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금과 강한서의 고모부는 친척 관계였다. 서해금은 강한서의 고모부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송가람이 강한서를 삼촌이라고 불러도 문제 될 건 없었다.그러나 송가람은 전혀 그런 뜻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강한서는 정말 송가람이 한 말의 의미를 몰랐을까?물론, 강한서도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사실 그는 깨어나 송가람을 봤을 때,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강한서는 송가람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송가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송가람을 거절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분명 자연스럽게 송가람을 거절했음에도 그의 마음속에선 그에게 방금 했던 그 말은 송가람이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라며 얼른 없던 일로 하라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어벨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강한서의 머릿속이 순식각에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귓가에 쉬어버린 송가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서 오빠. 제 말이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요. 좋아해요...”말하며 송가람이 뚝뚝 눈물을 떨구었다. 강한서의 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였다. 그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송가람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송가람에게 거의 다다랐을 때, 한현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 씨, 가요.”그녀의 목소리에 어지럽던 강한서의 머릿속이 순간 맑아졌다. 그러나 그는 뻗은 손을 거두지 않고 다만 송가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귀띔했다. “감기 안 걸리게 옷 잘 챙겨입어요.”송가람의 눈이 전보다 더 빨개졌다. 한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한서의 품에 가방을 던져버리고는 혼자 먼저 집을 나섰다. 강한서는 송가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3분이 지나서야 집 밖으로 나왔다. 이미 차에 타 있던 한현진은 강한서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한서가 차에 타더니 민경하에게 말했다. “출발하죠.”알겠다고 대답한 민경하가 차를 출발시켰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강한서가 손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흠칫했다. 손바닥에 닿은 피부는 들고 있던 물병의 온도보다도 더 낮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전—”한현진이 손을 빼내며 말했다. “단지 아이를 바라는 거라고 해도 최소한 척이라도 좀 하죠.”강한서는 텅 비어버린 손바닥을 바라보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 민경하에게 말했다. “히터 좀 더 틀어요.”민경하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차 안의 온도가 곧 따뜻해졌다. 사실 한현진은 추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송가람을 걱정하는 강한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만약 방금 강한서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하마터면 송가람의 눈물을 닦아줬을 것이다. 강한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었지만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한현진은 더 이상 강한서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마음은 혼란스러웠지만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로 한현진은 곧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너무 이상했다. 분명 물속이었지만 전혀 춥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하기까지 했다. 오색찬란한 바닷속에는 물고기가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점점 더 깊이 잠수하는 한현진의 앞에 갑자기 동글동글한 투명 기포 같은 것이 나타났다. 어쩐지 마음이 동해 한현진은 손을 들어 기포를 살짝 찌르자 기포는 바로 둘로 갈라져 갑자기 그녀의 몸을 향해 날아왔다. 손을 뻗어 기포를 잡으려던 한현진은 두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숨이 꽉 막히는 기분에 그녀는 발버둥 치며 눈을 떴다. 그리고 한현진은 브라운 컬러의 강한서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기가 강한서의 품에 기대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강한서는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고 있었다. 마치 한현진이 갑자기 깨어날 줄은 몰랐던 사람처럼 강한서의 눈빛엔 당황스러움이 물들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곧 강한서에게 의해 가려졌다. 강한서가 손을 놓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일어났으면 내리
강한서는 한현진을 무시한 채 웨딩 사진을 지나쳐 한현진의 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위층에서 청소하고 있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소리를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 돌아오셨어요?”강한서가 간단히 인사를 받고는 테이블 위의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모님, 한현진 씨 짐 게스트룸에 옮겨주세요.”황씨 아주머니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게스트룸에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현진 씨는 제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잠시 여기서 지낼 거예요. 짐 정리 좀 같이 해주세요.”황씨 아주머니도 물론 강한서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을 완전히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황씨 아주머니는 정인월의 당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표님, 게스트룸에는 사람이 묵을 수 없어요.”