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는 방금까지 재잘거리던 한성우가 제법 성숙한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러 온 예비 신랑 예비 신부를 대한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송가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한 대표님은 옛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시네요. 첫사랑의 약혼식에 현여친을 데리고 오는 걸 보면요.”차미주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휙 한성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예비 신부가 아까부터 이쪽을 계속 쳐다보더라니, 이 개자식. 날 바로 앞에 두고 바람이야.’한성우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송가람 씨, 오늘은 허율 씨 약혼식이에요. 말조심하시죠.”차미주는 한 상 가득 차려진 산해진미를 보고도 입맛이 싹 사라졌다. 한성우는 조심스레 차미주에게 생선 한 조각을 집어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시 없어. 먹어봐.”차미주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손가락이 일부러 우리 사이를 이간질 하려고 그러는 거야. 화내면 안 돼.’그녀는 겨우 미소를 짜내며 고맙다는 말고 함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한성우가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비웠다. 맞은 편의 두 사람을 보던 차미주 역시 입맛도 없었던 터라 바람을 쐬러 밖으로 향했다. 복도로 나온 차미주는 한 여자가 뒤에서 한성우를 끌어안는 모습을 목격했다. 순간 차미주는 하늘이 그녀의 머리 위로 배신감이라는 감정을 툭 던져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차미주가 막 소매를 걷고 불륜 현장을 급습하려는데 누군가 그녀보다 한발 빨리 움직였다. 그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휴대폰과 카메라를 들고 그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가 촬영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옆으로 밀려난 차미주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곧 한 남자가 달려들더니 한성우를 안고 있던 여자를 가리키며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윤설아, 네가 어떻게 우리 약혼식에서 다른 남자와 놀아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차미주가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뭐야, 배신당한
이 바닥 생활 수년 차의 한성우는 이미 별의별 일을 못 겪어본 게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그 여자가 달려와 안겼을 때 그는 이미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불륜남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자 한성우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데 사람들 속에 섞여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는 차미주의 얼굴이 보였다. 한성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망했네. 우리 도둑이가 또 허튼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냐?’다급해진 한성우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차미주에게 변명하려던 그때, 차미주는 갑자기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악—”차미주가 배를 움켜잡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성우 오빠, 나 배 아파. 우리 아기 잘 못 된 거 아냐?”비명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차미주에게로 쏠렸다. 방금까지 한성우를 잡고 있던 여자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차미주를 향해 말했다. “누구세요? 누가 그쪽 오빠라는 거예요?”한성우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자기를 잡고 있는 여자를 밀쳐버리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차미주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여 그녀를 부축했다. 한성우가 상황극을 받아줄 만한 대사를 던지기도 전에 차미주가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 “성우 오빠, 이 여자는 누구야? 누군데 오빠가 약혼식을 망치러 왔다고 하는 건데? 다른 사람들은 약혼식 어떻게 하나 구경하러 온 거라며. 나중에 나한테 이것보다 더 꿀리지 않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왜 저 여자는 오빠가 자기 때문에 온 거라고 하는 거야? 나랑 우리 아기를 버리려는 거야?”말하며 차미주는 남몰래 허벅지를 꽉 꼬집어 억지로 눈물 한 방울을 쥐어짰다. 한성우는 곧 차미주의 형편없는 연기력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아 혀를 꾹 깨물며 마음 아픈 표정을 지었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나랑 저 여자 사이에 정말 뭐라도 있었다면 내가 널 데리고 약혼식에 참석했을 리가 없잖아.”차미주가 울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오빠는 두 사람 사랑의 증표 같은 시계를 아직도
“애 같은 소리하네.”화가 난 차미주가 한성우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너 이 개자식. 어딜 가도 항상 여자 문제가 따라오지.”한성우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도 걔네가 약혼식에서 그런 짓을 벌일 줄은 몰랐지. 미친 것들.”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네가 예전에 그 예비 신부랑 그렇고 그런 사이만 아니었어도 너한테 이런 일을 덮어씌우려고 했겠어?”말문이 막힌 한성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매력적이라 그런 거 아니겠어?”“웩. 뻔뻔하기도 하지.”한성우는 씩 웃더니 고개를 숙여 턱으로 차미주의 얼굴을 쓸었다. “자기야, 우리 자기가 날 이렇게 믿어주고 있었구나. 난 네가 그 X놈들 말을 믿고 날 버릴까 봐 겁먹고 있었거든.”차미주가 한성우를 째려보았다. “네 첫사랑에게 X놈이라니. 그렇게 얘기해도 괜찮겠어?”“첫사랑은 개뿔.”한성우는 옛일을 떠올리며 바득 이를 갈았다. “고등학교 때 한 학기를 사귀었는데 여름 방학에 내가 견습하러 간 사이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이랑 바람이 났어. 약혼식에 오긴 전까지만 해도 난 예비 신부가 저 여자인 줄도 몰랐다니까. 끼리끼리 아주 잘 만났네.”“그럼 그 여자는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야?”한성우가 차 문을 열어 차미주를 조수석에 태운 후 자기도 운전석에 앉고 나서야 휴대폰을 꺼내 비서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그가 피식 냉소 지으며 말했다. “이 새X, 내가 전에 만났었던 모델과 연애하고 있었네.”사실 예비 신랑인 허율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전에 한성우에게 차였었던 모델이었다. 그 모델은 차미주의 전 회사에 소속된 연예인이기도 했다.그 모델은 한성우를 등에 업고 회사와 손절해 엄청난 위약금을 물어야 했다. 하지만 한성우는 결혼은커녕 오히려 그 모델을 차버렸다. 그 뒤로 스케줄은 점점 줄어들었고 인기도 하루하루 떨어져만 갔다. 그로 인해 그 모델은 한성우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른 후 그 모델은 허율을 만났고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져 죽고 못
