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흠칫했다. 손바닥에 닿은 피부는 들고 있던 물병의 온도보다도 더 낮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전—”한현진이 손을 빼내며 말했다. “단지 아이를 바라는 거라고 해도 최소한 척이라도 좀 하죠.”강한서는 텅 비어버린 손바닥을 바라보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 민경하에게 말했다. “히터 좀 더 틀어요.”민경하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차 안의 온도가 곧 따뜻해졌다. 사실 한현진은 추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송가람을 걱정하는 강한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만약 방금 강한서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하마터면 송가람의 눈물을 닦아줬을 것이다. 강한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었지만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한현진은 더 이상 강한서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마음은 혼란스러웠지만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로 한현진은 곧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너무 이상했다. 분명 물속이었지만 전혀 춥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하기까지 했다. 오색찬란한 바닷속에는 물고기가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점점 더 깊이 잠수하는 한현진의 앞에 갑자기 동글동글한 투명 기포 같은 것이 나타났다. 어쩐지 마음이 동해 한현진은 손을 들어 기포를 살짝 찌르자 기포는 바로 둘로 갈라져 갑자기 그녀의 몸을 향해 날아왔다. 손을 뻗어 기포를 잡으려던 한현진은 두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숨이 꽉 막히는 기분에 그녀는 발버둥 치며 눈을 떴다. 그리고 한현진은 브라운 컬러의 강한서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기가 강한서의 품에 기대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강한서는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고 있었다. 마치 한현진이 갑자기 깨어날 줄은 몰랐던 사람처럼 강한서의 눈빛엔 당황스러움이 물들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곧 강한서에게 의해 가려졌다. 강한서가 손을 놓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일어났으면 내리
강한서는 한현진을 무시한 채 웨딩 사진을 지나쳐 한현진의 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위층에서 청소하고 있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소리를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 돌아오셨어요?”강한서가 간단히 인사를 받고는 테이블 위의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모님, 한현진 씨 짐 게스트룸에 옮겨주세요.”황씨 아주머니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게스트룸에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현진 씨는 제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잠시 여기서 지낼 거예요. 짐 정리 좀 같이 해주세요.”황씨 아주머니도 물론 강한서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을 완전히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황씨 아주머니는 정인월의 당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표님, 게스트룸에는 사람이 묵을 수 없어요.”강한서가 멈칫했다. “게스트룸이 그렇게 많은데, 전부 안 된다는 건가요?”황씨 아주머니가 겨우 대답했다. “네.”그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 방 한 방문을 열고 확인에 나섰다. 결과, 안방을 제외한 모든 방에 침대가 놓여있지 않았다. 황씨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인월은 어젯밤 급히 사람을 불러 모든 게스트룸에 있던 침대를 가져가 버렸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한 침대에 묶어버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강한서가 입술을 앙다물고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한현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설마, 제가 할머니께 이런 부탁을 드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강한서는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제가 지금 강한서 씨를 상대로 뭘 할 수나 있어요? 그리고, 정말 강한서 씨가 절 원하지 않는다면 거기가 서기나 하겠어요?”멍해졌던 강한서가 곧 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귀가 빨개졌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그의 마음속엔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결혼 전 한현진과의 관계는 신미정이 얘기했던 것처럼 그렇게까지 상극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물과 불처럼 서로 상극인 사이었다면, 한현진이 그린 그림을 사무실 서랍에 숨겨놨을 리가 없었다. 한참을 그 그림을 빤히 쳐다보던 강한서는 다시 그림을 서랍 안에 넣었다. “민 실장, 팀원들에게 오늘 전 안 갈 거라고 얘기해줘요. 모든 회식 비용은 제가 낼게요. 나중에 바쁜 일을 모두 해결하고 나면 그때 같이 식사하죠.”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허니 디저트 가게에 요즘 새로운 디저트가 나왔던데, 사모님께 사드리실래요?”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뇨. 임산부는 혈당 관리를 해야 해요. 아니면 태아가 너무 커서 낳을 때 고생이거든요.”그 말에 민경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대표님께서는 대체 언제 이런 것까지 아신 거야?’사실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은 강한서 스스로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전혀 일부러 그런 지식을 기억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날 한현진이 아이를 지우는 것을 막으러 병원에 갔을 때 우연히 병원에 있던 산모 건강 수첩을 보고 대충 훑어보고 기억하게 된 것이었다. 강한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세 한식당 대표에게 연락해 새우 물만두 좀 준비해 달라고 해요. 제가 가지러 갈게요.”“네.”그의 말에 대답한 민경하가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강한서가 다시 그를 불렀다. “오늘 병원에서 제가 수집하라고 한 물건은...”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미 조사 중입니다.”“그래요. 조용히 알아봐요. 아무도 모르게.”——강한서가 돌아왔을 때 한현진은 송민준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베란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강한서를 쳐다본 한현진이 말했다.“오빠, 한서가 왔어요. 이만 끊어요. 내일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잊지 말고 문자 해줘요. 그리고 제가 부탁한 일은 오빠도 신경 좀 써줘요.”송민준이 콧방귀 끼며 말했다.