강한서가 멈칫했다. “게스트룸이 그렇게 많은데, 전부 안 된다는 건가요?”황씨 아주머니가 겨우 대답했다. “네.”그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 방 한 방문을 열고 확인에 나섰다. 결과, 안방을 제외한 모든 방에 침대가 놓여있지 않았다. 황씨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인월은 어젯밤 급히 사람을 불러 모든 게스트룸에 있던 침대를 가져가 버렸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한 침대에 묶어버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강한서가 입술을 앙다물고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한현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설마, 제가 할머니께 이런 부탁을 드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강한서는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제가 지금 강한서 씨를 상대로 뭘 할 수나 있어요? 그리고, 정말 강한서 씨가 절 원하지 않는다면 거기가 서기나 하겠어요?”멍해졌던 강한서가 곧 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귀가 빨개졌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그의 마음속엔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결혼 전 한현진과의 관계는 신미정이 얘기했던 것처럼 그렇게까지 상극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물과 불처럼 서로 상극인 사이었다면, 한현진이 그린 그림을 사무실 서랍에 숨겨놨을 리가 없었다. 한참을 그 그림을 빤히 쳐다보던 강한서는 다시 그림을 서랍 안에 넣었다. “민 실장, 팀원들에게 오늘 전 안 갈 거라고 얘기해줘요. 모든 회식 비용은 제가 낼게요. 나중에 바쁜 일을 모두 해결하고 나면 그때 같이 식사하죠.”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허니 디저트 가게에 요즘 새로운 디저트가 나왔던데, 사모님께 사드리실래요?”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뇨. 임산부는 혈당 관리를 해야 해요. 아니면 태아가 너무 커서 낳을 때 고생이거든요.”그 말에 민경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대표님께서는 대체 언제 이런 것까지 아신 거야?’사실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은 강한서 스스로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전혀 일부러 그런 지식을 기억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날 한현진이 아이를 지우는 것을 막으러 병원에 갔을 때 우연히 병원에 있던 산모 건강 수첩을 보고 대충 훑어보고 기억하게 된 것이었다. 강한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세 한식당 대표에게 연락해 새우 물만두 좀 준비해 달라고 해요. 제가 가지러 갈게요.”“네.”그의 말에 대답한 민경하가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강한서가 다시 그를 불렀다. “오늘 병원에서 제가 수집하라고 한 물건은...”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미 조사 중입니다.”“그래요. 조용히 알아봐요. 아무도 모르게.”——강한서가 돌아왔을 때 한현진은 송민준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베란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강한서를 쳐다본 한현진이 말했다.“오빠, 한서가 왔어요. 이만 끊어요. 내일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잊지 말고 문자 해줘요. 그리고 제가 부탁한 일은 오빠도 신경 좀 써줘요.”송민준이 콧방귀 끼며 말했다.
한현진이 피식 냉소를 흘렸다. “그렇군요.”한현진은 젓가락으로 그릇 안에 담긴 물만두를 뒤적였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그릇을 부딪치며 끊임없이 맑은 소리를 냈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본가에서 그녀와 밥을 먹은 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식사 예절이 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강한서가 본 한현진은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제야 그는 뒤늦게 뭔가를 눈치채고 말했다. “화났어요?”“그럴 리가요.”한현진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 대표님께서 이렇게 늦게 퇴근하시면서까지 제 음식을 챙겨주시니 기뻐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요. 하하.”“...”강한서는 뭔가 한현진의 특징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녀는 화가 나면 자신을 강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또 기억 조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도 한현진은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었다. “강 대표님, 시계 예쁘네요.”하지만 그때의 한현진은 진심으로 시계가 예뻐서 칭찬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건넨 것이었다. 한현진이 화낸 포인트를 알 수 없었던 강한서가 물었다. “새우 물만두 안 좋아해요?”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새우는 임산부에게 좋죠. 태아에게도 좋고요.”“...”강한서는 그 말에 뭔가를 깨달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한세 한식당 대표가 제가 늘 새우 물만두만 사 간다고 해서, 전 한현진 씨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그 말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그녀가 다시 물만두를 입에 넣었을 때, 더 이상 젓가락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강한서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임산부는 역시 호르몬의 영향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해. 화도 쉽게 냈다가 또 쉽게 풀잖아.’물만두를 다 먹은 한현진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강한서가 그런 한현진을 불렀다. “나가서 좀 걸어요. 소화도 시킬 겸.”그러자 한현진이 더 놀라고 말았다. ‘강한서는 내 카리스마를 느끼고 싸움 대신 굴복을 선택한 거야?’도륵 눈을
