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가 이미 뱃속에 있는데, 이 여자는 대가 끊긴다는 말을 입밖에 내뱉을 수가 있어?’송가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현진 씨, 현진 씨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 안 해요?”‘이거 봐. 아무리 잘 감추고 있는 것 같아도 결국엔 이 말에 멘탈이 흔들리잖아.’만약 강한서가 그런 피드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다면 그건 공개적으로 송가람과의 사이를 부인하는 것은 물론 송가람의 희망을 잘라내는 것이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테였다. 한현진은 느릿하게 설명했다. “가람 언니, 왜 이렇게 흥분하세요. 저도 알아요.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언니는 제 약혼남에게 다른 마음이 없겠죠. 하지만 강한서 씨는 지금 기억을 잃었고 또 언니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으니 솔로인 남녀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만약 강한서 씨가 언니에게 흔들리기라도 한다면요?”“아빠는 저와 결혼했던 강한서 씨가 또 언니까지 건드리는 일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강한서 씨에게 두 사람 사이를 해명하라고 하는 건 단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 아빠가 화내시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뿐이에요. 안 그래도 아빠가 혈압도 높으신데, 그건 아빠에겐 너무 충격적인 일이잖아요.”입술을 바들바들 떠는 것을 보니 송가람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모양이었다. “정말 아빠를 위한 일이에요? 아니면 현진 씨 사적인 욕심 때문이에요?”한현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눈빛은 한현진의 의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또 어쩔 건데요?”송가람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한현진은 더 이상 그녀에게 눈빛도 주고 싶지 않아 바로 강한서에게 물었다. “어떤 걸 고르시겠어요?”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만약 두 가지 모두 선택하지 않는다면요?”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마음속으로 못내 기뻐했다. 그녀는 강한서의 그 대답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부끄러움에 얼굴을
서해금과 강한서의 고모부는 친척 관계였다. 서해금은 강한서의 고모부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송가람이 강한서를 삼촌이라고 불러도 문제 될 건 없었다.그러나 송가람은 전혀 그런 뜻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강한서는 정말 송가람이 한 말의 의미를 몰랐을까?물론, 강한서도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사실 그는 깨어나 송가람을 봤을 때,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강한서는 송가람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송가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송가람을 거절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분명 자연스럽게 송가람을 거절했음에도 그의 마음속에선 그에게 방금 했던 그 말은 송가람이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라며 얼른 없던 일로 하라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어벨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강한서의 머릿속이 순식각에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귓가에 쉬어버린 송가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서 오빠. 제 말이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요. 좋아해요...”말하며 송가람이 뚝뚝 눈물을 떨구었다. 강한서의 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였다. 그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송가람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송가람에게 거의 다다랐을 때, 한현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 씨, 가요.”그녀의 목소리에 어지럽던 강한서의 머릿속이 순간 맑아졌다. 그러나 그는 뻗은 손을 거두지 않고 다만 송가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귀띔했다. “감기 안 걸리게 옷 잘 챙겨입어요.”송가람의 눈이 전보다 더 빨개졌다. 한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한서의 품에 가방을 던져버리고는 혼자 먼저 집을 나섰다. 강한서는 송가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3분이 지나서야 집 밖으로 나왔다. 이미 차에 타 있던 한현진은 강한서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한서가 차에 타더니 민경하에게 말했다. “출발하죠.”알겠다고 대답한 민경하가 차를 출발시켰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강한서가 손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흠칫했다. 손바닥에 닿은 피부는 들고 있던 물병의 온도보다도 더 낮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전—”한현진이 손을 빼내며 말했다. “단지 아이를 바라는 거라고 해도 최소한 척이라도 좀 하죠.”강한서는 텅 비어버린 손바닥을 바라보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 민경하에게 말했다. “히터 좀 더 틀어요.”민경하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차 안의 온도가 곧 따뜻해졌다. 사실 한현진은 추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송가람을 걱정하는 강한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만약 방금 강한서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하마터면 송가람의 눈물을 닦아줬을 것이다. 