한현진이 피식 냉소를 흘렸다. “그렇군요.”한현진은 젓가락으로 그릇 안에 담긴 물만두를 뒤적였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그릇을 부딪치며 끊임없이 맑은 소리를 냈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본가에서 그녀와 밥을 먹은 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식사 예절이 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강한서가 본 한현진은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제야 그는 뒤늦게 뭔가를 눈치채고 말했다. “화났어요?”“그럴 리가요.”한현진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 대표님께서 이렇게 늦게 퇴근하시면서까지 제 음식을 챙겨주시니 기뻐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요. 하하.”“...”강한서는 뭔가 한현진의 특징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녀는 화가 나면 자신을 강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또 기억 조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도 한현진은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었다. “강 대표님, 시계 예쁘네요.”하지만 그때의 한현진은 진심으로 시계가 예뻐서 칭찬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건넨 것이었다. 한현진이 화낸 포인트를 알 수 없었던 강한서가 물었다. “새우 물만두 안 좋아해요?”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새우는 임산부에게 좋죠. 태아에게도 좋고요.”“...”강한서는 그 말에 뭔가를 깨달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한세 한식당 대표가 제가 늘 새우 물만두만 사 간다고 해서, 전 한현진 씨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그 말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그녀가 다시 물만두를 입에 넣었을 때, 더 이상 젓가락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강한서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임산부는 역시 호르몬의 영향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해. 화도 쉽게 냈다가 또 쉽게 풀잖아.’물만두를 다 먹은 한현진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강한서가 그런 한현진을 불렀다. “나가서 좀 걸어요. 소화도 시킬 겸.”그러자 한현진이 더 놀라고 말았다. ‘강한서는 내 카리스마를 느끼고 싸움 대신 굴복을 선택한 거야?’도륵 눈을
한현진의 마음이 조금씩 찢겼다. ‘몽롱이라...’‘상처가 얼마나 심각했어야 매일 같이 진통제를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썼을까?’한현진은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늘 생각했다. 만약 그때 강한서를 꼭 잡았었더라면 나중의 모든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강한서가 제일 힘든 순간에 그를 외롭게 혼자 놔두지도 않았을 텐데...우울한 한현진의 기분을 눈치챈 강한서는 어쩐지 자기 마음도 침울해지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현진과 같은 발걸음을 유지하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가로등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한현진 씨와 그 사람... 은 예전에도 이렇게 자주 산책했어요?”그의 말에 잠시 멍해졌던 한현진은 강한서가 말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전의 그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혹은 그녀와 결혼했었던 그를 말하는 걸지도 몰랐다. 왜냐면 전에 한현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최소한 날 사랑했던 강한서가 무사한지는 알아야겠어요.”한현진이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 “아뇨. 저희는 같이 산책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산책하더라도 제 손을 잡은 적이 없었죠.”그건 강한서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속이 좁고 삐딱한 성격이라 절 좋아하면서도 늘 자존심 때문에 표현하기를 꺼렸어요. 선물을 줄 때도 분명 자기가 고심해서 고른 거면서도 늘 클라이언트가 준 거라고 했었고 제가 해 준 음식을 좋아했으면서도 맛이 별로라고 했죠. 항상 마음과 다른 말을 해서 늘 저를 화나게 했어요.”“전 이제껏 나이 30 먹은 남자가 그렇게까지 유치하고 삐딱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처음 봤어요. 그때 전 산책할 때마다 생각했었어요. 다른 부부는 손을 잡거나 어깨를 껴안고 걷는데 왜 우리만 늘 앞뒤로 걸어야 하나, 하고요.”“나중에야 알았죠. 저와 손을 잡기 싫
조급한 마음에 한현진이 나가지 않으려고 하자 진씨가 입을 열었다. “한현진 씨, 나가시죠. 이건 지 선생님 룰이에요.”한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방문이 굳게 닫히고, 안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현진은 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한 한현진이 진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분은 어디서 오신 분이세요? 믿을 만한 분이에요?”진씨가 대답했다. “한현진 씨도 보신 적 있는 분이세요.”한현진이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제가요? 전 전혀 기억이 없는데.”진씨가 말했다. “삼청관.”“삼청—”한현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현기법사 님이요? 그분은 무당 아니셨어요? 의학도 아시는 거예요?”머리를 묶지 않아 한현진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진씨가 말했다. “미신은 신앙이고 과학은 생활이죠.”“...”‘말 한마디로 직업이 바뀌네.’현기법사와 정인월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아마 정인월도 현기법사를 누구보다 신뢰하기 때문에 그를 부른 것일 테였다. 하지만 현기법사의 의술이 강한서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1 시간쯤 되었을 때 드디어 방문이 열렸다. 젊은 남자가 고개를 내밀고 한현진과 진씨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한현진이 빠른 걸음으로 청년의 뒤를 따랐다. 강한서는 침대에 앉아 법— 아니, 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혈색이 없고 피곤해 보였지만 방금 전의 창백하던 모습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았다. 한현진이 방으로 들어서자 강한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곧 시선을 거두었다. 지 선생님은 강한서에게 몇 마디 당부의 말을 남기더니 몸을 일으키며 진씨에게 말했다. “갑시다.”한현진은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일어나기 힘들어서 그러니 손님 배웅 좀 해줘요.”
