한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강한서는 또 배터리 사용량이 많은 앱까지 전부 다 켜놓고는 밖에 나가 지현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송가람의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한현진은 참지 못하고 강한서의 카톡을 검색했다.그러다 결국 침묵하고 말았다. 강한서는‘한서 오빠’라고 적혀있었고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대화 배경 화면도 강한서의 사진인 것이다.사진 속 여윈 모습의 강한서는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옆모습으로 창가에 기대어 앉은 강한서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캐시미어 가디건에 햇살이 비쳐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딱 봐도 강한서가 기억 상실되었을 때의 모습이었다. 사진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기도 했다.[10년을 기다린다고 해도 상관없어.]주인공이 오랜만에 상봉한 소설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면 감동에 겨워 울면서 보았겠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한현진은 송가람 핸드폰 속 강한서의 카톡과 사진을 삭제하려다 겨우 참았다.그녀는 두 번이나 한숨을 내쉬어서야 평온을 되찾았고 송가람의 갤러리를 들춰보다 강한서가 실종되었던 동안에 찍은 사진이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이럴 수가.’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들춰보다가 비밀번호가 설정되어있는 앨범을 확인하게 되었다.그녀는 멈칫도 잠시 전혀 망설임 없이 강한서의 생일 날짜를 입력했다. 역시나 앨범은 바로 열렸고 그 안에는 수백 장의 강한서의 사진과 동영상들이 있었다
강한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한현진이 먼저 말했다.“그 약을 사용하지 않게 허락한 것도 이미 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거야. 날 말릴 거면 내일 바로 이혼해! 너랑 더 이상 살기 싫어!”강한서는 할 말을 잃었다.“데이터를 다 써버리면 어떡해. 와이파이를 연결하면 더 빠를 수도 있잖아.”‘눈치라도 있으니 다행이야.’한현진이 와이파이를 연결한 순간, 아래층에서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커튼 사이를 통해 밖을 내다보니 다름아닌 서해금의 차량이 도착한 것이다.한현진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배터리도 아직 남아있고 사진도 다 보내지 못했단 말이야.”강한서가 그녀를 달래면서 말했다.“일단 당황하지 말고 옆방에 가서 조용히 있어봐. 내가 시간 끌어볼게.”그러고는 한현진에게 옷을 걸쳐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긴장하지도 말고. 사진 다 보냈으면 대화 기록도 지우고 와이파이도 끊는 걸 잊지 마. 배터리가 다 되지 않아도 괜찮아.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절대 소리 내지 말고.”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한서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이마에 뽀뽀했다.“가봐.”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강한서는 방안에 아직 한현진의 향기가 남아있다는 것은 확인하고 송가람의 핸드백 속에 있는 향수를 사방에 뿌리고는 서서히 향기가 퍼져나갈 수 있게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민경하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혀 조급함 없이 1층으로 내려갔다.문이 열리고,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왜 이제야 문을 여는 거야. 가람이는?”강한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숙취해소제를 마시고 2층에서 쉬고 있어요.”“어느 방에 있는 거야? 안내해 봐.”강한서가 말했다.“아줌마, 잠깐만요. 가람이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요. 숙취해소제가 소용없었는지 계속 머리가 아프다길래 민 실장님더러 약을 사 오라고 했어요. 약 먹고 데려가시죠.”“아니야. 됐어.”서해금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바로 데려갈 거야. 집에 약 있어.”‘차라리 아직 안 깨서 다
강한서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한현진한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보지 마. 이제 집에 가.”한현진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였다.“다시 줘.”강한서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집에 가자고.”한현진이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다시 주라고.”강한서가 아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자 한현진은 일어나 빼앗으려고 했고, 강한서는 그런 그녀를 품에 안았다.“보지 마. 듣고 싶은 거 내가 얼마든지 듣게 해줄게.”한현진은 강한서가 피투성이인 상태로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이 떠올라 심장이 미어지게 아파져 왔다.“도대체 얼마나 고생한 거야.”한현진은 울먹거리기 시작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강한서의 허리를 안았다.“주삿바늘도 무서워하는 사람이 마취도 없이 13바늘이나 꿰맸는데 아프지 않았어?”품속에 안겨있는 한현진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송가람이 강한서를 구해준 이유는 바라는 것이 있어서였다. 보상받으려고 일부러 병간호했던 모습을 찍어놓은 것이고, 이것을 핑계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어서였다.그래도 다행히 이 동영상들로 인해 그때 당시의 상태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강한서가 구조되었을 때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장시간 동안 찬물에 잠겨있어 심각한 호흡기감염 증상이 있었고 의사 선생님은 그 증상이 악화되어 경련을 일으킬까 봐 차마 마취를 진행하지 못했다.그때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라 아팠는지도 몰랐다. 수술이 끝나고 의사 선생님은 통증완화 연고를 발라주었고 송가람에게 아프다고 할 때마다 발라주라고 했다. 아프다는 말이 없으면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라고 신신당부했다.강한서가 아프다고 한 적은 없었지만 한현진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 다정하게 한현진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이 싫은 송가람은 계속 연고를 발라주었고, 그러는 바람에 일주일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했다.그래서 한현진이 아프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다.“안 아팠어. 그리고 나 바늘 무서워하지 않아.”한현진이 울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