한현진의 마음이 조금씩 찢겼다. ‘몽롱이라...’‘상처가 얼마나 심각했어야 매일 같이 진통제를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썼을까?’한현진은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늘 생각했다. 만약 그때 강한서를 꼭 잡았었더라면 나중의 모든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강한서가 제일 힘든 순간에 그를 외롭게 혼자 놔두지도 않았을 텐데...우울한 한현진의 기분을 눈치챈 강한서는 어쩐지 자기 마음도 침울해지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현진과 같은 발걸음을 유지하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가로등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한현진 씨와 그 사람... 은 예전에도 이렇게 자주 산책했어요?”그의 말에 잠시 멍해졌던 한현진은 강한서가 말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전의 그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혹은 그녀와 결혼했었던 그를 말하는 걸지도 몰랐다. 왜냐면 전에 한현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최소한 날 사랑했던 강한서가 무사한지는 알아야겠어요.”한현진이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 “아뇨. 저희는 같이 산책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산책하더라도 제 손을 잡은 적이 없었죠.”그건 강한서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속이 좁고 삐딱한 성격이라 절 좋아하면서도 늘 자존심 때문에 표현하기를 꺼렸어요. 선물을 줄 때도 분명 자기가 고심해서 고른 거면서도 늘 클라이언트가 준 거라고 했었고 제가 해 준 음식을 좋아했으면서도 맛이 별로라고 했죠. 항상 마음과 다른 말을 해서 늘 저를 화나게 했어요.”“전 이제껏 나이 30 먹은 남자가 그렇게까지 유치하고 삐딱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처음 봤어요. 그때 전 산책할 때마다 생각했었어요. 다른 부부는 손을 잡거나 어깨를 껴안고 걷는데 왜 우리만 늘 앞뒤로 걸어야 하나, 하고요.”“나중에야 알았죠. 저와 손을 잡기 싫
조급한 마음에 한현진이 나가지 않으려고 하자 진씨가 입을 열었다. “한현진 씨, 나가시죠. 이건 지 선생님 룰이에요.”한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방문이 굳게 닫히고, 안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현진은 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한 한현진이 진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분은 어디서 오신 분이세요? 믿을 만한 분이에요?”진씨가 대답했다. “한현진 씨도 보신 적 있는 분이세요.”한현진이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제가요? 전 전혀 기억이 없는데.”진씨가 말했다. “삼청관.”“삼청—”한현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현기법사 님이요? 그분은 무당 아니셨어요? 의학도 아시는 거예요?”머리를 묶지 않아 한현진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진씨가 말했다. “미신은 신앙이고 과학은 생활이죠.”“...”‘말 한마디로 직업이 바뀌네.’현기법사와 정인월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아마 정인월도 현기법사를 누구보다 신뢰하기 때문에 그를 부른 것일 테였다. 하지만 현기법사의 의술이 강한서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1 시간쯤 되었을 때 드디어 방문이 열렸다. 젊은 남자가 고개를 내밀고 한현진과 진씨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한현진이 빠른 걸음으로 청년의 뒤를 따랐다. 강한서는 침대에 앉아 법— 아니, 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혈색이 없고 피곤해 보였지만 방금 전의 창백하던 모습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았다. 한현진이 방으로 들어서자 강한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곧 시선을 거두었다. 지 선생님은 강한서에게 몇 마디 당부의 말을 남기더니 몸을 일으키며 진씨에게 말했다. “갑시다.”한현진은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일어나기 힘들어서 그러니 손님 배웅 좀 해줘요.”
주방으로 다 데워졌냐는 송병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서해금이 대답했다. “다 됐어요.”말하며 그녀는 문자를 전부 지워버리고는 데워진 국을 들고 주방을 나섰다. “이제 이런 일은 아줌마 시켜.”송병천이 손을 닦으며 말했다. “날도 추운데 왔다 갔다 하는 사이면 음식 다 식잖아.”“아줌마도 저녁 내내 바삐 보내다 이제 겨우 쉬면서 방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이런 일은 제가 해도 돼요.”서해금은 송병천에게 국을 한 그릇 더 떠주며 말했다. “전에 어머님 보살펴 드리면서 습관이 되어서 괜찮아요.”그 말에 송병천은 멈칫하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해금이 시어머니를 모시던 그 몇 년 동안, 그녀는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송씨 가문은 재벌가였으니 사람을 보살피는 일이 아무리 고되다고 하더라도 돈만 제대로 준다면 간병인을 찾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송병천의 모친은 젊은 시절 성격이 온화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넘치던 사람으로 한주에서 알아주는 재벌가 규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병환에 시달리며 온종일 침상에만 갇혀 생활했고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어 점점 우울 속에 빠졌다. 아무리 성격이 좋았던 사람도 아프기 시작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기도 했다. 송병천의 모친 역시 그랬고 그녀는 자주 모욕적인 말로 간병인을 욕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송병천이 아무리 임금을 올려주어도 2달 이상 버틸 수 있는 간병인을 찾기 어려웠다. 서해금 역시 갓 시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했을 때는 온갖 모욕적인 말들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서해금은 워낙 끈기가 있는 성격이라 설사 시어머니가 매일 같이 그녀를 비꼬며 욕해도 날마다 꾸준히 시어머니를 돌봐왔다. 송병천 역시 어머니가 밖에서 발작을 일으킬 때 서해금이 두 손으로 어머니의 구토물을 받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들인 자기도 그렇게까지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서해금의 그 행동에 송병천은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송병천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