강한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었지만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한현진은 더 이상 강한서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마음은 혼란스러웠지만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로 한현진은 곧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너무 이상했다. 분명 물속이었지만 전혀 춥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하기까지 했다. 오색찬란한 바닷속에는 물고기가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점점 더 깊이 잠수하는 한현진의 앞에 갑자기 동글동글한 투명 기포 같은 것이 나타났다. 어쩐지 마음이 동해 한현진은 손을 들어 기포를 살짝 찌르자 기포는 바로 둘로 갈라져 갑자기 그녀의 몸을 향해 날아왔다. 손을 뻗어 기포를 잡으려던 한현진은 두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숨이 꽉 막히는 기분에 그녀는 발버둥 치며 눈을 떴다. 그리고 한현진은 브라운 컬러의 강한서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기가 강한서의 품에 기대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강한서는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고 있었다. 마치 한현진이 갑자기 깨어날 줄은 몰랐던 사람처럼 강한서의 눈빛엔 당황스러움이 물들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곧 강한서에게 의해 가려졌다. 강한서가 손을 놓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일어났으면 내리
강한서는 한현진을 무시한 채 웨딩 사진을 지나쳐 한현진의 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위층에서 청소하고 있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소리를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 돌아오셨어요?”강한서가 간단히 인사를 받고는 테이블 위의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모님, 한현진 씨 짐 게스트룸에 옮겨주세요.”황씨 아주머니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게스트룸에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현진 씨는 제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잠시 여기서 지낼 거예요. 짐 정리 좀 같이 해주세요.”황씨 아주머니도 물론 강한서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을 완전히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황씨 아주머니는 정인월의 당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표님, 게스트룸에는 사람이 묵을 수 없어요.”강한서가 멈칫했다. “게스트룸이 그렇게 많은데, 전부 안 된다는 건가요?”황씨 아주머니가 겨우 대답했다. “네.”그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 방 한 방문을 열고 확인에 나섰다. 결과, 안방을 제외한 모든 방에 침대가 놓여있지 않았다. 황씨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인월은 어젯밤 급히 사람을 불러 모든 게스트룸에 있던 침대를 가져가 버렸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한 침대에 묶어버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강한서가 입술을 앙다물고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한현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설마, 제가 할머니께 이런 부탁을 드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강한서는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제가 지금 강한서 씨를 상대로 뭘 할 수나 있어요? 그리고, 정말 강한서 씨가 절 원하지 않는다면 거기가 서기나 하겠어요?”멍해졌던 강한서가 곧 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귀가 빨개졌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그의 마음속엔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결혼 전 한현진과의 관계는 신미정이 얘기했던 것처럼 그렇게까지 상극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물과 불처럼 서로 상극인 사이었다면, 한현진이 그린 그림을 사무실 서랍에 숨겨놨을 리가 없었다. 한참을 그 그림을 빤히 쳐다보던 강한서는 다시 그림을 서랍 안에 넣었다. “민 실장, 팀원들에게 오늘 전 안 갈 거라고 얘기해줘요. 모든 회식 비용은 제가 낼게요. 나중에 바쁜 일을 모두 해결하고 나면 그때 같이 식사하죠.”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허니 디저트 가게에 요즘 새로운 디저트가 나왔던데, 사모님께 사드리실래요?”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뇨. 임산부는 혈당 관리를 해야 해요. 아니면 태아가 너무 커서 낳을 때 고생이거든요.”그 말에 민경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대표님께서는 대체 언제 이런 것까지 아신 거야?’사실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은 강한서 스스로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전혀 일부러 그런 지식을 기억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날 한현진이 아이를 지우는 것을 막으러 병원에 갔을 때 우연히 병원에 있던 산모 건강 수첩을 보고 대충 훑어보고 기억하게 된 것이었다. 강한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세 한식당 대표에게 연락해 새우 물만두 좀 준비해 달라고 해요. 제가 가지러 갈게요.”“네.”그의 말에 대답한 민경하가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강한서가 다시 그를 불렀다. “오늘 병원에서 제가 수집하라고 한 물건은...”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미 조사 중입니다.”“그래요. 조용히 알아봐요. 아무도 모르게.”——강한서가 돌아왔을 때 한현진은 송민준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베란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강한서를 쳐다본 한현진이 말했다.“오빠, 한서가 왔어요. 이만 끊어요. 내일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잊지 말고 문자 해줘요. 그리고 제가 부탁한 일은 오빠도 신경 좀 써줘요.”송민준이 콧방귀 끼며 말했다.