주방으로 다 데워졌냐는 송병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서해금이 대답했다. “다 됐어요.”말하며 그녀는 문자를 전부 지워버리고는 데워진 국을 들고 주방을 나섰다. “이제 이런 일은 아줌마 시켜.”송병천이 손을 닦으며 말했다. “날도 추운데 왔다 갔다 하는 사이면 음식 다 식잖아.”“아줌마도 저녁 내내 바삐 보내다 이제 겨우 쉬면서 방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이런 일은 제가 해도 돼요.”서해금은 송병천에게 국을 한 그릇 더 떠주며 말했다. “전에 어머님 보살펴 드리면서 습관이 되어서 괜찮아요.”그 말에 송병천은 멈칫하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해금이 시어머니를 모시던 그 몇 년 동안, 그녀는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송씨 가문은 재벌가였으니 사람을 보살피는 일이 아무리 고되다고 하더라도 돈만 제대로 준다면 간병인을 찾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송병천의 모친은 젊은 시절 성격이 온화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넘치던 사람으로 한주에서 알아주는 재벌가 규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병환에 시달리며 온종일 침상에만 갇혀 생활했고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어 점점 우울 속에 빠졌다. 아무리 성격이 좋았던 사람도 아프기 시작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기도 했다. 송병천의 모친 역시 그랬고 그녀는 자주 모욕적인 말로 간병인을 욕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송병천이 아무리 임금을 올려주어도 2달 이상 버틸 수 있는 간병인을 찾기 어려웠다. 서해금 역시 갓 시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했을 때는 온갖 모욕적인 말들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서해금은 워낙 끈기가 있는 성격이라 설사 시어머니가 매일 같이 그녀를 비꼬며 욕해도 날마다 꾸준히 시어머니를 돌봐왔다. 송병천 역시 어머니가 밖에서 발작을 일으킬 때 서해금이 두 손으로 어머니의 구토물을 받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들인 자기도 그렇게까지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서해금의 그 행동에 송병천은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송병천
여기까지 생각한 송병천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비서한테 연극 티켓을 두 장 예매하라고 했어. 내일 오후에 시간 있어?”서해금은 다소 의외였다. 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됐지만, 항상 그녀가 모든 것을 준비한 후 송병천을 불러냈다. 그는 먼저 약속을 잡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해도 친구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해서였다.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있어요. 몇 시 공연이에요?”“3시, 내일 데리러 갈게.”서해금은 알았다고 대답했다.송병천은 국을 마시며 천천히 말했다.“가람은 20년 키웠으니 오래 전부터 친자식으로 생각했어. 현진은 20여년 떨어져 있다가 어렵게 다시 만나서 가끔 그쪽으로 기우는 걸 어쩔 수 없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서해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다 이해하니까 설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에 제가 잘못한 부분도 있으니 당신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해요. 제가 민준을 키우기 시작할 때 겨우 열 살이었어요. 나이가 어려서 맞추기 쉽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현진은 돌아올 때 이미 성인이었어요. 고민이 있어도 숨기는 나이였죠. 저는 그저 그 애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잘 몰랐을 뿐이에요. 게다가 이번에 가람이 한서를 구한 걸 놓고 속으로 원망하는 것 같아요. 저도 자꾸 말하면 귀찮아할까 봐 말하지 못했어요.”송병천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현진은 철없는 아이가 아니야. 당신이 잘해주면 그 애는 당신한테 더 잘할 거야. 은혜를 갚을 줄 알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것이 아람과 똑같아.”서해금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이 말했다.“알았어요.”이어서 한현진이 아름드리 펜션에 사는 문제를 얘기했는데, 서해금은 결혼하지 않았으니 같이 사는 것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하지만 강한서가 한현진을 기억 못하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한서가 현진에게는 생명의 은인이고, 이번에 가는 목적도 한서가 기억을 되찾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