한성우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덩치도 산만한 놈이 바보도 아니고, 송가람이 납치한다고 납치가 되겠어?”차미주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너 방금 연회장에서 송가람이 강한서에게 계속 술 먹이는 거 못 봤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한성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송가람이 한서를 취하게 만들어서 관계라도 가질까 봐 걱정되는 거야?”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만약 강한서가 취해서 인사불성인 채로 선을 넘는 짓을 하면 현진이는 절대 강한서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그 말에 한성우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는 차미주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도둑아, 넌 연애 경험이 없어서 남자를 몰라도 너무 몰라.”한성우가 다정하게 말했다. “술 취해서 실수했다는 건 그저 어떻게 해보려는 핑계에 불과해. 남자는 말이야, 정말 그저 자는 게 목적이면 식초를 마시고도 취할 수 있고 그런 생각이 전혀 없다면 뭘 마셔도 소용없어. 그리고 강한서가 어떤 녀석인지 생각해 봐. 걘 그런 짓 못 해.”그제야 차미주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어쩐지 그쪽으론 빠삭한 것 같은 한성우의 태도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너도 혹시 그런 핑계를 자주 댔었던 거 아냐?”한성우가 피식 소리 내 웃으며 차미주의 손을 끌어와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정한 눈빛으로 차미주를 바라보았다. “내가 비록 성인군자 같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런 품위 떨어지는 짓은 한 적 없어.”잠시 말을 멈춘 한성우가 차미주를 나무라며 말했다. “나보단 오히려 네가 더 문제인 것 같은데? 넌 여자애가 왜 그렇게 술버릇이 나빠?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취해서는 영화에 나오는 엉덩이 얘기나 하고 말이야.”차미주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녀는 손을 빼내더니 한성우의 머리를 후려치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화를 냈다. “입 좀 닫아.”한성우는 욱 화를 내는 차미주의 모습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
“23번 유현진 씨, 가족분께 연락하셨나요?“이제 간호사가 몇 번째로 유현진을 재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흘긋 확인해보았으나 강한서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한주시 북부 환형 육교에서 연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다 강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직 그녀의 남편은 늦도록 연락되지 않았다.처참했던 사고 현장이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고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이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유현진 씨?”간호사의 부름에 유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셔츠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몰골이 처참했으나 여전히 품위 있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연락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좀 바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인해도 될까요?”“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가족분께서 사인할 수 없다면 병원에 남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거예요. 뇌진탕은 빠른 진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병원에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유현진은 입술을 꾹 닫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볼게요.”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기기를 담은 플라스틱 카트를 들고 지나가던 두 간호사를 만나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여 길을 비켜줬다. 그때, 간호사 중 한 명이 말했다.“16번 환자, 누군지 알아요?““아뇨. 누구죠?““송민영 몰라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얼마 전에 찍은 핫한 드라마 ’비밀의 연인‘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분이에요.““저런! 그분, 많이 다치셨어요?““조금 늦게 오셨어요. 그리고 팔에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그때 이미 약간 아문 상태였어요. 하지만 연예인들 얼굴이 간판이잖아요. 당연히 우리 같은 일반인과 비길 수 없죠. 내가 만약 송민영과 같은 얼굴과 몸매
뜨거운 열기가 귓가에 뿜어지고 달아오른 체온까지 더해 유현진의 귓불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만 그녀는 복부에 난 멍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다행히 불이 꺼져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목젖에 키스했다. 강한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짙은 눈빛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를 한입 물었다. 곧이어 유현진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나 오늘 배란기야, 할 때가 됐어.”강한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눈가에 스친 욕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분노에 찬 말투로 물었다.“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야?”유현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귓불도 서서히 열기가 식었다.