한현진이 피식 냉소를 흘렸다. “그렇군요.”한현진은 젓가락으로 그릇 안에 담긴 물만두를 뒤적였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그릇을 부딪치며 끊임없이 맑은 소리를 냈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본가에서 그녀와 밥을 먹은 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식사 예절이 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강한서가 본 한현진은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제야 그는 뒤늦게 뭔가를 눈치채고 말했다. “화났어요?”“그럴 리가요.”한현진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 대표님께서 이렇게 늦게 퇴근하시면서까지 제 음식을 챙겨주시니 기뻐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요. 하하.”“...”강한서는 뭔가 한현진의 특징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녀는 화가 나면 자신을 강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또 기억 조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도 한현진은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었다. “강 대표님, 시계 예쁘네요.”하지만 그때의 한현진은 진심으로 시계가 예뻐서 칭찬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건넨 것이었다. 한현진이 화낸 포인트를 알 수 없었던 강한서가 물었다. “새우 물만두 안 좋아해요?”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새우는 임산부에게 좋죠. 태아에게도 좋고요.”“...”강한서는 그 말에 뭔가를 깨달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한세 한식당 대표가 제가 늘 새우 물만두만 사 간다고 해서, 전 한현진 씨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그 말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그녀가 다시 물만두를 입에 넣었을 때, 더 이상 젓가락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강한서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임산부는 역시 호르몬의 영향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해. 화도 쉽게 냈다가 또 쉽게 풀잖아.’물만두를 다 먹은 한현진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강한서가 그런 한현진을 불렀다. “나가서 좀 걸어요. 소화도 시킬 겸.”그러자 한현진이 더 놀라고 말았다. ‘강한서는 내 카리스마를 느끼고 싸움 대신 굴복을 선택한 거야?’도륵 눈을
한현진의 마음이 조금씩 찢겼다. ‘몽롱이라...’‘상처가 얼마나 심각했어야 매일 같이 진통제를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썼을까?’한현진은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늘 생각했다. 만약 그때 강한서를 꼭 잡았었더라면 나중의 모든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강한서가 제일 힘든 순간에 그를 외롭게 혼자 놔두지도 않았을 텐데...우울한 한현진의 기분을 눈치챈 강한서는 어쩐지 자기 마음도 침울해지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현진과 같은 발걸음을 유지하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가로등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한현진 씨와 그 사람... 은 예전에도 이렇게 자주 산책했어요?”그의 말에 잠시 멍해졌던 한현진은 강한서가 말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전의 그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혹은 그녀와 결혼했었던 그를 말하는 걸지도 몰랐다. 왜냐면 전에 한현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최소한 날 사랑했던 강한서가 무사한지는 알아야겠어요.”한현진이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 “아뇨. 저희는 같이 산책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산책하더라도 제 손을 잡은 적이 없었죠.”그건 강한서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속이 좁고 삐딱한 성격이라 절 좋아하면서도 늘 자존심 때문에 표현하기를 꺼렸어요. 선물을 줄 때도 분명 자기가 고심해서 고른 거면서도 늘 클라이언트가 준 거라고 했었고 제가 해 준 음식을 좋아했으면서도 맛이 별로라고 했죠. 항상 마음과 다른 말을 해서 늘 저를 화나게 했어요.”“전 이제껏 나이 30 먹은 남자가 그렇게까지 유치하고 삐딱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처음 봤어요. 그때 전 산책할 때마다 생각했었어요. 다른 부부는 손을 잡거나 어깨를 껴안고 걷는데 왜 우리만 늘 앞뒤로 걸어야 하나, 하고요.”“나중에야 알았죠. 저와 손을 잡기 싫
조급한 마음에 한현진이 나가지 않으려고 하자 진씨가 입을 열었다. “한현진 씨, 나가시죠. 이건 지 선생님 룰이에요.”한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방문이 굳게 닫히고, 안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현진은 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한 한현진이 진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분은 어디서 오신 분이세요? 믿을 만한 분이에요?”진씨가 대답했다. “한현진 씨도 보신 적 있는 분이세요.”한현진이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제가요? 전 전혀 기억이 없는데.”진씨가 말했다. “삼청관.”“삼청—”한현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현기법사 님이요? 그분은 무당 아니셨어요? 의학도 아시는 거예요?”머리를 묶지 않아 한현진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진씨가 말했다. “미신은 신앙이고 과학은 생활이죠.”“...”‘말 한마디로 직업이 바뀌네.’현기법사와 정인월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아마 정인월도 현기법사를 누구보다 신뢰하기 때문에 그를 부른 것일 테였다. 하지만 현기법사의 의술이 강한서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1 시간쯤 되었을 때 드디어 방문이 열렸다. 젊은 남자가 고개를 내밀고 한현진과 진씨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한현진이 빠른 걸음으로 청년의 뒤를 따랐다. 강한서는 침대에 앉아 법— 아니, 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혈색이 없고 피곤해 보였지만 방금 전의 창백하던 모습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았다. 한현진이 방으로 들어서자 강한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곧 시선을 거두었다. 지 선생님은 강한서에게 몇 마디 당부의 말을 남기더니 몸을 일으키며 진씨에게 말했다. “갑시다.”한현진은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일어나기 힘들어서 그러니 손님 배웅 좀 해줘요.”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