“너희 엄마가 계속 날 다그치잖아.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차라리 너 정자 기증할래? 그럼 내가 시험관시술 할게.”강한서가 비난 조로 되물었다.“엄마가 재촉한 게 아니라 네가 사모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아이라도 낳으려는 거 아니야?”유현진은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옅은 미소만 지었다.“맞아, 네가 날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둘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지.”강한서는 단추를 채우고 짜증 섞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런 데 신경 쓰지 마. 난 아이 안 가질 거야.”유현진의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문밖을 나서려는 강한서를 불러세웠다.“강한서, 넌 대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 아니면 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강한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뭐가 다른데?”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같은 뜻이라면 결혼도 아무 의미 없겠지. 이혼해 그냥.”“네 마음대로 해.”강한서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유현진은 베개를 문에 힘껏 내던졌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다음 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강한서는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했다.아침을 준비한 지 반나절이 됐지만 그는 도통 수저를
차미주는 꿈속에서 헤매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문을 연 순간 유현진이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떡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숙박 좀 할 수 있을까?”차미주는 그녀에게 아이스 콜라 한 병 건넸다. 유현진이 콜라를 건네받자 그녀는 불쑥 제 머리를 툭 쳤다.“내 정신 좀 봐. 너 탄산음료 안 마시지? 우유 갖다 줄게.”“아니야, 괜찮아.”유현진은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못 마시는 게 어디 있어?”전에는 임신 준비 때문에 술과 담배, 음료 및 자극적인 것들을 싹 다 멀리했지만 이혼을 앞둔 지금은 이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것을.‘임신 준비? 그딴 건 무능한 강한서더러 하라고 해!’“너 정말 강한서 씨랑 이혼할 생각이야?”차미주는 소파의 반대편에 앉으며 확실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응.”유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 또 송민영이랑 만나.”차미주는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그 여잔 대체 왜 이렇게 뻔뻔한 거야? 애초에 결혼할 때도 찾아와 소란을 피우더니 3년이 지난 후 또다시 나타나? 세상에 남자가 없대? 아니 왜 유부남을 물고 늘어지는 거냐고? 강한서 그 자식도 한심해. 놀다 버린 장난감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유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지금 대체 누굴 욕하는 거지?’차미주는 마른기침을 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 지금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넌 그냥 빠지려고? 왜 그런 비겁한 인간들을 봐줘? 끝까지 맞서 싸우란 말이야! 그 여자가 온갖 청순한 척을 다 떨잖아. 사람들 앞에서 그 가면을 확 벗겨버려! 청순은 개뿔, 유부남이나 만나는 뻔뻔스러운 년인 주제에!”“그래서? 내 결혼생활이 파탄 났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려? 남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가여운 여자로 남아?”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 결혼은 이미 실패야. 떠날 때까지 비참하게 굴고 싶
“네? 대표님은 아직 주무십니다.”“그럼 침실로 가서 깨워요!”유현진은 살짝 화가 치밀었다. 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심지어 이제 막 잠에서 깬 잠긴 목소리라 한순간 유현진도 저 자신을 의심할 뻔했다.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며칠 뒤에 네 옷장의 옷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내줄게. 앞으론 이런 따분한 일들로 전화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따분한 일?”강한서가 차갑게 웃었다.“유현진, 이런 따분한 일들은 네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었잖아. 내가 무슨 속옷을 입는 것까지 일일이 책임졌잖아. 이게 고작 네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어?”유현진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심장이 쑤시듯이 아팠다.강한서에게 자신이 그저 이런 이미지였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 느낌이 새삼 달랐다.대체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야 이런 수모를 겪었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을까?전화기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유현진이 잠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봐도 한심했어. 그러니까 이젠 더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얼른 사인해. 우리 둘 사이 빨리 끝내자.”화제가 또다시 이혼으로 돌아왔고 이제 막 화가 가라앉았던 강한서는 금세 분노가 차올랐다.“제발 적당히 해!”유현진은 피식 웃으며 비난 조로 되물었다.“내가 뭘 어쨌는데?”“너 후회하지 마!”강한서는 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툭 끊었다.유현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상하게 챙겨주고 묵묵히 헌신했던 지난날들이 강한서에겐 그저 한낱 놀림거리에 불과하다니.매번 그를 위해 여러 장소에서 입을 옷들을 정성껏 챙겨줄 때 정작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엔 짜증이 잔뜩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종일 하루 세끼와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는 여자가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녀가 생각해도 이런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리석어 보였다.“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